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r Jinju 자연마을을 찾아서 - 연재를 시작하며
자연마을을 찾아서 -연재를 시작하며 전국적으로 면지(面誌) 발간 붐이 일었다. 아마 2000년 초의 일로 기억한다. 진주에서 처음으로 명석면지가 발간 된 이후 각 읍면에서 면지 발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우연한 기회에 집현면지를 집필하게 되었다. 짧은 글들은 기회가 생길때 마다 쓰곤 했지만 한 지역의 역사를 담은 책을 저술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냥 한 번 해보자하는 마음으로 집현면지 집필에 도전했다.특정 지역의 역사, 문화, 인물 등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거의 2년 가까이 걸린듯 하다. 집현면지편찬위원회가 구성되고 마을 어른들과 함께 집현면 곳곳을 다니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특히 마을마다 구술을 해주신 어른들의 도움이 컸다.집현면의 자연마을 곳곳을 찾아다녔다.특별할게 없이 평범한 마을들과 사람들과의 만남은 당시로서는 꽤나 신선했다.도심에서 허비하는 일상의 시간들과 다른 특별한 만남으로 느낀것 같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루어진 집현면지 편찬작업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동네 어르신들이 함께 한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열고 '집현면지' 출간을 기념했다. 집현면지 집필 이후 , 대평면지, 미천면지, 수곡면지를 집필하는 기회를 가졌다.진주의 면단위 지역의 역사를 집대성한 면지발간은 이후 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면지 집필을 하면서 자연마을을 찾아다니며 적은 글이 면지에 수록된 '자연마을을 찾아서'이다. 글을 적은지 최소 20년의 시간이 지났다.다시 자연마을을 찾아서 20년 전과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오늘에 이르고야 말았다. 진주평론 홈페이지가 만들어지면서 직접 집필한 4개 지역의 면지(집현면, 대편면, 미천면, 수곡면)에 수록된 자연마을에 대한 기록을 게재하기로 했다.물론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발전된 자연마을도 있겠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자연마을을 찾아서를 연재하는 이유는 지금에야 돌아보게 되는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되살리고픈 마음이 더 크다.40대 초반에 적은 글들을 환갑이 지난 지금에야 들여다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도 되리라 생각한다. 부끄러운 글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20년 전 추억을 되새기면서 한 편 한 편 살펴보고 조심스레 올린다. 많은 격려를 부탁드린다.
- 202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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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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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진주평론외전 희망을 기다리며
사람은 본디 가벼운가, 무거운가. 골치 아픈 물음이다. 사실 깃털과 풍선의 경중을 가리는 일이라면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늘 높이 던져 보면 쉽게 해결 될 일이 아닌가. 근데 사람의 일은 좀 다르다.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구해낼 답이 아니기에 그렇다. 늦었지만 지금에야 자문해 본다. 가벼운가, 아니면 무거운가. 깃털 같은 가벼움을 직감한다. 아니, 개울가 댑싸리 사이를 오가는 송사리 같음이 맞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며 먹을 것만 찾았다. 잠시도 가만있질 않았다. 해가 저물도록 움직였다.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말이다. 새삼 곱씹을 필요도 없다. 아침마다 꿈꾸었던 행복의 모양새가 어땠는지 말이다. 권태 탓이다. 어쩌면 쉽게 잊어 먹은 까닭이다. 돌이켜 보건대, 마음에 새긴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가벼움으로 온 몸을 부르르 떨지 않았는가. 진정 무던히도 참고 인내하는 법을 그동안 배우긴 한 건가. 지금에 와서 나 자신의 변덕과 분열을 설명할 길이 없다. 분한 것은, 그 변덕스러운 감정 사이를 어떤 서투른 글로도 서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한 것은 마음의 흩어짐을 끝내 다잡을 수 없었던 초라함이다. 끝내 지키지 못하고 무심히 세상에 내어주지 않았던가. 사실은 꿈 단지가 턱없이 컸음이다. 그랬기에 한꺼번에 담으려 했고, 많은 것을 담으려 했음이다. 담으려 욕심낼 수록 오히려 채워지지 않는 것이 꿈 단지인 것을 정녕 몰랐던 탓이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의 꿈 단지에 공백이나 다름없는 지난 세월의 부끄러움이 가득 차 있음을 본다. 진정 가벼웠음이다. 이제야 땅을 갈고, 이랑을 만들어야 할 마음의 밭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음을 깨닫는다. 내일은 그 밭을 일굴 내 몫의 쟁기 하나쯤은 챙겨두리라. 듬직한 황소 한 마리와 뿌릴 씨앗도 넉넉히 준비할 참이다. 꿈 단지를 이대로 비워둘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애오라지 희망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고,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 맬 여력이 없는 어려운 세상이기에 더더욱 흘러 넘치도록 채우리라. 그토록 가벼웠기에 이토록 텅텅 비어 있지 않는가. 그랬기에 이처럼 절망의 시대를 부여안고 살고 있지 않는가.뒤돌아볼 수 없는 곳에 무언가를 두고 왔다해서, 넋 놓고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 아무리 애를 써도 가질 수 없는 것 한 가지씩 갖고 사는 게 사람의 일이 아니던가. 단지 때로는 희망으로, 때로는 절망으로 다가올 뿐이다. 희망을 기다리며 다시 자문한다. 가벼운가, 무거운가.
