이용열(보령축제관광재단 사무국장)
2024.03.06 PM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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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코로나19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로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 전 분야에서 많은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고 있고 특히 관광산업 분야는 최대의 일격을 맞아 헤어나오기 힘든 수렁 속에서 헤매고 있다. 마치 생태계의 흐름과 같은 관광 분야는 여행사와 항공, 숙박업은 물론 각종 공연행사 등이 심각히 우려되고 있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축제 분야도 직격탄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으로 해외에서는 8~9월 예정이던 유명축제들 - 스페인 라토마티나와 산페르민, 영국 에딘버러페스티벌, 독일 옥토버페스트 등 - 대부분이 취소되었고 국내에서도 국제행사급으로 개최 예정이던 계룡군문화엑스포와 산양산삼엑스포가 내년으로 연기 결정을 하게 되었다. 또한 대표적인 여름축제인 보령머드축제를 비롯하여 부여서동연꽃축제와 장흥물축제등 여름축제들도 줄줄이 취소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나라 축제의 대부분이 가을축제에 몰려 있는데 더욱 심각한 것은 올가을쯤 2차 팬데믹을 예고하고 있어 누구도 예측불허 상황인 현시점에서 가을축제를 담당하는 실무자들의 고민은 깊어만 가고 있다.
지난 25년간 문화관광축제를 정부 주도로 육성해온 문화체육관광부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고, 크고 작은 많은 축제들을 주최해 오던 지자체와 축제관광재단의 입장에서도 무조건 취소만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큰 부담도 갖게 되었다. 과연 지속가능한 축제 발전을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 지금 순간에서 몇 가지 제안해 보고자 한다.
첫째, 언택트(비대면) 콘텐츠 개발과 온라인축제 개최를 통한 축제의 연속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축제마다 제각각의 소재와 특징을 갖고 있으나 나름대로 고유의 축제 프로그램들 중 온라인 분야에 맞는 적극적인 콘텐츠를 구성하여 축제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다음을 기약해 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올해 23회를 맞이하는 보령머드축제는 온라인축제로 개최키로 하고 MUD라는 주제성을 반영한 다양한 온라인 콘텐츠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인데 주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2020년 보령머드축제 주요 프로그램>
머드스노우앱 체험, 거점형AR머드댄스체험, 집콕머드체험 공모전, 머드유튜브채널 개설, 릴레이머드버킷챌린지, 머드아바타 라이브체험, 리멤버 머드페스티벌, 영상으로 즐기는 머드축제 등
"비대면 콘텐츠개발과 온라인축제 개최를 통한 축제의 연속성이 필요하다. 더불어 축제 방문객을 위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품질 개선도 이루어져야 한다. 야간관광이 중요시 되고 있다. 축제분야도 야간 활성화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체류형 관광객을 늘려야 한다. 현 축제의 대형화에서 소규모 마을형 축제로의 활성화가 예상된다."
둘째, 축제 방문객을 위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품질 개선 방향이다. 코로나 이후 단체방문객보다는 개별, 가족형 등 소규모 방문객들이 주를 이룰 것으로 예측하는데 이들을 유치하기 위한 지자체들 간 경쟁도 심할 것으로 생각된다. 축제 개최를 통한 지역 홍보와 방문객들을 유치하여 지역경제를 살리는 데 본래의 축제 목적이 있기에 기존의 축제콘텐츠도 관객의 입장에서 질을 높여야 한다. 특히 방문객들의 먹거리와 잠자리가 편안해야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으므로 그에 따른 축제음식 개발과 숙박의 품질을 높여야 한다고 본다. 보령시는 수년전부터 미소 친절 청결운동을 시민캠페인으로 전개하며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라 생각한다.
셋째, 앞으로 밤이 더 즐겁고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야간관광이 중요시되고 있는 시점에서 축제 분야도 야간 활성화 프로그램의 도입이 중요하리라 본다. 국내 축제 중 야간형 축제로써 가장 성공한 진주남강유등축제는 야간활성화의 대표 축제라고 할 수 있는데 야간 프로그램 개발과 운영으로 체류형 관광객을 더욱 늘리고 즐거움을 제공한다면 주변과의 관광 연계를 통해서 지역 소득경제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방문객들에겐 새로운 매력성을 높게 하여 다시 찾고 싶은 축제로 거듭날 것으로 생각한다.
넷째, 대형화된 축제에서 소규모 마을형 축제로의 활성화가 예상된다. 최근 각 지자체마다 도생재생사업과 함께 작은 마을 단위의 사업들이 활성화되고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체험 프로그램들을 연계한 지역관광사업들도 탄력을 받아 가고 있는 상황인데 우린 그동안 대규모의 인원이 참가한 규모화된 축제가 성공한 축제로 인식하여 왔으나 코로나 이후에는 작지만 매력 있는 소규모 마을형 축제에 더 관심과 방문이 늘 것으로 예상된다. 작지만 매력적인 축제 소재를 잘 발굴하고 개발하여 감성이 더해진다면 충분한 성공요인이 될 것이다.
다섯째, 민간주도형 축제전문가들의 양성과 조직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엔 대표적인 문화관광축제들(보령머드축제, 안동탈춤축제, 진주남강유등축제, 화천산천어축제)은 전담조직을 갖추고 축제 운영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를 충분히 쌓아가고 있으나 대규모 축제들은 지자체에서 관주도형으로 운영되어온 것이 현실이었다. 아직도 대부분의 지자체 축제들은 담당 공무원들이 전담인력으로 담당하고 있는데 향후 소규모 축제들이 더욱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마을 단위에서 직접 운영하고 주민들이 직접 축제의 기획과 실행을 경험하고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꾸준한 교육과 능력 개발의 기회를 충분히 갖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 시대에 살면서 축제 분야도 좀 더 능동적이고 스스로 자생력을 갖기 위한 노력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삼는 긍정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 생각한다. 하루빨리 정상으로 돌아와 축제인 모두가 환한 모습으로 현장으로 돌아오기를 소망해본다.
