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규/발행인
2024.10.17 PM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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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아는 논개, 아무나 모르는 논개
진주 출신 고 이형기 시인은 ‘정신(精神)은 그것이 정신인 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만 정신이 된다’라고 했다. 달리 표현하자면 ‘역사(歷史)는 그것이 역사인 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만 역사’가 되는 이치와 같다. ‘대한민국 누구나 다 잘 아는 논개이지만, 정작 아무나 모르는 논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이른바 논개 담론의 역사에는 해묵은 논란들이 여전히 진행중이다.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장수들은 충렬(忠烈)의 이름을 얻었고, 논개는 조선왕조로부터 의기사(義妓祠)라는 사당을 받으면서 의기(義妓)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충렬로 나라의 승인을 받은 논개는 시대를 거치면서 의기(義妓)에서 후처(後妻)로, 충신(忠臣)에서 열녀(烈女)로 격하되고 각색되는 역사변형의 과정을 거쳐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논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논개 담론의 핵심은 ‘짓밟힌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몸을 던진 한 어린 여인의 정당한 분노’로 정의된다. 근데 ‘천민과 양반’ ‘기생과 부인’과 같은 논개 담론의 곁가지만 붙들고 의미 없는 논란만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논개의 순국이 의미하는 메시지’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화 욕심이다.
다산 정약용은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라는 글에서 논개 순국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報國)을 하였으니, 군신(君臣)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 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논개의 신분과 출생 관련 논란의 시작점이자, ‘누구나 다 아는 논개이지만, 아무나 모르는 논개’로 전락하게 된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론, 칼럼, 소설, SNS에도 ‘누구나 다 아는 논개’가 활개 치고 있다. S 신문의 기사를 소개한다.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다. 양반 가문의 규수였고 의병을 일으킨 최경회의 아내였다.’ 반론을 하고 싶다. 조선 영조는 논개에게 의로운 기생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의미의 ‘의기사(義妓祠)’를 내렸다. 이것이 바로 ‘아무나 모르는 논개’의 본질이다.
금기(禁忌)라는 말이 있다. ‘마음에 꺼려서 하지 않거나 피하는 것’을 말한다. 논개는 ‘나라를 위한 충절’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여인상이다. 따라서 논개에 있어서 금기시되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담보되지 않는 신분과 출생에 대한 무분별한 논개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의기 논개의 역사적 현장인 의기사와 의암이 있는 진주에서는 더욱 금기시된다.
진주문화관광재단이 운영하는 ‘진주관광’이라는 공식 블로그 ‘진주역사’에 논개 관련 글이 두 편이 게시되어 있다. ‘의암바위 전설, 논개 설화. 진주성에서 만나 본 논개’와 ‘논개(포토 툰) 논개이야기’이다. 이 글을 보면 의기 논개는 ‘의로운 기생’이 아니라 ‘장수군 주촌면 양반가에서 태어난 최경회의 후실’로 정의되어 있다. 역사적 오류도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여과 장치 없이 이 글을 게재한 진주문화관광재단에 일차적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전문성이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일각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수정, 삭제 등의 일련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주시가 동일한 사안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자 마자 홍보영상을 즉각 삭제 조치한 것과 비교된다. 의기 논개와 관련한 진주시와 진주문화관광재단의 생각과 태도가 서로 다르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과연 누구의 태도가 옳은가? 진주시인가? 진주문화관광재단인가?
