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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4 15: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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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여성 의장 시대에 바란다

‘여성의장 시대’ 여성 의장 시대는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와 다선 여성 의원의 증가를 확인할 수 있는 의미있는 변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지방자치가 시작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꽤 오랫동안 지방의회는 여전히 남성이 독식하는 정치문화가 강했다. 그런 점에서 여성 의장의 증가는 지방의회가 과거와 달리 다양성과 대표성을 점점 넓혀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된다. 전국 곳곳에서 여성 의장이 잇따라 선출되었다. 경남지역을 보면 진주시의회, 창원시의회, 하동군의회, 함양군의회, 거창군의회에서 여성 의장이 탄생했다. 여성 의장의 탄생은 지방의회의 변화로도 읽힌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착 측면에서는 분명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주목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지방의회의 의장이 여성으로 바뀌면 의회도 바뀔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아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성별이 리더십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결국 성별을 떠나 공정성과 소통, 그리고 책임감이 리더십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지방의회 의장의 역할은 분명하다. 최우선 덕목은 집행부에 대한 감시이다. 더불어 지역사회의 미래를 설계하고, 의원 간 갈등을 조정하며, 시민의 목소리를 의회 운영에 담아내는 최고 책임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의장이 특정 정당의 대표처럼 행동하거나, 집행부와 친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의회의 독립성은 지속적으로 흔들려왔다. 매번 집행부의 거수기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시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집행부의 손을 들어 주는데 골몰했다. 물론 이면으로 개인의 이익을 도모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장이 시민들의 대표가 아니라 시장이나 군수의 협력자가 된다면 시민은 의회를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은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 있다. 더 큰 문제는 ‘여성 의장 시대’라는 상징성만 내세워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여성 의장 시대’ 그 이후에 대한 냉정한 평가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여성 의장 시대 이후에 예산 심사는 더 치밀해졌는가, 행정사무감사는 더 날카로워졌는가, 주민의 목소리는 더 많이 반영됐는가이다. 만약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여성 의장 증가는 정치적 기록일 뿐, 정치적 변화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여성 의장이 늘어난 지금이야말로 더 엄격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그래서 ‘여성이라서 잘할 것’이라는 기대도, ‘여성이라서 부족할 것’이라는 편견은 사라져야 한다. 평가 기준은 오직 하나이다. 공정하게 의회를 운영했는가.강하게 집행부를 견제했는가.시민 편에 섰는가. 지방의회는 집행부 거수기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의장은 꽃자리가 아니라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지방의회가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의장의 성별이 아니라 구태의연한 의회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다수당이 독식하는 원구성 이전에 토론문화가 자리 잡아야 하고, 계파 정치보다 정책 경쟁이 우선돼야 하며, 정당의 이해보다 시민의 이익이 앞서야 한다. 여성 의장 시대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이제 시민은 단순히 성별을 보지 않고 성과를 볼 것이다.직함을 보지 않고 품격을 볼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이렇게 물을 것이다.당신은 여성 의장이었습니까, 아니면 좋은 의장이었습니까?“ 그 질문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여성 의장 시대는 지방정치의 진정한 발전으로 기록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다.정치는 성별로 평가받지 않는다. 다만 의장의 이름앞에 붙어야 할 수식어는 ‘여성의장’이 아니라 ‘공정한 의장’ ‘당당한 의장’ ‘시민의 의장’이어야 한다. 여성 의장 시대가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변화의 계기가 되기를 바래본다.

