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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OF 진주2) 16. 1966년 화마(火魔)가 중앙시장을 삼키다 썸네일 이미지

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16. 1966년 화마(火魔)가 중앙시장을 삼키다

진주에는 ‘날三子’라는 말이 있다. 진주에서 돈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은 3대 째가 되면 진주를 떠나야 한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는 시장교역(市場交易)의 이동성(移動性)을 의미한다. 더불어 객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와 함께 치부(致富)한 재산은 자손들이 관리하기 어렵다는 뜻도 갖고 있다. 더불어 1862년 진주농민항쟁운동과 형평운동, 경남도청 이전 당시 촉석루와 배다리를 가득 메워 진주의 정신을 보여준 이들도 바로 진주의 상인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진주의 시장역사(市場歷史)는 진주시민이 새로운 문물을 교환하고 개척하는 역사(交換開拓史)이면서 민권운동의 중심 세력사(勢力史)이자, 진주의 모든 행사의 전위사(前衛史)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로부터 인구가 모이고 농업이 풍성하며 교통의 중심지인 진주에 자연스럽게 저자(市場)가 생겨난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시장에 구름 같이 사람이 모여 들면서 진주는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 발전해 나갔다. 이후 ‘진주장(晋州場)’으로 불렸던 중앙시장은 경남 경제의 총본산이었던 진주상무사의 중심 교역장으로 발전했다. 더불어 중앙시장을 비롯한 진주지역의 시장(市場)은 진주 경제의 뿌리인 시장경제(市場經濟)의 출발점임과 동시에 진주 서민들의 경제생활을 주도하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성내시장(城內市場)과 북문통시장 진주에는 사전(四廛)이 있었다. 진주에는 장터가 두 군데 있었는데 첫 번째 시장이 관아(官衙)의 감독을 받았던 성내시장(城內市場)이다. 당시 성내시장은 옛 세무서 앞에서 제일극장까지였다. 지금의 공북문 앞에서 촉석문까지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민간 시장의 형태로 농산물을 교역했던 농산물 장터인 북문통 시장이다. 옛 경찰서 자리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점포 형식이 아닌 노점이었다.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시전의 특권이 완전히 폐지되고 상인들의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진주장(晋州場)은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자본이 상륙하면서 시장은 그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당시 성내 시장은 현재의 진주경찰서 서쪽에서 한동안 성시를 이루었으나 끝내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일본인과 일본 자본이 대안동과 동성동 일대를 사실상 점거하면서 시장의 확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성내시장과 성외시장은 통합을 이루게 되고 명칭도 진주시장진흥회(晋州市場繁榮會)로 바뀌면서 조국의 해방을 맞게 된다. 이것이 근대 진주 시장의 시작이다. 옛날 중앙시장 거리들 사단법인 진주중앙시장번영회가 지난 1982년 발간한 『진주중앙시장 백년사(1982. 금호인쇄)』를 보면 일제강점기 당시의 시장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진주시장의 과도기는 1910년 일제의 강제 한일합방에서 3·1운동 이후, 1930년까지이다. 당시 성내장터는 이미 폐철된지 오래였고, 지금 장터는 진주의 대사지 건너 북문과 남문의 동북쪽에 있었던 정식 공설시장이 번창했다. 시장 서쪽에는 북문통(北門通)이라는 신작로개 개설되었고, 시장 쪽으로 경찰서, 의용소방대가 있었으며, 서쪽 편에 금융조합, 상업은행, 남쪽에 식산은행이 있었다. 당시 중앙시장의 의령길(시장 중앙) 남쪽에 ‘보리전’과 ‘쌀전’이 있었다. 길 양편에는 ‘잡화전(雜貨廛)’와 ‘포목전(布木廛)’, ‘고무신전’이 있었다. 북쪽으로는 ‘비단전’과 ‘야채전’, 그리고 장새미골목쪽으로는 ‘나무전’이 있었다. 고정점포는 객주업자가 제일 처음 지었고, 병자년(1936) 물난리 이후에는 고정된 현대식 점포가 들어섰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앙시장은 그야말로 폐허가 된다. 포탄에 산산조각난 시장의 모습은 아비규환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중앙시장 상인들은 그 폐허를 딛고 일어선다. 그리고 중앙시장이 제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최대의 시련과 마주친다. 바로 1966년 중앙시장의 대화재이다. 중앙시장 화재 현장(1966년)진주중앙시장을 삼키다, 1966년 대화재 사단법인 진주중앙시장번영회는 지난 1982년 『진주중앙시장 백년사(1982. 금호인쇄)』를 발간했다. 당시 안승균 진주중앙시장번영회장은 발간사에서 ‘고종 21년(1884) 1월에 결성된 진주상무사(晋州商務社)의 사전청금록을 근거로 백년사라는 표제를 붙였다. 경남 경제의 총본산으로서 진주장은 그 중심 교역장이었으나 그 밖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중앙시장 백년사’에는 중앙시장 관계자들의 증언과 1966년 중앙시장을 덮쳤던 대화마(大火魔)에 대한 기록과 생생한 사진이 실려 있어 중앙시장에 대한 기록물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중앙시장이 불길에 휩싸인 것은 1966년 2월 6일 오후 10시이다. 화마가 덮친 중앙시장은 다음 날인 2월 7일 아침 나절이 되기도 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성한 점포가 거의 없었다. 상인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렇게 중앙시장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것을 잃었다.중앙시장 대화재 이튿날인 2월 7일 진주시내 기관장과 상공인, 금융관계인, 유지들로 구성된 ‘화재대책위원회’가 긴급소집되었다. 중앙시장 대화재 수습방안 등이 논의되었다.중앙시장 대화재 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1966년 2월 8일 중앙조사반이 화재현장을 방문했다. 진주중앙시장회의실에서 중앙조사반에게 화재복구 계획을 설명한데 이어 정부의 도움을 요청했다. 상인은 물론 진주시민들의 성금답지가 이어졌고 중앙시장은 신속하게 복구되었다. 화재 후 불과 3개월 여만인 1966년 5월 수정동과 대안동 일대의 가설시장이 문을 열었다. 중앙시장 복구공사 기공식은 1966년 5월 20일이다. 당시 기공식에는 하병렬 회장과 진주지역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중앙시장 복구공사는 7개월만인 1966년 12월 15일 완공되었다. 당시 중앙시장 화재로 피해를 입은 옥봉북동 이재민을 위한 주택 52동도 신축되어 제공되었다. 이후 중앙시장은 여러차례의 변화를 꾀하면서 오늘날 진주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중앙시장을 비롯한 진주의 재래시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정부차원의 재래시장 활성화 정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재래시장 활성화는 요원한 실정이다. 중앙시장 백년사에 ‘진주시장사 서설’을 쓴 이명길 전 한국예총 진주지부장의 글 가운데 중앙시장과 관련한 일화가 적혀 있다. 사실 처음 이름과 이야기라 묻기도 하고 자료를 찾아 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다. 기인(奇人) 설대장사 박돌(朴乭)과 三수, 상인후견인 이무엽(李武燁), 진주시(晋州式) 놀음선수인 서울 덕수(德洙), 글 잘 쓰는 문술(文述)과 두 덕수(德洙), 설치기 조득제(趙得濟) 일화를 잘 아시는 분의 친절한 설명을 기대한다.

