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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진주문화관광재단

진주문화관광재단 정의(正義)를 입에 담으면 ‘참으로 어리석다’는 핀잔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히는 세상이다. 이미 세상이 시비(是非)보다 이해(利害)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 상습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고작 ‘정의’ 따위가 무슨 의미를 갖느냐는 식이다. 정작 ‘정의’는 사라지고 ‘위선’이 판을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명 조식은 ‘바른 선비는 범의 가죽과 같다’고 했다. 정의로운 사람을 바른 선비라고 가정한다면, ‘정의는 범(虎)’이라고 전제할 수 있다. ‘범 같은 정의’가 필요한 세상이지만, 정작 세상은 범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정의의 발톱’에 자기가 다칠까 두려워서다. 그래서 주변에는 하나같이 하이에나, 여우, 늑대 같은 동물들이 득실대기 마련이다.진주문화관광재단 출범 당시, 지역사회의 기대가 높았다. 문화예술정책 전문성 강화, 체계적인 지원시스템 구축 등을 통해 진주 문화예술계의 미래를 밝혀 줄 것이라는 믿음 또한 충만했다. 근데 현실은 진주의 문화와 관광을 지배하는 공공 권력이 되고 있다는 지적의 연속뿐이다. 몇몇 사례를 들어 본다.‘진주논개제’ 주최 단체가 하루 아침에 진주문화원에서 진주문화관광재단으로 바뀌었다. 진주문화원의 극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론화 절차는 생략됐고,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민간 단체가 수행하던 사업을 사실상 강탈한 것이나 진배없지만 진주문화관광재단은 아무런 문제 의식없이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그리고는 마치 진주문화관광재단의 엄청난 실적인 양, 언론에 홍보를 해댔다. 애당초 진주문화관광재단 설립을 반대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이후, 민간 영역의 적지 않은 사업들이 실적에 눈이 먼 진주문화관광재단이라는 블랙홀에 무차별적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진주문화예술재단의 핵심사업인 ‘대한민국 등 공모대전’도 진주문화관광재단이 사실상 강탈했다. 애초에 사업 수행의 노하우 여부 따위는 문제 삼지 않았다. 진주문화예술재단으로부터 사업을 빼앗아 진주문화관광재단의 실적을 채우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진주시가 하라는데 어쩔 수 없다’는 비겁한 변명을 해서는 안된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민간재단 사업을 빼앗아 제 살 찌우라고 만든 진주문화관광재단이 아니다.진주남강유등축제 초혼점등의 하이라이트인 ‘불꽃 놀이’와 ‘드론 쇼’도 올해부터 진주문화관광재단이 차지했다. 예산권을 쥔 진주시가 예산을 넘겨 주자 진주문화관광재단은 덥썩 물었다. 이러한 진주시의 독단적인 정책 결정이 지역 문화예술계에 미칠 악영향을 알면서도 진주문화관광재단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침묵은 암묵적 동의이며, 사실상 공범이다.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향후 진주문화관광재단의 존재 필요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는 핵심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특히 진주문화관광재단이 진주공예인협회의 민간 보조금 예산 전액을 가로챈 사실은 충격적이다. 오직 진주문화관광재단의 성과를 위해 민간 단체의 예산을 사실상 강탈한 것이다. 더군다나 사업 추진 과정에서 불거진 불협화음과 공동사업 추진 약속을 내팽개친 진주문화관광재단의 모습은 ‘문화 권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진주문화관광재단에 대한 지역사회의 지적이 쏟아지자, ‘어느 날 갑자기 진주에 정의로운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비아냥이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재단운영에 대해 지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거친 항의를 하는 등 불편한 심기를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진주문화관광재단의 태도에 최근 지역의 문화예술단체들은 눈치를 보며 납작 엎드리고 있다. 진주문화관광재단이 어느새 ‘갑 중의 갑(甲)’ ‘옥상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알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모른다면 정말 문제이다. 현재로선 이러한 모습이 바로 진주문화관광재단이다. ‘범(虎) 같은 정의’가 필요한 이유는 차고 또 넘친다.

  • 2024-11-26
  • 작성자

    황경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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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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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누구나 다 아는 논개, 아무나 모르는 논개

