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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6 21: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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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진주평론외전(2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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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관(官)을 쳐다 보지 마라

관(官)을 쳐다 보지 마라 국립민속박물관이 한국민속을 집대성한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밸런타인데이를 등재했다. 사전에는 ‘1990년대 이후 청소년들 사이에 매달 14일을 기념일로 정해 선물을 주고 받는 포틴데이(Fourteen Day)가 유행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2월 14일의 밸런타인데이가 가장 중요한 기념일로 꼽히며 3월 14일의 화이트데이, 4월 14일의 블랙데이도 중요하게 여겨진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밸런타인데이가 이제 한국에서 어엿한 세시풍속으로 자리잡았다는 의미이다. 근데 여기에 대해 다양한 의견도 존재한다. 이른바 ‘OO데이’가 상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체불명의 기념일을 만들어 특정인을 대상으로 벌이는 마케팅이 도덕적으로 건전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일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빼빼로 데이, 삼겹살 데이, 자장면 데이를 비롯해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기념일이 있다. 사실상 매월 이러한 기념일을 챙기는데 드는 적지 않은 품이 든다는데 정작 문제다. 각종 기념일에 맞춰서 기념품을 사서 집에 가지 않으면 왠지 할 일을 다하지 못한 기분이 드는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정체불명의 기념일보다 지역의 역사·문화·예술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기념일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 ‘진주논개가락지날’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국적불명의 기념일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시대에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의기 논개의 의로운 정신을 되새기는 날을 제정한 것이다. 매년 8월 8일을 진주논개가락지날로 정했다. 진주논개가락지날은 8월 8일로 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의기 논개가 순국한 1593년 6월 그믐을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8월 중순이 되어 ‘8월 8일’의 8월이 되었다. 그리고 8일은 진주논개가락지(반지 2개를 가락지라고 한다)의 모양을 본떠 정했다. 그렇게 8월 8일은 진주논개가락지날이 되었다. 진주논개락지날 운영위원회를 결성했다. 지역의 젊은 청장년 30명이 뜻을 같이 했다. 비록 크지 않은 돈이지만 행사비 마련을 위해 회비를 냈다. 관(官)의 도움없이 민(民)의 힘으로 기념일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러한 소중한 마음이 모여 마침내 2005년 8월 8일 「진주논개가락지날 선포 및 기념음악회」를 개최하면서 첫 발을 내디뎠다. 관(官)의 도움 없이 온전히 민(民)의 힘으로 진주를 대표하는 기념일을 제정한 것이다. 진주논개가락지날에 대한 진주시민들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자연스레 진주시 역시 예산지원 등의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진주논개가락지날 운영위원회는 온전히 민(民)의 힘으로 운영하고자 했다. 관의 도움을 받으면 재정적인 도움은 되겠지만, ‘순수 민간에 의해 운영되는 진주논개가락지날’이라는 평가가 더 필요했다. 지금도 후배들이 진주논개가락지날을 운영하고 있다.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최근에는 진주교방문화의 활성화를 통한 진주의 관광콘텐츠 개발에 관심을 두고 있다. 교방의 가무악(歌舞樂)과 시서화(詩書畵)를 비롯해 교방음식과 교방복식 등을 활용한 진주만의 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아젠다를 던진 지난 2019년에 비하면 지금의 진주 교방문화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개선된 편이다. 진주논개제의 주제가 교방문화로 정착되고 있다는 점만 봐도 매우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교방음식에 관심이 많다. 진주 논개제 기간에 ‘막전 한마당’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른바 ‘교방 막걸리 + 전(煎)’을 활용한 행사이다. 남해군의 독일마을 맥주축제와 전국적으로 개최되는 ‘치맥축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진주 고유의 문화인 교방문화에 정체성을 둔다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진주에는 막걸리의 주원료인 누룩을 제조하는 누룩공장이 있다. 그 역사만 해도 80년에 가깝다. 진주는 전국을 대표하는 막걸리의 고장이다. 그리고 교방음식 중의 하나인 전(煎)과 적(炙)을 활용하는 ‘대한민국 막전 한마당’을 개최한다면 진주를 홍보하는 좋은 콘텐츠가 될 것이다. 문제는 관(官)이 아닌 민(民)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民)의 힘으로 시작했던 ‘진주논개가락지날’의 성공을 감안한다면 ‘대한민국 막전 한마당’ 역시 민(民)의 힘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파성 설창수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기획이 있다면 관(官)을 쳐다보지 마라. 민 스스로 돈을 모아서, 민 스스로 해결해 나가라. 민중이 움직일 때 생명이 있다.’ 옳으신 말씀이다.

