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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진주평론외전(2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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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도대체 뭐하세요?

상식을 쌈 싸드시는 것도, 뭐 한 번쯤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근데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쌈만 싸드시니 이런말이 곧바로 튀어나온다.‘도대체, 뭐하세요?’세상사 뒤죽박죽인지라 눈 뜬 봉사 행세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건 뭐 동물원 수준에도 못 미치니 한심할따름이다. 말씀이 심하다고 하실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런 자리는 칭찬보다는 욕먹는 자리니 말이다.대체 뭔 말인지 궁금하실 테지만, 정치이야기라는 사실 정도는 쉽게 눈치채실 것이다. 굳이 옛날 개그콘서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던 ‘도진 개진’이라는 말을 적시하지 않더라도 말이다.‘정치인이 하는 말과 개짓는 소리는 같다’라는 사실을 풍자하는 이 개그를 보면서, 가슴이 시원해지면서 유쾌,상쾌, 통쾌해지는 건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지금 우리는 개(犬)의 거룩한 음성(?)과 동일시되는 정치인과 한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해야 할 뿐이다.콕 집어서 말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말한다고 비난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글을 읽고 가슴 한 구석이 찔리는 사람이 반드시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굳이 또박또박 적어서 적시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일각(?)에서 제기할 수 있는 반론 혹은 항의는 정중히 사양한다. 스스로 반성하시면될 뿐이다.성현의 말씀 중에는 사람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仁)이 되는 것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공자가 제자인 자장의 물음에 답한 다섯 가지이다. 아마 정치인에게는 거의 해당사항이 없을 테지만, 스스로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공(恭), 관(寬), 신(信), 민(敏),혜(惠)’사람이 공손하면 업신여기지 않고(恭則不侮), 사람이 너그러우면 뭇사람들을 얻게 되고(寬則得衆), 신의가 있으면 남들에게서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고(信則人任焉), 일에 민첩하면 공이 있고(敏則有功), 은혜로우면 충분히 사람을 부릴 수 있다.(惠則足以使人)근데 지금은 어떤가?선거가 끝나면 곧바로 공손하지 않으시고, 타인의 이익에 너그럽지 않으시며, 남에게 주는 믿음이 없어 일을 맡기기 어렵고, 남의 일에 민첩하지 않으시며, 어려운 이에게 은혜롭지 못하신 건 아니신지. 차마 여기서 천지삐까리라는 말은 삼간다.공자께서는 이 다섯 가지를 행하면 마음이 보존되고 이치가 얻어진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시는데, 이분들은 고개를 싹 돌려 외면한 채, 주구장창 쌈만 싸드시고 계시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도대체 뭐하세요?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 조회수

    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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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그대들에게 국민은 있는가?

아쉽게도 이 땅은 힘이 있는 쪽의 ‘유리’, 힘이 없는 쪽의 ‘불리’라는 오래되고 케케묵은 ‘공식’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소위 정치인들은 언제나 ‘흰옷 입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입이 아프도록 떠들어 댄다. 과연 그런가.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흰옷 입은 백성이 정녕 나라의 주인이었는가. 그리고 지금은?거의 난장판을 방불케 하는 세태 속에 비비고 섞고 살면서 유독 정치(政治)만이 정연하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철 따라 때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며 기득권을 좇는 집단이 있는 한, 우리는 그 오래된 환상 속에서 헤맬 뿐이다.밉건 곱건 간에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은 모두가 우리의 현주소를 가리키는 자료임이 분명하다. 우선 그토록 우리가 저질이라고 매도해 마지않는 저 선량(選良)들. 그들을 뽑아낸 건 정작 누구였던가. 