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14. 익룡(翼龍), 진주 하늘을 지배하다
익룡(翼龍), 진주 하늘을 지배하다고고(古古)한 자연사,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 백악기(白堊紀) 익룡(翼龍)이 진주의 하늘을 지배했다. 일억 일천만 년 전 백악기 익룡의 땅이었던 진주(晋州)는 자연사(自然史)의 보고(寶庫)이다. 중생대 백악기 공룡(恐龍)은 진주 땅의 지배자였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육식공룡의 화석을 보유한 화석산지(化石産地) 진주는 1억여 년 전 백악기 자연유산(自然遺産)의 보물창고임에 손색없다. 진주에는 4개의 공룡화석산지가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천연기념물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공룡축제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경남 고성군은 화석 관련 천연기념물이 2개에 불과하다. ‘화석산지(化石産地) 진주(晋州)’의 가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세계 최대의 중생대 익룡 발자국 화석이 전시된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서 ‘고고(古古)한 자연사 여행’을 떠나 본다. 익룡(翼龍), 진주 하늘을 날다 세계 최대 규모의 중생대 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갈퀴 새’를 포함해 새 발자국 화석 642개와 육식공룡인 수각류의 발자국 화석 67개가 발굴되었다. 당시 이 화석산지는 문화재계와 학계를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진주는 다양한 중생대 백악기 생물들의 흔적인 화석이 존재하고 있는 세계 최대, 최고의 화석산지로 고고학계에 등장했다. 진주혁신도시 조성 공사 중 발견된 천연기념물 제543호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가 바로 그곳이다. 경남 진주 혁신도시 개발 사업 조성 공사 구역 내 입회 조사를 실시하던 중 토목공사 구역의 퇴적층에서 익룡 발자국 화석, 새 발자국 화석, 수각류 발자국 화석 등의 화석이 대규모로 발견되었다. 발굴 조사에서 발견된 익룡 발자국은 개수, 밀집도, 그리고 보존 형태 등에서 국내 최대로 발견되어 학술적 가치와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2011년 10월 14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 백악기 하늘을 지배했던 익룡과 다양한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익룡발자국자연유산적 가치 세계 최대 규모의 익룡발자국 화석이 매우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발견되었다. 이는 중생대 백악기 당시 익룡의 행동 특성 연구와 익룡의 해부학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 특히 단일 지역 내에서 최고의 생물 다양성 군집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전 지구적인 백악기 공룡시대의 고생태와 고환경 이해에 있어 중요한 자연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이 지역에 분포하는 백악기 진주층은 호수 또는 호수주변부 퇴적환경에서 형성되었으며 발자국 화석의 생성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고고학계에 따르면 세계 최대 규모의 익룡 발자국을 비롯해 매우 잘 보존된 도마뱀 발자국, 세계 최소 랩터 발자국 등 진주에서 발견된 우수한 화석들이 가지는 가치와 중요성이 높다. 국내에서는 1996년 전남 해남에서 아시아 최초로 300여 점의 익룡 발자국이 발견된 이후, 경남 하동, 사천, 거제 등지에서도 나타났다. 하지만 진주의 화석산지는 규모 면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이 산출된 곳으로 관심을 모았다. 특히 발자국 화석의 경우에는 걸어 다닌 흔적인 ‘보행렬’도 5개 이상 발견이 된 것은 물론 보존 상태도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는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을 개관하고, 익룡 발자국 2,500여점을 비롯해 중생대 백악기 생물들의 화석을 전시함과 동시에 1억 1천만년 전 익룡과 공룡 등 당시 동물들의 발자국 화석을 보유한 진주의 고고학적 가치를 대내외에 알리고 있다.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에서 발견된 주요 발자국 화석은 익룡 발자국 2,486개, 새 발자국 1,220개, 육식공룡 발자국 122개, 초식공룡 발자국 47개, 척추동물 발자국 11개 및 악어·도마뱀·개구리·포유류 발자국 등 약 4,000여개인 것으로 보고되었다.현재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 전시된 주요 화석은 다음과 같다. ▲밀집된 익룡 발자국 화석 ▲ 아주 작은 아기 익룡의 발자국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개구리의 발자국 ▲ 세계에서 가장 작은 육식 공룡인 랩터의 발자국 ▲ 중생대 백악기 호수에 살았던 악어와 거북의 발자국 ▲ 가느다란 발가락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겨진 도마뱀 발자국 ▲ 캥거루처럼 뒷발 두 개로만 깡충깡충 뛰어다니던 뜀걸음형 포유류의 발자국 ▲ 수컷 육식 공룡이 짝짓기를 위해서 암컷 육식 공룡을 유혹했던 구애 흔적 ▲ 네 발로 걸어 다닌 포유류의 발자국 ▲ 정체를 알 수 없는 대형 척추동물의 발자국 등이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의 진주화석관(晋州化石館)에는 진주혁신도시 조성 공사 중 발견된 1억 1천만 년 전 살았던 익룡 발자국 화석뿐만 아니라 희귀한 도마뱀 발자국과 세계에서 가장 작은 랩터 발자국, 캥거루쥐 발자국까지 다양한 발자국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도마뱀 보행열희귀한 도마뱀 발자국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는 전 세계에서 단 3개만 발견된 1억 1천천만년 전 도마뱀 발자국이 전시되어 있다. 