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평론외전 잘 있거라 3등아, 4등은 집에 간다
시골에 사는 연로한 아버지가 서울에 사는 자식 집에 찾아갔다. 사흘 쯤 묵은 뒤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심하게 이런 말을 툭 던진다.‘잘 있거라 3등아, 4등은 집에 간다’아버지가 보기에는 집안의 서열을 볼 때 1등은 강아지, 2등은 자식, 3등이 바로 아들이었고, 정작 연로한 자신은 4등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웃고 넘길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실이 이와 다르다고 반문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 싶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눈물 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40개월 미만의 자녀를 가진 가장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다. 설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지갑속에 아이의 사진이 몇 장이나 있나요’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건 언제인지요’ 등이다. 설문에 답하는 내내 가장들의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근데 또 한번 설문조사를 한다. 이번에는 똑같은 설문내용이지만 ‘아이’ 대신 ‘아버지’가 쓰여 있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지갑속에 아버지의 사진이 몇 장이나 있나요’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건 언제인지요’ 설문을 읽던 가장의 얼굴이 굳어진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과 아버지의 사진과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빠와 아버지’라는 설문조사이다. 이윽고 설문에 선뜻 답을 적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이의 아빠에게 노년의 아버지가 방문한다. 아이들의 아빠이자, 아버지의 아들은 마침내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리고 통곡을 한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그런 존재이지만 늘 잊고 산다.평소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이요, 의(義)는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을 버리고 말미암지 않으며, 그 마음을 잃어버렸는데도 찾을 줄 알지 못하니 슬프구나. 사람이 닭과 개를 잃어버리면 그것들을 찾을 줄은 알지만 마음을 잃어버렸는데도 찾을 줄을 모르니 학문의 길은 다른데 있지 않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데 달려 있을 뿐이다.’(孟子曰 仁人心也 義人路也 舎其路而弗由 放其心而不知求 哀哉 人有鶏犬放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현재 지니고 있는 마음 가짐이 과연 어떠한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자기가 기르던 개와 닭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기 위해 전봇대에 전단을 붙일 줄은 알지만 정작 자신이 잃어버린 인의(仁義)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은 정작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과연 아낀다(愛之)는 건 무엇일까? 물론 도올 선생이 말한 서양문화에서 비롯된 LOVE의 개념이라도 상관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도 다 그 때와 절도가 있다는 것이다.간혹 어떤 학생이 친구집에 놀러가서는 친구의 아버지에게 깍듯이 대하고 존대를 하면서도정작 자신의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반말을 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아이가 적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패덕(悖德)이라고 부른다.그래서 맹자는 결론을 내린다.어버이를 골육의 정으로 받들고 나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며, 다른 사람을 사랑한 이후에 금수초목을 사랑하는 구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은 사랑할 줄 알면서 자신의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고, 금수초목을 사랑할 줄 알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이 과연 바른 사람인가하는 물음을 던져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지금 바로 알아보자. 그리고 지갑속에 아버지의 사진을 챙겨 넣고 다니자. 그리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자. 부끄럽지만 이렇게 말해보자. ‘아버지 사랑합니다.’ 자랑스런 아이의 아빠가 되고 싶은가? 먼저 모범적인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잘 있거라 3등아, 4등은 집에 간다’는 말은 하시지 않도록 하자. 그대도 아이의 아버지이다.