‘정신(精神)은 그것이 정신인 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만 정신이 된다’
고 이형기 시인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평균의 늪에 빠진 진주 진주가 ‘평균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결코 복제 가능한 도시가 아님에도 ‘획일화’ 혹은 ‘평균화’의 수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 진주의 강점을 스스로 희석시키고, 자발적 평준화에 동참하면서 대한민국 여러 도시 가운데 ‘One of them(그저 그런 도시 중의 하나)’로 퇴색되고 있는 것이다. 진주가 가진 도시 고유의 가치가 발현되었던 ‘Only one(오직 이곳)’이었던 진주의 위상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도시의 평균화와 획일화가 진행되면 도시의 역사성과 정체성은 흐려진다. 타 도시에서 ‘검증된 모델’과 ‘성공사례’가 무차별 도입되면 도시는 개성을 잃게 된다. 궁극에는 시민들도 ‘나도 그냥 그 중의 하나’라는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지게 된다. 지역사회 일각에서 ‘지금 진주는 어떤 도시로 기억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유이다. 도시의 경쟁력은 독창성과 차별화에서 나온다. 근데 진주는 ‘차별화가 아닌 평준화’, ‘변화가 아닌 안전한 모방’을 선호한다. 타 지자체의 우수사례와 선도도시 모델 등에 주목한다. 다른 도시에서 효과를 거둔 사업이면 ‘실패할 확률이 적다’라는 안전한 선택논리가 작동한다. 더불어 이러한 시도의 이면에 진주의 차별성과 창의성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는 비판적 인식은 배제된다. 이미 정해져 있는 쉬운 길을 쫓아가는 ‘One of them 도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타 지역에서 소비된 모델을 뒤늦게 가져다 추진하는 사업도 적지 않다. 전국에 복제되다시피한 ‘청년몰 모델과 재래시장활성화사업’, 핫플레이스 흉내 프로젝트처럼 변해버린 ‘특화 공간 조성’, 예산 투입과 사업실적이 목표가 된 ‘공공 건축’ 등의 사례처럼 하나같이 공간의 상품화에만 올인하고 있다. 통합전략 없이 개별 사업이 서로 고립된 채 진행되면서 결국 행사성 사업의 반복으로 귀결된다. 도시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는 소홀한 ‘명분한 화려한 공공사업’만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진주가 ‘Only one 도시’에서 ‘One of them 도시’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은 오래되었다. 행정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선택의 반복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검증된 모델만 선택한다. 외부 설계와 공모전 당선작을 지역의 맥락과 검토 없이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 창의적 실험과 접근은 ‘안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회피한다. 시민 의견의 수렴과정은 형식적이며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이런 행정 정책의 반복 속에서 결과물은 비슷해지고 도시의 색깔은 날로 희미해진다. 과정속에서 진주만의 독창성이 상실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주의 정책 설계의 중심에 도시의 고유성·시민성·역사성이 부여되어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시민이 던지는 질문’이다. ‘이 사업이 진주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가?’ ‘이 거리는 진주 시민의 일상을 담아내고 있는가?’ ‘이 공간은 진주의 역사와 정체성을 잇고 있는가?’ ‘이 정책의 주인이 시민인가, 행정인가?’ 만약 이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정책이라면 지금이라도 과감히 중단되어야 한다. 진주가 ‘그저 그런 도시’의 반열에 머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일회성 오류의 반복이 아니라 구조화된 행정 관행에 있다는 지역사회의 지적은 뼈아프다. ‘뭐라도 하나 더 만드는 도시’가 아니라 ‘하나라도 제대로 만드는 도시’로의 전환점을 맞이해야 한다. 과거 진주는 역사·문화·예술·경제 등 많은 분야에 있어서 적어도 ‘Only one’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도시였다. 지금도 과연 그런가? 진주가 평균의 늪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지금의 진주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그것이 ‘Only one’ 도시 진주를 다시 만드는 첫걸음이다.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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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권하는 사회 ‘거짓을 권하는 사회’는 거짓을 토해내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고, 진실을 말하면 오히려 손해가 되는 사회구조를 말한다. 더 나아가 거짓이 생존전략이 되고, 거짓이 유리한 방향으로 작동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개념이다. 더 큰 문제는 거짓임을 알고도 다양한 이해관계에 의해 침묵과 외면 혹은 터부시가 당연시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거짓을 권하는 사회의 진짜 얼굴’이다. 거짓을 권하는 사회는 지역사회 구성원들을 ‘끼리끼리 뜯어먹기 판’의 공범으로 내몬다. ‘이익 공동체’의 안위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거짓’이 곧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잘못된 사고를 주입한다. 지역사회에 부조리가 횡행해도 구성원의 이익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판단하에 침묵하거나 진실의 편에 서기를 꺼리게 만든다. 종국에는 스스로 ‘거짓말’의 문을 열게 만든다. 거짓을 권하는 사회의 커다란 폐해이다. 전문가들은 민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거짓을 권하는 사회’가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시민의 신뢰 위에서 작동해야 하는 행정의 과도한 권력 남용이 개인·사회·단체에 ‘거부하기 어려운 거짓말’을 요구하고 있다는 강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적시하지 않아도 행정 압력의 사례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역사회에서 ‘굳이 행정과 싸워 봐야 좋을 것 없다.’