도마뱀은 무게가 가벼워 발자국을 남기기 어렵고 서식지가 달라 공룡에 비해 화석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랩터 발자국 거대한 육식공룡의 이미지와 달리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룡인 랩터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발자국 길이가 1cm로 ‘진주에서 발견된 드로마에오사우루스의 발자국’이라는 의미로 ‘드로마에오사우리포미페스 라루스(Dromaeosauriformipes rarus)라고 불린다. 일반적으로 랩터는 세 개의 발가락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먹이를 낚아 채기 위해 위로 휘어져 있어 두 개의 발자국을 남긴다. 최초 발견, 억어 발자국 화석 혁신도시 조성 공사 중 가장 먼저 발견된 화석은 중생대 백악기 공룡과 함께 생활한 악어(鰐魚) 발자국 화석이다. 발견된 화석수는 2,486개이다. 악어는 앞다리는 5개의 발가락, 뒷다리는 4개의 발가락을 갖고 있다. 뜀걸음 포유류 발자국 화석 코리아살티페스 진주엔시스(Koreasaltipes Jinjuensis)는 ‘진주에서 발견된 한국의 뜀걸음 발자국’이라는 의미의 학명이다. 이 발자국 화석은 캥거루처럼 두 발로 깡충깡충 뛰어다녔던 작은 포유류이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의 진주화석관(晋州翼龍館)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익룡 발자국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진주에 살았던 익룡으로 추정되는 듕가리프테루스의 뼈 화석(복제)가 대표적이다. 수각류 발자국세계 최고 익룡 발자국 화석산지 진주혁신도시에서 발굴된 익룡 발자국은 8개의 발굴 지층에서 2,500여 개가 발견되었다. 대부분의 발자국은 1, 4, 8층에서 800여 개씩 발견되었다. 특히 일부 익룡 발자국에는 물갈퀴와 발톱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어 ‘최대 최고의 익룡 발자국 화석산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진주에 살았던 익룡 진주에서 발견된 익룡 화석은 ‘듕가리프테루스 화석(Dsunggaripterus Weii)’와 ‘안항구에라 화석(Anhangguera Blittersdorfi)’이다. 듕가리프테루스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끝이 뾰족하고 길쭉한 턱으로 위로 굽어있고, 턱 앞부분은 이빨이 없으나 턱 뒤쪽에는 강하고 뭉툭한 이빨을 가지고 있어 부리로 조개 등을 찾아 이빨로 부숴 먹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안항구에라는 포르투칼어로 ‘늙은 악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약 4.6m의 큰 날개를 가지고 있는 중형급 익룡이다. 세계 최고(最古)의 개구리 발자국 진주에서 발견된 개구리 발자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4번째 발견이다. 개구리 발자국 화석을 보면 4개의 앞발과 뒷 발자국이 보존되어 있고, 연속적인 뜀걸음 보행렬(hopping trackway)이 관찰된다. 새 발자국 화석들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을 통해 새들이 개구리를 잡아먹기 위해서 이곳을 돌아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개구리 발자국 화석은 최소 1억 1천만 년 전에 개구리가 점프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증거이다. 전 세계가 진주를 주목하다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들 논문들 중에 주목을 받고 있는 논문은 ▲ 세계에서 가장 작은 랩터 공룡 발자국(사이언티픽 리포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개구리발자국(백악기연구) ▲가장 큰 도마뱀 발자국(사이언티픽 리포트) ▲동북아시아 최초의 악어발자국(백악기연구) ▲뜀걸음형 포유류 발자국 ▲육식 공룡 발자국 화석 등 백악기 공룡생태계를 알 수 있는 다양한 화석들에 대한 연구였다.‘진주에서 최초로 발견된 화석’으로 이름이 명명된 것은 3종류이다. ‘드로마에오사우리포미페스 라루스’(Dromaeosauriformipes rarus), ‘네오사우로이데스 이노바투스’(Neosauroides innovatus), ‘코리아살티페스 진주엔시스’(Koreasaltipes jinjuensis)다. 더불어 새로운 종류의 익룡 발자국으로 테라이크너스 그라실리스(Pteraichnus gracilis)로 명명된 화석이 있다. 한국, 일본, 스페인에서 보고되었던 소형 익룡 발자국과 비교해 앞발자국에서 뒤쪽을 향하는 세 번째 발가락이 길이가 더 길고, 좁고 긴 형태를 보이고 있는 이 소형 익룡 발자국 화석은 중생대 백악기 동안 호수에서 퇴적된 진주층에서 발견되었으며 약 1억 700만 년 전에 살았던 익룡이 남긴 발자국이다. 중생대 백악기 화석산지의 중심, 진주 진주는 전 세계적인 화석산지의 중심이다. 현재 진주의 화석산지는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390호) ▲진주 가진리의 새발자국 및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395호) ▲진주 정촌면 백악기 공룡·익룡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566호)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543호)가 있다. 