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2024.06.28 PM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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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주성 관련 연구성과의 축적
진주성 내·외성과 관련된 그동안의 연구성과의 축적은 괄목할만하다.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에 의해 다방면으로 이루어진 연구를 통해 진주성의 내성과 외성의 일각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연구는 진주성 내·외성의 주요 시설물의 발굴과 복원 자료로 활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진주성 관련 주요 연구로는 진주성도와 문헌, 1920년대 일제강점기 지형도 등을 통해 내성과 외성의 존재와 진주성내의 시설도 작성과 복원도를 작성한 연구한「조선왕조시대의 도읍경관체제연구Ⅱ(1987, 김한배, 박찬용)」가 있다.
진주성 관련 각종 문헌과 기존의 복원도, 고지도, 일제강점기 지형도를 활용해 임진왜란 이후의 성곽복원과 기존 학자들의 복원도 및 1938년 지적도를 종합 정리해 임란 이후의 진주성을 복원한 「진주성의 위곽 복원에 관한 연구(2003, 이상호)」가 있다.
진주목의 도시경관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변화된 과정을 고찰하고, 일제 강점기 지형도를 활용해 진주성 외성 복원을 연구한 「진주시 도시구조에 관한 역사지리적 연구(2000, 이영희)」가 있다.
해자의 발굴사례와 진주성도를 통해 진주 외성의 역사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진주성 외성을 비정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활용하는 등 복원의 정당성을 논의한 「경상우도 상징물 진주성(2010, 박용국)」이 있다.
진주성과 수령관아에 대한 연구를 체계적으로 진척시키며 조선시대 진주성의 변화를 현재의 진주성과 대배하여 정리하고 변화상을 그림으로 묘사한「조선시대 진주성의 규모와 모양의 변화(2013, 김준형)와 20여종에 달하는 진주성도를 정리하고 진주성도 내에서 시기마다 모습이 달라지는 변화양상을 20여종의 진주성도의 시기구분을 통하여 분석한 「조선시대 진주성도의 비교분석(2014, 김준형)」이 있다.
현재 파괴되고 훼손되어 현존하지 않는 진주성 외성과 성벽관련 시설, 그리고 동시대에 존재했던 진주목 관아의 위치를 진주성도, 지적원도, 발굴사례를 통해 비정한 「조선시대 진주성 외성과 진주목 관아지의 위치 비정(2016, 박세원)」이 있다.
진주성 관련 발굴 및 발견 과정과 그동안의 성과를 정리한 「진주성 원형과 역사유적의 재발견(2023, 송영진)이 있다.
이상에서 제시한 연구 성과는 진주성 관련 고지도, 지형도, 지적도 등을 중심에 놓고 최근에 발굴된 진주성 관련 유적을 통해 조선시대 진주목의 경관을 복원하고자 했다.
이러한 진주성 내·외성에 대한 연구 조사 성과의 축적은 진주성 내·외성의 발굴조사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3. 진주성 내·외성 주요 시설물의 발굴과 복원
진주성 관련 연구와 발굴 조사에 이은 복원사업은 진주성의 원형찾기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발굴·복원은 주로 진주성 내성과 외성을 포함한 ‘역사속에 묻혀진 진주성의 이름 부여’라는 측면에서 그 중요성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진주성 내성 중심 발굴조사
실제로 진주성에 대한 초기 발굴조사는 진주성 내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선화당 부지 조사(국립진주박물관, 1997년), 공북문조사(경남문화재연구원, 1999년), 촉석루 아래 성벽 조사(국립진주박물관, 2000년) 이후 진주성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송영진,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실장)
공북문과 우물 복원
대표적으로는 진주성의 역사성, 상징성, 유일성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현 진주성의 모습을 갖춘 계기가 된 진주성정화사업(1980년)이 있다. 이어 진주성 성곽복원(1980년대)과 성곽 및 시설물 정비사업(1990년대)도 이루어졌다.
이어 2013년에는 진주성 내 우물지의 발굴과 복원과 경남도청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된 공북문 터 발굴조사와 공북문이 복원(2002년)되었다.
진주성 내·외성의 주요 시설물에 대한 발굴과 복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10년 이후의 일이다.
진주성 관련 발견과 발굴 성과는 송영진 국립경상대학교 박물관 학예실장의 「진주성 원형과 역사유적의 재발견-진주성 관련 발굴성과를 중심으로」연구를 전제한다.
진주성 외성 동벽
경상국립대학교 박물관이 실시한 입회조사에서 진주성 외성의 첫 발견이라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진주성의 동쪽과 북쪽 외성벽의 실체가 발견된 것이다. 최초로 성벽이 확인된 곳은 진주교 사거리 동쪽에 위치(구 중앙파출소 골목길)하는 진주성 외성의 동벽구간이다.
진주성 외성 북벽
진주성 외성 북벽은 지금의 진주경찰서와 진주우체국 앞길로 추정된다.
진주성 외성 남벽(진주대첩 기념광장)
진주대첩기념광장 발굴(2019년)을 통해서는 통일신라시대 배수로와 고려시대 토성, 조선시대 석성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진주성 외성과 치성·대사지 추정 유구 발굴(2020년)이 이루어졌다.
진주성 외성 북서벽
진주시 중안동 15-11번지에서 통일신라시대 채토수혈과 외성벽, 대사지 호안석축 등이 조사되었다.(2022년)
대사지 북쪽 호안과 남쪽 호안
진주 중안동 유적-경상남도 진주 교육청 이전 부지내에서 대사지 북쪽 호안과 남쪽 호안이 발견되었다.(2009년)
진주성 대사지와 해자
진주성 외성 북쪽 대사지 흔적은 중앙병원과 동산교회 사잇길에서 확인되었다. 동성동의 진주성 외성 동벽 구간에서도 해자로 추정되는 자료가 확인되었다. 중앙동행정복지센터 앞길이다.
중영복원
최근에는 진주시가 진주성 내 경상우병영 병마우후(종3품)의 집무공간인 중영(中營)을 복원했다. 진주성정화사업 이후 성곽의 촉석문과 공북문 등 문루(門樓) 이외에 건축물로서는 진주성 내에서 최초로 복원된 건물이다. 현재 복원된 중영은 역사·문화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상의 진주성 내·외성 지역의 발굴과 복원 성과를 바탕으로 진주성 내·외성의 복원과 활용 계획 수립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4. 진주성 내·외성 복원과 정비
진주성 내·외성 복원과 정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것은 각종 연구 성과의 축적과 발굴조사와 복원이 계기가 되었다.
특히 최근에 발굴 복원된 중영의 경우에는 진주성 내성 뿐만 아니라 외성에 대한 발굴조사와 발굴의 기대감을 높였다. 운주헌과 선화당의 복원 역시 진주성 복원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진주시가 지난 2020년에 수립한「진주성 종합정비계획 수립(2020)」용역 역시 진주성 발굴과 정비라는 시대적 요청에 답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진주시는 진주성에 대한 현황조사를 실시해 그 원형을 파악하고 고증을 통한 중장기적인 복원정비 계획 수립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를 통해 진주성의 역사성을 회복하고 국내외 탐방객들에게 역사문화유적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더불어 진주성 내성과 연계한 진주대첩 기념광장 조성사업 부지 내 유적을 비롯한 주변과 연계한 활용 및 활성화에 대한 중장기계획 수립도 추진하고 있다.
5. 진주성 외성 찾기와 성곽투어 등 관광컨텐츠 개발
진주시는 지난 2023년 진주성을 활용한 진주 관광미래 100년 마스터플랜 「진주성 외성 찾기 프로젝트 학술용역」을 실시했다.
진주성 외성 찾기는 ‘진주성 원형 찾기’ 또는 ‘진주성 제모습 찾기’이다.
