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규
2024.06.26 PM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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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진주는 공단종합시장(1981년) 설립에 이어 평거지구 택지조성사업(1987년), 중앙지하상가(1988년), 상평교 준공(1990년), 호탄지구 구획정리사업(1992년), 남해안고속도로 진주~광양(1992년), 신안택지개발(1992년), 이현종합시장(1993년), 실키안(1997년), 진주농산물도매시장(1999년) 등 진주 경제의 성장을 위한 발판마련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공단종합시장은 진주시 하대동에 소재하고 있는 재래시장으로 1981년 12월 24일 개설되었다. 한국전매공사 경남지역본부 진주지사가 1987년 4월 1일 설치가 되고, 같은 해 11월 26일에는 상평3차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되었다. 12월에는 평거지구 일단의 주택지조성사업이 시행되었다.
한국도로공사 경남지사 진주지부가 1988년 3월 2일 설치되었고 같은해 5월 28일에는 중앙지하상가가 개설되었다. 중앙지하상가는 2017년 6월 8일 ‘에나몰’로 새롭게 개장했다. 진주가 각 분야별로 경제 활성화를 위한 안정기에 들어선 것이 이 시기이다.
이에 따라 진주는 견직산업 육성과 농공단지 건설, 건설업 활성화, 바이오산업의 등장, 신선농산물의 수출 등으로 진주 경제 지표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진주 경제의 성장을 견인하는 필요충분 조건들이 충족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한국견직연구원의 설립은 진주 견직산업의 발전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견직연구원은 견직의 제직·염색·가공·디자인에 관한 연구와 견직업체에 대한 기술지원 및 기술지도, 기술인력 양성과 생산비 절감, 그리고 품질향상을 위한 시제품 개발 지원 등을 통해 진주 견직산업 발전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한국견직연구원은 점차 퇴색해 가던 진주 견직산업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진주실크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에 힘이 되었다.
진주지역의 건설업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시기도 이때이다. 진주를 대표하는 건설사와 관련업체로 영남레미콘(1985년), 한주종합건설(1985년), 흥한건설(1986년), 흥한주택(1990년)을 필두로 ㈜삼우건설(1986년), ㈜한반도건설(1990년) 등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대동공업 이전과 진주 경제
대동공업과 진주 경제는 따로 떼어 이야기 할 수 없다. 대동공업의 대구 이전으로 진주 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 경제는 일어섰다. 오늘날 진주 경제를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진주지역 기업체의 역할이 컸다. 다음의 글은 『스토리 오브JINJU』에 게재된 ‘대동공업과 진주’의 내용을 전제한 것이다.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1925년)이라는 치명타를 입은 진주는 두 차례의 경남도청 진주환원운동 역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데 이어, 정부 주도의 신흥공업도시 조성정책에서도 소외돼 198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낙후지역을 면하지 못했다.
대동공업은 지역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유일한 향토기업이자 대기업으로 오랜 시간동안 진주경제의 핵심으로 자리해왔다. 당시로서는 촉석루와 남강, 그리고 대동공업이 진주를 상징한다고 칭할 정도로 진주와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 온 것이다.
대동공업이 1986년 2월 경북 달성군으로의 이전을 최종 결정했다. 대동공업(주) 대구공장에서 개최된 제40기 정기주주총회에서 1986년 3월 1일부터 본점을 경북 달성군에 둔다는 정관개정이 통과됨에 따른 것이다.
진주상공회의소를 비롯한 진주시민들은 극렬하게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지난 1947년 5월 20일 대동공업사로 출발해 39년간 진주와 더불어 성장·발전해온 대동공업(주)은 1986년 진주를 떠났다.
대동공업은 1947년 5월 20일 대동공업사로 영업을 시작했다. 김삼만 회장 체제의 창립 초기에는 채 20명에 못미치는 근로자가 근무하는 가내수공업 규모로 운영되었다. 당시 대동공업에는 선반 4대를 비롯해, 공작 기계의 일종인 세이퍼 1대와 드릴링 머신 1대, 전기와 산소용접기 각각 1대씩을 갖춘 영세사업장에 불과했다.
대동공업은 주한미군원조사절단(USOM)의 지원 아래 국제협력처(ICA) 차관을 받아 1960년 대단위 공장을 건립했다. 이후 1966년 대동공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바꾼 뒤, 가정용 송풍기 제작을 시작으로 경작용 쟁기, 제초기, 가마니 기계, 제승기, 탈곡기, 발동기 등 각종 농기구와 농기계를 제작했다.
더불어 1962년 대동공업의 대명사인 경운기를 국내 최초로 생산하면서 대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1968년 농용 트랙터, 1977년 이앙기와 바인더, 1982년에는 콤바인을 제작하면서 농기계 국산화를 이끌었다. 이후 대동공업은 국내 굴지의 종합 농기계 메이커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대동공업의 종업원 수는 1983년 기준 7천 여 명에 이르렀다. 대동공업이 진주시 산업경제의 4분의 3을 차지할 정도로 진주경제의 근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주시민들이 삶을 영위하는 삶 터이자, 진주경제의 뿌리였던 셈이다.