- 202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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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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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13.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진주소싸움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진주소싸움 대한민국 최고의 전통을 가진 진주 소싸움은 진주의 기상(氣像)을 닮았다. 진주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고 견디게 한 촉매제가 바로 ‘남강 백사장의 소싸움’이었던 것이다. 진주 발(發) 소싸움 소식이 들려오면 진주 인근에서 몰려든 인파로 남강 백사장은 인산인해가 되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의 싸움소의 긴장감 넘치는 혈투가 벌어지면 수만 군중의 함성은 하늘을 진동시켰다. 백사장을 뒤 덮은 차일과 인파 속에서 진주 양조장 술이 동이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주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진 진주 소싸움은 일제강점기 진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싸인 울분을 토해내는 해방공간이자, ‘일제의 심장을 겨누는 화살(矢)과 같은 존재’였다. 대한민국 지방지의 효시인 경남일보의 주필이던 위암 장지연은 「진양잡영(晉陽雜詠」에서 소싸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가을 풀 우거지고 밭갈이 쉬었기로 목동들은 한가한데, 억센 소 힘이 솟아 그 분기가 산과 같네. 뒤엉킨 뿔싸움 다투어 충돌하니 제(齊)나라 군대가 절묘한 승리로 묵적(墨翟)군을 파하고 돌아오는 듯 하네. 일제는 삼일독립운동과 기생걸인독립운동 이후, 황급히 진주 소싸움을 금지시켰다. 이처럼 진주 소싸움은 조선과 일본의 대리전(代理戰)의 성격을 가졌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놀이였다. 진주 소싸움의 역사 진주 소싸움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민족대백과사전에는 ‘삼국시대 전승 기념 잔치에서 비롯되어 고려 말부터 진주를 중심으로 자생한 고유의 민속놀이’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소싸움의 기원을 백제를 이긴 신라의 전승 기념잔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소를 많이 잡아 먹어 소들을 위령하기 위해 시작되었는 설이 있다. 북한과학원이 발간한 「조선의 민속놀이편」에는 ‘진주 일대에서 줄다리기와 더불어 소싸움은 연중 가장 큰 행사’라 적고 있다. 이처럼 진주 소싸움은 오랜 전승 과정을 통해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구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진주에서 소싸움이 처음 개최된 것은 1884년이다. 당시 소싸움은 진주성 성내(城內)와 성외(城外) 마을간 벌였던 소싸움이 최초의 기록이다. 1909년에는 위암 장지연이 진주 소싸움의 정경을 묘사한 시(詩)를 경남일보에 게재했다. 1913년에는 추석에 진주와 창원에서 투우대회가 개최되었다. 1917년에는 남강 백사장에서 개최된 소싸움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朝鮮)』에 「진주의 투우(鬪牛)」가 소개되었고, 당시 진양군수인 일본인 야마시타(山下正導)가 경성일보 등에 「진주 명물 투우」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특히 야마시타가 기고한 글을 통해 진주 소싸움의 정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야마시타에 의하면, 진주의 소싸움은 남강 강변에서 열린 우시장의 성행으로 자연스럽게 개최되었고 주로 초파일과 백중, 추석 명절의 정례적 행사였다고 한다. 1884년 진주에서 벌어진 소싸움의 경우, 성안마을에 사는 부호인 김선여와 성밖 마을의 호농인 오작지 두 사람이 평소에 우량소를 키우며 서로 과시하는 과정에서 소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을 계기로 마을 대항의 소싸움이 읍치에서 벌이는 성대한 소싸움으로 변모되었는데, 1897년경에는 고을민의 후원으로 우승상금을 마련했고 군수도 상금과 상품을 내걸면서 소싸움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진주 읍치의 성 안과 성 밖 마을들이 벌이는 소싸움이 끝난 다음날 도동면과 진주읍의 승부가 이어졌고, 17일에는 도동면과 금산면의 승부가 펼쳐졌다. 이와같이 19세기 말 진주에서는 마을 단위는 물론 고을 단위의 대동놀이로서 소싸움이 전승되었고 주민들은 싸움소를 자신이 속한 지역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소싸움은 경남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926년에는 진주, 김해, 마산, 통영, 산청 등지에서 투우대회를 개최했으며, 1927년에는 의령, 합천, 하동, 거창에서 투우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투우대회를 개최하는 지역이 증가했다. ‘진주는 투우놀이가 성하여 천의 군중과 함께 으르렁 으르렁 거리는 모습이 일대장관이더라’ 진주 소싸움은 일본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삼일만세운동으로 일제가 진주 소싸움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이후 일제의 축산장려정책으로 1923년 재개된 이후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지역으로 1930년대 까지 전승되었다. 