  • 2024-08-24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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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떨거지들

누군가가 ‘떨거지’라고 부른다면, 일단 얕잡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무리에 기생하며 사는 이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더러는 양심과 영혼까지 팔아먹는 짓을 서슴치 않으니, 실로 이보다 더한 인간군상이 어디 있겠는가? 시쳇말로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맹목적인 진리가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인 양, 설레발은 치지 말자. 이 모진 세상에 안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갑질만 일삼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떨거지들의 특성은 동네 양아치들의 ‘오로지 충성’ 같은 맹목적 복종 혹은 ‘알아서 기는’ 노예근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앞 뒤 구분 못하고 주인에게 오로지 복종하는 것이 주인을 죽이는 일인지도 모르는 무지(無知)함과 손이 발이 되도록 비벼대며 아양을 떨지 않으면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육본편(六本篇)을 보면 ‘은(殷)나라 탕(湯)왕과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곧은 충신이 있었기 때문에 번창했고, 하(夏)나라의 걸(桀)왕은 맹목적으로 복종한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멸망했다.’는 글귀가 있다. 충견(忠犬)은 절대로 주인을 물지 않는다. 꼬리치며 알랑거리는 똥개(糞犬)가 주인을 물기 마련이다. 떨거지를 가려내는 지혜가 있어야 나라도 기업도 번창할 수 있다. 떨거지들은 가라.

  • 2024-08-07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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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희망줍기

희망줍기 사람은 본디 가벼운가, 무거운가. 골치 아픈 물음이다. 사실 깃털과 풍선의 경중을 가리는 일이라면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늘 높이 던져 보면 쉽게 해결 될 일이 아닌가. 근데 사람의 일은 좀 다르다.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구해낼 답이 아니기에 그렇다. 지금에야 자문해 본다. 가벼운가, 아니면 무거운가. 깃털 같은 가벼움을 직감한다. 아니, 개울가 댑싸리 사이를 오가는 송사리 같음이 맞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며 먹을 것만 찾았다. 잠시도 가만있질 않았다. 해가 저물도록 움직였다.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말이다. 새삼 곱씹을 필요도 없다. 새해 아침마다 꿈꾸었던 행복의 모양새가 어땠는지 말이다. 권태 탓이다. 어쩌면 쉽게 잊어 먹은 까닭이다. 돌이켜 보건대, 마음에 새긴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가벼움으로 온 몸을 부르르 떨지 않았는가. 진정 무던히도 참고 인내하는 법을 그동안 배우긴 한 건가. 지금에 와서 나 자신의 변덕과 분열을 설명할 길이 없다. 분한 것은, 그 변덕스러운 감정 사이를 어떤 서투른 글로도 서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한 것은 마음의 흩어짐을 끝내 다잡을 수 없었던 초라함이다. 끝내 지키지 못하고 무심히 세상에 내어주지 않았던가. 사실은 꿈 단지가 턱없이 컸음이다. 그랬기에 한꺼번에 담으려 했고, 많은 것을 담으려 했음이다. 담으려 욕심낼 수록 오히려 채워지지 않는 것이 꿈 단지인 것을 정녕 몰랐던 탓이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의 꿈 단지에 공백이나 다름없는 지난 세월의 부끄러움이 가득 차 있음을 본다. 진정 가벼웠음이다. 이제야 땅을 갈고, 이랑을 만들어야 할 마음의 밭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음을 깨닫는다. 새해에는 그 밭을 일굴 내 몫의 쟁기 하나쯤은 챙겨두리라. 듬직한 황소 한 마리와 뿌릴 씨앗도 넉넉히 준비할 참이다. 꿈 단지를 이대로 비워둘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애오라지 희망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고,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 맬 여력이 없는 어려운 세상이기에 더더욱 흘러 넘치도록 채우리라. 그토록 가벼웠기에 이토록 텅텅 비어 있지 않는가. 그랬기에 이처럼 절망의 시대를 부여안고 살고 있지 않는가. 뒤돌아볼 수 없는 곳에 무언가를 두고 왔다해서, 넋 놓고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 아무리 애를 써도 가질 수 없는 것 한 가지씩 갖고 사는 게 사람의 일이 아니던가. 단지 때로는 희망으로, 때로는 절망으로 다가올 뿐이다. 희망을 기다리며 다시 자문한다. 가벼운가, 무거운가.