은장도의 맥을 잇다 ▲ 은장도에 대한 관심이 높은, 반면에 잘 모르는 분들도 많다. 은장도 이야기를 해달라. ○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몸에 칼을 지니는 풍습(風習)이 있었다. 한 뼘 남짓의 이 칼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성인(成人)이 되면 옷고름에 달고, 허리춤에 차고,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잠시도 몸에서 떼지 않았다. 이 칼을 패도(佩刀, 차는 칼) 혹은 장도(粧刀, 꾸밈 칼)이라고 불렀고, 주머니에 넣어 다니면 낭도(囊刀)라 부르지만 그 본래 용도는 같다. 패도를 몸에 지녔던 이유는 남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려 함이었고, 신념(信念)과 정절(情節)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다짐을 상징(象徵)하는데 두었다. 임진왜란 당시 선비와 여인들이 왜적(倭賊)에게 더럽힘을 당할 위기에 처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사용된 것도 장도이다. 은장도▲ 예부터 은장도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가? ○ 일상에서도 장도는 요긴하게 쓰였다. 칼이나 가위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 신분과 나이에 상관없이 생활필수품이었다. 집안의 일상생활에서 깎고, 자르고, 다듬는 일을 도맡았던 생활용품이라고 보면 된다. 더불어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는 친정 어머니가 훈계(訓戒)와 함께 건네던 애정(愛情)이 담긴 선물이자, 아버지가 관례(冠禮)를 치르는 아들에게 하사하던 의식(儀式)의 상징이었다. 장도는 이처럼 행주좌와(行住座臥,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4가지 격식을 갖춘 태도나 차림새)의 생활속에서 늘 함께 했다. ▲ 은장도 한 자루가 완성되는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해 달라. ○ 패도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아름다운 패도의 진면목을 실물로 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패도는 칼 날을 수없이 불에 달군 뒤, 망치질로 단단하게 만드는데 정성을 쏟는다. 칼자루와 칼집은 금(金)·은(銀)·옥(玉)을 비롯해 나무·뿔·뼈·대·산호·나전칠기로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금·은·백동·구리 등으로 장식을 한다. 오색(五色)으로 물들인 명세(明細) 끈목으로 매듭을 지어 고리에 끼우면, 비로소 한 자루의 패도가 완성이 된다. 은장도 한 자루에는 수 천 번에 이르는 장인(匠人)의 수고로움이 묻어 있다. ▲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은장도의 구분이 있다고 들었다. ○ 조선시대 장도의 특징은 장도에 젓가락이 부착되어 있다. 첨사도라고 부른다.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였다. 이른바 당상관 이상은 상장도(上粧刀)를 사용하는데, 젓가락이 칼 집안에 들어있다. 그런데 당하관은 젓가락이 은장도 안에 들어 있다. 일반 양반들은 일반적인 은장도를 사용했고, 서민들은 목장도인 까치 장도를 사용했다. 장도의 종류는 장식·형태·재료에 따라 나뉘는데 장식이 복잡한 갖은 장식과 단순한 맞배기가 있다. 첨사를 덧붙이면 첨사장도라고 부른다. 칼자루와 집을 꾸미는 재료에 따라 먹감나무를 사용하면 먹감장도, 대모를 사용하면 대모장도라고 하며 이밖에 많이 사용된 재료는 대추나무·화류나무·산호·화각·금·은 등이 있다. 먹감팔모일자도 ▲ 이른바 쪼이질이라는 전통 기법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가 있는가? ○ 전통의 가치는 지켜나가는데 있다. 쪼이질은 한마디로 고생스럽다. 주물이나 프레스로 찍어내면 하루에 수 천개도 만들 수 있다. 문양도 레이저로 하거나 다른 방법도 많다. 하지만 장인의 손에서 나오는 손끝 맛이 없다. 칼자루와 칼집에 문양을 넣는 쪼이질 기법은 새가 모이를 쪼는 것처럼 정으로 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 자루 만드는데 말 그대로 수만 번도 넘는 쪼이질이 필요하다. 전통의 맥을 잇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그 전통을 고수해야만 한다. 그것이 장인이 가져야 할 기본 자세이다. ○ 은장도 제작에 있어 쪼이질 기법을 사용하는 곳이 있는가? ▲ 다른 장르의 무형문화재에는 쪼이질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은장도를 만들면서 쪼이질을 하는 곳은 아마도 진주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쉬운 일이다. 전통을 고수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힘들다고 해서 전통을 버려서는 안된다. 쪼이질을 포기하는 것은 은장도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 은장도의 칼날을 벼릴 때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한다고 들었다. ▲ 쪼이질과 마찬가지로 칼 날을 벼리는 작업도 고되다. 그래선지 은장도 공방에서 풀무질을 하는 곳은 아마 거의 없다. 쇠를 불에 달구고 수백 수천 번을 내리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만 제대로 된 한 자루의 은장도가 만들어진다. 사실 제일 포기하고 싶은 과정의 하나이다. 그냥 편한 방법을 찾을 수 있지만, 은장도의 생명인 칼날을 현대문명의 이기에 떠밀려 포기한다는 것 역시 은장도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은장도를 만드는 전 과정이 순수한 수작업이다. 그것이 전통이고, 난 전통을 따르고 있다. ○ 세월이 흐르면서 은장도가 장식품이 되고 있다. ▲ 작고하신 아버님(무도 임차출 옹)께서 은장도를 장식품용으로 만드는 것을 싫어하셨다. 칼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었다. 그리고 ‘가격을 비싸게 받지 말라’는 유언도 남기셨다. 은장도를 더 많은 사람들이 지니기를 소망하신 것이다. 선친의 유언에 따르고 있다. 진주의 은장도가 싼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굳이 가격 비교를 한다면, 50만원인 진주 은장도가 타 지역에서는 200~300만원에 팔리고 있다. 은장도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정말 힘든 상황이지만, 유언을 따르는 것이 제자이자, 아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진주 은장도의 역사를 간단히 말해준다면? ○ 진주 은장도의 역사는 울산 경상좌병영의 장도에서 시작된다. 부친인 경남무형문화재 제10호인 무도(撫刀) 임차출 옹이 울산 경상좌병영의 장도장이었던 김말호씨로부터 장도 제작기술을 배웠다. 장도의 칼 몸체를 벼리는 기법과 전통적인 문양을 조각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이후, 진주로 거처를 옮겨 정착했다. 아마 1977년 쯤으로 기억한다. 