- 2024-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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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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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고음불가
노래방 선곡 남자 1위 곡은 단연 임재범이 부른 고해이다. 고해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고백을 애절하게 표현한 곡이다. 임재범이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 감정과 폭발적인 가창력이 필수인 노래방 실력자들의 애창곡이다. 근데 아이러니 하게도 여자들이 싫어하는 노래방 1위 곡 역시 임재범의 고해이다. 특히 거나하게 술 한 잔 들어간 상황에서 부르는 이 노래는 시작 후 10초만에 ‘정지’ 버튼을 만나고 마는 가혹한 운명을 맞이한다. ‘분위기 어쩔’은 물론이다. 여성 노래방 선곡 1위 곡은 이영현의 체념이다. 파워보컬 디바인 이영현의 파워풀한 성량은 시원하기까지 하다. 가수 본인도 라이브 소화를 힘들어 한다는 전설의 노래이건만 전국적으로 여성들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근데 남자들이 싫어하는 노래방 1위 곡 역시 이영현의 체념이다. 특히나 오열하며 부르는 체념은 듣는 사람마저 체념하게 만든다.임재범의 고해와 이영현의 체념은 많은 대중들이 오랜 기간동안 좋아하는 스테디 인기가요이다. 저마다 사연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노래의 전주만 흘러나와도 가슴을 움켜 쥘 만큼 노래가 가진 파급력은 적지 않다. 특히 듣기에는 좋지만 따라 부르기에는 엄청나게 어려워 도전=실패라는 공식을 가진 헬(Hell) 곡이다. 고음(高音)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쉽사리 도전하기 어려운 노래가 많다. 특히 경연프로그램에서 고음으로 곡을 소화하는 사람들이 많은 인기를 얻고 좋은 성적을 낸다. 물론 가슴을 살짝 살짝 건드는 발라드가 인기를 얻곤 한다. 그래도 고음이 뒷받침된 이른바 고음가요가 득세하는건 어쩔 수 없는 트랜드이다. 물론 동굴 같은 저음이 환영 받을 때도 있다. 음악이 아니라 개그라면 굳이 고래고래 고음을 쥐어 짜낼 필요가 없다. 저음(低音)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고음처리를 해야 할 부분에서 저음으로 불러 웃음을 자아내는 개그 코너가 있었다.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였던 이수근의 고음불가(高音不可)를 기억하실 것이다. 오프닝 멘트부터 기대감을 한껏 올려 준다. ‘천상의 하모니, 신이 버린 완벽한 목소리. 더 이상의 고음 처리는 없다. 신인 가수 고음불가가 부릅니다.’ 그리고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작은 키에 긴 머리 가발, 그리고 땅에 질질 끌리는 복장을 입은 이수근이다. 옆에는 류담과 변기수가 정상적인 차림으로 등장해 노래를 바르게 부른다. 근데 이수근은 오프닝 멘트에서 소개한 대로 ‘고음불가’이다. 극강의 고음이 나와야 할 승부처에서 고음이 아닌 획기적인(?) 저음으로 승부를 건다. 관객들은 자지러진다. 이 코너의 웃음코드는 바로 이 지점이다. 고음불가는 음치개그이다. 이 코너에서는 정상적인 가창이 아닌 고음불가라야 개그가 된다. 관객들의 기대를 여지 없이 무너뜨리는 저음만이 승부처가 된다. 노래가 진행되면서 극강의 고음(高音) 대신에 이수근의 엄청난 저음(低音)에 환호를 내지른다. 그야말로 게임 끝이다. 세상 온 천지에 ‘고음(高音)’이 득세하고 있다. 일단 내지르고 본다. ‘아니면 그만’이다. 그래선지 언젠가부터 고음을 내지르는데 익숙해져 간다. 가벼운 접촉사고에도 큰 소리가 오가고, 조금 기분이 나쁘다고 욕설과 주먹질을 해대는 세상이다. 오로지 고음을 내질러야만 이긴다는 오판(?)이 넘쳐난다. 고음만 내지르는 이 세상의 흔한 사람들과 다르게 동굴 같은 저음을 내는 사람이 그립다. 부정과 불의에 대해 모른 척 하기 보다는 조용한 말로 타이르는 어른들이 필요한 세상이다. 버럭버럭 내지르는 고음(高音)보다는 힘있는 저음(低音)이 힘을 발휘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이수근의 고음불가 개그를 보면서 맘 편히 맘껏 웃었다.
-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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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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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제목만 보고 바로 유머 1번지를 떠올리신다면 연세를 넉넉하게 드신 분이 분명하다. 통통한 몸매에 재치있는 입담으로 인기 몰이를 했던 개그맨 김형곤의 출세작이 바로 ‘탱자 가라사대’이다. 이른바 불모지였던 한국 시사 개그의 개척자이자 대부로서 당대에 사회적인 붐을 일으켰다. 원래는 제자백가시대를 배경으로 한 ‘꽁자 가라사대’로 시작했지만, 춘추시대 노나라에 있던 탱자나무 그늘에서 깨달음을 얻은 ‘탱자’라는 사이비 스승과 제자들이 당대 사회를 거침없이 비꼬는 방식의 프로그램으로 바뀐 것이 ‘탱자 가라사대’이다. 당시 유행어들을 기억하실 것이다. 명언을 하나 날린 뒤에 ‘적어라 적어’ ‘꼭 공부 안하는 것들이’로 시작한다. 입시위주 교육에 대한 일침과 공부를 적으로 돌린 학생들을 풍자한 멘트로만 해석할 부분이 아니다. 기성세대도 포함된다. 이 코너에서는 다양한 유행어를 탄생시켰다. 특히 ‘일생에 도움이 안되요’라는 탱자의 유행어는 당시 안 쓴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 니 잘났다. 니 팔뚝 굵다’라는 대사는 ‘그래 니 잘났다. 니 똥 굵다’라는 유행어를 재유행시키기도 했다. 