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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찾아서 ④ / 진주교방문화, 미래 문화가치 무궁무진

  • 작성자

    황경규

  • 작성일

    2024.07.20 AM 10:48

  • 조회수

    320

진주 고유의 문화콘텐츠인 교방문화에 대한 아젠더를 지역사회에 선보인지 벌써 5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진주교방문화활성화를 위해 진주시는 교방문화활성화 기본용역을 했고, 진주시의회에서도 교방문화특화관광도시 진주조성 용역을 실시했다. 지난해에는 한국교방문화학회(회장 신현규, 중앙대)가 창립되고 연간 4회에 걸쳐 교방문화 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아직 교방음식, 교방복식, 교방가무악 등 연구과제는 산적해 있지만 민간의 노력이 중단되지 않는한 진주교방문화를 통한 진주 지역경제활성화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있다. 올해에는 진주교방의 술과 음식을 활용한 '진주교방 막전축제'를 계획하고 있다. "민간이 움직여야 생명력이 있다"는 파성 설창수 선생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진주교방문화활성화를 통해 진주에 새로운 활력소가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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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교방문화, 미래 문화가치 무궁무진

 

경남 문화·예술의 총본산으로 명성을 떨쳐 온 진주의 현주소를 되짚어 보아야 할 시기를 맞고 있다. 진주가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온 역사·문화·예술의 도시임을 자부함에 있어 누구도 쉽게 부정하기 어렵지만, 현실은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데 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지역의 정체성을 담보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을 바탕으로 한 재창조라는 시대적 과제에 눈을 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남을 대표하는 문화도시로의 도약을 준비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약진이 눈에 띈다. 경남 최초로 문화도시에 선정된 김해시를 비롯해 창원시와 통영시도 최근 문화도시추진위원회를 출범하고 문화도시 추진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들 도시들은 지역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 지역 문화가치 발굴, 지역 문화브랜드 세계화 등에 필요한 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더불어 문화유산과 연계한 특화·브랜드 사업과 문화지구 활성화 등에 대한 조사와 연구 작업도 병행해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남 최초의 문화도시 김해

 

경남 최초의 문화도시로 예비사업지역에 선정된 김해시는 이를 계기로 ‘오래된 미래를 꿈꾸는 역사·문화도시 김해’를 완성하는 첫걸음을 뗀 셈이다. 김해시는 김해 문화도시가 김해의 가치와 도시철학을 만들고 도시의 미래발전을 견인하는 새로운 전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김해시는 김해에 스며있는 스토리를 바탕으로 도시재생사업과 문화도시 사업을 연계하는 사업전략을 제시해 가야문화권 대표도시로 나아가는 마중물로 삼겠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다. 

창원시도 문화예술 전문가와 시민대표로 구성된 ‘문화도시추진위원회’ 출범식을 갖고 문화도시 추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창원시의 문화도시 사업은 역사와 문화, 사람과 자연을 잇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창원 문화도시’ 선정에 전력을 계획이다.

통영시 역시 2020년 문화도시 지정을 목표로 지난해 ‘문화도시추진협의회’를 구성하고 통영의 문화도시 계획수립에서부터 심사평가단 현장설명 등의 사업을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다. 더불어 문화도시 지정을 위한 예비사업 계획 수립과 사업추진을 위한 세부적인 일정 역시 마련해 놓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하는 문화도시는 지역별 특색있는 문화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문화 창조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지역문화진흥법에 따라 지정하고 있다. 물론 문화도시로 지정되어야 진정한 문화도시임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도시 지정 과정에서 확산되는 지역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와 인식전환, 보존과 전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효과가 문화도시 지정을 뛰어넘는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진주문화유산원은 진주교방문화화성화를 위해 창립했다.

 

진주문화유산원의 설립과 문화유산의 창조적 활용

 

진주시가 문화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역내에 산재해 있는 문화유산을 통합·관리하는 기관의 설립과 그 보존과 전승을 위한 추진체계를 다시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문화창조력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문화를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문화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상생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상생의 시대에 걸맞는 최우선 행보는 무형문화재와 유형문화재를 포괄하는 지역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과 전승체계 개선을 위한 문화유산 보존 연구 기관의 설립이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한국국학진흥원은 우리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잘 계승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관이다. 국학진흥원은 자료의 수집과 보존에 이은 아카이브구축, 학술 연구 및 교류와 출판사업 등을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보존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의 전통문화를 홍보하기 위한 문화공간으로 설립된 ‘한국의 집’ 역시 전통 한옥의 멋을 간직한 공간에서 전통의 음식·공연·혼례·문화상품을 판매하는 등 서울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는 홍보대사역을 자임하고 있다.