사실상 진주 은장도의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진주에는 장도를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 진주에서 처음부터 은장도를 만들었는가? ○ 진주에 와서 은장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은장도는 선물용으로 많이 만들었다. 그래서 은(銀)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고 본격적으로 은장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진주로 오기 전, 울산 병영에서는 주로 목장도를 만들었다. 뿔장도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오면서 병영이 없어졌다. 따라서 병기 제작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이때부터 작은 장도와 담뱃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병기제작에서 생활용품 제작으로의 변화는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담뱃대 역시 이른바 궐련이 나오면서 장도보다 더 빨리 사라지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나마 장도는 그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 맥을 잇고 있다. 은팔모일자도 ▲ 무도 임차출 옹이 제작한 목장도 40여점이 있다고 들었다. ○ 선친께서는 은장도 못지 않게 목장도도 많이 만들었다. 당시 목장도를 40여 종류가 넘게 만들 수 있는 장인은 대한민국에 없었다. 목장도와 은장도를 함께 제작할 수 있는 장인도 드물었다. 현재 진주에 목장도 40여 종이 남아 있다. 장도에 관심이 많은 한 분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다. 진주 장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 은장도의 도신에 새겨져 있는 글귀와 그 의미를 말해 달라. ○ 선친께서는 장도에 늘 글귀를 새겼다. 바로 일편심(一片心)이다. 패도(佩刀)의 도신(刀身)에 새겨진 이 명(銘)은 선인(先人)들이 패도를 지녔던 심지(心志)이자, 장인들이 패도의 전승에 혼신(渾身)의 정성(精誠)을 쏟고 있음을 상징하는 장인(匠人)의 언어이다. 일편심이란 글귀가 새져져 있다면 진주 은장도라고 보면 된다. ▲ 선친의 뒤를 이어 진주 은장도의 맥을 잇고 있다. ○ 제가 고등학교 즈음에 선친께서 풀무에서 칼 날을 벼릴 때 옆에서 풍로를 돌렸다. 일명 바람잡이라고 한다. 그것이 은장도와의 인연의 시작이다. 본격적으로 은장도에 뛰어든 것은 군 제대 후이다. 당시 경상대학교 여증동교수와 동아대 정상박 교수의 제의가 있었다. 전통공예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선친이 만드신 은장도 제작 기법을 그대로 전수받았다. 전통적인 '쪼이질 기법'을 이용한 은조각과 민화풍의 조각선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선친에게는 아직도 못미치지만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 은장도 제작 과정을 시연하고 있다.▲ 현재 진주 장도의 현주소는 어떤가?○ 장도는 1960년대부터 ‘상품’으로 제작되어 왔다. 당시만 해도 장도는 장식용품이 아닌 생활용품이었다. 엄연한 사실이다. 근데 최근에 와서 은장도가 그 가치를 인정받고 문화재가 되었다고 해서 ‘작품’이 되고 엄청난 가격대를 호가하는 장식용품이 되어서는 안된다. 작품과 상품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사실 선친의 ‘가격을 비싸게 받지 말라’는 유언을 따르다 보니 생활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야말로 근근이 먹고 살 수는 있었다. 하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선물용으로 판매되던 은장도의 판로가 막혀 버린 것이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은장도는 단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지원금과 관리비 이외에는 사실상 수입이 없다고 보면 된다. ▲ 은장도를 포함한 진주의 공예산업 활성화를 위해 시급한 일이 있다면? ○ 공예하는 사람이 자신의 분야에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대안이 마련되면 좋겠다. 작품을 만드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판로도 스스로 개척해야 하지만, 그 흔한 홈페이지 하나 없는 실정이다. 그냥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공예를 하는 사람에게는 벅찬 일이다. 진주의 공예를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은장도 뿐 아니라 진주에는 한지, 염색, 칠보, 가죽, 구슬공예 등 각 종목의 작가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유네스코 창의도시에 걸맞는 공예도시로 만들어 나가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유네스코 창의도시에 걸맞는 공예도시를 만드는 것이 소망이다. ○ 진주시장도장전수회관의 향후 계획이 있다면? ▲ 장도장 보존회를 만들 계획이다. 진주 장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위한 자구책 정도로 보면 된다. 보존회의 구체적인 활동계획은 미정이지만, 진주 장도의 새로운 출발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진주의 은장도를 비롯해 진주공예의 활성화를 위해 진주공예학교를 운영할 계획이다. 진주공예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것은 물론 진주공예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믿고 있다. 공예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진주공예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있다. ○ 진주 장도 발전을 위한 체계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먼 훗날 박물관에 가야만 진주 장도를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진주 장도의 발전적 계승을 위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 당장 진주 장도를 이을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을 찾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 장도장의 길은 가시밭길이다. 선뜻 나서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일차적으로 전통에 관심이 있으면 좋겠다. 그 다음은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단지 희망사항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개인적으로 꼭 이루고 싶은 것은 ‘진주장도박물관’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광양장도박물관이 유일하다. 꿈이다.