누구나 다 아는 논개, 아무나 모르는 논개 진주 출신 고 이형기 시인은 ‘정신(精神)은 그것이 정신인 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만 정신이 된다’라고 했다. 달리 표현하자면 ‘역사(歷史)는 그것이 역사인 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만 역사’가 되는 이치와 같다. ‘대한민국 누구나 다 잘 아는 논개이지만, 정작 아무나 모르는 논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이른바 논개 담론의 역사에는 해묵은 논란들이 여전히 진행중이다.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장수들은 충렬(忠烈)의 이름을 얻었고, 논개는 조선왕조로부터 의기사(義妓祠)라는 사당을 받으면서 의기(義妓)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충렬로 나라의 승인을 받은 논개는 시대를 거치면서 의기(義妓)에서 후처(後妻)로, 충신(忠臣)에서 열녀(烈女)로 격하되고 각색되는 역사변형의 과정을 거쳐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논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논개 담론의 핵심은 ‘짓밟힌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몸을 던진 한 어린 여인의 정당한 분노’로 정의된다. 근데 ‘천민과 양반’ ‘기생과 부인’과 같은 논개 담론의 곁가지만 붙들고 의미 없는 논란만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논개의 순국이 의미하는 메시지’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화 욕심이다. 다산 정약용은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라는 글에서 논개 순국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報國)을 하였으니, 군신(君臣)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 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논개의 신분과 출생 관련 논란의 시작점이자, ‘누구나 다 아는 논개이지만, 아무나 모르는 논개’로 전락하게 된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언론, 칼럼, 소설, SNS에도 ‘누구나 다 아는 논개’가 활개 치고 있다. S 신문의 기사를 소개한다.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다. 양반 가문의 규수였고 의병을 일으킨 최경회의 아내였다.’ 반론을 하고 싶다. 조선 영조는 논개에게 의로운 기생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의미의 ‘의기사(義妓祠)’를 내렸다. 이것이 바로 ‘아무나 모르는 논개’의 본질이다.금기(禁忌)라는 말이 있다. ‘마음에 꺼려서 하지 않거나 피하는 것’을 말한다. 논개는 ‘나라를 위한 충절’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여인상이다. 따라서 논개에 있어서 금기시되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담보되지 않는 신분과 출생에 대한 무분별한 논개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의기 논개의 역사적 현장인 의기사와 의암이 있는 진주에서는 더욱 금기시된다. 진주문화관광재단이 운영하는 ‘진주관광’이라는 공식 블로그 ‘진주역사’에 논개 관련 글이 두 편이 게시되어 있다. ‘의암바위 전설, 논개 설화. 진주성에서 만나 본 논개’와 ‘논개(포토 툰) 논개이야기’이다. 이 글을 보면 의기 논개는 ‘의로운 기생’이 아니라 ‘장수군 주촌면 양반가에서 태어난 최경회의 후실’로 정의되어 있다. 역사적 오류도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여과 장치 없이 이 글을 게재한 진주문화관광재단에 일차적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전문성이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일각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수정, 삭제 등의 일련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주시가 동일한 사안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자 마자 홍보영상을 즉각 삭제 조치한 것과 비교된다. 의기 논개와 관련한 진주시와 진주문화관광재단의 생각과 태도가 서로 다르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과연 누구의 태도가 옳은가? 진주시인가? 진주문화관광재단인가?‘정신(精神)은 그것이 정신인 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만 정신이 된다’고 이형기 시인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 2024-10-17
  • 작성자

    황경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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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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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진주대첩광장과 고 노무현 묘역의 박석

진주대첩광장과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의 박석 김해시 봉화마을에 있는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에는 글귀가 새겨진 얇고 넓적한 바닥 각인석이 있다. 바로 박석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박석 하나 하나에 국민들이 직접 쓴 글이 새겨져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국민들의 존경, 사모, 사랑을 담은 메시지들이다. 박석에 새겨진 문구 몇 개를 소개한다. 가장 바보였기에 오히려 위대했던 분’ 당신 국민이어서 행복합니다.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노짱 영원한 대통령. 우리는 박석에 새겨진 글귀를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의 삶을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다. 진주대첩광장에도 박석이 있다. 진주대첩을 이룩한 1592년을 기념하고자 1592개의 박석에 시민들의 메시지를 담았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이자, 진주정신을 상징하는 자랑스런 진주의 역사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진주대첩광장 박석에 새겨진 문구 몇 개를 소개한다. 강의 도시 부강 진주.K-기업가 정신의 산지.진주 르네상스 포용도시로 비상하라. 세계를 주도한 부강한 진주의 기적을 행복한 시민이 일궈 나가요. 박석에 새겨진 글귀에서 과연 진주대첩을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진주대첩이 가진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적 가치를 일거에 오염시키는 폭거에 가깝다. 진주대첩광장의 모든 박석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는 건 물론 아니다. 대부분의 박석에는 ‘3천이 3만을 이긴 7일의 전투’ ‘4백 년 전 그날의 함성’ 등 진주대첩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긍지를 담은 메시지가 새겨져 있다. 박석을 통해 ‘나라 없는 겨레 없고 겨레 없는 나라 없다’는 충의 하나로 피에 굶주린 섬 오랑캐에 치욕스런 패배를 안겨준 청사에 빛나는 진주대첩의 그날을 기억해 내기에 충분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진주시의회가 진주대첩광장에 조성된 박석의 문구를 조사했다. 진주대첩의 역사와 충절 관련 문구 이외에 진주 관련 문구 361개, 기업가정신 관련 문구 50개, 기적 관련 문구 178개, 하모 관련 문구 21개, 우주항공 관련 문구 180개 등 모두 790개의 문구가 진주대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구였다. 이러한 글귀가 새겨지게 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주시의 진주대첩광장 바닥재 각인 문구 공모 과정과 의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주시는 진주의 기적을 3종류로 분류했다. 진주시 제1의 기적인 진주대첩 승전과 제2의 기적인 K-기업가 정신, 그리고 제3의 기적이 될 우주항공산업 도시로 비상할 진주시의 도약을 표현하는 상징적 문구가 공모 주제와 내용이다. 진주대첩에 K-기업가정신과 우주항공도시를 억지로 포함시키는 이른바 역사 끼워 팔기 시도로 여겨진다. 특히 K-기업가정신이 진주의 기적이라는 논리의 비약은 충격적이다. 진주대첩이 진주시민이 이루어 낸 기적이라는 사실에 누구도 반대의견을 내기 어렵다. 근데 진주시의 시책에 불과한 K-기업가정신을 진주의 기적으로 규정하고 역사화 시키는 행위는 납득하기 어렵다. 역사 앞에 부끄러운 일이면서 진주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기에 그렇다. 역사의 사유화 시도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진주대첩은 공적 자산이다. 공적 자산을 비역사적 혹은 비공익적인 용도로 사사롭게 사용하는 것은 형법상 횡령·배임 행위와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대첩광장 조성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역사회의 지적에 대해 진주시는 우주항공도시와 기업가정신이 진주대첩과 맞먹는 기념비적인 일이며 시민 공모를 했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명백한 진주 역사의 왜곡이자, 궤변 중의 궤변이 아닐 수 없다. K-기업가 정신과 우주항공산업이 어떠한 역사적 가치 측면에서 진주대첩과 동등한 역사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인가? 이는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진주시의 주장은 진주대첩광장에 진주시정 슬로건을 박제화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천년 진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왜곡한 부끄럽고 한심한 역사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고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의 박석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의 삶이 온전히 담겨 있다. 반면에 진주대첩광장의 박석에는 진주대첩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 어린 메시지와 진주시의 시정 구호가 마구 뒤섞여 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진주대첩의 역사를 기리는 공간인지, 진주시정을 홍보하는 공간인지 알 길이 없다. 역사의 지나친 신성화도 경계해야 하지만, 역사의 사유화 비판을 초래하는 행위 역시 극히 삼가야 한다. 역사를 과도하게 사유화하고, 그것을 통해 토호처럼 이익을 편취하려는 시도에 대해 류 근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사유화한 권력과 기득권의 말로가 어찌 되는지 역사는 다 알고 있다. 진주대첩광장 조성과 박석 논란에 대처하는 진주시의 자세가 참으로 공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2024-09-30
  • 작성자