  • 2026-07-14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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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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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Jinju 자연마을을 찾아서 1. 집현면 현동(賢洞)마을

현동(Hyundong 賢洞) 집현산(集賢山)이 높이 솟은 곳에 월아산(月牙山)이 안대가 되고, 남강(南江)이 띠가 되어 동부(洞府)를 에워싸고 수림과 계곡이 아름다운 곳에 시내를 끼고 앉은 현동(賢洞)마을.현동(賢洞)은 예로부터 수많은 인재(人才)가 많이 배출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등교육의 본산(本山)인 집현초등학교(集賢初等學校)가 건재하고, 해마다 수재(秀才)를 길러 내는 현동(賢洞). 집현면(集賢面)의 3대 명당(明堂) 중의 하나로 알려진 현동은 강인한 민족정신의 발로(發露)를 엿볼수 있음과 동시에 ‘살아서 꿈틀대는 집현의 정기(精氣)’를 음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리의 얼굴이자 역사인 느티나무가 600년의 세월을 품고 말없이 서있고, 들판의 여문 곡식처럼 알알이 익어가는 현동의 역사(歷史)는 후학(後學)들의 자양분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현동(賢洞)은 일제강점기 이래로 당하(堂下)로 부르다가 1995년 10월1일부터 현동(賢洞)이라는 고유지명을 찾게 되었다. 현동의 지명유래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300년전 지금의 봉강(鳳降)과 당하(堂下)를 합쳐 현동(賢洞)으로 불렀는데, 그 뒤에는 서편이라 불렸으며, 그후 당하마을 뒤편 큰 정자나무 아래에 안씨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당안’이 되었고, 다시 일제강점기 당시, 지내마을과 현동마을 사이의 사랑등이라는 산 능성에 큰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아래에 있는 동네라 하여 당하(堂下)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이 민족말살 정책의 하나로 우리의 지기(地氣)를 차단하기 위해 강제로 동명(洞名)을 당하(堂下)로 바꾸었지만, 주민들의 의지(意志)로 고유의 지명을 되찾은 것은 지난 1995년이다.진주시는 일제시대때 임의로 바뀐 우리의 고유 지명을 찾아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고유지명 찾기 운동을 폈다.그 결과 집현면의 당하(堂下)를 원래 지명인 현동(賢洞)으로 바꾸자는 뜻을 모았고, 마을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압도적인 찬성으로 고유지명을 되찾게 된 것이다. 현동(賢洞)은 지명(地名)에 걸맞게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순흥안씨 조상의 위패를 모신 집현정사(集賢精舍)와 숭조사(崇祖祠), 절충장군의 묘, 보호수 등 마을의 역사를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전형적인 농촌마을로 2000년 10월31일 현재 66세대 235명의 주민들이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는 현동은 농가의 50%가 딸기재배를 하며 고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현동․새터․몽골 등이 있다. 집현초등학교에서 북서쪽으로 500m 지점에 위치한 현동마을은 수령이 600년인 느티나무와 함께 역사를 써왔다. 그 옛날 마을의 이름을 강제로 빼앗겼던 아픔도 간직하고 있고, 마을주민들의 희노애락을 세월속에 묻어 놓고 오늘에야 하나 하나 그 잎들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느티나무는 마을사람들의 회의장소로 기능했으며, 마을축제때는 더없이 좋은 잔치마당이기도 했다. 수백년의 세월을 간직했음직한 ‘들돌’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에 마을 청년들이 힘자랑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절충장군비가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의 역사를 일러주고, 삶을 꾸려 나가는 주민들에게 ‘지난한 삶을 깨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지내천을 주 용수로 사용하고 있는 현동마을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추억거리가 있다. 지내천 직강공사를 하기 전에 옛 하천에서 현동 앞들과 덕곡을 연결하는 폭 1m의 나무다리가 세워져 있었는데 대홍수로 없어졌고 내천 보를 이용하곤 했다.내천의 물이 많을 때는 신발을 벗고 왕래하기도 해 아직도 그 나무다리를 기억하고, 지나온 삶을 되새기는 마을사람들은 ‘평범한, 너무 평범한 그 때의 마을풍경’을 지금도 생생히 전한다. 새터마을은 새로 만들어진 동네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 졌는데, 집현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마을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볼때 새터는 ‘만석꾼’이 날 자리라는 말이 전해 내려 올 정도로 좋은 지형을 갖고 있다. 집현면의 3대 명당을 꼽을 때 흔히 집현초등학교 자리와 집현면 사무소, 응석사를 꼽곤 하는데 새터는 바로 집현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는 ‘양지터’로 손꼽히고 있다.현재 양지터는 해마다 가구수가 늘어 나고 있는 추세이며, 딸기재배로 인해 농가소득도 꽤 괜찮은 고소득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 2026-07-11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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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Jinju 자연마을을 찾아서 - 연재를 시작하며