진주성은 조선시대 고지도에 그 형태가 표기돼 있지만 현재는 내성(內城)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대사지 매립을 시작으로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진주성 외성(外城)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도시화를 위해 성벽을 허문 자리에는 근대식 건물이 들어섰고, 대사지는 외성의 성벽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진주성 외성은 무려 9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땅 속에 묻힌채,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
진주성 외성 찾기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진주성 외성의 측량을 통해 ‘진주성 외성에 고유의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진주성의 원형을 찾는 노력의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진주성 외성 찾기는 향후 복원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진주성 외성 찾기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현 진주성 내성에서 외성까지 성곽길을 따라 가는 진주성 성곽 투어와 진주객사, 진주목관아 등 주변의 역사 문화자원을 활용한 새로운 도심여행 코스 개발 등과 같은 역사관광자원화까지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특히 진주성 성곽 투어는 진주성 외성 공간인 본성동, 동성동, 장대동, 중안동 등 원도심과 중앙시장을 살리는 기폭제가 됨과 동시에 성북동·칠암동·중안동에서 추진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과의 연계개발을 통해 진주성을 중심으로 한 경남관광 허브로 부상시킬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진주성 성곽 문화자원을 활용한 성곽 투어는 무궁무진한 관광스토리와 코스개발의 가능성이 높아 진주성이 가진 관광자원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일이 될 것이다.
진주성 외성 찾기에 이어 진주성 성곽 탐방 종합 정보 플랫폼 구축은 물론
진주성 성곽 종합 가이드 북 제작, 진주성 성곽 스마트폰 앱 개발 등 진주성 성곽 투어를 위한 관련 관광정보 제공을 위한 준비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성곽 투어가 단순히 성곽 라인만 안내하는 방식으로는 지속적인 탐방이 이어지기 어렵다. 따라서 성곽 주변 지역과 연계된 먹거리·볼거리·즐길거리가 포함된 코스 개발과 성곽 인근 관광자원과 연계된 성곽 투어 프로그램 개발도 중요하다.
진주성 외성 찾기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진주성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임과 동시에 진주 관광 미래 100년을 책임지는 마스트 플랜을 세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진주성 외성 찾기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6. 전국 각 지자체의 감영 복원 사례
감영(監營)은 조선시대 각 도의 행정사무를 관장했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도청에 해당한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지 이전 이후 전국 행정구역을 8도로 확장하면서 생긴 신설기관이다.
1895년 기존 8도 체제가 23부제로 개편되면서 부청(府廳)으로 개칭되었다가, 1896년 13도제로 다시 개편되면서 ‘도관찰부’라고 개칭했고 1910년 일제강점기에 지금과 같은 도청(道廳)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감영의 건축물 다수는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감영 건축물 다수가 훼손되거나 파괴되었다. 서울의 경기감영과 해주의 황해감영은 아예 완전히 철거되었고, 전주의 전라감영과 평양의 평안감영은 한국전쟁 도중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러나 최근 각 지자체에서 감영복원 사업을 추진하면서 옛 모습을 찾은 감영도 생겨났다. 조선시대 감영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대구를 포함해 강원과 충청, 전라 등 4개 지역이다. 이 지역들은 저마다 대규모 복원사업을 통해 ‘행정·문화 중심지’라는 사실을 홍보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가장 잘 복원된 곳은 원주시의 강원감영이다. 전주시의 전라감영도 복원이 완료되었으며, 상주시의 경상감영은 복원 추진중이다. 공주시의 충청감영은 남아 있던 건축물을 이전하여 감영공원을 만들었다. 대구시의 경상감영은 선화당과 징청각을 중심으로 한 공원화가 이루어졌다.
강원감영(江原監營)
문화재청과 원주시는 강원감영도(江原監營圖)를 근거로 1995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1996년부터 복원 정비사업을 추진했다.
1단계(2005년)로 선화당, 포정루를 보수하고 내삼문 중삼문, 내아, 행각을 복원했다. 2단계사업(2006년)으로 영주관, 환선정, 봉래각, 채약오, 책방, 방지를 복원했다.
복원정비사업은 1995년 시작돼 2018년 11월 3일 준공되어 총 소요기간 23년에 207억여원이 투입된 대단위 공사였다.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8도 감영 가운데 처음 복원된 것으로 강원 교육장소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원도심 관광과 상권활성화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원주시의 감원감영은 사적 제439호로 지정되어 있고 강원감영 선화당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이다.
전라감영(全羅監營)
전주시는 2015년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전라도를 관할하던 행정기관인 전라감영이 있던 자리였던 옛 전북도청사 건물을 철거한 뒤 2017년 전라감영 재창조 복원사업을 시작했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전소된 전라감영은 2017년 전라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을 비롯해 내아, 내아행랑, 관풍각, 연신당 등 주요 건물 복원은 물론 측우대와 가석, 폐석 등 조경시설물을 설치하고 2020년 8월 복원사업을 완료하고 일반시민에게 개방했다.
전라감영의 선화당은 구한말 미국 공사대리였던 조지 클레이튼 중위의 사진 자료를 토대로 최첨단 ICT(정보통신기술) 기술을 접목한 콘텐츠로 재현했다.
전주시는 전라감영의 복원을 ‘단순한 건축물의 복원이 아닌 전라감영에 담긴 역사적 가치와 문화를 살려내고 지역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전주시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복원된 전라감영을 중심으로 옛 도심이 문화역사가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변모하는 것은 물론 한옥마을과 전주 풍패지관(객사)를 비롯한 구도심 일대를 연결하는 새로운 관광축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구 경상감영공원
대구 경상감영공원은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 있는 공원.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있던 곳으로 1970년대에 중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장되었다가, 1997년에 공원 내 문화재들을 바탕으로 새롭게 재단장 한 뒤 경상감영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 선화당과 징청각 등의 역사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대구시는 경상감영 선화당과 징청각을 관광자원화했다. 2010년까지 사업비 92억원을 들여 조선시대 지은 일제강점기 조선식산은행을 활용한 경상감영공원을 만들었다.
선화당은 통신사 접견, 측우기 사용, 백성 애로사항 청취 등의 집무사항을 복원하고, 관찰사의 처소인 징청각은 생활공간으로 복원해 전국 최초의 감영 전문전시관으로 특화했다.
경상감영공원 마당에는 공연무대와 야외체험장, 노천카페 등을 설치하고 조선시대 민가생활 및 전통 5일장을 여는 세시풍속을 재현했다.
상주시 경상감영공원(慶尙監營公園)
경북 상주시는 2021년 5월 ‘경상감영공원’을 조성했다. 사업비 188억원이 투입된 경상감영공원은 2013년 첫 삽을 뜬지 8년만이다. 상주시는 경상감영자리가 도심에 위치해 상주의 관문인 복룡동에 시설을 재현했다.
경상감영공원에는 주 건물인 관찰사 집무실인 청유당과 임금에게 예를 행하던 장소이자 중앙에서 온 관리의 숙소로 사용했던 상산관, 관아를 지키던 포졸들이 근무하던 사령청도 재현했다.
고증을 거쳐 건립한 경상감영은 상주가 경상도의 중심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알리면서 역사문화교육공원, 관광자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충청감영의 흔적, 공주 선화당
충청감영의 흔적인 공주 선화당 건물은 1833년 순조 33에 세운 것으로 일제강점기인 1932년 공주 중동의 구 국립공주박물관 내로 옮겨 1972년 공주박물관이 신축 개관하기까지 박물관 전시실로 이용되었다. 1992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포정사 문루는 1833년(순조 33)에 세웠는데, 1985년에 이를 해체하여 1993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감영 시절의 문루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당시 충청 감영에는 50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선화당, 포정사와 삼문, 부속 건물 1채만 남아 있다. (출처 공주시청)
7. 일본 오사카성의 사례
최근에는 문화재를 활용한 관광 콘텐츠의 확장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화재를 활용한 관광 콘텐츠의 확장 선례로 미루어보아, 관광에 있어 전통성을 강조한 콘텐츠의 수요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럽의 크고 작은 고성과, 중국의 자금성, 또한 일본의 오사카성등 다양한 국가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성들이 위치하고 있고 해당 성과 성곽을 중심으로 먹거리, 즐길거리, 볼거리등이 유입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랜된 것이란 재미없고, 볼 것이 없는 것이 아닌 그 나라, 그 지역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관광지이며 더불어 그 지역을 가장 빨리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로써 한정적이며 특별한 콘텐츠를 자처하는 문화재는 관광객이 찾아오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천하의 부엌으로 불린 경제도시 오사카가 품은 오카사성
실제 일본의 천년의 도시 오사카성의 경우, 천하의 부엌으로 불린 경제도시 이며 일본의 근대문화를 가장 잘 품고있는 지역이다. 더불어 일본의 명성중 하나인 오사카성이 위치하고 있다, 일본의 성 대부분의 특징은 적당한 높이의 산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해자를 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더불어 사무라이 시대의 상징적 문화재인 오사카성은 일본 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손꼽히고 있다.