  • 2024-07-27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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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잘 먹고 잘 살기

쉬운 일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대문간에 놓인 아침신문 집어 들고 집에 들어가는 처절한 객기를 부린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듯 싶다. 살아가면서 그 어떤 진실이나 가치쯤은 한번쯤 눈감고 외면하면 쉽게 될 법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때맞춰 끼니 해결하고, 별 탈없이 지내는 일이 전부라면 어려울 게 뭐가 있는가. 주야장창 땟거리 걱정할 시절도 아닌 터에 말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그 지겨웠던 전통적인 가난의 때가 벗겨지고 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지 않은가. 막걸리가 아닌 샴페인도 일찌감치 터뜨리고 말이다.그럼에도 이 땅의 많은 부모들은 가난을 운명처럼 부여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건 살아가는데 느끼는 조금의 불편이 아니다. 생사의 한계를 넘나드는 절실함이다.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어미와 아비가 혈육을 세상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야 마는 그 처절하고 냉엄한 현실을 말이다. 물론 그 몰 인간 함은 어떤 이유에도 극렬하게 비난받아 마땅하다.많은 것을 잃었고, 때로는 빼앗겨 왔기에 남은 것은 가난뿐이었다. 그것이 이 땅의 부모들이었다. 그럼에도 가난을 즐길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화롯불을 사이에 두고 부모님이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는 항상 ‘잘 먹고 잘 살았다’ 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가난을 벗고자 하는 소박한 염원이었으리라 믿고 있다.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단지 기준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근데도 세상은 너무나 각박한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다. 아니 어찌보면 몰염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오직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일에만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일면 무시무시할 정도다.조금 불편할 정도의 가난을 느끼는 부류로 갈수록 집착은 더욱 강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했던 가난을 터무니 없이 두려워 한다. 그래서 변절과 배신과 범죄와 같은 비리들을 서슴치 않는다. 그들은 절대 알아차리지 못한다. 불편한 정도일 뿐인 그 가난이 두려워 저지른 비리들이, 실은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는 걸 말이다.살아가면 갈수록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때론 무시하고 포기해도 좋은 것이 무언가를 진지하게 성찰해온 옛사람들의 모습은 찾아 보기 힘들다. 이제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들먹거리지 않을 수 없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고,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이웃을 돌보던 자랑스런 우리의 옛 전통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진정 어려운 이웃을 돌아 볼 여유를 갖고 있는가. 혹시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악다구니 판을 벌이고 있지는 않은가. ‘불합리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지 못한다’는게 요즘 세태라면 과한 지적일까“잘 먹고 잘 산다는게 무엇인가. 진정 배불리 먹고 편히 사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 2024-07-16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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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바보되기