    황경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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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주류 혹은 비주류로 사는 법

주류와 비주류로 사는 법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獨立軍) 안옥윤이 묻는다. ‘왜 동지를 팔았나?’ 밀정(密偵) 염석진이 고해성사하듯 대답한다.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안옥윤이 권총을 겨누며 차갑게 말한다. ‘16년 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밀정 염석진은 그렇게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이 안옥윤에게 묻는다. ‘강인국과 가와구치 둘만 죽이면 독립이 되는가?’ 안옥윤이 답한다. ‘모르지. 근데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돈 때문에 뭐든지 하는 당신처럼 살 수는 없잖아.’ 하와이 피스톨은 목숨을 걸고 안옥윤을 구한다.영화 암살은 주류와 비주류로 사는 법에 대해 질문하고 답한다. 광복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무기력감과 현실 순응이라는 핑계로 친일파라는 당시로서는 주류의 길을 걷기도 하고, 광복의 희망을 끝끝내 부둥켜안고 독립군이라는 비주류의 삶을 선택하기도 했다. 근데 후일 역사는 평가한다. ‘시대의 흐름만 쫓다가 역사의 흐름을 놓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된다. 시대는 잘못된 선택을 해도 역사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역사는 ‘광복’을 통해 비주류의 삶이 옳았음을 증명해 냈다.홀로코스트의 실무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나는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고 강변했다. 자신의 행위는 오직 국가적 공식 행위였으며, 맡은 바 책임을 다했기에 무죄라는 것이다. 재판을 지켜본 독일계 정치이론가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유대인 학살 행위가 관료의 출세욕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악이란 특별히 악한 존재 혹은 악한 무언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무사유(無思惟)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 여기서 천망회회(天網恢恢)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 엉성해 보이지만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그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 하나 낱낱이 역사에 기록한다. 절대로 역사를 경원시(敬遠視)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주류와 비주류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매 순간 주류와 비주류의 길을 고민하게 만든다. 잔인한 일이다. 비주류이기를 강요하는 일도 당연시되고 있다. 이른바 백성을 그물질하고 있는 시대이며, 맹자가 말한 망민(罔民)이 바로 이것이다. 백성들의 생업을 빌미로 법과 제도를 이용해 ‘주류와 비주류’로 가르는 것이 바로 ‘백성을 그물로 잡아들인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인 에밀 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이 땅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것이다.’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은 역사(歷史)와 정의(正義)의 가치를 믿는 시민들의 힘에 기초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영화 밀정에서 안옥윤과 염석진의 삶이 달랐던 이유는 ‘시대와 역사를 판단하는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를 거부하고 기꺼이 광복이라는 역사의 정의를 선택한 비주류 안옥윤과 시류에 편승해 친일파라는 주류의 길을 선택한 염석진의 삶이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주류와 비주류로 사는 법은 의외로 간단할지 모른다. 역사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혹시 그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면 된다. 주류인지, 비주류인지 선명히 보일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주류와 비주류도 없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진주대첩광장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 202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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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경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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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진주시의회가 나서지 않는 이유