오사카는 밤에는 도톤부리 시가지에서 먹거리와 야경을 즐기고 낮이면 오사카성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모습의 시가지를 즐기는 코스가 관광객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어트랙션으로 사랑받는 유니버셜 스튜디오 테마파크와 수족관까지 자리잡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며 관광 콘텐츠의 다변화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이끌어 내고 있다.
오사카성의 해자와 성곽을 활용한 다양한 즐길거리
성의 해자를 활용한 고부자내 뱃놀이는 오카사성의 성곽을 활용한 또 다른 관광 콘텐츠로 방문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넓은 오사카성의 관광 스팟의 이동수단으로써의 기능을 동시에 하고 있으며, 성곽의 숨은 이야기 들을 가이드의 해설과 함께 즐길 수 있다.
8. 진주성 원형 찾기를 위한 과제 진주성 외성 찾기는 ‘진주성 원형 찾기’ 또는 ‘진주성 제모습 찾기’이다.진주성은 조선시대 고지도에 그 형태가 표기돼 있지만 현재는 내성(內城)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대사지 매립을 시작으로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진주성 외성(外城)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도시화를 위해 성벽을 허문 자리에는 근대식 건물이 들어섰고, 대사지는 외성의 성벽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진주성 외성은 무려 9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땅 속에 묻힌채,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진주성 외성 찾기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진주성 외성의 측량을 통해 ‘진주성 외성에 고유의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진주성의 원형을 찾는 노력의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진주성 외성 주요 시설지 표식(미디어 스마트 폴) 설치 현재 진주성 외성의 주요 시설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토대로 진주성 외성임을 인식할 수 있는 표식의 설치가 필요하다. 현재 발굴조사를 통해 시설지 추정지로 확인되어 표식 설치가 가능한 곳은 5곳 정도이다. ▲남문(南門) 추정지(진주대첩기념광장~옛 중앙파출소 골목) ▲동장대(東將臺) 추정지(대흥주차장 인근) ▲신북문(新北門) 추정지(기업은행) ▲외성 북벽 추정지(진주우체국 앞 도로) ▲구북문(舊北門) 추정지(진주문화원 앞) 표식설치는 현재 진주시가 버스정류장에 설치한 스마트 폴을 진주성 주요 시설지에 설치하는 방안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스마트 폴에는 진주성 3D, 진주성 종합정보 제공은 물론 시내버스 안내방송 등 다양도로 활용이 가능하다. 진주성 관문인 남문(南門) 재현 진주성 외성 찾기 사업을 통해 진주성의 내성과 외성을 포함하는 진주성 관문의 설치 필요성이 매우 높다. 남문은 진주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향후 진주성 복원 및 정비 사업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사전 사업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진다.진주성 남문의 위치 비정과 함께 진주성 남문(南門)의 재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진주성 다큐멘터리와 진주성 3D 진주성 외성 찾기 사업의 결과물인 진주성 숏 다큐 제작을 통해 진주시민들에게 진주성 외성 찾기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고 진주성 복원과 정비에 대한 필요성을 제고하기 위해 필요하다.촉석루와 남문, 중영을 3D 영상 제작을 시작으로 향후 진주성 내성과 외성을 포함한 진주성 3D 제작을 통해 진주성의 역사성을 진주시민들에게 알린다. ICT 기술 기반(AR글래스) 진주성 컨텐츠 개발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즉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AR글래스를 통해 진주성에 대한 접근을 편리하게 함과 동시에 모바일 에플리케이션을 활용한 진주성 활용 등을 통해 진주성 외성 컨텐츠를 개발한다. ‘진주성 특화골목’ 개발 진주성 외성 찾기를 통해 진주성-구도심, 진주성-재래시장을 연결하는 ‘특화골목’을 조성한다. 동장대 특화골목현재 동장대 추정지인 대흥주차장에서 북쪽 방향 200M지점을 지나 대로변 건너편에는 중앙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동장대-중앙시장에 이르는 이 특화골목은 가칭 ‘동장대 특화골목’으로 진주성 외성 탐방 이후 자연스럽게 중앙시장으로 연결함으로써 재래시장 활성화에 기여하는 측면을 강조할 수 있다. 공북문 특화골목 공북문 특화골목은 진주시교육지원청 사거리-공북문에 이르는 골목길이다. 진주시교육지원청 사거리 입구에서 진주성 공북문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 골목에는 커피숍 등 다양한 상점이 즐비해 있는 것은 물론 진주성과 연결되는 구도심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버스 안내방송으로 만나는 진주성 진주의 대중교통(시내버스)의 안내방송을 활용한 진주성 외성의 건물지 안내방송 캠페인을 진행한다. 안내방송을 이용하여 “진주성 남문을 통과하고 있습니다.”와 같은 방송을 진행해 진주시민들에게 진주성에 대한 청각적 이미지와 기억속에 외성에 대한 정보를 익힐 수 있도록 한다. 결론 및 제언 진주성은 경상남도의 역사적 전통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경상남도 관광실태조사에서 경남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인상 깊은 곳으로 꼽은 곳이 ‘진주성’이다. 이는 진주성이 경상남도의 상징, 즉 랜드마크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진주성 원형 찾기는 이처럼 진주성의 역사성과 정체성 확립을 위한 시급한 일이다. 진주성 원형 찾기가 단순히 주요 건물지의 원형 복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주성 원형 찾기를 통해 확보된 성곽자원을 활용한 ‘진주 관광 미래 100년 마스트 플랜’을 수립하는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주성에 녹아 있는 쳔년 역사의 흔적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성곽 문화자원을 활용하는 진주시 관광자원 개발의 무한대 가능성을 인식하는 계기도 마련될 것이다. 지금부터 진주성 원형 찾기를 시작해야 한다. 진주성 원형찾기가 ‘진주 100년 미래’의 마중물이라는 시대인식 아래 「진주성 원형 찾기 추진위원회」 결성은 물론 진주성 원형찾기를 위한 중장기 계획 수립 등 필요한 절차가 마련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주성 원형 찾기가 ‘현상황에서 실현 불가능하다’라는 회의론적 자세를 버리고 ‘진주의 미래세대에게 남겨 줄 문화유산’이라는 점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지역사회에서 진주성 원형찾기의 필요성은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연구와 발굴 성과도 축적되어 있다. 진주성 원형 찾기는 지금의 진주가 아닌 미래의 진주를 위해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 진주성 원형 찾기를 위해 다음의 제안을 하고 싶다. 첫째, 진주성 원형 찾기를 위한 「진주성 원형 찾기 범시민 추진위원회」 결성이 필요하다. 둘째, 진주성 외성 원형 찾기가 포함된 진주성종합정비계획의 재정비가 필요하다. 셋째, 진주성 역사도심 특별지원에 관한 조례 제정이 필요하다. 넷째, 진주성 원형 찾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진주성 남문(南門)」 재현 사업이 시급하다. 다섯째, 진주성 원형 찾기 범 시민 홍보사업으로 「진주성 3D」 제작이 필요하다. 여섯째, 진주성 내·외성을 활용한 성곽축제 등 성곽프로그램 등의 컨텐츠 개발이 필요하다. 일곱째, 진주성 관광의 구심점이 될 스마트 미디어 폴 설치 및 AR글래스 관광 콘텐츠의 개발이 필요하다. 여덟 번째, ‘진주성 원형 찾기 진주시민 서명운동’을 추진해야 한다.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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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진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 체계와 냉철한 비판의식이 필요하다. 과연 지금의 지역사회가 ‘진주 역사·문화의 미래 비전과 과제’에 대해 어떤 자세와 행동양식을 견지하고 있는지 반성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진주향당 창립 20주년 기념 토론회가 제시한 「진주성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아젠다는 ‘지역사회 스스로 진주의 미래 비전과 과제라는 아젠다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더불어 ‘진주 역사와 문화의 비전 수립’을 위한 지역사회의 역량을 결집하고 키워 나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점 역시 유의미하다. 진주성 원형복원을 위한 선결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진주 역사의 핵심 공간인 진주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이다. 진주성이 가진 역사와 가치의 이해라는 바탕 위에서 과제를 도출하고 미래 비전을 설정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진주성의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가꾸어 갈 것인가’이다. 진주성이 진주 미래 100년을 책임질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진주성의 미래를 고민하는 지역사회의 고민과 실천’이 담보되어야 한다.세 번째는 ‘바람직한 진주성의 미래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과 정책은 무엇인가’이다. 진주성의 미래상을 제시하기 위해 학계·지방정부·정치권은 전략과 정책을 구상하고, 개인과 시민·사회단체는 깊이 있는 사고와 품격 높은 행동양식으로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진주성 원형 찾기, 이른바 진주성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포함한 ‘진주성 복원’ 논의는 해묵은 과제처럼 치부돼 왔다. 