핫 코너였던 ‘탱자 가라사대’의 퇴장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노나라 탱자나무 그늘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탱자는 스스로 ‘가르침이 부족했다’라는 말과 함께 깊은 산 속으로 떠나겠다는 고별사로 코너는 종료되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지금의 세상과 비교하면 당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김형곤의 시사 개그와 풍자는 거침없었다. 당시의 서슬 퍼런 군부독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방송은 아니었지만 ‘대통령 방귀 뀌는 스타일’이라는 스탠딩 코미디는 전현직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겨냥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이 방귀를 뀌고 나서 하는 말은 ‘괜찮아, 임자도 뀌어’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방귀를 뀌면 부하들이 ‘각하, 제가 뀌었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근데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이 방귀를 뀌고 나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니가 뀌었제?’ 그러면 부하들이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각하 방귀 대신 뀌어드릴까요’ 물론 이 개그는 ‘핫바지 방귀 새듯이’ 조용히 사라진 건 물론이다. 안기부가 가만두었을 리가 없다는게 당시의 정설이다. 김형곤은 재벌도 개그 소재로 삼았다. 재벌들을 향한 날카로운 풍자의 칼 날을 던졌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코너는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비룡그룹이라는 가상의 재벌그룹 이사급 회의실이라는 공간에서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현안을 풍자했다. 기억하실 것이다. 회장이 말도 안되는 말을 하고 퇴장을 하면 이사들이 똑같은 동작으로 자신의 턱을 ‘탁’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잘 될 턱이 있나.’ 이외에도 아부성 발언인 ‘저는 회장님의 영원한 종입니다. 딸랑딸랑’과 선거판에서 ‘받아 먹는건 받아 먹는거고, 찍는건 제대로 찍어야지’라는 유행어는 한동안 어린아이부터 어른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유행어는 당시 유행했던 돈으로 얼룩진 선거판을 겨냥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변하지 않는 악습이지만, 개그로 승화했다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을만 하다. 당시 김덕배 회장님을 보좌하는 임원들도 나름 인기를 얻었다. 김학래와 엄용수는 선임이사로 회장에게 아부하는 캐릭터를 소화했다. 정명재는 늘 회장에게 무시당하는 캐릭터였고, 회장의 처남으로 회장에게 늘 바른 말을 하고 싶지만 단 한번도 하지 못하는 양종철이 꾸며나가는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은 무수한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인기몰이를 했다. 이 코너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이 코너를 못마땅하게 여겨 종영 압박을 했다는 후문도 있다. ‘탱자 가라사대’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라는 코너가 방영된 것은 1980년대이다. 서슬퍼런 군부독재 시절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대통령과 재벌들을 희화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지금 ‘탱자 가라사대’라는 코너가 방송된다면 이런 유행어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쉽(입틀막)’
-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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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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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쫄지 말고 살자
아주 오래전에 파성 설창수 선생을 뵌 적이 있다. 청수헌(廳水軒) 마루에서 2시간이 넘게 선생의 사자후(獅子吼)를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청년시절,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일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언론관, 문학을 통한 조국애 함양으로 이어지는 선생의 달변은 좀체 그칠 줄 몰랐다. 흰 두루마기에 백발을 휘날리며 개천제단에 예술을 봉헌하던 파성 설창수 선생을 늘 기억한다. 파성은 지사품(志士風)인데가 있었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고, 좋고 싫음을 결코 감추려 하지 않았다. 소신을 밀고 나감에는 어떤 희생도 사양치 않았으며 불의와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다. 이런 대쪽같은 성품이 문학과 언론관으로 이어져 선생의 글은 강철 펜으로 박박 긁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했다. 당대 최고의 문장으로 평가받는 파성의 영남예술제 취지문은 민족혼과 예술혼을 접목하려는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과 땅이 있는 곳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이 인류의 역사가 있는 곳에 문화의 꽃이 피는 것은 아름다운 우주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개천예술제는 전국 각 지역 문화예술제의 촉매제가 되었고, 파성의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은 역사도시 진주에 찬란한 문화의 꽃이자, 거름이 되었다. 