진주는 천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형성된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문화의 도시이다. 하지만 천년의 전통문화를 꽃 피운 진주에 이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기관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는 진주의 다양하고 정체성을 간직한 문화유산이 제대로 모아지고 보존·계승되어야 한다. 시대적인 요청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인 교방문화를 비롯한 진주의 천년 역사와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올바른 전승과 보존을 위한 ‘진주문화유산원(晋州文化遺産院)’과 같은 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

진주문화유산원은 전통문화와 문화유산에 대한 조사·연구 및 아카이브 구축, 연구·위탁사업, 전문인력양성 및 시민교육사업, 학술행사 개최 및 지원사업 등을 통해 진주문화유산의 폭넓은 이해와 보존과 전승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수행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특히 진주가 진정한 문화도시로 성장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진주의 문화유산에 대한 아카이브 구축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주시 문화유산에 대한 아카이브 구축은 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 확보는 물론 창조적 문화활용을 통한 문화상생시대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진주교방문화의 경우,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이지만, 제대로 된 조사나 연구 작업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보존과 전승을 위한 책임을 민간에 미루어 놓는 바람에 창조적 활용은 고사하고 명맥유지에만 그치고 있는 실정임을 유념해야 한다.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의 필요성 제기에만 그칠게 아니라 진주문화유산원이 교방문화에 대한 아카이브 구축과 연구, 창조적 활용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고 추진하는 추진주체가 되어야 한다. 비단 진주교방문화 뿐만 아니라 진주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그 대상이 됨은 물론이다.

문화의 역할은 즉각적일 수는 없지만, 그 근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진주 문화의 DNA를 풍요롭고 건강하게 하기 위한 진주 전통문화예술의 보존과 활용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진주문화유산원이 문화도시 진주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보존하며 연구하면서 진주만의 멋과 맛을 확산시킬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있도록 진주시는 물론 전문가, 시민 모두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진주교방문화의 보존과 전승 과제

 

진주교방문화의 보존과 전승 과제는 진주시의 문화도시 지정 노력과 도시재생사업과의 연계, 진주문화유산원의 설립 의지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연구작업과 교방문화단지 조성 등이 민간차원에서 추진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자료조사, 활용방안 마련 등의 과제들은 민간단체가 담당하기에는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진주의 전체 문화유산을 아울러 연구하고 활용하는 기관의 설립을 통해 진주교방문화의 보존과 전승을 위한 과제를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진주문화유산원을 통해 진주교방문화의 창조적 활용 방안이 마련되고 시민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그 영향력은 다른 문화유산에 파급돼 선순환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진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과 연계를 짓는 방안도 고려해 볼만 하다. 우선적으로 독창적인 진주만의 전통문화라는 장점을 도시재생과 연계 짓는다면 도시재생사업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국적인 것이 아닌 진주만의 것이라는 장점은 도시재생에 큰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역축제를 통한 진주교방문화의 전국적인 홍보도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진주의 봄 축제인 ‘진주논개제’를 통해 진주교방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적극 홍보해 나갈 필요성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진주논개제의 대표 프로그램인 의암별제는 진주교방문화의 진수이자, 킬러 컨텐츠로 이미 오래전 부터 자리잡고 있다. 의암별제뿐만 아니라 진주교방의 악가무인 진주검무와 교방굿거리춤, 한량무, 포구락무 등의 컨텐츠를 차별화시키고, 대중화시켜 나갈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된다면 진주교방문화가 바탕이 된 진주의 대표적인 축제로 발전시켜 나갈수 있을 것이다. 만약 진주교방문화가 아닌 백화점식 프로그램이 남발된다면 진주교방문화는 물론 진주논개제의 미래는 결코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다.