하늘을 달리고 싶다. 물론 바보같은 이야기다. 어떤 선배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다리 육백 치는 소리쯤 된다. 숫송아지 새끼 밸 때나 되면 모를까. 어쨋든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럼에도 속된 세상사에 끄달리다 보면, 문득 하늘 위를 내달리고 싶은 생각이 와락 달려든다. 딱히 하늘인 이유는 없다. 땅 위라면 편하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웬지 생기지 않는다. 마음 끌리는 데야 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비웃으며 바보라 단정지어도 상관없다. 때론 조롱 당한들 어떠랴. 지금 이 세상엔 더한 바보들이 우글대고 있다. 단지 그런 부류에 속하지만 않으면 된다. 익히 알다시피 바보는 거짓과 위선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엔 어리석고 한심해도 그저 있는 그대로를 진실되게 보여준다. 절대 감추고 속이려 들지 않는다. 때론 진짜 바보인 듯 오해 할만큼 정직하다. 이 세상의 바보들이 늘 춥고 가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데 이 땅엔 진짜 바보들이 더 많다. 뭔 짓을 해서든지 등 따습고 배부른 짓만 해대는 이들이다. 빗대자면 뒤에서 호박씨만 까대며 이익만 챙기는 이들의 총칭쯤 된다. 그들은 뒤돌아 앉아 희희닥 거리며 세상을 조롱하며 손가락질을 해댄다. 바보라고 말이다. 그러나 정작 우스꽝스러운건 그들 자신이 진짜 바보란걸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연일 각본 없는 대하 드라마를 쓰고 있는 정치권을 보자. 물론 입에 담기도 싫지만, 연말 술 안주로는 최고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너는 많이 먹었고, 나는 덜 먹었다’로 하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된 입장에서 보면 바보중에 상바보들이 따로 없다.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일진대, 허구헌날 비비고 찌찌고 볶는 꼴이란. 어느새 정치가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알고 보면 정치권만 그런 건 아니다. 사람냄새 나는 곳은 어디든 다 그렇다. 자리 탐 많고, 말빨만 뾰족히 세우는 이들도 그 중에 하나로 친다. 처음에는 세상의 규격을 깨는 대담함을 내쳐 보여줄 것처럼 온갖 쓴 소리를 내뱉는다. 그런데 정작 필요할 때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꼬리조차 내보이질 않는다. 사실 따져보면 정치권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 모두가 똑같은 바보들인 것을. 잘난 세상에 잘난 사람들만 넘쳐나는 세상이다. 날로 얼굴 가죽도 두꺼워져 웬만한 일에는 낮 붉히는 일조차 보기 힘들다. 그런 세상에서 한 번쯤은 우직한 바보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다. 아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어쩌면 바보되기가 아닌가 싶다. 설사 춥고 가난해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 2024-07-09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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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꽃피는 봄이 오면

‘꽃 피는 봄이 오면~’부터 시작해서 봄 날 가슴을 설레게 하던 공약(空約)들은 선거가 마무리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한 표’를 위해 세상에 내던져졌던 말 잔치 놀음이 허상이었다는 걸 눈치챌 시간도 다가올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아니면 다행이지만 말이다.당선자의 공약은 최대한 지켜질 것으로 믿는다. 다음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행하려는 노력이 뒷받침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쪼록 고심하면서 만들어낸 공약이 반드시 이행돼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데 일조를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적어도 선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기 더욱 그렇다.낙선자의 공약은 아마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제 아무리 좋은 공약이라 할지라도 당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더 큰 문제는 낙선과 함께 공약 실천 의지가 곧바로 꺾여 버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약을 실천해 낼 ‘힘’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정치공학적으로는 이해 되지만 가슴으로 납득은 되지 않는다. ‘당선되면 하고, 낙선하면 안 한다’는 것인가? 참 편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사실 정치인이 내거는 공약은 국민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당선인의 공약보다 낙선인의 공약이 더 필요한 경우도 많다. 근데 제 아무리 마음에 드는 공약이라 할지라도 낙선자의 공약은 연기처럼 사라지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그래왔지 않은가? 근데 반문하고 싶다. 낙선하더라도 지역을 위해 반드시 이행되어야 할 공약이라면 죽을 힘을 내서라도 추진하는게 맞지 않을까? 당선시켜 주면 하겠다는 건 어쩌면 일종의 ‘협박’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논리대로라면 지역발전을 위해 뛰는 민간의 노력은 허사에 불과하다는 말이 된다. 지역발전을 위한 민간의 노력은 필요없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만약 ‘정치권이 밀어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맞다면 민간은 더 이상 노력할 이유가 없다. 단체의 이익을 위해 주어진 일거리만 척척 해내는 부속품으로 사는게 더 현명할테니 말이다. ‘선거와 관계없이 지역의 발전을 위한 공약과 아젠다를 제시하고 실천하려는 지속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만 지역민들에게 진심이 전달된다.’ 총선에서 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어떤 후보에 전한 말이다. 아마 이해할 수 없는 잔소리 정도로 들렸을 것이다. 근데 선거 때만 되면 등장해서 공약을 제시하고, 낙선하면 사라지는 행태만 보여서는 ‘유권자의 표와 믿음’을 얻기 어렵다. 무릇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를 듣길 싫어한다. 하물며 명예를 먹고 사는 정치인은 더욱 그렇다. 사실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정치를 한다는 것은 한시도 공적책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정치인은 끊임없이 비판의 소리를 들어야 마땅하다. 축군하우(畜君何尤)라는 말이 있다. ‘임금을 비판하는 것이 무슨 허물이 되랴’는 뜻이다. 이것은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가 곧 자신을 사랑하는 소리와 같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정치인이 비판을 싫어하고 수용하지 않는다면 정치인의 생명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정치적 행위가 여민동락(與民同樂)이 아닌 개인의 사욕을 위한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당선자들은 자신들이 내 건 공약의 실천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키지 않는 약속의 무의미함을 국민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낙선자들의 공약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비록 낙선했지만, 지역을 위해 고심했을 그 시간들이 가지는 가치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선자와 낙선자 모두가 공약의 실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실천하지 않으면 비판의 칼날이 비수처럼 날아갈 것이다. 더불어 유권자들은 더 이상 신뢰의 손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4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다.