자연마을을 찾아서 -연재를 시작하며 전국적으로 면지(面誌) 발간 붐이 일었다. 아마 2000년 초의 일로 기억한다. 진주에서 처음으로 명석면지가 발간 된 이후 각 읍면에서 면지 발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우연한 기회에 집현면지를 집필하게 되었다. 짧은 글들은 기회가 생길때 마다 쓰곤 했지만 한 지역의 역사를 담은 책을 저술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냥 한 번 해보자하는 마음으로 집현면지 집필에 도전했다.특정 지역의 역사, 문화, 인물 등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거의 2년 가까이 걸린듯 하다. 집현면지편찬위원회가 구성되고 마을 어른들과 함께 집현면 곳곳을 다니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특히 마을마다 구술을 해주신 어른들의 도움이 컸다.집현면의 자연마을 곳곳을 찾아다녔다.특별할게 없이 평범한 마을들과 사람들과의 만남은 당시로서는 꽤나 신선했다.도심에서 허비하는 일상의 시간들과 다른 특별한 만남으로 느낀것 같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루어진 집현면지 편찬작업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동네 어르신들이 함께 한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열고 '집현면지' 출간을 기념했다. 집현면지 집필 이후 , 대평면지, 미천면지, 수곡면지를 집필하는 기회를 가졌다.진주의 면단위 지역의 역사를 집대성한 면지발간은 이후 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면지 집필을 하면서 자연마을을 찾아다니며 적은 글이 면지에 수록된 '자연마을을 찾아서'이다. 글을 적은지 최소 20년의 시간이 지났다.다시 자연마을을 찾아서 20년 전과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오늘에 이르고야 말았다. 진주평론 홈페이지가 만들어지면서 직접 집필한 4개 지역의 면지(집현면, 대편면, 미천면, 수곡면)에 수록된 자연마을에 대한 기록을 게재하기로 했다.물론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발전된 자연마을도 있겠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자연마을을 찾아서를 연재하는 이유는 지금에야 돌아보게 되는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되살리고픈 마음이 더 크다.40대 초반에 적은 글들을 환갑이 지난 지금에야 들여다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도 되리라 생각한다. 부끄러운 글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20년 전 추억을 되새기면서 한 편 한 편 살펴보고 조심스레 올린다. 많은 격려를 부탁드린다.

  • 2026-07-02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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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희망을 기다리며

사람은 본디 가벼운가, 무거운가. 골치 아픈 물음이다. 사실 깃털과 풍선의 경중을 가리는 일이라면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늘 높이 던져 보면 쉽게 해결 될 일이 아닌가. 근데 사람의 일은 좀 다르다.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구해낼 답이 아니기에 그렇다. 늦었지만 지금에야 자문해 본다. 가벼운가, 아니면 무거운가. 깃털 같은 가벼움을 직감한다. 아니, 개울가 댑싸리 사이를 오가는 송사리 같음이 맞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며 먹을 것만 찾았다. 잠시도 가만있질 않았다. 해가 저물도록 움직였다.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말이다. 새삼 곱씹을 필요도 없다. 아침마다 꿈꾸었던 행복의 모양새가 어땠는지 말이다. 권태 탓이다. 어쩌면 쉽게 잊어 먹은 까닭이다. 돌이켜 보건대, 마음에 새긴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가벼움으로 온 몸을 부르르 떨지 않았는가. 진정 무던히도 참고 인내하는 법을 그동안 배우긴 한 건가. 지금에 와서 나 자신의 변덕과 분열을 설명할 길이 없다. 분한 것은, 그 변덕스러운 감정 사이를 어떤 서투른 글로도 서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한 것은 마음의 흩어짐을 끝내 다잡을 수 없었던 초라함이다. 끝내 지키지 못하고 무심히 세상에 내어주지 않았던가. 사실은 꿈 단지가 턱없이 컸음이다. 그랬기에 한꺼번에 담으려 했고, 많은 것을 담으려 했음이다. 담으려 욕심낼 수록 오히려 채워지지 않는 것이 꿈 단지인 것을 정녕 몰랐던 탓이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의 꿈 단지에 공백이나 다름없는 지난 세월의 부끄러움이 가득 차 있음을 본다. 진정 가벼웠음이다. 이제야 땅을 갈고, 이랑을 만들어야 할 마음의 밭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음을 깨닫는다. 내일은 그 밭을 일굴 내 몫의 쟁기 하나쯤은 챙겨두리라. 듬직한 황소 한 마리와 뿌릴 씨앗도 넉넉히 준비할 참이다. 꿈 단지를 이대로 비워둘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애오라지 희망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고,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 맬 여력이 없는 어려운 세상이기에 더더욱 흘러 넘치도록 채우리라. 그토록 가벼웠기에 이토록 텅텅 비어 있지 않는가. 그랬기에 이처럼 절망의 시대를 부여안고 살고 있지 않는가.뒤돌아볼 수 없는 곳에 무언가를 두고 왔다해서, 넋 놓고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 아무리 애를 써도 가질 수 없는 것 한 가지씩 갖고 사는 게 사람의 일이 아니던가. 단지 때로는 희망으로, 때로는 절망으로 다가올 뿐이다. 희망을 기다리며 다시 자문한다. 가벼운가, 무거운가.