해방 이후, 진주에서는 1949년 추석을 맞아 남강 백사장에서 전국 투우대회를 개최했다. 1961년에 이르러서는 진주에서 투우단체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진주 개천예술제의 외곽행사로 투우대회가 개최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969년 남강댐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 방문 기념 투우대회도 개최되었다. 전국 소싸움대회의 원조인 진주가 소싸움으로 위상을 갖게 된 것은 2006년 전국 최초로 진주전통소싸움경기장을 건설하면서 부터이다. 청도는 이듬해인 2007년에 청도소싸움경기장을 개장했다. 2011년에는 진주에서 ‘토요상설소싸움대회’가 시작되었다. 더불어 매년 10월에 개최되는 진주남강유등축제와 개천예술제 기간에 열리는 ‘진주 전국 민속 소싸움 대회’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의령군이 지난 2023년 채택한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에 관한 보고서」는 소싸움을 문화재로 인정받음으로써 소싸움의 민속문화적 요소들을 발굴하고 복원·전승 체계를 확고히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른바 겜블링 소싸움과의 차별화를 통해 소싸움 대회 및 싸움 소 농가의 자긍심 고취와 지속성을 확보하고 현존하는 전통 농경민속문화의 대표격인 소 싸움을 통해 국민 여가 활동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더불어 문화재 지정에 의한 소싸움의 활성화를 통해 지역 일자리 창출과 경제활성화라는 긍정적인 기대도 명시했다. 현재 소싸움은 진주를 중심으로 의령과 청도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진주 소싸움 우표와 싸움소 은퇴식 ‘진주의 독특한 투우’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면서 기념우표도 발행되었다. 1937년 발행한 「조선도읍대관」 진주읍 편에서 ‘진주 소싸움 우표’ 발행 소식을 전한 것이다. 진주 소싸움을 진주의 독특한 투우로 평가하면서 우편국에서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이 우표에는 진주성 촉석루와 진주 소싸움 장면이 실려있다. 당시 진주 소싸움이 가진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소싸움대회가 마치면 싸움 소의 은퇴식이 열리기도 했다. 은퇴식에서 우주(牛主)와 소가 관객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죽으면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의 시간도 가진다. 2009년에는 의령의 싸움소 ‘범이’가 은퇴식을 가졌고, 다음 해 범이가 죽자, 우주인 하영효씨는 정중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봉분과 비석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당시 ‘범이’의 은퇴식은 mbc뉴스 등 언론매체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은퇴식을 가진 싸움소는 박성권의 ‘깡패’, 진순호씨의 ‘강남스타’가 있다. 진주 소싸움 캐릭터 ‘맹우(猛牛) 진주 소싸움을 상징하는 캐릭터 ‘맹우(猛牛)’가 등장한 것은 진주에서 개최된 전국 민속 소싸움대회 캐릭터로 선정되면서 부터이다. ‘맹우(猛牛)’는 일제강점기에 유명세를 날렸던 진주 전통 소싸움 대회에서 명성을 날린 싸움소의 이름이다. ‘맹우(猛牛)’가 캐릭터로 선정된 것은 소싸움을 하던 도중 뿔이 부러지는 극한 상황을 극복하고 우승을 차지한 전설적인 진주의 싸움소이다. 캐릭터는 맹우의 힘찬 모습과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흰 옷을 입혀 왜침에 항거한 백의민족의 강인함으로 표현했다. 뿔치기·목치기·후려치기, 소싸움 기술 싸움소의 등장은 1970년대 이후 농기구 사용의 일반화로 농사 소의 이용이 줄어들면서 부터이다. 대회에 출전하는 싸움소는 평소 순발력과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 엄청난 체력 운동을 병행했다. 식단도 호박, 인삼에 이어 쓰러진 소도 뻘떡 일으켜 세운다는 낙지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영양 식단이었다. 그리고 싸움소는 싸움 기술을 연마했다. 소싸움 기술로는 일반적으로 치는 기술, 거는 기술, 미는 기술, 복합 기술 등이 있다. 치는 기술은 상대방 싸움소를 들이 받으면서 타격을 주는 기술로 들치기, 머리치기, 뿔치기, 옆치기, 후려치기가 있다. 거는 기술은 뿔을 이용해 상대를 걸어서 누르거나 들어 올리는 기술로 뿔걸이가 있다. 미는 기술은 힘으로 밀어 붙이는 기술로 밀치기, 목치기, 주둥이 뜨기가 있다. 복합 기술은 두 가지 이상의 기술을 연속으로 펼치는 기술이다. 대표적으로 연타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소싸움 기술은 싸움소를 기른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진 지식과 민간에 전해지는 지식이 합쳐진 민속 지식으로 볼 수 있다.이러한 싸움소의 기술을 생생히 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진양호 공원내 상설 소싸움 경기장이다. 특히 소싸움을 중계하는 해설자의 달변은 소싸움의 새로운 묘미와 재미를 알게 해준다. 경기장에서 최고의 스타는 싸움소를 제외하고는 단연 소싸움 해설자이다. 소싸움의 위기, ‘동물학대 논란’ ‘소싸움=동물학대’라는 동물·환경보호단체들의 반대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문화재청(국가유산청)은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보류하고 학술조사를 선행한 후, 추진 여부를 결정키로 한다. 이른바 ‘소싸움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문화재위원들은 이들 단체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세시풍속으로서의 소싸움과 현재 각 지역에서 상설 운영되는 소싸움의 동일시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역사성과 전승 주체, 지역주민들의 참여, 사행성, 동물 학대 등 문제 소지가 있는 부분은 학술조사를 통해 면밀히 따져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세시풍속이었던 ‘소싸움’이 ‘소 힘겨루기’라는 명칭으로 변경된다. 