대동공업은 1947년 창업 이래, 대한민국 최고의 농기계 제조업체로 성장해 진주산업경제의 핵심으로 자리해왔다. 당시 대동공업과 계열회사, 그리고 전문지정업체, 기타 부품제조 납품업체가 차지하는 공업생산고(工業生産高, 일정한 기간에 생산되어 나오는 재화의 수량이나 액수)가 진주시의 전 공업생산고의 50%를 차지했다.
더불어 대동공업과 계열사와 하청공장의 국세와 지방세 담세액이 진주시의 44%를 차지했음을 감안하면 대동공업이 진주경제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상 진주경제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대동공업 이전은 진주 경제의 근원을 뒤흔드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특히 진주의 시장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대동공업 이전이 임직원과 계열사·하청공장, 종업원의 연간 임금 120억원과 630억원에 이르는 물품대금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대동공업 이전과 관련해서 진주상공회의소와 지역 경제인들이 ‘대동공업(주) 진주유치대책협의회’를 구성하고 결의문을 발표하는 등 반대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대동공업(주) 김상수 회장은 1983년 1월 10일, ‘대동은 이전하지 않습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진주시 기점 10km이내 대동공업의 부지 물색 사실의 인정과, 분공장 건설의 필요성, 본사(주약동 156번지) 사업 주기종인 경운기와 부품생산을 위주로 한 본사공장 유지, 그룹회사 전문화 지정업체와 하청업체의 존속 등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대동공업(주)은 이전하지 않습니다’라는 방침을 재차 천명했다.
하지만 대동공업(주)진주유치대책협의회는 ‘대동공업이 종전의 주장만 되풀이 하고 있다’는 판단하에 1983년 1월 13일까지 서명된 7만여명의 서명록과 건의문, 결의문을 가지고 관계요로에 진정한다.
건의문에는 ‘대동공업이 신기종공장 65,000평 규모를 타지역 공단에 신축하겠다는 발표는, 진주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며, 대동공업의 이전은 진주지역의 산업경제는 물론 진주시민의 생활의 부침과 생존상의 일대 위협이다.’라고 적시했다.
특히 대동공업이 요구한 진주지역 입주요건 제시사항인 부지 6만평 확보문제와 세제혜택, 부족자금 100억원 지원, 부지대금 5년 분할상환 등에 대해 납득할만한 답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동공업은 경북 달성군 이전을 결행했다. 대동공업은 1984년 진주 본점을 대구공장으로 옮긴 후 공장부지는 주택업자에게 매각하면서 진주시 주약동 본 공장을 폐쇄하고 ‘대동공업 진주시대’를 마감했다.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과 대동공업의 대구 이전은 진주경제를 최소한 50년 이상 후퇴시켰다는 전망도 일부에서 제기되었다. 그리고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과 경남도청 진주환원운동의 실패와 더불어 대동공업의 이전은 진주산업경제의 근간을 뒤흔든 진주의 암울한 사건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농공단지 건설과 신산업의 등장
전통산업인 농업이 시대를 지나면서 사양화되고 이촌향도 현상이 생기면서 지역의 경제적 기반은 더욱 위축되었다. 이에 지역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심화되면서 대도시 지역의 인구집중이라는 사회적 문제도 돌출되었다. 이에 정부는 농업만으로 문제 해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농촌공업화를 통해 소득원을 개발하기 위한 농공단지 개발을 추진했다.
농공단지는 농어촌지역을 개발수준에 따라 구분하고 단지개발 규모 및 지원내용을 차등화하는 것은 물론 농공단지 입주업체에 조세·금융등의 지원을 제공했다. 결론적으로 농공단지는 인력확보와 필요 시설 및 제품의 유통망 확보의 어려움으로 정상적인 공장가동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서 폐업사태가 속출했다. 하지만 정부는 운영난에 빠진 농공단지를 기초산업단지로 육성하기 위해 지원규모를 늘리고 면적한도와 부지조성비를 확대하는 등의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농공단지 조성은 농촌공업화에 의한 농촌소득원 개발사업으로 추진된 사업이다.
이같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진주에도 농공단지 조성이 시작된다. 먼저 진성농공단지가 1989년 준공되었다. 진주시 진성면 상촌리 일대에 있는 공업단지로 1988년 5월 17일 지정되었고 1988년 12월 29일 착공해 1989년 7월 25일 준공되었다.
이어 이반성농공단지가 조성되었다. 진주시 이반성면 길성리 일대의 공업단지이다. 1993년 7월 19일 지정되어 1994년 4월 1일 착공되었고, 1995년 10월 10일 준공되었다.
