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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Jinju

Tour Jinju(7건)
자연마을을 찾아서 4.  수곡면 원계리-이순신장군의 흔적을 발견하다 썸네일 이미지

Tour Jinju 자연마을을 찾아서 4. 수곡면 원계리-이순신장군의 흔적을 발견하다

원계리 창촌리에서 25번 진주시도의 북쪽으로 달리면 원계리다. 동남쪽에 도량마을, 중앙에 원계마을, 가장 북쪽에 동월마을이 위치하고 있다.원계리는 전형적인 동서고저 지형이다. 서쪽으로는 덕천강이 흐르고 그 주변으로 논밭과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반해, 동쪽은 해발 고도 약 300m의 산지로 재궁산, 마항골, 독산 등에 둘러싸여 있다. 도량마을도량마을은 원계리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써, 하동과 진주를 연결하는 길목이란 뜻에서 도량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출렁이는 강물이 보이는 풍경은 선비들이 가장 선호하는 풍경이었을 터, 그 증거 하나가 이곳 덕천강변에 있다. 마을 남쪽 덕천강 주변에 농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주변에 세 개의 바위가 더 있었더란다. 너럭바위는 아니더라도 여러 사람 어울려 풍류를 즐기기에 손색이 없는 조건이었는지 예부터 선비들이 즐겨 찾았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농바위에는 삼락대(三樂臺)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원계마을삐그덕대는 놀이기구, 기린이며 호랑이같은 석조장, 이순신 장군 동상, 세종대왕 동상,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지겨운 훈시가 있었던 교단까지. 폐교가 된 원계초등학교에 아직도 남아있는 것들이다. 원계초등학교를 지나자 진짜 마을로 들어선 느낌이다. 원계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 사곡에서 살던 밀양손씨가 옮겨와 살면서 '엥기'라 부른데서 유래돼 이후 원계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다른 마을에 비해 눈여겨 볼만 한 것들이 많다. 원계리 노거수 마을에 정자나무나 마을을 보호하는 당산나무가 있는 경우는 흔하지만,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를 보기란 그리 흔치 않다. 그 흔치 않은 구경을 원계마을에서는 실컷 할 수 있다. 원계경로당 앞에, 지난 1982년 도지정 보호수로 지정된 원계리 노거수가 떡 하니 버티고 섰기 때문이다. 수령 550년으로 경남에서도 오래된 느티나무로 손꼽히는 원계리 노거수는 그 높이만 12m에 나무 내부가 큰 동공으로 되어있는 등 매우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게다가 전체 폭이 워낙 넓어서 서 있는 것인지 누워있는 것인지 분간이 힘들 정도다. 몸체의 중간을 쇠봉에 의지하고 있는 형편이긴 하지만, 튼튼한 둥치며 푸른 잎들이 건재함을 과시한다.이렇게 유명세를 타는 나무라면 남다른 사연도 있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노거수에 나뭇잎이 일시에 피면 그해에 풍년이 온다는 전설이 마을에 전해져 온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 한 가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주민들은 마을의 재난을 노거수가 막아주고 있다고 선한 마음으로 믿고 있다는 점이다. 이충무공진배미유적지월계마을에서 꼭 보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를 꼽으라면 아마 누구라도 진배미 유적지를 선택할 것이다. 진배미는 이순신 장군의 인생에 있어 대전환점을 맞은 곳이다.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하루 아침에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는 신세로 전락했을 때, 다시금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 교서를 받고 전의를 다지며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이후, 마을사람들은 원계리 앞 큰 들판이었던 이곳을 가리켜 ‘진뱀이’라고 부르고 있다.진뱀이의 ‘진’은 군사들의 대오가 있는 곳을, ‘뱀이’란 ‘논뱀이’의 준말로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의 하나하나의 구역’을 뜻함으로써, 즉 진뱀이란 군사들의 대오가 있는 논을 말한다.한편, 1975년 12월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과 얼을 되살리기 위해 옛 훈련장의 일부지역에 문화공보부 기념물 제16호로 높이 약 4m, 너비 1.1m 정도의 ‘이충무공 군사훈련 유적비(李忠武公 軍事訓練 遺蹟碑)”가 세워졌다. 이 유적비는 도로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 비닐하우스 단지 사이에 있는데 마을 주민들에겐 남다른 자부심의 공간이기도 하다. 외지 관광객이 찾아와 길이라도 물을라 치면 손짓으로 함부로 가르쳐 주는 법 없이 자청해 대뜸 길 안내를 나설 정도라니 말이다. 손경례 고택이충무공진배미유적지를 둘러보았다면 이번엔 당연히 손경례 고택을 둘러볼 차례다. 이곳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1597년(선조 30) 7월 27일에 머물렀던 곳으로, 며칠이 지난 8월 3일에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은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위치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원계리 노거수가 서 있는 뒤편으로 언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손씨 재실이 보이고, 그와 이웃한 집에 손경례의 후손들이 지금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대문을 걸어잠궈놓은 상태F 함부로 드나들 순 없지만, 그들에게 청을 넣으면 언제든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도록 집을 공개하고 있다.목조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인 고택 마당에는 여기가 바로 이충무공이 재임명교서를 받은 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양정 하경복 묘원계마을과 구태마을을 연결하는 농로에서 조금 떨어진 구릉에 4각 석조분 1기가 눈에 띄인다. 하경복은 본관이 진주로,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경성병마절도사,함경도절제사,경상도병마절제사를 지내며 조선 초기 국방 강화에 큰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로 주변에 많은 인덕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묘는 1983년 8월 2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현재 잘 관리되고 있다. 동월마을동월마을은 원계리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청군 단성면과 인접해 있다.처음에는 마을이름을 매화정이라고 하였는데, 병자년 대홍수 때 매화나무가 모두 유실되는 바람에 산 밑으로 약간 옮겨내려와 동월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 서쪽에는 두뫼산이, 북쪽에는 큰 시리봉과 작은 시리봉이 있다. 특히 큰 시리봉의 꼭대기엔 옛 진양군과 하동군, 산청군 3개군의 경계라 하여 표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표지석을 확인하는 버릇이 발동하여 마을 앞에 잠시 멈춰섰다. 그런데 동월마을 표지석 옆에는 표지석보다 더 큰 크기의 ‘효(孝)’라고 적힌 비석이 서 있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에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맹세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다.