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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06 15:11(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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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晋州城), 그 위대한 가치를 찾아서 썸네일 이미지

Archive of 진주 진주성(晋州城), 그 위대한 가치를 찾아서

진주성(晋州城), 그 위대한 가치를 찾아서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천년 진주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진주성(晋州城)의 위대한 가치(價値)를 찾아 나서야 한다. 진주성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앵무새처럼 되짚어 보는 일을 반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진주성의 원형 복원이 진주와 진주성의 미래를 결정짓는 역사적인 과업이라는 시대의식을 갖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진주성이 진주의 미래 100년의 마중물이자, 진주를 이끌어갈 미래세대의 문화유산이라는 점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기성세대의 품위를 보여주는 일임과 동시에 진주의 미래를 걱정하는 참 세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진주성 중영(3D)역사속에 묻힌 진주성에 대한 이름 부여 진주성 관련 축적된 연구와 발굴조사는 진주성 원형 찾기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발굴·복원 노력은 진주성 내성과 외성을 포함해 ‘역사 속에 묻혀진 진주성에 대한 이름 부여’라는 측면에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 진주성에 대한 연구는 매우 광범위하게 진행된 반면, 발굴조사는 진주성 내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선화당 부지조사(국립진주박물관, 1997년), 공북문 조사(경남문화재연구원, 1999년), 촉석루 아래 성벽조사(국립진주박물관, 2000년)가 대표적이다.발굴조사에 이어 진주성 복원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진주성 내 우물지 복원과 공북문 복원(2002년)에 이어 최근에는 진주시가 진주성 내 경상우병영 병마우후의 집무공간인 중영(中營)을 복원했다. 진주성정화사업 이후 촉석문과 공북문 등 문루(門樓) 이외에 건축물로서는 진주성 내에서 최초로 복원된 건물이리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진주성 중영 복원을 계기로 진주성 원형 찾기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진주시가 지난 2020년에 수립한 「진주성 종합정비계획 수립(2020)」 용역 역시 진주성 발굴과 정비라는 시대적 요청에 답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진주성의 역사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진주의 미래 먹거리 마련이라는 실천의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진주성 외성을 찾아 나서다 진주성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진주성의 외성을 직접 찾아 나섰다. 진주시도 진주성 외성 찾기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도심 속에 파묻힌 진주성 외성 찾기는 ‘진주성에 대한 고유한 이름 부여’임과 ‘진주성 원형 찾기’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진주성 외성 찾기는 1910년대 진주시 지적도를 비롯한 기존의 연구성과물을 바탕으로 GPS를 활용한 측량작업으로 진행했다. 이를 통해 대사지 등 진주성 외성의 위치를 특정함과 동시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남문(南門), 동문(東門)과 동장대(東將臺), 북문(北門) 등 외성을 구성하고 있는 성곽 문화자원의 발굴에 중점을 두었다. 진영못으로 불렸던 대사지의 정확한 위치와 진주객사, 진주목관아, 향청 등 진주의 읍치를 구성했던 건물지의 위치 특정 작업도 병행했다. 진주성 외성 찾기뿐 아니라 진주성 내성에서 외성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을 따라 진주성 성곽투어와 진주객사와 진주목관아 등 주변의 역사 문화자원을 활용한 진주성 성곽 투어 등 새로운 도심 여행코스 개발과 같은 역사관광자원화도 염두에 두었다. 실제로 진주성 성곽 투어는 진주성 외성 공간인 본성동, 동성동, 장대동, 중안동 등 원도심과 중앙시장을 살리는 기폭제가 됨과 동시에 성북동·칠암동·중안동에서 추진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과의 연계개발을 통해 진주성을 중심으로 한 경남관광 허브로 부상시킬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진주성 성곽 문화자원을 활용한 성곽 투어는 무궁무진한 관광스토리와 코스개발의 가능성이 높아 진주성이 가진 관광자원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남문 재현(3D)진주성의 관문, 남문(南門) 재현 필요 진주성 외성 찾기 사업을 통해 진주성의 내성과 외성을 포함하는 진주성 관문의 설치 필요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확인했다. 남문(南門)은 진주성의 주 출입문이자, 수많은 사람들과 물자가 드나들었던 곳이다. 이에 남문의 재현은 향후 진주성 원형 찾기와 복원사업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사전 사업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진다. 