황경규(글)/양영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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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진주 소목의 역사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진주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주거공간은 주로 나무를 이용한 움집 등을 활용했고, 각종 생활용품 역시 나무를 사용했다. 이것은 남강을 중심으로 한 산청의 소남과 진주의 대평선사유적의 발굴성과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 생활유적이 오늘날 진주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진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다양한 목재가 생산되는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다.진주의 역사를 보면 삼국시대는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로 지역적 특성을 가진 문화가 형성되지 못했다. 하지만 신라가 통일되고 9주 5소경의 청주가 설치되면서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천년이 넘도록 진주는 경남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이때부터 진주는 다양한 문화적 특성을 갖게 되었고 소목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목공예분야도 진주의 지역적 특색을 반영하며 동반 발전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고려시대에는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어 목사가 주재하면서 인근의 9개 현을 관장하는 행정, 군사, 교육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행정 교육 군사기관에 소용되는 각종 가구들을 제작하는 기관이 필수적으로 생겨났다.아마 이때부터 진주를 중심으로 소목공예가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진주 소목의 역사는 진주의 역사와 함께 한다. 진주의 소목이 전국적으로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02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진주에는 소목을 담당하는 전문인력이 배치되는 등 소목이 활성화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경국대전을 살펴보면 진주에 소목을 담당하는 전문인력이 배치되도록 되어 있다. 실제로 1800년대 초에 그려진 각종 진주성도를 살펴보면 관찰사영, 병영, 진영, 향청, 향교, 객사 등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 공방(工房)이 있다. 조선시대부터 소목을 중심으로 한 공예가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측컨대, 진주성도에 나타난 각종 공공기관에 사용되는 각종 가구의 제작이 이루어졌고, 그 기술이 전래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전승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진주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감안해 볼 때 지리산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다양한 수종의 목재를 확보하기에 용이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진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훨씬 다양한 목재를 구하기가 쉬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두꺼운 목재와 원목을 확보해 가구의 견고함을 더할 수 있는 천혜의 자연적인 조건을 갖고 있는 곳이 바로 진주이다. 진주의 소목이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지리적 조건에서 기인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특히 진주지역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신라시대 불교의 융성에 따른 불교미술의 발달과 함께 각종 사찰에서 사용되는 각종 목가구, 목조각, 의례용으로 사용되는 각종 목가구에 더해지는 칠공예까지 함께 발전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소목장 03 역사적으로 진주가 소목기능을 중심으로 한 목공예 분야가 발전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지리산에서 채취할 수 있는 다양한 수종의 목재 등과 같은 천혜의 자연적인 조건이 진주 목공예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진주지역 소목공예는 대체로 지리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우선 소목공예에 사용되는 목재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목재의 다양성은 소목을 비롯한 다양한 소목공예의 발전에 기틀이 되었다.소목공예에 있어 풍부한 목재 공급이 용이하다는 사실은 두터운 원목을 사용하는 가구제적 기능의 발달에 도움을 주었다. 요즘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두꺼운 원목을 원하는만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나무의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한 가구의 짜임기능이 발달했다. 짜임기술은 오늘날 진주의 소목장을 대표하는 기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다양한 원목의 나무색을 이용하는 제작기술도 발달하게 되었다. 상감이나 목늬를 살리는 제작방법이다. 진주 소목공예의 특징은 바로 짜임과 상감이다. 진주가 소목기능을 중심으로 한 목공예 분야의 발전을 이룬 것은 다양한 목재의 수급과 이를 활용한 제작방식의 발달에 기인한 바가 크다. 04 소목은 전국적으로 진주가 유명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목은 경남도청의 부산이전이 이루어진 1925년을 기점으로 성쇠가 결정되었다. 진주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된 이후, 도시의 발전이 느려지게 된다. 더불어 각종 기관에서 사용하던 가구제작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소목뿐 아니라 전 분야에 걸쳐 그 파급효과가 미치게 되었다.하지만 소목공예의 본산인 진주의 명성마저 쇠퇴한 것은 아니었다. 진주의 수정동을 중심으로 전통가구를 제작하는 공방들이 명맥을 유지해왔다. 쇠퇴의 길목에서 소목의 전통을 묵묵히 이어온 선대 소목장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소목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진주의 소목공예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1990년대이다. 지금은 작고하신 정돈산이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으로 지정되면서 진주의 소목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현재 진주의 소목은 전국 제일의 기능을 갖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더불어 최고의 품질을 갖춘 소목 생산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특히 진주지역 소목의 특징인 짜임과 상감 기능은 전국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선대 장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개인적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정진호(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 기능보유자) 05 진주 소목과의 인연을 이야기 해주신다면? 소목과 인연을 맺기 전에 저는 조각가의 길을 걸었다. 서울에 있는 신세계공예사에서 조각하는 일을 하다가 1967년에 진주에 와서 소목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조공예사를 운영했던 김동진 선생에게 사사를 했다. 그러다 1976년 진주 의천공방 정돈산 선생의 부름으로 본격적으로 소목에 뛰어들게 되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인 소목장 정돈산 선생이 나의 조각 기술이 소목공예에 큰 기술적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부터 소목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다. 06 조각과 소목의 결합이 진주 소목공예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주 소목공예는 짜임과 상감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짜임은 가구 제작에 필요한 원목, 특히 두꺼운 나무를 잘 다루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기능이지만, 상감은 그야말로 기술의 결정체이다. 