도로 맞은편에는 딸기집하장과 경로당이 있고, 마을 안쪽으로는 비닐하우스가 즐비하다. 그런데, 마을 안으로 몇 발짝 떼기가 무섭게 오른쪽으로 펼쳐진 넓은 들을 만나게 된다. 당연히 비닐하우스 단지겠거니 하고 걷다가 뜻밖의 풍경에 살짝 당황햐지려는 찰라, 여기가 바로 칠성백이라는 마을주민으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칠성백이는 마을 서쪽에 있는 큰들이라는 의미다. 옛날 이 들 한 복판에는 북두칠성처럼 생긴 바위 7개가 있었다고 해서 불리워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낱 헛된 입소문이 아니다. 농경지정리로 인해 과거와 달리 위치가 변하고 2개의 바위가 소실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칠성백이 들 맞은 편 비닐하우스 단지 사이에 5개의 바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 한 분은 그 모양새를 자신이 분명 보았고 또렷하고 기억하고 있다며 한참을 강조하셨다. 어디 별 이야기 뿐이겠는가. 마을 입구 오른편에 위치한 동월마을 동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성성한데, 이곳은 일명 토끼가 달을 올려다보는 언덕이라 하여 망월동산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이밤..., 동월마을 망월언덕에는 북두칠성이 떨어지듯 달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그래서 동화 속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라는 토끼 한 마리가 귀를 쫑긋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 2026-08-21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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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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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Jinju 자연마을을 찾아서 3. 미천면 효자리 효자마을

미천면 효자리 효자마을 모든 가치의 우선이 효였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삶의 의무처럼 존중받던 시절에도 충을 넘어서는 단 하나의 가치가 바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성이었다. 부모의 말씀을 거역한다는 걸을 상상할 수조차 없던 때. 그때가 언제일까..., 문득 이 세상에는 없는 일인 냥 궁금해진다. 자식이 있어도 혼자 외로이 늙어가는 노인들이 늘고,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자식에게 봉양받을 거라는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속 편하다고 말하는 요즘, 자식들은 떳떳하게 효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보험금 몇 푼을 위해 부모의 목숨을 앗아가는 세상을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비관적인 생각일까?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무방비 상태에서 적의 공격을 당할 때처럼 마음을 뒤흔드는 마을이 눈 앞에서 펼쳐진다. 가난하지만 효자 효부가 많아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마을, 이름 효자리 효자마을이다. 1914년, 진주군 안간면 효자동 일부로서 효자리라 하였는데, 미천면 효자리는 효잠․독점․무동을 합한 지역으로 미천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진주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 산청군 생비량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한데 합쳐진 세 마을을 면면을 살펴보자만, 효잠마을은 수원 백씨가 대성을 이루고 살았으며, 마을안에는 최근 건립한 숭효제가 있다. 또 독점마을은 밀양 박씨가 대성을 이루었으며 효잠 저수지 뒤편에 밀양 박씨 규정공파의 재실인 우석정이 있다. 무동마을은 마을 뒷산이 춤추는 사람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조씨가 많이 살았다. 모든 마을이 집현산 자락에 걸쳐져 있는데, 독점과 무등은 특히나 더 골이 깊어 외부인의 출입이 거의 상태라고 한다. 효자마을이란 지명은 아무렇게나 붙여진 게 아님을 역설하듯, 마을에는 효자비와 효부비가 있다.백갑수 덕수 형제의 효행을 적은 효자백갑수덕수형제행적비가 추계마을 입구에 있고, 효열부광산김씨의 비가 도로변에 있다. 효자마을이 워낙 깊은 골 가운데 있어 사람들이 보기 쉬운 곳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효자 효부의 내력은 과거에 그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살림을 꾸리면서 시아버지 병수발에 남편 병수발, 거기에 시동생 병수발까지 하는 사람들이, TV나 라디오에서 소개되는 아름다운 미담이 이곳에서는 생활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사는 노인들조차 마음이 편히 산다고 한다. 외로움이야 인간으로 태어난이상 짊어지고 가야할 고단한 숙제일 따름이고. 하지만, 마을을 들어서면 집현산에 포위라도 당한 듯 눌러앉은 모습이다. 골이 워낙 깊어 한 겨울에도 골 안과 밖의 온도차가 5℃까지 난다고 하니, 골이 얼마나 깊은 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마을은 경제적으로는 척박한 인상을 풍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1968에 준공한 저수지가 있어 물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점이다. 효자마을과 독점마을 사이에 위치한 저수지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주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물 공급원으로, 지난 해엔 확장공사까지 끝마쳐 웬만한 가뭄에도 끄덕없다. 게다가 우석정과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다워 지친 일상의 시름을 덜어주고 있다. 식수 또한 풍부한 편에 속한다. 효자리에는 마을 앞까지 상수도가 들어와 있지만, 실제로 상수도를 연결해서 이용하는 주민들은 적은 편이고, 집현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지하수를 더 많이 이용하고 있다. 물 맛이 기가 막히다는 자랑이 뒤를 잇는다. 미천면은 진주시 관내에서도 밤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마을이 깊은 골짜기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겨울철에는 해를 보는 시간이 짧아 시설작목 재배가 곤란해 주민들은 논농사 외에 밤나무로 소득을 올렸던 것이다. 밤생산이 소득은 좋은 편이긴 하지만 워낙 일손이 부족해 수확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는데, 지금은 그나마 수령이 많아서 대부분 베어내고 그 자리에 단감 나무를 심어 소득을 보충하고 있다.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도 돈이 없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것은 효자마을은 골짜기 깊은 곳에 숨어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가끔 외식을 하고 때가 되면 그거면 됐다는 식으로 용돈이나 내미는 것이 효가 아니라는 것을, 효는 마음이 즐겁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새삼 깨닫게 된다.