한국성곽연구소(소장 심광주)의 의견에 따르면진주성 남문의 위치는 현재 성곽이 발견된 진주대첩광장 성벽에서 구 중앙파출소 골목으로 이어지는 중간지점(진주교 끝단)으로 추정된다. 진주시 역시 진주성 남문(南門) 재현에 높은 관심을 갖고 검토 중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남문의 재현에 이어 동장대와 신북문 등 진주성 외성을 구성했던 문루(門樓)의 재현에 진주성 외성 복원의 성패가 달려 있다. 진주성 성곽을 활용한 관광자원화 제안 진주성은 조선시대 고지도에 그 형태가 표기돼 있지만 현재는 내성(內城)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대사지 매립을 시작으로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진주성 외성(外城)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도시화를 위해 성벽을 허문 자리에는 근대식 건물이 들어섰고, 대사지는 외성의 성벽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진주성 외성은 무려 9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땅 속에 묻힌채,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 진주성 외성 찾기를 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진주성 성곽을 활용한 관광자원화였다. 진주성 외성의 주요 시설지에 대한 발굴 조사와 현장 측량을 토대로 진주성 외성임을 인식할 수 있는 표식의 설치에 주목했다. 서울의 한양도성의 경우, 미디어 스마트폴과 안내판 설치 등으로 한양도성의 역사를 전하고 있음에도 주목했다. 진주성 외성 찾기를 종료하면서 발굴조사 결과 진주성을 구성했던 시설지 추정지로 확인되어 미디어 스마트 폴 등의 표식설치가 가능한 곳은 5곳 정도이다. ▲남문(南門) 추정지(진주대첩기념광장~옛 중앙파출소 골목) ▲동장대(東將臺) 추정지(대흥주차장 인근) ▲신북문(新北門) 추정지(기업은행) ▲외성 북벽 추정지(진주우체국 앞 도로) ▲구북문(舊北門) 추정지(진주문화원 앞) 등이다. 미디어 스마트 폴은 진주성 3D, 진주성 종합정보 제공은 물론 시내버스 안내방송 등 다양도로 활용이 가능하다.더불어 진주시민들에게 진주성 외성 찾기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고 진주성 복원과 정비에 대한 필요성을 제고하기 위해 진주성 외성 찾기의 전 과정을 담은 진주성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진주성의 원형 찾기의 필요성과 진주성을 활용한 관광자원 구축방안 등도 담고 있다. 진주성 특화골목 개발 진주성 외성 찾기를 통해 진주성-구도심, 진주성-재래시장을 연결하는 ‘특화골목’의 조성 필요성을 제기했다. 진주성 특화골목은 ‘동장대 특화골목’과 ‘공북문 특화골목’이다.현재 동장대 추정지인 대흥주차장에서 북쪽 방향 200M지점을 지나 대로변 건너편에는 중앙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동장대-중앙시장에 이르는 이 특화골목은 가칭 ‘동장대 특화골목’으로 진주성 외성 탐방 이후 자연스럽게 중앙시장으로 연결함으로써 재래시장 활성화에 기여하는 측면을 강조할 수 있다.공북문 특화골목은 진주시교육지원청 사거리-공북문에 이르는 골목길이다. 진주시교육지원청 사거리 입구에서 진주성 공북문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 골목에는 커피숍 등 다양한 상점이 즐비해 있는 것은 물론 진주성과 연결되는 구도심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진주 최초로 ‘진주성 3D’ 제작 진주 최초로 진주성 3D 영상을 제작했다.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도(晋州城圖) 원본을 토대로 최대한 조선시대 진주성을 구현하고자 했다. 진주성 3D에는 현전하고 있는 건축물인 촉석루, 의기사, 촉석문, 서장대, 의기사, 공북문, 중영 등을 3D 작업을 통해 구현했다. 이와함께 진주 내성의 선화당과 남문, 신북문, 대사지 등도 3D로 구현해 옛 모습을 볼 수 있게 했다.진주성 3D는 현재 완성도 측면에서는 낮은 단계에 있으나 진주지역 최초로 구현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둘 수 있으며, 향후 지속적인 보완작업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 나갈 예정이다.더불어 진주성 3D를 활용해 초·중·고교 교육자료로 활용하는 한편 진주지역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홍보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진주성 외성 복원 프로젝트 수립하자 진주성은 경상남도의 역사적 전통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경남도의 수부도시라는 상징성을 회복하는 길은 진주성의 복원이 될 것이다. 경남을 찾은 외국인들이 가장 인상깊은 곳으로 ‘진주성’을 꼽았다.(2008년 경상남도 관광실태조사) 외국인은 진주성을 경남의 상징물, 즉 랜드마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진주성 복원(외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회의론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한 진주성 복원은 요원하다. 일본의 오사카성(大阪城)의 천수각과 구마모토(熊本城)의 복원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오사카성 천수각은 1665년 소실 이후, 266년이 흐른 1931년에 복원이 되었다. 성채가 견고하기로 유명한 구마모토성도 1877년 소실된 이후, 83년이 지난 1960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도 진행중이다. 일제강점기 부터 그 모습을 잃기 시작한 진주성 외성의 복원 프로젝트를 수립해야 한다. 이는 진주를 벗어나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업이 될 것이다.