일반적으로 상감은 금속이나 도자기 등의 겉면에 무늬를 새기고 거기에 금, 은, 자개 등 다른 재료를 끼워 장식하는 기법을 말한다. 소목공예에 있어 조각 기술은 상감기법의 보다 높은 완성도를 이루어내는데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다. 남다른 조각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보다 높은 품질의 가구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주가 상감으로 유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각의 기술이 더해진 소목가구는 기능에 예술성을 보태는 일이다. 예술적 가치가 있는 진주의 소목이 오랜 세월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이다. 07 단원공방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신다면? 지난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이수자가 되었습니다. 서울 신세계공예사에서 진주의 이조공예사와 의천공방에서 소목과 인연을 맺은 지, 25년만의 일입니다. 이수자가 되기까지 소목은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목공예만 바라보며 묵묵히 일해 온 지난 시간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 눈 팔지 않고 소목에 매달려 온 과정의 일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이름을 건 공방을 열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걸어 온 소목의 길을 넓히고, 저만의 작품세계를 채우는 공간이 절실했습니다. 마침내 1995년 진주시 명석면에 단원공방을 차렸습니다. 무려 28년만에 저만의 공간이 생긴 것입니다. 사실 저는 공방 이외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단원공방이 제 집이었고, 직장이었고, 삶터였습니다. 지금도 단원공방밖에 모릅니다. 08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 기능보유자로서의 각오가 있다면 한 말씀? 중요무형문화제 제55호 소목장 이수자로서의 삶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 기능보유자로서의 삶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명칭은 다를지 몰라도 소목공예가로서의 삶을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목장의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는 현실이 주는 무게감은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 김동진선생과 정돈산선생에게 배웠던 기술의 전승과 보존, 나아가 계승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소목장은 가구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예술적인 감각이 살아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생계유지를 위해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목장 기능보유자로서 진주의 소목공예 역사에 길이 빛나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목장 기능보유자로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소목장으로서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09 불교문화와 관련한 작품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진주지역의 경우, 불교문화의 성행으로 사찰 등에서 사용되는 각종 불교미술의 발전이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이른바 목가구, 목조각, 의례용으로 사용되는 각종 목가구에 더해지는 칠공예가 그것입니다. 불교와 관련된 목가구의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조각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조각이 제 전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찰이나 향교 등의 기관의 목가구 제작에 많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진주지역의 각종 사찰은 물론이고 진주향교 등에서 사용되는 목가구를 많이 제작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불교미술전람회 등에서 동상과 특선을 하기도 했습니다. 10 어느 곳을 가면 작품을 볼 수 있을까요? 합천 해인사에 가시면 팔만대장경 행사때 사용되는 손수레인 연(輦)이 있고, 대한불교 조계종 광명사의 법상, 남해 보리암의 태조 이성계 감실의 전패와 연(輦), 경상남도 산림환경연구원 산림박물관내 대형 노거수와 경기도 국립수목원의 전통 목가구 등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진주향교를 비롯한 각종 사찰에 작품들이 있습니다. 11 소목장으로서 작품 제작에 있어 중요시 여기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소목공예에 있어서 기능도 기능이지만 목재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특히 목재 고유의 문양이나 먹감의 상태에 따라서 질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목재의 색깔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느티나무의 경우에는 500년 이상이 되면 나무의 색이 질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색깔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좋은 나무는 소비자가 바로 알아봅니다. 좋은 소목가구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바로 목재입니다.다음으로 중요한 부분은 목재의 건조입니다. 고사목으로 5년 이상의 연식을 가진 나무와 살아있는 나무 건조방식이 다르다. 사람과 비교하면 나이가 많으면 일반적으로 기름기가 없다. 따라서 잘 건조된 나무는 수분도 없고, 진도 없으며 잘라보면 색깔이 좋고 깨끗하다. 옛날에는 좋은 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진주의 소목이 유명해 질 수 있었다.진주에서 소목공예를 하신 분들은 좋은 나무를 다루어 본 경험이 많다. 그래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12 진주지역 소목의 특징에 대해 소개해 주신다면? 전통소목의 기능으로는 연귀맞춤, 사개맞춤, 촉연귀맞춤, 동자짜임 등이 있다. 진주의 소목은 짜임과 상감으로 유명하다. 상감은 진주지역에서 많이 한다. 개인적으로는 조각이 전공이기 때문에 상감을 할 수 있다. 물론 상감을 한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은 튼 차이가 있다. 우선 상감기법이 들어간 작품은 시간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한다. 예를들면 수복강영(壽福康寧)과 부귀영화(富貴榮華)와 같은 상감을 하려면 기존의 작품과 비교해 2~3배의 노력이 투입된다.짜임기법은 가구제작의 소목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중의 하나로 목재가 갖고 있는 성질을 활용해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와 목재가 서로 맞물리게 제작하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오랜 시간동안 숙련과정을 거쳐야 하고, 이 기능을 익혀야만 소목기능인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다. 13 소목장의 자질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소목장은 우선 나무를 잘 알아야 한다. 좋은 나무를 구별하는 것은 물론 나무를 잘 건조하는 기술도 보유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재단을 잘 해야 하고, 작품을 만드는 미적감각이 있어야 한다. 진주 소목의 특징을 반영하는 짜임과 상감에도 특별한 기능을 보유한다면 금상첨화이다. 그리고 제작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능과 과정에 숙련되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소목인으로서 가져야 할 기능적인 측면이다.소목장으로서 더 중요한 부분은 상품이 아닌 작품을 만든다는 장인정신이다. 