  • 2026-11-02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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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강길선 의원 '진주 8경 재정비 속도보다 방향입니다'  썸네일 이미지

이슈&이슈 강길선 의원 '진주 8경 재정비 속도보다 방향입니다'

진주시가 추진중인 진주 8경 재정비사업에 제동을 거는 시의회 지적이 제기됐다. 진주시의회 강길선의원은 진주시의회 제277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 5분발언을 통해 ‘진주의 정체성을 지키는 진주 8경 재정비 속도보다 방향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강길선의원의 5분발언 내용이다. 진주시가 추진 중인 ‘진주 8경 재정비 사업’의 취지에 함께 공감하면서도, 진주의 백년대계를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정책적 제언을 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변화하는 관광 환경에 발맞추어 지역의 새로운 매력을 발굴하고 홍보하려는 집행부의 고민과 노력은 잘 알고 있습니다. 행정의 이러한 선제적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그러나 정책의 의도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진주라는 도시가 가진 고유의 정체성과 가치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8경(八景)’은 단순한 관광 목록이 아닙니다.수백 년의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진주의 영혼이자, 변하지 않는 역사와 자연 경관을 담아낸 ‘도시의 얼굴’입니다.현재 진행 중인 재정비 후보군을 살펴보면, 세월이 검증한 자연·역사 경관과 최근 시가 조성한 현대식 공공시설 및 체험 공간이 하나의 후보군으로 함께 묶여 있습니다. 자연과 역사가 숨 쉬는 ‘풍경(景)’과, 행정이 조성하여 사람이 찾아가는 ‘장소(所)’는 엄연히 그 성격과 가치가 다릅니다.이 둘을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은, 자칫 8경 고유의 희소성과 상징성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1차 예비조사의 검증 기준이 충분히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호도 조사 중심의 2차 조사가 서둘러 진행된다면, 결과에 대한 시민적 수긍도를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정당성이 부족한 8경은 도시의 자랑이 되기 어렵습니다. 시장님과, 집행부 관계공무원,시민여러분! 본 의원의 제언은 행정의 발목을 잡으려는 것이 아닙니다.‘진주의 품격’을 함께 지켜내자는 대승적 당부입니다. 이에 집행부에 세 가지 발전적 대안을 강력히 제안합니다. 첫째, 진행 중인 2차 조사를 잠시 정지하고, 후보 도출 기준과 용역 검토 결과를 시민과 의회에 투명하게 먼저 공유해 주십시오.충분한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 행정의 신뢰를 높이는 길입니다. 둘째, ‘진주 8경(景)’과 ‘진주 8명소(名所)’로 개념을 명확히 분리하여 재정비해 주십시오.변하지 않는 역사와 자연의 절경은 ‘진주 8경’으로 보존하고, 시가 새로 구축한 우수한 관광·체험 인프라는 ‘진주 8명소’로 구분하여 홍보할 때,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며 훨씬 강력한 관광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셋째, 향후 관광자원 재정비가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관련 기준을 제도화하고 의회와의 소통을 강화해 주십시오.‘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입니다. 지금 잠시 멈추어 기준을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단순한 순위가 아니라 ‘진주의 정체성’일 것입니다.진주 8경 재정비가 필요하다면 해야한다. 단, 행정이 시민의 뜻을 무시하고 시민의 대표인 시의원의 의견마저 고민하지 않는다면 과연 진주시는 누구를 위한 행정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주 8경 재정비는 진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준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더불어 진주시는 강길선 의원의 5분발언에 대해 입장을 내놓아야 한다.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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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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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