  • 2026-11-06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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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은 비벼야 맛이지만, 예산 심사까지 비벼서야 썸네일 이미지

주간평론 비빔밥은 비벼야 맛이지만, 예산 심사까지 비벼서야

비빔밥은 비벼야 맛이지만, 예산 심사까지 비벼서야 진주시가 이틀짜리 비빔밥 축제를 열겠다며 2억 5천만 원을 급하게 추경에 올렸다. 소관 상임위원회인 진주시의회 기획문화위원회는 전액을 삼각했다. 그런데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이 예산이 부활했다.기획문화위원회는 왜 진주비빔밥 페스타 예산을 전액 삭감했을까? 지난 9월 1일 회의록을 보면, 의원들이 무엇을 문제 삼았는지 나온다. 첫째, 왜 시급하지도 않은 행사성 축제를 추경예산에 올린 이유를 질의했다.전종현 의원은 진주의 대표 음식을 알리고 관광객을 끌어오는 취지에는 공감했다. 그러면서도 처음 하는 축제를 지금 추경에 편성할 만큼 시급한지 물었다. 진주비빔밥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설명만으로는 올해 당장 2억 5천만 원을 써야 하는 이유까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불과 이틀에 2억 5천만 원이라는 시민 세금을 쓸 만큼 계획이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했다.전종현 의원은 적지 않은 금액임을 전제하고 담당 부서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물었다. 강묘영 위원장도 경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틀간 열리는 새 행사에 2억 5천만 원을 쓰는 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지적했다. 셋째, 진주 비빔밥 페스타 행사를 기획문화위원회에 미리 설명조차 하지 않은 것은 시의회를 무시하는 처사라는 요지의 질책을 했다.전종현 의원이 상임위에 업무보고를 했느내고 물었고, 강 위원장 역시 “안 했죠”라고 재차 확인했다.이에 전종현 의원은 기획안을 제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관광진흥과장은 그 자리에서 1,592인분 비빔밥 나눔과 체험행사, 스탬프 투어 구상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료를 미처 제공하지 못했다며 추후 제출하겠다고 했다. 이게 기획문화위원회 예산심사에서 나온 이야기이다.종합해보면 시급하지도 않은 행사성 축제인데 왜 굳이 추경예산에 상정을 했는가. 고작 이틀 행사에 2억 5천만 원이라는 엄청난 예산이 필요한가. 그 판단에 필요한 자료는 왜 미리 주지 않았나. 시민 세금을 심사하는 의원이라면 당연히 물어야 할 질문이었다. 이 때문에 기획문화위원회는 집행부가 올린 진주 비빔밥 페스타 예산 2억 5천만원을 전액 삭감조치했다. 그런데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예산이 부활했다. 당초 2억 5천만원에서 5천만원이 삭감된 2억원으로 통과된 것이다.상임위에서 예산을 전액 삭감한 의원이 예결위에서 다시 통과시켰다는 전언도 있다. 상임위에서 예산이 전액 삭감되자, 시 공무원이 예결특위를 방문해 예산을 살려 달라고 읍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예결특위에 묻는다. 기획문화위원회에서 집행부에 던진 세 가지 질문에 집행부가 무슨 답을 내놨는가?진주 비빔밥 페스타를 올해 꼭 열어야 할 사정이 새로 확인됐는가?집행부가 행사비 2억 5천만 원에 대한 산출 근거를 제출했는가? 상임위가 집행부에 요구한 기획안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고, 그중 무엇이 예결특위의 판단을 바꿨는가? 만약 예결특위가 진주비빔밥 페스타 예산 부활과 관련해 정회 중에 논의했다면, 회의를 다시 열었을 때라도 설명했어야 한다. 기획문화위원회가 어떤 문제를 제기했고, 예결특위는 무슨 자료를 보고 다르게 판단했는지 시민이 알 수 있어야 한다. 진주시는 2027년도에 진주비빔밥 페스타 예산 5억원을 올릴 계획이라고 밝혔다.그렇다면 내년에 추진해도 되는 시급하지도 않은 사업을 굳이 추경에 올린 진주시의 의도가 이해되는 시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진주시에도 묻는다. 진주비빔밥 페스타는 원도심과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마련한 행사라고 했다.근데 비빔밥을 몇 그릇 나누는 행사와 몇가지 이벤트로진짜로 원도심과 전통시장을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인가 의심스럽다.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가? 이제 진주비빔밥 페스타 예산 2억원을 왜 살렸는지, 올해부터 상설화된 예결특위가 답할 차례이다. 비빔밥은 비벼야 맛이지만 예산 심사 까지 비벼서야. 쯧쯧쯧