  • 2026-07-26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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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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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Jinju 자연마을을 찾아서 2. 대평면 당촌(堂村)마을 - 대평 무 종자채종지

대평 무 채종지 당촌(堂村) 당촌(堂村)은 ‘一文山 二大坪’이라는 말이 나오게 한 곳이다. 남강댐으로 인한 수몰이전만 하더라도 가구수가 100호가 넘었던 대촌(大村)인데다 무 종자채종으로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973년 2월 26일 법률 제2555호로 종묘관리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당촌의 무 종자 생산량은 72kg들이 400가마를 생산한 대평면내 최고의 무 채종지였다. 당촌리 김덕용(金德龍)은 면내에서 생산된 무 종자를 600여가마를 수집해 대전 전주 흥농종묘지사(興農種苗支社)로 80여가마를 내다 팔고, 나머지는 강원도, 경기도 등 전국각지에 내다파는 무 거상(巨商)이었다.그러나 종묘관리법 제정 이후에는 이곳 당촌에서는 무 종자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었고, 대전 전주 흥농종묘지사에서 종자를 생산해 「진주 대평 무」라 이름붙여 전국에 보급하고 있다. 또 일제강점기에 대평면내에서 벼 공출을 제일 많이 한 곳이 이곳 당촌(堂村)마을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당시 원활한 공출미 수송을 위해 일제가 건설한 당촌교와 지하교이다. 물론 준공년도일이 표시된 일본왕연호는 해방직후 정으로 쪼아진 채 삭제돼 있다. 조선조 말엽에 1만2,000여평이나 되는 못이 있어 대평리 어은마을에 보(洑)를 막던 안상영이라는 부자가 당촌리와 내촌리 일대에 논을 만들려고 못둑을 만들다가 실패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당촌리 지하(池下) 삼거리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곳이었다. 무 종자를 구하러 오는 상인들로 북적였고 마을안에 큰 상점이 있어 늘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했던 곳이다.대평면내 여느 마을처럼 당촌도 희망찬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남강댐 보강공사가 끝나면 마을 전역이 수몰지구로 편입되는 것이다. 당촌마을 사람들은 비옥한 땅을 송두리째 내주어야 했던 것처럼 일부는 이주단지로 또 일부는 진주시내로 이주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29세대 정도만이 잔류를 이야기하고 있다.한동안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농촌공동체가 남강댐 건설이라는 시대적 요청 앞에 순식간에 붕괴되고 만 당촌마을. 예로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 산 곳에 이름 붙여졌던 당(堂)이라는 글자를 따서 이름지어졌던 당촌(堂村)마을은 이제 변변한 집 한 채 없는 마을로 전락했다.

  • 2026-07-20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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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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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Jinju 자연마을을 찾아서 1. 집현면 현동(賢洞)마을

현동(Hyundong 賢洞) 집현산(集賢山)이 높이 솟은 곳에 월아산(月牙山)이 안대가 되고, 남강(南江)이 띠가 되어 동부(洞府)를 에워싸고 수림과 계곡이 아름다운 곳에 시내를 끼고 앉은 현동(賢洞)마을.현동(賢洞)은 예로부터 수많은 인재(人才)가 많이 배출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등교육의 본산(本山)인 집현초등학교(集賢初等學校)가 건재하고, 해마다 수재(秀才)를 길러 내는 현동(賢洞). 집현면(集賢面)의 3대 명당(明堂) 중의 하나로 알려진 현동은 강인한 민족정신의 발로(發露)를 엿볼수 있음과 동시에 ‘살아서 꿈틀대는 집현의 정기(精氣)’를 음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리의 얼굴이자 역사인 느티나무가 600년의 세월을 품고 말없이 서있고, 들판의 여문 곡식처럼 알알이 익어가는 현동의 역사(歷史)는 후학(後學)들의 자양분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현동(賢洞)은 일제강점기 이래로 당하(堂下)로 부르다가 1995년 10월1일부터 현동(賢洞)이라는 고유지명을 찾게 되었다. 현동의 지명유래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300년전 지금의 봉강(鳳降)과 당하(堂下)를 합쳐 현동(賢洞)으로 불렀는데, 그 뒤에는 서편이라 불렸으며, 그후 당하마을 뒤편 큰 정자나무 아래에 안씨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당안’이 되었고, 다시 일제강점기 당시, 지내마을과 현동마을 사이의 사랑등이라는 산 능성에 큰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아래에 있는 동네라 하여 당하(堂下)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이 민족말살 정책의 하나로 우리의 지기(地氣)를 차단하기 위해 강제로 동명(洞名)을 당하(堂下)로 바꾸었지만, 주민들의 의지(意志)로 고유의 지명을 되찾은 것은 지난 1995년이다.진주시는 일제시대때 임의로 바뀐 우리의 고유 지명을 찾아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고유지명 찾기 운동을 폈다.그 결과 집현면의 당하(堂下)를 원래 지명인 현동(賢洞)으로 바꾸자는 뜻을 모았고, 마을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압도적인 찬성으로 고유지명을 되찾게 된 것이다. 현동(賢洞)은 지명(地名)에 걸맞게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순흥안씨 조상의 위패를 모신 집현정사(集賢精舍)와 숭조사(崇祖祠), 절충장군의 묘, 보호수 등 마을의 역사를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전형적인 농촌마을로 2000년 10월31일 현재 66세대 235명의 주민들이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는 현동은 농가의 50%가 딸기재배를 하며 고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현동․새터․몽골 등이 있다. 집현초등학교에서 북서쪽으로 500m 지점에 위치한 현동마을은 수령이 600년인 느티나무와 함께 역사를 써왔다. 그 옛날 마을의 이름을 강제로 빼앗겼던 아픔도 간직하고 있고, 마을주민들의 희노애락을 세월속에 묻어 놓고 오늘에야 하나 하나 그 잎들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느티나무는 마을사람들의 회의장소로 기능했으며, 마을축제때는 더없이 좋은 잔치마당이기도 했다. 수백년의 세월을 간직했음직한 ‘들돌’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에 마을 청년들이 힘자랑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절충장군비가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의 역사를 일러주고, 삶을 꾸려 나가는 주민들에게 ‘지난한 삶을 깨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지내천을 주 용수로 사용하고 있는 현동마을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추억거리가 있다. 지내천 직강공사를 하기 전에 옛 하천에서 현동 앞들과 덕곡을 연결하는 폭 1m의 나무다리가 세워져 있었는데 대홍수로 없어졌고 내천 보를 이용하곤 했다.내천의 물이 많을 때는 신발을 벗고 왕래하기도 해 아직도 그 나무다리를 기억하고, 지나온 삶을 되새기는 마을사람들은 ‘평범한, 너무 평범한 그 때의 마을풍경’을 지금도 생생히 전한다. 