 

 

TVING 다큐멘터리 '기생 꽃의 고백'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

 

‘진주교방문화의 맛과 멋’이라는 기획을 연재하면서 기대한 것은 진주 교방문화에 대한 지역사회의 이해와 바른 인식에 있었다. 더불어 진주교방문화가 진주를 대표하는 또하나의 새로운 문화컨텐츠로 자리잡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진주교방문화 시리즈를 통해 이른바 기생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바람을 담았고, 진주의 교방문화가 남긴 미래의 가치에 주목하고자 했다.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이라는 창조적 활용방안을 제시했고, 궁극적으로 문화도시로의 방향설정은 물론 진주문화유산원 설립, 도시재생사업과의 연계 등의 과제로 발굴했다.

이제 남은 것은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지역사회의 노력이다. 진주시와 진주시의회, 문화예술전문가, 민간단체, 진주시민에 이르기까지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관심과 보존·전승코자 하는 의지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첫 술에 배부를 순 없다. 하지만 진주교방문화가 전 시민의 자랑거리가 되는 그 날까지 조금씩 준비해 나가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과 강력한 추진력이 필요하다. 진주교방문화는 독창적인 진주만의 문화유산이다. 그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보존과 전승에 이어 창조적 활용으로 까지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없을 것이다.

 

 

중앙일보 서소문 포럼(2019.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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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찾아서 ③ /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와 문화예술적 평가