  • 2026-11-04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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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OF 진주2) 16. 1966년 화마(火魔)가 중앙시장을 삼키다 썸네일 이미지

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16. 1966년 화마(火魔)가 중앙시장을 삼키다

진주에는 ‘날三子’라는 말이 있다. 진주에서 돈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은 3대 째가 되면 진주를 떠나야 한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는 시장교역(市場交易)의 이동성(移動性)을 의미한다. 더불어 객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와 함께 치부(致富)한 재산은 자손들이 관리하기 어렵다는 뜻도 갖고 있다. 더불어 1862년 진주농민항쟁운동과 형평운동, 경남도청 이전 당시 촉석루와 배다리를 가득 메워 진주의 정신을 보여준 이들도 바로 진주의 상인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진주의 시장역사(市場歷史)는 진주시민이 새로운 문물을 교환하고 개척하는 역사(交換開拓史)이면서 민권운동의 중심 세력사(勢力史)이자, 진주의 모든 행사의 전위사(前衛史)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로부터 인구가 모이고 농업이 풍성하며 교통의 중심지인 진주에 자연스럽게 저자(市場)가 생겨난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시장에 구름 같이 사람이 모여 들면서 진주는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 발전해 나갔다. 이후 ‘진주장(晋州場)’으로 불렸던 중앙시장은 경남 경제의 총본산이었던 진주상무사의 중심 교역장으로 발전했다. 더불어 중앙시장을 비롯한 진주지역의 시장(市場)은 진주 경제의 뿌리인 시장경제(市場經濟)의 출발점임과 동시에 진주 서민들의 경제생활을 주도하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성내시장(城內市場)과 북문통시장 진주에는 사전(四廛)이 있었다. 진주에는 장터가 두 군데 있었는데 첫 번째 시장이 관아(官衙)의 감독을 받았던 성내시장(城內市場)이다. 당시 성내시장은 옛 세무서 앞에서 제일극장까지였다. 지금의 공북문 앞에서 촉석문까지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민간 시장의 형태로 농산물을 교역했던 농산물 장터인 북문통 시장이다. 옛 경찰서 자리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점포 형식이 아닌 노점이었다.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시전의 특권이 완전히 폐지되고 상인들의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진주장(晋州場)은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자본이 상륙하면서 시장은 그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당시 성내 시장은 현재의 진주경찰서 서쪽에서 한동안 성시를 이루었으나 끝내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일본인과 일본 자본이 대안동과 동성동 일대를 사실상 점거하면서 시장의 확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성내시장과 성외시장은 통합을 이루게 되고 명칭도 진주시장진흥회(晋州市場繁榮會)로 바뀌면서 조국의 해방을 맞게 된다. 이것이 근대 진주 시장의 시작이다. 옛날 중앙시장 거리들 사단법인 진주중앙시장번영회가 지난 1982년 발간한 『진주중앙시장 백년사(1982. 금호인쇄)』를 보면 일제강점기 당시의 시장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진주시장의 과도기는 1910년 일제의 강제 한일합방에서 3·1운동 이후, 1930년까지이다. 당시 성내장터는 이미 폐철된지 오래였고, 지금 장터는 진주의 대사지 건너 북문과 남문의 동북쪽에 있었던 정식 공설시장이 번창했다. 시장 서쪽에는 북문통(北門通)이라는 신작로개 개설되었고, 시장 쪽으로 경찰서, 의용소방대가 있었으며, 서쪽 편에 금융조합, 상업은행, 남쪽에 식산은행이 있었다. 당시 중앙시장의 의령길(시장 중앙) 남쪽에 ‘보리전’과 ‘쌀전’이 있었다. 길 양편에는 ‘잡화전(雜貨廛)’와 ‘포목전(布木廛)’, ‘고무신전’이 있었다. 북쪽으로는 ‘비단전’과 ‘야채전’, 그리고 장새미골목쪽으로는 ‘나무전’이 있었다. 고정점포는 객주업자가 제일 처음 지었고, 병자년(1936) 물난리 이후에는 고정된 현대식 점포가 들어섰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앙시장은 그야말로 폐허가 된다. 포탄에 산산조각난 시장의 모습은 아비규환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중앙시장 상인들은 그 폐허를 딛고 일어선다. 그리고 중앙시장이 제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최대의 시련과 마주친다. 바로 1966년 중앙시장의 대화재이다. 중앙시장 화재 현장(1966년)진주중앙시장을 삼키다, 1966년 대화재 사단법인 진주중앙시장번영회는 지난 1982년 『진주중앙시장 백년사(1982. 금호인쇄)』를 발간했다. 당시 안승균 진주중앙시장번영회장은 발간사에서 ‘고종 21년(1884) 1월에 결성된 진주상무사(晋州商務社)의 사전청금록을 근거로 백년사라는 표제를 붙였다. 경남 경제의 총본산으로서 진주장은 그 중심 교역장이었으나 그 밖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중앙시장 백년사’에는 중앙시장 관계자들의 증언과 1966년 중앙시장을 덮쳤던 대화마(大火魔)에 대한 기록과 생생한 사진이 실려 있어 중앙시장에 대한 기록물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중앙시장이 불길에 휩싸인 것은 1966년 2월 6일 오후 10시이다. 화마가 덮친 중앙시장은 다음 날인 2월 7일 아침 나절이 되기도 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성한 점포가 거의 없었다. 상인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렇게 중앙시장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것을 잃었다.중앙시장 대화재 이튿날인 2월 7일 진주시내 기관장과 상공인, 금융관계인, 유지들로 구성된 ‘화재대책위원회’가 긴급소집되었다. 중앙시장 대화재 수습방안 등이 논의되었다.중앙시장 대화재 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1966년 2월 8일 중앙조사반이 화재현장을 방문했다. 진주중앙시장회의실에서 중앙조사반에게 화재복구 계획을 설명한데 이어 정부의 도움을 요청했다. 상인은 물론 진주시민들의 성금답지가 이어졌고 중앙시장은 신속하게 복구되었다. 화재 후 불과 3개월 여만인 1966년 5월 수정동과 대안동 일대의 가설시장이 문을 열었다. 중앙시장 복구공사 기공식은 1966년 5월 20일이다. 당시 기공식에는 하병렬 회장과 진주지역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중앙시장 복구공사는 7개월만인 1966년 12월 15일 완공되었다. 당시 중앙시장 화재로 피해를 입은 옥봉북동 이재민을 위한 주택 52동도 신축되어 제공되었다. 이후 중앙시장은 여러차례의 변화를 꾀하면서 오늘날 진주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중앙시장을 비롯한 진주의 재래시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정부차원의 재래시장 활성화 정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재래시장 활성화는 요원한 실정이다. 중앙시장 백년사에 ‘진주시장사 서설’을 쓴 이명길 전 한국예총 진주지부장의 글 가운데 중앙시장과 관련한 일화가 적혀 있다. 사실 처음 이름과 이야기라 묻기도 하고 자료를 찾아 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다. 기인(奇人) 설대장사 박돌(朴乭)과 三수, 상인후견인 이무엽(李武燁), 진주시(晋州式) 놀음선수인 서울 덕수(德洙), 글 잘 쓰는 문술(文述)과 두 덕수(德洙), 설치기 조득제(趙得濟) 일화를 잘 아시는 분의 친절한 설명을 기대한다.