진주 가진리의 새 발자국 및 공룡 발자국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395호로 새와 공룡의 발자국이 함께 남아 있는 드문 경우에 해당하는 화석산지이다.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세계적인 공룡과 새 발바국 화석산지이다. 원래 해발 55m 정도의 구릉지였다. 경남과학교육원 신축과정에서 화석이 발견되었다. 발굴 결과, 5개 지역에서 새 발자국 2,500개, 공룡 발자국 80개, 양 날개 길이가 20m에 달하는 익룡 발자국 20개가 발견되었다. 새발자국은 3종으로 나뉘는데 가장 큰 발자국은 길이가 419m에 달한다. 땅의 겉표면이 말라 거북이등처럼 갈라져 터진 모양과 물결자국 등도 발견되었다.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390호이다. 이 화석산지는 약 1억 년전 중생대 백악기에 물과 바람에 의해 모래와 진흙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퇴적층으로 두 개의 공룡화석층이 150m 사이를 두고 발견되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용각류의 지골, 발가락 뼈, 새끼 공룡의 좌골화석, 종류를 알 수 없는 두개골 화석 2점, 장골편 등 147점에 달하는 공룡화석이 발굴되었다. 오래된 토양층이나 나무 그루터기 화석, 숯 화석, 각종 과거 생물의 생활 흔적 화석 등 다양한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공룡이 살던 당시의 환경과 화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진주 정촌면 백악기 공룡·익룡발자국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566호이다.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과 익룡을 비롯해 1만 여개의 발자국 화석이 대거 발견되었다. 단일 화석지로 높은 밀집도와 다양성이 있는 화석 산지로 보고되었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로 보고되었다 7,000여개의 공룡 발자국이 집단 보행을 하는 화석이 발견된 것이다. 특히 2cm 남짓한 아주 작은 크기의 발자국부터 50cm가량 되는 대형 육식 공룡 발자국까지 나타났다.이 화석산지는 발자국의 밀집도, 다양성, 학술적 가치 측면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더불어 1억 년전 대한민국에 살았던 동물들의 행동양식, 서식환경, 고생태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진주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주요 화석산지이다. 진주 권역에 집중된 공룡 발자국 등의 화석의 보관과 관리, 연구의 필요성이 매우 높다. 현재 중생대 백악기 화석산지인 진주에 국립지질유산센터의 설립을 추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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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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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51
주간평론 제10대 진주시의회에 바란다
제10대 진주시의회에 바란다 제10대 진주시의회 전반기 원구성이 마무리됐다. 다수당인 국민의 힘이 의장과 상임위원장 자리를 독식했고, 더불어민주당은 상임위원장 배정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진주시민은 더불어 민주당에 압도적인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예상된 결과였다. 지역 언론에서는 전반기 원구성의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궁금한 것은 따로 있다. ‘진주시의회는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무엇을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진짜 원구성의 시작이다. 사실 지방의회 원구성 때마다 반복되는 풍경이 있다. 의장 선거, 상임위원장 배분, 정치적 셈법 등이다. 하지만 시민들에게는 누가 어떤 자리에 앉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민들이 내어준 자리에 앉아서 ‘시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할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의회의 존재 이유는 행정을 감시하고 예산을 꼼꼼히 살피며 시민의 목소리를 대신하는데 있다.지난 의회를 돌아보면 시민들이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도 분명 있었다. 그래서 시민사회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이 계속 제기되었다. ‘집행부에 대한 견제는 충분했는지, 수천억 원의 예산은 제대로 검증했는지, 시민들이 궁금해하는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었는가?’ 일각에서는 비판만 하는 의회가 문제라는 지적을 하곤한다. 하지만 비판하지 못하는 의회는 더 큰 문제이다. 비판과 감시, 견제와 협력,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해내는 것이 지방의회의 본래 역할이라는 점을 늘 잊지 않아야 한다. 