교방문화의 전승·보전은 시대적 요청 심포지엄 개최 등 학문적 접근 노력 필요 역사·문화 활용한 문화컨텐츠 개발 노력 교방문화를 선도한 예기(藝妓)는 신분제도에 있어 하층민에 속한 존재로 신분적 멸시와 냉대는 물론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중 삼중의 억압과 천대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힘든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특히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이른바 기생문화라는 그릇된 인식의 확산에 따라 전통문화예술을 계승해 온 교방문화가 이 땅에서 소멸되다시피 한 것은 사실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더불어 교방문화의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부족해 교방문화가 가진 문화·예술적 가치가 과소평가되어 온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이제는 교방문화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부당한 제도와 부적절한 사회적 시선에 대한 새로운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방문화가 간직하고 있는 문화·예술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 교방문화의 전승과 보전이라는 시대적인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주성도에 나타난 교방(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소장)교방(敎坊)의 역사와 기녀(妓女) 고려시대에 기녀(妓女)들에게 춤과 음악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중앙에 교방(敎坊)이 있었다. 교방은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으로, 교육을 받은 기녀들은 궁중의례와 연회, 외교사절 접대, 연등회, 팔관회 등과 같은 국가행사에 동원됐다.교방(敎坊)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기녀들의 교육을 관장했고, 조선 초기에 설치된 악학도감과 장악서 등을 계승한 장악원(掌樂院)이 설립된다. 장악원은 성종 1년(1470) 이후, 고종 광무 1년(1897)의 관제 개혁으로 교방사(敎坊司)로 개칭될 때 까지 427년 동안 활동한 국립 음악기관으로 자리했다.조선 세조 때 장악원(掌樂院) 하부의 좌방(左坊)과 우방(右坊)을 합쳐 교방이라 불렀고, 조선후기에는 지방에도 교방을 설치했다. 특히 지방에 설치된 교방의 위치는 읍성 내의 가장 중요한 위치한 지방 관아(官衙)에 딸려 있는 건물로 대개 관문 밖 객사(客舍)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진주의 교방에 대한 기록은 진주의 인문지리지 『진양지(晋陽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우(館宇)」 조에는 ‘중대청(中大廳) 동쪽과 서쪽에 낭청방(郎廳房)이 있고, 서쪽 낭청방 앞에 교방(敎坊)이 있었다(中大廳 東西各有郎廳房 西郎廳之前 有敎房)’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옛 진주MBC가 바로 진주객사가 있던 자리이며 진주교방이 있던 곳이다.갑오개혁(1894년)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됨과 동시에 장악원이 해체되었다. 이에따라 궁중과 지방관아에 속한 기생안(妓生案)이 사라지면서 관기(官妓)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1905년에는 고려시대 당악정재·향악정재를 연주했던 교방악의 전통을 이은 여악(女樂)마저 폐지되면서 1909년 관기제도는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선상기 한성권번 왕월출(1897년생) / 신현규(중앙대 교수) 이후 생계유지를 위한 자구책의 하나로 기생조합들이 생겨나게 된다. 최초의 기생조합은 1909년 4월 경찰 주도하에 만들어진 한성기생조합이며, 조선기녀의 전통과 역사가 반영된 다동기생조합과 광교기생조합도 잇달아 만들어 진다.이때부터 이른바 ‘기생문화’가 이 땅에 자리잡게 된다. 당시 일제는 기생조합의 설립에 따른 기생활동을 통제하는 단속령을 내리게 된다. 당시 기생은 관청에 속한 관기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던 일패 기생과 은근자(隱勤者)라 불린 이패 기생, 탑앙모리(搭仰謨利)라 해서 몸을 파는 유녀인 삼패 기생으로 엄격히 구분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러한 엄격한 구분을 해체한 뒤 예기(藝妓)와 창기로 구분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속칭 ‘기생(妓生)’으로 불리게 되는 불행한 운명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상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통문화의 계승자였던 기녀(妓女)들이 기생(妓生)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가지게 된다.특히 당시 기생조합들은 1914년부터 일제의 강요에 의해 ‘권번(券番)’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권번제도가 도입되면서 예기와 창기의 구분이 없는 ‘가무와 몸을 파는 기생’이라는 이미지로 정착되고 만다. 이는 일제가 자국에서 들여온 저급한 유녀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예인(藝人)으로서 자존심을 지켜왔던 조선 기녀(妓女)들의 가치가 평가절하됨은 물론 성적 이미지의 왜곡이 더욱 심해지고 노골화 된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인식하에서도 당시 기생(妓生)의 신조와 원칙은 ‘노래를 팔지언정 몸은 팔지 말라(買唱不賣淫)’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더불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기생독립운동 등 애국(愛國)에 대한 열정은 물론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기생들도 적지 않았다. 진주권번은 1915년 당시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지만, 진주 기녀인 금향을 비롯한 노기(老妓)들이 다시 ‘진주기생조합’을 만들어 재정이 건실한 권번으로 발전되었다. 당시 진주기생조합은 여성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바뀌고 경영권이 남자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비리와 부조리가 만연하게 된다.