진주 축구 100년 스토리, 4257에서 K4우승까지 썸네일 이미지

Archive of 진주 진주 축구 100년 스토리, 4257에서 K4우승까지

진주 축구 100년 스토리, 4257에서 K4 우승까지 민족의 시간을 새긴 청년 축구단 4257축구단시민의 이름으로 들어 올린 진주시민축구단의 K4 우승 진주시민축구단이 K4 리그 첫 우승을 확정했다. 지난 2019년 12월 창단한 이후 무려 일곱 해 만에 거둔 결실이다. 그동안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흘린 땀과 지도자의 노력, 구단 관계자와 시민들의 응원이 함께 만든 성취이다. 오는 11월 8일 진주종합경기장에서 열리는 마지막 홈경기 뒤에는 시민들 앞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릴 예정이다. 간만에 기쁜 소식이다. 이번 진주시민축구단의 K4 우승은 진주 축구의 오래된 기억을 돌아보게 한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기년법을 이름에 담았던 4257단, 전국대회에서 이름을 떨친 학교 축구, 올림픽과 월드컵으로 향한 선수들, 생활체육 현장을 지켜온 시민들. 우승컵 뒤에는 그렇게 쌓인 진주 축구 100년의 역사가 있다. 네 자리 숫자에 담은 민족의 시간 진주의 청년 축구인인 강수영, 정수만, 서종숙, 박학조 등 진주의 청년 축구인이 1924년 ‘4257축구단’을 결성했다. 축구단에 사용된 숫자는 그 해의 단기 연도인 4257년을 의미했다. 단기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원으로 삼는 기년법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활동하던 청년들이 팀 이름에 우리 역사의 시간을 새긴 것이다. 일제강점기 진주에서 활동을 시작한 4257단은 이름 때문에 탄압받았다. 일제는 4257이라는 팀명의 의미를 알아차린 뒤 책임자를 구금하고 강제로 해산시켰다. 순수하게 축구가 좋아 모인 진주 청년들에게 일제는 팀 이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4257축구단의 역사가 진주 축구사에 남긴 의미는 적지 않다. 먼저 축구단의 이름에 민족의 역사를 담았다는 점이다.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우리 역사의 시간을 팀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역사적 의미는 진주 축구와 청년운동이 연결되는 지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축구를 매개로 모인 청년들이 지역사회의 문제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더불어 진주 축구의 주체가 오래전부터 진주의 청년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진주 축구사를 더 깊게 기록하는 출발점이 됨과 동시의 진주축구의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계기가 된다는 측면에서 4257축구단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내려져야 한다. 우정환, 진주의 운동장에서 런던올림픽으로 일제강점기 진주의 축구는 학교 운동장에서도 성장했다. 동아일보 1936년 8월 1일자 보도를 보면 진주공립농업학교가 제8회 전조선중등학교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신문 기록은 진주 학생들이 전국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동아일보 기사(1936년 8월 1일자) 이 시기의 진주 축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우정환이다. 1914년 진주에서 태어난 우정환은 진주공립농업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공격수로 이름을 알렸다. 지역에서 성장한 그의 축구 인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를 가로지른다. 진주 축구가 전국무대에서 쌓아온 역량을 한국 대표팀으로 이어준 인물이었다. 우정환은 1948년 런던올림픽 최초로 한국 축구 국가대표로 출전해 ‘축구 국가 대표 최초의 올림픽 득점’과 ‘최초의 올림픽 8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는데 주축 역할을 했다. 진주는 진주공설운동장 3번 출구 인근에 우정환을 추모하는 비를 세웠다. 우정환을 추모하는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번개처럼 날쌘 철각과 무적의 드리블에다 총알 쏘는 듯한 슈팅의 위력으로 한국 축구 여명기의 갈색 포탄 같은 골로 기여했고, 오늘 세계 프로축구의 어디에 내세워도 뛰어난 별일 것임을 세상이 애석할 바다’ 진주 축구의 산증인 우정환선수 그의 별명은 ‘오토바이’였다. 빠르게 그라운드를 누볐던 공격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키 178cm, 몸무게 75kg의 뛰어난 신체조건에 100m를 무려 10초 9로 주파하는 스피드를 자랑했다. 학창시절엔 모교를 우승으로 이끈 우승제조기였다. 각종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어 우승기가 남대문 이북으로 넘어간 적이 없다며 격찬하기도 했다. 진주가 축구의 고장으로 명성을 떨치는 그 중심에 우정환이 있었던 것이다. 우정환은 지역 축구인들과 함께 뛰며 진주 축구의 명성을 쌓았다. 진주시체육회가 소개하는 1940년 밀양 개최 전국축구대회 우승 기념사진에는 우정환과 권창세, 김용하, 신기순, 조하구, 이강열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한 사람의 뛰어난 재능 곁에는 함께 달리고 승리를 일군 동료들이 있었다. 전국축구대회 우승 기념(1940년) 그의 축구 인생에서 중요한 장면은 1948년 런던올림픽이었다. 우정환은 한국 축구의 첫 올림픽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대표팀에는 김용식, 정남식, 정국진, 홍덕영 등 한국 축구 초창기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함께했다.대표팀은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5대 3으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이어 스웨덴에 크게 패하며 세계 축구와의 격차를 경험했지만, 첫 올림픽에서 거둔 승리는 한국 축구사의 소중한 출발로 남았다. 진주에서 성장한 우정환도 그 도전의 일원이었다. 우정환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진주에서 공을 차던 청년이 세계무대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지역의 운동장과 올림픽 경기장이 한 선수의 삶을 통해 연결됐다. 우정환은 진주 축구가 한국 축구의 초기 역사에 남긴 중요한 이름이다. 조광래, 한국 축구의 중원을 설계한 ‘컴퓨터 링커’ 우정환이 한국 축구의 첫 올림픽 여정에 함께했다면, 다음 세대의 조광래는 월드컵 무대에서 진주 축구의 이름을 알렸다. 1954년 진주에서 태어난 조광래는 봉래초등학교와 진주중학교, 진주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로 진학했다. 진주의 학교에서 성장해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 잡은 인물이다. 