  • 2026-11-02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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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선 의원 '진주 8경 재정비 속도보다 방향입니다'  썸네일 이미지

이슈&이슈 강길선 의원 '진주 8경 재정비 속도보다 방향입니다'

진주시가 추진중인 진주 8경 재정비사업에 제동을 거는 시의회 지적이 제기됐다. 진주시의회 강길선의원은 진주시의회 제277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 5분발언을 통해 ‘진주의 정체성을 지키는 진주 8경 재정비 속도보다 방향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강길선의원의 5분발언 내용이다. 진주시가 추진 중인 ‘진주 8경 재정비 사업’의 취지에 함께 공감하면서도, 진주의 백년대계를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정책적 제언을 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변화하는 관광 환경에 발맞추어 지역의 새로운 매력을 발굴하고 홍보하려는 집행부의 고민과 노력은 잘 알고 있습니다. 행정의 이러한 선제적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그러나 정책의 의도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진주라는 도시가 가진 고유의 정체성과 가치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8경(八景)’은 단순한 관광 목록이 아닙니다.수백 년의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진주의 영혼이자, 변하지 않는 역사와 자연 경관을 담아낸 ‘도시의 얼굴’입니다.현재 진행 중인 재정비 후보군을 살펴보면, 세월이 검증한 자연·역사 경관과 최근 시가 조성한 현대식 공공시설 및 체험 공간이 하나의 후보군으로 함께 묶여 있습니다. 자연과 역사가 숨 쉬는 ‘풍경(景)’과, 행정이 조성하여 사람이 찾아가는 ‘장소(所)’는 엄연히 그 성격과 가치가 다릅니다.이 둘을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은, 자칫 8경 고유의 희소성과 상징성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1차 예비조사의 검증 기준이 충분히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호도 조사 중심의 2차 조사가 서둘러 진행된다면, 결과에 대한 시민적 수긍도를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정당성이 부족한 8경은 도시의 자랑이 되기 어렵습니다. 시장님과, 집행부 관계공무원,시민여러분! 본 의원의 제언은 행정의 발목을 잡으려는 것이 아닙니다.‘진주의 품격’을 함께 지켜내자는 대승적 당부입니다. 이에 집행부에 세 가지 발전적 대안을 강력히 제안합니다. 첫째, 진행 중인 2차 조사를 잠시 정지하고, 후보 도출 기준과 용역 검토 결과를 시민과 의회에 투명하게 먼저 공유해 주십시오.충분한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 행정의 신뢰를 높이는 길입니다. 둘째, ‘진주 8경(景)’과 ‘진주 8명소(名所)’로 개념을 명확히 분리하여 재정비해 주십시오.변하지 않는 역사와 자연의 절경은 ‘진주 8경’으로 보존하고, 시가 새로 구축한 우수한 관광·체험 인프라는 ‘진주 8명소’로 구분하여 홍보할 때,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며 훨씬 강력한 관광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셋째, 향후 관광자원 재정비가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관련 기준을 제도화하고 의회와의 소통을 강화해 주십시오.‘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입니다. 지금 잠시 멈추어 기준을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단순한 순위가 아니라 ‘진주의 정체성’일 것입니다.진주 8경 재정비가 필요하다면 해야한다. 단, 행정이 시민의 뜻을 무시하고 시민의 대표인 시의원의 의견마저 고민하지 않는다면 과연 진주시는 누구를 위한 행정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주 8경 재정비는 진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준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더불어 진주시는 강길선 의원의 5분발언에 대해 입장을 내놓아야 한다.

