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평론
2024.03.05 AM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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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과 인연을 맺다
과거의 역사를 알고자 하면 역사 기록을 살펴야 한다. 역사 기록이 없다면 역사는 한갓 전설이나 이야깃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기록이 있어야만 역사에 대한 신빙성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기록은 돌과 쇠에 남아 있기도 하고, 문서와 책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그림으로 남아 있기도 한다. 이러한 옛 역사 기록을 달리 고문헌이라고 한다. 우리의 역사 기록인 고문헌을 체계적으로 수집·보존하여 잘 활용하고,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필자가 고문헌과 인연을 맺게 된 배경과 고문헌을 어떻게 수집·보존·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여 보았다.
1988년 3월. 경상대학교 한문학과에 입학하였다. 하루는 보따리 하나를 들고 교수님을 따라나섰다. 산청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가 원지에서 내려, 다시 합천 가회로 가는 군내버스로 갈아탔다. 버스에서 내려 시골길을 5리쯤 걸어서 도착한 곳은 신등면 평지리 ‘내당서사(內塘書舍)’라고 하는 곳이었다. 근세 유학자 중재(重齋) 김황(金榥) 선생이 살았던 곳으로, 경남에서 가장 많은 고문헌이 소장되어 있었다. 중재 선생의 아들 되시는 정관(靜觀) 김창호(金昌鎬) 옹이 교수님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교수님이 정관 옹과 환담하는 사이 나는 오래된 문서가 꼬챙이에 끼여 대청마루 기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중재 문중에서 받은 편지나 부고 등을 모아둔 것인데, 대수롭지 않게 관리되고 있었다. 방안 벽장 속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인 고서가 천장까지 가득 소장되어 있었다. 교수님이 찾고자 하는 책의 서명을 정관 옹에게 제시하였다. 그러나 정관 옹은 소장한 책의 목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장 목록은 단지 기억에 의존할 뿐이었다. 교수님은 열람하고 싶은 고서를 겨우 찾아서 보따리에 싸고 정관 옹에게 차용증을 써주고 진주로 돌아왔다. 빌려온 고서는 진주 시내 복사가게에 맡겨 복사하고, 며칠 뒤에 다시 정관 옹을 찾아가 반납하였다. 이런 일은 반복되었다.
당시 경상대학교 도서관에는 고서실이 없었다. 연구자가 고문헌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고문헌을 소장한 문중을 개별 방문하여 자료를 열람하여야만 했다. 교수님은 정관 옹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책을 빌릴 수가 있었다. 소장자와 친분이 없다면 소장 고문헌의 복사는 고사하고 열람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연구자가 논문 한 편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소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90년 8월 여름방학. 후배 10여 명과 함께 다시 내당서사를 찾았다. 약 40여 일간 내당서사에 머물면서 낮에는 맹자를 자습하고, 밤에서 정관 옹에게 논어를 배웠다. 이때 정관 옹이 머무는 서재 벽장 속 고서를 다시 볼 수 있었으나, 예전과 큰 변화가 없었다.
무더운 여름날 공부가 지겨워지면 고개를 하나 넘어 이웃 마을에 있는 이택당(麗澤堂)을 찾아갔다. 이택당은 경남 서부지역 성재(性齋) 허전(許傳) 선생 문인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고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이택당 장판각에는 성재 선생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판각된 목판이 가득 보관되어 있었다. 장판각에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나무 창살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손만 넣으면 목판을 쉽게 꺼낼 수가 있었다. 목판 한두 장을 꺼내어 먹물을 발라 한지에 책을 인쇄해 보기도 하였다.
내당서사에 머물면서, 고서를 잘 관리하고 연구자가 편리하게 열람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였다. 이렇게 보관하다가는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지역 고서를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여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 연구자가 고문헌을 편리하게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당서사에 머물면서, 고서를 잘 관리하고 연구자가 편리하게 열람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였다. 이렇게 보관하다가는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지역 고서를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여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 연구자가 고문헌을 편리하게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상대학교 도서관과 인연을 맺다
1996년 9월부터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조교로 근무하게 되었다. 하루는 경상대학교 도서관에서 학과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 왔다. 근래 도서관에 고문헌이 기증되었는데 도서관에는 고문헌을 담당하는 사서가 없어 고문헌 정리를 좀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몇 해 전 산청의 어느 서원에 소장된 고문헌을 서명별로 짝을 맞추어 목록을 만들어 본 것이 고문헌 정리 경험의 전부였기에 적임자가 아니라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부탁이 간곡하여 정리업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밤과 주말을 활용하여 5개월 만에 고문헌 정리를 마쳤다.