조광래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다. 당시 축구명문이었던 진주중-진주고 진학으로 충분하게 입증됐지만, 경기장에서도 영리하기로 따지면 단연 으뜸이었다. ‘컴퓨터 링커’라는 현역시절 애칭도 그만의 탁월한 두뇌 플레이의 소산물이다. 링커는 공격과 수비를 연결하며 경기를 풀어가는 선수를 가리킨다. 조광래는 정확한 패스와 영리한 경기 운영으로 이름을 얻었다. 공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느 순간 공격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그의 강점이었다. 한 언론에서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조광래 축구는 굉장한 마력을 지녔다. 그의 품을 거치는 선수는 차원을 달리하고, 그의 손을 거치는 팀은 뚜렷한 색채를 띤다. 그야말로 소리없이 강한 진정한 축구의 달인이 아닌가 싶다.’ 조광래는 1970∼1980년대 한국 축구의 주요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1978년과 1986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힘을 보탰으며,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도 출전했다. 한국이 1954년 스위스대회 이후 32년 만에 돌아간 월드컵 본선에 진주 출신 조광래가 있었다.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에도 그의 축구는 이어졌다. 프로팀 지도자로 나선 조광래는 2000년 안양 LG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영표와 이청용 등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도 관여하며 유망주를 발굴하고 기르는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경남FC를 이끌던 시절에도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선수들의 기술과 판단을 살리는 경기 운영은 현역 시절 자신의 축구와도 맞닿아 있었다. 2010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진주의 운동장에서 시작한 축구 인생이 국가대표 선수에 이어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 확장된 것이다. 우정환과 조광래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력에는 공통점이 있다. 진주에서 자란 축구 재능이 전국무대를 거쳐 세계무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의 기록은 진주 축구의 자부심을 구체적인 역사로 보여준다. 서서히 드러나는 진주 축구의 저력 진주 축구의 계보는 두 사람에게서 멈추지 않았다. 우정환, 조광래, 최진한, 김판곤, 남태희, 김민우. 여러 세대에 걸친 진주 출신 축구인들이 선수와 지도자로 한국 축구에 이름을 남겼다. 진주중학교와 진주고등학교를 거친 최진한은 국가대표와 프로선수로 활약한 뒤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김판곤도 선수 생활에 이어 국내외 축구 현장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다. 경기장에서 쌓은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하며 진주 축구인의 활동 범위를 넓혔다.후배 세대의 남태희와 김민우도 국가대표로 성장했다. 남태희는 봉래초등학교에서 축구의 기본기를 익혔다. 대표팀 경기를 마친 뒤 고향의 모교를 찾아 스승과 후배들을 만난 일은, 세계무대에서 뛰는 선수에게도 어린 시절 운동장의 기억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민우 역시 봉래초등학교에서 어린 시절 공을 찼다. 진주 축구를 기록할 때는 출생지와 성장한 학교를 구분하면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주에서 태어난 선수뿐 아니라 이곳에서 배우고 성장한 선수들도 지역 축구사의 중요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봉래초등학교에서 성장한 백지훈과 정종선, 진주고등학교를 거친 윤일록도 그 명단에 들어간다. 이들의 이름은 진주가 축구인의 고향이면서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의 터전이었음을 말해준다. 특정 시기에 뛰어난 선수 한 명이 등장한 도시와 여러 세대에 걸쳐 축구 인재를 길러낸 도시의 역사는 다르다. 진주에서는 선배가 떠난 운동장에 후배가 들어섰고, 그 후배를 보며 또 다른 아이가 꿈을 키웠다. 그렇게 이어진 이름들이 진주 축구의 저력이다. 스타의 뒤에는 진주시민이 있었다 선수들의 성취를 가능하게 한 것은 지역의 축구 문화였다. 아이들에게 공 차는 법을 가르친 지도자, 훈련과 경기를 뒷바라지한 가족, 학교 축구를 후원한 동문, 새벽과 주말의 운동장을 지킨 동호인들이 그 바탕을 이뤘다. 권창세의 이야기는 그 문화를 보여준다. 우정환과 함께 뛰었던 그는 회갑 비용을 아껴 우승컵을 만들고, 1975년 권창세배축구대회를 창설했다고 전해진다. 개인의 기념일에 쓸 비용을 지역 축구인들이 함께 뛰는 대회로 돌려준 것이다. 권창세(진주시체육회 초대회장)진주 축구사는 국가대표와 유명 선수들의 기록에 더해 운동장을 지켜온 사람들의 역사까지 담아야 한다. 학교 축구는 선수를 길렀고, 생활축구는 직접 뛰고 응원하는 시민들의 기반을 넓혔다. 그 두 흐름 속에서 축구는 진주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진주시민의 이름으로 들어 올린 우승컵 2019년 12월 23일 진주시민축구단이 창단했다. 이듬해부터 4부리그에 참가한 구단은 지역을 대표하는 성인팀으로 도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2026년, 창단 7년 만에 K4리그 첫 우승을 확정했다. 4257단과 진주시민축구단은 조직적으로 이어지는 같은 구단은 아니다. 그러나 두 팀을 진주 축구사라는 긴 시간 위에 놓으면 각 시대의 사람들이 축구에 담았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1924년의 청년들은 팀 이름에 민족의 시간을 새겼다. 오늘의 선수들은 진주의 이름을 달고 뛰며 시민들과 우승의 기쁨을 나눈다. 그 사이에는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학생들, 올림픽과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 다음 세대를 가르친 지도자들, 생활축구를 이어온 시민들이 있었다. 이번 우승을 오래 기억하려면 우승컵과 함께 그 시간도 기록해야 한다. 흩어진 사진과 대회 자료를 모으고, 원로 축구인들의 증언을 남기며, 학교와 동호회가 간직한 이야기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 우정환이 뛰던 시절의 기억과 조광래를 길러낸 운동장의 이야기는 다음 세대가 물려받아야 할 진주의 역사다. 진주 축구의 백 년은 이름을 지키려 했던 청년들과 더 넓은 무대에 도전한 선수들, 그리고 공을 놓지 않았던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왔다. 그래서 2026년 진주시민축구단의 첫 우승은 진주의 축구 역사에 새롭게 더해진 빛나는 한 장이다. 진주시민축구단의 K3도전에 힘찬 응원을 보낸다.