대곡농공단지가 1996년 12월 27일 지정되었다. 대곡농공단지는 대곡면 와룡리 일대의 공업단지로 1997년 3월 착공되어 1998년 12월 31일 준공되었다.
사봉농공단지는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 일대에 있는 공업단지이다. 1996년 12월 27일 지정되었고, 1997년 12월 4일 착공되었다.
진주를 빛낸 기업들
진주 경제의 성장발판을 마련한 이 시기 진주지역의 기업체들은 견직산업, 건설업, 바이오산업, 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했다. 대표적인 기업들은 다음과 같다.
세일공업(1982), 남강제지(1982), 남양염직(1983), 명화염직(1983), 성화산업(1983), 고려식품(1982), 영남레미콘(1985), 한주종합건설(1985), 흥한건설(1986), 설정식품(1988), ㈜한반도건설(1990년), 대신정공(1988), 흥한주택(1990), 순실크(1990), 장생도라지(1995), 케이엠씨(1996), 일광금속(1996), 진양화학(1998), 드림실크(1999) 등이다.
민족자본에 대한 침탈과 약탈로 얼룩진 일제강점기를 지나 근·현대 진주의 도시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서 진주 경제를 이끌어 온 수많은 기업과 기업인의 이야기를 최대한 담고자 했다. 진주라는 지리적 공간 속에서 변화된 진주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진주의 기업이 만들어온 진주경제의 역사를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도 매우 유의미한 일임에 분명하다.시간적 제약 속에서 진주경제를 함축된 표현으로 정리하는 일이 애초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인식했다. 결론적으로 시대를 관통하는 진주 경제의 핵심을 꺼집어 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힘들다. 어쩌면 거대한 진주경제의 흐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보는게 맞을지 모른다.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은 이 글을 통해 묵묵히 진주 경제를 이끌어 온 진주의 경제인과 기업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왔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기업가정신의 수도 진주에 걸맞는 기업과 기업인을 찾아내고 만나는 일도 의미 있었다. 일제강점기 민족자본의 침탈에 맞선 향토기업과 정체와 소외의 오랜 터널을 뚫고 근·현대 진주경제를 이끈 기업인들이 있었다. 이제는 이러한 진주의 기업과 기업인을 기억하고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는 시대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진주 경제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오늘날, 진주 경제의 과거·현재·미래를 담아내는 이러한 작업들의 연속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Memory of 진주경제』에 이어 ‘진주의 기업과 기업인’을 다루는 또다른 기회가 만들어진다면 부족한 부분을 조금이나마 채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진주 경제학(晋州 經濟學)’ 차원의 지속적인 학문적 연구활동의 필요성에 대해 숙의할 필요도 있다. 진주 경제학은 진주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을 연구하는 미시적·거시적 학문 활동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진주 지역의 성장과 발전, 변화 분석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경제적 현상을 이해하고 미래의 경제를 대응하는데 도움을 준다. 진주 경제인 주도로 ‘진주 경제학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진주 경제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진주 경제학 연구센터에 진주 경제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동시에 진주 경제의 흐름을 예측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기능이 보태지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진주경제에 대한 기억(Memory of 진주경제)』이 진주경제의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재설계하는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 경남경제의 중심지라는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시대의식의 발로가 진주경제를 이끈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뜻이다. ‘한 눈에 보는 진주 경제 이야기’가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덧붙이는 이유이다.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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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주는 경남진주혁신도시 정착과 항노화 바이오산업의 약진, 차세대 미래산업인 우주항공산업의 도약, 경남국가항공산단과 미래운송장비산업 등으로 진주 경제의 장밋빛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항공우주부품·소재 강소 개발특구지정(2019년)과 항공우주분야 시험센터 개소(2020년), 뿌리산업단지 및 지식산업센터 조성(2020년), 수송시스템용 세라믹섬유 융복합센터 개소(2021년), 경남국가항공산단 조성(2022년), 사천 항공MRO단지 지정(2023년)에 이어 혁신도시 시즌2(공공기관 추가 이전), 우주항공청 사천 설립 등은 과거 진주 경제의 틀을 벗어나 가히 혁신적인 진주 경제의 틀을 구축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항공 우주도시로의 도약 진주가 우주산업 협력지구 위성특화지구로 지정돼 ‘항공우주도시’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초소형위성 ‘진주셋 원’ 개발 등으로 위성시장을 선점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2022년 진주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부터 우주산업 협력지구 위성특화지구로 지정을 받았다. 