지난 2009년에 창립된 (사)한국민속소싸움협회도 2022년 (사)대한민속소힘겨루기협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전승위기를 기회로 소싸움은 오랜 전승 과정에서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구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지방종합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 등 지역축제와 결합하면서 관광자원화의 길도 열었다. 현재 전국 10개 시·군과 2개의 광역자치단체에서 소싸움 관련 조례를 제정했고, 4개의 시·군에서는 소싸움 전용 경기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싸움 관련 기술과 민속 지식의 전승 등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미룰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싸움이 가진 한민족의 전통적인 민속문화적 요소를 발굴·복원·계승하는 것은 물론 소싸움 지속적인 전승의 문화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더 이상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 등의 소싸움이 문화재로 지정된데 비해 대한민국의 소싸움은 전승 세대 부족 현상과 소싸움을 동물권 침해로 보는 견해 등으로 전승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대로라면 세대를 초월한 한민족의 전통 문화유산인 소싸움은 결국 존폐의 기로에 서고 말 것이다.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은 소싸움대회와 싸움소 농가의 자긍심 고취와 전승 지속성 확보, 국민여가 활동의 다양성 기여, 전통문화유산의 보존과 계승 등 소싸움의 미래를 결정짓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 소싸움의 명운이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소싸움을 동물권 침해로 보는 일부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 소싸움을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좀 더 깊은 숙의가 필요하다. 마권(馬券) 발행 처럼 소싸움에 대한 온라인 배팅 허용 문제 역시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러한 협의의 논란이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뜻이다. 일제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전통의 진주 소싸움이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진주 소싸움의 주인공인 ‘맹우(猛牛)’가 갖고 있는 힘찬 모습과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흰 옷을 입고 왜침에 항거한 진주 사람들의 강인함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진주 소싸움은 일제의 심장을 겨눈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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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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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정수리 찬물 한 바가지
대체 젊다는 것은 무엇이던가. 거짓과 협잡이 난무하는 패악질을 두 눈 치켜 뜨고 맞서 자존을 지켜나가는 일이 아니던가. 더 나아가 기득권에 빌붙는 타락한 시대정신을 비웃고, ‘옳은 것’ 보다는 ‘유리한 것’만 찾아다니는 세상의 부조리를 깨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던가. 주제넘게도 붓 한 자루 꼬나 쥔 시퍼런 청춘이 오래 전, 이 거칠고 거친 세상에 뛰어 들 때는 적어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껏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천년 도시 진주의 속내에 정제돼 있는 진주정신의 살아있음을 말이다. 더불어 노쇠해 가는 육체가 정신의 격무를 견디지 못해 파탄하는 그 날까지 버티리라 다짐했다. 그것이 진주에서 살아 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정작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어설픈 투사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과의 일에서 단지 서로 의견이 조금 다를 뿐인데도 결코 상대방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남의 일은 단점을 들춰내고, 무턱대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그것이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그랬다. 그리고 거기에서 새롭게 맛보는 작은 특권과 기득권은 달콤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단지 껍데기일 뿐 이었다는 사실을 알아 채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거머쥔 작은 특권과 기득권을 지키려고 날마다 저지르는 불평등과 불공평에 눈을 감는 내 안의 거짓된 모습에도 개혁과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읽던 책을 내려 놓는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수리에 찬 물 한 바가지가 쏟아졌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언제부턴가 우리는 내 안의 거짓을 찾기 보다는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데 더 익숙해져 있기에 더욱 그랬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겉으로는 올곧은 정신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자신만의 기득권을 쫓는 타락한 시대정신들이 많으리라. 