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평론
2024.03.05 PM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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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이 땅은 힘이 있는 쪽의 ‘유리’, 힘이 없는 쪽의 ‘불리’라는 오래되고 케케묵은 ‘공식’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소위 정치인들은 언제나 ‘흰옷 입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입이 아프도록 떠들어 댄다. 과연 그런가.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흰옷 입은 백성이 정녕 나라의 주인이었는가. 그리고 지금은?
거의 난장판을 방불케 하는 세태 속에 비비고 섞고 살면서 유독 정치(政治)만이 정연하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철 따라 때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며 기득권을 좇는 집단이 있는 한, 우리는 그 오래된 환상 속에서 헤맬 뿐이다.
밉건 곱건 간에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은 모두가 우리의 현주소를 가리키는 자료임이 분명하다. 우선 그토록 우리가 저질이라고 매도해 마지않는 저 선량(選良)들. 그들을 뽑아낸 건 정작 누구였던가.
시시각각 ‘저질’의 화살을 불같이 쏘아댔지만, 내일의 선거에서 과연 그들에게 낙선의 쓴 잔을 안겨주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는 장담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짐작건대 아직도 우리나라는 지역주의와 패거리의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에는 아직 멀다.
개혁. 무릇 개혁을 외쳐온 지가 언제부터인가. 그러나 그 개혁은 민망하게도 우리의 열망과 비례하지 않았다. 억측일 수 있겠지만, 오히려 기득권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빌미만 제공했을 뿐이다. 그래서 사회 곳곳에서 외쳐대는 개혁이 여전히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불현듯 나는 묻고 싶어진다. ‘과연 그들에게 국민은 있는가’ 노암 촘스키 교수는 그의 저서인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에서 시장의 논리를 신격화하는 신자유주의 무리,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계시 장화’를 선도하는 무리와 그 이론제공자의 눈엔 국민이 없다는일갈을 내뱉었다.
어떤 대목에서는 시장만능주의를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라고까지 매도하고 있다.
물론 그의 지론이 옳고 그른지는심사숙고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 오늘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화와 시장화의 기류를 살펴보건데, 어느 곳에서도 국민이 주도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일들을 살펴봐도 그렇다. 이쯤에서 다시 묻고 싶어진다. 그들에게 진정 국민은 있는가?
정치와 경제의 큰 줄기에 국민이 들어서지 못하면 물난리가 상습화되듯이 정치·경제도 상습화될 수밖에 없다.
물난리와 정치·경제 따위의 난리는 메커니즘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응의 본질에는 큰 다름이 없다. 때문에 거듭 거듭 ‘그들’에게 국민은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제 오로지 인간을 믿고 싶다.
묵은 천 년이 저물었고, 새 천 년이 밝아온 지도 오래됐건만 아직도 이 땅의 기운은 음습하다. 그리고 ‘오로지 인간’을 부르기보다는 ‘오로지 돈’을 떠받드는 목청들로 이 땅의 질서와 이 땅의 삶은 어지럽고 어둡다. 심지어 이웃이 이웃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세상 밖으로 내던져버리는 카오스가 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국가의 양화는 오히려 못 가진 자들의 보호 장치를 허물어 가고, 우리는 새로운 귀속의 대상을 찾아야 하는 정체성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한때 그토록 사회 전반의 지지를 받으면서 바람몰이를 했던 젊은 피.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장밋빛 그림은 오직 가진 자들의 몫일 뿐이라는 회의가 밑바탕에 더욱 진하게 깔리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의 삶이라면 오버센스한 것일까?
이대로 간다면 극단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군들 극치의 어둠을 거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이쯤에서 우리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믿음을 떠올리고 희망의 부활을 다짐해 보고 싶다. 짧게 본다면 어둠의 현실은 더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긴 숨결로 본다면 끝내 어둠의 현실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인간다운 인간의 저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구태여 이름한다면 희망과 절망의 변증법쯤 될 것이다.
깨어난 인간이라야 어둠의 역사를 빛으로 구원한다. 함석헌 옹의 말투를 빌리자면 그렇다.