이때 ‘경상대학교 도서관은 경남에서 가장 큰 도서관인데, 고문헌을 전담하는 사서가 없어서야 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상대학교 도서관에 언젠가는 고서실이 생기고 고문헌 전담 사서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사서 자격증을 필수로 취득해 두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대구 계명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일주일에 3일씩 진주-대구를 오가며 힘겹게 사서 자격증을 취득했다.
2001년 경상대학교 내에 남명학관이 건립되었고, 도서관에서는 이 건물의 2층에 고서실인 ‘문천각(文泉閣)’을 설치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제 고문헌을 전담할 사서가 필요해졌다. 4년 전 도서관에서 고문헌 정리에 참여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연락이 왔다. 그러나 채용 조건은 일용 계약직 직원이라고 하였다. 일한 날짜만큼 계산하여 급여를 받고, 일이 없을 때는 언제든지 해고가 가능한 신분이었다.
당시 필자는 함안 모 고등학교 한문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교사직을 사임하고 경상대학교 도서관 일용직 사서로 돌아왔다. 먼저 중앙도서관에 있는 고문헌을 남명학관으로 모두 옮기고, 경남지역 고문헌을 부지런히 모아 정리하였다. 2003년 정식 사서가 되었고, 2017년에는 학예연구사가 되었다. 당시 1만 2천 권으로 시작한 고문헌이 현재는 7만 6천 권으로 불어났다.
진주는 고문헌의 보고였다
오늘날 진주는 옛 진양군을 포괄하는 행정구역 명칭이지만, 조선 시대 진주는 진주목(晉州牧)이었다. 남해, 하동, 산청을 아우르는 경남 서부지역의 정치와 문화, 행정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일찍부터 인쇄 문화가 발달하였고, 많은 학자가 탄생한 곳이다.
1232년 몽골의 침략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최씨 무인정권은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골을 물리칠 목적으로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진주목 관할의 남해에 분사대장도감을 설치하였다. 남해는 지리적 여건상 몽골군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였고, 지리산이 가까워 목판으로 사용되는 목재를 구하기에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해가 위치한 진주목은 최씨 무인정권의 식읍지로, 분사의 운영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분사를 운영하던 최이의 처남 정안은 1249년 남해에 정림사를 세우고 승려 일연을 주지로 임명하였는데, 일연이 정림사에서 대장경 간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남해 분사대장도감에서는 팔만대장경 등 불경뿐만 아니라 불교 관련 서적과 유학자의 문집도 널리 간행하였다. 대장경 판각의 후원자였던 최이의 서자 만종이 단속사 주지로 있으면서 1244년 혜심의 『선문염송』을 간행하였고, 1251년에는 백운거사 이규보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을 손자 이익배가 하동감무로 있을 때 왕의 명을 받들어 남해 분사대장도감에서 간행하였다.
1296년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더불어 고려 3대 역사서로 꼽히는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왕명으로 진주부사 이원이 간행하였다. 1354년에는 최해의 문집인 『졸고천백』을 비롯하여 『중용』, 『주자혹문(朱子或問)』 등을 간행하였다. 1355년에는 보물 710-5호인 『동인지문』이 진주목에서 간행되었다. 1360년에는 이승휴의 시문집 『동안거사문집』이 간행되었다.
또한, 원나라로부터 귀화한 설손의 아들 설장수가 진양 수령으로 있으면서 부친의 시문집인 『근사재일고(近思齋逸藁)』를 간행하였고, 1370년에는 진주목사 이인민이 보물 제262호인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를 간행하였다. 1371년 7월에는 보물 제706호와 제707호인 『중용주자혹문』이 진주목에서 인쇄되었다. 이처럼 고려 시대 진주목에서 간행한 고문헌 중 보물로 지정된 것이 많다. 대장경 간행으로 축적된 판각기술은 경남지역 고문헌 인쇄 발달에 기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에도 고문헌 간행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진주도호부사 김이음이 권근의 『입학도설』을 진주에서 찍었다. 인쇄문화뿐만 아니라,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들이 영남 사림파를 형성하여 많은 문헌을 남겼다. 이로 인해 어숙권이 지은 『고사촬요』에 따르면 임진왜란 직전 진주지역에 소장하고 있는 책판 수는 전주·경주·평양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로 많았다.