새터마을은 새로 만들어진 동네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 졌는데, 집현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마을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볼때 새터는 ‘만석꾼’이 날 자리라는 말이 전해 내려 올 정도로 좋은 지형을 갖고 있다. 집현면의 3대 명당을 꼽을 때 흔히 집현초등학교 자리와 집현면 사무소, 응석사를 꼽곤 하는데 새터는 바로 집현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는 ‘양지터’로 손꼽히고 있다.현재 양지터는 해마다 가구수가 늘어 나고 있는 추세이며, 딸기재배로 인해 농가소득도 꽤 괜찮은 고소득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 2026-07-11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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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Jinju 자연마을을 찾아서 - 연재를 시작하며

자연마을을 찾아서 -연재를 시작하며 전국적으로 면지(面誌) 발간 붐이 일었다. 아마 2000년 초의 일로 기억한다. 진주에서 처음으로 명석면지가 발간 된 이후 각 읍면에서 면지 발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우연한 기회에 집현면지를 집필하게 되었다. 짧은 글들은 기회가 생길때 마다 쓰곤 했지만 한 지역의 역사를 담은 책을 저술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냥 한 번 해보자하는 마음으로 집현면지 집필에 도전했다.특정 지역의 역사, 문화, 인물 등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거의 2년 가까이 걸린듯 하다. 집현면지편찬위원회가 구성되고 마을 어른들과 함께 집현면 곳곳을 다니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특히 마을마다 구술을 해주신 어른들의 도움이 컸다.집현면의 자연마을 곳곳을 찾아다녔다.특별할게 없이 평범한 마을들과 사람들과의 만남은 당시로서는 꽤나 신선했다.도심에서 허비하는 일상의 시간들과 다른 특별한 만남으로 느낀것 같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루어진 집현면지 편찬작업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동네 어르신들이 함께 한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열고 '집현면지' 출간을 기념했다. 집현면지 집필 이후 , 대평면지, 미천면지, 수곡면지를 집필하는 기회를 가졌다.진주의 면단위 지역의 역사를 집대성한 면지발간은 이후 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면지 집필을 하면서 자연마을을 찾아다니며 적은 글이 면지에 수록된 '자연마을을 찾아서'이다. 글을 적은지 최소 20년의 시간이 지났다.다시 자연마을을 찾아서 20년 전과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오늘에 이르고야 말았다. 진주평론 홈페이지가 만들어지면서 직접 집필한 4개 지역의 면지(집현면, 대편면, 미천면, 수곡면)에 수록된 자연마을에 대한 기록을 게재하기로 했다.물론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발전된 자연마을도 있겠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자연마을을 찾아서를 연재하는 이유는 지금에야 돌아보게 되는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되살리고픈 마음이 더 크다.40대 초반에 적은 글들을 환갑이 지난 지금에야 들여다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도 되리라 생각한다. 부끄러운 글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20년 전 추억을 되새기면서 한 편 한 편 살펴보고 조심스레 올린다. 많은 격려를 부탁드린다.

  • 2026-07-02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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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한 진주) 2. 남강 스타일, 대평 스타일 -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썸네일 이미지

Tour Jinju (고고한 진주) 2. 남강 스타일, 대평 스타일 -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남강 스타일, 대평 스타일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시간(時間)의 강(江) 위로 ‘3000년 진주의 비밀’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 최고 규모로 알려진 청동기시대 진주인(晋州人)의 삶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남강(南江) 물결 따라 켜켜이 쌓인 역사가 면면히 흐르는 곳. 풍요(豐饒) 땅, 진주의 대평유적(大坪遺跡)이다. 남강을 이웃한 ‘대평(大坪)’은 이름만큼 넉넉한 품을 내어 주었다. 남강을 따라 사람들이 산 것은 10만 년 전인 중기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의 일이다.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에 들어서면서 진주 사람들은 남강을 곁에 두고 집을 지었다. 그렇게 풍요의 물줄기 남강의 물결 따라 청동기 시대 진주 사람들의 삶은 곧 역사가 되었다.‘3000년 전 진주의 비밀’을 품은 청동기 시대 진주 대평 유적은 아주 잠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후 진양호 아래로 사라졌다. 최대 1만 평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청동기시대 밭 경작지와 400여 동의 집터, 100여 기의 무덤, 옥과 석기를 만드는 공방, 고도의 토목기술과 노동력이 집약된 환호 등의 마을 유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남강 물결 따라 청동기 시대 문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3000년 전 진주인의 삶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晋州靑銅器文化博物館)이다. 남강 물결 따라 청동기문화를 만나다 풍요의 물줄기 남강 물결을 따라서 대평유적(大坪遺跡), 귀곡동유적(貴谷洞遺跡), 평거동유적(平居洞遺跡) 등의 많은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선사시대 진주역사의 발원지인 남강이 만들어 낸 ‘남강선사유적(南江先史遺跡)’의 현장들이다. 대륙문화의 종착지인 남강 유적은 신석기-청동기-삼한시대로 이어지는 선사시대 역사의 변천 과정을 밝혀주는 한국 고고학의 보고(寶庫)이다.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진양호에 삶의 터전을 내어 준 대평 사람들의 애환과 청동기시대 대평인의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남강이 품어 낸 청동기시대와 대평인(大坪人)의 흔적을 찾아 떠나본다.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번성했던 진주 남강유역의 청동기시대 진주지역 문화상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지난 2009년 개관했다. 특히 진양호의 아름다운 풍광과 어우러지는 야외전시장과 수변 산책로를 가지고 있다. 지난 2021년 9월 대대적인 시설 개선을 통해 체험형 콘텐츠 보강을 비롯해 쾌적한 관람환경을 제공하는 역사문화체험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대한민국 선사유적의 보고 대평유적은 ‘대평(大坪)-대평 그 이전’ ‘풍요(豐饒)-농경생활’ ‘기술(技術)-대평공방’ ‘영원(永遠)-무덤과 의례’로 요약된다. 남강 물결 따라 축적된 청동기 문화는 대평, 그 이전에서 시작된다. 