진주시의회가 나서지 않는 이유 구부러진 판자를 바르게 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반듯한 판자를 그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 한 장으로 부족하면 여러 장을 포개면 된다. 조금 시간이 걸릴지라도 언젠가는 반듯하게 펴진다. 공자님 말씀이다. 비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할 필요도 없다. 사실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최대 4년 주기로 구부러진 판자는 빼서 갖다 버리기도 한다. 유권자가 가진 힘이다.지방자치제의 가장 큰 폐해는 ‘지방의회와 행정의 사유화’이다. 강준만 교수가 그의 책 『지방은 식민지이다』에서 한 말이다. 선거 과정에서 동원된 지연·학연·동향·측근 인사들에게 특혜를 베풀어 신세를 갚는 방편으로 사용하거나 향후 정치 행보의 기초를 다지는 당연한 과정으로 이해한다. 더 큰 문제는 정치 무대에 등장시켜 준 시민들의 목소리에 정작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름 끼칠 정도로 냉철한 정치적·개인적 이해관계가 그 뒤에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지역사회가 안고 있는 현안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보다는 여론의 비판과 같은 윤리적인 문제로 치환해서 바라보는 인식의 문제도 심각하다. 때로는 권력이 제공하는 달콤함에 젖어 감시와 비판의 기능도 하지 못한다. 안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방자치에 역행하는 지방의회의 사유화를 근본적으로 치료하기 어렵게 만드는 원인을 스스로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게 현실이다. 인간이 주는 먹이에 길들여진 야생동물은 결국 그 야생성을 잃고 애완동물이 되고 만다. 지방의회 사유화의 근절은 막기 어려워도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이른바 지방의회를 포함한 공공영역이 사유화로 인해 탕진되는 것을 막는 것 이상의 큰 개혁은 없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감시와 비판이 이제 진주시의회로 향하고 있다는 점을 지금 인식해야 한다.진주평론이 주최한 ‘진주대첩광장 이대로 괜찮은가’ 전문가 초청 토론회에서 진주시의회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진주대첩광장이 17년 동안 940억 원이라는 시민의 세금이 쓰인 사업임에도 진주시의회가 철저하게 감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감시는 커녕 비판의 목소리를 들은 기억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진주시의회는 여전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론의 향배만 쫓고 있는 듯하다. 어떤 타이밍을 재고 있는지 알 길도 없다. ‘진주대첩광장에 진주대첩의 역사가 없다.’는 지적에 집중해야 한다. 진주대첩계사순의로 순국한 조상의 영령을 위무하는 ‘추모광장(追慕廣場)’을 없애 버리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공연장을 대신 세웠다. 그래 놓고 ‘진주대첩’이라는 명칭을 부끄럼없이 사용하고 있다. 지금의 진주대첩광장 조성 사업이 과연 진주성의 역사적 가치와 진주대첩에 빛나는 진주정신을 과연 담고 있는지에 대한 원론적인 의문이 드는 이유이다. 진주시민들은 진주시의회의 입장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다. 근데 진주시의회 전체 의원의 절반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도시환경위원회가 나서서 입장표명을 했다. 아마 전체 의원들의 의견 조율에 실패했을 것이다. 집행부의 눈치를 보며 망설이거나 입장조차 낼 배짱이 없는 의원이 여전히 수두룩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진주시의회의 현주소이다.물론 의원 개개인의 입장 표명에 대한 권리는 정당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가 막연하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단 한 명이라도 진주시민의 요구가 있다면 최소한 권리보다는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것이 진주시의회의 본질이고, 진주시의회 의원의 의무이다. 시민들에게 구부러진 판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은 물론이다. 진주대첩광장에 반대의견을 내라고 종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혹여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수도 있는 비생산적인 논란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진주시의회가 나서 해결의 물꼬를 터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진주시는 진주대첩광장의 공정율을 이유로 ‘진주시민토론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물론 이해한다. ‘진주시민설문조사’를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의사도 보이지 않는다. 그 또한 이해된다. 하지만 사전에 토론회나 설문조사를 실시해 시민의견을 수렴했더라면 시민들의 반발이 이처럼 크지 않았을 것이다. 진주시 최대의 실수이자, 오판임을 향후 진주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근데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감시와 비판의 기능을 수행해야 할 진주시의회가 이런 상황에서 입 다물고, 외면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진주시의회가 적극 나서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판자의 교체 시기만 앞당길 뿐이라는 시민들의 따끔한 지적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진주에서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 역시 ‘강 건너 불구경’하다가 제 옷에 불이 옮겨 붙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만약 선거 철새라는 비판을 듣고 싶지 않다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현명한 태도일 수 있다.특히 진주시의회와 직접적인 소통 채널을 갖고 있는 진주지역 국회의원들의 관심도 촉구한다. 여러 곳에 의견을 묻고 있는 차에, 서울 지인이 전화가 왔다. 격앙된 진주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다. ‘국회의원 한테 일러 바쳐삐라.’ 잠시였지만 참으로 부끄러웠던 시간이었다.

  • 2024-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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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경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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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성심당(聖心堂)과 실크테라(SILKTERA)