  • 2026-10-26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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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민 설문 특별기획  Ⅰ 내 자녀에게 진주에서 살라고 하겠습니까? 썸네일 이미지

Agenda 24 진주시민 설문 특별기획 Ⅰ 내 자녀에게 진주에서 살라고 하겠습니까?

  • 2026-10-23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 조회수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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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진주시민 세금으로 총선 준비?

시민 세금으로 총선 준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지방자치단체장의 권한은 거의 ‘묻지마’에 가깝다. 특히 인사권은 차후 정치적 행보를 위해 사용하는 권능의 절대적 무기인 ‘도깨비 방망이’에 비유될 정도이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가히 ‘물불 가리지 않는 불도저’에 비견된다. 왜 이렇게 까지 하는 것일까? 인사에는 권한이 따른다. 하지만 그 권한에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면 인사는 특권이 되고, 특권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의혹은 꼬리를 물게 마련이다. 이 평범한 사실이 민선 지방자치 이후에 ‘인사=특권’이 당연시되고 ‘특권=권력’으로 정착되고 있다. 단체장으로 당선되고 난 후의 권력화된 인사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진주시의 인사권은 시장에게 있다. 공직자를 비롯해 출자출연기관과 ‘어공(어쩌다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진주시민을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의 월급은 시민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시장이 임명했다고 해서 시장 개인을 위해 일해도 되는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진주시가 황진선 전 진주시의원을 정책보좌관으로 임용했다. 지역사회에서는 조규일 시장의 향후 총선 출마를 염두에 둔 사전포석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시민의 세금을 시장 개인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엄연한 원칙부터 다시 꺼내야 하는 현실이 참담할 지경이다. 황진선 전 의원은 지난 10월 12일, 임기 1년의 5급 상당 임기제 정책보좌관으로 임명됐다. 재선 시의원 출신으로 지난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공천을 받지 못한 뒤 탈당했다. 이후, 조규일 시장후보과 함께 무소속 연대에 참여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들었다. 요약해 보면 조규일 시장과 함께 선거를 함께 치른 정치적 동지가 갑자기 시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며 시장을 보좌하게 된 것이다. 이 인사를 단순한 인재 활용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누가 봐도 선거에서 맺은 정치적 관계가 진주시의 유급 직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인사만으로 정치적 의도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특정인의 임용이 곧바로 선거 준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조직의 인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임명의 정당성과 인사의 목적을 시민에게 설명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시민이 궁금한 것은 ‘누구를 임명했느냐’가 아니다. 왜 그사람이어야 했으며 그 인사가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것이다. 인사는 시장의 권한이지만, 그 인사가 시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5급 정책보좌관, 정책을 위한 자리인가 정치적 포석인가 정책보좌관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총선 준비를 지시한 문서나 실제 선거 활동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조규일 시장이 황진선 전의원을 정책보좌관으로 임용한 공적 목적은 밝혀진 바가 없다. 언론을 통해 보도되지도 않았다. 해석해 보면, 일반적으로 진주지역의 언론들이 보도하지 않는 기사는 ‘시청에 불리한 기사’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진주시의 황진선 전의원의 정책보좌관 임명은 ‘진주시에 불리한 기사’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아니면 ‘진주시가 나서서 적극 알리고 싶지 않았거나 알려지면 불편한 일’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중요한 것은 진주시민 대부분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주시는 황진선 전 의원의 정책보좌관 임명에 대해 ‘시민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둬야 한다’고 강변해서는 안된다. 그럴것 같았으면 임용사실을 시민에게 알리고 양해를 구했어야 옳다.더불어 시민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있는 근거를 내놓으면 된다. 정책보좌관으로 임명을 했으면 진주시를 위해 무슨 일을 할 것이라는 정도의 안내 정도는 있어야 마땅하다. 진주시민의 세금을 사용하려면 그 세금의 가치에 걸맞는 인사는 되어야 맞기 때문이다. 