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6-07-26 22:22(일)

전체기사
로그인 구독신청
구독신청

제10대 진주시의회에 바란다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 작성일

    2026.07.26 PM 22:11

  • 조회수

    69

‘의회의 권위는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신뢰에서 나온다’ 제10대 진주시의회가 '자리의 정치'를 넘어 '책임의 정치'를 보여주는 의회가 되길 기대한다.

제10대 진주시의회에 바란다

 

제10대 진주시의회 전반기 원구성이 마무리됐다. 

다수당인 국민의 힘이 의장과 상임위원장 자리를 독식했고, 더불어민주당은 상임위원장 배정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진주시민은 더불어 민주당에 압도적인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예상된 결과였다.

 

지역 언론에서는 전반기 원구성의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궁금한 것은 따로 있다. ‘진주시의회는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무엇을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진짜 원구성의 시작이다.

 

사실 지방의회 원구성 때마다 반복되는 풍경이 있다. 

의장 선거, 상임위원장 배분, 정치적 셈법 등이다. 

하지만 시민들에게는 누가 어떤 자리에 앉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민들이 내어준 자리에 앉아서 ‘시민을 위해 어떤 일을 할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의회의 존재 이유는 행정을 감시하고 예산을 꼼꼼히 살피며 시민의 목소리를 대신하는데 있다.

지난 의회를 돌아보면 시민들이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도 분명 있었다. 

그래서 시민사회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이 계속 제기되었다.

 

‘집행부에 대한 견제는 충분했는지, 수천억 원의 예산은 제대로 검증했는지, 시민들이 궁금해하는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었는가?’

 

일각에서는 비판만 하는 의회가 문제라는 지적을 하곤한다. 

하지만 비판하지 못하는 의회는 더 큰 문제이다. 

비판과 감시, 견제와 협력,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해내는 것이 지방의회의 본래 역할이라는 점을 늘 잊지 않아야 한다.

 

앞으로 진주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청년들은 도시를 떠나고 있고, 여전히 원도심을 활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지역경제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고, 대형 개발사업은 시민의 세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끊임없이 검증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럴 때일수록 진주시의회는 집행부의 동반자이면서도, 시민을 대신해 질문하는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의장은 의회를 하나로 이끄는 리더십을 보여야 하고, 상임위원장은 전문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은 공부하는 의원, 현장을 뛰는 의원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진주시의회에 지지를 보낸 시민들에게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시민들은 더 이상 보여주기식 정치를 원하지 않는다. 

사진 한 장 찍기 보다는 정책 제안을 원한다. 

얼굴 알리기를 위한 행사 참석보다는 치열한 토론을 바란다. 

정당간의 정쟁보다는 시민의 삶을 바꾸는 결과를 가져오는 정치를 원한다.

 

이제 전반기 원구성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평가가 시작된다. 

앞으로 2년 동안 시민들은 의원들의 말보다 행동을, 약속보다 결과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의회의 권위는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신뢰에서 나온다’

 

제10대 진주시의회가 '자리의 정치'를 넘어 '책임의 정치'를 보여주는 의회가 되길 기대한다. 