성심당(聖心堂)과 실크테라(SILKTERA)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3대 빵집이 있다. 군산 이성당, 순천 화월당, 대전 성심당이다. 군산 이성당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며 순천 화월당, 대전 성심당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먹거리 관련 백년 기업 중 한 곳으로 꼽힌다. 더불어 이들 3대 빵집은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기업이자, 지역민이 사랑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성심당(聖心堂)은 대전 대흥동성당에서 원조받은 밀가루 두 포대로 대전역 앞에 천막을 치고 찐빵집을 시작했다. 배고픈 사람들과 찐빵을 나누면서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한 성심당은 대한민국 제과업계를 대표하는 대전의 향토기업이자, 자부심이 되었다. 군산 이성당(李盛堂)은 가게 앞 좌판 할머니에게 공간과 빵을 제공하는 ‘나눔’을 실천하면서 군산의 자랑이자, 명소가 되었다. 순천 화월당 역시 기업의 역사만큼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에 진심이었다. 대한민국 3대 빵집이라는 명성과 위상을 얻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크(SILK)는 진주(晋州)의 자랑이다. 실로 10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한때는 세계 5대 실크 주산지였다. 실크 산업의 쇠퇴일로 이전까지 진주는 ‘대한민국 실크의 대명사’ 그 자체였다.실크 산업의 부활과 저변확대를 위한 대대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진주 실크 전시회, 실크 패션쇼, 디자인 경진대회와 ‘실크융복합전문단지’ 조성에 이어 최근에는 ‘진주실크박물관’ 건립도 추진되고 있다. ‘진주 실크 재건 의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진주 실크 산업은 좀체 기지개를 펴지 못하고 있다. ‘실크=의류’라는 전통적 범주와 인식에서 탈피하기도 어려웠다. 실크 산업의 다변화로 이른바 ‘먹는 실크’라는 최신 트랜드가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실크 커피(SILK COFFEE)’와 ‘실크테라(SILKTERA)’이다. 정작 문제는 이들 ‘먹는 실크’가 ‘진주 실크산업 부흥의 모멘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진주 실크의 미래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 볼 문제라는 의미이다. 진주 실크 산업의 핵심 공간인 ‘실크융복합전문단지’에 뽕잎가루가 들어간 빵과 음료를 만드는 ‘실크테라(SILKTERA)’가 입주했다. ‘뽕잎을 실크로 볼 수 있는가’라는 논란을 제쳐두더라도 ‘실크=견직물’이라는 경계를 허문 새로운 시도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근데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드러난 진주시민들의 인식은 전혀 아니다. ‘진주 실크의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진주 핫플, 정원이 있는 초대형 신상카페’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실크테라에 정작 실크가 보이지 않는다’ ‘커피와 빵을 파는 카페가 실크융복합전문단지에 입주 가능한가’라는 시민들의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크테라의 입주를 허가한 진주시 역시 ‘과연 진주 실크 산업의 미래가 맞는가’ ‘차라리 카페를 하지, 앞으로 누가 견직 제조업을 하겠는가’라는 지적에 대해 진주실크의 미래가 명확하게 담보된 책임있는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진주 실크의 미래를 위한 진주시의 선택이 옳았음이 머지 않은 시간에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진주 실크 산업 다변화의 선두주자로 평가받고 있는 실크테라가 ‘신상 초대형 진주 핫플 카페’가 아니라 전주 이성당, 순천 화월당, 대전 성심당과 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빵집으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더불어 '합법(合法)을 가장한 불법(不法)이다' ‘특혜 아니냐’ ‘진주의 전통 실크 산업을 이용한다’는 비판적인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자세를 가졌으면 한다. 실크테라 스스로 언론을 통해 ‘진주 실크 산업의 부흥’을 분명히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진주 실크에 대한 진주사람들이 가진 애정은 상상초월이다.

  • 2024-08-20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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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문화관광재단 3년 평가 필요하다 썸네일 이미지

주간평론 진주문화관광재단 3년 평가 필요하다

진주문화관광재단 3년 평가 필요하다 전국의 문화재단이 공통으로 직면하고 있는 해묵은 과제가 있다. 바로 재단의 관료화, 문화 행정 팽창 수단화, 국가 공모사업 확보 도구화 문제이다. 설립 3년째를 맞은 초창기 진주문화관광재단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정작 문제는 이의 해결을 위한 노력의 부재이다.진주문화관광재단의 조직체계는 지역문화정책 수립과 문화예술자원 집결을 통한 특화된 사업을 전개하는 조직 구조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여전히 행정의 관리와 감독의 개념에 준한다는 점에서 재단의 전문인력은 전문성 발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관료적 관행을 받아들이는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바로 재단이 관료화되는 지점이다.재단의 운영에는 설립 초기부터 행정개입의 필연성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이는 지자체의 재단 인력 및 조직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위한 일련의 조치로 선행된다. 이로 인해 재단은 자율성과 독립성 확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른바 지역문화관광의 질적 성장은 도외시하고 지자체의 하부조직 혹은 문화 행정의 팽창 수단으로 전락하는 과정이다.과도한 성과 지상주의는 국가 추진 공모사업의 확보를 위한 도구로 변질시켰다. 사실 단기적 효과와 성과를 가시적으로 도출하는데 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공모사업만큼 좋은 것이 없다. 사활을 걸게 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재단이 민간단체와 경쟁관계를 형성하고 나아가 민간 보조금을 가로채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공예주간’ 사업이 과도한 성과 지상주의의 폐해이다.진주의 문화관광정책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설립된 진주문화관광재단은 설립 이후 3년 동안 조직 개편 및 사업 조정 등의 운영체계를 마련하는 초기 단계를 거쳐 ‘서부경남 문화 관광의 미래 중심’이라는 비전 달성을 위해 전 구성원들이 열심히 달려왔음도 인정한다. 시민들의 다양한 문화 향유 수요 대응, 지역관광활성화 노력, 전문적인 운영 주체 발굴, 지역문화예술 거버넌스 구축 등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진주의 문화예술계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체계가 만들어져 문화예술인들의 양적 질적 성장에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진주문화관광재단의 조직 관리와 운영은 낙제점에 가깝다. 실례로 재단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총괄 관리자와 중간관리자의 장기 부재라는 상황속에서도 조직체계 정비는 여전히 등한시했다. 여기에 행정의 지속적이고도 과도한 간섭은 재단의 대외적 이미지에 치명타를 안긴 것은 물론이다. 이는 전체적으로 재단의 정체성 확립 기반을 허약하게 만들고 불안정한 조직체계를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진주문화관광재단이 공모사업 선정과 지자체 위탁사업 대행기관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진단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사회 일각에서 지속적인 진주문화관광재단의 운영 필요성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진주문화관광재단에 투입된 예산은 지금까지 대략 200여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근데 설립 초기 내건 비전에 상응하는 괄목할만한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성과관리를 포함한 종합적인 경영전략과 재단의 경영평가 개량화를 위한 표준모델 구축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재단에 투입된 예산규모는 결코 적지 않지만 진주시와 진주시의회 차원의 정기감사나 행정사무조사 수준의 최소한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무관심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진주문화관광재단은 지난 3년 동안의 자체적인 성과와 평가를 지역사회에 알릴 책임이 있다. 이와 함께 ‘진주문화관광재단 3년 평가’를 위한 시민 공청회 혹은 토론회 자리도 마련되어 지역사회의 엄중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진주문화관광재단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성공 정착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 2024-07-19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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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지방은 거지가 아니다