  • 2024-07-01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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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왕초와 맨발

거지왕 김춘삼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왕초'가 한때 큰 인기를 끌면서 시청자들을 바보상자 앞에 묶어 두었던 적이 있었다. 이 드라마는 앵무새, 맨발, 발가락, 까마귀 등 코믹하고도 개성있는 인물들의 등장과 해방 전후의 어려운 시대상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극적 재미를 더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던 기회이기도 했던 '왕초'는 6.25전쟁도 하나의 테마로 삼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왕초는 거지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다. 일명 ‘김춘삼부대’로 알려졌던 이들은 힘들고 어려운 전투는 도맡았지만, 서로 아웅다웅하면서도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낸다. 출연진들도 큰 인기를 얻었다. ‘스나이퍼(저격수)’로 변신한 맨발 윤태영의 활약상은 단연 세간의 화제거리였고, 거지들의 눈치만 살피며 ‘소대 앞으로’만 연신 외쳐대던 어슬픈 소대장인 ‘몰라 몰라’의 주인공 윤다훈도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왕초의 절대적 라이벌이었던 발가락 허준호와 김두한 역으로 분한 이훈, 앵무세 역의 김세준, 까마귀 역의 이혜영과 연지 역의 송윤아 등도 인기 백배였다. 당시 시청률은 35%였다. 1999년에 방송된 드라마이지만 실로 경이로운 기억이다. 검은 바바리코트에 중절모를 눌러쓰고 화면을 가득 메웠던 왕초는 어린 시청자들에겐 우상이 되었고, 동네 골목골목에서는 품바타령이 넘쳐났다. 신분은 비록 거지신세였지만 드라마에 나온 왕초는 시대에 굽신거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이 바라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당시 거지들의 대장으로 군림했던 발가락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전형적인 악인이었다. 부하 거지들을 돌봐주기는커녕 제 호주머니 채우기에만 급급했던 발가락의 전횡을 보다 못해 나선 왕초 김춘삼과의 대결에서 패한다. 새로운 거지 왕초가 된 김춘삼은 서울 염천교 부근으로 진출해 본격적인 거지왕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고집스럽고 인내심이 강하며 한 번 정해진 목표는 반드시 이루는 저돌적인 성격으로 이성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는 행동파이기도 했다. 드라마 왕초는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온갖 인간군상들의 삶을 시대적 관점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영화같은 삶을 산 거지왕 김춘삼과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오로지 복수의 삶을 산 발가락의 인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다. 최근 정치판을 보면 온갖 인간군상을 경험하게 한다. 드라마 왕초의 김춘삼같은 지도자를 찾는 것은 정말 힘들다. 반면 자신의 권좌를 빼앗은 왕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발가락같은 인간군상을 찾기 어렵지 않다. 너무 많아서 아닌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일제에 붙어서 온갖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면서도 끝까지 살아남는 그 저력(?)만큼은 인정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평가가 뒤따를 정도이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친일파 암살작전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 ‘암살’이 엄청난 인기를 얻은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다. 친일파 염석진(이정재)과 같은 일제 추종자들을 끝까지 찾아내 처단하는 모습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일제에 부역하는 군상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처벌을 받는다는 메시지가 참 좋았다. 정치를 비롯한 각 분야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하긴 어렵다. 다만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작지만 달콤한 권력을 탐하려 든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권력이란 ‘온전히 제 것이 아닌 허깨비’이다. 오로지 권력만을 위해 무작정 달리기만 한다면 나중에 절대로 멈출 수 없다. 그리고 멈출 수 없게 된다면 뒤따라 오는 것은 ‘주벌(誅伐)’ 뿐이다. 드라마 왕초를 다시 보면서 생각한다.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일이다.’