어느 한가한 날에 컴퓨터 이곳 저곳을 뒤지다 파성 선생의 어록이라는 이름이 붙은 파일 하나를 발견했다. 제목은 ‘파성 설창수 어록’이었다. 생전에 워낙 많은 화제(話題)를 남기신 분이라 큰 기대없이 파일을 열었다. 내용은 간단했지만, 의미는 적지 않았다.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글 아래에 출전을 기록해 두지 않아서 아쉬운 건 순간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다. 짧지만 한편으로는 절망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이 담겨 있는 글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앞에 놓여진 수많은 닫힌 문을 경험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닫힌 문 앞에서 서성거릴 줄은 알아도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은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면서 살아간다. 파성은 ‘닫힌 문만 쳐다보며 실망하는 어리석음보다는 열린 문을 찾아 나서는 현명한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한 문이 닫힌다고 해서 모든 문이 닫히는 것은 아니다. 이 평범한 진리를 파성은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 앞에 열려 있는 문(門)이 닫히는 것이 두려워서 못 본체 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하고 있다면 생각을 바꾸기를 권하고 싶다. 단언컨대, 그 문은 우리가 열고 나가야 할 문이 아니다. 당장 먹기 살기 위해서라는 변명도 할 필요없다. 문 앞에 서서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고,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못 본체 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한다면 그것은 옳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파성이 말하지 않았는가?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고.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시대적 명제는 지금까지 불의(不義)한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의롭지 않더라도 ‘돈이 되면 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런 사람을 막무가내로 비난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마음으로 허락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이 세상에는 부정과 불의에 맞서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 문이 닫혔다고 해서 두려워할 것 없다. 고개를 돌리고 발을 움직여 당신을 향해 있는 열린 문을 찾아 나서면 된다. 옳고 그름을 분변할 줄 알았던 파성이 그의 삶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 요즘 세상 그런 식으로 살면 ‘힘든다’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신경을 끄는게 좋을 듯 싶다. 그리고 응원의 한마디를 해주고 싶다. ‘쫄지 말고 하고 싶은대로 살자.’
-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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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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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이 녀석이 기어코
놀부를 쏙 빼 닮은 녀석이 하나 있었다. 놀부가 오장 육부에 ‘심불보’가 하나 더 붙어 오장 칠부로 소문났지만, 녀석은 ‘말썽보’'가 하나 더 붙어 ‘오장 팔부’였다. 하는 짓도 놀부를 쏙 빼 닮았다. 심술 많고 투기 많은 녀석의 하는 짓을 보자. 고무줄 끊어 먹기는 양반이고, 화장실 가는 처녀 선생님 몰래 따라가 문 열고 인사하기, 여학생 화장실에 산 개구리 던져 넣기는 양념이고, 치마입은 여자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이른바 ‘똥침’ 놓는게 이 녀석의 주특기였다. 제 아비는 사십 줄에 본 외동아들이라 ‘옹냐 옹냐’로 키웠으니, 녀석의 말썽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로 심해진 건 당연지사. 매사 이런 식이니 사건이 안 터지는게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다.그런 어느 날, 마침내 사건이 터졌다. 사촌 형수가 제 집에 인사를 왔는데 문 칸에 서있던 이 녀석은 형수가 제 아비에게 절할 때 드러난 곡선을 보고는 말썽보가 발동하고 말았다. 기어코 녀석이 형수에게 ‘똥침’을 날렸고, 그의 형수는 고꾸라지면서 기절. 아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고, 녀석은 튀었다. 한참을 동구쪽으로 뛰던 녀석이 돌연 멈춰 서며 길바닥에 줄을 죽∼ 긋고는, 뒤따르는 제 아비에게 소리 쳤다. “이 선 넘어오면 내 아들 놈”. 이 정도 되면 이 녀석 사람 만들기는 물건너 간거나 마찬가지다.그런 녀석이 어느 날부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곱상하게 생긴 친구 녀석을 하나 달고 집을 들락거리더니 그 놈의 말썽보가 말끔히 사라진게다. 