는 의식의 팽배가 그 뚜렷한 증거이다. 민선시대 행정의 언로(言路) 장악 역시 ‘거짓이 만연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행정에 대한 비판 역시 ‘행정 조직에 대한 정면 도전 혹은 정치적 불이익’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언로를 막는 최상의 무기인 각종 보조금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려 시도한다. 물론 그러한 행위는 비공개적으로 행해진다. 암묵적이며, 때로는 회유도 동반한다. 더 큰 문제는 아무런 죄의식없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원을 받으면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식이다. 과연 그런가? 행정에 대한 비판은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 공공성과 책임성, 시민참여 등과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담론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왜곡하고 변질시키려고 시도한다. 예산과 인맥을 통해 비판의 주체를 압박하는 것은 물론 주변인들의 이해관계를 역이용해 압박의 강도를 높인다. 결국 보조금을 지원받는 단체는 울며 겨자먹기로 행정의 압력을 수용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내부 분열 혹은 부분 와해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행정에 대한 비판은 점차 금기시된다. 이것이 이른바 민선시대 행정 권력의 민낯이다. 지역사회가 거짓을 권하는 사회로 이행되는 원인은 ‘행정 권력은 끊임없이 비판과 견제를 받아야 한다’는 비판적 사고의 멸실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지역사회는 부당한 행정 권력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과 견제를 하고 있는지 자문자답해야 한다. ‘행정 권력을 비판하는 일련의 행위는 무차별 보복을 받는다.’는 피해망상적인 사고방식 또한 바뀌어야 한다. 단언컨대, ‘행정은 성역이 아니다.’ 물론 행정 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거짓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거짓이 유리하게 작동되는 잘못된 행정 시스템의 결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렇다고 ‘거짓을 권하는 행정 시스템’을 행정 스스로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진실을 위험하게 여기는 행정’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더불어 지역사회를 ‘거짓말을 권하는 공간’으로 더욱 퇴보시켜 나갈 것이다. ‘거짓을 권하는 사회’가 지속되면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로 변질되고 ‘권력과 이익이 진실을 억압하는 사회’로 퇴보된다. 예방책은 간단하다. ‘거짓을 말해야 살아남는 행정’이 아니라 ‘진실을 말해도 안전한 행정’을 만드는 것이다. 거짓을 권하는 사회에서 행복한 시민은 존재할 수 없다.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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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일 진주시장 좌하 ‘관치 식민지 시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의 자치가 철저히 배제되고 일본인 총독과 관료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식민지 관치 체제’를 말합니다. 이 시기의 행정은 일본식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그대로 계승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자치제도는 허울뿐이었으며, 경제는 관치금융과 관치경제로 대표되며, 사회 통제를 위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했습니다. 해방정국과 군사정권을 거쳐 민주주의가 정착된 작금에, ‘관료가 시장과 사회를 직접 통제·관리하는 관치적 사고방식’은 여전히 지역사회에서 무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치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의도적인 민간단체 사업추진 방해 공작과 선별적 지원 혹은 배제 등의 사례들은 너무나 참혹한 지역사회의 민낯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역사회 일각에서 ‘관치 식민지 시대의 부활’이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은 민주주의 사회에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알 권리’는 투명한 행정, 언론 자유, 시민 참여까지 포괄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장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근데 지금 지역사회는 진주시의 행정 행위들이 헌법이 정한 표현의 자유와 국민주권 원리에 근거한 행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담보하고 있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민간단체에 대한 진주시 행정의 과도한 간섭이 대표적입니다. 거의 ‘일제강점기 관치 식민지 시대’와 버금간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특히 민간 주체의 자율적 활동에 대한 행정의 지나친 개입과 통제는 각종 폐해를 낳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에는 민간단체의 사업을 아예 추진하지 못하도록 행정이 압력을 행사하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민들의 눈과 귀를 막는 행위’로 군부독재 시절에서나 벌어졌던 일입니다. 단언컨대, 진주시 행정이 ‘현재 관치 식민지 시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진주시에는 501호와 801호가 있다.’라는 비아냥이 세간에 횡행하고 있습니다. 행정이 전방위적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비단 문화예술 분야에만 그치지 않고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행정이 재정지원과 감사 권한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민간단체는 지원 종속과 간섭 부담 속에 심각하게 자율성이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행정을 따르라. 