당신을 위한 추천 평론
여성 의장 시대에 바란다 썸네일 이미지

여성 의장 시대에 바란다

‘여성의장 시대’ 여성 의장 시대는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와 다선 여성 의원의 증가를 확인할 수 있는 의미있는 변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지방자치가 시작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꽤 오랫동안 지방의회는 여전히 남성이 독식하는 정치문화가 강했다. 그런 점에서 여성 의장의 증가는 지방의회가 과거와 달리 다양성과 대표성을 점점 넓혀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된다. 전국 곳곳에서 여성 의장이 잇따라 선출되었다. 경남지역을 보면 진주시의회, 창원시의회, 하동군의회, 함양군의회, 거창군의회에서 여성 의장이 탄생했다. 여성 의장의 탄생은 지방의회의 변화로도 읽힌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착 측면에서는 분명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주목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지방의회의 의장이 여성으로 바뀌면 의회도 바뀔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아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성별이 리더십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결국 성별을 떠나 공정성과 소통, 그리고 책임감이 리더십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지방의회 의장의 역할은 분명하다. 최우선 덕목은 집행부에 대한 감시이다. 더불어 지역사회의 미래를 설계하고, 의원 간 갈등을 조정하며, 시민의 목소리를 의회 운영에 담아내는 최고 책임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의장이 특정 정당의 대표처럼 행동하거나, 집행부와 친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의회의 독립성은 지속적으로 흔들려왔다. 매번 집행부의 거수기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시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집행부의 손을 들어 주는데 골몰했다. 물론 이면으로 개인의 이익을 도모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장이 시민들의 대표가 아니라 시장이나 군수의 협력자가 된다면 시민은 의회를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은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 있다. 더 큰 문제는 ‘여성 의장 시대’라는 상징성만 내세워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여성 의장 시대’ 그 이후에 대한 냉정한 평가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여성 의장 시대 이후에 예산 심사는 더 치밀해졌는가, 행정사무감사는 더 날카로워졌는가, 주민의 목소리는 더 많이 반영됐는가이다. 만약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여성 의장 증가는 정치적 기록일 뿐, 정치적 변화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여성 의장이 늘어난 지금이야말로 더 엄격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그래서 ‘여성이라서 잘할 것’이라는 기대도, ‘여성이라서 부족할 것’이라는 편견은 사라져야 한다. 평가 기준은 오직 하나이다. 공정하게 의회를 운영했는가.강하게 집행부를 견제했는가.시민 편에 섰는가. 지방의회는 집행부 거수기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의장은 꽃자리가 아니라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지방의회가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의장의 성별이 아니라 구태의연한 의회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다수당이 독식하는 원구성 이전에 토론문화가 자리 잡아야 하고, 계파 정치보다 정책 경쟁이 우선돼야 하며, 정당의 이해보다 시민의 이익이 앞서야 한다. 여성 의장 시대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이제 시민은 단순히 성별을 보지 않고 성과를 볼 것이다.직함을 보지 않고 품격을 볼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이렇게 물을 것이다.당신은 여성 의장이었습니까, 아니면 좋은 의장이었습니까?“ 그 질문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여성 의장 시대는 지방정치의 진정한 발전으로 기록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다.정치는 성별로 평가받지 않는다. 다만 의장의 이름앞에 붙어야 할 수식어는 ‘여성의장’이 아니라 ‘공정한 의장’ ‘당당한 의장’ ‘시민의 의장’이어야 한다. 여성 의장 시대가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변화의 계기가 되기를 바래본다.

  • 2026-07-26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 조회수

    125

화투판 꼬라지 썸네일 이미지

화투판 꼬라지

화투판 꼬라지 일제강점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오락거리는 단연 ‘화투’였다. 밤이면 사랑방이나 주막에서 화투판이 벌어졌고, 농한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화투를 즐기기도 했다. 근데 문제는 이 화투판이 심하면 가산탕진에 자식까지 내다 팔게 하는 또 다른 마약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정치판도 선거판도 도긴개긴이다. 화투가 불러온 이같은 망조(亡兆)는 국제통화기금시대를 지나, 경제가 겨우 허리를 펴고 있다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소위 ‘육백’ ‘삥오도시’ ‘섯다’ ‘짓고땡’ ‘아도사키’로 이어졌고, 급기야 한때는 ‘박정희 고스톱’ ‘전두환 고스톱’ 으로 부활해 막가기도 했다. 한때는 그랬다. 화투판 풍경을 보자. ‘현금 박치기’ ‘안면 몰수’ ‘촌수 불문’으로 불리는 화투판은 ‘어머님 죽어요’ ‘아버님 쌌어요’라는 막가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상가의 밤샘 고스톱은 그래도 양반 축에나 꼈지만, 해외 공항 로비에서 신문지를 깔고 서너 명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는 광경은 각종 언론을 도배하기도 했다. 화투판이 정치판과 다를 게 없다는 비아냥 속에서 이른바 ‘화투판의 불문율’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화투판의 불문율에 칠 것 없으면 ‘비풍초똥팔삼’을 버리라는 말이 있다. 점수도 잘 안 나고 광도 아니고 띠도 아닌 애매한 패들을 빗대어 부르는 표현이다. 근데 이러한 패를 요즘 선거판에 비춰보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하나씩 풀어보자. ‘비’는 비리와 각종 의혹에도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일단 ‘모르쇠’로 버티는 사람이다. 사실 결과는 뻔하지만 우선 살고 보자는데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고(go) 스톱(stop) 구분이 잘 안되는 경우이다. ‘풍’은 살랑살랑 바람 부는 대로 이곳저곳 떠돌며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곳만 기웃거리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어른행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네 아이들조차 손가락질하는 줄은 모르는 사람들이다. ‘초’는 초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름인데, 겨우 먹고 사는 민초들의 멱살을 잡고 대장 앞에 무릎을 꿇리는게 도와주는 일인 양 착각하니 불쌍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다. 정치를 종교로 생각하는 부류가 이들이다. ‘똥’은 말 그대로 구린내 나는 자들인데, 각종 특혜 의혹 제기에도 ‘깨끗한 놈 있으면 나와 봐라는 식’으로 제 식구 감싸기는 물론이고 주변의 손가락질에는 깔끔하게 고개 돌려 외면하시는 분들이다. ‘팔’은 겉만 보면 팔팔해 보이는데 속은 팍삭 늙은 분을 말하는데, 내거는 기치는 가히 개혁적으로 보이지만 마무리는 ‘상전 눈치보기’의 대가여서 저래도 되나 싶은 분이다. ‘삼’은 평생을 로터리에 서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손바닥에 침을 뱉어 갈 길 점치는 자이니, 높은 자리에서 배 불리 먹고도 성에 안 차는 사람이다. 앞장서서 내뱉는 해괴한 말주변은 우리를 아연실색케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풍초똥팔삼'은 버려야 한다는 화투판 선각자들의 얘기가 맞는 듯하다. 아끼다가는 ‘피박’ ‘멍박’ ‘설사’로 피칠갑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옛 어르신들은 화투판과 정치판에 빠진 사람을 보고 ‘모기가 피 빨아 먹듯 돈을 빨아 먹는다’고 했다. ‘화투판은 피를 빨아 먹는 게임’이라는 농담과 궤를 같이 한다. 오래된 잡지에 실린 ‘모기’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치판이나 화투판에서도 상통하는 글이다.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 10g도 안되는 너와 더 이상 씨름하고 싶지 않다. 압사한 너의 시체에 경악하거나, 니가 사라진 장롱 위를 노려보며 버티는 것도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너, 돌아가라. 네 친구들인 파리와 바퀴벌레에게도 조심하라고 일러라. 나 오늘 홈키파 사왔다.’