앞으로 진주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청년들은 도시를 떠나고 있고, 여전히 원도심을 활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지역경제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고, 대형 개발사업은 시민의 세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끊임없이 검증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럴 때일수록 진주시의회는 집행부의 동반자이면서도, 시민을 대신해 질문하는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의장은 의회를 하나로 이끄는 리더십을 보여야 하고, 상임위원장은 전문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은 공부하는 의원, 현장을 뛰는 의원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진주시의회에 지지를 보낸 시민들에게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시민들은 더 이상 보여주기식 정치를 원하지 않는다. 사진 한 장 찍기 보다는 정책 제안을 원한다. 얼굴 알리기를 위한 행사 참석보다는 치열한 토론을 바란다. 정당간의 정쟁보다는 시민의 삶을 바꾸는 결과를 가져오는 정치를 원한다. 이제 전반기 원구성은 끝났다.이제부터는 평가가 시작된다. 앞으로 2년 동안 시민들은 의원들의 말보다 행동을, 약속보다 결과를 기억할 것이다.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의회의 권위는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신뢰에서 나온다’ 제10대 진주시의회가 '자리의 정치'를 넘어 '책임의 정치'를 보여주는 의회가 되길 기대한다.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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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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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60
Tour Jinju 자연마을을 찾아서 3. 미천면 효자리 효자마을
미천면 효자리 효자마을 모든 가치의 우선이 효였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삶의 의무처럼 존중받던 시절에도 충을 넘어서는 단 하나의 가치가 바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성이었다. 부모의 말씀을 거역한다는 걸을 상상할 수조차 없던 때. 그때가 언제일까..., 문득 이 세상에는 없는 일인 냥 궁금해진다. 자식이 있어도 혼자 외로이 늙어가는 노인들이 늘고,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자식에게 봉양받을 거라는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속 편하다고 말하는 요즘, 자식들은 떳떳하게 효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보험금 몇 푼을 위해 부모의 목숨을 앗아가는 세상을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비관적인 생각일까?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무방비 상태에서 적의 공격을 당할 때처럼 마음을 뒤흔드는 마을이 눈 앞에서 펼쳐진다. 가난하지만 효자 효부가 많아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마을, 이름 효자리 효자마을이다. 1914년, 진주군 안간면 효자동 일부로서 효자리라 하였는데, 미천면 효자리는 효잠․독점․무동을 합한 지역으로 미천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진주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 산청군 생비량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한데 합쳐진 세 마을을 면면을 살펴보자만, 효잠마을은 수원 백씨가 대성을 이루고 살았으며, 마을안에는 최근 건립한 숭효제가 있다. 또 독점마을은 밀양 박씨가 대성을 이루었으며 효잠 저수지 뒤편에 밀양 박씨 규정공파의 재실인 우석정이 있다. 무동마을은 마을 뒷산이 춤추는 사람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조씨가 많이 살았다. 모든 마을이 집현산 자락에 걸쳐져 있는데, 독점과 무등은 특히나 더 골이 깊어 외부인의 출입이 거의 상태라고 한다. 효자마을이란 지명은 아무렇게나 붙여진 게 아님을 역설하듯, 마을에는 효자비와 효부비가 있다.백갑수 덕수 형제의 효행을 적은 효자백갑수덕수형제행적비가 추계마을 입구에 있고, 효열부광산김씨의 비가 도로변에 있다. 효자마을이 워낙 깊은 골 가운데 있어 사람들이 보기 쉬운 곳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효자 효부의 내력은 과거에 그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살림을 꾸리면서 시아버지 병수발에 남편 병수발, 거기에 시동생 병수발까지 하는 사람들이, TV나 라디오에서 소개되는 아름다운 미담이 이곳에서는 생활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사는 노인들조차 마음이 편히 산다고 한다. 외로움이야 인간으로 태어난이상 짊어지고 가야할 고단한 숙제일 따름이고. 하지만, 마을을 들어서면 집현산에 포위라도 당한 듯 눌러앉은 모습이다. 골이 워낙 깊어 한 겨울에도 골 안과 밖의 온도차가 5℃까지 난다고 하니, 골이 얼마나 깊은 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마을은 경제적으로는 척박한 인상을 풍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1968에 준공한 저수지가 있어 물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점이다. 