개인적으로 상품과 작품을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세상에 남긴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 단지 팔겠다는 일념으로 만든다면 작품이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품은 주문이 들어오면 한다. 작업공간에서는 늘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게 마음이 편하다. 14 진주를 대표하는 소목(생활가구)의 종류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진주하면 소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 반다지 종류가 유명하다. 사실 소목 중에 큰 나무를 다루는 것이 반다지이다. 다양한 소목가구들이 제작되고 있지만 상감기법이 들어가는 문갑이나 책장도 유명하다. 소목은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다양한 소품용 제품들이 있다. 안방가구로는 장(欌)과 농(籠)이 있고, 귀중품 보관용으로 각게수리, 반짇거릇, 빗접, 좌경이 있다. 책상류로는 서안, 서견대, 경상이 있고 문방가구로는 문갑, 서가, 책갑, 책장, 연갑, 연상, 궤, 약장, 금침장 등이 있다. 부엌가구로는 뒤주, 찬장, 찬탁, 소반이 있고, 생활용 가구로는 팔걸이 궤, 평상, 교의, 교상, 사방탁자, 뒤주, 향안, 교의가 있다. 15 작품세계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면? 아마도 전국의 소목장 가운데 조각과 소목 등 두 가지 기능을 가진 소목장은 유일하다. 정상박 동아대학교 명예교수에 따르면 가죽나무, 돌베나무 등의 뼈대가 이루는 간결한 결구가 아름다운 구조미를 발산하고 있다는 평을 해준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 선비의 청빈하고 올곧은 성품을 대하는 듯 한 작품들이라고 평가해주었다. 그리고 느티나무와 오동나무 등 판목의 은은한 나무결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은행나무, 먹감나무 등으로 상감한 회장무늬에서 도식화된 상징성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선비의 풍류 정신과 현실적 소망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좋은 평가를 했다.한 공방에 청년으로 들어가 근 20년간 일하고 배우며 지내다가 스승이 타개한 후 장년이 되어서 나온 삶의 자세에서 작품에 반영된 정진과 끈기와 우직의 근원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감사하다. 개인적으로 저의 작품세계에 드릴 말씀은 없다. 부끄럽다. 16 지금까지의 소목작품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이 있다면? 특별히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은 없다. 나의 손을 거쳐간 모든 작품들에 애착을 갖고 있다. 장인의 길을 걷고 있다면 누구나 똑 같을 것이다. 지금은 조각기능을 살린 목탑을 만들고 있다. 3년 동안 작품을 하고 있다. 조각이 핵심인 작품이다 보니 시간도 공도 많이 든다.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있다. 사실 나의 조각 기능을 살릴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잠깐 작품 소개를 드리면 1층 8대 신장, 2층 열두 모서리 12대 보살상, 3층 4대 부처에 88군데 코너에 동자상, 4층 8가지 공양상, 5층 삼보 법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가 2미터 50센티미터, 가로 세로 1미터 80센티미터이다. 올해 안에 완성해서 내년에 전시할 생각으로 열심히 하고 있다. 17 진주지역 소목의 발전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 있다면? 소목을 하는 분들은 사실 경제적으로 어렵다. 그런 가운데 진주 소목의 역사를 이어나가는데 최우선 목표를 두고 있다. 경제적 도움도 중요하지만, 진주의 소목을 전국적으로 알리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실 진주 소목이 중요하다지만 홍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 흔한 홈페이지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다.그럼에도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소목전수관이다. 은장도전수관과 두석장은 있는데 소목장만 없다. 소목의 발전을 위한 후계자를 육성하는 일 역시 중요하지만, 개인 공방에서 소목의 역사를 지켜나간다는 일은 쉽지 않다. 소목전수관이 만들어 져야만 소목의 전통을 비로소 지켜 나갈 수 있다. 소목장의 뒤를 이을 기능 보유자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18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 기능보유자로서 앞으로 계획은? 진주의 소목공예를 이어 나갈 후계자의 육성이다. 목공예는 나무 다루는 기능 등의 세심한 기술이 전수되어야 한다. 따라서 소목의 기능을 이어받을 후계자 육성이 쉽지 않다. 진주소목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 나간다는 책임감을 가진 소목인을 찾아서 기르고 육성해야 한다. 지금 나에게 남겨져 있는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곁에 소목공예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라건대, 나와 함께 소목인의 길을 함께 해주기를 바란다.
황경규(글)/양영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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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다. 사망자만 현재 전 세계적으로 44만 명이 넘는다. 미디어에서 연일 전 세계의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를 실시간으로 집계하여 보도하고 있다. 6월 16일을 기준으로 미국 내 코로나 감염자 사망자 수는 총 11만 6,854명으로 1차 세계대전 미군 전사자 수 11만 6,516명을 넘어선 수치라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코로나 이전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 경고한다. 이미 주변 이곳저곳에서 일상의 모습이 바뀌어 간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문구가 익숙해졌다. 비대면, 언택트 등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다양한 표현이 등장하고 실제 이를 실현하고 있다. 코로나 유행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다. 항간에 BC(Before Corona 코로나 전)와 AC(After Co-rona 코로나 후)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지금은 이전과 다르다. 대전환점의 시기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더 이상 과거의 표준이 통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 표준이 세상 변화를 주도하는 ‘뉴노멀(New Normal 새로운 표준)’ 시대가 개막하였다고 한다. 경제, 경영 쪽에서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펼쳐진 저성장, 저금리, 고규제 경제 환경을 대변하면서 생긴 십여 년 전 용어이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지금 코로나 사태로 인해 과거의 패러다임이 무너졌다. 소수의 전문가 집단이 언급하던 뉴노멀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이제 우리에게도 피부로 전해졌다. 그 변화를 느끼고 있어 이제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단어가 되었다. 뉴노멀. 강자가 지키던 표준의 문이 코로나 사태로 열렸으니 누구라도 달려 나가 표준의새로운 깃발을 세우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어떨까. 전문가들은 뉴노멀 시대에 비대면과 탈세계화, 불확실성의최소화 전략 등의 특징을 띨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최근의 사태로 인해 축제는 발붙일 곳이 없다. 뉴노멀시대를 예측하면서 첫 단어가 비대면이다. 사람들은 모이지 말 것이며, 접촉은 더더욱 안 되는 금기로 여겨진다. 비교적 저렴한 투자로 빈약한 자원을 보유한 지역에일시적이지만 폭발적인 경제 활성화를 제공하였던 축제가, 경제적 부담은 적으면서 만족도 높은 문화관광의 체험 기회를 대중에게 제공하던 축제가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어려운 얘기가 될 것이라 전망한다.과연 그럴까? 축제가 지닌 원초적 기능에 대해 간과한면이 있다. 