현실적인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회의론적 시각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학계를 중심으로 진주성 관련 연구 성과 축적과 주요 시설물들의 발굴과 복원에도 불구하고 진주성 복원에 대한 지역사회 중심의 진지한 접근은 시도되지 못했다. 진주성 원형 찾기에 있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회의론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진주성 원형 찾기는 요원하다. 일본의 오사카성(大阪城)의 천수각과 구마모토(熊本城)의 복원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오사카성 천수각은 1665년 소실 이후, 266년이 흐른 1931년에 복원이 되었다. 성채가 견고하기로 유명한 구마모토성도 1877년 소실된 이후, 83년이 지난 1960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도 진행중이다. 이제는 ‘진주성 원형 찾기’라는 아젠다를 지역사회에 천명함과 동시에 조속한 실천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여기에 진주시민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지속적인 의지도 보태져야 한다. 만약 과거처럼 지역사회가 강력하게 요청하지 않고 남 일처럼 외면한다면 진주성 원형찾기는 요원한 일이 된다. 더불어 일제강점기 이후 110년이 넘도록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는 진주성 역시 한 발자국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시대인식을 가져야 한다. 최근 진주향당이 중심이 되어 시도한 「진주성 외성 찾기」는 ‘진주성 원형 찾기의 필요성에 대한 지역사회의 공감대 형성’과 ‘진주성이 중심이 되는 경남관광의 허브로 부상할 수 있는 잠재력을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지역사회가 ‘진주성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아젠다의 필요성을 인식함과 동시에 진주성 원형복원을 위한 선결과제에 동의한다면 ‘진주성 원형 찾기’는 전후 최대의 역사(役事)였던 촉석루 복원에 이어 ‘새로운 진주 100년 미래를 준비하는 자랑스런 역사(役事)’로 기록될 것이라 믿는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장대(진주성 3D재현) 1. 근·현대 진주성의 역사 진주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자원인 진주성의 본격적인 훼철이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일제는 진주에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급증하자, 진주의 도시 근대화라는 명분 아래 경상우병영의 군사방어시설이던 진주성벽을 허물고 대사지를 매립했다. 이 시기, 경남도청 선화당을 비롯해 진주성 내의 주요 옛 건축물들은 역사 속으로 모습을 감춘 것은 물론 진주성 외성 역시 근대도시화의 미명 아래, 진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해방전후와 한국전쟁 시기의 진주성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시기는 진주성에 더욱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진주성의 상징인 촉석루가 전소된 것을 비롯해 진주 시가지는 폐허가 되었다. 진주성 역시 그 원형을 잃은 채로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되었다. 이 시기 진주성은 내성의 성곽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고, 진주성 외성은 존재 자체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가 되었다. 진주성, 사적 제118호 지정 진주성의 복원에 대한 지역민의 건의가 이어졌다. 이에 따라 1960년 진주성이 사적 제118호로 지정됨과 동시에 성지 일원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이후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진주성은 폐허 상태 그 자체였다. 진주성정화사업의 추진 지역사회에서 진주성 복원을 통한 진주의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진주시가 1969년 진주시장기계획사업으로 진주성정화사업을 설정했다. 진주성정화사업은 제1차 진주성정화사업(1970~1975년)을 통해 성곽, 촉석문, 북암문을 복원하고 촉석루를 비롯한 9동의 문화재 보수와 성지내 순환도로 개설로 사적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제2차 진주성정화사업(1979~1980년)에서는 성지 경내에 산재한 민가 751동의 철거와 토지 보상이 이루어졌고, 제3차 진주성정화사업(1981~1984년)에서는 성곽 490m가 복원되고 유적 7동이 보수되었으며 광장 4,728평과 주차장 456평, 10,677평에 이르는 조경사업이 추진되었다. 국립진주박물관이 건립(1984년)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진주성 내·외성 복원 필요성 제기진주성정화사업은 진주성의 역사성·상징성·유일성이 내재된 역사 복원 혹은 역사공간의 원형보존에 실패한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적지 임에도 불구하고 시민공원 또는 관광지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점은 진주성 뿐만 아니라 진주시 전체의 불행이기도 하다.진주성정화사업을 통해 진주성(내성)은 불완전하나마 제 모습을 찾았지만, 진주성 외성 복원과 정비에 대한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주성 내·외성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면서 다양한 성과물이 축적되면서 최근 진주성 외성 복원 혹은 재현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진주성 외성 찾기 프로젝트 시행지난 2023년 진주시가 진주성 관련 발굴된 외성의 흔적과 기록자료를 기반으로 일제강점기 전의 조선후기 진주성의 성곽을 찾는 작업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진주향당의 「진주성 외성 찾기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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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진주성의 가치와 의미 1. 진주성 정화사업을 통한 경관 회복 노력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진주성의 원형 경관은 급격하게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1895년 진주 관찰부가 출범하면서 우병영의 본관 건물을 선화당으로 개칭하여 관찰사의 집무처로 삼았다. 관찰부의 경무서는 중영 건물을 사용하였다. 직제개편에 따라 진주성 내 건물의 기능이 변화되고 방어 기능이 사라지자 성벽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외성 동장대는 1906년 갑자기 무너졌으며 진주성 성벽은 민가의 석재로 활용되었다. ‘읍성 훼철령(1910년), ’시가지 건축물 취제규칙(1913년)‘, ’면제시행규칙(1917년)‘ 등 법령도 전국 읍성들의 철거 속도를 가속하였다. 1910년에는 진주성의 돌과 흙으로 대사지를 메워 택지를 조성하였다. 관공서나 민가 건축, 신작로 개설 등에 진주성의 토석이 사용되면서 진주성은 순식간에 원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1917년에는 대일항쟁의 상징이었던 촉석루 북쪽 언덕에 진주 신사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진주성 내의 역사 경관은 계속 파괴되고 진주성의 성벽은 더이상 원형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하강진 2014, 39~49쪽). 진주성 경내는 빈 곳에 없을 정도로 민가들이 무질서하게 점거하고 있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고 문화재보호구역이 설정되었으나 이후에도 진주성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진주성에 대한 본격적인 관리가 시작된 것은 진주성 정화 사업이 추진된 1970년부터 였다. 1차 진주성 정화사업은 1970년부터 1975년까지 6년 동안 성벽 1,173m와 촉석루, 서문, 북암문을 복원하고 촉석루와 9동의 건물을 보수하였다 성내 순환도로도 이때 정비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정화사업은 1987년부터 추진되었다. 성벽 위주의 정비를 추진한 1차 사업과 달리 2차 사업에서는 성내의 민가를 철거해야 했으므로 정부의 보상 대책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진주시에서는 임대아파트나 국민주택 등 이주대책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대화와 설득 끝에 마침내 성내의 민가 751동을 모두 철거하였다.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해 단합된 행정력의 효능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제3차 진주성 정화 사업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5년 동안 실시되었다. 제3차 사업 기간 성벽 490m가 복원되었다. 광장과 주차장이 설치되고 조경공사도 추진되었다. 성내에는 국립진주박물관이 건립되었다(안길현 1985, 70∼79쪽). 3차에 걸친 진주성 정화 사업은 원형 고증이라는 측면에서 한계가 있었지만, 진주성의 경관을 지금처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이해관계로 완강히 반대하던 주민들과의 갈등 관계를 해결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생활공간을 역사 공간으로 지켜낸 것은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진주성의 원형 경관 회복 사업은 진주성 외성 구간의 선형을 찾아 복원해야 비로소 끝이 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현시점에 진주성 정화 사업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진주성 정화 사업과 추진과 관련한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일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2. 