지방은 거지가 아니다. 굳이 이 문장을 적시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권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가끔씩 중앙에서 지방에 은전을 베푸는 방식만 고집해서는 한국사회에 고착된 지역주의를 결코 극복하기 어렵다는 담론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현재 전국 대부분의 지방은 사회 각 분야에 걸친 서울과 수도권의 집중화에 따른 상대적인 소외감와 지역의 정체를 하소연하고 있다. 이른바 ‘지방도 이제는 잘살아 보자’는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간절하고도 당당한 시대적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근데 정부의 태도를 보면 지방의 균형발전 요구를 ‘우는 아이 젖 더 주기 신드롬’ 따위에 기대는 거지근성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지방의 입장에서는 분통 터질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방은 선물이나 탐내는 거지가 절대 아니다. ‘지방의 반란’이 필요하다. 한국 수도권 집중도의 절반도 되지 않는 일본도 지방의 반란을 외치고 있다. 근데 한국의 지방에서는 말이 없다. 입으로만 외칠 뿐,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공약(空約)’을 모진 인내심으로 버텨내고만 있다. 지역균형발전을 가져오는 최선의 행동강령이 ‘지방의 반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때이다.지방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서울과 수도권이 나라 전체를 생각하는 발상을 포기한 것은 분명해진 만큼, 이제는 지방이 한국을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체계를 정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방이 똘똘 뭉쳐야만 지역주의를 타파할 수 있고 지방이 살 수 있다. 정부는 이제야말로 ‘지역균형발전 대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객관적이고 포괄적인 증거를 우선 제시하는 것은 물론 균형발전의 순차적 청사진을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모든 지역에 일관되고 공정하게 적용될 수 있는 원칙도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 정치적인 정략과 연고가 아닌 공정하고 객관적인 원칙과 기준에 의해 지역발전전략이 수립되고 실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최근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위해 벌이고 있는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의 총력전은 지역균형발전의 질적인 논의를 촉발하고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 문화를 지역발전의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점에서 향후 지역균형발전의 질적인 변화도 예측할 수 있다.일각에서는 지방선거를 앞 둔 정치공학적 행위라는 부정적인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어쩌면 이건희 미술관 건립을 통해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지방의 대응전략을 수립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서울과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에 이건희 미술관이 건립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대원칙이 필요하다. 정부가 진정으로 지역균형발전을 실천할 의지가 있다면 반드시 지역에 세워져야 한다. 말로만 지역균형발전을 외칠게 아니라, 이제는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이건희 미술관이 진주에 건립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문화분권을 통한 지역균형발전의 첫 단추를 꿰는 지역이 진주이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이다. 경남도청이 1925년 부산으로 이전된 이후, 무려 96년 동안 소외와 정체를 경험한 진주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지역 이기주의라는 일차원적 문제제기는 정중히 사양한다. 진주와 지역균형발전을 염원하는 진주시민이라면 누구나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해야 한다. 지금은 침묵과 방관이 아닌 강력한 의사표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주장한다. 이건희 미술관의 최적지는 진주이며, 진주에 건립되어야 한다. 정부는 응답하라. (2021. 6. 25)

  • 2024-07-15
  • 작성자

    황경규/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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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박완수 경남도지사 좌하