시시각각 ‘저질’의 화살을 불같이 쏘아댔지만, 내일의 선거에서 과연 그들에게 낙선의 쓴 잔을 안겨주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는 장담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짐작건대 아직도 우리나라는 지역주의와 패거리의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에는 아직 멀다.개혁. 무릇 개혁을 외쳐온 지가 언제부터인가. 그러나 그 개혁은 민망하게도 우리의 열망과 비례하지 않았다. 억측일 수 있겠지만, 오히려 기득권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빌미만 제공했을 뿐이다. 그래서 사회 곳곳에서 외쳐대는 개혁이 여전히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불현듯 나는 묻고 싶어진다. ‘과연 그들에게 국민은 있는가’ 노암 촘스키 교수는 그의 저서인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에서 시장의 논리를 신격화하는 신자유주의 무리,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계시 장화’를 선도하는 무리와 그 이론제공자의 눈엔 국민이 없다는일갈을 내뱉었다. 어떤 대목에서는 시장만능주의를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라고까지 매도하고 있다. 물론 그의 지론이 옳고 그른지는심사숙고해야 할 일이다.그러나 오직 하나. 오늘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화와 시장화의 기류를 살펴보건데, 어느 곳에서도 국민이 주도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일들을 살펴봐도 그렇다. 이쯤에서 다시 묻고 싶어진다. 그들에게 진정 국민은 있는가?정치와 경제의 큰 줄기에 국민이 들어서지 못하면 물난리가 상습화되듯이 정치·경제도 상습화될 수밖에 없다. 물난리와 정치·경제 따위의 난리는 메커니즘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응의 본질에는 큰 다름이 없다. 때문에 거듭 거듭 ‘그들’에게 국민은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이제 오로지 인간을 믿고 싶다.묵은 천 년이 저물었고, 새 천 년이 밝아온 지도 오래됐건만 아직도 이 땅의 기운은 음습하다. 그리고 ‘오로지 인간’을 부르기보다는 ‘오로지 돈’을 떠받드는 목청들로 이 땅의 질서와 이 땅의 삶은 어지럽고 어둡다. 심지어 이웃이 이웃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세상 밖으로 내던져버리는 카오스가 되어 버리지 않았던가.국가의 양화는 오히려 못 가진 자들의 보호 장치를 허물어 가고, 우리는 새로운 귀속의 대상을 찾아야 하는 정체성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한때 그토록 사회 전반의 지지를 받으면서 바람몰이를 했던 젊은 피.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장밋빛 그림은 오직 가진 자들의 몫일 뿐이라는 회의가 밑바탕에 더욱 진하게 깔리고 있다.그것이 오늘날의 삶이라면 오버센스한 것일까?이대로 간다면 극단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군들 극치의 어둠을 거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이쯤에서 우리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믿음을 떠올리고 희망의 부활을 다짐해 보고 싶다. 짧게 본다면 어둠의 현실은 더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긴 숨결로 본다면 끝내 어둠의 현실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인간다운 인간의 저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구태여 이름한다면 희망과 절망의 변증법쯤 될 것이다.깨어난 인간이라야 어둠의 역사를 빛으로 구원한다. 함석헌 옹의 말투를 빌리자면 그렇다.이 땅의 서민이 해야 할 일이 있다.그것은 정치의 하늘을 여는 일이다. 정치의 하늘이란 무엇인가. 국민을 편안케 하는 일이며, 오염된 세력들의‘헤쳐 모여’가 아니라, 이 땅의 대의(大義)를 여는 일이다. 그리고 이 땅의 정치인들이 그토록 앵무새처럼 되뇌어온 ‘민심 천심’의 그 하늘이다.물론 정치라 해서 여의도에 모여서 일보는 이들만을 지칭하는 건 아니다. 지방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사회·문화등 사회 전반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왜 이 땅의 정치가 리더를 자처하는 그들의 독단과 밀실거래만으로 좌지우지되어야 하는가. 왜 하늘에 묻지 않고, 그들 스스로 하늘인 양 위장하고 있는가.이제 제대로 된 보석을 잘 살펴 가리고 골라야 할 때이다. 오늘에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을 원망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그렇게 한다면 힘이 있는 쪽의 ‘유리’, 힘이 없는 쪽의 ‘불리’라는 오래되고 케케묵은 ‘공식’은 이 땅에서 지울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에게 국민은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이유도 없다.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 땅의 질서를 되찾는 유일한 길은 단 하나다. 그것은 난장판을 다듬어 내고 정연한 저자 마당을 펴내고자 하는 국민들의 각성과 행동이다. 아니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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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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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이건 아니올시다