이 땅의 서민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정치의 하늘을 여는 일이다. 정치의 하늘이란 무엇인가. 국민을 편안케 하는 일이며, 오염된 세력들의‘헤쳐 모여’가 아니라, 이 땅의 대의(大義)를 여는 일이다. 그리고 이 땅의 정치인들이 그토록 앵무새처럼 되뇌어온 ‘민심 천심’의 그 하늘이다.
물론 정치라 해서 여의도에 모여서 일보는 이들만을 지칭하는 건 아니다. 지방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사회·문화등 사회 전반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왜 이 땅의 정치가 리더를 자처하는 그들의 독단과 밀실거래만으로 좌지우지되어야 하는가.
왜 하늘에 묻지 않고, 그들 스스로 하늘인 양 위장하고 있는가.
이제 제대로 된 보석을 잘 살펴 가리고 골라야 할 때이다. 오늘에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을 원망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그렇게 한다면 힘이 있는 쪽의 ‘유리’, 힘이 없는 쪽의 ‘불리’라는 오래되고 케케묵은 ‘공식’은 이 땅에서 지울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에게 국민은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이유도 없다.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 땅의 질서를 되찾는 유일한 길은 단 하나다. 그것은 난장판을 다듬어 내고 정연한 저자 마당을 펴내고자 하는 국민들의 각성과 행동이다.
아니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관(官)을 쳐다 보지 마라 국립민속박물관이 한국민속을 집대성한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밸런타인데이를 등재했다. 사전에는 ‘1990년대 이후 청소년들 사이에 매달 14일을 기념일로 정해 선물을 주고 받는 포틴데이(Fourteen Day)가 유행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2월 14일의 밸런타인데이가 가장 중요한 기념일로 꼽히며 3월 14일의 화이트데이, 4월 14일의 블랙데이도 중요하게 여겨진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밸런타인데이가 이제 한국에서 어엿한 세시풍속으로 자리잡았다는 의미이다. 근데 여기에 대해 다양한 의견도 존재한다. 이른바 ‘OO데이’가 상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체불명의 기념일을 만들어 특정인을 대상으로 벌이는 마케팅이 도덕적으로 건전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일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빼빼로 데이, 삼겹살 데이, 자장면 데이를 비롯해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기념일이 있다. 사실상 매월 이러한 기념일을 챙기는데 드는 적지 않은 품이 든다는데 정작 문제다. 각종 기념일에 맞춰서 기념품을 사서 집에 가지 않으면 왠지 할 일을 다하지 못한 기분이 드는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정체불명의 기념일보다 지역의 역사·문화·예술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기념일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 ‘진주논개가락지날’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국적불명의 기념일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시대에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의기 논개의 의로운 정신을 되새기는 날을 제정한 것이다. 매년 8월 8일을 진주논개가락지날로 정했다. 진주논개가락지날은 8월 8일로 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의기 논개가 순국한 1593년 6월 그믐을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8월 중순이 되어 ‘8월 8일’의 8월이 되었다. 그리고 8일은 진주논개가락지(반지 2개를 가락지라고 한다)의 모양을 본떠 정했다. 그렇게 8월 8일은 진주논개가락지날이 되었다. 진주논개락지날 운영위원회를 결성했다. 지역의 젊은 청장년 30명이 뜻을 같이 했다. 비록 크지 않은 돈이지만 행사비 마련을 위해 회비를 냈다. 관(官)의 도움없이 민(民)의 힘으로 기념일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러한 소중한 마음이 모여 마침내 2005년 8월 8일 「진주논개가락지날 선포 및 기념음악회」를 개최하면서 첫 발을 내디뎠다. 관(官)의 도움 없이 온전히 민(民)의 힘으로 진주를 대표하는 기념일을 제정한 것이다. 진주논개가락지날에 대한 진주시민들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자연스레 진주시 역시 예산지원 등의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진주논개가락지날 운영위원회는 온전히 민(民)의 힘으로 운영하고자 했다. 관의 도움을 받으면 재정적인 도움은 되겠지만, ‘순수 민간에 의해 운영되는 진주논개가락지날’이라는 평가가 더 필요했다. 지금도 후배들이 진주논개가락지날을 운영하고 있다.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최근에는 진주교방문화의 활성화를 통한 진주의 관광콘텐츠 개발에 관심을 두고 있다. 