진주시민들은 궁금하다 진주시의 어떤 문제가 기존 행정조직으로 해결되지 않아서 막대한 시민 세금을 들이면서까지 정책보좌관을 임명해야 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진주시와 지지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규일 시장은 역대 최고의 시장’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근데 천하의 조시장조차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굳이 전직 시의원을 청책보좌관으로 임명했다는 것인가. 만약 이러한 논리가 맞다면 이번 정책보좌관 임명은 그 자체로 조시장의 정책에 하자가 있다는 꼴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될 것이다. 더불어 황 전 의원의 어떤 전문성이 필요했는지와 임기 1년 동안 목표 달성 과제가 무엇인지도 밝혀야 한다. 재선 시의원이라는 경력이 곧바로 정책보좌관의 적격성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조례를 발의하고 연구회에 참여했다면, 그 활동에서 무엇을 바꾸었고 어떤 성과를 냈는지 제시하면 된다. 단지 정치권에 오래 몸담았다는 사실과 시민의 삶을 개선할 정책 능력은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연 시의회에 몸담았던 시절, 집행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진주시민이 있을지 의문이다. 더구나 시의원은 시민을 대신해 시장과 집행부를 감시하는 자리이다. 시장이 예산을 제대로 쓰는지, 인사가 공정한지, 시정이 시민보다 시장 자신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지 따져야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시장의 보좌관이 됐다면, 과거의 의정활동까지 다시 평가받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을 견제했고, 어떤 잘못을 바로잡았으며, 시민의 편에서 시장에게 얼마나 책임을 물었는지 기록으로 답해야 한다. 감시자의 경력이 시장 곁의 자리로 이어지는 모습을 진주시민들이 ‘적절한 인사’라고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견제의 경험을 정책에 활용하는 인사인지, 정치적 친밀함에 보상하는 인사인지 가르는 것은 직함이 아니라 선발 근거와 실제 업무이다. 고위 퇴직공무원의 재취업도 '제멋대로' 퇴직 고위공직자의 산하기관 재취업도 같은 기준으로 살펴야 한다. 공직 경험이 해당 기관에 필요한 전문성인지, 익숙한 사람에게 자리를 이어주는 관행인지 검증해야 한다. 시장 주변 인사들이 공공의 자리를 차지할수록 선발 과정과 성과에 대한 설명 책임은 더욱 무거워진다. 근데 지금 진주시는 퇴직 공무원의 재취업을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지난 지방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지역사회의 지적을 감안하면 '고위직 퇴직공무원 시대'라는 비아냥도 그냥 듣고 흘려버릴 일이 아니다. 실제로 고위 공직자들은 퇴직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공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퇴직한지 몇 개월되지 않은 고위공직자도 벌써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시장을 보좌하면서 언론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시청과 산하기관을 시장의 정치적 인맥이 순환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시민이 세금을 내는 이유는 시장 주변 사람들의 다음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은 퇴직공무원의 노후를 책임지는 자리가 아니며, 특정 정치인의 미래를 위한 안전판도 아니다. 시민을 위해 성과를 내야 하는 조직이다. 진주시민들은 조규일 시장에게 요구하고 있다. ‘황진선 정책보좌관의 임용 절차와 자격 심사 근거, 구체적인 업무분장과 보수, 임기 중 달성할 과업을 공개하라.’ 황 전 의원 역시 정책보좌관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지 시민 앞에 밝혀야 한다. 시장을 가까이에서 도왔다는 정치적 이력보다, 시민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먼저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설명과 성과가 없다면, 이번 인사는 정책보좌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동지를 챙겼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총선을 앞둔 정치적 기반 다지기라는 의심도 더욱 커질 것이다. 진주시민은 묻고 있다. 황진선 전 시의원을 5급 정책보좌관으로 임명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해당 직책의 업무와 권한은 무엇이며, 임용기준과 절차는 정당했는가.진주시 출자출연기관의 고위직 인사는 어떤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가. 임용 대상자의 전문성과 경력은 해당 기관의 업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기관별 경영 성과와 인사결과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가.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인사들이 진주시의 발전과 시민의 삶에 어떤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시장에게 정치적 의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일이 아니다. 공공의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에게 공공의 기준을 제시하라는 요구이다. 진주시민은 시장의 정치적 인연까지 부양하겠다고 세금을 낸 적이 없다.조규일 시장이 더 큰 정치적 자리를 꿈꾸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사람과 조직의 비용까지 진주시민에게 청구해서는 안된다. 진주시청은 시민의 시청이다. 시장의 다음 선거를 준비하는 사무실이 아니다.