박완수 경남도지사 좌하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은 대한민국 최초의 문화예술회관임과 동시에 경남을 대표하는 위상과 브랜드 이미지를 대·내외에 표방하는 문화예술공간입니다. 경남의 문화·예술을 선도하는 거점 기관으로서 경남 특유의 문화예술 브랜드 생산과 경남도민의 문화예술 향유권 보장, 소외 없는 문화복지 실현을 선도하는 복합 문화예술공간으로 명성을 견지해왔습니다.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은 대한민국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현대건축의 거장인 김중업 건축가의 작품인 프랑스대사관, 광주문화방송 등과 함께 대한민국 건축사에서 매우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현대 건축문화유산의 건축사적 가치와 공간 미학을 인정받는 경상남도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임이 분명합니다.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은 1988년 개관 이후, 35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공연과 전시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현대의 문화예술공간과 달리 전국에서 최고로 낙후된 문화예술공간으로 도민들에게 외면받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문화예술회관이자, 건축사적 가치를 가지는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의 불행의 시작은 행정의 몰이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난 2009년 시행된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리모델링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김중업 특유의 건축사적 가치의 훼손이라는 대한민국 건축계와 지역사회의 지적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남도는 리모델링을 강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이 가진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근대문화유산 지정 가능성마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최근에는 두 번째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부지내에 콘테이너로 제작된 예술창작공간인 ‘아트스페이스 남강’이 들어선데 이어, ‘경남도립예술단 창작관’이 주차장에 건립되었습니다. 심각한 부조화를 넘어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이 가지는 건축사적 가치의 근본적인 훼손이 명백한데도 강행되었습니다. 진주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진주시민 77.5%가 ‘주차장에 경남도립예술단 창작관’ 건립을 반대했습니다. 경상남도에 도민들의 의견을 전달했지만, 도민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민선 7기의 일입니다. 현재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을 찾는 관객들은 부족한 주차장으로 인해 인근 학교 운동장 흙바닥에 차를 세우고 있습니다.(최근에는 학교내 공사로 인해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명실공히 경남도를 대표하는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수준이 이 정도입니다. 창원 성산아트홀의 주차면수는 448면입니다. 이에 비해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은 256면에 불과한데도, 주차장 부지를 이용해 경남도립예술단 창작관을 지었습니다. 현재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을 이용하는 도민들은 주차공간 부족으로 인한 불편을 묵묵히 참고 인내하고 있습니다. 경남문화예술회관을 이용하는 도민들의 주차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주차공간확보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 경남문화예술회관 주차장 부지 지하공간에 주차장과 소공연장과 부대시설, 편의시설을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상남도를 대표하는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의 진정한 위상을 찾기 위해서는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중·장기 발전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각계의 지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광역단체가 운영하는 문화예술회관의 예산현황을 보면 전국 7개 광역단체 가운데 경상남도가 꼴지입니다. 광주광역시의 광주문화예술회관은 총예산이 2022년 기준 505억여원에 달하지만,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은 54억여원에 불과합니다. 무려 10배에 가까운 차이입니다. 경남도민의 문화예술 향유기회 제공이라는 측면에서 경상남도를 대표하는 문화예술공간인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중·장기 발전방안’을 마련하고 시행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은 지금 신음하고 있습니다. (경남일보 경일포럼 2023. 2.)

  • 2024-07-08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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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평론 진주평론 발행인 칼럼 / 황경규