동네에서 내놓은 녀석 취급을 당하던 그 녀석, 말썽보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고 하는 폼새도 완전히 달라졌다. 동네어른 보이면 뛰어가서 인사하고, 교실에서 떠드는 놈 혼내주기는 기본이고, 시키지도 않는 앞마당 청소에 제 아비 부르는 소리에는 먹던 밥도 팽개치고 달려 가는 효자가 된게다. 흐뭇한 마음에 한 번은 철부지 아들더러 친구 불러오라 시켜 놓고 하는 행색을 보았더니, 과연 양반집 자제 그 이상이었다. 두 손 앞으로 곱게 모으고 인사하는 폼에서부터 공손히 대답하는 말뽐새라니. 그 양반 얼굴 가득 미소 지으며 아들 친구녀석의 손을 붙들며 말했다. “이보소, 제발 우리 아들녀석하고 천년 만년 친구좀 해 주소”옛말에 스승을 얻는 것은 가장 급하고(得師以爲急), 벗을 택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擇友以爲難)이라 했다. 그래서 좋은 친구를 선택하는 방법도 전해 내려온다. 먼저 좋은 친구는 정직하고(友直), 성실하고(友諒), 견문이 넓은(友多聞) 친구를 택하라고 했다. 반대로 객관성이 결여되고 편벽하거나, 우유부단해서 싫으면 싫다는 소리를 못하는 친구,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친구는 가려서 사귀라고 했다. 새해가 밝아오고 있다. 내년만큼은 자치기, 고무줄 놀이 하고 싶은 아이들에게 “공부 좀 해라”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를 하기 보다는 아이의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보는 일도 꽤 의미있을 것 같다. 허구헌날 집에서 공부해라는 우격다짐만 놓다가는 우리집 아들 녀석이 어느날 갑자기 ‘이 선 넘어오면 내 아들 놈’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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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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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외전 아이들의 눈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이가 입학 기념 통장을 만들기 위해 엄마와 함께 은행에 갔다. 은행원이 내미는 구비서류에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를 줄줄줄 잘만 써내려 가던 어린이가 ‘종전 거래은행’을 기재하라는 곳에서 한참 동안 한쪽 턱을 괴고 연필만 돌리고 있더니 곧바로 이렇게 적었다.‘돼지 저금통’아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그 해답은 옛날 모 방송국의 ‘전파견문록’이라는 오락프로그램에서 찾을 수 있다. ‘동심견문록’이라고도 부르는 이 방송은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의 눈을 통해 바라본 사물을 어른들이 알아맞히는 일종의 수수께끼 알아맞히기 프로이다.알쏭달쏭 기상천외한 수수께끼에 어른 출연자들은 한마디로 쩔쩔맨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비친 사물이나 어린이 특유의 기상천외한 발상을 성인 출연자들이 선뜻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방송에 출연하는 어린이는 대개 일곱 살짜리가 많은데 사물을 보는 시각이 상상을 초월할 때가 많다. 그래선지 역대 방송 중에 첫 번째 힌트에 정답을 알아맞힌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재미삼아 몇 문제 풀어보자.어린이가 수수께끼를 낸다. ‘직업은 아는데 이름은 아무도 몰라요’문제가 출제되고 나면 연예인 출연자들은 눈만 꿈뻑꿈뻑 할 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허탈한 표정만 짓는다. 그런 분위기도 잠깐, 사회자가 “정답 공개합니다”하고 화면을 통해 정답이 공개되면 방청객에서는 감탄과함께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물론 정답을 볼 수 없는 출연자들은 실없는 웃음만 흘리며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다.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생각하거나, 직업이라고 해서 소방관, 경찰, 대통령 등등의 ‘Job’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정답을 맞힐 수가 없다. 정답은 다름아닌 ‘양치기 소년’이기 때문이다.한 문제 더 풀어보자. 어린이가 또박또박한 말투로 문제를 낸다.‘범인을 절대 잡을 수 없어요’수수께끼를 듣고 나서 머릿속에서 ‘신창원’을 떠올린다면 십중팔구 오답의 쓰라린 경험만 되풀이 할 뿐이다. 정답은 ‘새똥’이기 때문이다.글을 쓰면서도 재미있어 서너 문제 더 풀어본다. ‘누가 쉬가 마려워 엘리베이터에 쉬를 하면 사람들이 이걸 해요’의 정답은 ‘반상회’이다. ‘나무꾼이 나오면 바로 끝나요’의 정답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서 결코 찾을 수 없는 ‘공포의 쿵쿵따’이고, ‘ㄱㄴㄷㄹㅁㅂ이 다 들어 있어요’는 ‘사다리’가 정답이다.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순수한 동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먹고사는일에 얽매여 우리도 모르게 잊고 사는 건지도 모른다.정월 대보름이 오면 달집을 태우며 이런 소원을 빌어 보고 싶다.‘이 세상 모든 이들이 순수한 동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소서.’이렇게 빌다 보면 순수를 가슴에 품고 있지 못한 우리가 혹시라도 수수께끼 한 문제쯤은 풀 수 있는 날이 오지않을까?보너스 문제. ‘나는 1단계, 할머니는 6단계입니다’정답은 ‘전기장판’