  • 2026-10-23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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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보조금은 안녕하십니까(feat. 시민세금을 시민에게 주지 말라니) 썸네일 이미지

주간평론 여러분의 보조금은 안녕하십니까(feat. 시민세금을 시민에게 주지 말라니)

여러분의 보조금은 안녕하십니까 진주시의 민간단체 보조금 행정의 문제는 ‘예산=표’라는 원칙하에서만 작동하는 태도를 견지한다는데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예산지원’이라는 등식이 이미 오래전부터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시민의 세금으로 민간단체의 공익활동을 지원하면서도, 마치 행정이 민간단체에 혜택을 베푸는 것처럼 여기는 적반하장식 태도 역시 여전하다. 따라서 진주시의 보조금을 지원받는 민간단체의 질문은 진주시에 대한 하극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정당한 비판은 이른바 ‘표가 안된다’는 판단하는 듯하다. 조규일 시정에 있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최근 진주시의 진주향당의 진주역사골든벨 보조금 삭감 과정은 이러한 의심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사례가 되고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의 절정 ‘민간단체 보조금’ 사실 12년의 역사를 가진 진주역사골든벨은 조규일 진주시장에게도 낯선 행사가 아니다. 조 시장은 진주시장 출마를 꿈꾸던 경남도 부지사 시절부터 진주역사골든벨 행사에 참석해 시민들과 만나며 자신의 얼굴을 알렸다. 진주시장 당선 이후에도 해마다 진주역사골든벨에 참석해 시민들에게 진주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왔다. 문제의 발단은 진주향당이 진주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면서 부터였다. 이때부터 조시장은 과거 시민의 앞에서는 자리의 가치는 누렸지만, 단지 시정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시민이 그 자리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예산에 냉혹한 시각을 가지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진주시 문화유산과의 결정을 진주시장의 문제로 확대한다는 지적은 받아들일 수 없다. 진주시장은 진주시 행정의 모든 결정에 대한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진주시 문화유산과의 갑질 OF 갑질 진주향당에 대한 보조금 삭감 통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진주시 문화유산과는 당초 2027년 진주역사골든벨 보조금 3,200만에서 700만 원을 삭감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이 부분은 문화유산과 담당 팀장과의 전화통화 내역에서 확인된다. 이에 진주향당은 문화유산과 담당 팀장에게 삭감 내역과 사유를 구체적으로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세금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민간단체가 사업계획을 조정하기 위해 당연히 확인해야 할 내용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진주문화유산과 담당 팀장으로부터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삭감액이 700만원에서 1,200만원으로 늘어나 있었다. 삭감 내역과 삭감 사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 뒤 하룻밤 사이 삭감액이 무려 500만 원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선후관계만으로 보복성 삭감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보조금의 삭감 내역과 사유를 물은 다음 날 보조금 삭감의 규모가 커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보복성 삭감 이외에는 그 행위를 설명하기 어렵다. 전화를 통해 보조금 삭감 내역과 사유에 대해 입장을 물었다. 문화유산과 담당 팀장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의회 지적사항과 부서 내부 검토 과정을 거쳐 보내드린 것입니다. 넓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그렇게 결정했으니 그런 줄 알라’라는 식 이외에는 달리 해석하기 어려웠다.민간단체 보조금을 주무르는 안하무인격인 진주시 행정의 단면을 보게 된 답장이었다. 최초 통보 이후 어떤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으며, 누가 어떤 기준으로 추가 삭감을 결정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단지 ‘부서 내부 검토’라는 말은 검토가 있었다는 설명만 있을 뿐, 문화유산과의 판단이 정당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시에 비판적인 단체에는 보조금의 잣대가 유독 냉혹하다는 의심은 이런 과정에서 자란다. 민간단체 보조금은 ‘침묵의 대가’ 행정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면 손해를 본다는 경험이 축적될수록 민간단체는 사업의 공익성보다 담당 부서의 심기를 먼저 살피게 된다. 보조금이 시민활동을 북돋우는 재원이 아니라 침묵을 요구하는 장치로 작동하는 것이다. 진주시가 이러한 의심을 부당하다고 여긴다면, 다른 보조사업에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했다는 자료부터 제시하면 된다. 진주향당은 진주시의 보조금 삭감 결정에 대해 이사회를 개최하고 ‘진주시 문화유산과의 보조금 결정을 거부한다’는 공식적인 답변을 했다. 하지만 문화유산과는 거의 한 달이 지난 시점에도 ‘진짜로 사업을 포기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다. 