조선 중기에는 남명 조식에 의해 남명학파가 형성되어 많은 제자가 면면히 문헌을 남겼고, 조선 말기에는 면우 곽종석 등의 거유가 탄생하여 거질의 문집을 남겼다. 특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된 『주자어류(朱子語類)』는 1905년 면우 곽종석과 진주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지리산 대원사에서 판각 간행한 것이다. 목판 분량만도 2,076판에 달한다. 경남 서부지역 68개 문중이 힘을 합쳐 간행한 책으로, 유가의 팔만대장경이라 일컬을 수 있다. 이처럼 진주목은 고문헌의 보고(寶庫)였다.
오늘날 진주는 옛 진양군을 포괄하는 행정구역 명칭이지만, 조선 시대 진주는 진주목(晉州牧)이었다. 남해, 하동, 산청을 아우르는 경남 서부지역의 정치와 문화, 행정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일찍부터 인쇄 문화가 발달하였고, 많은 학자가 탄생한 곳이다.
김해시 장유면 덕정마을은 형세가 연봉을 뒤에 두고 추월산을 앞에 두어 그윽하고 깊으며 넓으면서 탁 트여 자고로 군자가 은거·강학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 마을의 중심에 월봉서원이 자리하고 있다.나는 젊은 시절 이 서원의 봉양재(鳳陽齋)에서 한학자이신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 선생을 모시고 공부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교편생활을 하게 된 후에는 매년 수차례 선생님을 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선생님 별세 후 지금까지 자주 서원을 찾고 강당에 앉아 추월산을 바라보며 공부하던 시절을 추억한다.덕정마을은 전주 이씨들의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덕정마을이 장유 신도시 고층 아파트들에 둘러싸여 예전의 풍광 수려하던 모습은 많이 변하였으나 서원을 중심으로 일신재(日新齋), 연강재(蓮崗齋) 등의 건물이 어우러져 고색 짙은 거대한 한옥촌을 이루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고택이 주는 예스럽고 중후하며 편안함을 저절로 느끼게 한다.유학(儒學)이 조선의 지배이념이었던 시대에는 곳곳에 서원과 서당이 있어 학문을 진흥시키고 인재를 양성하며 사회를 교화하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서원은 조선 시대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는 사립학교이다. 선현을 제사하고 사림들이 공부하고 인격을 닦는 곳이면서 동시에 향촌 사림이 회합하는 장소이자 정치적, 사회적 거점의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그러나 서원의 고유한 기능은 존현(尊賢)과 강학(講學) 두 가지이다. 서원에는 선현에게 제사 드리는 사묘(祠廟), 교육을 담당하는 강당(講堂),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는 재사(齋舍)가 설치되는데 월봉서원 역시 이러한 공간들을 갖추고 있다. 사묘에서 드리는 향사는 의식이 엄숙하였으며 강당과 재사에서 이루어지는 강학은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었다.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유학이 이미 삶의 지표가 되고 사회의 주도적 이념이라는 지위를 상실한 상태이기에, 서원은 과거와 같은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하는 기능은 거의 소멸되었다. 이에 선현을 제향하는 일만이 주된 기능이 되었고 전국에 남아있는 서원들도 거의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저 유서 깊은 유교 문화유산으로 남아 탐방하는 관광객들의 볼거리로 전락한 상태에 놓인 곳이 허다한 실정이다.서원에는 선현에게 제사 드리는 사묘(祠廟), 교육을 담당하는 강당(講堂),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는 재사(齋舍)가 설치되는데 월봉서원 역시 이러한 공간들을 갖추고 있다. 사묘에서 드리는 향사는 의식이 엄숙하였으며 강당과 재사에서 이루어지는 강학은 엄격한 학규에 의해 운영되었다.월봉서원은 영남 기호학파의 거유(巨儒) 월헌(月軒) 이보림(李普林, 1903~1972)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유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월헌이 별세하자 사림의 공의로 1984년에 설립되었다.월헌 이보림은 김해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 이씨이다. 어려서부터 조부 농은(農隱) 이경현(李慶鉉)과 부친 봉정(鳳亭) 이승기(李承驥)의 훈도 아래 가학을 전수하여 경사(經史)를 섭렵하였고, 1920년 봄 서해의 계화도에 은거하고 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찾아가 그 문도가 되었다. 간재 문하에서 혁재(赫齋) 서진영(徐震英), 양재(陽齋) 권순명(權純命),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 등과 학문을 강마하다가, 간재가 별세하자 서진영을 따라 변산의 진계정사(眞溪精舍)로 가서 학문을 익혔으며, 이어 호서의 망화재(望華齋)로 석농(石農) 오진영(吳震英)을 찾아가 그 학문을 전수받았다.