진주성 성벽에 응축된 우리나라 성곽의 축성 기술 성곽을 쌓으려면 지리, 지질, 측량, 건축, 토목, 수학, 과학 등 여러 분야의 토목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곽에는 축성 당시의 기술 반영되어 있게 마련이다. 수 개축도 마찬가지이다. 진주성이 축성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진주성의 초축 기록은 없지만, 상세한 수 개축 기록이 남아있다. 진주성 내외부에 대한 발굴, 특히 대첩광장 부지를 발굴하여 진주성의 초축 시기가 고려시대인 것을 밝힌 것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아무도 진주성의 초축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축 당시의 진주성은 기단석축형 판축공법으로 축조되었다. 기저부에 2열의 석열을 배치하고 판축공법으로 중심토루를 조성하였으며 중심토루 내외부에 덧붙여 쌓은 내외피토루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토성은 석축성벽과 선형을 달리하고 있으며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배수로 유구 위에 조성되어 있다. 토성 내부의 판축토에서 청자편과 기와편이 출토되어 토성은 10〜12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우왕 5년(1379) 진주성은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개축된 석성이 토성의 선형과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주성의 고려시대 석성은 조선초기 남해안 일대에 축성되는 읍성의 축성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석성은 지대석과 대형 기단석을 세워쌓거나 눕혀 쌓았으며, 기단석이 직육면체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대첩광장에서 확인된 외성 성벽 중 하단부의 대형 석재가 사용된 성벽은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 축성법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동쪽 성벽을 둘레 2,750m로 약 650m 정도 확장하여 쌓았다. 이 시기는 읍성과 영진보성이 본격적으로 구축되는 성종대에서 100년이 지난 시점으로 축성법의 변화가 주목된다. 내성 구간이 이때 신축되었으므로 원형이 보존된 내성 성벽처럼 크기가 작고 가공되지 않은 깬 돌이 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1603년 경상우도 병영이 진주로 이설되면서 진주성 동벽 구간을 단축하는 공사가 실시되었다. 확장공사가 시행된 후 10여 년 지난 시점에 이루어진 개축 공사였으므로 축성법의 변화는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숙종 6년(1680)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숙종 대에는 전국적으로 많은 산성이 축성되었으며 공통적인 축성법이 적용되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숙종대 축성법의 특징은 장방형으로 가공한 대형 성돌과 그랭이질을 통한 치밀한 축성기법이라 할 수 있다. 면석의 표면에서는 줄정다듬이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화강암 성돌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진주성은 화강암을 구하기 힘든 지역이므로 사암이 주로 사용되었다. 책임시공을 위하여 일정한 구간마다 축성 분담 구간을 성돌에 새겨놓아 축성시기와 담당자를 알 수 있도록 한 것도 특징이다. 진주성도에서 확인되는 조선 후기 진주성 외성의 둘레는 2,578m이다. 그중 진주성 정화 사업 기간에 이미 복원된 성벽은 내성을 포함하여 1,663m이다. 대첩광장에서 확인된 성벽 구간을 제외하면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시가지 구간에 포함된 구간은 약 978m 정도이다. 이 구간의 성벽이 지하에 어느 정도 높이까지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향후 지속해서 발굴 조사하면, 시기별 축성법의 특징을 좀 더 명확하게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3. 견고하고 완전무결한 것으로 평가된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 유산임 조선 초기에는 국제전쟁의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각 고을에 인접한 산성을 수축하고 창고를 설치하여 유사시 입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왜구도 기승을 부렸다. 조선과 명의 관계가 개선되고 해상치안이 강화되자 왜구의 피해가 줄어들게 되면서 산성 입보와 중요 거점 중심의 진관체제는 읍성 중심의 방어 체제로 대체되었다. 소규모 왜구의 침입은 읍성만으로도 막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대부터 본격적으로 축조된 읍성은 성종 대에는 122에 달하였다. 읍성은 왜구를 가상의 적으로 하는 방어시설이었으므로 규모가 크지 않고 평지성이나 평산성의 형태로 축조되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지였다. 1차 진주성 전투는 1592년 10월 5일부터 진주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3,800여 명의 수성 병력이 의병들의 지원을 받으며 2만여 명에 달하는 왜군을 상대로 6일 동안 항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593년 6월 19일부터 전개된 진주성 2차 전투는 3천여 명의 군인과 5만 7천여 명의 백성들이 9만 3천 명에 달하는 왜군을 상대로 11일 동안 버텼으며, 결국 성은 함락되고 전원 몰살당하였다( 이형석 1994, 556, 723쪽). 다른 읍성과 달리 진주성에서 이러한 항전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진주성 입지가 탁월했기 때문이다. 선조 36년(1603) 진주성에 경상 우병영이 이곳에 설치된 것도 형세가 험고하여 방어에 유리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진주목의 관아가 있는 읍치였던 진주성에 우병영이 설치되면서 진주성은 일시적으로 읍치와 병영성을 겸하게 되었다. 우병사 김수일이 진주목사까지 겸하였다. 이후 무신이 수령을 겸하는 데 대한 문신들의 반발로 인조 13년(1635) 진주목사가 따로 파견되었다. 이때 진주목의 관아는 병영에서 분리되어 성 밖 비봉산 자락으로 이전되었다. 경상 우병영이 설치되면서 방어시설은 새롭게 변모되었다. 동벽의 규모를 축소하고 내성을 쌓아 내성과 외성의 구조로 만들어 방어력을 보완하였다. 구북문과 신북문, 남문에는 옹성을 설치하여 성문을 보강하였다. 대포를 쏠 수 있도록 내성에 3개의 포루, 외성에 9개의 포루 등 12개의 포루를 설치하고 삼가, 의령, 곤양, 단성, 초계, 진주, 거창, 사천, 함양, 남해, 합천 등 11개 읍에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성내에는 길이 100척, 너비 80척, 깊이 11척이 되는 연못을 파서 유사시 음용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진주성의 대안 망진산에는 이미 조선시대 초기부터 봉화를 설치하여 왜구의 침입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대응하도록 하였다. 진주성은 평지성이면서 산성의 방어력을 갖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이었다. 이러한 평가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화성 성역을 논의하던 중 정조는 진주성을 직접 거론하면서 ’사람을 보내 영남의 진주성 초루를 본떠오게 할 정도로 진주성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표출하였다(박정애 2023, 70쪽). 정조 18년(1794)에는 신료들과 성역을 논하는 자리에서 ‘지금 화성의 제도 역시 진주성을 모방하여 견고하고 완전무결함이 영원히 이어지지를 바라는 것이니, 어찌 급하게 역사를 감독하여 오직 속히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겠는가?’라고 다시 진주성을 언급하였다. 이를 통해 진주성은 당대에도 이미 견고하고 완전무결함에 있어 조선 최고의 성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진주성의 축성 역사와 가치에 대해 살펴보았다. 진주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신문왕 5년(685)이다. 거열주가 完山州와 菁州로 분리되면서 진주는 청주의 치소가 되었다. 비로소 진주는 11군 30개 현을 다스리는 서부 경남의 중심도시로 자리잡게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진주성에서 통일신라 시기 강주성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진주성과 구시가지 일원에 격자형 가로망을 갖춘 고대도시가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대첩광장에서 확인된 기단석축형 판축토성은 고려 초기에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토성은 석성과 선형을 달리하고 있으며 둘레는 2.1k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24개 역과 10주 37현을 관장하는 山南道의 중심도시 진주의 위상에 걸맞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진주성은 고려말 우왕 5년(1379)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이후에도 선조 대와 숙종 대에 진주성은 대대적으로 수축되었다. 따라서 진주성은 조선시대의 시기별 축성법의 변화양상을 알 수 있는 핵심유적이라 할 수 있다. 향후 외성 구간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시기별 축성법의 특징을 좀 더 명확하게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혼란기를 거치며 진주성은 원형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었다. 성내에 많은 민가가 난립해 있었다. 1970년부터 1984년까지 3차에 걸쳐 실시된 진주성 정화 사업은 진주성의 경관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성공적인 사례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진주성 정화사업은 정책 결정과 행정력의 효능감을 잘 보여준 모범사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없었다면 현재의 진주성은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향후의 과제는 진주성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이다. 장기적인 보존과 관리방안이 수립하고 계획적인 발굴조사를 통하여 성곽의 선형과 변화양상, 수 개축 시기별 축성법의 특징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진주성의 역사 경관과 자연경관의 가치를 인식하고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곽도시에 걸맞도록 원형경관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