교방의 가무악(歌舞樂)과 시서화(詩書畵)를 비롯해 교방음식과 교방복식 등을 활용한 진주만의 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아젠다를 던진 지난 2019년에 비하면 지금의 진주 교방문화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개선된 편이다. 진주논개제의 주제가 교방문화로 정착되고 있다는 점만 봐도 매우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교방음식에 관심이 많다. 진주 논개제 기간에 ‘막전 한마당’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른바 ‘교방 막걸리 + 전(煎)’을 활용한 행사이다. 남해군의 독일마을 맥주축제와 전국적으로 개최되는 ‘치맥축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진주 고유의 문화인 교방문화에 정체성을 둔다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진주에는 막걸리의 주원료인 누룩을 제조하는 누룩공장이 있다. 그 역사만 해도 80년에 가깝다. 진주는 전국을 대표하는 막걸리의 고장이다. 그리고 교방음식 중의 하나인 전(煎)과 적(炙)을 활용하는 ‘대한민국 막전 한마당’을 개최한다면 진주를 홍보하는 좋은 콘텐츠가 될 것이다. 문제는 관(官)이 아닌 민(民)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民)의 힘으로 시작했던 ‘진주논개가락지날’의 성공을 감안한다면 ‘대한민국 막전 한마당’ 역시 민(民)의 힘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파성 설창수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기획이 있다면 관(官)을 쳐다보지 마라. 민 스스로 돈을 모아서, 민 스스로 해결해 나가라. 민중이 움직일 때 생명이 있다.’ 옳으신 말씀이다.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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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떨거지’라고 부른다면, 일단 얕잡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무리에 기생하며 사는 이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더러는 양심과 영혼까지 팔아먹는 짓을 서슴치 않으니, 실로 이보다 더한 인간군상이 어디 있겠는가? 시쳇말로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맹목적인 진리가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인 양, 설레발은 치지 말자. 이 모진 세상에 안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갑질만 일삼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떨거지들의 특성은 동네 양아치들의 ‘오로지 충성’ 같은 맹목적 복종 혹은 ‘알아서 기는’ 노예근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앞 뒤 구분 못하고 주인에게 오로지 복종하는 것이 주인을 죽이는 일인지도 모르는 무지(無知)함과 손이 발이 되도록 비벼대며 아양을 떨지 않으면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육본편(六本篇)을 보면 ‘은(殷)나라 탕(湯)왕과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곧은 충신이 있었기 때문에 번창했고, 하(夏)나라의 걸(桀)왕은 맹목적으로 복종한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멸망했다.’는 글귀가 있다. 충견(忠犬)은 절대로 주인을 물지 않는다. 꼬리치며 알랑거리는 똥개(糞犬)가 주인을 물기 마련이다. 떨거지를 가려내는 지혜가 있어야 나라도 기업도 번창할 수 있다. 떨거지들은 가라.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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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줍기 사람은 본디 가벼운가, 무거운가. 골치 아픈 물음이다. 사실 깃털과 풍선의 경중을 가리는 일이라면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늘 높이 던져 보면 쉽게 해결 될 일이 아닌가. 근데 사람의 일은 좀 다르다.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구해낼 답이 아니기에 그렇다. 지금에야 자문해 본다. 가벼운가, 아니면 무거운가. 깃털 같은 가벼움을 직감한다. 아니, 개울가 댑싸리 사이를 오가는 송사리 같음이 맞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며 먹을 것만 찾았다. 잠시도 가만있질 않았다. 해가 저물도록 움직였다.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말이다. 새삼 곱씹을 필요도 없다. 새해 아침마다 꿈꾸었던 행복의 모양새가 어땠는지 말이다. 권태 탓이다. 어쩌면 쉽게 잊어 먹은 까닭이다. 돌이켜 보건대, 마음에 새긴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가벼움으로 온 몸을 부르르 떨지 않았는가. 진정 무던히도 참고 인내하는 법을 그동안 배우긴 한 건가. 지금에 와서 나 자신의 변덕과 분열을 설명할 길이 없다. 분한 것은, 그 변덕스러운 감정 사이를 어떤 서투른 글로도 서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한 것은 마음의 흩어짐을 끝내 다잡을 수 없었던 초라함이다. 