  • 2026-10-26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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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of 진주 진주 축구 100년 스토리, 4257에서 K4우승까지

진주 축구 100년 스토리, 4257에서 K4 우승까지 민족의 시간을 새긴 청년 축구단 4257축구단시민의 이름으로 들어 올린 진주시민축구단의 K4 우승 진주시민축구단이 K4 리그 첫 우승을 확정했다. 지난 2019년 12월 창단한 이후 무려 일곱 해 만에 거둔 결실이다. 그동안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흘린 땀과 지도자의 노력, 구단 관계자와 시민들의 응원이 함께 만든 성취이다. 오는 11월 8일 진주종합경기장에서 열리는 마지막 홈경기 뒤에는 시민들 앞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릴 예정이다. 간만에 기쁜 소식이다. 이번 진주시민축구단의 K4 우승은 진주 축구의 오래된 기억을 돌아보게 한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기년법을 이름에 담았던 4257단, 전국대회에서 이름을 떨친 학교 축구, 올림픽과 월드컵으로 향한 선수들, 생활체육 현장을 지켜온 시민들. 우승컵 뒤에는 그렇게 쌓인 진주 축구 100년의 역사가 있다. 네 자리 숫자에 담은 민족의 시간 진주의 청년 축구인인 강수영, 정수만, 서종숙, 박학조 등 진주의 청년 축구인이 1924년 ‘4257축구단’을 결성했다. 축구단에 사용된 숫자는 그 해의 단기 연도인 4257년을 의미했다. 단기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원으로 삼는 기년법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활동하던 청년들이 팀 이름에 우리 역사의 시간을 새긴 것이다. 일제강점기 진주에서 활동을 시작한 4257단은 이름 때문에 탄압받았다. 일제는 4257이라는 팀명의 의미를 알아차린 뒤 책임자를 구금하고 강제로 해산시켰다. 순수하게 축구가 좋아 모인 진주 청년들에게 일제는 팀 이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4257축구단의 역사가 진주 축구사에 남긴 의미는 적지 않다. 먼저 축구단의 이름에 민족의 역사를 담았다는 점이다.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우리 역사의 시간을 팀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역사적 의미는 진주 축구와 청년운동이 연결되는 지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축구를 매개로 모인 청년들이 지역사회의 문제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더불어 진주 축구의 주체가 오래전부터 진주의 청년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진주 축구사를 더 깊게 기록하는 출발점이 됨과 동시의 진주축구의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계기가 된다는 측면에서 4257축구단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내려져야 한다. 우정환, 진주의 운동장에서 런던올림픽으로 일제강점기 진주의 축구는 학교 운동장에서도 성장했다. 동아일보 1936년 8월 1일자 보도를 보면 진주공립농업학교가 제8회 전조선중등학교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신문 기록은 진주 학생들이 전국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동아일보 기사(1936년 8월 1일자) 이 시기의 진주 축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우정환이다. 1914년 진주에서 태어난 우정환은 진주공립농업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공격수로 이름을 알렸다. 지역에서 성장한 그의 축구 인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를 가로지른다. 진주 축구가 전국무대에서 쌓아온 역량을 한국 대표팀으로 이어준 인물이었다. 우정환은 1948년 런던올림픽 최초로 한국 축구 국가대표로 출전해 ‘축구 국가 대표 최초의 올림픽 득점’과 ‘최초의 올림픽 8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는데 주축 역할을 했다. 진주는 진주공설운동장 3번 출구 인근에 우정환을 추모하는 비를 세웠다. 우정환을 추모하는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번개처럼 날쌘 철각과 무적의 드리블에다 총알 쏘는 듯한 슈팅의 위력으로 한국 축구 여명기의 갈색 포탄 같은 골로 기여했고, 오늘 세계 프로축구의 어디에 내세워도 뛰어난 별일 것임을 세상이 애석할 바다’ 진주 축구의 산증인 우정환선수 그의 별명은 ‘오토바이’였다. 빠르게 그라운드를 누볐던 공격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키 178cm, 몸무게 75kg의 뛰어난 신체조건에 100m를 무려 10초 9로 주파하는 스피드를 자랑했다. 