심광주(한국성곽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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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성곽은 적의 침입이나 재해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방어시설이다. 군사시설이면서 동시에 통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행정의 거점이었으며 국가나 영역을 의미하기도 했다. 성곽은 국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 시설이자 국가나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상징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 시대의 전쟁은 성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새로운 지역을 점령하면 먼저 성을 쌓거나 수리한 후 군사를 배치하고 주민을 이주시켰다. 성내에는 관아와 창고, 병영, 의례 시설, 집수시설, 도로 등이 설치되었다. 성곽은 국가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역사의 현장이었으며, 일상생활이 전개되는 삶의 터전이었다. 따라서 성곽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종교, 생활 등 여러 분야의 가치가 중첩된 복합 문화유산이다. 현재 남한지역에서 확인된 성곽 유적은 모두 2,182건이다(문화재청 2007, 308쪽). 경상남도에는 338건의 성곽이 분포되어 있다. 15건이 국가사적이며 38건이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해방 이후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고 1963년에는 이 법에 따라 125건의 문화유산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중 성곽 유산은 44건이며 진주성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진주성 1차전투는 행주대첩과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대파한 3대 대첩의 하나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6만여 명의 군사와 백성이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이형석 1994, 736쪽). 또한 진주는 통일신라 시기 강주의 치소였다. 진주라는 이름이 출현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경상우도의 정치, 문화, 군사, 행정의 중심지로서 역사적 가치와 학술 가치가 축적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경상 우병영이 설치되면서 진주성의 위상은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진주성은 영남 제일의 자연경관과 인문 경관을 갖추고 있으며 방어력이 가장 뛰어난 성으로 평가되어 왔다. 성내에는 촉석루와 서장대를 비롯한 9건이 경상남도 지정 유산으로 관리되고 있을 정도로 문화유산의 밀집도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진정성과 완전성 측면에서도 진주성은 여전히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정성(Authenticity)과 완전성(Integrity)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도입된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평가 개념이다. 진정성은 해당 문화유산이 시대성을 반영하는 진짜 문화유산인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축조 시점이나 축조 기술, 축조 당시의 원형 보존과 관리상태 등에 대한 평가이다. 완전성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의 기준을 충족하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이다. 성곽은 본질적으로 군사 유산이다. 단순한 건물과 달리 입지와 경관, 구조와 방어체계까지 고려하여 관리와 보존이 이루어져야 한다. 성벽, 성문, 치, 장대, 포루, 성랑, 해자 등의 방어시설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내 건물, 당대의 무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충분히 고증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복원된 문화유산은 진정성과 완전성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현재 진주성은 원형 경관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성벽 동쪽 구간의 30% 정도가 시가지조성으로 인하여 지상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현존하는 성벽은 1970년부터 1984년까지 실시된 진주성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된 성벽이다. 발굴조사나 고증이 없이 복원되는 바람에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여러 차례 수·개축 되면서 성벽에 축적된 시대별 토목기술의 특징이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진주성의 원형 경관을 회복하기 위한 계획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진주성의 초축 시기나 외성의 선형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해방 이후 진주성 내외부에 대한 발굴조사는 모두 합해야 10여 차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 내부에 대한 발굴로는 1997년 경상 우병영의 본관인 선화당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운주헌으로 추정되는 초석열과 연도가 확인되었다(국립진주박물관 1998) 2000년에는 진주성 내성의 정문인 공북문을 복원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시행되어 공북문의 육축 규모는 너비 8.3m, 높이 5.3m, 출입문의 너비는 4.6m인 것으로 확인되었다(경남문화재연구원 2000). 촉석루 남쪽 성벽과 의암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암반을 정지하고 흙과 기와편 등으로 기초성토 후 체성벽을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성벽 하부의 석축 시설은 성체의 기초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임진왜란 직후에 조성한 것으로 조사되었다(국립진주박물관 2002). 2014년에는 공북문 안쪽 광장에서 깊이 8m에 달하는 조선시대 우물지를 조사하고 정비하였다(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14). 2018년에는 대첩광장 조성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의 배수로와 고려시대 토성, 외성성벽의 잔존 유구가 확인되었다(한국문물연구원 2021). 중영 정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2019년부터 실시되어(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22) 우여곡절 끝에 2023년 전면 7칸 규모의 중영건물이 복원되었다. 2020년에는 북장대를 해체 정비하는 과정에서 초석 및 기단석의 위치 확인을 위한 발굴조사가 시행되었다(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20. 대첩광장 조성과 관련한 우·오수관 정비 구간에 대한 2022년의 발굴조사에서는 목책유구와 다량의 인골이 발견되었다(경상문화재연구원 2023).외성 구간에 대한 조사로는 2006년 조선시대 객사터 부근에 대한 발굴을 통해 객사의 부속건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동서문물연구원2006). 2011년 실시된 진주 중안동 유적에서는 대사지의 호안석축 석열과 기와가마, 우물 등이 조사되었다(경상문화재연구원 2011). 2010년부터 몇 차에 걸친 하수관거 공사와 관련한 입회조사를 통하여 남강로673번길, 비봉로24번길에서 외성 성벽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진주대로1032번길에서는 해자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기도 하였다(경상문화재연구원 2014). 2019년에는 중안동 15-11번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외성의 성벽 유구와 통일신라시대의 채토 수혈 등이 확인되었다(경상문화재연구원 2022). 진주성 외성의 선형은 그동안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밝혀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지적 원도를 바탕으로 외성과 진주목 관아지의 위치가 규명되었으며(박세원 2016) 진주성의 시기별 변화 과정도 파악되었다(김준형 2013). 진주성 관련 문헌자료와 고고자료 및 기존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자료집이 발간되기도 하였다(극동문화재연구원 2019) 이 발표는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진주성의 시기별 축성법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 군사유산으로서의 진정성과 완전성 회복을 위한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Ⅱ. 진주성의 역사적 배경과 축성 과정 1. 진주성은 가야성인가? 변한 12 소국 중 古淳是國은 대체로 낙동강 본류를 중심으로 하는 진주, 고성 사천 등지로 비정되고 있다. 각종 사서에 등재된 가야의 소국 중에서 弁辰走漕馬國, 居陀國, 上峙里國, 弁樂奴國의 중심지가 진주로 비정되기도 한다(천관우 1976, 262쪽). 