진주권번은 1939년 11월 2일 주식회사 ‘진주 예기권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면서 전통적인 진주 기생의 풍류와 멋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게 된다. 진주권번은 현재 우리은행(옛 상업은행) 자리에 있었다. 선상기 한성권번 이죽향(1900년생)/신현규(중앙대교수)진주권번의 교육과 가무 국립문화재연구소 중요무형문화재 기록도서인 『진주검무』를 보면 당시 진주권번의 교육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당시 진주권번은 기생 100명과 견습생 50~60명으로 학부를 설치했다. 오전과 오후 두 번에 걸쳐 진주검무와 한량무를 비롯한 가무를 시작으로 음곡, 산술, 일본어, 예법 등을 가르쳤다. 견습생들은 각 과목당 3개년 수업 연한으로 고전시조, 가야금, 유행가, 서화, 수신, 산술 등 학술방면의 교육을 받았다. 합격자에 한해서는 기생자격을 부여하고, 3개년의 의무 연한제를 제정해 진주 기생의 양성에 목적을 두었다.진주권번에는 대개 12~13세에 입학했다. 이들과 같은 동기(童妓)들은 예의범절부터 배웠다. 12세 때는 시조, 우락, 계면, 편 등의 가곡을 수련했으며, 춘향가, 단가 등을 교육시켰다. 춤은 검무, 한량무, 신무(神舞), 춘향무 등을 익혔다. 이 가운데 진주검무는 진주권번에서 익히는 중요한 무용이었다. 오전에는 주로 창(唱)을, 오후에는 무용을 수련했다. 당시 진주권번의 무용 선생으로는 김창조(1865~1919)가 유명했다.중외일보는 1929년 당시 진주권번의 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진주에서는 권번에 입적하여 기예를 익히는 과정의 기생을 ‘학생기생’이라 하였다. 학생 기생은 3년간 월사금 2원씩을 내고 국악전반에 관해 학습을 하게 된다. 또한 배우는 학과에 따라 자신이 부족한 부분은 따로 수업료를 내야했다.’이처럼 진주권번은 기생의 양성을 책임지는 교육기관으로 조직을 탄탄히 갖추어 나갔다. 진주를 비롯한 서울, 평양, 대구, 부산 등 대도시의 권번들은 예능인 배출이라는 목표 하에 다양한 내용과 철저한 방식으로 교육을 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진주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의 존재 의의는 예능(藝能)에 있으며, 기생 교육의 본질적 목표가 예도를 구현함에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진주출신 선상기 금향(김영희) / 사진제공(신현규 중앙대 교수) 진주교방문화의 문화·예술적 평가 진주교방문화가 가지는 문화·예술적 가치는 대단히 높다. 실제로 진주의 교방문화는 전국적으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진주만큼 교방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는 지역이 드문 것이다. 진주권번에서 계승된 궁중무와 민속무는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춤으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시·도문화재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교방에서 진주권번으로 이어진 교방악가무는 우리 전통 악가무의 주역이자 중심이며, 오랜 시간을 이어오면서 길러지고 다듬어진 진주교방문화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만 하다.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그 풍류와 멋을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로 재발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진주만의 독특한 문화로 전승되고 있는 교방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적 접근의 필요성은 물론 교방문화가 풀어야 할 숙제인 이른바 ‘기생문화’라는 부정적인 인식변화를 위한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우선 진주교방문화의 문화·예술적 가치에 대한 심포지엄을 비롯한 학문적 접근은 물론 교방문화의 인식개선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등의 노력이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이 올해 문화재청 생생문화재 활용사업에 ‘교방문화 그 풍류와 멋’이라는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향후 본격적으로 교방문화에 대한 인식개선을 비롯한 토론회를 비롯해 지역민과 함께 호흡하는 교방문화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비록 오늘날 진주의 교방문화가 역사속의 전설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정신사적 가치와 문화예술적인 가치를 전승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예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계승 보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 존재가치를 상실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단법인 진주민속예술보존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노력이 더해져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문화·예술사적 가치가 계승·발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진주의 봄축제인 진주논개제를 통해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대내외에 꾸준히 알려나가고 있다는 점도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진주교방문화의 문화·예술적 가치 평가에 이견(異見)이 없다면, 이제는 지역사회가 나서서 진주교방문화를 어떻게 계승·발전 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진주의 문화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우리의 진정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 202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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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찾아서 ② 교방문화의 멋과 맛이 남긴 미래가치