어쩌면 나 자신도 그 중의 한 명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나와 주변 세계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는 원동력이 되는 ‘정신의 탄력’이란 명제는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그것이 진주정신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혹시라도 한심하고 타락한 시대정신이 천년의 속내를 키워 온 진주정신을 왜곡하고 무참히 짓밟도록 내려 둘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다짐한다. 모래 위엔들 어떠랴. 무엇이든 세워라. 대신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워야 한다. 스치기만 해도 크고 오래 남을 상처가 남을 정도면 더 좋다. 설사 실패해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찾아와도 괜찮다. 그럴수록 다음 기회는 그만큼 재빠르게 오니까 말이다. 수없이 마음을 다잡고, 미리 예단해 미적거리지도, 꼼지락거리지도 말자. ‘말면 말지’ 하는 마음도 접어 두자. 구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고, 구함이 많을수록 번잡스런 것이 세상 이치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것은 단언코 없다.무엇을 세우든, 시작부터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예감한다. 또한 누구도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편안하게 사는 게 어떠냐는 회유도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갖가지 이유가 따라 붙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지부진하다가 슬며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 예측하고 시작했으니 괜찮다. 그 정도야 지금껏 수없이 겪어왔던 일이고 견뎌냈던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단 하나만 믿자. 진실은 다래끼 돋은 눈꼽에도 끼어 있고, 미운 며느리 속옷에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엇이든 세워야 한다. 설사 허황된 꿈에 머물지라도, 이상만 가지고 처절한 현실의 벽을 허물려고 한 맹자의 우활(迂闊)함이라 비판받아도 좋다. 대신 절대 겁내지 말아야 한다. 상처가 남으면 어떠랴. 또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면 어떠랴. 지금 뭔가를 세운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붓 한 자루 꼬나 든 시퍼런 청춘이 세월을 돌고 돌아 다시 세상에 뛰어든다. 딱 봐도 무모하다. 우활하다. 가시밭길이다. 근데 난 괜찮다. 함께 가는 길동무가 있기에 그렇다. 세울 것이다. 끝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그 무엇인가를.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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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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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12. 1889 함안군수 오횡묵의 진주 나들이
1889 함안군수 오횡묵의 진주 나들이함안군총쇄록 조선시대 개항기의 문신·학자로 ‘조선시대 함안의 역사와 마을을 기록한 함안총쇄록(咸安叢瑣錄)’의 저자 함안군수(咸安郡守) 오횡묵(吳宖黙)이 진주(晋州) 나들이를 한 기록이 있다. 함안총쇄록 진주 편을 보면 오횡묵 군수는 1889년 5월 23일 소촌역(召村驛)을 시작으로 말티고개, 촉석루, 향교, 진주성 남문, 대사지, 함옥헌, 동장대 등 진주를 대표하는 공간을 탐방하면서 주요 건물의 위치와 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 시(詩)와 소감을 남겼다. 이는 1890년 이후 진주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오횡묵 군수의 진주 나들이를 토대로 ‘1890년 이후 진주의 모습’을 재구성했다. 참고로 함안군수 오횡묵은 1890년부터 1893년까지 함안군수를 지냈다. 함안총쇄록에 남겨진 진주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고 별도의 해설을 적어 보았다. 오횡묵 군수는 진주에 맨 먼저 도착한 곳은 문산의 소촌역(召村驛)이었다. 10리쯤 이르니 소촌역이 있었는데 호수가 천호(千戶) 쯤이었다. 마을의 모습이 부유해 보이고 사람과 물건이 번성해 보였다. 곧 영남 제일의 역이다.(倒十里有召村驛 可量近千戶 村容殷富 人物繁盛 乃嶠南第一察訪道也) 소촌역은 진주목(晉州牧)이 관장했던 관도(官道)인 소촌도(召村道)의 찰방역(察訪驛)이었다. 더불어 조선시대 41개 역도(驛道) 가운데 소촌역을 비롯한 16개 속역(屬驛)을 관장하던 문산찰방(文山察訪) 관할의 역이었다. 당시 소촌역의 인구수를 알기 어렵다. 다만 ‘찰방(察訪)과 역리(驛吏) 1,714명, 노(奴) 869명, 비(婢) 399명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이 기록으로 인해 소촌역 인근의 호수가 1,000호에 달했고 소촌역 일대가 진주 지역 내에서 상당히 번성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교남제일찰방도(嶠南第一察訪道)에서 교남(嶠南)은 ‘조령(鳥嶺)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경상도’를 말한다. 