일제는 식민지화한 조선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우리 전래의 유학전통을 철저하게 파괴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08년부터 자행된 서당 철폐와 보통교육의 실시 강행 이와 병행한 단발령의 강행 등이었다. 월헌 이보림은 이에 저항하여 전래의 의관과 두발을 지키면서 서당을 열어 전통 한학교육을 계속하였다. 덕정마을 부로들의 전언에 의하면 그 서당교육은 지금의 관동중학교 자리의 서당골에 있었다는 봉양재서당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서당골의 서당수업은 일신재서당으로 옮겼고 학생들과 부형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서당의 유지와 운영이 더욱 활성화되어 집이 좁아 학생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였다 하며 이는 광복 직전까지 이어졌다.월봉서원은 월헌이 태어난 생가 건물이 서원으로 변모한 특이한 경우이다. 월봉서원의 규모와 외양은 소박하다. 전체적인 구성은 서원의 중심 건물이며 강당인 월봉서당이 자리한 오른편에 이보림 선생을 제향하는 사묘인 명휘사(明輝祠)와 내삼문이 있고, 강당의 맞은편에 위치한 봉양재는 옛 봉양재서당의 역사를 이은 건물로서 제2강당으로 사용되며, 관리사와 외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원과 관련된 주변 건물로는 선생이 강학하며 평생 기거하던 일선재(日新齋)와 선생의 아들이자 월헌의 학문을 계승한 근세의 유학자의 태두(泰斗)로 지칭하는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 선생이 강학하고 기거하던 연강재가 있다.2009년 월봉서원의 강당 건물이 문화재자료 제464호로, 월봉서원 소장 고문서 일괄(月峯書院 所藏 古文書 一括)은 문화재자료 제469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중요 고문서는 간재유묵, 간재선생필첩, 석옹수찰, 혁재사고, 논어강의, 대학강의, 월헌가서찰, 월헌집, 월헌필, 경덕재자금부, 일신재계안, 추연서찰, 화양속리금강송도해주평양유기, 간재년보, 전주이공흥현시혜비서 등이다.현재 서원을 운영하고 보존하는 이들에게, ‘유학의 전통은 이 시대에도 의미 있는 삶의 지표가 될 수 있으며 서원 내지는 서당은 어떠한 역할을 하여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커다란 숙제가 아닐 수 없다.월봉서원은 몇 군데 되지 않는 글 읽는 서원이며, 유학의 전통 계승과 문화적 사명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지역 유림의 정신적 구심체 역할도 하고 있다. 서원의 문화 활동 프로그램은 선현들의 충의정신과 전통학문을 현대적 계승을 중심으로 기획되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명휘사에서 행하는 전통제향체험이 있고, 인문학 강좌, 사서 강의, 전통다도 강의, 서원음악회, 경전성독대회, 어린이 인성교육, 한지공예, 캘리그래피 등은 강당에서 이루어지며, 선비들의 충절과 선비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유적지를 선정하여 탐방학습도 실시하고 있다. 알차고 유익한 문화행사를 활발하게 시행함으로써 2019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유교지원국고보조사업체로 선정되었다. 서원의 종사자들은 더욱 내실 있고 유익한 유교문화를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주변을 정비하여 더 나은 문화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도 계속하고 있다.서원과 서당은 귀중한 유교 문화유산이다. 우리는 서원과 서당들에서 단순히 현대사회에서 보기 드문 호기심 어린 관광목적지로 여길 것이 아니라, 향토문화와 역사를 체험하고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배우고 경험하는 귀한 공간임을 인식하고, 많은 이들이 탐방하여 옛 선비들의 학문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자신을 성찰해보는 뜻 있는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서원과 서당은 귀중한 유교 문화유산이다. 우리는 서원과 서당들에서 단순히 현대사회에서 보기 드문 호기심 어린 관광목적지로 여길 것이 아니라, 향토문화와 역사를 체험하고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배우고 경험하는 귀한 공간임을 인식하고, 많은 이들이 탐방하여 옛 선비들의 학문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자신을 성찰해보는 뜻 있는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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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로 지정되어도 그런 자료를 어떻게 보관해야 하는지 소장자는 잘 모른다. 개인이 보관하다가 분실 또는 훼손되기도 하고, 심지어 은행 금고에 보관하기도 한다. 일반인은 문화재를 열람하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은 그러한 자료를 기증받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디지털화하여 이용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고문헌을 어떻게 보존·관리하는가?문화재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인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로 지정되어도 그런 자료를 어떻게 보관해야 하는지 소장자는 잘 모른다. 