이번 지정으로 진주시가 국내 항공우주산업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다.진주시는 위성특화지구 지정과 함께 초소형위성 개발사업, 항공우주 관련 연구기관, 시험인증 기관, 교육기관 등 다양한 우주관련 산업 및 인프라를 잘 활용해 항공우주 분야가 진주의 미래를 바꿀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현재 진주시를 포함한 경남 서부지역은 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KAI), 한국항공서비스주식회사(KAEMS), 국방기술품질원, 경남테크노파크 항공우주센터 등이 입주해 있다. 항공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는 우리나라 항공우주산업의 전진기지로서, 국내 항공 산업의 70% 이상이 밀집돼 있는 지리적 특성을 살려 산·학·연·관이 협력해 항공우주분야 관련 기술창업, 기술 사업화, 연구개발 등을 추진 중이다. 수송시스템용 세라믹섬유 융복합센터 개소 경남의 주력산업인 항공, 자동차, 조선의 핵심소재부품 제조기반과 기업지원시스템 구축‧운영을 위한 세라믹섬유융복합센터가 2022년 2월 진주 혁신도시에 개소했다. 세라믹섬유융복합센터는 세라믹섬유 융복합 기반구축사업의 일환으로 지역의 신산업 육성을 위해 연구기반시설을 구축하고 기술개발을 지원함으로써 새로운 지역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사업이다.경남도와 진주시, 한국세라믹기술원이 2018년 산업부의 지역산업거점기관지원사업에 선정돼 유치한 '수송시스템용 세라믹섬유융복합 기반구축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했으며, 진주시 충무공동 소재의 한국세라믹기술원 옆 부지를 확보해 2019년 5월 착공했다.세라믹섬유융복합센터는 개별기업 차원에서 갖추기 어려운 고가의 첨단제조장비인 2,000℃ 초고온 열처리제조장비, 열가소성 복합재료 연속압출 성형장비, 로봇자동 고온압축성형장비 등이 갖춰져 있어 경남의 수송시스템 소재부품 제조업체들이 이를 활용하여 경쟁력 있는 제품을 생산할 것으로 기대된다.세라믹섬유융복합센터의 개소로 세라믹섬유를 융복합해 고기능 복합재로 만들어 지역의 주력산업인 우주항공을 비롯한 자동차, 조선해양플랜트 등 수송시스템 산업에 적용하는 미래 신성장산업의 핵심 사업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뿌리산단과 경남국가항공산단 진주뿌리산단은 항공·조선·자동차 등 전략산업과 연계한 남중부, 동남권 뿌리산업의 허브 산업단지로 지난 2016년 말에 착공해 2021년 1월에 부지 조성이 완료됐다.뿌리산업인 금형,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 주조, 열처리 업종뿐만 아니라 기타 운송장비 등 유치업종을 다양화해 정촌일반산단, 항공국가산단과 함께 고부가가치 신성장 동력 산업단지로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최근 고금리, 고물가, 고환율 3중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동산 경제 여건 속에서도 정부와 지자체의 우주항공, 교통, 도시 인프라 등 정책사업 호재가 잇따르면서 진주뿌리산단의 부지 분양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경남국가항공산단은 진주·사천 일대에 조성되는 대규모 항공우주산업 특화 산업단지이다. 항공우주산업이 가지는 국가적 중요도에 따라 경상남도에 항공우주산업의 60% 이상이 집적되어 있는 상태에서 항공우주산업을 보다 더 크게 발전시키기 위한 정부의 지원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진주시는 경상국립대학교 우주부품시험센터, 항공전자기기술센터 그리고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이 있다. 또한, 한국세라믹기술원 및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이 있으며 국방 부문으로 관련된 방위사업청 산하 국방기술품질원과 부설 연구소인 국방기술진흥연구소도 소재하고 있어 항공우주산업의 적지이다. 기업가정신 수도 진주와 기업인 기업가 정신의 힘은 국부 창출의 원동력이 된다. 지역 경제, 나아가 국가 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한 지역에서의 기업가정신의 확립은 중요한 일이다.일반적으로 기업은 경제 내 혁신을 촉진하고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유도해 지역의 경제성장은 물론 일자리 증가를 가져온다. 기업은 시대를 초월해 지역의 경제를 견인하는 역군으로 대접받아야 마땅하다. 다만, 한 지역의 기업가 정신이 특정 기업을 의미하는데 그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지역의 경제를 견인한 크고 작은 기업들이 이루어낸 지역경제에 대한 헌신을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지금까지 서술한 진주 경제 이야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진주의 기업과 기업인들은 때로는 격랑의 시대에서 때로는 소외와 정체의 시대를 견뎌내면서 진주 경제의 한 부분으로 제 자리를 지켜왔다. 