  • 2026-07-26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 조회수

    331

기득권 카르텔은 지방선거에서 손 떼라 썸네일 이미지

기득권 카르텔은 지방선거에서 손 떼라

정치는 결국 신뢰다. 유권자들은 완벽한 정치인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평소 자신의 언행과 과거 정치적 행보에 대해 최소한의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모습을 기대한다. 근데 최근 선거 양상을 보면 특정 정당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고도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탈당하거나 무소속을 선택하는 정치인들의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제각각 내세우는 명분은 다양하지만 유권자들의 시선은 차갑다. 유권자를 정치적 명분의 도구로 이용하거나 볼모로 잡는 삼류정치의 전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당정치는 정치적 우산이 아니다. 일종의 정치적 약속이다. 공천 과정에서 촉발된 문제는 정당 내부에서 해결해야 마땅하다. 절대로 유권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된다. 정당의 그늘 속에서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다가, 정당 내에서 처지가 불리해지면 ‘이제는 시민만 믿고 간다’는 말로 무소속 명분을 포장하는 주장들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 심각한 것은 대부분의 무소속 출마자들이 마치 ‘정의로운 결단’처럼 포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그럴까. 유권자의 눈에는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보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보이지 않는 손’의 선거 개입 의혹이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일부 행정 조직, 관변단체, 동창회, 퇴직 공무원의 선거 개입 의혹은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문제이다. 물론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 일부 보이지 않는 손들은 오랜 기간 형성된 인맥과 영향력을 선거에 개입시켜 개인의 기득권 추구를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특정 후보의 권력 연장의 도구로 자처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역사회에서는 이러한 보이지 않은 손을 ‘기득권 카르텔’이라고 부른다. 지방선거가 오랜 기간동안 지역 권력을 공유해온 기득권 카르텔간의 권력다툼의 장이 된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일부 행정 조직과 퇴직 공무원 등의 선거 개입은 단순한 개인적 정치 활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시민들은 그것을 ‘개인 권력 쟁취의 연장선’으로 본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이른바 이들이 가진 권력과 영향력을 선거판에 동원해 기득권이나 이권을 챙기려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있다는 점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출자·출연기관의 중요 직책 대부분을 퇴직 공무원이 독차지하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현 공무원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선거 때마다 정치 권력에 줄 서는 문화가 반복되면서 ‘공직사회의 중립성’은 무너져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유권자들이 더 강한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일부 관변단체를 비롯한 동창회 등의 조직적인 움직임이다. 선거철만 되면 대놓고 특정 후보 주변으로 몰려드는 모습은 시민들에게 심각한 허탈감을 안긴다. 시민을 위한 단체인지, 권력에 집착하는 단체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더 큰 문제는 지역 여론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부 관변 네트워크가 선거를 좌우하려는 시도를 계속 이어간다면 지방자치를 해치는 ‘낡고 병든 정치문화’로 낙인 찍혀 시민들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특정 관변단체들의 노골적인 선거 개입은 ‘단체 기득권 챙기기’에 불과할 뿐이다. 특정 관변단체의 비호를 받는 후보가 있다면 시민들은 표로써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 이제 ‘시민은 무엇을 심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시민과 정당과의 약속을 저버린 정치’, ‘관변단체와 동창회 등의 조직 동원 정치’, ‘일부 퇴직 공무원과 행정 권력의 그림자’, ‘시민 위에 군림하는 기득권 권력 문화’를 심판해야 한다. 이제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시민을 악용하려는 후보에게는 철퇴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시민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후보를 잘 선택해야 진주의 선거문화가 건강해진다. 정치권력에 기생하는 기득권 카르텔은 당장 지방선거에서 손을 떼야 한다.