학창시절엔 모교를 우승으로 이끈 우승제조기였다. 각종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어 우승기가 남대문 이북으로 넘어간 적이 없다며 격찬하기도 했다. 진주가 축구의 고장으로 명성을 떨치는 그 중심에 우정환이 있었던 것이다. 우정환은 지역 축구인들과 함께 뛰며 진주 축구의 명성을 쌓았다. 진주시체육회가 소개하는 1940년 밀양 개최 전국축구대회 우승 기념사진에는 우정환과 권창세, 김용하, 신기순, 조하구, 이강열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한 사람의 뛰어난 재능 곁에는 함께 달리고 승리를 일군 동료들이 있었다. 전국축구대회 우승 기념(1940년) 그의 축구 인생에서 중요한 장면은 1948년 런던올림픽이었다. 우정환은 한국 축구의 첫 올림픽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대표팀에는 김용식, 정남식, 정국진, 홍덕영 등 한국 축구 초창기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함께했다.대표팀은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5대 3으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이어 스웨덴에 크게 패하며 세계 축구와의 격차를 경험했지만, 첫 올림픽에서 거둔 승리는 한국 축구사의 소중한 출발로 남았다. 진주에서 성장한 우정환도 그 도전의 일원이었다. 우정환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진주에서 공을 차던 청년이 세계무대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지역의 운동장과 올림픽 경기장이 한 선수의 삶을 통해 연결됐다. 우정환은 진주 축구가 한국 축구의 초기 역사에 남긴 중요한 이름이다. 조광래, 한국 축구의 중원을 설계한 ‘컴퓨터 링커’ 우정환이 한국 축구의 첫 올림픽 여정에 함께했다면, 다음 세대의 조광래는 월드컵 무대에서 진주 축구의 이름을 알렸다. 1954년 진주에서 태어난 조광래는 봉래초등학교와 진주중학교, 진주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로 진학했다. 진주의 학교에서 성장해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 잡은 인물이다. 조광래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다. 당시 축구명문이었던 진주중-진주고 진학으로 충분하게 입증됐지만, 경기장에서도 영리하기로 따지면 단연 으뜸이었다. ‘컴퓨터 링커’라는 현역시절 애칭도 그만의 탁월한 두뇌 플레이의 소산물이다. 링커는 공격과 수비를 연결하며 경기를 풀어가는 선수를 가리킨다. 조광래는 정확한 패스와 영리한 경기 운영으로 이름을 얻었다. 공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느 순간 공격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그의 강점이었다. 한 언론에서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조광래 축구는 굉장한 마력을 지녔다. 그의 품을 거치는 선수는 차원을 달리하고, 그의 손을 거치는 팀은 뚜렷한 색채를 띤다. 그야말로 소리없이 강한 진정한 축구의 달인이 아닌가 싶다.’ 조광래는 1970∼1980년대 한국 축구의 주요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1978년과 1986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힘을 보탰으며,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도 출전했다. 한국이 1954년 스위스대회 이후 32년 만에 돌아간 월드컵 본선에 진주 출신 조광래가 있었다.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에도 그의 축구는 이어졌다. 프로팀 지도자로 나선 조광래는 2000년 안양 LG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영표와 이청용 등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도 관여하며 유망주를 발굴하고 기르는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경남FC를 이끌던 시절에도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선수들의 기술과 판단을 살리는 경기 운영은 현역 시절 자신의 축구와도 맞닿아 있었다. 2010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진주의 운동장에서 시작한 축구 인생이 국가대표 선수에 이어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 확장된 것이다. 우정환과 조광래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력에는 공통점이 있다. 진주에서 자란 축구 재능이 전국무대를 거쳐 세계무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의 기록은 진주 축구의 자부심을 구체적인 역사로 보여준다. 