프랙털이라는 개념은 프랑스 수학자 베누아 만델브로(B. mandelbrot)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 ‘미세한 부분에서 전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이 프렉털(Fractal)이다. 프랙털 이론은 ‘자기유사성’과 ‘자기반복성’으로 요약되며, ‘부분이 전체를 대변하고, 전체는 부분의 또 다른 일부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프랙털 이론은 혼돈과 무질서로부터 질서의 탄생과 같은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탄생한 패러다임이자, 불규칙하고 무질서한 현상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자기유사성과 자기반복성으로 ‘무질서 속에 숨겨진 질서’를 밝힐 수 있는 방법론의 하나인 것이다.프랙털 이론을 활용한 TV 예능프로그램이 있었다. 사물의 일부분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면, 패널들이 사물의 진짜 모습을 맞추는 코너였다. 우리 주변에 흔해 빠진 사물, 즉 종이, 볼펜, 나뭇잎 등을 200배 혹은 300배로 확대해서 보여주면 패널들은 혼란에 빠진다.확대된 사물은 일반적인 인식공간의 범주에 벗어나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대 비율이 낮아지기 전에는 사물의 원형을 맞추는 패널은 거의 없다. 반면, 확대 비율이 낮아지고, 사물의 원형에 가깝게 접근하면 “겨우 이거였어?”라며 허탈해한다.향후 진주의 100년 미래를 좌우할지도 모르는 남부내륙고속철도 시대를 맞아 진주발전 전략을 마련하는 것은 시대적 요구이다. 진주의 미래가 달려있다면 더더욱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더불어 ‘지금 진주에서 추진되는 각종 대형사업들이 과연 시대적 요구에 적절한 사업인지’와 ‘진주의 백년대계에 대비하는 대형 프로젝트가 맞는지’에 대해 한 번쯤은 뒤돌아보고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다시 말해, 진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3대 프로젝트를 비롯해 현재 추진되고 있는 각종 대형사업들에 대해 충분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발목을 잡자는 것이 아니다. 진주의 미래와 관련된 일이니만큼 조금 더 확실하게 진주의 미래를 준비하자는 것이다.우리 속담에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안다’는 말이 있다. 프랙털 이론이 주창하는 바와는 이론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시사하는 바는 같은 범주에 있는 듯하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각종 대형 프로젝트에 대해 낙관적이기보다는 비관적인 시각이 노출되고 있다는 점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는 말이 있다. 미팅을 하면서 ‘킹카’를 기대했는데, 꼭 ‘지뢰밭 속의 폭탄’과 짝이 되고 마는 ‘머피의 법칙’과 친척뻘쯤 되는 말이다. 뭐든지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열심히 하다가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원칙과 기본에서 벗어난다면 그 뒷일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 결국 진주시민이 감당해야 한다. 만약 진주를 걱정하는 진주시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보통 사람들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건 아니올시다.”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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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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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모기야 모기야

무더위와 장마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만 되면 제일 곤혹스러운 게 ‘점심 때우기’와 무지막지하게 달려드는 ‘모기떼’이다.점심만큼은 ‘밥’에 목숨을 거는 현대인들에게 습관적인 아침 공복과 ‘비만’이 도사리는 저녁을 제쳐두면 애매한 점심시간만 매일 고생이다. 냉면이 하루에 수백 그릇 팔려나간다지만, 그것도 결국 ‘한 끼 때우기’에 불과하다. 역시나 매일매일 풀어야 할 숙제는 ‘오늘은 뭘 먹을까?’ 하는 것이며, 해답은 쉽게 구해지지 않는다.7첩 반상을 표방하는 영양만점 도시락. 한 끼 대용으로는 적당하지만, 질리도록 자주 시키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 도시락의 함정이다. 그래서 ‘만만한 게 조조 군사’인 중국집 배달음식. 이른바 중국 음식으로 표방되는 메뉴들은 미식가들에게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매일 점심 식단을 점거해 농성 아닌 농성을 벌인다. 