  • 2026-07-02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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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2) 13.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진주소싸움 썸네일 이미지

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13.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진주소싸움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진주소싸움 대한민국 최고의 전통을 가진 진주 소싸움은 진주의 기상(氣像)을 닮았다. 진주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고 견디게 한 촉매제가 바로 ‘남강 백사장의 소싸움’이었던 것이다. 진주 발(發) 소싸움 소식이 들려오면 진주 인근에서 몰려든 인파로 남강 백사장은 인산인해가 되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의 싸움소의 긴장감 넘치는 혈투가 벌어지면 수만 군중의 함성은 하늘을 진동시켰다. 백사장을 뒤 덮은 차일과 인파 속에서 진주 양조장 술이 동이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주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진 진주 소싸움은 일제강점기 진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싸인 울분을 토해내는 해방공간이자, ‘일제의 심장을 겨누는 화살(矢)과 같은 존재’였다. 대한민국 지방지의 효시인 경남일보의 주필이던 위암 장지연은 「진양잡영(晉陽雜詠」에서 소싸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가을 풀 우거지고 밭갈이 쉬었기로 목동들은 한가한데, 억센 소 힘이 솟아 그 분기가 산과 같네. 뒤엉킨 뿔싸움 다투어 충돌하니 제(齊)나라 군대가 절묘한 승리로 묵적(墨翟)군을 파하고 돌아오는 듯 하네. 일제는 삼일독립운동과 기생걸인독립운동 이후, 황급히 진주 소싸움을 금지시켰다. 이처럼 진주 소싸움은 조선과 일본의 대리전(代理戰)의 성격을 가졌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놀이였다. 진주 소싸움의 역사 진주 소싸움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민족대백과사전에는 ‘삼국시대 전승 기념 잔치에서 비롯되어 고려 말부터 진주를 중심으로 자생한 고유의 민속놀이’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소싸움의 기원을 백제를 이긴 신라의 전승 기념잔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소를 많이 잡아 먹어 소들을 위령하기 위해 시작되었는 설이 있다. 북한과학원이 발간한 「조선의 민속놀이편」에는 ‘진주 일대에서 줄다리기와 더불어 소싸움은 연중 가장 큰 행사’라 적고 있다. 이처럼 진주 소싸움은 오랜 전승 과정을 통해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구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진주에서 소싸움이 처음 개최된 것은 1884년이다. 당시 소싸움은 진주성 성내(城內)와 성외(城外) 마을간 벌였던 소싸움이 최초의 기록이다. 1909년에는 위암 장지연이 진주 소싸움의 정경을 묘사한 시(詩)를 경남일보에 게재했다. 1913년에는 추석에 진주와 창원에서 투우대회가 개최되었다. 1917년에는 남강 백사장에서 개최된 소싸움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朝鮮)』에 「진주의 투우(鬪牛)」가 소개되었고, 당시 진양군수인 일본인 야마시타(山下正導)가 경성일보 등에 「진주 명물 투우」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특히 야마시타가 기고한 글을 통해 진주 소싸움의 정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야마시타에 의하면, 진주의 소싸움은 남강 강변에서 열린 우시장의 성행으로 자연스럽게 개최되었고 주로 초파일과 백중, 추석 명절의 정례적 행사였다고 한다. 1884년 진주에서 벌어진 소싸움의 경우, 성안마을에 사는 부호인 김선여와 성밖 마을의 호농인 오작지 두 사람이 평소에 우량소를 키우며 서로 과시하는 과정에서 소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을 계기로 마을 대항의 소싸움이 읍치에서 벌이는 성대한 소싸움으로 변모되었는데, 1897년경에는 고을민의 후원으로 우승상금을 마련했고 군수도 상금과 상품을 내걸면서 소싸움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진주 읍치의 성 안과 성 밖 마을들이 벌이는 소싸움이 끝난 다음날 도동면과 진주읍의 승부가 이어졌고, 17일에는 도동면과 금산면의 승부가 펼쳐졌다. 이와같이 19세기 말 진주에서는 마을 단위는 물론 고을 단위의 대동놀이로서 소싸움이 전승되었고 주민들은 싸움소를 자신이 속한 지역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소싸움은 경남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926년에는 진주, 김해, 마산, 통영, 산청 등지에서 투우대회를 개최했으며, 1927년에는 의령, 합천, 하동, 거창에서 투우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투우대회를 개최하는 지역이 증가했다. ‘진주는 투우놀이가 성하여 천의 군중과 함께 으르렁 으르렁 거리는 모습이 일대장관이더라’ 진주 소싸움은 일본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삼일만세운동으로 일제가 진주 소싸움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이후 일제의 축산장려정책으로 1923년 재개된 이후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지역으로 1930년대 까지 전승되었다. 