대평(大坪)-대평, 그 이전 대평리 강 건너 마을인 상촌리(上村里)에서 대규모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이 발견되었다. 선(線)을 그어 표면을 꾸민 빗살무늬토기와 사람의 뼈가 보관된 독인 옹관(甕棺), 그 외에 돌로 만들어진 여러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더불어 조, 수수 등과 같은 잡곡이 불에 탄 상태로 발견되어 신석기시대 남강 유역에서 이미 농경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인 ‘새김 덧띠 무늬 토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토기의 입구 바깥쪽 아래에 덧띠라고 부르는 점토를 붙이고 그 위쪽에 사선 무늬를 깊이 새겨 넣은 형태의 토기이다. 돌칼, 붉은 간 토기 등과 함께중국 동북 지역의 농경문화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특히 상촌리 신석기 시대 14호 집자리에서 사람의 뼈가 보관된 독인 옹관(甕棺) 2점이 발견되었다. ‘상촌리 14호 옹관’은 옹관은 세워진 채로 발견되었다. 내부에서는 불에 탄 어른 뼈가 확인되면서 화장(火葬)과 같은 장례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풍요(豐饒)-농경생활 선사시대에 삶의 방식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는 농경(農耕)이다. 농경사회로의 진입은 인류의 삶의 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집단생활, 식량과 재화의 축적, 인구 증가, 수공업품을 생산하는 장인(匠人)의 등장과 함께 최첨단 기술의 결과물인 청동기도 받아들여진다. 청동기시대의 이른 집자리는 대평리 어은과 대평리 옥방마을에서 조사되었다. 네모 반듯한 방형 혹은 직사각형 장방형의 평면형태의 집자리에는 출입 시설과 화덕, 토기를 땅에 묻어 저장시설로 사용한 흔적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 초기의 토기로 새김 덧띠 토기와 낮은 바리 항아리 모양의 호형토기 등 다양한 토기들이 제작되었다.토기에 남은 조리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대평마을에서 출토된 토기의 경우 표면에 까맣게 거을린 흔적과 음식물이 끓어 넘친 흔적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음식을 조리했을까. ‘화덕에 토기를 잘 세운 후, 그 주위에 나무 등의 연료를 쌓아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청동기시대 농경에 사용된 도구들은 대부분 돌로 만들어졌다. 밭을 일굴 때 사용하는 괭이, 호미, 돌보습, 곡물 수확할 때 사용하는 반달 돌칼, 돌낫이 출토되었다. 사냥 도구도 보인다. 대평인들의 삶에서 사냥도 큰 부분을 차지했다. 사냥에 유용한 도구로는 돌 화살촉이 있고 돌창과 사냥 돌도 사용되었다. 함정을 파 놓고 짐승이 걸려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기술(技術), 대평 공방 농경사회 진입과 잉여 농산물의 증가는 대평인들의 재화 소비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자급자족 시기를 넘어 분업화·전문화 생산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강 유역에서는 이같은 전문 장인(匠人)의 등장을 엿 볼 수 있는 다수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분야는 토기(土器), 석기(石器), 옥기(玉器), 직조(織造) 등 다양한 분야이고 그 생산물은 교역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청동기시대 옷 제작과 관련한 유일한 유물이 있다. 바로 가락바퀴이다. 옷감을 펴기 위해 섬유 여러 가닥을 꼬아 실을 만들고 가락바퀴를 회전시켜 탄력 있는 섬유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대평 석기 공방’이 있었다. 청동기시대에는 나무와 돌을 이용해 도구를 만들었다. 대평마을에서 석기를 만드는 재료, 도구, 돌가루가 확인돼 석기를 만드는 전문적인 공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대평 옥 공방’도 주목할 만하다. 대평마을에서는 옥마석을 비롯해 가공 이전의 옥(玉) 원석(原石), 석영으로 만든 뚜르게, 활비비 추 등이 확인되었다. 대평의 옥은 남해안을 따라 축조된 여러 대형 고인돌에 부장될 만큼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다.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사용된 ‘가지 무늬 토기’와 ‘붉은 간 토기’도 있다. 가지 무늬 토기는 둥근 토기 몸체에 어깨 부분에 검은색 가지 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남 서부 지역에서만 발견된다. 영원(永遠)-무덤과 의례 농경의 보편화로 정착해 살게 된 사람들은 일종의 기념물로 ‘무덤’을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집 자리의 바로 옆이나 밭 한가운데 열(列)을 지어있거나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영역을 분리하지 않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내세관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늦은 시기가 되면 점차 생활공간과 무덤의 공간이 분리되면서 공동묘지가 만들어졌다. 더불어 고도의 노동력과 많은 재화가 투입되는 대형무덤이 조성되기도 했다. 죽음을 애도하는 의례는 청동기시대의 사회를 통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청동기시대 매장의례(埋葬儀禮)는 시신과 함께 부장품을 묻는 방식이었다. 부장 유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지 무늬 토기와 붉은 간 토기이다. 보통 가지 무늬 토기는 관 바깥쪽, 붉은 간 토기는 관 내부의 시신 옆이나 머리맡 혹은 발치에 부장한 특징이 있다. 남강스타일, 대평스타일 남강 유역의 지역성을 보여주는 독특한 문화요소가 있다. 이름하여 ‘대평스타일’이다. 대평리식 겹아가리 사발(大坪里式 二重口線 盌)이다. 이 사발은 입구 부분 바깥에 점토 띠를 덧붙인 후 입술 부분을 안쪽으로 비스듬히 깎아 내 단면이 두꺼운 삼각형을 띠는 토기이다. 남강유역에서만 확인된다. 입술 부분이 아래로 수평의 횡침선을 새긴 가로 줄무늬 사발(赤色磨硏土器)은 대평리식 겹아가리토기의 변형이다. 얇은 판석 몇 매를 듬성듬성하게 세워 긴 벽을 만든 석관묘(石棺墓)와 말각방형의 형태에 내부 중앙의 타원형 구덩이와 일부 중복되거나 일부 떨어지도록 두 개의 기둥구멍을 만드는 독특한 대평리식 집자리(大坪里式 住居址)도 남강유역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청동기 역사 탐험, 상설전시관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에서는 상설전시관과 야외 전시를 통해 수몰된 진주 남강 유역 청동기시대의 진품 유물과 실감 체험형 전시로 만날 수 있다. 상설전시관은 대평지역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청동기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상설전시관은 9개의 테마공간을 통해 대평 유적을 쉽게 알 수 있다.상설전시관의 첫 공간은 「가라앉은 비밀」이다. 진양호 아래 수몰되어 있는 대평리 유적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인트로 공간으로 암각화와 수몰 모습을 연출해 대평리 시대속으로 들어가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전이공간(轉移空間)공간이다. 다음은 「대평, 그 이전」이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에 이르기까지 시간적 흐름과 연혁을 이해하고 각 시대별 유물을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실감영상관」은 360도 입체 서라운드 영상관으로 타임가이드 호봇이 풍요로운 대평마을의 축제현장으로 안내한다. 