  • 2024-06-29
  • 작성자

    황경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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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파묘와 월하의 공동묘지

숨쉬기 조차 힘든 한낮의 무더위와 등으로 방바닥의 먼지만 닦을수 밖에 없는 열대야를 이기는 좋은 방법 하나. 시원한 에어컨이 ‘따봉’인 은행의 쇼파와 저녁나절 가족과 돗자리 펴고 강가에 나가 누워 하늘을 보는 '마실 나간다'는 개념을 가지신다면 일단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은행에는 10분만 지나면 온갖 눈총이 쏟아지고, 더더욱 최소 3명 이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면 30분은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강가에 나가는 것도 꼬마들 옷 입히고, 먹을 것 챙기고, 돗자리 싣고 하다 보면 어느새 지쳐버리고 만다. ‘차라리 집에 있자’는 말이 나올 법도 한 지긋지긋한 무더위며 열대야의 풍경이다. ‘이제 5분만 지나면 귀신이 튀어 나온다’는 가족들의 엄포에 이불 밑에 숨어 눈만 빼곡히 내밀고 보던 한국의 전통 귀신영화 '월하의 공공묘지'를 기억하시는가. 컬러 TV시대가 개막된 뒤 귀신의 입가에 흐르던 시뻘건 피는 하얀 소복과 함께 더욱 선명하게 다가와 가족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곤 했다. 하긴 꼬리 아홉개 달린 여우 이야기인 ‘구미호’가 오히려 전통의 호러무비라고 반박하는 이들도 계실게다. 호러물에서 진일보된 호러 멜로 드라마였지만, 방송이 끝나고 나서는 특수효과로 치장된 여우의 잔영 때문에 잠을 청한 이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성 싶다. 근데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미 월하의 공동묘지와 구미호를 마음속 텔레비전을 통해 보셨다면 무더위와 열대야는 이미 한 발 짝 물러서 있을테니 말이다. 그 옛날 한 가족이 둘러앉아 숨을 죽이고 보던 결코 흔하지 않았던 공포영화. 어릴 적 귀신영화한다는 예고편이라도 나올라치면 서둘러 잠을 청하거나, 내려오는 눈거풀을 끄집어 올리며 ‘두근 세근반’ 뛰는 가슴으로 기다리곤 했다. 그 때의 기억만으로도 은행의 에어컨과 강가의 시원한 바람보다는 무더위와 열대야는 어느새 저만치 비켜서 있는 느낌이 든다. 최근에는 이런 전통의 호러 무비들이 자취를 서서히 감추고 극장가에는 시원한 에어컨을 주무기로 소위 ‘슬래셔무비’라고 부르는 각종 난도질 영화들이 여름을 점령하고 있다. 꽤나 오래된 영화이긴 하지만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다소 긴 제목의 영화에서 부터 ‘스크림 1, 2, 3’ ‘블레어 윗치’ 등 섬뜩하고 잔혹한 내용의 영화들이다. 한국영화도 다르지 않아서 해마당 여름 극장가에 ‘해변으로 가다’ ‘하피’ ‘가위’같은 우리 손으로 만든 토종 난도질 영화가 관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처녀 귀신의 한과 사랑이라는 한국인의 정서는 자취를 감추고 이제는 이유없이 무조건 베고 자르며 인간의 말초적인 본능과 공포를 자극한다. 근데 이런 종류의 호러 영화는 그야말로 때 지나고 철 지나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는게 약점이다. 파묘(破墓) 이야기를 하려고 먼 길을 둘러왔다. 호러물로 분류되는 월하의 공동묘지와는 다르지만 현대판 오컬트 미스터리 장르인 파묘가 천만 관객을 끌어 모았다. 호러 영화지만 고전적 방식이 아닌 잘 짜여진 각본과 독특한 분위기를 통해 한국형 오컬트 무비로 자리를 잡았다. 파묘가 천만영화의 대열에 낄 거라고 예측한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근대 천만을 훌쩍 넘어 신기록을 앞두고 있다. 단순한 오컬트 영화를 넘어 민족의 얼과 한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영화라는 점도 관객을 끌어당긴 요소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른바 천만 배우인 최민식과 유해진의 연기력과 MZ세대 무속인으로 분한 김고은과 이도현의 인기로 한 몫을 했다. 개인적으로 호러영화나 오컬트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 파묘를 보지 못했지만 등에 땀이 줄줄 흐르는 한 여름 무더위가 찾아오면 제대로 한 번 볼 셈이다. 당장은 못보지만 꼭 보고 싶은 영화가 바로 파묘이다. 근데 공짜로 보라고 해도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영화도 있다. 다들 아실게다. 바로 건국전쟁이다. 날이 선선한 지금 봐도 아마 등에 땀이 줄줄 흐를 것 같고 정신건강에도 안좋을 것 같아서다. 차라리 가족들과 ‘월하의 공동묘지’를 보는게 더 나을 듯 하다.