해방 이후, 진주에서는 1949년 추석을 맞아 남강 백사장에서 전국 투우대회를 개최했다. 1961년에 이르러서는 진주에서 투우단체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진주 개천예술제의 외곽행사로 투우대회가 개최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969년 남강댐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 방문 기념 투우대회도 개최되었다. 전국 소싸움대회의 원조인 진주가 소싸움으로 위상을 갖게 된 것은 2006년 전국 최초로 진주전통소싸움경기장을 건설하면서 부터이다. 청도는 이듬해인 2007년에 청도소싸움경기장을 개장했다. 2011년에는 진주에서 ‘토요상설소싸움대회’가 시작되었다. 더불어 매년 10월에 개최되는 진주남강유등축제와 개천예술제 기간에 열리는 ‘진주 전국 민속 소싸움 대회’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의령군이 지난 2023년 채택한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에 관한 보고서」는 소싸움을 문화재로 인정받음으로써 소싸움의 민속문화적 요소들을 발굴하고 복원·전승 체계를 확고히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른바 겜블링 소싸움과의 차별화를 통해 소싸움 대회 및 싸움 소 농가의 자긍심 고취와 지속성을 확보하고 현존하는 전통 농경민속문화의 대표격인 소 싸움을 통해 국민 여가 활동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더불어 문화재 지정에 의한 소싸움의 활성화를 통해 지역 일자리 창출과 경제활성화라는 긍정적인 기대도 명시했다. 현재 소싸움은 진주를 중심으로 의령과 청도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진주 소싸움 우표와 싸움소 은퇴식 ‘진주의 독특한 투우’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면서 기념우표도 발행되었다. 1937년 발행한 「조선도읍대관」 진주읍 편에서 ‘진주 소싸움 우표’ 발행 소식을 전한 것이다. 진주 소싸움을 진주의 독특한 투우로 평가하면서 우편국에서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이 우표에는 진주성 촉석루와 진주 소싸움 장면이 실려있다. 당시 진주 소싸움이 가진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소싸움대회가 마치면 싸움 소의 은퇴식이 열리기도 했다. 은퇴식에서 우주(牛主)와 소가 관객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죽으면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의 시간도 가진다. 2009년에는 의령의 싸움소 ‘범이’가 은퇴식을 가졌고, 다음 해 범이가 죽자, 우주인 하영효씨는 정중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봉분과 비석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당시 ‘범이’의 은퇴식은 mbc뉴스 등 언론매체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은퇴식을 가진 싸움소는 박성권의 ‘깡패’, 진순호씨의 ‘강남스타’가 있다. 진주 소싸움 캐릭터 ‘맹우(猛牛) 진주 소싸움을 상징하는 캐릭터 ‘맹우(猛牛)’가 등장한 것은 진주에서 개최된 전국 민속 소싸움대회 캐릭터로 선정되면서 부터이다. ‘맹우(猛牛)’는 일제강점기에 유명세를 날렸던 진주 전통 소싸움 대회에서 명성을 날린 싸움소의 이름이다. ‘맹우(猛牛)’가 캐릭터로 선정된 것은 소싸움을 하던 도중 뿔이 부러지는 극한 상황을 극복하고 우승을 차지한 전설적인 진주의 싸움소이다. 캐릭터는 맹우의 힘찬 모습과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흰 옷을 입혀 왜침에 항거한 백의민족의 강인함으로 표현했다. 뿔치기·목치기·후려치기, 소싸움 기술 싸움소의 등장은 1970년대 이후 농기구 사용의 일반화로 농사 소의 이용이 줄어들면서 부터이다. 대회에 출전하는 싸움소는 평소 순발력과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 엄청난 체력 운동을 병행했다. 식단도 호박, 인삼에 이어 쓰러진 소도 뻘떡 일으켜 세운다는 낙지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영양 식단이었다. 그리고 싸움소는 싸움 기술을 연마했다. 소싸움 기술로는 일반적으로 치는 기술, 거는 기술, 미는 기술, 복합 기술 등이 있다. 치는 기술은 상대방 싸움소를 들이 받으면서 타격을 주는 기술로 들치기, 머리치기, 뿔치기, 옆치기, 후려치기가 있다. 거는 기술은 뿔을 이용해 상대를 걸어서 누르거나 들어 올리는 기술로 뿔걸이가 있다. 미는 기술은 힘으로 밀어 붙이는 기술로 밀치기, 목치기, 주둥이 뜨기가 있다. 복합 기술은 두 가지 이상의 기술을 연속으로 펼치는 기술이다. 대표적으로 연타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소싸움 기술은 싸움소를 기른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진 지식과 민간에 전해지는 지식이 합쳐진 민속 지식으로 볼 수 있다.