「풍요, 농경생활」에서는 대평리의 이른 시기와 늦은 시기의 주거지와 토기를 확인하고 농경사회 모습과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기술, 대평공방」은 직조공방, 석기공방, 옥공방 등 대평리의 기술을 관람하는 곳으로 각 유물의 제작 방법 및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영원, 무덤과 의례」는 대평인의 권위와 죽음을 다룬 공간으로 환호와 부장양상, 제사유구를 확인할 수 있다. 「AR드론 관측실」의 「VR옥공방」에서는 가상현실로 대평의 특산품인 옥을 직접 제작해 보고, 여행을 마친 후에는 타임케슬 승강장에서 자신이 만든 옥 팬던트가 새겨진 굿즈(기념품)을 받을 수 있다. 「대평의 기억」 코너는 대평인의 식문화에 관련한 모습을 터치하면 해당 내용을 인터랙티브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연출하고, 모니터를 통해 움집, 망루를 움직여서 청동기마을을 직접 꾸며보는 참여형 방명록이다. 추억 저장공간, 야외전시장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에 들어서면 청동기시대 유적을 재현한 야외전시장이 눈길을 끈다. 야외전시장은 청동기시대 대평마을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이다. 마을을 보호하는 나무 울타리인 목책과 움집, 곡식을 저장한 다락 창고, 강변을 따라 넓게 펼쳐진 밭, 밥을 해 먹던 아궁이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다. 야외전시장 역시 9개의 테마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토기탐험」 코너는 박물관의 대표 유물인 대형 가지무늬토기를 전시하고 있어 추억을 쌓고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공간이다. 「호봇 공방」 코너는 청동기시대 늦은 시기의 옥 공방과 석기 공방으로 사용되던 말각 방형의 집 자리를 재현한 공간이다. 「다락 창고」 코너는 청동기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여러 가지 먹거리를 저장하던 다락 창고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공간이다.「진주네 집」은 이웃 부족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한 대평마을 사람들을 도와서 밥을 짓고 농기구도 수리해 보는 공간이다. 「대평이네 집」에서는 대평이와 진주의 움집 생활을 홀로그램 뮤지컬로 꾸며 놓았다. 「야외 아궁이」코너는 청동기시대 늦은 시기, 야외 아궁이에 함께 모여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던 모습을 재현한 공간이다. 「캐릭터 존」은 아름다운 진양호를 배경으로 다양한 대평 사람들과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공간이다. 「남강유역 움집 재현 실험」은 남강 유역에 축조되던 집 자리를 재현하는 실험으로, 1년 동안 존치·전시되면서 유지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무덤군」은 가호동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무덤을 이전 복원한 공간이다. 즐거운 놀이로 역사를 배우다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아이들이 즐거운 문화놀이터’로 변신했다. 역사 공부 대신에 즐길거리를 가득하다. ‘놀이를 통해 진주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한다.’는 전략은 기가 막히게 통했다. 박물관의 주 관람층이 자녀가 중심이 되는 가족 단위라는 점에서 확인된다.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은 시간여행 탑승권인 ‘옥 목걸이’를 받는다. 시간여행 가이드인 호봇의 안내를 받으며 풍요로운 청동기시대 대평마을로 타임워프(Time Warp)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받는다.미디어 체험 전시를 도입한 상설전시관은 풍요, 기술, 영원이라는 주제로 진주 대평 유적과 평거동, 초전동 등지의 진주 청동기시대에 출토된 진품 유물 4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청동기시대 대평마을의 생활모습을 재현한 전시모형(디오라마)와 AR맵핑으로 만날 수 있는 AR관측실에서는 청동기 시대 마을을 산책하는 듯한 편안한 공간 속에서 사냥, 목책 수리, 무덤 만들기 등의 게임도 즐길 수 있다. 특히 VR 옥 공방에서 만드는 옥 목걸이 팬던트는 관람객의 얼굴을 인쇄할 수 있어 ‘나만의 기념품’을 가질 수도 있다.새롭게 조성된 기획전시관에서는 ‘별을 보며 풍요를 빌다’라는 주제로 농경과 자신만의 별자리를 만들어 밤 하늘에 띄울 수 있는 체험도 할 수 있다. 물빛이 아름다운 진양호를 바라보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계단 전망 쉼터와 북카페인 옥방 쉼터도 박물관의 명소이다.야외전시장에는 청동기 주거지를 재현해 놓고 있다. 넓은 잔디밭과 호반 산책로가 자랑이다. 여기서 모션 인식형 체험, 홀로그램 뮤지컬을 즐길 수 있다. 아름다운 경관을 갖고 있는 야외 수변 공간에서는 XR망원경으로 수몰된 대평리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을 실감 기술로 물 위에 재현해 는 색다른 문화 체험을 제공한다.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선사시대 진주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진양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다양한 볼거리와 함께 3000년 진주역사를 간직한 선사시대 진주 특별시이다’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조가영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기획전시, 진주 평거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2024년 기획전 「진주 평거」를 선보였다. 이 기획전은 진주시 읍면동의 시대와 문화 흐름을 다루는 연속 기획전의 첫 번째로 평거지역(평거동 및 신안·판문동 일부)를 대상으로 했다. 예로부터 살기 좋은 땅 평거(平居)의 이미지를 진품 유물, 영상자료, IT전시기법 등을 활용해 친근하게 풀어냈다. 기획전 진주 평거는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 순으로 전시구성을 했다. 평거의 생활 변화상과 도시 발달사를 보여주기 위하여 국립진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평거동 출토 고고 유물 80여 점을 활용해 ‘평거 마을의 탄생’, ‘능숙한 농사꾼들의 마을’, ‘문명이 꽃피는 평거 마을’ 등의 주제로 입체적으로 전시했다. 특히 ‘영혼의 통로, 붉은 간 토기’ 전시는 3면 맵핑 영상과 투명 디스플레이를 활용하여 평거동에서 출토된 긴 목 붉은 간 토기에 담긴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망자에 대한 관념과 염원을 부각시켰다. ‘진주성도(晉州城圖)에 담긴 평거의 풍류’와 ‘평거지(平居誌)에 담긴 평거의 평안’ 전시에서는 진주성도(부산시립박물관 소장품)에 담겨진 촉석루에서 광탄까지 이어지는 뱃놀이의 모습을 평거산수도(平居山水圖)와 연계하여 미디어 전시로 재현했다.평거지의 실물 자료도 공개되었다. 이 자료는 1893년 우산 한약우(愚山 韓若愚, 1868-1911)가 작성한 것이다. 평거지에는 평거산수도와 유오서당도(柳塢書堂圖) 등 2장의 그림이 실려 있는데, 이 일대의 지명과 당시의 공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평거 일대는 1984년 진주 도시기본계획에 의해 주거지역으로 개발의 기본 방향이 수립되었다. 이에 ‘체계적 계획도시, 평거동’에서는 도시기본계획을 바탕으로 설계된 쾌적한 주거지역인 평거동 일대의 개발과 변천과정을 다루었다.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남강의 물줄기를 품고 있는 듯한 형상의 전시관과 청동기시대 마을의 모습을 재현한 야외전시장은 남강 유역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실감 기술과 다양한 전시기법으로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남강 물결 따라 청동기문화의 진수를 만날 수 있는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을 찾아 대한민국 최대, 최고의 선사유적지인 대평 유적과 함께 선사시대를 살았던 진주 사람들의 삶을 마음에 담아 보기를 권하고 싶다.