일제강점기 일본기업들과 맞선 향토기업에서부터 현대의 최첨단 우주항공산업 관련 기업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기업도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진주의 기업가정신은 일제강점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헌신한 진주 기업과 기업인들을 기억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음은 진주 경제 역사의 산증인이자, 주요 산업별 대표 기업체 현황이다. ▲상업·유통진주상무사, 진주중앙시장, 농산물도매시장, 경남일보(고영진), 원창약방(원준옥), 진주극장, 천황식당, 구인회포목상점(구인회), 수복빵집 ▲식품·바이오산업진주전분공장(최재호), 진주양조(김백용), 진주곡자공업(이원휘), 기화제약(하용운), 진양농산(제양성), 고려식품(구자연), 설정식품(임승언), 장생도라지(이성호), 아미코젠(신용철), 휴림황칠(조창수), 선마린바이오텍(박시향) ▲ 견직산업동양염직소(추겸호), 진주제사, 조일견직(성재조), 해동제사·해동직물(최병주), 동명직물(신문기), 남강직물(류재기), 신화직물(권성근), 유창직물(백진웅), 수산직물(추태식), 남양염직(윤영표), 명화염직(최연동), 순실크(박태현), 그림실크(노권) ▲ 기계산업대동공업(김삼만), 대동기어(김수웅), 한국마그넷(강원근), 세일공업(최영태), 우성정공(성현석), 성화산업(노준형), 대신정공(구재홍), ITR인거스트리즈(이용재), 성광(김영욱), 코리아크롤러트랙(조행래), 대황정밀(김영수) ▲건설업대동건설(남기옥), 대경건설(이윤우), 한주종합건설(이상문), 흥한주택종합건설(강창근), 영남레미콘(최규진), 흥한건설(김회조), 양지산업(금대호) ▲화학·제지산업환일고무공장(문해술), 영진플라스틱(권석진), 해동화학(최종현), 대림화학(김명신), 신흥(김기석), 신흥화학(오세재), 진양화학(허성두), 진주특종제지(정영식), 신무림제지·무림페이퍼(이도균), 남강제지(하계백) ▲여객·운수업진주합동운수(정상진), 진주하주운송, 경전여객(강해리), 경진화물(서영환), 신흥택시(문상율), 부산교통(조옥환), 삼성공업(김성규), 삼성교통(김동기), 경원여객(강세민), 대동정비(양윤식), 한일교통(조재화) ▲ 항공산업 하이즈항공(하상헌), 에이엔에이치스터럭쳐(안현수) ▲ 미래운송장비산업우성정공(성재용), 케이엠씨(차재도), 일광금속(김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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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진주도청환원운동이 시작되면서 서남지구개발추진위원회가 1963년 발족되었다. 당시 진주상공회의소는 서남지구개발추진위원회의 활동에 이어 1964년의 제1차 도청환원운동과, 1977년의 제2차 도청환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8년에는 진주-하동-광양-순천을 잇는 경전선이 개통되었다.당시 진주는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서남지구개발추진위원회를 필두로 한 경남도청환원운동(1964년과 1977년)에 이어 진주청년회의소(1966년)가 설립되었다. 진주청년회의소는 ‘청년이 조국의 미래’라는 기치 아래, 지역사회 청년 경제인들의 친선도모와 협력을 통한 지역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상평공단의 태생을 예고한 상평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68년)이 추진됨과 동시에 같은 해에는 경전선이 개통되었다. 상습 침수로 해마다 수해를 겪었던 진주는 남강댐 준공(1969년 10월 7일)을 통해 택지개발, 공장용지 확보 등 진주 경제의 든든한 후원군을 맞이하게 된다.남강댐은 진주시 판문동과 내동면 삼계리 사이의 남강에 구축된 다목적 댐이다. 서부 경남의 생·공·용수 및 관계용수의 안정적 공급과 남강 하류 및 사천만 연안의 홍수 피해 방지, 수력발전 등 수자원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진주 경제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남강댐의 준공과 함께 남해고속도로 개통(1973년), 사천공항 항공기 취항(1969년), 진주시외버스터미널 건립(1974년)은 곧바로 진주 경제에 다양한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장대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70년)을 필두로 서부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71년), 칠암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1974년), 남강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79년), 봉원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1980년) 등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현대 신도시 진주의 면모를 갖추는 원동력이 되었다. 남강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79년) 진주 경제 발전의 신호탄, 상평공단 사실 진주 경제는 진주상평산업단지조성 전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주상평산업단지는 지역산업구조 개편을 통해 진주 경제 발전을 이끈 신호탄이자, 선두두자인 셈이다. 남강댐 건설 이후, 홍수기 백사장이었던 상평지구의 택지개발과 공장 용지 개발이 추진됐다. 1970년대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에 따라 제1차 산업이 주종이었던 진주에도 제2차 산업인 공업화 정책이 시작됐다. 공업정책에 발맞춰 지방 공업 육성 방안으로 공단 조성 계획이 수립됨으로써 전형적인 소비도시에서 생산도시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이에 진주상평산업단지 조성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당시 진주에는 주택지 곳곳에 가내 공업 형태의 섬유공장과 국내 유일의 농기계 생산공장인 대동공업의 부품공장이 산재해 있었다. 이른바 기계부품과 섬유업체의 집단화를 통한 지역산업의 구조조정 촉진의 대안으로 자리잡은 것이 공단(工團)이었던 것이다.진주시는 1978년 3월 15일 건설부 고시로 지방공업 장려지구로 지정하고 공단조성 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했다. 이후 진주시는 상평지역에 남강 하류 지역의 상습 침수 지역인 상대지구와 상평지구 등 3개 동의 일부를 공업용지로 활용키로 승인했다. 