  • 2024-06-28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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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잘 있거라 3등아, 4등은 집에 간다

시골에 사는 연로한 아버지가 서울에 사는 자식 집에 찾아갔다. 사흘 쯤 묵은 뒤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심하게 이런 말을 툭 던진다.‘잘 있거라 3등아, 4등은 집에 간다’아버지가 보기에는 집안의 서열을 볼 때 1등은 강아지, 2등은 자식, 3등이 바로 아들이었고, 정작 연로한 자신은 4등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웃고 넘길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실이 이와 다르다고 반문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 싶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눈물 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40개월 미만의 자녀를 가진 가장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다. 설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지갑속에 아이의 사진이 몇 장이나 있나요’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건 언제인지요’ 등이다. 설문에 답하는 내내 가장들의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근데 또 한번 설문조사를 한다. 이번에는 똑같은 설문내용이지만 ‘아이’ 대신 ‘아버지’가 쓰여 있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지갑속에 아버지의 사진이 몇 장이나 있나요’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건 언제인지요’ 설문을 읽던 가장의 얼굴이 굳어진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과 아버지의 사진과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빠와 아버지’라는 설문조사이다. 이윽고 설문에 선뜻 답을 적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이의 아빠에게 노년의 아버지가 방문한다. 아이들의 아빠이자, 아버지의 아들은 마침내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리고 통곡을 한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그런 존재이지만 늘 잊고 산다.평소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이요, 의(義)는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을 버리고 말미암지 않으며, 그 마음을 잃어버렸는데도 찾을 줄 알지 못하니 슬프구나. 사람이 닭과 개를 잃어버리면 그것들을 찾을 줄은 알지만 마음을 잃어버렸는데도 찾을 줄을 모르니 학문의 길은 다른데 있지 않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데 달려 있을 뿐이다.’(孟子曰 仁人心也 義人路也 舎其路而弗由 放其心而不知求 哀哉 人有鶏犬放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현재 지니고 있는 마음 가짐이 과연 어떠한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자기가 기르던 개와 닭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기 위해 전봇대에 전단을 붙일 줄은 알지만 정작 자신이 잃어버린 인의(仁義)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은 정작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과연 아낀다(愛之)는 건 무엇일까? 물론 도올 선생이 말한 서양문화에서 비롯된 LOVE의 개념이라도 상관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도 다 그 때와 절도가 있다는 것이다.간혹 어떤 학생이 친구집에 놀러가서는 친구의 아버지에게 깍듯이 대하고 존대를 하면서도정작 자신의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반말을 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아이가 적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패덕(悖德)이라고 부른다.그래서 맹자는 결론을 내린다.어버이를 골육의 정으로 받들고 나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며, 다른 사람을 사랑한 이후에 금수초목을 사랑하는 구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은 사랑할 줄 알면서 자신의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고, 금수초목을 사랑할 줄 알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이 과연 바른 사람인가하는 물음을 던져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지금 바로 알아보자. 그리고 지갑속에 아버지의 사진을 챙겨 넣고 다니자. 그리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자. 부끄럽지만 이렇게 말해보자. ‘아버지 사랑합니다.’ 자랑스런 아이의 아빠가 되고 싶은가? 먼저 모범적인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잘 있거라 3등아, 4등은 집에 간다’는 말은 하시지 않도록 하자. 그대도 아이의 아버지이다.