일반적으로 가야 소국의 중심부에는 공통적으로 대규모 평지성이 위치하고 중심부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간선도로의 길목에 산성들이 분포되어 있다. 왕성으로 추정되는 가야의 평지성들은 수상교통이 양호하고 해발 40∼50m 정도로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지점에 있다. 성곽은 토성으로 축조되었으며 둘레는 1∼2km 정도이다. 왕성 주변에는 왕릉이나 최상급 수장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중대형 고분군이 분포되어 있다(심광주 2023, 54쪽).이러한 기준에서 본다면 진주성은 가야의 왕성이 입지할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수운이 편리한 남강에 접해 있으며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구릉상에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수정봉·옥봉고분군이 배치되어 있고, 조금 거리가 있지만 상봉동·중안동·이현동 고분군, 가좌동 고분군과 우수리 고분군, 내촌리 고분군 등 상당한 규모의 가야 고분군이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진주성이 가야성일까?562년 대가야 멸망 이후 신라는 가야 영역으로 진출하여 각 지역에 거점성을 쌓았다. 함안 성산산성이나, 거제 둔덕기성, 남해 대국산성 등은 모두 신라 산성이다. 진주성도 이 시기에 쌓은 신라성은 아닐까? 문무왕 3년(663) 장군 欽純과 天尊이 백제 거열성 취하고 居列州를 설치하였다. 7세기 중반경에는 진주를 포함한 서부 경남 일대는 신라에서 다시 백제 영역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진양지』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각종 지지자료에서도 진주는 본래 백제의 居列城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주성이 백제성일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들을 어느 정도 해소하게 된 것이 대첩광장에 대한 발굴조사이다. 발굴조사 결과 조사 지역에서 통일신라의 도시 관련 배수로 유구, 고려시대의 토성, 그리고 진주성 외성벽 유구가 확인되었다. 가야나 백제, 신라 관련 유구나 유물을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한국문물연구원 2021). 대첩광장 지역은 초축 당시에도 진주성의 내부에 포함되어 있었던 지역이었다. 서장대나 북장대 등 해발고도가 높은 지점에서 선대의 유구 발견 가능성은 여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조사 지점은 진주성의 다양한 역사적 층위를 볼 수 있는 핵심 지점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성내의 선화당지나 촉석루 부근 성벽 조사, 조선시대 우물지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도 통일신라 이전 시기의 유물은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자료만 보면 진주성은 가야나 백제, 신라와는 관련이 없다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진주 일대에도 가야나 백제, 신라 성곽은 전혀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 진주시의 성곽은 무려 21개소에 달하지만, 진주성과 전송대산성을 제외하면 정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대부분 축조 시기를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주시에 소재하는 성곽은 3개의 군으로 분류하여 Ⅰ군은 임란당시 왜군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송대산성, 장군대산성, 하촌리 산성, 매화산성, 작당산성, 마성리성지, 보잠산성, 방어산성), Ⅱ군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한 왜성(망진산성, 장단산성, 호탄동성지), Ⅲ군은 1차진주성 전투시 왜곽 지원군이 축성한 성(장단산성, 녹도산성, 덕곡성지, 외율리성지, 제석산성, 내촌리성지) 등으로 분류한 견해도 있다(홍성우 2014, 88~89쪽). 타당한 견해라고 판단되지만, 인접 시군에서 확인되는 성곽의 시기적 다양성을 고려하면 진주시에 소재하는 모든 성곽을 임진왜란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성곽의 성격이나 축성 시기를 규명하기 위한 정밀 조사가 조속히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2. 통일신라 시기 康州의 설치와 진주성 문헌에서 晉州라는 지명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삼국사기』 신문왕 5년(685) 기사이다. ‘居陀州를 나누어 청주를 설치하였다. 경덕왕 때 이름을 바꾸어 강주(康州)라고 하였다. 지금의 晉州이다‘고 하였다. 또 다른 기록에는 ‘거열주에 청주를 설치하여 비로소 9주가 갖추어졌다. 대아찬 福世를 총관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신라의 주(州)는 현재의 도와 같은 광역 행정구역이다. 거열주의 기원은 하주(下州)이다. 6세기 중엽 하주의 치소는 비사벌에 있었다가 가야멸망 이후 565년 대야(합천)로 옮겼으며 642년 대야성 함락 이후 압량(경산)에 설치되었다. 660년 백제 멸망 이듬해에 다시 대야로 옮겼다가 663년 거열(거창)로 옮기는 등 군사적인 상황에 따라 계속 이동되었다. 영토확장으로 거열주의 영역이 서부 경남지역뿐만 아니라 전북지역까지 포괄하게 되자 665년 거열주와 삽량주(양산)를 분리하였다. 신문왕4년(684)에는 고구려 유민이 金馬渚(익산)를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685년 거열주를 분할하여 전북지역에 완산주, 서부 경남지역에 청주를 설치하였다. 菁州의 치소는 진주였다. 경덕왕 대에 청주의 명칭을 康州로 변경하였으며, 혜공왕 대에 다시 청주가 되었다. 당시 강주는 직할 현인 가수현과 굴촌현을 포함하여 남해, 하동, 고성, 함안, 거제, 궐성(단성), 천령(함양), 거창, 고령, 강양(합천), 성산 등 11개 군과 30개의 현을 관장하고 있었다. 신라는 점령지역에 거점성을 쌓았으며, 군현제로 편제된 이후에는 거점성이 치소성으로 기능하였다. 치소성은 해당 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기능을 하였으며 유사시 피난성으로도 기능하였다. 주의 치소성은 치소에서 가까운 곳에 석성으로 구축되었으며 둘레 1.2∼3km로 군성이나 현성보다 큰 게 축조되었다. 7세 기대의 신라성은 화강암 가공성 돌과 지대석, 퇴물림 쌓기와 편축식 성벽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신문왕 대에 완비된 9주에는 유일하게 강주에만 치소성이 확인되지 않았다. 진주성을 중심으로 사방 10km 이상으로 범위를 넓히더라도 강주의 치소성이라 볼 만한 통일신라 산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거의 유일한 가능성은 발굴을 통해 진주성이 강주성으로 밝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첩광장 조성부지에 대한 발굴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성벽 유구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토성 기저부 성토층에서 청자편과 고려시대 기와편이 출토되어 토성은 고려시대 이후에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를 고려하면 아직 이유는 알 수 없지만 9주 중 강주에는 치소성이 설치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9주의 치소는 인구와 물자가 집중되는 지역 중심지였으므로 고대도시가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진주도 경주나 상주처럼 통일신라 때에 조성된 격자형 가로망을 갖춘 도시가 조성되었다. 가로망의 중심축은 북에서 약 15°편서 하도록 계획되었으며 한 구획의 크기는 남원소경과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박태우 1987, 35쪽). 대첩광장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도 남-북 도로망이 연결되고 동-서 방향으로 설치된 배수로 유구가 확인되어 토성이 구축되기 전에 坊里가 구획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한국문물연구원 2021, 444쪽). 외성 구역인 중안동 15-11번지 유적에서는 다수의 통일신라시대 채토수혈유구가 조사되었다(경상문화재연구원 2022, 111쪽). 따라서 대첩광장을 포함한 진주 구시가지 일원에 통일신라시대의 계획도시가 설치되었다는 견해가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2. 고려시대 진주성의 초축과 입보용 산성 고려는 건국 이후 태조 23년(940)에 전국 부목군현의 명칭을 개정하였다. 菁州는 다시 康州가 되었으며 성종 2년(983)에 12목을 설치하면서 비로소 진주목으로 변경되었다. 성종 14년(995)에는 唐制를 본받아 역로 중심의 10도제를 실시하였다. 진주는 山南道에 속하는 24개역과 10주 37현을 관장하게 되었다. 고려는 초기부터 부목군현에 성을 쌓고 치소성을 설치하였다. 고려의 치소성은 대부분 기단석축형 판축토성이라 불리는 토성이었다. 기단 석축형 판축토성은 토성 기저부에 2열의 석열을 배치하고 판축공법으로 쌓았다. 대첩광장에서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바로 기단석축형 판축토성 유구가 확인되었다. 토성은 석축성벽의 선형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이어지다가 촉석문에서 130m 지점에서 회절하여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토성은 통일신라 배수를 관통하고 있으며, 토성벽 조성층에서 고려 초기의 기와편과 청자편이 다수 확인되었다. 조사단에서는 토성의 초축은 10세기, 수축은 12세기 이후로 추정하였다(한국문물연구원 2021, 450쪽) 흥미로운 것은 2022년 대첩광장 북쪽의 우·오수관 정비구간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목책 유구와 함께 구상유구에서 16개체에 달하는 인골이 출토되었다. 인골들은 모두 둔기에 맞아 타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경상문화재연구원 2023, 34쪽). 