효자마을과 독점마을 사이에 위치한 저수지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주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물 공급원으로, 지난 해엔 확장공사까지 끝마쳐 웬만한 가뭄에도 끄덕없다. 게다가 우석정과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다워 지친 일상의 시름을 덜어주고 있다. 식수 또한 풍부한 편에 속한다. 효자리에는 마을 앞까지 상수도가 들어와 있지만, 실제로 상수도를 연결해서 이용하는 주민들은 적은 편이고, 집현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지하수를 더 많이 이용하고 있다. 물 맛이 기가 막히다는 자랑이 뒤를 잇는다. 미천면은 진주시 관내에서도 밤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마을이 깊은 골짜기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겨울철에는 해를 보는 시간이 짧아 시설작목 재배가 곤란해 주민들은 논농사 외에 밤나무로 소득을 올렸던 것이다. 밤생산이 소득은 좋은 편이긴 하지만 워낙 일손이 부족해 수확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는데, 지금은 그나마 수령이 많아서 대부분 베어내고 그 자리에 단감 나무를 심어 소득을 보충하고 있다.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도 돈이 없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것은 효자마을은 골짜기 깊은 곳에 숨어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가끔 외식을 하고 때가 되면 그거면 됐다는 식으로 용돈이나 내미는 것이 효가 아니라는 것을, 효는 마음이 즐겁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새삼 깨닫게 된다.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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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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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57
Tour Jinju 자연마을을 찾아서 2. 대평면 당촌(堂村)마을 - 대평 무 종자채종지
대평 무 채종지 당촌(堂村) 당촌(堂村)은 ‘一文山 二大坪’이라는 말이 나오게 한 곳이다. 남강댐으로 인한 수몰이전만 하더라도 가구수가 100호가 넘었던 대촌(大村)인데다 무 종자채종으로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973년 2월 26일 법률 제2555호로 종묘관리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당촌의 무 종자 생산량은 72kg들이 400가마를 생산한 대평면내 최고의 무 채종지였다. 당촌리 김덕용(金德龍)은 면내에서 생산된 무 종자를 600여가마를 수집해 대전 전주 흥농종묘지사(興農種苗支社)로 80여가마를 내다 팔고, 나머지는 강원도, 경기도 등 전국각지에 내다파는 무 거상(巨商)이었다.그러나 종묘관리법 제정 이후에는 이곳 당촌에서는 무 종자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었고, 대전 전주 흥농종묘지사에서 종자를 생산해 「진주 대평 무」라 이름붙여 전국에 보급하고 있다. 또 일제강점기에 대평면내에서 벼 공출을 제일 많이 한 곳이 이곳 당촌(堂村)마을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당시 원활한 공출미 수송을 위해 일제가 건설한 당촌교와 지하교이다. 물론 준공년도일이 표시된 일본왕연호는 해방직후 정으로 쪼아진 채 삭제돼 있다. 조선조 말엽에 1만2,000여평이나 되는 못이 있어 대평리 어은마을에 보(洑)를 막던 안상영이라는 부자가 당촌리와 내촌리 일대에 논을 만들려고 못둑을 만들다가 실패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당촌리 지하(池下) 삼거리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곳이었다. 무 종자를 구하러 오는 상인들로 북적였고 마을안에 큰 상점이 있어 늘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했던 곳이다.대평면내 여느 마을처럼 당촌도 희망찬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남강댐 보강공사가 끝나면 마을 전역이 수몰지구로 편입되는 것이다. 당촌마을 사람들은 비옥한 땅을 송두리째 내주어야 했던 것처럼 일부는 이주단지로 또 일부는 진주시내로 이주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29세대 정도만이 잔류를 이야기하고 있다.한동안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농촌공동체가 남강댐 건설이라는 시대적 요청 앞에 순식간에 붕괴되고 만 당촌마을. 예로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 산 곳에 이름 붙여졌던 당(堂)이라는 글자를 따서 이름지어졌던 당촌(堂村)마을은 이제 변변한 집 한 채 없는 마을로 전락했다.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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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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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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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여성 의장 시대에 바란다