개인이 보관하다가 분실 또는 훼손되기도 하고, 심지어 은행 금고에 보관하기도 한다. 일반인은 문화재를 열람하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은 그러한 자료를 기증받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디지털화하여 이용자에게 제공하고 있다.고문헌의 재질은 종이나 목재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까지는 이런 자료를 화재로부터 지키기 위해 분말소화기나 스프링클러를 이용했다. 그러나 화재가 발생하여 분말소화기나 스프링클러로 화재를 진압하고 나면, 고문헌 자료는 훼손되어 자료적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은 하론 소화기와 질소가스 소화설비를 갖추고 있다. 이 방식은 화재를 진압한 후 고문헌 자료에 전혀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은 지난해 문화재청이 공모한 훈증소독사업에 선정되어 고문헌을 전문적으로 보존·관리하게 됐다. 훈증소독은 서화류·섬유류·목재류 등 동산문화재 다량 보관처의 충·균 등에 의한 생물학적 피해를 예방함으로써 문화재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한 사업이다. 유물 및 건물 특성에 따라 밀폐, 피복, 포장 훈증소독 방법을 사용한다.고문헌은 화재나 습기, 벌레 등에 매우 취약하다. 고문헌 원본은 재생산이 안 되는 희귀자료가 많다. 한번 사라지고 나면 영영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고문헌은 디지털 촬영 또는 스캐닝하여 별도로 보관하게 된다. 고문헌도서관에서는 고문헌 원본의 보존을 위해 방범, 방재, 항온·항습, 방충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쓴다. 특히, 고문헌도서관 소장자료는 개인 또는 문중에서 백 년 이상 보관해 온 자료다. 한 번도 소독을 한 적이 없는 책이다. 그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먼지 수북한 책을 기증받아 정리하다 보면 몸이 근질근질하기도 한다. 그러니 고문헌을 다루는 업무는 기피 업종에 가깝다. 소장자료 중 중요 자료는?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에 소장된 고문헌은 원본 자료가 약 5만 점에 달한다. 이 중 29종 3,247점이 문화재다. 전국 대학 도서관 중 가장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이 중 지난해 문화재로 지정된 남명 조식 관련 고문헌과 희귀 친필, 고종과 명성황후 관련 궁중 음식문화 자료를 소개한다.『학기유편』은 남명 조식 선생이 독서를 하다가 자신의 공부와 수양에 좋은 구절이 있으면 이를 발췌해 놓은 것이다. 남명 사후 제자 정인홍이 『근사록』 체재에 따라 분류한 후 『학기유편(學記類編)』이라 명명하고, 서문을 지어 정사년(1617) 산청 덕천서원에서 최초로 간행한 것이다. 현재 『학기유편』 서문에는 정인홍의 이름이 검은 먹으로 뭉개져 있는데, 남명학파의 굴곡이 심했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남명 조식 선생이 28세 때인 1528년 10월, 부친의 3년 상(喪)을 마치고 부친 조언형의 생애를 직접 지은 ‘선고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 부군 묘갈명’의 초고본도 소장하고 있다. 남명 조식은 한국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 남긴 문헌이 많지 않은데, 저술보다 실천을 중시한 유학자이기 때문이다. 친필 원고는 더욱 극소수로 남아 있어 이번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고종과 명성황후 관련 궁중 음식문화 자료는 1895년부터 1921년까지 고종과 명성황후 영전에 다례와 조석상식을 올리기 위해 제작된 고문서로, 총 206점이다. 다례는 조선 왕실에서 국왕의 상례 기간에 조석상식과 아울러 매일 오시(午時)에 점심을 대신해 다과와 간단한 제사 음식을 올리던 것을 말한다. ‘발기’는 각종 의식에 쓰이는 물품의 목록과 수량을 열거한 문서를 가리킨다. 특히 각각의 다례에서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았을 때 실제 차려졌던 음식 이름과 그릇 개수가 날짜별로 자세하게 기록돼 있는 등 궁중의 상차림을 알 수 있어, 조선 후기 궁중의례 연구는 물론 음식문화 연구 등에 중요한 자료이다. 최근에는 이를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도 나왔다. 지역민을 위한 찾아가는 고문헌 상담서비스경상대학교는 대학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지역민과의 상생 협력을 드높이기 위해 2009년부터 ‘고문헌 상담서비스’를 해 오고 있다. 지난 10년간 고문헌 상담을 통해 지역민의 궁금증 500여 건을 상담했다.그런데 2018년 고문헌도서관을 개관하면서 고문헌 상담 신청이 부쩍 늘었다. 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은 이처럼 지역민의 반응이 좋아지자, 지난해부터는 고문헌도서관 내에 ‘고문헌상담실’을 설치하고, 지역민을 위해 찾아가는 고문헌 상담을 실시하고 있다.소장 자료가 적으면 소장자가 고문헌을 지참하고 고문헌도서관을 찾아와 상담할 수도 있다. 내용에 따라서는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고서전문위원 및 대학 내 관련 분야 전문가의 자문을 받기도 한다.