진주의 개천예술제는 1949년 10월 3일 처음 개최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 열리지 못하였으나 이듬해 개최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충남 부여에서는 휴전 2년 뒤 1955년에 백제문화제가 수륙제가 중심이 되어 열렸다. 죽은 영혼을 달래는 불교의식을 축제 형태로 변환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 중심도시 에든버러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년 뒤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 열리며 8월에 집중 개최되는 에든버러 축제기간의 시발점이 되었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도 않은 시기에 축제라니.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인간과 축제와 삶은 늘 같이 있었다.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축제와 떨어져 산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지금은 무서운 코로나 때문에 참지만 언제가 주체할 수 없는 삶 속으로, 축제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축제에 대한 인간의 본능은 고전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서양의 고전 중 고전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트로이의 전쟁영웅 오디세우스가 10여 년간 떠돌다 귀향하기 직전 알키노스 왕이 다스리는 섬에 다다른다. 왕의 환대 속에서 펼쳐진 축제를 바라보며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음식과 노래를 즐기는 모습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 칭했다. 전쟁에 지친 영웅의 말을 되새겨 본다면 전쟁이 끝난 직후 열린 축제가 낯설지 않다. 축제는 온라인과 언택트를 거부한다. 축제는 혼자서 화면을 보고 즐길만한 것이 아니다. 상처가 깊을수록 공동체는 서로 위로하고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며 결속의 행위로 축제를 통해 더욱 가까워지려 할 것이다. 서로 어깨와 어깨가 부딪히고 눈을 마주치는 접촉의 행위가 일 년 중 가끔 허용되는 비일상으로서 특별함의 의미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고대부터 최근까지 봐 왔던 것처럼 축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은 희소한 축제에 더욱 목말라한다는 희망을 전제하고 앞으로 열리는 축제의 표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코로나 감염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통제할 수 없다면 뉴노멀의 표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축제의 표준은 ‘안전’이다. 축제에 대한 열망은 크나 아직 가시지 않은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떨쳐내기 어렵다. 주저하는 축제 수요자들에게 안전한 축제라는 인식을 무엇보다 강하게 심어줘야 할 것이다. 사실 안전은 십여 년 전 축제장에서 일어난 사고로 인해 강화되는 듯했으나, 실상 임시 축제시설에 대한 견고성과 화재 예방 차원의 행정지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는 비용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빠듯한 재정에 지역사회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전개하는 축제에 촘촘한 안전체계는 비용의 상승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제 안전이라는 축제 콘텐츠를 개발할 시기가 뉴노멀 시대에 도래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마치 프로그램을 짜듯 연령과 방문객의 성향을 세분화하여 표적시장에 맞는 안전 콘텐츠의 표준을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이다. 둘째, ‘조절’과 ‘적정’이다. 뉴노멀 이전 시대의 축제는 양적 성과가 우선이었다. 많은 방문객, 많은 프로그램, 큰 주차장 등 아무튼 크고 많은 것이 대우받던 시대였다. 관광에서는 이로 인해 오버투어리즘이 대두되었다. 축제도 수용 능력을 넘은 방문객으로 인해 지역주민들의 불편이 혜택보다 많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적정 방문객의 유치는 쾌적한 축제환경을 만들고 만족도를 높일 수 있으며 보다 긴 체류시간과 늘어난 소비지출을 기대할 수 있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조절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간 간과되었던, 체계적이지 못했던 축제장의 동선은 적정한 인원이 거리를 두고 이동하도록 조절해야 할 것이며 촘촘하게 붙여놓았던 구조물은 비교적 여유롭게 간격을 조정해야 한다. 시루 속 콩나물마냥 배치한 무대 앞 좌석도 공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조절할 필요가 있다. 특히 축제장은 출입구와 함께 명확하게 구획이 정해져야 할 것이다. 셋째, ‘경영’과 ‘콘텐츠의 질(質)’이다. 적정한 방문객 유치와 축제장의 조절은 방문객의 감소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실리적으로 본다면 방문객 감소는 축제 수익의 감소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충남 보령의 머드축제에서 철망을 치고 머드체험장을 유료화하던 첫해 축제장 입장객의 감소가 있었다. 확인 결과 방문객의 만족도와 함께 유료화로 인한 수익 창출이 나타났고 지금까지 폐쇄형 유료화를 지속해오고 있다. 이를 위해서 경영 관점의 축제 접근을 요한다. 이를테면 축제 표적시장을 보다 세분화하는 마케팅을 전개하여 방문객 수는 줄지만 충성고객을 확보하는 방향을 수립해야 한다. 무엇보다 즐기지도 않는 프로그램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적지만 열광할 수 있는 콘텐츠에 집중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반드시 올 수요자에 집중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콘텐츠가 질적으로 우수해야 한다. 비대면, 온라인, 비접촉, 언택트 등 코로나 사태와 함께 등장한 용어들은 축제와 함께 살아온 우리에게 코로나만큼 두렵다. 그러나 축제는 언제나 삶 그 자체였고 전쟁 폐허에서도 새롭게 태어났다. 하비콕스는 저서 ‘바보제’에서 호모 페스티부스(Homo Festivus 축제하는 인간)이라 하지 않았던가. 축제의 본성과 그것을 즐기는 원초적 인간의 삶이 계속되는 한, 뉴노멀 시대에 걸맞은 축제의 새로운 표준으로 사람들이 열광하고 서로 위로하는 장을 만들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김주호(배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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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대한민국의 첫 축제는 정월대보름 축제부터 시작된다고 본 필자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정월대보름 축제부터 대한민국의 모든 축제는 멈추어 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어둠의 터널에 갇혀 언제 걷힐지 모르는 두려움에 축제산업은 서서히 잠들어 가고 있다.2020년 4월 1일 에딘버러 국제 페스티벌과 프린지 페스티벌 취소 소식이 전해졌다. 매년 8월 한 달 동안 전 세계 420만 명의 관광객이 축제를 찾으며, 70개국 25,000명 이상의 예술가와 공연자가 5,000회 이상의 공연을 하는 축제가 코로나로 인해 취소가 되었다. 또한 이전 3월 15일에는 야간축제의 대명사 Vivid Sydney 축제 취소 뉴스가 온라인을 달구었다. 2019년 Vivid Sydney를 통해 약 240만명이 시드니를 방문했으며, 1억 7,200만 호주 달러의 경제효과를 창출하는 초대형 축제마저도 코로나19를 피해가지 못했다.대한민국 축제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진해 군항제를 비롯하여 많은 봄축제들이 취소되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계룡군문화엑스포를 2021년으로 연기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가을축제까지 벌써 취소의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생활 속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방역으로 코로나19의 대응은 일부 완화되었으나 여전히 코로나19의 위협은 상존한다. 특히나 사람을 모으고 일탈을 즐기는 축제산업은 현 코로나19 상황에서 지속가능성마저 의심받고 있다. 