‘여성의장 시대’ 여성 의장 시대는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와 다선 여성 의원의 증가를 확인할 수 있는 의미있는 변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지방자치가 시작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꽤 오랫동안 지방의회는 여전히 남성이 독식하는 정치문화가 강했다. 그런 점에서 여성 의장의 증가는 지방의회가 과거와 달리 다양성과 대표성을 점점 넓혀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된다. 전국 곳곳에서 여성 의장이 잇따라 선출되었다. 경남지역을 보면 진주시의회, 창원시의회, 하동군의회, 함양군의회, 거창군의회에서 여성 의장이 탄생했다. 여성 의장의 탄생은 지방의회의 변화로도 읽힌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착 측면에서는 분명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주목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지방의회의 의장이 여성으로 바뀌면 의회도 바뀔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아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성별이 리더십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결국 성별을 떠나 공정성과 소통, 그리고 책임감이 리더십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지방의회 의장의 역할은 분명하다. 최우선 덕목은 집행부에 대한 감시이다. 더불어 지역사회의 미래를 설계하고, 의원 간 갈등을 조정하며, 시민의 목소리를 의회 운영에 담아내는 최고 책임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의장이 특정 정당의 대표처럼 행동하거나, 집행부와 친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의회의 독립성은 지속적으로 흔들려왔다. 매번 집행부의 거수기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시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집행부의 손을 들어 주는데 골몰했다. 물론 이면으로 개인의 이익을 도모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장이 시민들의 대표가 아니라 시장이나 군수의 협력자가 된다면 시민은 의회를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은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 있다. 더 큰 문제는 ‘여성 의장 시대’라는 상징성만 내세워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여성 의장 시대’ 그 이후에 대한 냉정한 평가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여성 의장 시대 이후에 예산 심사는 더 치밀해졌는가, 행정사무감사는 더 날카로워졌는가, 주민의 목소리는 더 많이 반영됐는가이다. 만약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여성 의장 증가는 정치적 기록일 뿐, 정치적 변화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여성 의장이 늘어난 지금이야말로 더 엄격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그래서 ‘여성이라서 잘할 것’이라는 기대도, ‘여성이라서 부족할 것’이라는 편견은 사라져야 한다. 평가 기준은 오직 하나이다. 공정하게 의회를 운영했는가.강하게 집행부를 견제했는가.시민 편에 섰는가. 지방의회는 집행부 거수기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의장은 꽃자리가 아니라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지방의회가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의장의 성별이 아니라 구태의연한 의회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다수당이 독식하는 원구성 이전에 토론문화가 자리 잡아야 하고, 계파 정치보다 정책 경쟁이 우선돼야 하며, 정당의 이해보다 시민의 이익이 앞서야 한다. 여성 의장 시대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이제 시민은 단순히 성별을 보지 않고 성과를 볼 것이다.직함을 보지 않고 품격을 볼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이렇게 물을 것이다.당신은 여성 의장이었습니까, 아니면 좋은 의장이었습니까?“ 그 질문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여성 의장 시대는 지방정치의 진정한 발전으로 기록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다.정치는 성별로 평가받지 않는다. 다만 의장의 이름앞에 붙어야 할 수식어는 ‘여성의장’이 아니라 ‘공정한 의장’ ‘당당한 의장’ ‘시민의 의장’이어야 한다. 여성 의장 시대가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변화의 계기가 되기를 바래본다.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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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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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25