때마침 정부 역시 1970년대 지방의 균형개발 정책을 통해 서울과 지방간의 경제 격차를 완화하고 각 지방의 특색에 알맞은 지방 공업 발전 및 고용증대를 목표로 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평공단의 조성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상평공단 조성 과정에서 진주시는 지방재정이 빈약하다는 점을 감안해, 공사비 대부분을 수익자 부담 원칙에 의한 입주자의 분양 가수입을 통해 재원을 조달했다. 상평공단의 유치업종은 입지 구역, 구조 위치, 부존자원 등 다각적인 검토를 통해 섬유, 기계금속, 제지, 식음료, 기타 등 6개 계열을 지정했다. 노동 및 기술집약적이고 공해가 적은 공장이 입주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완공 후 260여개의 기업이 입주해 2만 8,000여명의 고용 효과를 기대했다.진주상평산업단지는 1978년 3월 15일 건설부 고시 제25호에 의거 지방공업개발장려지구로 지정되었고, 상공부 고시에 의해 1986년 7월 19일 공업단지로 지정되었다. 1977년 10월 15일부터 1992년 12월 31일까지 조성해 기업체에 분양했다. 상평공단(2007년) 진주 경제 발전의 걸림돌, 그린벨트 완화 건의 진주상공회의소는 1997년 9월 22일 건설교통부에 ‘진주권 및 지방 중소도시 그린벨트 해제 건의’를 했다. 당시 건설교통부가 그린벨트내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조건부 규제완화 방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규제 완화에도 불구하고 진주시를 비롯한 지방 중소도시의 그린벨트가 규제완화 대상에서 제외됨으로써 이의 해결방안을 요구한 것이다.진주권의 경우 춘천권, 통영권, 제주권 등과 함께 관광자원과 자연보존이라는 특수목적으로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있었다. 특히 진주권의 경우 지정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하게 설정되어 있었다.더불어 통합 진주시는 서부경남의 중추도시로서 그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정부의 개발정책에서 소외되고 과도하게 설정된 그린벨트로 인해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또한 경남도내의 개발도시에 비해 경제 규모 및 재정 자립도가 낮은 상황에서 진주시의 장기 개발계획 수립시에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린벨트의 해제없이는 바람직한 도시개발과 지역발전을 이룰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진주상공회의소의 이같은 건의는 그린벨트가 진주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시대적인 인식 아래 취해진 조치였다. 하지만 그린밸트 해제와 규제완화는 여전히 진주 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오랜 기간 동안 작용했다. 이후 진주상공회의소는 1998년 3월 10일 진주지역에 신산업 단지 조성을 진주시에 건의하게 된다. 진주 상평산업단지가 가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진주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던 것이다.당시 진주상공회의소는 상평공단이 가진 문제점을 인식했다. 상평공단은 규모가 협소해 질 높은 생산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공단조성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신규공장 설립이나 공장확장 등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가폭등으로 인한 경쟁력 상실은 물론 도심에 위치함에 따른 효율적인 도시계획 저해와 각종 주민 민원 야기 등의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었다.이와 함께 입주기업들의 용지난 심화, 정부의 광역개발계획에 따른 적극적 지역개발, 통합 진주시의 생산 기반시설 확충 필요성, IMF체체 극복 이후의 입주기업 시설 확장 애로 등에 대한 지적과 함께 신산업 단지 조성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했다. 이같은 진주상공회의소의 진주 경제 활성화를 위한 노력은 1988년 대곡농공단지 조성을 시작으로 추진된 농공단지 조성 등으로 진주 경제의 성장 발판을 구축하는데 유의미한 역할을 했다. 진주 경제의 디딤돌, 기업 진주 경제 발전의 버팀목이 된 진주상평산업단지의 조성으로 진주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에 진주에는 진주 경제를 이끌어 갈 기업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견직산업과 농기계산업에 이어 화학산업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 진주에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이 시기(1961~1980) 진주직물공업협동조합(1962년)이 설립된다. 당시 섬유업계의 어려운 재정적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동양염직 대표였던 추연택을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해 설립했다. 당시 100여개 업체 중 비교적 큰 규모의 50여 개 업체가 참여했다. 진주직물공업협동조합은 1996년 조합명칭을 경남직물공업협동조합으로 변경했다.이어 진주지역 대표적인 운수업계인 부산교통(1963년)에 이어 삼성교통(1965), 경원여객(1966년), 한일교통(1967년)이 차례로 등장했다. 