-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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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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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진주평론외전 주(酒)사파를 아십니까
술을 마시고 곤드레만드레 하는 주사파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슬퍼서 술을 마시거나, 술을 마셔서 슬픈 ‘불효한 어린 왕자형’. 이런 사람들은 평상시엔 집사람의 ‘호출 전화’만와도 펄펄 뛰던 사람인데, 술만 한 잔 들어갔다 하면 어릴 적 어머니 고생한 얘기 하면서 왕 눈물을 흘려 술자리를 숙연하게 한다.다음은 ‘얄미운 선견지명형’. 모임 있는 날이면 끈 달린 구두나 목구두, 운동화를 즐겨 착용하는 부류로 주변 인물들을 잘 매수해서 계산할 때쯤 휴대폰이 울리도록 미리 손 써두는 신종 기법을 즐겨 사용한다.술자리에서 안주발만 최대로 세우는 ‘1960년대 걸식아동형’도 있다. 걸식아동형은 최악의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 정치인들보다 더 미움을 받는 부류로 낙인 찍히면서도 맥주 한 모금에 땅콩 3개, 오징어 다리 1개, 골뱅이 세젓가락은 기본이다. 물론 안주 떨어지면 메뉴판을 들고 설치는 사람은 백의 백 이들이다.근데 최근에는 주사파 가운데 세간의 인정과 함께 동조를 받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사회 불만형'이다. 이들은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하자마자, 평소보다 100배쯤 말이 많아지면서 정계와 재계가 난자당하고, 연예계의 비리가 무차별 폭로된다.최근 진주시 고위 공무원 자녀 특혜 채용 비리를 둘러싼 지역정가의 꼴볼견을 두고, 이들 사회불만형 주사파들의 거침없는 목소리가 지역 곳곳에서 마구 터져 나오고 있다. 특히 젊은층의 본거지인 호프집을 비롯해 40~50대들의 안방인 실비집 등 술과 안주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자식 이야기에다 단골 안주인 정계와 재계 인사들이 도마에 오른다. ‘죽일 놈들’은 그래도 양반이고, ‘다음에 두고 보자’식의 과격파들이 주류를 이룬다.원래 ‘욕 먹는 직업’이라는 거는 아는데, 이번에는 좀 심하다. 코로나19를 뚫고 술집에서 친구들과 거나하게 한잔 해버린 청년에 물으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보나마나 입에 담기도 힘든 끔찍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다 아는데, 그 사람들만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다가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시민의 일꾼이 되겠습니다’이 말을 들을까 봐 끔찍하다.
-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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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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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330

진주평론외전 화투판 꼬라지
일제강점기, 이 나라 백성들을 교란시키기 위해 들여왔다는 이놈의 ‘화투’는 심하면 가산탕진에 계집과 자식까지 내다 팔게 하는 또 다른 마약이었다.이 같은 망조는 국제통화기금시대를 지나, 경제가 이제야 겨우 허리를 펴고 있다는 지금에까지 이어져 ‘육백’ ‘삥오도시’ ‘섯다’ ‘짓고땡’에서 ‘아도사키’로 이어지고 있고, 급기야 한때는 ‘박정희고스톱’ ‘전두환고스톱’ 이 부활해막가기도 했다.‘현금 박치기’ ‘안면몰수’ ‘촌수불문’인 화투판은 ‘어머님 죽어요’ ‘아버님 쌋어요’에까지 이른다. 상가에서 밤새기고스톱은 그래도 양반 축에나 끼지만, 해외 공항 로비에서 신문지 쩍! 하니 깔고 서너 명 둘러앉아 치는 고스톱은 이제 진풍경도 아니다.정치판과 고스톱판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데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는 듯한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역시 이와 똑같으니, 세상 살맛 안 난다는 이가 적지 않다.화투판의 불문율에 칠 것 없으면 ‘비풍초똥팔삼’을 버리라는 말이 있다. 이를 요즘 세상에 비춰보면 하나도 틀린게 없다.‘비’는 비리와 각종 의혹에도 질끈 눈을 감아버려 민초들의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는 자들인데, 자신들의 주인님(?)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고, 급기야 온갖 변명으로 정쟁만 일삼고 있으니 억장이 무너지고. ‘풍’은 바람 부는 대로 떠돌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옳다’ 싶으면 얼른 자리를 차고앉아 ‘어른행세’ 하지만, 동네아이들조차 손가락질하는 줄은 모르고.‘초’는 초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름인데, 이른바 완장을 떡하니 차고서는 민초들의 멱살을 잡고 무릎을 꿇리는게 대장(?)을 도와주는 일인 양 착각하니 불쌍하기 그지없고. ‘똥’은 말 그대로 구린내 나는 자들인데, 고위 공무원 자녀 특혜채용 의혹 제기에 ‘깨끗한 놈 있으면 나와 봐라’며 제 식구 감싸기에 온 몸을 던져 희생하는 전사(戰士)와 누가 뭐라 하든 간에 깔끔하게 고개 돌려 외면하시는 분들이고. ‘팔’은 겉만 보면 팔팔해 보이는데 속은 팍삭 늙은 분을 말하는데, 내거는 기치는 가히 개혁적이나 마무리는 ‘눈치보기’의 대가여서 저래도 되나 싶은 분이고. ‘삼’은 로터리에 서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손바닥에 침을 뱉어 갈 길 점치는 자니, 이익이 있는 곳이면 앞뒤 고려하지 않고 달려가면서 내뱉는 해괴한 말주변은 우리를 아연실색케 한다.아무리 생각해도 '비풍초똥팔삼'은 버려야 한다는 고스톱판의 선각자들 얘기가 맞는 듯하다. 아끼다가는 ‘피박’‘멍박’ ‘설사’로 피칠갑하기 십상일 테니까.