교방문화의 멋과 맛이 남긴 미래가치 의암별제·전통가무·교방음식의 풍류와 맛 계승관광산업·지역경제활성화 연계 방안 마련 돼야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을 통해 타 지역과 차별화 된 문화도시 진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역사성과 정체성에 기반을 둔 문화컨텐츠의 개발이 중요하다. 실제로 지역의 문화자원 활용을 통한 문화컨텐츠 개발은 기존의 역사문화자원을 토대로 하거나, 문화자원이 가지는 가치(價値)를 이식(移植)하는 방법이 대두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진주교방문화는 지역의 소중한 문화자원과 문화적 가치의 이식이라는 두 측면 모두 활용이 가능하다. 이는 진주교방문화를 통해 진주를 대표하는 새로운 문화컨텐츠로의 개발은 물론 이를 통한 기존 관광산업과 연계한 관광활성화와 먹거리산업 확산을 통한 지역경제활성화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충분한 미래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최근 진주시는 물론 전국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都市再生事業)에서 문화·예술·역사가 화두(話頭)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이 남긴 미래가치’에 대해 주목하는 일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다. 문화와 예술이 도시를 재생하고, 창의성과 독창성을 지닌 문화컨텐츠 개발을 통해 문화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근거를 진주교방문화에서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방문화의 풍류와 멋, 의암별제 진주교방문화의 풍류와 멋은 의기논개(義妓論介)를 추모하는 성대한 대동제 성격의 의암별제(義巖別祭)와 진주권번에서 계승된 진주검무(晋州劍舞)를 비롯한 전통 가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진주교방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단연 의암별제(義巖別祭)이다. 의암별제는 고종 5년인 1868년 당시 진주목사인 정현석(鄭顯奭)에 의해 창설되었다. 의암별제는 매년 음력 6월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기녀들만이 치른 대규모 의식으로, 악공을 제외한 제관(祭官) 등 모든 의식(儀式)을 여성들이 주관하는 점과 선비들의 음악인 정악(正樂)을 사용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하는 행사이다.첫 제례가 베풀어진 무진년(戊辰年)에는 300여 명의 기녀들이 모인 가운데 악가무(樂歌舞)가 어우러진 성대한 제례가 행해졌고, 무려 3일 동안 베풀어진 여흥잔치에는 수 천명의 구경 인파가 몰려 가히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의암별제는 그 의식(儀式) 자체가 갖는 민족성 때문에 진주의 노소명기(老少名妓)와 시민들의 의식발로로 일제강점기에도 한 두 차례 봉행되다가 결국 단절이라는 아픔을 겪지만, 진주민속예술보존회의 노력에 힘입어 1992년 진주성 촉석루에서 의암별제 복원과 봉행이 거행된다. 의암별제의 복원과 봉행은 논개의 민족적 충혼을 오늘에 되살리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일임과 동시에 나아가 민족의 정체성을 후손들에게 알리는 민족적인 쾌사(快事)라는 가치를 지닌다.의암별제가 가지는 또 하나의 가치는 조선시대 종묘(宗廟)에서 행해진 종묘대제(宗廟大祭)나 문묘(文廟)에서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제외하고서 의암별제처럼 음악과 노래, 춤이 어우러진 제사의식을 치른 전례가 없다는데 있다. 여기에서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역사성과 정체성, 독창성을 계승하는 진주만의 문화컨텐츠로 발전시켜 나가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진주의 봄 축제인 2018년 진주논개제의 대표 프로그램인 의암별제가 세계축제협회 한국지부 주최로 열린 피너클 어워드 한국대회에서 대표 프로그램상을 수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당시 의암별제는 의암별제 창설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1868년 그날’이라는 주제로 진주검무 이수자들과 진주지역 학생 등 100여명이 참여했으며, 당상악공, 당하악공 등이 제례에 참여하는 종합가무제로 창설 그 당시 그대로 재현한 행사여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역사적 사실 재현을 통한 전통문화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의암별제의 대표 프로그램상 수상은 그 의미가 깊고, 진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유네스코 공예·민속예술창의도시 지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주목할만 한 부분이다.일각에서 대한민국 축제의 원조가 ‘의암별제’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도 있다. 동의한다면 의암별제가 창제된 1868년을 기점으로 진주의 축제는 151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갖게 된다. 축제도시 진주를 표방하는 진주시가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더불어 의암별제가 지닌 가치의 전승을 위해 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의암별제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감안한다면 무형문화재 지정은 당연한 일이다. 의암별제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진주교방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핵심사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진주논개제의 대표프로그램인 의암별제 봉행 교방의 악가무가 지닌 전통의 향기 의암별제와 더불어 진주교방문화의 핵심은 진주검무를 비롯한 전통가무(傳統歌舞)에 있다. 