다음 날, 소촌역을 떠나 나루터에 도착한 오횡묵군수는 인근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새벽에 일어나 알아보니, 뱃사공이 배를 대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평평한 벌판을 바라보니 온갖 곡식이 싱싱했고, 그 앞으로 강이 두르고 있었다. 멀리 수풀이 하늘 속에 떠있었다. 하물며 장마가 막 개이고 아침 해가 비치니 나루의 풍경은 기절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제의 근심과 절망감이 오늘의 상쾌한 심정으로 바뀌었다. 배를 타고 시 한 수 읊었다. 배에서 내려서 7리(里)를 가서 도착한 곳이 마치(馬峙) 즉, 말티고개였다. 이곳에서 진주성에 있던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과 촉석루(矗石樓)를 발견하고는 율시 한 수를 짓는다. 배에서 내려 7리를 가자 마치(馬峙)고개가 있었는데, 소나무가 울창했고 대나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멀리 병영(兵營)이 보였고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회칠을 한 성벽 주위로 백성들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의 집에서 나는 연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가운데 누각 하나가 반공에 우뚝 솟아 있었는데 바로 촉석루(矗石樓)였다. 이에 율시 한 수를 지었다. 오횡묵 군수가 본 병영은 진주성에 있는 경상우도병마절도영(慶尙右道兵馬節度營)을 말하는 듯하다. 경상우병영은 임진왜란 이후인 1603년 마산 합포에서 진주성으로 옮겨왔다. 병영(兵營)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는 병마절도사가 있던 영문(營門)을 말한다.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것은 남강(南江)이다. 주목할 부분은 당시 ‘진주성의 성벽에 회칠(灰漆)을 했다’는 점이다. 회칠은 석회를 칠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 당시 진주성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율시(律詩)는 촉석루가 시제(詩題)였다. 고개를 내려가 얼마 되지 않아 위로 돌 절벽이 있었고, 아래로는 강가에 험한 돌다리 사이로 나 있는 한 줄기 길이 1리 가까이 되었다. 몇 백 미터 되는 곳에 향교(鄕校)가 있었고, 또 몇 걸음 안 가서 사정(射亭)이 있었는데, 몇 그루 오래된 나무가 겹겹이 덮고 있었고, 지세가 평평하였다. 정자 북쪽에 못이 하나 있었는데, 훤출한 연꽃줄기가 빽빽이 솟아 바람을 받고 있었다. 이 곳은 진주 병영 동쪽 성의 아래였다. 말티고개에서 진주성의 병영과 촉석루를 본 뒤, 말티고개를 내려와 마주한 돌 적벽은 ‘뒤벼리’이다. 뒤벼리는 이른바 진주층의 표식지를 대표하는 곳이다. 진주층은 중생대 백악기에 쌓인 일련의 퇴적층군을 말하는 것으로 회색 내지 검은색의 사암과 셰일이 교대로 싸인 지층이 바로 뒤벼리 절벽이다. 뒤벼리 옆에서 발견한 사정(射亭)은 진주 궁도의 산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진주 최고(最古)의 국궁장인 람덕정(覽德亭)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주 최초의 사정은 1879년(고종 16) 이전에는 남강을 사이에 두고 습사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879년에 이르러서야 남강변 동쪽 방수림 첩석환수하(疊石環樹下)에 정(亭)을 세우고 남사정이라 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한 사정은 람덕정인 것으로 보인다. 진주 병영 동쪽 성 아래에 있던 정자(亭子)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찾기 어렵다. 오횡묵 군수의 다음 목적지가 진주성 남문(南門)임을 감안하면 이 곳 부근에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을 따라 몇 발짝 더 가서 도니 성의 남쪽 문인데, 예화문(禮化門)이라고 편액을 걸었다.공북문(控北門)을 돌아 들어가 군방(軍房)에 속한 영주인 김학봉(金鶴奉)에게 머물렀다. 영주인을 불러 그 지역의 산 이름과 문의 이름을 물으며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병영의 주산은 북쪽에 있는 비봉산(飛鳳山)이고, 남쪽은 망진봉(望晉峯)이고, 동쪽은 선학치(仙鶴峙)이고, 서쪽은 청천(菁川) 늪이었다. 진주성의 관문인 남문(南門)은 일제강점기 읍성철거령(1910년)으로 인해 훼철되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당시 남문의 편액이 ‘예화문(禮化門)’이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가치를 지닌다. 『여지도서』에 실려 있는 경상도우병영지지도에는 외성(外城)에 옹성(甕城)이 설치된 곳은 구북문(舊北門), 신북문(新北門), 남문(南門)이었다. 촉석성(矗石城)은 안팎의 주위가 10리쯤 되는데, 성의 북쪽에는 대사지(大寺池)라는 큰 못이 있었다. 못 남쪽에는 망경대(望景臺)가 있고, 동쪽에는 수정봉(水晶峯)이 있었다. 남쪽은 예화문(禮化門), 서쪽은 의정문(義正門), 북쪽은 지제문(智濟門)이라고 했다.옛날에는 북쪽문을 대인문(對仁門)이라 했고, 내북문(內北門)을 공북문(控北門), 내동문(內東門)을 촉석문(矗石門)이라고 했다. 또 안팎의 수문(水門)이 있는데 이는 병영 안에 물을 길어오는 중요한 길이었다. 촉석성은 진주성(晋州城)을 말한다. 북쪽 문을 대인문(對仁門)이라 한 것은, 과거 진주성의 북쪽에 있던 구북문(舊北門)을 말한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도」에는 대인문은 구북문, 지제문은 신북문, 예화문은 남문, 의정문은 서문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수문(水門)으로는 외수문(外水門), 내수문(內水門 ), 암문(暗門)이 있었다. 동쪽에 동장대(東將臺)가 있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대변청(待變廳)이라고 했다. 서쪽에는 서장대(西將臺)가 있고, 그 아래 산성사(山城寺), 호국사(護國寺)가 있었다. 장대(將臺)의 이름은 봉서루(鳳棲樓)라고 했고, 누의 남쪽에 진남루(鎭南樓)가 있었다. 