  • 2025-08-21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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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한 진주) 1. 익룡(翼龍), 진주 하늘을 지배하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  썸네일 이미지

Tour Jinju (고고한 진주) 1. 익룡(翼龍), 진주 하늘을 지배하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

익룡(翼龍), 진주 하늘을 지배하다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 백악기(白堊紀) 익룡(翼龍)이 진주의 하늘을 지배했다. 일억 일천만 년 전 백악기 익룡의 땅이었던 진주(晋州)는 자연사(自然史)의 보고(寶庫)이다. 중생대 백악기 공룡(恐龍)은 진주 땅의 지배자였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육식공룡의 화석을 보유한 화석산지(化石産地) 진주는 1억여 년 전 백악기 자연유산(自然遺産)의 보물창고임에 손색없다. 진주에는 4개의 공룡화석산지가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천연기념물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공룡축제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경남 고성군은 화석 관련 천연기념물이 2개에 불과하다. ‘화석산지(化石産地) 진주(晋州)’의 가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세계 최대의 중생대 익룡 발자국 화석이 전시된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서 ‘고고(古古)한 자연사 여행’을 떠나 본다. 익룡(翼龍), 진주 하늘을 날다 세계 최대 규모의 중생대 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갈퀴 새’를 포함해 새 발자국 화석 642개와 육식공룡인 수각류의 발자국 화석 67개가 발굴되었다. 당시 이 화석산지는 문화재계와 학계를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진주는 다양한 중생대 백악기 생물들의 흔적인 화석이 존재하고 있는 세계 최대, 최고의 화석산지로 고고학계에 등장했다. 진주혁신도시 조성 공사 중 발견된 천연기념물 제543호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가 바로 그곳이다. 경남 진주 혁신도시 개발 사업 조성 공사 구역 내 입회 조사를 실시하던 중 토목공사 구역의 퇴적층에서 익룡 발자국 화석, 새 발자국 화석, 수각류 발자국 화석 등의 화석이 대규모로 발견되었다. 발굴 조사에서 발견된 익룡 발자국은 개수, 밀집도, 그리고 보존 형태 등에서 국내 최대로 발견되어 학술적 가치와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2011년 10월 14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 백악기 하늘을 지배했던 익룡과 다양한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익룡자연유산적 가치 세계 최대 규모의 익룡발자국 화석이 매우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발견되었다. 이는 중생대 백악기 당시 익룡의 행동 특성 연구와 익룡의 해부학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 특히 단일 지역 내에서 최고의 생물 다양성 군집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전 지구적인 백악기 공룡시대의 고생태와 고환경 이해에 있어 중요한 자연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이 지역에 분포하는 백악기 진주층은 호수 또는 호수주변부 퇴적환경에서 형성되었으며 발자국 화석의 생성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고고학계에 따르면 세계 최대 규모의 익룡 발자국을 비롯해 매우 잘 보존된 도마뱀 발자국, 세계 최소 랩터 발자국 등 진주에서 발견된 우수한 화석들이 가지는 가치와 중요성이 높다. 국내에서는 1996년 전남 해남에서 아시아 최초로 300여 점의 익룡 발자국이 발견된 이후, 경남 하동, 사천, 거제 등지에서도 나타났다. 하지만 진주의 화석산지는 규모 면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이 산출된 곳으로 관심을 모았다. 특히 발자국 화석의 경우에는 걸어 다닌 흔적인 ‘보행렬’도 5개 이상 발견이 된 것은 물론 보존 상태도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는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을 개관하고, 익룡 발자국 2,500여점을 비롯해 중생대 백악기 생물들의 화석을 전시함과 동시에 1억 1천만년 전 익룡과 공룡 등 당시 동물들의 발자국 화석을 보유한 진주의 고고학적 가치를 대내외에 알리고 있다.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에서 발견된 주요 발자국 화석은 익룡 발자국 2,486개, 새 발자국 1,220개, 육식공룡 발자국 122개, 초식공룡 발자국 47개, 척추동물 발자국 11개 및 악어·도마뱀·개구리·포유류 발자국 등 약 4,000여개인 것으로 보고되었다.현재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 전시된 주요 화석은 다음과 같다. ▲밀집된 익룡 발자국 화석 ▲ 아주 작은 아기 익룡의 발자국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개구리의 발자국 ▲ 세계에서 가장 작은 육식 공룡인 랩터의 발자국 ▲ 중생대 백악기 호수에 살았던 악어와 거북의 발자국 ▲ 가느다란 발가락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겨진 도마뱀 발자국 ▲ 캥거루처럼 뒷발 두 개로만 깡충깡충 뛰어다니던 뜀걸음형 포유류의 발자국 ▲ 수컷 육식 공룡이 짝짓기를 위해서 암컷 육식 공룡을 유혹했던 구애 흔적 ▲ 네 발로 걸어 다닌 포유류의 발자국 ▲ 정체를 알 수 없는 대형 척추동물의 발자국 등이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의 진주화석관(晋州化石館)에는 진주혁신도시 조성 공사 중 발견된 1억 1천만 년 전 살았던 익룡 발자국 화석뿐만 아니라 희귀한 도마뱀 발자국과 세계에서 가장 작은 랩터 발자국, 캥거루쥐 발자국까지 다양한 발자국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도마뱀 발자국희귀한 도마뱀 발자국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는 전 세계에서 단 3개만 발견된 1억 1천천만년 전 도마뱀 발자국이 전시되어 있다. 도마뱀은 무게가 가벼워 발자국을 남기기 어렵고 서식지가 달라 공룡에 비해 화석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랩터 발자국 거대한 육식공룡의 이미지와 달리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룡인 랩터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발자국 길이가 1cm로 ‘진주에서 발견된 드로마에오사우루스의 발자국’이라는 의미로 ‘드로마에오사우리포미페스 라루스(Dromaeosauriformipes rarus)라고 불린다. 일반적으로 랩터는 세 개의 발가락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먹이를 낚아 채기 위해 위로 휘어져 있어 두 개의 발자국을 남긴다. 수각류발자국최초 발견, 억어 발자국 화석 혁신도시 조성 공사 중 가장 먼저 발견된 화석은 중생대 백악기 공룡과 함께 생활한 악어(鰐魚) 발자국 화석이다. 발견된 화석수는 2,486개이다. 