상담이 접수되면 먼저 학예연구사가 고문헌 현황을 대략으로 파악한다. 소장 자료가 많으면 방문 일자를 협의하여 소장처를 방문하여 고서·고문서·목판·현판 등 고문헌의 내용, 보존·관리 방안 등을 알려준다.고문헌을 소장한 분들은 고령자가 많아 이동이 어렵다. 고문헌은 이동 중 도난 및 분실의 위험도 있다. 그래서 찾아가는 상담서비스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소장자가 소장한 고문헌의 내용을 알게 되면 문중의 자부심도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근래에 한학(漢學) 세대의 단절로 인하여 종손이라도 문중 전래 고문헌의 내용과 관리 방법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요즘 젊은 세대는 한문 해석은 고사하고 한자도 잘 읽지 못한다. 종손이라도 선조가 남긴 기록을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 그분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드리기 위해 시작한 일이 고문헌 상담 업무다. 경상대학교는 지역민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 위해 오랫동안 축적한 고문헌 관련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민을 위한 찾아가는 고문헌 상담서비스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선조가 남긴 문헌의 내용을 묻는 것에서부터, 문중이나 마을의 비석 내용, 일제강점기 때 선조의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달라고 하는 내용까지 다양하다. 한번은 어느 마을 큰 보호수 곁에 비석이 서 있었다. 비석 속에 그 보호수를 심은 사람, 심은 경위, 그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을 알려드린 적이 있다. 내용을 알고 나니 후손들은 선조에 대한 자부심이 커졌을 뿐만 아니라 마을 정자나무의 유래를 잘 알게 되어 기뻐하였다. 고문헌을 막연히 소장만 하고 있었는데, 상담을 통해 그 내용을 알게 되니 문중의 역사를 알게 되고 선조들에 대한 공경심도 더해진다고 한다.선현들이 기록을 남기는 목적은 그분들의 생활상이나 문학, 사상 등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선조가 남긴 역사 기록은 개인이나 문중에서 가두어 둘 것이 아니라, 이제는 국가기관 등 전문기관에 기증하여 연구에 널리 활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고문헌을 남긴 선조들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고, 문중을 빛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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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 어떻게 수집할 것인가?고문헌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시문 창작을 통해 사교를 나누는 등 우리 선조들의 삶의 일부였다. 그러나 근래에는 한학(漢學) 세대의 단절로 인하여 종손이라도 문중 전래 고문헌의 내용과 관리 방법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근대로 넘어오면서 고문헌은 시골에서 벽을 바르고 장독을 덮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6·25전쟁 중에는 많은 고문헌이 전쟁의 피해를 입었고, 근대에는 고문헌이 빨랫비누 몇 장과 바꾸어지기도 하였다. 다행히 살아남은 진주목 간행 보물급 고문헌도 진주가 아닌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분산되기도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보물급 고문헌 문화재는 모두 진주가 아닌 타지에 소장되어 있다. 이는 그동안 우리 지역에서 고문헌에 관심을 소홀히 한 데다가, 물질적 가치만을 숭상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지역에서 고문헌에 관심을 두고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경상대학교 도서관에 문천각을 설치하면서부터다.필자가 고문헌 수집 과정에서 잊지 못할 에피소드 몇 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경남의 어느 마을 재실에 고문헌이 많이 소장되어 있었다. 몇 차례 찾아가서 기증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문중 전체의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기증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 기증이 결정되었다. 필자와 문중 대표가 재실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고문헌을 보관했던 캐비닛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고, 바닥에는 도둑이 훔쳐 가다가 흘린 책이 널브러져 있었다. 문중에서는 경찰에 신고하였으나, 고문헌을 언제 도난당하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범인과 도난 맞은 고문헌도 영영 찾지 못하였다. 