  • 2024-06-27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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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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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고음불가

노래방 선곡 남자 1위 곡은 단연 임재범이 부른 고해이다. 고해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고백을 애절하게 표현한 곡이다. 임재범이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 감정과 폭발적인 가창력이 필수인 노래방 실력자들의 애창곡이다. 근데 아이러니 하게도 여자들이 싫어하는 노래방 1위 곡 역시 임재범의 고해이다. 특히 거나하게 술 한 잔 들어간 상황에서 부르는 이 노래는 시작 후 10초만에 ‘정지’ 버튼을 만나고 마는 가혹한 운명을 맞이한다. ‘분위기 어쩔’은 물론이다. 여성 노래방 선곡 1위 곡은 이영현의 체념이다. 파워보컬 디바인 이영현의 파워풀한 성량은 시원하기까지 하다. 가수 본인도 라이브 소화를 힘들어 한다는 전설의 노래이건만 전국적으로 여성들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근데 남자들이 싫어하는 노래방 1위 곡 역시 이영현의 체념이다. 특히나 오열하며 부르는 체념은 듣는 사람마저 체념하게 만든다.임재범의 고해와 이영현의 체념은 많은 대중들이 오랜 기간동안 좋아하는 스테디 인기가요이다. 저마다 사연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노래의 전주만 흘러나와도 가슴을 움켜 쥘 만큼 노래가 가진 파급력은 적지 않다. 특히 듣기에는 좋지만 따라 부르기에는 엄청나게 어려워 도전=실패라는 공식을 가진 헬(Hell) 곡이다. 고음(高音)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쉽사리 도전하기 어려운 노래가 많다. 특히 경연프로그램에서 고음으로 곡을 소화하는 사람들이 많은 인기를 얻고 좋은 성적을 낸다. 물론 가슴을 살짝 살짝 건드는 발라드가 인기를 얻곤 한다. 그래도 고음이 뒷받침된 이른바 고음가요가 득세하는건 어쩔 수 없는 트랜드이다. 물론 동굴 같은 저음이 환영 받을 때도 있다. 음악이 아니라 개그라면 굳이 고래고래 고음을 쥐어 짜낼 필요가 없다. 저음(低音)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고음처리를 해야 할 부분에서 저음으로 불러 웃음을 자아내는 개그 코너가 있었다.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였던 이수근의 고음불가(高音不可)를 기억하실 것이다. 오프닝 멘트부터 기대감을 한껏 올려 준다. ‘천상의 하모니, 신이 버린 완벽한 목소리. 더 이상의 고음 처리는 없다. 신인 가수 고음불가가 부릅니다.’ 그리고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작은 키에 긴 머리 가발, 그리고 땅에 질질 끌리는 복장을 입은 이수근이다. 옆에는 류담과 변기수가 정상적인 차림으로 등장해 노래를 바르게 부른다. 근데 이수근은 오프닝 멘트에서 소개한 대로 ‘고음불가’이다. 극강의 고음이 나와야 할 승부처에서 고음이 아닌 획기적인(?) 저음으로 승부를 건다. 관객들은 자지러진다. 이 코너의 웃음코드는 바로 이 지점이다. 고음불가는 음치개그이다. 이 코너에서는 정상적인 가창이 아닌 고음불가라야 개그가 된다. 관객들의 기대를 여지 없이 무너뜨리는 저음만이 승부처가 된다. 노래가 진행되면서 극강의 고음(高音) 대신에 이수근의 엄청난 저음(低音)에 환호를 내지른다. 그야말로 게임 끝이다. 세상 온 천지에 ‘고음(高音)’이 득세하고 있다. 일단 내지르고 본다. ‘아니면 그만’이다. 그래선지 언젠가부터 고음을 내지르는데 익숙해져 간다. 가벼운 접촉사고에도 큰 소리가 오가고, 조금 기분이 나쁘다고 욕설과 주먹질을 해대는 세상이다. 오로지 고음을 내질러야만 이긴다는 오판(?)이 넘쳐난다. 고음만 내지르는 이 세상의 흔한 사람들과 다르게 동굴 같은 저음을 내는 사람이 그립다. 부정과 불의에 대해 모른 척 하기 보다는 조용한 말로 타이르는 어른들이 필요한 세상이다. 버럭버럭 내지르는 고음(高音)보다는 힘있는 저음(低音)이 힘을 발휘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이수근의 고음불가 개그를 보면서 맘 편히 맘껏 웃었다.

  • 2024-06-25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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