-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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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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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진주평론외전 도대체 뭐하세요?
상식을 쌈 싸드시는 것도, 뭐 한 번쯤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근데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쌈만 싸드시니 이런말이 곧바로 튀어나온다.‘도대체, 뭐하세요?’세상사 뒤죽박죽인지라 눈 뜬 봉사 행세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건 뭐 동물원 수준에도 못 미치니 한심할따름이다. 말씀이 심하다고 하실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런 자리는 칭찬보다는 욕먹는 자리니 말이다.대체 뭔 말인지 궁금하실 테지만, 정치이야기라는 사실 정도는 쉽게 눈치채실 것이다. 굳이 옛날 개그콘서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던 ‘도진 개진’이라는 말을 적시하지 않더라도 말이다.‘정치인이 하는 말과 개짓는 소리는 같다’라는 사실을 풍자하는 이 개그를 보면서, 가슴이 시원해지면서 유쾌,상쾌, 통쾌해지는 건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지금 우리는 개(犬)의 거룩한 음성(?)과 동일시되는 정치인과 한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해야 할 뿐이다.콕 집어서 말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말한다고 비난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글을 읽고 가슴 한 구석이 찔리는 사람이 반드시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굳이 또박또박 적어서 적시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일각(?)에서 제기할 수 있는 반론 혹은 항의는 정중히 사양한다. 스스로 반성하시면될 뿐이다.성현의 말씀 중에는 사람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仁)이 되는 것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공자가 제자인 자장의 물음에 답한 다섯 가지이다. 아마 정치인에게는 거의 해당사항이 없을 테지만, 스스로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공(恭), 관(寬), 신(信), 민(敏),혜(惠)’사람이 공손하면 업신여기지 않고(恭則不侮), 사람이 너그러우면 뭇사람들을 얻게 되고(寬則得衆), 신의가 있으면 남들에게서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고(信則人任焉), 일에 민첩하면 공이 있고(敏則有功), 은혜로우면 충분히 사람을 부릴 수 있다.(惠則足以使人)근데 지금은 어떤가?선거가 끝나면 곧바로 공손하지 않으시고, 타인의 이익에 너그럽지 않으시며, 남에게 주는 믿음이 없어 일을 맡기기 어렵고, 남의 일에 민첩하지 않으시며, 어려운 이에게 은혜롭지 못하신 건 아니신지. 차마 여기서 천지삐까리라는 말은 삼간다.공자께서는 이 다섯 가지를 행하면 마음이 보존되고 이치가 얻어진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시는데, 이분들은 고개를 싹 돌려 외면한 채, 주구장창 쌈만 싸드시고 계시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도대체 뭐하세요?
-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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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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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

진주평론외전 그대들에게 국민은 있는가?