문중에서 뒤늦은 후회를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한번은 고문헌을 많이 소장한 노부부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댁에는 사나운 개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집에 도둑이 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개를 키운다고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부부가 시장을 가거나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여행을 갈 때도 부부가 같이 가지 못하고 한 사람은 남아서 집을 지켜야만 했다.“아무리 사나운 개를 키워도 도둑이 독약이 든 고기를 던져주면 개가 그것을 먹고 죽습니다. 그러면 도둑은 자기 물건인 양 트럭을 동원하여 훔쳐 갑니다. 고문헌을 대학에 기증하시면 두 분 시름을 덜게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하였다. 결국 노부부는 기증을 결심하였다. 그 후 두 분을 뵈니, 내가 고문헌을 왜 늦게 기증했는지 후회스럽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두 분은 시장도 같이 가고 개도 키우지 않게 되었다.고문헌을 많이 소장한 서원이 있었는데, 고문헌을 지키기 위해 두껍게 벽을 쌓고 튼튼한 철문을 달았다. 고문헌을 소장한 서원은 동네에서 외진 곳에 있었다. 하루는 밤중에 도둑이 용접기를 싣고 와서 철문을 해체하고, 고문헌을 모두 자기 것인 양 트럭에 실어갔다. 후회하고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고문헌 디지털화, 보존과 활용의 두 날개를 달다고문헌은 수집만 해 두면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수집한 고문헌은 많은 사람이 널리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경상대학교 문천각 사서로 임용되자마자 소장한 고서를 많은 사람이 손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 방법은 고서를 디지털화하는 것이었다. 고서를 한번 디지털화하면 원본을 굳이 열람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원본은 더욱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고, 내용은 많은 사람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인터넷으로 동시에 열람할 수 있게 된 것이다.2002년 당시는 IMF 구제금융 위기를 지난 시기라, 고학력 고급 인력의 실업이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보통신부에서는 고학력 고급 인력을 활용하여 우리나라 역사 기록을 디지털화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서울대 규장각·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가 하나의 그룹이 되어 고문헌 디지털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정보통신부에 주관하는 국가 DB 구축사업에 <남명학 관련 고문헌 디지털화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그때만 해도 남명이 지금처럼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기였다. 결과는 아쉽게도 탈락이었다. 다음 해에도 또 탈락하였다.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니, 심사위원들이 조금씩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DB 구축사업은 2002년 사업계획을 수립하여 2011년 사업을 완료하기까지 10년 동안 열 번의 사업계획서를 제출하여 다섯 번 탈락하고 다섯 번 선정된 것이다. 마침내 전국 대학 도서관으로서는 최초로 <남명학고문헌시스템>(http://nmh.gnu.ac.kr)을 개발할 수 있었다. 자료를 모으고, 모은 자료는 열심히 디지털화하여 전국의 연구자에게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제공했다. 시스템을 개통한 이래 현재까지 약 900만 건의 고문헌 열람이 이루어졌다. 이제는 고서를 열람하기 위해 굳이 경상대학교 도서관을 찾지 않아도 시간과 장소의 구애 없이 경남지역 유학자의 문집을 안방에서 열람할 수 있게 된 것이다.처음에 이 작업을 할 때 다른 대학 고문헌 담당자들은 의아해했다. 왜 힘들게 수집한 자료를 그냥 무료로 제공하느냐는 것이었다. 지역민으로부터 무상으로 기증받았으니, 원본은 잘 보존·관리하고 내용은 전 국민이 널리 활용하면 좋지 않으냐고 답변하였다. 현재 남명학고문헌시스템에는 경남지역 유학자의 문집 약 50만 면, 6천만 자가 디지털화되어 있다. 연간 약 30만 건의 검색 열람이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남명학 연구가 활성화된 이면에는 남명학고문헌시스템의 역할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고문헌을 전문적으로 보존하고 교육할 공간을 마련하다국가 DB 구축사업을 추진하면서 국사편찬위원회·서울대 규장각·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한국국학진흥원 등을 수차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 기관들의 시설과 장서 및 인력을 보니, 경상대학교 문천각은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나에게는 이루지 못한 숙원사업이 하나 더 늘어났다. 