서서히 드러나는 진주 축구의 저력 진주 축구의 계보는 두 사람에게서 멈추지 않았다. 우정환, 조광래, 최진한, 김판곤, 남태희, 김민우. 여러 세대에 걸친 진주 출신 축구인들이 선수와 지도자로 한국 축구에 이름을 남겼다. 진주중학교와 진주고등학교를 거친 최진한은 국가대표와 프로선수로 활약한 뒤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김판곤도 선수 생활에 이어 국내외 축구 현장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다. 경기장에서 쌓은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하며 진주 축구인의 활동 범위를 넓혔다.후배 세대의 남태희와 김민우도 국가대표로 성장했다. 남태희는 봉래초등학교에서 축구의 기본기를 익혔다. 대표팀 경기를 마친 뒤 고향의 모교를 찾아 스승과 후배들을 만난 일은, 세계무대에서 뛰는 선수에게도 어린 시절 운동장의 기억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민우 역시 봉래초등학교에서 어린 시절 공을 찼다. 진주 축구를 기록할 때는 출생지와 성장한 학교를 구분하면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주에서 태어난 선수뿐 아니라 이곳에서 배우고 성장한 선수들도 지역 축구사의 중요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봉래초등학교에서 성장한 백지훈과 정종선, 진주고등학교를 거친 윤일록도 그 명단에 들어간다. 이들의 이름은 진주가 축구인의 고향이면서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의 터전이었음을 말해준다. 특정 시기에 뛰어난 선수 한 명이 등장한 도시와 여러 세대에 걸쳐 축구 인재를 길러낸 도시의 역사는 다르다. 진주에서는 선배가 떠난 운동장에 후배가 들어섰고, 그 후배를 보며 또 다른 아이가 꿈을 키웠다. 그렇게 이어진 이름들이 진주 축구의 저력이다. 스타의 뒤에는 진주시민이 있었다 선수들의 성취를 가능하게 한 것은 지역의 축구 문화였다. 아이들에게 공 차는 법을 가르친 지도자, 훈련과 경기를 뒷바라지한 가족, 학교 축구를 후원한 동문, 새벽과 주말의 운동장을 지킨 동호인들이 그 바탕을 이뤘다. 권창세의 이야기는 그 문화를 보여준다. 우정환과 함께 뛰었던 그는 회갑 비용을 아껴 우승컵을 만들고, 1975년 권창세배축구대회를 창설했다고 전해진다. 개인의 기념일에 쓸 비용을 지역 축구인들이 함께 뛰는 대회로 돌려준 것이다. 권창세(진주시체육회 초대회장)진주 축구사는 국가대표와 유명 선수들의 기록에 더해 운동장을 지켜온 사람들의 역사까지 담아야 한다. 학교 축구는 선수를 길렀고, 생활축구는 직접 뛰고 응원하는 시민들의 기반을 넓혔다. 그 두 흐름 속에서 축구는 진주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진주시민의 이름으로 들어 올린 우승컵 2019년 12월 23일 진주시민축구단이 창단했다. 이듬해부터 4부리그에 참가한 구단은 지역을 대표하는 성인팀으로 도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2026년, 창단 7년 만에 K4리그 첫 우승을 확정했다. 4257단과 진주시민축구단은 조직적으로 이어지는 같은 구단은 아니다. 그러나 두 팀을 진주 축구사라는 긴 시간 위에 놓으면 각 시대의 사람들이 축구에 담았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1924년의 청년들은 팀 이름에 민족의 시간을 새겼다. 오늘의 선수들은 진주의 이름을 달고 뛰며 시민들과 우승의 기쁨을 나눈다. 그 사이에는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학생들, 올림픽과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 다음 세대를 가르친 지도자들, 생활축구를 이어온 시민들이 있었다. 이번 우승을 오래 기억하려면 우승컵과 함께 그 시간도 기록해야 한다. 흩어진 사진과 대회 자료를 모으고, 원로 축구인들의 증언을 남기며, 학교와 동호회가 간직한 이야기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 우정환이 뛰던 시절의 기억과 조광래를 길러낸 운동장의 이야기는 다음 세대가 물려받아야 할 진주의 역사다. 진주 축구의 백 년은 이름을 지키려 했던 청년들과 더 넓은 무대에 도전한 선수들, 그리고 공을 놓지 않았던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왔다. 그래서 2026년 진주시민축구단의 첫 우승은 진주의 축구 역사에 새롭게 더해진 빛나는 한 장이다. 진주시민축구단의 K3도전에 힘찬 응원을 보낸다.

  • 2026-10-26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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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민 설문 특별기획  Ⅰ 내 자녀에게 진주에서 살라고 하겠습니까? 썸네일 이미지

Agenda 24 진주시민 설문 특별기획 Ⅰ 내 자녀에게 진주에서 살라고 하겠습니까?

  • 2026-10-23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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