끝내 지키지 못하고 무심히 세상에 내어주지 않았던가. 사실은 꿈 단지가 턱없이 컸음이다. 그랬기에 한꺼번에 담으려 했고, 많은 것을 담으려 했음이다. 담으려 욕심낼 수록 오히려 채워지지 않는 것이 꿈 단지인 것을 정녕 몰랐던 탓이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의 꿈 단지에 공백이나 다름없는 지난 세월의 부끄러움이 가득 차 있음을 본다. 진정 가벼웠음이다. 이제야 땅을 갈고, 이랑을 만들어야 할 마음의 밭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음을 깨닫는다. 새해에는 그 밭을 일굴 내 몫의 쟁기 하나쯤은 챙겨두리라. 듬직한 황소 한 마리와 뿌릴 씨앗도 넉넉히 준비할 참이다. 꿈 단지를 이대로 비워둘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애오라지 희망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고,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 맬 여력이 없는 어려운 세상이기에 더더욱 흘러 넘치도록 채우리라. 그토록 가벼웠기에 이토록 텅텅 비어 있지 않는가. 그랬기에 이처럼 절망의 시대를 부여안고 살고 있지 않는가. 뒤돌아볼 수 없는 곳에 무언가를 두고 왔다해서, 넋 놓고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 아무리 애를 써도 가질 수 없는 것 한 가지씩 갖고 사는 게 사람의 일이 아니던가. 단지 때로는 희망으로, 때로는 절망으로 다가올 뿐이다. 희망을 기다리며 다시 자문한다. 가벼운가, 무거운가.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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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일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대문간에 놓인 아침신문 집어 들고 집에 들어가는 처절한 객기를 부린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듯 싶다. 살아가면서 그 어떤 진실이나 가치쯤은 한번쯤 눈감고 외면하면 쉽게 될 법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때맞춰 끼니 해결하고, 별 탈없이 지내는 일이 전부라면 어려울 게 뭐가 있는가. 주야장창 땟거리 걱정할 시절도 아닌 터에 말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그 지겨웠던 전통적인 가난의 때가 벗겨지고 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지 않은가. 막걸리가 아닌 샴페인도 일찌감치 터뜨리고 말이다.그럼에도 이 땅의 많은 부모들은 가난을 운명처럼 부여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건 살아가는데 느끼는 조금의 불편이 아니다. 생사의 한계를 넘나드는 절실함이다.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어미와 아비가 혈육을 세상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야 마는 그 처절하고 냉엄한 현실을 말이다. 물론 그 몰 인간 함은 어떤 이유에도 극렬하게 비난받아 마땅하다.많은 것을 잃었고, 때로는 빼앗겨 왔기에 남은 것은 가난뿐이었다. 그것이 이 땅의 부모들이었다. 그럼에도 가난을 즐길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화롯불을 사이에 두고 부모님이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는 항상 ‘잘 먹고 잘 살았다’ 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가난을 벗고자 하는 소박한 염원이었으리라 믿고 있다.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단지 기준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근데도 세상은 너무나 각박한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다. 아니 어찌보면 몰염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오직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일에만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일면 무시무시할 정도다.조금 불편할 정도의 가난을 느끼는 부류로 갈수록 집착은 더욱 강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했던 가난을 터무니 없이 두려워 한다. 그래서 변절과 배신과 범죄와 같은 비리들을 서슴치 않는다. 그들은 절대 알아차리지 못한다. 불편한 정도일 뿐인 그 가난이 두려워 저지른 비리들이, 실은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는 걸 말이다.살아가면 갈수록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때론 무시하고 포기해도 좋은 것이 무언가를 진지하게 성찰해온 옛사람들의 모습은 찾아 보기 힘들다. 이제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들먹거리지 않을 수 없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고,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이웃을 돌보던 자랑스런 우리의 옛 전통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진정 어려운 이웃을 돌아 볼 여유를 갖고 있는가. 