이제는 수집한 고문헌을 보존·관리할 반듯한 집을 하나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문헌도서관이 입주한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5층, 전체면적 9,178㎡ 규모(건축면적 3,050㎡)의 시설로서, 2010년 3월 17일 건축사업이 확정됐다. 2013년 6월 7일 착공해 2016년 8월 5일 준공하고, 2017년 12월 13일 전시시설을 준공했으며, 2018년 2월 21일 박물관과 함께 개관하였다. 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은 우리 지역의 고문헌을 체계적으로 수집·보존·관리하기 위해 전국 대학 도서관 중 최초로 만들어진 고문헌 전문 도서관이다.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은 책자 형태의 고문헌인 고서, 낱장 문서 형태인 고문서, 고문헌 인쇄에 활용된 목판과 활자, 건축물의 내력과 이를 찬미한 현판 및 주련, 고서화(민화·영정·서화), 쇠와 돌에 새긴 기록인 금석문, 경남지역 관련 각종 역사 기록물, 향토사 자료, 한적 도서, 족보, 불교 관련 도서 등을 두루 수집·관리하고 있다.고문헌도서관은 도서관의 자료 수집·열람 기능을 기반으로 삼고, 기록관의 보존 기능과 박물관의 전시 및 사회교육 기능을 결합한 ‘라키비움(Larchiveum)’ 개념을 도입한 복합문화공간으로 건립되었다. 수집된 고문헌의 보존과 운영을 위해 보존처리실·방범방재실·공조설비실·디지털제작실과 고문헌 열람실·고문헌 전시실·체험실습실·세미나실 등과 오버헤드 스캐너 및 고문헌 전용 오동나무 서가 등 최첨단 기기를 두루 갖춘 최신 도서관이다.그리고 고문헌도서관 소장자료 7만 6천여 점 중 고문헌 원본 자료 5만여 점과 문화재 29건 3,249점은 오로지 지역민의 무상 기증과 기탁으로 확보된 자료다. 고문헌도서관은 지역민에 의해 만들어진 도서관이라고 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문헌 자료는 그동안 한문 해독이 가능한 전문 연구자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은 박물관과 전시실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고문헌 상설 전시실을 설치하여 지하 보존서고에 있는 자료를 선별 전시하여 그 내용을 알게 하고, 지역민을 대상으로 현장 견학하게 하고, 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유학기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박물관 및 고문헌도서관 방문객은 3만 7072명이다. 장기적으로는 지역민을 대상으로 고문헌의 이해를 돕기 위한 교양강좌프로그램도 개발하여 운영할 계획이다.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은 경남지역 선현들의 사상과 생활상이 기록된 고문헌을 수집하여 보존·관리하고 있다. 고문헌에는 개인과 문중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경남지역 개인과 문중 고문헌이 한곳에 모여 연구될 때 경남지역의 역사, 나아가 우리나라 역사 연구가 풍부해질 것이다. 고문헌을 잘 보존·관리하여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 고문헌도서관의 사명인 것이다.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은 경남지역 선현들의 사상과 생활상이 기록된 고문헌을 수집하여 보존·관리하고 있다. 고문헌에는 개인과 문중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경남지역 개인과 문중 고문헌이 한곳에 모여 연구될 때 경남지역의 역사, 나아가 우리나라 역사 연구가 풍부해질 것이다. 고문헌을 잘 보존·관리하여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 고문헌도서관의 사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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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지러우면 악덕 무당이 판친다. 제법 괜찮다는 길목엔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색천을 매단 대나무를 대문간에 세워두고 안방엔 신당을 차린다. 소위 신군(神君)을 자처하는 그들은 세상 살이 다급한 민초를 대상으로 혹세무민한다. 그리고 마치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판관처럼 행세한다. 보편적 인식이 그렇다는 말이다. 비단 무당에만 그치지 않는다. 조폭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패밀리’의 머릿수가 곧 ‘힘’인 이들은 ‘대부’의 그늘에서 복
‘잣대’라는 말이 있다. 길이를 재는 자로 사용되는 대막대기 혹은 나무 막대기의 일종으로 통칭 ‘자막대기’라고도 부른다. 이 말은 자고로 도덕적인 행위나 사물의 기준을 재단하는 객관적인 근거로 인용되곤 했다. 흔히 ‘객관적이지 못한 일’이나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이 잣대를 기준으로 잘잘못을 가리곤 한다.그런데 이 잣대란 말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잣대가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객관적이지 못하며 형평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 ‘잣대’는 일부 소수 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