아쉽게도 이 땅은 힘이 있는 쪽의 ‘유리’, 힘이 없는 쪽의 ‘불리’라는 오래되고 케케묵은 ‘공식’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소위 정치인들은 언제나 ‘흰옷 입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입이 아프도록 떠들어 댄다. 과연 그런가.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흰옷 입은 백성이 정녕 나라의 주인이었는가. 그리고 지금은?거의 난장판을 방불케 하는 세태 속에 비비고 섞고 살면서 유독 정치(政治)만이 정연하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철 따라 때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며 기득권을 좇는 집단이 있는 한, 우리는 그 오래된 환상 속에서 헤맬 뿐이다.밉건 곱건 간에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은 모두가 우리의 현주소를 가리키는 자료임이 분명하다. 우선 그토록 우리가 저질이라고 매도해 마지않는 저 선량(選良)들. 그들을 뽑아낸 건 정작 누구였던가. 시시각각 ‘저질’의 화살을 불같이 쏘아댔지만, 내일의 선거에서 과연 그들에게 낙선의 쓴 잔을 안겨주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는 장담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짐작건대 아직도 우리나라는 지역주의와 패거리의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에는 아직 멀다.개혁. 무릇 개혁을 외쳐온 지가 언제부터인가. 그러나 그 개혁은 민망하게도 우리의 열망과 비례하지 않았다. 억측일 수 있겠지만, 오히려 기득권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빌미만 제공했을 뿐이다. 그래서 사회 곳곳에서 외쳐대는 개혁이 여전히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불현듯 나는 묻고 싶어진다. ‘과연 그들에게 국민은 있는가’ 노암 촘스키 교수는 그의 저서인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에서 시장의 논리를 신격화하는 신자유주의 무리,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계시 장화’를 선도하는 무리와 그 이론제공자의 눈엔 국민이 없다는일갈을 내뱉었다. 어떤 대목에서는 시장만능주의를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라고까지 매도하고 있다. 물론 그의 지론이 옳고 그른지는심사숙고해야 할 일이다.그러나 오직 하나. 오늘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화와 시장화의 기류를 살펴보건데, 어느 곳에서도 국민이 주도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일들을 살펴봐도 그렇다. 이쯤에서 다시 묻고 싶어진다. 그들에게 진정 국민은 있는가?정치와 경제의 큰 줄기에 국민이 들어서지 못하면 물난리가 상습화되듯이 정치·경제도 상습화될 수밖에 없다. 물난리와 정치·경제 따위의 난리는 메커니즘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응의 본질에는 큰 다름이 없다. 때문에 거듭 거듭 ‘그들’에게 국민은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이제 오로지 인간을 믿고 싶다.묵은 천 년이 저물었고, 새 천 년이 밝아온 지도 오래됐건만 아직도 이 땅의 기운은 음습하다. 그리고 ‘오로지 인간’을 부르기보다는 ‘오로지 돈’을 떠받드는 목청들로 이 땅의 질서와 이 땅의 삶은 어지럽고 어둡다. 심지어 이웃이 이웃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세상 밖으로 내던져버리는 카오스가 되어 버리지 않았던가.국가의 양화는 오히려 못 가진 자들의 보호 장치를 허물어 가고, 우리는 새로운 귀속의 대상을 찾아야 하는 정체성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한때 그토록 사회 전반의 지지를 받으면서 바람몰이를 했던 젊은 피.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장밋빛 그림은 오직 가진 자들의 몫일 뿐이라는 회의가 밑바탕에 더욱 진하게 깔리고 있다.그것이 오늘날의 삶이라면 오버센스한 것일까?이대로 간다면 극단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군들 극치의 어둠을 거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이쯤에서 우리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믿음을 떠올리고 희망의 부활을 다짐해 보고 싶다. 짧게 본다면 어둠의 현실은 더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긴 숨결로 본다면 끝내 어둠의 현실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인간다운 인간의 저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구태여 이름한다면 희망과 절망의 변증법쯤 될 것이다.깨어난 인간이라야 어둠의 역사를 빛으로 구원한다. 함석헌 옹의 말투를 빌리자면 그렇다.이 땅의 서민이 해야 할 일이 있다.그것은 정치의 하늘을 여는 일이다. 정치의 하늘이란 무엇인가. 국민을 편안케 하는 일이며, 오염된 세력들의‘헤쳐 모여’가 아니라, 이 땅의 대의(大義)를 여는 일이다. 그리고 이 땅의 정치인들이 그토록 앵무새처럼 되뇌어온 ‘민심 천심’의 그 하늘이다.물론 정치라 해서 여의도에 모여서 일보는 이들만을 지칭하는 건 아니다. 지방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사회·문화등 사회 전반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왜 이 땅의 정치가 리더를 자처하는 그들의 독단과 밀실거래만으로 좌지우지되어야 하는가. 왜 하늘에 묻지 않고, 그들 스스로 하늘인 양 위장하고 있는가.이제 제대로 된 보석을 잘 살펴 가리고 골라야 할 때이다. 오늘에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을 원망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그렇게 한다면 힘이 있는 쪽의 ‘유리’, 힘이 없는 쪽의 ‘불리’라는 오래되고 케케묵은 ‘공식’은 이 땅에서 지울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에게 국민은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이유도 없다.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 땅의 질서를 되찾는 유일한 길은 단 하나다. 그것은 난장판을 다듬어 내고 정연한 저자 마당을 펴내고자 하는 국민들의 각성과 행동이다. 아니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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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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