혹시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악다구니 판을 벌이고 있지는 않은가. ‘불합리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지 못한다’는게 요즘 세태라면 과한 지적일까“잘 먹고 잘 산다는게 무엇인가. 진정 배불리 먹고 편히 사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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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달리고 싶다. 물론 바보같은 이야기다. 어떤 선배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다리 육백 치는 소리쯤 된다. 숫송아지 새끼 밸 때나 되면 모를까. 어쨋든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럼에도 속된 세상사에 끄달리다 보면, 문득 하늘 위를 내달리고 싶은 생각이 와락 달려든다. 딱히 하늘인 이유는 없다. 땅 위라면 편하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웬지 생기지 않는다. 마음 끌리는 데야 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비웃으며 바보라 단정지어도 상관없다. 때론 조롱 당한들 어떠랴. 지금 이 세상엔 더한 바보들이 우글대고 있다. 단지 그런 부류에 속하지만 않으면 된다. 익히 알다시피 바보는 거짓과 위선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엔 어리석고 한심해도 그저 있는 그대로를 진실되게 보여준다. 절대 감추고 속이려 들지 않는다. 때론 진짜 바보인 듯 오해 할만큼 정직하다. 이 세상의 바보들이 늘 춥고 가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데 이 땅엔 진짜 바보들이 더 많다. 뭔 짓을 해서든지 등 따습고 배부른 짓만 해대는 이들이다. 빗대자면 뒤에서 호박씨만 까대며 이익만 챙기는 이들의 총칭쯤 된다. 그들은 뒤돌아 앉아 희희닥 거리며 세상을 조롱하며 손가락질을 해댄다. 바보라고 말이다. 그러나 정작 우스꽝스러운건 그들 자신이 진짜 바보란걸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연일 각본 없는 대하 드라마를 쓰고 있는 정치권을 보자. 물론 입에 담기도 싫지만, 연말 술 안주로는 최고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너는 많이 먹었고, 나는 덜 먹었다’로 하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된 입장에서 보면 바보중에 상바보들이 따로 없다.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일진대, 허구헌날 비비고 찌찌고 볶는 꼴이란. 어느새 정치가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알고 보면 정치권만 그런 건 아니다. 사람냄새 나는 곳은 어디든 다 그렇다. 자리 탐 많고, 말빨만 뾰족히 세우는 이들도 그 중에 하나로 친다. 처음에는 세상의 규격을 깨는 대담함을 내쳐 보여줄 것처럼 온갖 쓴 소리를 내뱉는다. 그런데 정작 필요할 때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꼬리조차 내보이질 않는다. 사실 따져보면 정치권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 모두가 똑같은 바보들인 것을. 잘난 세상에 잘난 사람들만 넘쳐나는 세상이다. 날로 얼굴 가죽도 두꺼워져 웬만한 일에는 낮 붉히는 일조차 보기 힘들다. 그런 세상에서 한 번쯤은 우직한 바보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다. 아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어쩌면 바보되기가 아닌가 싶다. 설사 춥고 가난해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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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지러우면 악덕 무당이 판친다. 제법 괜찮다는 길목엔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색천을 매단 대나무를 대문간에 세워두고 안방엔 신당을 차린다. 소위 신군(神君)을 자처하는 그들은 세상 살이 다급한 민초를 대상으로 혹세무민한다. 그리고 마치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판관처럼 행세한다. 보편적 인식이 그렇다는 말이다. 비단 무당에만 그치지 않는다. 조폭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패밀리’의 머릿수가 곧 ‘힘’인 이들은 ‘대부’의 그늘에서 복
‘잣대’라는 말이 있다. 길이를 재는 자로 사용되는 대막대기 혹은 나무 막대기의 일종으로 통칭 ‘자막대기’라고도 부른다. 이 말은 자고로 도덕적인 행위나 사물의 기준을 재단하는 객관적인 근거로 인용되곤 했다. 흔히 ‘객관적이지 못한 일’이나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이 잣대를 기준으로 잘잘못을 가리곤 한다.그런데 이 잣대란 말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잣대가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객관적이지 못하며 형평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 ‘잣대’는 일부 소수 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