진주권번에서 계승된 진주의 궁중무와 민속무는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춤으로 남아있을 뿐아니라 시·도문화재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인 진주검무(晋州劍舞)이며,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인 한량무(閑良舞),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인 진주포구락무(晋州抛毬樂舞),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인 진주교방굿거리춤 등이다.이처럼 진주권번이 계승한 전통 춤들은 우리나라 무용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동안 요리집 여흥거리로만 인식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기녀들의 춤을 악(樂)의 총체적 개념속에서 보지 못하고, 여기(餘技)에 부속된 것으로만 인식되었던 탓이다. 진주교방에서 진주권번으로 이어진 기녀들의 춤에 대한 인식여부를 떠나 당대에는 엄연히 우리 춤의 주역이었고, 우리 춤의 중심이었다는 점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기녀들의 춤 속에는 수백, 수천년을 이어오면서 길러지고 다듬어진 우리 춤의 정신이 담겨있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단법인 진주민속예술보존회를 중심으로 진주교방문화 혹은 진주권번문화의 예술문화사적인 가치가 계승 발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교방의 가무악 중에 하나인 진주포구락무 교방문화의 맛, 진주냉면과 교방음식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문화컨텐츠 가운데 교방음식(敎坊飮食)은 조선 중기의 음식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교방음식의 재발견과 창조적 계승 노력은 진주교방문화 활성화에 필수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일반적으로 교방음식은 진주교방청의 연회음식에서 비롯된 한정식(韓定食)을 지칭한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오면 그들을 접대하기 위한 연회가 베풀어졌고, 이 자리에서 기생들의 가무와 술이 곁들여진 진주교방청의 연회음식이 곧 교방음식으로 발전한 것이다.예로부터 진주는 서부경남의 교통 중심지로 지리산의 청정 농산물과 남해바다의 신선한 수산물을 가까이 할 수 있어서 산해진미의 음식문화가 다양하게 발달되어 왔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진주교방음식은 타 지역들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교방이 폐쇄되면서 교방문화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고, 교방음식과 상차림은 일부 한정식 식당에서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교방음식(이 상차림은 교방음식을 재현한 한정식이다)교방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진주냉면이다. 진주의 기녀들이 새참으로 진주냉면을 먹었다는 전술(傳述)도 있지만, 진주의 권력가나 재력가들이 야참음식으로 즐겨 먹었는데, 조리하는 방식도 독특해 진주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시대부터 메밀을 이용한 메밀국수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냉면 중에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다’라고 할 만큼 평양과 진주지방에서 냉면이라는 명칭으로 정착, 발전하였다.디지털진주문화대전에 따르면 진주냉면은 1960년대 중반에 진주지역에서 사라졌다가, 1999년 진주냉면 원형을 중심으로 식생활문화연구가에 의해 재현되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옥봉동을 중심으로 수정식당, 평화식당, 은하식당 등 7~8개 업소가 성업 중이었으며, 옛날에는 이러한 식당들이 하인을 두고 직접 배달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방음식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진주냉면은 교방에서 즐겨먹던 새참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냉면이 그 역사와 전통을 이어 받아 진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북한의 평양냉면과 같은 명성과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능하다면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을 통한 진주냉면의 전국적인 홍보와 전략적인 발전방안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의암별제를 비롯한 진주의 전통가무의 계승·발전은 기존의 관광산업과 연계한 관광활성화에 힘을 보탤 수 있다. 그리고 진주 교방청에서 유래한 교방음식과 진주냉면의 문화컨텐츠화는 지역의 먹거리산업과 연계를 통해 지역경제활성화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이 남긴 미래가치이다. 정작 문제는 진주교방문화와 교방음식을 진주만의 새로운 문화컨텐츠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부재에 있다. 이제 진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방문화가 갖는 미래가치를 인식하고, 진주문화의 새로운 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할 수 있는 노력들이 이어져야 한다. 더불어 진주교방문화의 풍류와 멋이 지닌 진주만의 전통문화의 홍보와 전승은 물론 진주의 새로운 문화컨텐츠로 계승할 수 있는 각계의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진주교방문화가 갖고 있는 풍류와 멋은 진주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 2024-07-20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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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찾아서 ①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과 문화도시 도약 썸네일 이미지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찾아서 ①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과 문화도시 도약