또 더 가니 북장대(北將臺)가 있었다.또 촉석루(矗石樓)가 있는데, 촉석루에는 남장대(南將臺)라고 써 붙였다. 동쪽에 조그마한 집이 있어 지붕이 촉석루와 이어졌는데 함옥헌(涵玉軒)이라고 편액을 붙였다. 동장대는 조선시대 진주성에 설치됐던 4개의 장대(將臺) 중 가장 바깥 쪽에 위치한 동쪽 누각(樓閣)을 말한다. 동장대의 이칭(異稱)은 ‘대변루(待變樓)’로 알고 있지만, 여기서는 ‘대변청(待變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동장대의 위상이 감안된 명칭으로 보인다. 촉석루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동서(東西)로 부속 누각이 있었다. 동각(東閣)으로는 능허당(凌虛堂, 나중에 함옥헌으로 개칭)과 청심헌(淸心軒)이 있었고 서각(西閣)으로는 쌍청당(雙淸堂)과 임경헌(臨景軒, 나중에 관수헌(觀水軒)으로 개칭)이 있었다. 함옥헌(涵玉軒)은 ‘누각이 넓은 강에 흐르는 옥 같은 강물을 담고 있는 듯한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촉석루 부속누각 중 최후까지 존속되다가 일본인에 의해 1906년 훼철되었다. 병영(兵營)의 외삼문(外三門)인 망미루(望美樓) 문 밖에는 기둥 모양의 높은 표석(標石)이 하나 서 있는데, 이 병영은 지형이 가는 배 모양이기 때문에 이 돛대를 세워 둔 것이라 한다. 현 진주성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의 별칭이 망미루(望美樓)이다. 문 밖에 있었던 기둥 모양의 표석(標石)은 현재 없고 ‘하마비(下馬碑)’만 있다. 하마비를 표석으로 표현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병영의 지형이 ‘가는 배 모양’이어서 ‘돛대’를 상징하는 표석을 세웠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내삼문(內三門)인 원수아문(元帥衙門)은 영우병마원문(嶺右兵馬轅門)이라고 편액을 달았다.동헌(東軒)은 운주당(運籌堂)이라고 했는데, 양위합(養威閤), 완대헌(緩帶軒), 은표각(隱豹閣), 한광루(閑曠樓)라고도 했다. 서쪽의 누각은 주변루(籌邊樓)라고 했고, 또 의추각(疑秋閣)이라고 했는데 촉석루(矗石樓)를 마주하여 우뚝하였다. 동쪽에 누각 하나가 있는데, 공진당(拱辰堂) 영하루(暎荷樓)라고 했다. 당(堂)의 바깥 동쪽에 있는 것을 백화당(百和堂)이라고 했는데, 곧 막부(幕府)였고 문의 이름은 예라문(禮羅門)이라고 했다. 경상우도병마절도영(慶尙右道兵馬節度營)의 부속건물 명칭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소장 「진주성도」에 나타난 각 기관의 건물 명칭 표기와 비교해 더 자세하다. 먼저 계명대학교 진주성도에 표기된 ‘삼문(三門)’이 바로 원수아문(元帥衙門)이며, 편액은 영우병마원문(嶺右兵馬轅門)임을 알 수 있다. 동헌의 명칭도 운주당을 비롯해 양위합, 완대헌, 은표각, 한광루 등의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동쪽의 누각은 백화당, 서쪽의 누각은 주변루임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향후 경상우도병마절도영의 복원이 이루어지면 사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으로 보인다. 동쪽에 중영(中營)이 있는데 우후(虞候)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정당(政堂)은 찬주헌(贊籌軒)이라고 했는데, 또 망일헌(望日軒)이라고도 했다. 최근 진주성에 복원된 중영(中營)은 경상우병영 우후(虞候)의 군영이다. 우후는 경상우병영의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의 외관직으로 병마절도사의 참모장이다. 현재 복원된 중영의 편액은 ‘중영(中營)’이다. 하지만 이 기록에 의하면 1890년 당시 중영의 편액은 ‘찬주헌(贊籌軒)’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횡묵 군수는 촉석루 누각에서 진주를 내려다 보며 다음과 같이 소회를 적었다. 촉석루로 향하여 가서 누각 위로 걸어서 올라갔다.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행장(行狀)과 담배는 꾸려 싸도록 했다. 경치를 두루 보니 누각은 성 가에 다달아 있는데, 큰 강이 그 아래로 흘러가고 있었고 장사 배와 고기잡이 배들이 혹은 물에 떠 있기도 하고 혹은 매어 있기도 했다. 뱃노래가 하늘거리고 수풀은 푸른 빛을 띠고 있었고 큰 벌판은 아득했고 여러 산들은 기이하니 정말 영남의 경치 좋은 곳이자, 군사 방어상 중요한 곳이었다. 누각은 수 십간으로 촉석루(矗石樓) 석 자로 편액되어 있었는데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필체가 힘이 있고 굳세었는데 한 글자가 집 한 칸에 다 찰 정도였다. 당시 붓을 놀릴 때를 상상해 보니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던 바에서 훨씬 뛰어났다. 옛날부터 이름난 학사(學士)나 유람객들이 남긴 시(詩)와 기문(記文), 발문(跋文) 등등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눈을 들어 보니 정말 찬란하였고 그 능력을 자랑하고 재주를 드러내고 문채가 돋보이는 것이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한 마디 말을 토하고 솜씨를 한 번 발휘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이 곳은 비록 좋은 문장이 많이 모인 곳이라 해도 과장하는 말이 아니다. 그 가운데 신유한(申維翰)의 시는 중국 사람들에게 칭찬 받았다고 한다. 함안군수 오횡묵은 촉석루에서 남긴 소회를 뒤로 하고, 개양(開陽)과 조사(皂沙)의 주막에 들른 뒤 십수교(十水橋)를 끝으로 ‘진주 나들이’를 마무리했다. 함안총쇄록(咸安叢瑣錄)은 오횡묵이 함안군수로 재직한 1890년부터 1893년까지 각종 업무를 비롯해 부임지의 전반적인 상황을 매일 자세하게 기록한 일기 형식의 글로 내제(內題)는 ‘경상도함안총쇄록(慶尙道咸安叢瑣錄)이다. 이 책은 책머리에 지도를 싣고, 부임 절차와 부임 도중 지나치는 지방에 대해 기록하고 있어 다른 지방의 실태 파악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함안총쇄록에 실려있는 진주 관련 기록은 당시 진주의 자연경관과 읍치 등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록물이다.