사업 포기’가 아니라 ‘문화유산과의 보조금 결정을 거부한다’라는 사실을 여러번 밝혔는데도 문화유산과장은 지인을 통해 ‘면담’을 요청했고, 담당 팀장은 진주향당까지 찾아와 ‘사업을 포기할 것인가?’를 질문했다. 2027년도 진주역사골든벨 보조금 삭감내역을 살펴보면 진주시 문화유산과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총 700만원의 삭감 내역은 시상금 100만 원, 경품 200만 원, 문제집 제작비 900만 원이다. 삭감 사유는 각각 시의원의 지적, 중복·과다 편성, 온라인 배포 가능이다. 예산의 적정성은 따져야 한다. 하지만 시의원이 지적했다는 사실만으로 삭감 규모의 타당성까지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경품이 과다하다면 적정 규모를, 문제집을 없애려면 교육적 기능을 유지할 대안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정작 문제는 문화유산과가 삭감한 예산 전부가 진주역사골든벨 참가자에게 사용되는 예산이라는 점이다. 임기향 시의원 ‘시민에게 돌아가는 예산을 삭감하라' 문화유산과가 삭감내역과 사유의 출발점은 진주시의회 임기향 시의원의 발언이다. 임기향 시의원은 지난 2025년부터 진주향당의 진주역사골든벨의 시상금에 대해 ‘과다하다’라는 지적을 했다. 2026년 행정사무감사에서는 현안에 대한 질문 하나 없이 시간만 보내다가 마지막에 ‘진주향당 사업’관련 자료요구만 했다. 진주향당에 대한 임기향 시의원의 보복성 의정활동이라고 의심되는 대목이다. 문화유산과 부서 내부 검토 대상으로 중복 과다 편성으로 지적된 경품 예산 200만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참가자 기념품 예산인 180만원과 중복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처럼 ‘참가자에게 너무 퍼준다’라는 저급한 인식이 밑바탕이 된 듯 하다. 과연 그런가? 참가자들은 주최측의 선정도서 3권을 읽고 이외에도 진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한 시간들을 감안한다면 무엇이 과다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골든벨 문제집 제작비 900만원도 삭감했다. 사실 진주역사골든벨은 처음부터 선정도서가 없었다. 하지만 진주시 행정이 참가자들의 공부하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문제집을 만들자고 먼저 제의했다. 근데 진주시 문화유산과가 부서 내부 검토를 통해 결정한 삭감사유를 보면 ‘온라인 배포 가능’이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진주역사골든벨은 행사 당일 정답을 맞히고 상금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제집을 읽으며 몰랐던 진주의 역사를 배우고, 가족과 답을 찾아보며 진주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문제집은 집으로 가져가는 역사책이자 배움의 자료다. 이를 온라인 배포로 대신해도 된다는 문화유산과의 판단에 시민의 학습 방식과 정보 접근성에 대한 검토는 사실상 ‘무지’에 가깝다. 아예 선정도서가 없던 당시의 ‘시민들의 반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결국 삭감은 참가자에게 직접 돌아가는 예산에 집중됐다. 행사의 외형을 남겨두더라도 시민의 배움과 참여에 대한 직접적인 예산을 줄이면 사업의 목적은 훼손된다. 진주향당은 이러한 조건으로 행사를 형식적으로 이어가는 것은 책임 있는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해 시가 제시한 보조금 책정을 거부했고, 2027년 진주역사골든벨을 개최하지 않기로 했다. 진주시의 이번 보조금 삭감은 시민과 함께 동고동락해 온 12년이 넘는 진주역사골든벨의 역사를 단절시켰다.지난 시간동안 진주역사골든벨에 참여했던 진주시민 7,000여 명의 배움과 만남의 시간을 중지시킨 것이다. 2027년 진주역사골든벨을 개최하지 않기로 결정한 주체는 진주향당이다. 단순히 진주시의 예산 삭감에 불만을 품고 행사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시민에게도 오만함을 드러내는 진주시 보조금 행정에 철퇴를 내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이유이다. 시각장애인 이정숙씨의 마지막 도전 마지막 대회인 올해 행사에 참가한 시각장애인 이정숙 씨는 점자로 공부하며 골든벨을 준비했다. 시각장애인의 참여는 단순히 시상금, 경품, 문제집에 대한 욕심이 아니다. 진주의 역사를 배우려는 시민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진주역사골든벨은 시민들에게 천년 진주 역사를 배우는 가교역할을 자임해왔다. 넉넉하지 않은 예산의 대부분을 세금의 주인인 참가자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왜 보조금 삭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진주시는 삭감액을 하루 만에 늘린 검토 과정과 항목별 산출 근거를 공개해야 한다. 진주시의회 임기향 의원도 시민들에게 돌아가는 예산을 ‘과다하다’라고 판단한 이유를 진주시민 앞에서 밝혀야 한다. ‘시의원이 시민에게 돌아가는 예산이 많다’고 지적한다면 시민들 역시 시의원이 받아가는 월급도 ‘과다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민간단체에 대한 보조금은 시장의 돈도, 담당 부서의 돈도 아니다. 시민의 돈이다. 정치인이 얼굴을 알릴 때는 반가웠던 시민의 자리가 질문하고 비판하는 단체의 행사라는 이유로 홀대받아서는 안 된다. 진주향당은 이번 진주시 문화유산과의 보조금 삭감과 관련해 감사원과 국민권익위원회, 경상남도 감사위원회 등에 감사를 의뢰할 예정이다. 진주향당은 진주시에 진주역사골든벨 관련 예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진주에서 부족한 보조금에도 불구하고 희생정신으로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민간단체들을 위해 자진해서 나선것 일 뿐이다. 여러분의 보조금은 안녕하십니까. 이 물음에 민간단체들이 자신의 사업보다 행정의 눈치부터 살펴야 한다면, 진주시 보조금 행정은 이미 안녕하지 못하다.

  • 2026-10-22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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