이러한 싸움소의 기술을 생생히 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진양호 공원내 상설 소싸움 경기장이다. 특히 소싸움을 중계하는 해설자의 달변은 소싸움의 새로운 묘미와 재미를 알게 해준다. 경기장에서 최고의 스타는 싸움소를 제외하고는 단연 소싸움 해설자이다. 소싸움의 위기, ‘동물학대 논란’ ‘소싸움=동물학대’라는 동물·환경보호단체들의 반대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문화재청(국가유산청)은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보류하고 학술조사를 선행한 후, 추진 여부를 결정키로 한다. 이른바 ‘소싸움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문화재위원들은 이들 단체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세시풍속으로서의 소싸움과 현재 각 지역에서 상설 운영되는 소싸움의 동일시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역사성과 전승 주체, 지역주민들의 참여, 사행성, 동물 학대 등 문제 소지가 있는 부분은 학술조사를 통해 면밀히 따져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세시풍속이었던 ‘소싸움’이 ‘소 힘겨루기’라는 명칭으로 변경된다. 지난 2009년에 창립된 (사)한국민속소싸움협회도 2022년 (사)대한민속소힘겨루기협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전승위기를 기회로 소싸움은 오랜 전승 과정에서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구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지방종합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 등 지역축제와 결합하면서 관광자원화의 길도 열었다. 현재 전국 10개 시·군과 2개의 광역자치단체에서 소싸움 관련 조례를 제정했고, 4개의 시·군에서는 소싸움 전용 경기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싸움 관련 기술과 민속 지식의 전승 등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미룰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싸움이 가진 한민족의 전통적인 민속문화적 요소를 발굴·복원·계승하는 것은 물론 소싸움 지속적인 전승의 문화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더 이상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 등의 소싸움이 문화재로 지정된데 비해 대한민국의 소싸움은 전승 세대 부족 현상과 소싸움을 동물권 침해로 보는 견해 등으로 전승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대로라면 세대를 초월한 한민족의 전통 문화유산인 소싸움은 결국 존폐의 기로에 서고 말 것이다.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은 소싸움대회와 싸움소 농가의 자긍심 고취와 전승 지속성 확보, 국민여가 활동의 다양성 기여, 전통문화유산의 보존과 계승 등 소싸움의 미래를 결정짓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 소싸움의 명운이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소싸움을 동물권 침해로 보는 일부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 소싸움을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좀 더 깊은 숙의가 필요하다. 마권(馬券) 발행 처럼 소싸움에 대한 온라인 배팅 허용 문제 역시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러한 협의의 논란이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뜻이다. 일제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전통의 진주 소싸움이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진주 소싸움의 주인공인 ‘맹우(猛牛)’가 갖고 있는 힘찬 모습과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흰 옷을 입고 왜침에 항거한 진주 사람들의 강인함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진주 소싸움은 일제의 심장을 겨눈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 2026-06-29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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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정수리 찬물 한 바가지