관광산업에서는 비접촉 관광으로 한적한 자연으로의 관광이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트랜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축제의 경우는 단기간에 대단위 집객에 의한 지역경제 활성화에 중점을 두는 산업이다 보니 비접촉 형태의 축제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코로나19 이후 대한민국의 축제는 많은 변화를 맞이할 것으로 본다. 먼저 축제 운영을 위한 안전관리 비용(보건 분야)이 증가할 것이다. 실내는 물론이고 실외 행사장도 매시간 시설 및 집기에 대한 소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축제장 모든 곳에 손 소독제가 설치되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축제를 진행한다면 개개인이 위생을 철저히 하고, 마스크 착용이 기본인 축제의 형태로 축제장 구석구석을 방역함으로써 안전한 축제로 인식시켜야 할 것이다.두 번째로, 축제의 공간을 본다면 좁고 협소한 공간에서의 축제는 지양하며,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의 축제로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축제에서 장소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대중교통을 통한 접근성이 좋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장소이면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장소가 기존에는 좋은 장소였다. 코로나19 이후 관광객들의 교통이용 상황을 보면 대중교통보다는 자가용을 활용한 관광이 증가하는 형태이다. 이에 축제는 여전히 대중교통을 통한 접근성도 중요하겠지만, 축제장 접근을 위한 주차시설을 보다 많이 확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람과 사람의 접촉을 최소화 하기 위해 축제 공간의 확장은 축제 기획자들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될 것이다. 체험 및 판매를 위한 부스 운영도 기존에는 동선을 고려하여 가능한 한 촘촘히 배치했다면, 코로나19 이후는 부스와 부스 사이를 넓게 떨어뜨려 설치하여 안전을 위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고자 할 것이다. 실내에서의 체험, 전시, 공연 등의 프로그램은 대부분 실외로 옮겨질 것이다.세 번째로 축제 프로그램 운영에 있어서 체험 및 전시 프로그램은 접촉의 최소화를 위해 예약제를 통한 프로그램 진행이 예상된다. 유료 또는 무료 프로그램은 사전 예약이나 현장 접수를 통한 시간대별 예약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인기 프로그램으로의 사람 집중 현상을 완화할 수 있으며, 축제 방문객들에게 보다 쾌적한 형태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게 하여 적절한 체류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네 번째로 축제 시간의 확장으로 공간적 확장이 필요할 것이다. 기존 주간에만 하던 축제를 야간까지 연장함으로써 주간과 야간으로 시간적 확장을 통한 공간적 확장으로 축제 방문객의 분산을 유도하여 같은 공간을 보다 넓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야간형 축제는 주간 방문객과 야간 방문객으로 나누어져 축제장의 번잡함을 줄여줄 것이다. 또한 야간형 축제를 통해 방문객의 체류시간을 증가시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고, 관광의 형태도 주간에서 야간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야간경제(Night - Time Economy)를 통해 새로운 분야의 고용 창출과 직·간접적 경제효과 증가로 코로나19로 어려워진 경제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다섯 번째로 축제 공간이 개방형에서 폐쇄형 공간으로 바뀔 가능성이 아주 높다. 지금 정부는 다중이용 시설의 입장을 위해 QR코드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우리 축제장도 실외의 폐쇄형 공간에서 출입 방문객의 정보를 확보함으로써 코로나 관련 문제 발생 시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며, 축제장 방문객의 안전을 확보하는 한계 수용인력을 책정하여 축제장을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용 축제장 확보 및 조성을 위한 다양한 논의로 이어질 것이다. 길을 막거나 작은 공원에서 이루어지는 축제 대신 전용 축제장에서 축제를 개최함으로써 축제가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코로나19 이후 축제는 비용의 증가가 수반된다. 미래의 축제는 안전 관리의 증가, 공간의 확장, 시간의 확장 등 많은 부분에서 비용이 증가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될 것이다. 결국 축제는 유료화로 서서히 체질을 바꿔나갈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축제 유료화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축제 유료화에 따른 많은 긍정적, 부정적 의견들이 있겠지만, 유료화를 통한 축제 관람의 쾌적성은 이미 입증된 사례이다. 코로나19 이후 여가 트랜드가 비용 대비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받는 프리미엄 숙소에서의 호캉스를 선택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것은 적절한 비용을 지불하고 쾌적하고 안전하며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 받을 수 있는 축제를 사람들이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듯 축제가 유료화가 되면 협찬, 후원과 같은 스폰서십(Sponsorship)이 축제에 자리매김할 것이다. 축제를 운영하는 시대를 지나 축제 경영의 시대로 진입하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코로나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는 한 많은 축제들이 연기하거나 취소를 결정할 것이다. 최근 보령머드축제는 온라인 축제라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축제 유료화가 진행되면 축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부자들의 축제와 가난한 사람들의 축제로 나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문제들은 축제 기획자, 공공기관, 관광서 등 축제를 준비하고 만드는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노력으로 누구나 함께 안전하게 일탈을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축제는 존폐의 위기와 같은 많은 위협이 있겠지만 반면 새로운 방향과 준비로 축제산업의 성장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얻을 것이다. 야간형 축제로의 확장, 야간관광으로 확장, 야간경제(Night - Time Economy)로의 확장, 이것은 코로나19 이후 축제산업의 다양한 미래를 준비하는 새로운 방향일 것이다.
김상만(대전마케팅공사 관광사업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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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지러우면 악덕 무당이 판친다. 제법 괜찮다는 길목엔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색천을 매단 대나무를 대문간에 세워두고 안방엔 신당을 차린다. 소위 신군(神君)을 자처하는 그들은 세상 살이 다급한 민초를 대상으로 혹세무민한다. 그리고 마치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판관처럼 행세한다. 보편적 인식이 그렇다는 말이다. 비단 무당에만 그치지 않는다. 조폭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패밀리’의 머릿수가 곧 ‘힘’인 이들은 ‘대부’의 그늘에서 복
‘잣대’라는 말이 있다. 길이를 재는 자로 사용되는 대막대기 혹은 나무 막대기의 일종으로 통칭 ‘자막대기’라고도 부른다. 이 말은 자고로 도덕적인 행위나 사물의 기준을 재단하는 객관적인 근거로 인용되곤 했다. 흔히 ‘객관적이지 못한 일’이나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이 잣대를 기준으로 잘잘못을 가리곤 한다.그런데 이 잣대란 말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잣대가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객관적이지 못하며 형평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 ‘잣대’는 일부 소수 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