‘진주교방문화단지’조성과 문화도시 도약 교방문화 역사·문화·예술적 가치 재평가 필요교방청·교방음식관·교방촌 등 멋과 맛 담아야 진주의 교방문화(敎坊文化)에 대한 정신·예술사적 가치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진주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간직한 교방문화는 향후 진주를 대표할 새로운 문화컨텐츠이자, 진주가 진정한 의미의 문화도시(文化都市)로 도약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진주의 문화자산이기 때문이다.진주의 교방문화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의기 논개(義妓 論介)와 매국노를 꾸짖은 산홍(山紅)의 절의(節義), 그리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 기생독립운동(妓生獨立運動) 등과 같은 진주의 정신문화사(精神文化史)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진주교방문화에서 발원된 진주정신(晋州精神)의 줄기에 대한 확인은 물론 민족의 자주성을 대내·외에 천명한 일련의 역사는 결코 가볍게 다루어져서는 안된다. 더불어 151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교방문화의 진수인 의암별제(義巖別祭)와 진주교방문화에서 계승된 진주의 전통가무가 그 역사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아 시·도문화재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진주검무(晋州劍舞), 한량무(閑良舞), 진주포구락무(晋州抛毬樂舞), 진주교방굿거리춤 등이 지금도 전승·보존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진주교방문화가 갖고 있는 예술문화사 측면도 마땅히 고려되어야 한다.안타깝게도 진주 교방문화는 그동안 사회 전반에 걸친 이른바 ‘기생문화’ ‘바(BAR) 문화’라는 부정적인 인식의 지배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진주의 교방문화가 갖고 있는 정신·예술사적인 가치에 대한 재평가 노력은 물론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 등과 같은 실질적인 전승과 보전 노력을 통해 진주가 진정한 문화·예술의 도시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시대적인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 논개 부조 진주교방문화가 지닌 가치의 발견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오롯이 담아 낸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이 갖는 의미는 진주가 문화도시임을 대내외에 표방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킬러컨텐츠로서 지역의 관광산업과 지역경제활성화에도 큰 몫을 담당해 낼 수 있다는 점이다.의기 논개, 산홍, 기생독립운동 등이 갖는 교방문화의 정신사적 가치와 의암별제, 전통가무, 교방음식 등 교방문화가 지닌 문화예술사적 가치를 활용한다면 문화·예술·관광의 도시 진주를 대변하는 새로운 킬러 컨텐츠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특히 진주교방문화를 중심축으로 전국의 교방문화와 연계하는 ‘전국교방문화협의체(全國敎坊文化協議體)’ 구성 등을 통해 교방문화 관광벨트 구축은 물론 교방음식을 활용한 먹거리산업의 활성화를 통한 지역경제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다.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교방문화협의체 구성은 진주가 교방문화의 허브로 자리잡음과 동시에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됨은 물론이다.교방문화를 매개로 한 진주-평양간 남북문화교류 가능성에도 무게를 두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진주와 평양의 교방문화는 예로부터 ‘남진주-북평양’으로 불릴 만큼 대표적이며, 두 도시가 갖는 역사·문화적 연관성도 상당히 밀접하다. 진주냉면과 평양냉면으로 대별되는 교방음식은 물론 전통가무인 진주검무와 평양검무, 진주 의기 논개와 평양 계월향, 진주성 촉석루와 평양 부벽루, 진주 남강과 평양 대동강,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와 평양성전투, 진주의 기생독립운동과 평양의 기생독립운동이 있다. 진주-평양간 교방문화를 통한 남북문화교류사업의 시도를 위해 민간단체 주도의 ‘교방문화발전위원회(敎坊文化發展委員會)’ 운영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진주의 교방문화가 가지는 미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다만 지금 필요한 것은 이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장기플랜 수립과 지역차원의 적극적인 추진의지이다. 진주교방문화의 진수를 담은 ‘진주교방문화단지(晋州敎坊文化團地)’ 조성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진주기생 예기권번 진주교방문화의 진수를 담아내자 진주교방문화단지는 진주가 문화도시로의 새로운 도약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문화도시임을 표방하고 있는 파주 헤이리 아트벨리, 경주 역사문화중심도시, 부산 영상문화도시, 부천 만화에니메이션 산업단지 등과 같이 진주교방문화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성과 예술성, 그리고 미래가치를 담아내야 한다. 우선 진주교방문화단지에는 교방문화의 상징이자, 역사성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진주교방청(晋州敎坊廳)이 건립되어야 한다. 진주교방청은 진주교방문화의 상징물이 될 것이며, 향후 전국교방문화의 메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관광산업활성화 차원에서 진주교방의 역사를 한 눈에 맛 볼 수 있는 진주교방역사관(晋州敎坊歷史館)을 건립해야 한다. 역사관은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역사와 문화예술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창구이자, 진주교방문화를 중심으로 한 문화도시로의 도약을 천명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더불어 전국의 관광객들이 진주검무 등 진주교방의 전통가무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진주교방체험관(晋州敎坊體驗館), 진주냉면을 비롯한 교방음식을 맛 볼 수 있는 교방음식관(敎坊飮食館), 한옥 숙박시설인 교방촌(敎坊村) 등을 통해 진주교방의 멋과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교방문화의 역사와 문화·예술적 평가 이제 진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방문화의 흔적을 찾아내 진주문화의 새로운 한 축으로 자리매김시킬 수 있는 실천적 노력들이 이어져야 한다. 우선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와 문화예술성에 대한 학술연구와 이론정립은 물론 교방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의암별제와 전통가무의 전국적인 홍보와 전승, 진주냉면을 비롯한 교방음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 진주만의 새로운 킬러컨텐츠를 만들어 내야 한다. 단언컨대, 진주교방문화가 그 주역이 될 것이며, ‘진주교방문화단지’가 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의기논개 표준영정

  • 2024-07-20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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