대체 젊다는 것은 무엇이던가. 거짓과 협잡이 난무하는 패악질을 두 눈 치켜 뜨고 맞서 자존을 지켜나가는 일이 아니던가. 더 나아가 기득권에 빌붙는 타락한 시대정신을 비웃고, ‘옳은 것’ 보다는 ‘유리한 것’만 찾아다니는 세상의 부조리를 깨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던가. 주제넘게도 붓 한 자루 꼬나 쥔 시퍼런 청춘이 오래 전, 이 거칠고 거친 세상에 뛰어 들 때는 적어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껏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천년 도시 진주의 속내에 정제돼 있는 진주정신의 살아있음을 말이다. 더불어 노쇠해 가는 육체가 정신의 격무를 견디지 못해 파탄하는 그 날까지 버티리라 다짐했다. 그것이 진주에서 살아 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정작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어설픈 투사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과의 일에서 단지 서로 의견이 조금 다를 뿐인데도 결코 상대방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남의 일은 단점을 들춰내고, 무턱대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그것이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그랬다. 그리고 거기에서 새롭게 맛보는 작은 특권과 기득권은 달콤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단지 껍데기일 뿐 이었다는 사실을 알아 채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거머쥔 작은 특권과 기득권을 지키려고 날마다 저지르는 불평등과 불공평에 눈을 감는 내 안의 거짓된 모습에도 개혁과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읽던 책을 내려 놓는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수리에 찬 물 한 바가지가 쏟아졌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언제부턴가 우리는 내 안의 거짓을 찾기 보다는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데 더 익숙해져 있기에 더욱 그랬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겉으로는 올곧은 정신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자신만의 기득권을 쫓는 타락한 시대정신들이 많으리라. 어쩌면 나 자신도 그 중의 한 명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나와 주변 세계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는 원동력이 되는 ‘정신의 탄력’이란 명제는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그것이 진주정신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혹시라도 한심하고 타락한 시대정신이 천년의 속내를 키워 온 진주정신을 왜곡하고 무참히 짓밟도록 내려 둘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다짐한다. 모래 위엔들 어떠랴. 무엇이든 세워라. 대신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워야 한다. 스치기만 해도 크고 오래 남을 상처가 남을 정도면 더 좋다. 설사 실패해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찾아와도 괜찮다. 그럴수록 다음 기회는 그만큼 재빠르게 오니까 말이다. 수없이 마음을 다잡고, 미리 예단해 미적거리지도, 꼼지락거리지도 말자. ‘말면 말지’ 하는 마음도 접어 두자. 구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고, 구함이 많을수록 번잡스런 것이 세상 이치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것은 단언코 없다.무엇을 세우든, 시작부터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예감한다. 또한 누구도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편안하게 사는 게 어떠냐는 회유도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갖가지 이유가 따라 붙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지부진하다가 슬며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 예측하고 시작했으니 괜찮다. 그 정도야 지금껏 수없이 겪어왔던 일이고 견뎌냈던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단 하나만 믿자. 진실은 다래끼 돋은 눈꼽에도 끼어 있고, 미운 며느리 속옷에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엇이든 세워야 한다. 설사 허황된 꿈에 머물지라도, 이상만 가지고 처절한 현실의 벽을 허물려고 한 맹자의 우활(迂闊)함이라 비판받아도 좋다. 대신 절대 겁내지 말아야 한다. 상처가 남으면 어떠랴. 또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면 어떠랴. 지금 뭔가를 세운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붓 한 자루 꼬나 든 시퍼런 청춘이 세월을 돌고 돌아 다시 세상에 뛰어든다. 딱 봐도 무모하다. 우활하다. 가시밭길이다. 근데 난 괜찮다. 함께 가는 길동무가 있기에 그렇다. 세울 것이다.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그 무엇인가를.

  • 2026-06-29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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