진주평론과 시대정신 맹자(孟子)를 평가하는 단어가 있다. 우활(迂闊)이다. 사전적으로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이 우활하다는 말의 어원은 『사기』 「맹자순경열전」에 나온다. “맹자의 말은 현실과 거리가 멀고, 당시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라고 평하고 있다.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상앙(商鞅)이나 오기(吳起)와 같은 군사 전략가이자, 현실주의 정치인과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와 같은 정치와 외교에 뛰어났던 인재들을 등용해 부국강병을 꾀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맹자가 거침없이 내뱉은 ‘인의(仁義)에 기반한 왕도정치(王道政治)’와 같은 주장들은 서양의 돈키호테의 말과 행동 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여기서 맹자의 사상을 논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북송(北宋)의 정이천(程伊川)은 “역(易)을 아는 사람 가운데 맹자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知易者, 莫若孟子)”라고 평가했다. 역(易)이란 『주역(周易)』을 의미한다. 주역의 핵심은 시세를 알고 때를 아는 것이다. 정이천의 평가에 따른다면 맹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서생만은 아니었다.시대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맹자의 이상(理想)은 현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한 이상이었다. 현실을 몰랐거나 현실을 외면한 것도 아니다.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당시의 상황속에서 실현가능한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다만 칼을 쥐고 폭정을 일삼던 사람들이 우활하다고 평가했을 뿐이다. 인의(仁義)에 기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설파한 맹자의 바람과는 달리 전국시대의 패권은 진시황(秦始皇)이 거머쥐었다.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은 상앙(商鞅)과 이사(李斯)는 강력한 변법으로 중앙집권과 법치주의의 기초를 닦았고, 마침내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역사는 이를 ‘패도정치(覇道政治)’라고 평가한다. 천하가 통일되었다고 해서 백성들의 삶에 평화와 안정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민중들의 삶은 피폐했다. 여기서 우리는 무모한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보다는 교활한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들이 득세하는 시대가 어떤 결말을 가져 오는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맹자가 말하는 우활한 왕도정치가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다만 뻔뻔한 비굴과 아첨만이 횡행(橫行)하는 이 시대에 왕도정치를 주창한 맹자의 일침(一針)은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잘못된 정치로 죽이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하필 왜 이익(利)을 말하십니까.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시대의 흐름에 굴하지 않고 왕에게 직언했던 맹자의 강직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아쉬운 시대를 사는 것은 분명하다. 진주평론의 창간정신 진주평론(晋州評論)의 창간정신은 ‘시대와 함께 살고 싸우고 성찰하는 진주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올곧은 것은 끝내 살아남아 역사에 박힌다는 시대정신(時代精神)의 실현’이다. 듣기는 좋은데, 현실과 한참은 동떨어져 보인다. 한마디로 맹자처럼 우활하다는 평가를 받기에 딱 좋다.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언론환경 속에서 살아남기는커녕, 죽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길 것이다. 근데 다 알고 시작하는 일이다. 하지만 잔인한 현실을 외면한 이상의 추구가 초래하는 좌절 따위에 쉽게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것 같았으면 애당초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대정신의 실현이라는 길은 찾기도 어렵지만 멀고도 험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은 역시 만만치 않다. 다행인 것은 기꺼이 그 길에 동참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며, 정작 문제는 무엇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가에 있다. 그것이 시대정신이며, 진주평론이 추구하는 가치이다.진주평론이 가고자 하는 길도 분명하다. 진주의 천년역사에 뿌리하고 있는 진주정신(晋州精神)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역사속의 진주는 위대(偉大)했다. 진주사람들은 정의(正義)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고, 도덕(道德)을 명분으로 권력과 싸웠다. 역사 앞에서 적어도 인간답게 행동했으며, 이해(利害)가 아니라 시비(是非)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생명을 걸진 못하더라도, 진주역사에 기반한 양심이 살아 숨쉬는 글쓰기가 필요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이 역시 쉽지 않은 길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다만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변을 살피거나 눈치를 보지 않고 진주의 역사가 묵묵히 걸어 온 길을 따라 가고 싶을 뿐이다. 토론과 논쟁 진주에는 에나 토론(討論)과 논쟁(論爭)이 거의 없다. 일방적이며 주입식 토론과 논쟁만 더러 있을 뿐이다.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유의미(有意味)한 결론을 도출하기 보다는, 미리 답을 정해 놓고 토론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가장 심각한 것은 토론과 논쟁에 따른 결과물의 자의적 해석이다. 그에 따른 여론조작의 폐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역사가 증명한다. 진주평론은 지역의 현안을 놓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문화를 정착시켜 나갈 것이다. 전문가들과 이해당사자, 시민들의 의견을 골고루 담아낼 것이다. 매월 최소 1회 이상의 토론회나 대담을 통해 지역의 목소리를 담아낼 것이다. 시의성(時宜性)에 목숨 거는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정확한 사실의 기록에 비중을 둘 것이다. 그리고 비록 시일이 걸릴지라도 지역을 위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도록 노력할 것이며, 최종적으로 진주역사에 정확히 기록하는 책무를 묵묵히 수행할 것이다. 토론과 논쟁은 민주사회 구현의 기본이 된다고 믿는다. 보상과 문책 보상(補償)과 문책(問責)에도 소홀하다. 지역사회에는 개인의 이익보다 자기희생을 불사하며 공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런 사람은 너무 쉽게 잊는다. 더불어 위선과 기만과 변절을 범한 사람의 과거도 너무 쉽게 잊는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는 듯 앞소리꾼 행세를 한다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공익은 서서히 잊혀지고, 기회주의만 판을 치게 된다. 이제는 보상과 문책에 철저해야 한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져야 할 책임마저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진주를 위해 희생하는 이에게는 보상을, 지역발전을 저해하는 예전의 5도10적과 같은 이에게는 엄중한 문책을 가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역사회 전체가 공익(公益)을 생각하고, 기회주의적 처신을 두렵게 여기게 된다. 보상과 문책은 정의사회 구현의 기본이 된다. 출판의 언론화 출판의 언론화는 이미 오래전에 거의 폐기처분 수준에 놓여 있는 의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과 언론을 가리지 않고 언론의 자유가 언론기업의 이윤추구로 변질됐다는 세간의 평가를 적시하는 것도 부질없다. 이미 우리는 정론직필(正論直筆)의 가치가 사라진 언론 홍수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대단히 획일적인 거대 언론매체들이 언론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지역의 여론을 조장하고 때로는 급조하기도 한다. 감시와 비판의 영역은 이윤추구로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의 몫이 된다. 이 시점에서 언론의 가치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이른바 인스턴트 저널리즘의 홍수 속에서 저널리즘의 품위를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 저널룩(journalook)이다. 저널룩은 저널리즘(journalism)과 북(book)의 합성어이다. 출판의 언론화를 의미하는 저널룩을 지향하는 진주평론은 여러 가지 이슈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잡지 형식의 책으로 발간된다. 물론 책을 언론매체로 활용하는 방식은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1분 1초를 다투는 인스턴트 저널리즘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이슈를 느긋하고 심도 있게 관찰하고 평가하는 저널리즘도 필요하다. 진주평론은 세간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평가하고 논하는 평론(評論)’의 가치를 견지해 나갈 것이다. 진주평론 홈페이지(www.jinjureview.co.kr)이 시의성을 그나마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출판의 언론화는 궁극적으로 이른바 언론인들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 더불어 뜻 있는 몇몇 사람이 모여 독립적인 언론활동을 할 수 있고, ‘1인 저널리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한 거대 매체에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언론에 대한 후진성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진주 역사 아카이브 구축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고, 돈도 안되는 일이다.’ 계간지(季刊誌)로 발행되는 진주평론 창간 작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진정으로 걱정하는 말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돈 되는 일을 하려면 애당초 출판의 언론화 따위는 마음에 두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진주 역사와 문화의 아카이브 구축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대업적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진주가 성장·발전해 나가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싶을 뿐이다. 역사와 문화는 물론이고 정치·경제·인물 등 모든 분야를 다룰 것이다. 후일 진주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에게 진주평론의 기록이 자료로 사용될 수 있다면 만족한다. 진주평론은 지역사회에서 소수의 사람이 뜻을 내어 시작하는 계간잡지이다. 예상컨대,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중간에 멈춰 서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주평론이 실패하는 결과물을 마중하게 되어도 괘념치 않을 것이다. 진주평론의 창간정신과 가치를 잇는 또다른 누군가가 나타나게 될 것을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진주평론의 창간정신을 되새겨 본다. ‘시대와 함께 살고 싸우고 성찰하는 진주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올곧은 것은 끝내 살아남아 역사에 박힌다는 시대정신(時代精神)을 실현한다’ 단언컨대, 진주평론이 제 풀에 쓰러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기대에 부응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린다.

  • 2024-07-06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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