Tour Jinju 자연마을을 찾아서 1. 집현면 현동(賢洞)마을
현동(Hyundong 賢洞) 집현산(集賢山)이 높이 솟은 곳에 월아산(月牙山)이 안대가 되고, 남강(南江)이 띠가 되어 동부(洞府)를 에워싸고 수림과 계곡이 아름다운 곳에 시내를 끼고 앉은 현동(賢洞)마을.현동(賢洞)은 예로부터 수많은 인재(人才)가 많이 배출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등교육의 본산(本山)인 집현초등학교(集賢初等學校)가 건재하고, 해마다 수재(秀才)를 길러 내는 현동(賢洞). 집현면(集賢面)의 3대 명당(明堂) 중의 하나로 알려진 현동은 강인한 민족정신의 발로(發露)를 엿볼수 있음과 동시에 ‘살아서 꿈틀대는 집현의 정기(精氣)’를 음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리의 얼굴이자 역사인 느티나무가 600년의 세월을 품고 말없이 서있고, 들판의 여문 곡식처럼 알알이 익어가는 현동의 역사(歷史)는 후학(後學)들의 자양분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현동(賢洞)은 일제강점기 이래로 당하(堂下)로 부르다가 1995년 10월1일부터 현동(賢洞)이라는 고유지명을 찾게 되었다. 현동의 지명유래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300년전 지금의 봉강(鳳降)과 당하(堂下)를 합쳐 현동(賢洞)으로 불렀는데, 그 뒤에는 서편이라 불렸으며, 그후 당하마을 뒤편 큰 정자나무 아래에 안씨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당안’이 되었고, 다시 일제강점기 당시, 지내마을과 현동마을 사이의 사랑등이라는 산 능성에 큰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아래에 있는 동네라 하여 당하(堂下)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이 민족말살 정책의 하나로 우리의 지기(地氣)를 차단하기 위해 강제로 동명(洞名)을 당하(堂下)로 바꾸었지만, 주민들의 의지(意志)로 고유의 지명을 되찾은 것은 지난 1995년이다.진주시는 일제시대때 임의로 바뀐 우리의 고유 지명을 찾아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고유지명 찾기 운동을 폈다.그 결과 집현면의 당하(堂下)를 원래 지명인 현동(賢洞)으로 바꾸자는 뜻을 모았고, 마을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압도적인 찬성으로 고유지명을 되찾게 된 것이다. 현동(賢洞)은 지명(地名)에 걸맞게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순흥안씨 조상의 위패를 모신 집현정사(集賢精舍)와 숭조사(崇祖祠), 절충장군의 묘, 보호수 등 마을의 역사를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전형적인 농촌마을로 2000년 10월31일 현재 66세대 235명의 주민들이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는 현동은 농가의 50%가 딸기재배를 하며 고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현동․새터․몽골 등이 있다. 집현초등학교에서 북서쪽으로 500m 지점에 위치한 현동마을은 수령이 600년인 느티나무와 함께 역사를 써왔다. 그 옛날 마을의 이름을 강제로 빼앗겼던 아픔도 간직하고 있고, 마을주민들의 희노애락을 세월속에 묻어 놓고 오늘에야 하나 하나 그 잎들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느티나무는 마을사람들의 회의장소로 기능했으며, 마을축제때는 더없이 좋은 잔치마당이기도 했다. 수백년의 세월을 간직했음직한 ‘들돌’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에 마을 청년들이 힘자랑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절충장군비가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의 역사를 일러주고, 삶을 꾸려 나가는 주민들에게 ‘지난한 삶을 깨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지내천을 주 용수로 사용하고 있는 현동마을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추억거리가 있다. 지내천 직강공사를 하기 전에 옛 하천에서 현동 앞들과 덕곡을 연결하는 폭 1m의 나무다리가 세워져 있었는데 대홍수로 없어졌고 내천 보를 이용하곤 했다.내천의 물이 많을 때는 신발을 벗고 왕래하기도 해 아직도 그 나무다리를 기억하고, 지나온 삶을 되새기는 마을사람들은 ‘평범한, 너무 평범한 그 때의 마을풍경’을 지금도 생생히 전한다. 새터마을은 새로 만들어진 동네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 졌는데, 집현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마을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볼때 새터는 ‘만석꾼’이 날 자리라는 말이 전해 내려 올 정도로 좋은 지형을 갖고 있다. 집현면의 3대 명당을 꼽을 때 흔히 집현초등학교 자리와 집현면 사무소, 응석사를 꼽곤 하는데 새터는 바로 집현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는 ‘양지터’로 손꼽히고 있다.현재 양지터는 해마다 가구수가 늘어 나고 있는 추세이며, 딸기재배로 인해 농가소득도 꽤 괜찮은 고소득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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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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