  • 2026-07-26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대표

  • 조회수

    402

기득권이 사람의 뇌를 바꾼다 썸네일 이미지

기득권이 사람의 뇌를 바꾼다

기득권이 사람의 뇌를 바꾼다 거의 난장판을 방불케 하는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 유독 정치만이 정연하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개인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철 따라 때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며 기득권을 쫓는 집단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오래된 환상 속에서 늘 헤맬 뿐이다. 짐작컨대 아직도 우리 진주는 기득권 패거리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에는 아직 멀다. 개혁(改革). 무릇 그 개혁을 외쳐 온 지가 언제부터인가. 그러나 그 개혁은 민망하게도 우리의 열망과 비례하지 않았다. 어쩌면 기득권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빌미만 제공했을 뿐이다. 그래서 사회 일각에서 외쳐대는 개혁은 여전히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권력에 빌붙은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길어지고 있다. 반면 권력의 눈 밖에 난 자들의 보호장치는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선거 때마다 새로운 귀속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정체성의 위기에 내몰린 지도 오래이다. 장밋빛 그림은 오직 권력자와 기득권의 몫일 뿐이라는 회의 섞인 우려가 사회 전반에 가득 채워지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진주의 현주소라면 오버센스한 것일까? 이대로 간다면 극단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 누군들 극치의 어둠을 거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짧게 본다면 어둠의 현실은 더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긴 호흡으로 본다면 끝내 어둠의 현실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진주시민다운 저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천년 진주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깨어난 인간이라야 어둠의 역사를 빛으로 구원한다’는 함석헌 옹의 말투를 빌리자면 그렇다. 선거를 앞두고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정치의 하늘을 여는 일이다. 정치의 하늘이란 무엇인가. 오염된 세력들의 ‘헤쳐 모여’가 아니라 진주의 새로운 대의를 여는 일이다. 그리고 이 땅의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그토록 앵무새처럼 되뇌어온 ‘민심 천심’의 그 하늘이다. 진주의 정치가 리더를 자처하는 자들의 독단과 기득권의 밀실거래만으로 좌지우지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선거를 앞두고 질문을 던진다. 왜 기득권과 권력자들은 하늘에 묻지 않고, 그들 스스로 하늘인 양 위장하고 있는가.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된 보석을 잘 살펴 가리고 골라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진주의 하늘을 뒤덮고 있는 ‘힘 있는 쪽의 유리’, ‘힘 없는 쪽의 불리’라는 오래되고 케케묵은 공식을 이 땅에서 지워낼 수 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 땅의 질서를 되찾는 길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난장판을 다듬어 내고 정연한 저자 마당을 펴내고자 하는 진주시민들의 각성과 행동이다. 천년 진주를 지탱했던 도리(道理)가 땅에 떨어졌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염치가 사라지고, 과거 진주를 이끌었던 앞소리꾼의 기개와 절개 역시 아침이슬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권력과 이권’의 유혹 앞에 앞뒤 가리지 않고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인간성의 상실’은 참아도 ‘기득권의 상실’은 참을 수 없다는 식이다. 권력과 기득권을 움켜 쥔 사람들이 도덕적 우월감까지 누리면서 그걸 무기 삼아 시민에게 호통을 치고 있으니, 이 어찌 놀라운 진주의 현실이 아닌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을 맞아 남명 조식의 단성소(丹城疎)와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꺼내 읽어 본다. 단성소는 권력 앞에서 당당히 진실을 말한 양심선언이며, 서리망국론은 서리들의 무능으로 인해 국가와 조직이 무너지는 구조를 꿰뚫어 본 정치철학이다. 남명이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던진 이 두 가지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지방선거는 남명의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어야 한다. 그래야 천년 진주임이 증명된다고 굳게 믿는다. ‘기득권이 사람의 뇌를 바꾼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 2026-07-26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 조회수

    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