통제·불균형·관치로의 회귀’를 표방하는 듯한 진주시의 행정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행정이 시민을 앞질러 선두에 서게 되면 과거 권부(權府)의 공포를 재현하게 됩니다. 행정이 무심코 표현하는 무언의 압력은 개인의 양심을 ‘획일성의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종국에는 행정의 보복조치가 두려워 ‘자포자기의 감옥’에 갇히게 되면 개인은 물론 지역사회는 두 날개를 잃고 끝없이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행정이 시민사회의 합의에 기초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설정한 ‘지역 발전론’을 정당화하는 일도 삼가해야 합니다. 먼저 시민사회의 합의를 도출해 내야 합니다. 설사 비판적 시각이 제기되더라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지역사회는 ‘진주시 행정에 대한 모든 저항적 행위는 결국 무차별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는 뼈아픈 교훈을 역사에 새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일부를 전체로 확대 해석하는 부분은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역사회에는 ‘시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행정행위가 전방위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부디 ‘진주시의 행정이 관치 식민지 시대와 다를 바 없다’는 시민사회 일각의 우려를 씻어낼 수 있는 행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적습니다.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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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公人) 사용 설명서 2(feat. 관료) 공인(公人)이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시민들에게 직접 공개했다. 더 나아가 아예 휴대전화를 소통창구로 활용했다. 시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겠다는 뜻이다. 휴대전화에 제기되는 수많은 민원들도 직접 답장을 한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앞다퉈 벤치마킹을 하지만 진정성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이른바 ‘진심과 흉내의 차이’이다. 정원오 서울 성동구청장이 그 주인공이다. 정원오 구청장의 지표와 평판을 보자. 행복지수는 서울 자치구 중 상승률 1위, 포용지수는 25위에서 1위로 도약했다. 지역내 총생산(GRDP) 성장률도 서울 25개 자치구 중 2021년 기준 10.9%로 1위를 차지했다. 인물에 대해서도 진정성있는 ‘사람 중심 정치’라는 평가와 함께 높은 평점을 매겼다. 전국적인 화제를 모은 것은 당연했다. 요즘 세상에 판을 치고 있는 관료(官僚)가 아니라, 쉽게 볼 수 없는 제대로 된 공인(公人)이었기에 언론에서도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공인(公人)에 비해 관료(官僚)라는 단어는 부정적 의미로 곧잘 쓰인다. 관료의 사전적 의미와 용례를 살펴보자. ‘관료는 행정을 집행하는 임명직이다. 권력을 배경으로 국민의 의사와 사정을 무시하고 독선적·획일적으로 일을 처리하며,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는데 급급해하는 특성을 갖는다. 이를 비난하는 경우에 관료라는 말을 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전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굳이 나서서 오지랖을 떨 필요까지는 없다. 미국 행정학자 랠프 험멜은 「관료제 경험(1977)」이라는 글에서 ‘관료에 대한 5가지 오해’를 적시했다. 50여 년 전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순간, 저절로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하게 된다. 관료에 대한 5가지 오해를 살펴보자. 사회적 관점에서 관료는 ‘사람을 다룬다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관료는 사람이 아닌 사례(事例)를 다룬다.’ 문화적 관점에서 관료는 ‘정의·자유·폭력·억압·병폐 등에 관심을 갖고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관료는 통제와 능률에만 관심을 가진다.’ 심리적 관점에서 관료는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머리와 영혼이 없는 새로운 퍼스낼리티이다.’ 언어적 관점에서 관료는 ‘그들만의 언어를 쓰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 의견을 나누기보다는 어떻게 꾸미고 알리는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정치적 관점에서 관료는 ‘공공 관료제가 사회에 대한 봉사기구가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는 통제기구라고 생각한다.’고 진단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공인 사용 설명서’ 보다 ‘관료 퇴치 설명서’가 더 필요한 사회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공인(公人)의 탈을 쓴 관료(官僚)가 지금도 활개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도 관료사회에 남아 있는 ‘권위주의에 기반한 조폭 문화’를 목격하면 관료의 부정적 이미지가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창동 전 문화관광부장관은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의전 행위에 대해 ‘관료사회의 권위주의적 조폭문화’라고 회고했다. 지금도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각종 의전(儀典)이 횡행하고 있다. 흡사 조폭과 흡사해 보이는 이같은 ‘권위에 대한 복종문화’는 여전히 행정과 평범한 일반 시민과의 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확인하게 한다. 사실 의전은 관료만이 누릴 수 있는 달콤한 권력이자, 알면서도 모른 척 향유하는 관료의 속내이기도 하다. 