악어는 앞다리는 5개의 발가락, 뒷다리는 4개의 발가락을 갖고 있다. 뜀걸음 포유류 발자국 화석 코리아살티페스 진주엔시스(Koreasaltipes Jinjuensis)는 ‘진주에서 발견된 한국의 뜀걸음 발자국’이라는 의미의 학명이다. 이 발자국 화석은 캥거루처럼 두 발로 깡충깡충 뛰어다녔던 작은 포유류이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의 진주화석관(晋州翼龍館)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익룡 발자국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진주에 살았던 익룡으로 추정되는 듕가리프테루스의 뼈 화석(복제)가 대표적이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 내부세계 최고 익룡 발자국 화석산지 진주혁신도시에서 발굴된 익룡 발자국은 8개의 발굴 지층에서 2,500여 개가 발견되었다. 대부분의 발자국은 1, 4, 8층에서 800여 개씩 발견되었다. 특히 일부 익룡 발자국에는 물갈퀴와 발톱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어 ‘최대 최고의 익룡 발자국 화석산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진주에 살았던 익룡 진주에서 발견된 익룡 화석은 ‘듕가리프테루스 화석(Dsunggaripterus Weii)’와 ‘안항구에라 화석(Anhangguera Blittersdorfi)’이다. 듕가리프테루스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끝이 뾰족하고 길쭉한 턱으로 위로 굽어있고, 턱 앞부분은 이빨이 없으나 턱 뒤쪽에는 강하고 뭉툭한 이빨을 가지고 있어 부리로 조개 등을 찾아 이빨로 부숴 먹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안항구에라는 포르투칼어로 ‘늙은 악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약 4.6m의 큰 날개를 가지고 있는 중형급 익룡이다. 세계 최고(最古)의 개구리 발자국 진주에서 발견된 개구리 발자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4번째 발견이다. 개구리 발자국 화석을 보면 4개의 앞발과 뒷 발자국이 보존되어 있고, 연속적인 뜀걸음 보행렬(hopping trackway)이 관찰된다. 새 발자국 화석들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을 통해 새들이 개구리를 잡아먹기 위해서 이곳을 돌아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개구리 발자국 화석은 최소 1억 1천만 년 전에 개구리가 점프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증거이다. 보호각전 세계가 진주를 주목하다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들 논문들 중에 주목을 받고 있는 논문은 ▲ 세계에서 가장 작은 랩터 공룡 발자국(사이언티픽 리포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개구리발자국(백악기연구) ▲가장 큰 도마뱀 발자국(사이언티픽 리포트) ▲동북아시아 최초의 악어발자국(백악기연구) ▲뜀걸음형 포유류 발자국 ▲육식 공룡 발자국 화석 등 백악기 공룡생태계를 알 수 있는 다양한 화석들에 대한 연구였다.‘진주에서 최초로 발견된 화석’으로 이름이 명명된 것은 3종류이다. ‘드로마에오사우리포미페스 라루스’(Dromaeosauriformipes rarus), ‘네오사우로이데스 이노바투스’(Neosauroides innovatus), ‘코리아살티페스 진주엔시스’(Koreasaltipes jinjuensis)다. 더불어 새로운 종류의 익룡 발자국으로 테라이크너스 그라실리스(Pteraichnus gracilis)로 명명된 화석이 있다. 한국, 일본, 스페인에서 보고되었던 소형 익룡 발자국과 비교해 앞발자국에서 뒤쪽을 향하는 세 번째 발가락이 길이가 더 길고, 좁고 긴 형태를 보이고 있는 이 소형 익룡 발자국 화석은 중생대 백악기 동안 호수에서 퇴적된 진주층에서 발견되었으며 약 1억 700만 년 전에 살았던 익룡이 남긴 발자국이다. 중생대 백악기 화석산지의 중심, 진주 진주는 전 세계적인 화석산지의 중심이다. 현재 진주의 화석산지는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390호) ▲진주 가진리의 새발자국 및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395호) ▲진주 정촌면 백악기 공룡·익룡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566호)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543호)가 있다. 진주 가진리의 새 발자국 및 공룡 발자국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395호로 새와 공룡의 발자국이 함께 남아 있는 드문 경우에 해당하는 화석산지이다.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세계적인 공룡과 새 발바국 화석산지이다. 원래 해발 55m 정도의 구릉지였다. 경남과학교육원 신축과정에서 화석이 발견되었다. 발굴 결과, 5개 지역에서 새 발자국 2,500개, 공룡 발자국 80개, 양 날개 길이가 20m에 달하는 익룡 발자국 20개가 발견되었다. 새발자국은 3종으로 나뉘는데 가장 큰 발자국은 길이가 419m에 달한다. 땅의 겉표면이 말라 거북이등처럼 갈라져 터진 모양과 물결자국 등도 발견되었다.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390호이다. 이 화석산지는 약 1억 년전 중생대 백악기에 물과 바람에 의해 모래와 진흙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퇴적층으로 두 개의 공룡화석층이 150m 사이를 두고 발견되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용각류의 지골, 발가락 뼈, 새끼 공룡의 좌골화석, 종류를 알 수 없는 두개골 화석 2점, 장골편 등 147점에 달하는 공룡화석이 발굴되었다. 오래된 토양층이나 나무 그루터기 화석, 숯 화석, 각종 과거 생물의 생활 흔적 화석 등 다양한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공룡이 살던 당시의 환경과 화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진주 정촌면 백악기 공룡·익룡발자국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566호이다.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과 익룡을 비롯해 1만 여개의 발자국 화석이 대거 발견되었다. 단일 화석지로 높은 밀집도와 다양성이 있는 화석 산지로 보고되었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로 보고되었다 7,000여개의 공룡 발자국이 집단 보행을 하는 화석이 발견된 것이다. 특히 2cm 남짓한 아주 작은 크기의 발자국부터 50cm가량 되는 대형 육식 공룡 발자국까지 나타났다.이 화석산지는 발자국의 밀집도, 다양성, 학술적 가치 측면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더불어 1억 년전 대한민국에 살았던 동물들의 행동양식, 서식환경, 고생태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진주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주요 화석산지이다. 진주 권역에 집중된 공룡 발자국 등의 화석의 보관과 관리, 연구의 필요성이 매우 높다. 현재 중생대 백악기 화석산지인 진주에 국립지질유산센터의 설립을 추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025-08-12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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