견직산업 분야에서는 남강직물(1965년), 신화직물(1972년) 제지업계로는 진주특종제지(1965년), 신무림제지(1973년) 기계로는 대동정비(1968년)와 영진플라스틱(1969년)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이후 신흥(1973년), 대동기어(1973년), 한국마그넷(1973년), 진주상호신용금고(1973년), 대동건설(1973년), 유창직물(1975년), 신흥화학(1976년), 진양농산(1977년), 수산직물(1978년), 대경건설(1979년), 우성정공(1980년)이 진주 경제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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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견직은 1946년 현 인사동 이마트 자리에 창업을 했다. 조일견직의 창립은 1970~1980년대 진주가 전국 최대 규모의 실크 제조공장을 갖는 바탕이 되었다. 더불어 대동공업사는 1947년 5월 20일 대동공업사로 영업 등기를 한 이후, 1962년 국내 최초로 경운기를 생산하는 진주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하지만 1950년의 한국전쟁은 진주 시가지는 물론 진주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인민군이 진주에 들어온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진주시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이 진행됐다. B-29편대가 남쪽으로부터 날아와 네이팜탄과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하였고, 기총사격을 가하였다. 진주는 인민군 주둔지역이 아니라 함안의 전투지역으로 가는 통과지역이었지만, 전략요충지로서 많은 물자들을 인민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 이 폭격으로 시 외곽을 제외한 시가지 전역이 불탔다.진주시청을 비롯하여 진주고, 진주여고 등 지역의 큰 건물은 모두 미군 폭격기의 폭격을 맞아 무너졌다. 당시 영남의 제일가는 누각으로서 국보 제278호였던 촉석루가 소실되었고, 남강교도 폭파되었다. 남강교는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군 측에서 폭파했던 것이고, 촉석루는 북한군 지휘소가 설치되어 있어 9월 1일에 미군기가 소이탄을 투하하여 소각했던 것이다. 폭격된 남강교는 대동공업의 직원을 동원하여 가교를 설치하여 임시통행조치를 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주경찰서도 폭파되어서 진주경찰서 부대는 전 김준기병원을 임시청사로 사용했다. 진주시는 1950년 9월경 수복되었으나 몇 년 동안 전쟁의 잿더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한국전쟁의 상흔을 씻기 위한 진주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1952년 대안지구토지구획사업으로 대표되는 진주시가지 복구사업에 이어 진삼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진주는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1955년에는 경상남도 축산진흥연구소가 설립한데 이어 1957년에는 진주농업기술센터가 개소되면서 진주 경제는 탄탄한 경제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대동공업 창립(1947년) 대동공업 유치 서명운동 전후복구사업과 진주의 토지구획사업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진주시가지 복구사업은 1952년 시작되었다. 시가지복구사업은 진주시 토지구획정리사업과 맞물려 진주시 중심가 3만여평을 대상으로 했다. 지금의 중앙로타리와 평안·봉곡·인사로타리 사각의 안쪽에 해당되는 지역과 그 외곽의 일부 지역이 포함되었다. 당시 진행된 진주시가지 복구사업은 오늘날 진주의 도시구조의 핵심을 이루었다.당시 철거 대상이 된 건물만 해도 800여동에 달했으며, 폭격을 맞은 건물은 무려 2천동이 넘었다. 처음에는 도면상 도로 폭 35m를 기준으로 계획을 세웠지만, 경상남도의 심의과정에서 5m, 건설부 심의과정에서 5m가 줄어 최종 25m로 건설되었다. ‘대안토지구획정리사업’이 1952년 8월 20일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신도시의 구상과 설계로 수립된 도시계획 아래, 착공 6년 4개월만인 1958년 12월 31일 도로축조공사 및 환지배정(실지조성)을 실시 완료한 동시에 일부 하수도 및 포장공사를 완료하였다. 이 사업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가지를 복원함으로써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시민주택을 세우거나 보수함으로써 도시형 주택이 이루어지게 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대안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은 수정남북동, 평안동, 대안동, 동성동, 계동, 상봉서동 일부, 봉곡동 일부, 인사동 일부, 남성동 일부, 본성동 일부, 중안동 일부, 장대동 일부, 봉래동 일부 등 총 14개 동에 걸쳐 주거지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또한 대안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추진 과정에서 현재의 중앙시장이 대안동 부지에 이설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당시의 시장부지는 택지로 개발되었다. 대안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은 진주의 토지를 합리적으로 구획하고 지형 형태를 정리하여 각종 공공시설을 설치함으로써 대지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대안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이어 1970년에 들어서는 장대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을 필두로 상평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68년), 서부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71년), 칠암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74년), 남강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79년), 봉원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80년), 평거지구 택지개발사업(1996년)으로 진주는 새로운 도시활력을 찾게 된다.