물론 의전은 조폭문화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공인(公人)은 ‘지방 소멸을 걱정’하지만, 관료(官僚)는 ‘지역사회를 지배하는 통제기구가 되기를 꿈꾼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공인 사용 설명서’보다도 ‘관료 퇴치 설명서’가 더 시급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공인(公人)과 관료(官僚). 누구를 선택할지는 시민의 손에 달려 있다.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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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公人) 사용 설명서 1 ‘모든 것이 정치와 이념 그리고 거기에 기생하는 무리들에 의한 편리성과 늘공들의 무사안일에서 진주는 서서히 함몰되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읽은 글이다. 냉철한 시선으로 진주를 바라본다면 참으로 공감되는 말이다. 그래서 단순히 한 개인의 의견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도 너무 뼈아픈 지적이다. 지방소멸 위기 극복을 위해 지역사회 전체의 냉철한 자성이 반드시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묻고 싶다. ‘과연 지금 진주는 순항하고 있는가?’함몰되는 진주의 원인으로 지적된 ‘늘공’과 함께 ‘어공’에 대한 엄격한 평가도 해야 한다. 사실 ‘늘공(정규직 공무원)’과 ‘어공(정무직·별정직 공무원)’은 지방 행정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키워드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늘공은 행정의 축이요, 어공은 정책의 추진력을 담당한다고 한다. 근데 그건 각각 제 기능을 발휘할 때의 이야기이다. 시민에게 봉사하기 보다는 머리 꼭대기에 앉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일부 시민들의 지적에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자치단체의 미약한 권한과 열악한 지방재정은 지방자치를 후퇴시키는 한계요인으로 지적받아 왔다. 감시와 견제가 무색한 대의정치 역시 지방자치를 여전히 위협하고 있다. 지방자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산적한 지방자치의 과제 해결을 위해서는 역량과 자질을 갖춘 공인(公人)이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지역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공인(公人) 사용 설명서’를 만들 필요가 있다.공인(公人)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시민의 눈높이에서 방송인 김제동의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국가의 세금 즉, 공공이 내는 돈을 가지고 공공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공인들이 나와서 아무리 자신들의 업적을 홍보해도 박수칠 필요가 없다. 왜냐면, 마땅히 자기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라고 지적했다. 한편으로는 속시원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훌륭한 공인을 가져야만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규정하고 있는 공인 사용 설명서가 필요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공인(公人)은 지역의 미래를 제시하는 이상과 철학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일수’ 찍는 일에만 급급하고 미래를 위한 ‘적금’ 드는 일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공인(公人)은 시민 세금을 낭비없이 환원하고, 행정의 낭비를 줄여야 하며, 인기·개인 위주의 행정을 해서는 절대 안된다. 공인(公人)은 선거를 의식한 무사안일주의나 인기 영합에 기초한 사업 추진에 올인해서도 안된다. 뻔한 주장의 나열에 불과하다고 여겨서는 절대로 안된다. 지역을 살리는 공인을 선택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그동안 이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공인을 평가해 본 적이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지금의 공인들이 진주를 살리는 ‘공인 사용 설명서’에 부합하는지 꼼꼼히 따져 묻고 심판해야 한다. 그래야 지역이 산다.지방의 발전이 중앙의 발전과 국제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한 일본 이즈모 시의 이와쿠니 시장의 발언이 한때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관료 출신은 단체장으로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관료를 위한 편의주의적 행정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관료적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참신한 시각과 아이디어가 공인이 갖추어야 할 제1의 조건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관료 출신은 무조건 안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역발전을 저해하는 공인들의 독선과 무능을 바로 잡을 공인 사용 설명서를 반드시 준비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점이다. 진주의 내일을 위해 꼭 필요한 공인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깊이 고민해 볼 문제이다.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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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일 진주시장 좌하 ‘관치 식민지 시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의 자치가 철저히 배제되고 일본인 총독과 관료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식민지 관치 체제’를 말합니다. 이 시기의 행정은 일본식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그대로 계승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자치제도는 허울뿐이었으며, 경제는 관치금융과 관치경제로 대표되며, 사회 통제를 위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했습니다. 해방정국과 군사정권을 거쳐 민주주의가 정착된 작금에, ‘관료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