그리고 식당 주인의 의기양양한 말씀. ‘지가 뛰어봐야 벼룩이지’.바야흐로 ‘언론 홍수 시대’를 맞고 있다. 진주의 핵심 취재처인 진주시에 등록된 언론사만 55개에 달한다. 뜻밖의 영양만점 도시락과 산해진미 가득한 중국집 메뉴를 기대했다면 오판이다. 애석하게도 미식가들의 냉혹한 평가만 이어진다. ‘불어 터진 면발’ 아니면 ‘식어버린 짬뽕 국물’, 이런 식이다.시민들은 묻고 또 묻는다.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왜?’냐고. 왜 그렇게 자신의 몸무게보다 두 배가 넘는 피를 빨아 먹는 모기처럼 욕심을 부리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도 할 말은 없다. 이 어려운 시절에 편안히 먹고사는 건 전체 국민의 5%에 불과한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주소이기에 그렇다.언론인 이영희는 『우상과 이성』이라는 책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참으로 오래된 잡지에 실린 ‘모기’에 대한 글이 있다. 소개한다.‘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 10g도 안 되는 너와 더 이상 씨름하고 싶지 않다. 압사한 너의 시체에 경악하거나, 니가 사라진 장롱 위를 노려보며 버티는 것도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너, 돌아가라. 네 친구들인 파리와 바퀴벌레에게도 조심하라고 일러라. 나 오늘 홈키파 사 왔다.’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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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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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잣대

‘잣대’라는 말이 있다. 길이를 재는 자로 사용되는 대막대기 혹은 나무 막대기의 일종으로 통칭 ‘자막대기’라고도 부른다. 이 말은 자고로 도덕적인 행위나 사물의 기준을 재단하는 객관적인 근거로 인용되곤 했다. 흔히 ‘객관적이지 못한 일’이나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이 잣대를 기준으로 잘잘못을 가리곤 한다.그런데 이 잣대란 말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잣대가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객관적이지 못하며 형평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 ‘잣대’는 일부 소수 권력자의 전유물로 인식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도 만들어 냈다. 물론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진주의 유력 사회단체장이 이 ‘잣대’에 걸려들었다. 일종의 괘씸죄다. 좀 더 자세하게 풀어보면 ‘알아서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지 않은 죄’ 혹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고위직에게 불평을 쏟아낸 죄’ 쯤으로 보면 된다. 이어진 ‘개인 뒷조사’와 ‘언론플레이’는 기가 막힐 지경이다.이 지점에서 옛날 어르신들이 자주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나이가 들면 죽어야지.”이 말은 단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의미보다는 ‘올바르지 못한 잣대’가 적용됐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물론 둥지를 튼 자리가 오래돼 썩고, 고약한 냄새가 난다면 새 자리를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 근데 적용된 기준이 ‘객관적·형평성’에서 어긋난다면, 그것은 ‘어설픈 잣대’일 뿐이며 ‘대중의 비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오래전이다. 20~30년 전쯤이다. 모 방송국 TV프로그램 중에 「스타 서바이벌 게임」이란 게 있었다. 일종의 짝짓기 놀이다. 남녀 각각 4명이 출연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출연자를 한 사람씩 탈락시킨다. 마지막에는 남자 2명, 여자 1명이 남게 되는데, 남자 연예인 2명이 혼자 남은 여자 출연자 앞에 서서 장난감 칼을 멋지게 뽑으며 이렇게 외친다. “호랑이야! 내가 간다.”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이 부분이다. 두 자루의 칼끝에는 각기 다른 물건이 달려 있다. 한 사람은 날이 곧추선 칼이 나오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노가리’나 ‘대파’ 같은 민망한 것이 칼날 대신 달려 있다.당시 시청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배꼽을 잡고 웃는 이유는 ‘바짝 말라비틀어진 노가리’와 ‘숨이 죽어 축 늘어진 대파’가 아니라 사회 통념상 기준이 되는 ‘잣대’가 정작 그곳에 없기 때문이다.행여나 ‘적합한 법집행’이라는 이름의 칼에 민망한 ‘노가리’를 매달고 마구 휘두르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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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