- 202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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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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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70
주간평론 화투판 꼬라지
화투판 꼬라지 일제강점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오락거리는 단연 ‘화투’였다. 밤이면 사랑방이나 주막에서 화투판이 벌어졌고, 농한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화투를 즐기기도 했다. 근데 문제는 이 화투판이 심하면 가산탕진에 자식까지 내다 팔게 하는 또 다른 마약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정치판도 선거판도 도긴개긴이다. 화투가 불러온 이같은 망조(亡兆)는 국제통화기금시대를 지나, 경제가 겨우 허리를 펴고 있다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소위 ‘육백’ ‘삥오도시’ ‘섯다’ ‘짓고땡’ ‘아도사키’로 이어졌고, 급기야 한때는 ‘박정희 고스톱’ ‘전두환 고스톱’ 으로 부활해 막가기도 했다. 한때는 그랬다. 화투판 풍경을 보자. ‘현금 박치기’ ‘안면 몰수’ ‘촌수 불문’으로 불리는 화투판은 ‘어머님 죽어요’ ‘아버님 쌌어요’라는 막가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상가의 밤샘 고스톱은 그래도 양반 축에나 꼈지만, 해외 공항 로비에서 신문지를 깔고 서너 명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는 광경은 각종 언론을 도배하기도 했다. 화투판이 정치판과 다를 게 없다는 비아냥 속에서 이른바 ‘화투판의 불문율’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화투판의 불문율에 칠 것 없으면 ‘비풍초똥팔삼’을 버리라는 말이 있다. 점수도 잘 안 나고 광도 아니고 띠도 아닌 애매한 패들을 빗대어 부르는 표현이다. 근데 이러한 패를 요즘 선거판에 비춰보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하나씩 풀어보자. ‘비’는 비리와 각종 의혹에도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일단 ‘모르쇠’로 버티는 사람이다. 사실 결과는 뻔하지만 우선 살고 보자는데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고(go) 스톱(stop) 구분이 잘 안되는 경우이다. ‘풍’은 살랑살랑 바람 부는 대로 이곳저곳 떠돌며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곳만 기웃거리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어른행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네 아이들조차 손가락질하는 줄은 모르는 사람들이다. ‘초’는 초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름인데, 겨우 먹고 사는 민초들의 멱살을 잡고 대장 앞에 무릎을 꿇리는게 도와주는 일인 양 착각하니 불쌍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다. 정치를 종교로 생각하는 부류가 이들이다. ‘똥’은 말 그대로 구린내 나는 자들인데, 각종 특혜 의혹 제기에도 ‘깨끗한 놈 있으면 나와 봐라는 식’으로 제 식구 감싸기는 물론이고 주변의 손가락질에는 깔끔하게 고개 돌려 외면하시는 분들이다. ‘팔’은 겉만 보면 팔팔해 보이는데 속은 팍삭 늙은 분을 말하는데, 내거는 기치는 가히 개혁적으로 보이지만 마무리는 ‘상전 눈치보기’의 대가여서 저래도 되나 싶은 분이다. ‘삼’은 평생을 로터리에 서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손바닥에 침을 뱉어 갈 길 점치는 자이니, 높은 자리에서 배 불리 먹고도 성에 안 차는 사람이다. 앞장서서 내뱉는 해괴한 말주변은 우리를 아연실색케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풍초똥팔삼'은 버려야 한다는 화투판 선각자들의 얘기가 맞는 듯하다. 아끼다가는 ‘피박’ ‘멍박’ ‘설사’로 피칠갑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옛 어르신들은 화투판과 정치판에 빠진 사람을 보고 ‘모기가 피 빨아 먹듯 돈을 빨아 먹는다’고 했다. ‘화투판은 피를 빨아 먹는 게임’이라는 농담과 궤를 같이 한다. 오래된 잡지에 실린 ‘모기’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치판이나 화투판에서도 상통하는 글이다.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 10g도 안되는 너와 더 이상 씨름하고 싶지 않다. 압사한 너의 시체에 경악하거나, 니가 사라진 장롱 위를 노려보며 버티는 것도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너, 돌아가라. 네 친구들인 파리와 바퀴벌레에게도 조심하라고 일러라. 나 오늘 홈키파 사왔다.’
- 2026-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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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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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