토지구획사업은 일제강점기 때 농경지 정리사업의 수단으로 시작되었다. 1911년 대사지 매립을 시작으로 1912년 제1차 영정(대안동) 매립이 완료되었다. 이것이 시가지 정리사업의 출발이었다. 진주시는 남강 하상의 일부를 매축하고 제방을 쌓은 뒤 현재의 시가지를 조성하고 통행을 위한 도로를 개설했다. 그 결과 장대지구는 서서히 주택지를 형성하면서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상평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진주시가지를 복원하기 위한 토지구획정리사업 중 가장 넓은 지역이자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된 사업이다. 상평 1차는 1968년 시행되었는데 대안지구보다 4배가 넘는 규모였다. 상평 2차는 1974년 시행되었다. 상평지구는 진주시 상평동 일대의 주택지와 농경지를 시가지로 정리하면서 가장 넓은 도로 면적을 확보했으며, 진주 경제 발전의 신호탄이 된 상평공단의 형성에 기여했다. 장대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은 장대동과 동성동 일대의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사업기간은 1970년 9월 29일부터 1972년 12월 31일까지 시행되었다. 사업기간 중에 진주시 장대동과 동성동을 중심으로 주거지가 재정비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가지에 대한 복구계획이 수립되었다. 진주시는 택지조성사업의 하나로 13개 지구를 선택해 도시구획 정비사업을 시행했는데 서부지구는 4번째에 해당된다. 서부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은 공사 기간은 1971년 4월 20일부터 1972년 12월 14일까지이다. 사업 기간 중 진주시 봉곡동과 상봉서동 일부의 기존 주택지와 농경지를 시가지로 정리하면서 도로를 개설했다.칠암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74년 6월 11일 시작해 1975년 12월 24일에 완료되었다. 이 지구는 진주시의 도시구획 정비사업 가운데 가장 작은 규모이다. 사업을 통해 진주시 칠암동 일부의 기존 주택지와 농경지를 시가지로 정리했다. 칠암지구는 칠암동 한 구역만 계획지구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도시형태의 통일성을 가지는데 일조했다는 평가이다.봉원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80년 12월 24일 부터 1984년 7월 5일까지 시행됐다. 사업기간 중 진주시 유곡동과 상봉서동 일부 택지와 농경지 일부를 시가지로 정리하였다. 평거지구 택지개발사업은 1987년부터 1991년까지를 계획기간으로 했던 진주시 도시개발계획 2단계에 평거동이 포함되면서 평거지구 택지개발사업이 추진되었다. 진주시에서 추진된 도시구획 정리사업으로 인해 진주시의 건축허가가 완화되면서 주택건설업이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인구유입이 늘어나면서 진주시는 현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진주뉴똥과 진주의 기업들 진주견직산업은 ‘진주뉴똥’이라는 브랜드 개발해 전국적인 명성을 날렸다. 해방 이후 성재조가 조일견직을 창업하여 견직공업이 급격한 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진주에서 생산된 견직물을 ‘진주뉴똥’으로 브랜딩화해서 진주실크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실크의 명산지로 자리잡는데 일조를 한 것이다.더불어 1946년에는 최병두가 해동제사주식회사를 설립해 진양, 하동, 함양, 산청 등의 누에고치를 이용한 명주실을 전국적으로 판매했다. 1948년에는 해동직물과 동명직물 등 진주를 대표하는 견직산업의 선두주자들이 나타났으며, 1947년에는 진주 경제의 든든한 대들보가 된 대동공업사가 설립되었다.진주 경제는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운수업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창립되었다. 1951년에 경전여객이 설립되었고, 1952년에는 경진화물이 1957년에는 신흥택시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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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지러우면 악덕 무당이 판친다. 제법 괜찮다는 길목엔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색천을 매단 대나무를 대문간에 세워두고 안방엔 신당을 차린다. 소위 신군(神君)을 자처하는 그들은 세상 살이 다급한 민초를 대상으로 혹세무민한다. 그리고 마치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판관처럼 행세한다. 보편적 인식이 그렇다는 말이다. 비단 무당에만 그치지 않는다. 조폭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패밀리’의 머릿수가 곧 ‘힘’인 이들은 ‘대부’의 그늘에서 복
‘잣대’라는 말이 있다. 길이를 재는 자로 사용되는 대막대기 혹은 나무 막대기의 일종으로 통칭 ‘자막대기’라고도 부른다. 이 말은 자고로 도덕적인 행위나 사물의 기준을 재단하는 객관적인 근거로 인용되곤 했다. 흔히 ‘객관적이지 못한 일’이나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이 잣대를 기준으로 잘잘못을 가리곤 한다.그런데 이 잣대란 말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잣대가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객관적이지 못하며 형평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 ‘잣대’는 일부 소수 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