이 인골들을 928년 여름 5월에 견훤이 몰래 군사를 내어 康州를 습격하여 300여인을 죽였다는 기사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목책은 당시 토성이 구축되기 전의 임시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골이 발견된 층위는 통일신라 문화층과 함께 토성보다 아래층이므로 이 발굴 역시 통일신라 시기에는 토성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고려시대의 진주성과 관련된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하륜(1347-1416)의 城門記가 핵심 자료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하륜이 젊었을 때 이미 토성이 있었으며 1379년 진주목사 김광중이 석성으로 개축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수축된 성곽의 둘레는 하륜은 800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종 때에 간행된 『경상도지리지』에는 ‘진주읍성 둘레 726보 4척이며 내부 넓이는 12결 38부이다. 못3개와 우물3개가 있다’고 하여 河崙이 제시한 것보다 구체적인 수치가 제시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경상도지리지』, 『경상도 속찬지리』에 수록된 성곽의 둘레는 모두 步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의 1보는 布帛尺 6척을 기준으로 하였다(김준형 2013, 75쪽). 포백척의 단위 길이는 46〜48cm로 시대에 따라 약간의 오차가 있지만,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포백척은 황종척의 1척3촌4푼8리’ 라 하였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하면 포백척 1자의 길이는 대략 46.7cm로 환산된다. 고려시대 후기에 석성으로 수축되어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었던 진주성의 둘레는 726보 4척으로 포백척으로 4,360척이다. 포백척 4,360척은 2,075m 환산된다. 따라서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고려시대 진주성의 둘레는 2,100m 내외 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진주성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륜의 城門記를 참고할 수 있다. ‘성문 셋을 설치하였는데, 서쪽은 義正門, 북쪽은 智濟門, 남쪽은 禮化門이라 하였으며 문위에는 樓가 있었다. 올라서 사면을 돌아보니 菁川이 서쪽을 둘렀고, 긴강(南江)이 남쪽에 흐르며 品字가 동쪽에 벌였다. 세곳 못물이 북쪽을 돌아 모인다. 성과 못 사이에 참호를 파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와서 꺾여 또 남쪽으로 가서 강에 이르는데 형세의 장함이 진실로 성의의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할만하였다. 성이 완성되자 왜구가 다시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여 온 경내가 편안하였다 이 내용에 의하면 고려시대 말의 진주성은 한국문물연구원의 제시안처럼 대첩광장 북측에서 바로 내성으로 이어졌다기보다는(한국문물연구원 2021, 452쪽), 북쪽으로 대사지까지 이어진 이후에 북장대쪽으로 연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김준형 2013, 80쪽). 조사단에서는 토성의 선형을 따라 석성으로 개축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토성의 외벽부가 대부분 유실되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의문은 고려 우왕 5년(1379) 당시 개축된 석성 축성법의 실체가 어떠한가 하는 점이다. 이는 조선 초기 남해안 일대의 읍성 축성법과 연계되어 있으므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조선 초기 읍성의 축성법이 고려시대의 축성법을 계승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토목기술이 적용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고려말에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연해 읍성을 중심으로 고려 초기에 쌓은 다수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진주성은 1379년 知密直 裵克廉(1355-1392)이 진주에 와서 목사 金仲光에게 명하여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게 하였다. 개축 도중에 왜구들이 몰려와서 江城郡山城으로 피신하여 중단되기는 하였지만, 왜구를 물리친 후 다시 성을 쌓아 완성하였다. 이 시기에 개축된 석성의 규모를 보면 치소의 격에 따라 규모를 달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통적인 특징은 기반층을 굴착하고 할석과 점토로 기저부를 조성하고 말목으로 지정하였다. 그 위에 1m 내외의 장대석을 사용하여 지대석을 놓고 10~30cm 안쪽으로 들여서 기단석을 놓았다. 기단석은 90-180cm 크기의 대석을 세우거나 눕혀 쌓고 그사이에 깬 돌로 채웠다. 내벽은 방형으로 가공한 석재를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린 구조이다. 성벽 기저부의 너비는 6m 정도이다. 대첩광장에서는 약 100m 정도의 석축 성벽이 확인되었다. 성벽의 너비는 12m 정도이고 잔존상태가 양호한 성벽의 높이는 6m 정도이다. 그중 가장 높게 남아있는 B 구간의 성벽은 초축 이후 2차의 대대적으로 개축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제일 하단부의 성벽은 하부를 잡석으로 다지고 그 위에 얇은 판상의 지대석을 설치하고 외면에서 안쪽으로 10〜12cm 정도 안쪽으로 들여서 크기 1〜1.8m에 달하는 대형의 기단석을 세워쌓거나 눕혀쌓기 하였다.대형 기단석 위에는 크기가 기단석보다 작은 부정형 석재로 쌓은 3~4단의 성벽이 확인되며 그 위에는 장방형의 가공성돌로 정연하게 쌓은 성벽이 확인된다. 명문 기록으로 볼 때 제일 상단부의 성벽은 조선 숙종대를 전후로 하는 시기에 수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에는 거란, 몽골 등 이민족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고려에는 토성을 위주로 하는 평지 치소성을 주로 쌓았지만, 몽골의 침입이 지속되면서 읍치에서 가까운 곳에 대규모 입보용 산성을 쌓고 유사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때 쌓은 입보용 산성은 높고 험준한 곳에 대형으로 쌓았으며 부정형의 할석을 사용하여 담장 형태로 쌓았다는 특징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 진주의 입보용 산성은 松臺山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대산성은 진주성에서 동쪽으로 13.5km 지점에 있으며 해발 291m의 산상에 있다. 둘레는 2.1km이다.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성내에서 창고로 추정되는 대형 석벽건물지가 조사되었다(경남문화재연구원 2007, 14쪽).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송대산성의 둘레가 760보라 하였다. 1보를 포백척(0.476m) 6자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송대산성의 둘레는 2,016m로 측량 결과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경상남도 기념물 지정 시 전송대산성이라 하였으나 이제는 傳자를 떼고 송대산성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하륜의 「성문기」에 보면 ‘왜구가 침입해 오자 江城郡山城으로 피난하였다는 내룡이 있다. 비록 성이 좁고 지세가 높아서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고, 치소에서 거리가 멀어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하였지만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 때에는 송대산성보다 강성군산성이 진주성의 입보용 산성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성군산성은 산청군 백마산성을 지칭한다. 백마산성은 황강변의 해발 286m 지점에 있으며 둘레는 150보(428m)로 송대산성에 비하여 매우 협소하며 진주성에서 직선거리 17.4km로 거리도 송대산성보다 훨씬 멀다. 그러나 남강 하류에서부터 강을 따라 올라오는 왜구를 피하려고 적의 이동 경로에서 더욱 먼 곳에 있는 백마산성으로 피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3. 1591년 임진왜란 직전의 성곽 증축 진주성은 고려말에 석축 성벽으로 개축된 이후 조선 초기까지 경관이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종 원년 충청 전라 경상도 체찰사 鄭苯의 보고서에도 진주성은 추후 축성이 필요한 성으로 분류되었다.. 세조 4년에도 진주성 축성 문제가 거론되어 세조7년(1461) 개축 되지만 성벽의 규모나 축성법의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직전에 진주성의 경관은 크게 변화되었다. 선조 24년(1591) 경상도 관찰사 金睟가 진주성이 좁다고 조정에 보고하여 동쪽으로 성의 범위를 확장하여 쌓게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모습이나 둘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다만 동쪽 부분은 저지대의 습한 진흙땅 위에 축조되어 방어의 어려움이 있었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모습에 대해서는 『진양지』에는 동문 밖에 ‘加坊堤堰’이 있는데 임진년(1592)에 파서 성의 해자로 삼았다는 기록과 일제강점기의 지형도를 근거로 선형을 추적한 김준형의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복원 도면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둘레는 대략 2,750m로 측정된다(김준형2013, 80~85쪽). 그런데 발굴조사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수축 성벽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대첩광장 구간에서 확인된 3시기의 서로 다른 축성법 중 어떤 유형의 축성법이 적용되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후대의 성벽과 중첩되지 않는 가방제언 구간의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4. 1603년 내성의 축조와 성벽 개축 임진왜란 직후 합포성에 있던 우병영은 진주로 옮겨졌다. 진주성은 형세가 험고하여 방어하기 좋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선조 36년(1603)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李守一이 병영을 진주로 옮기고 진주목사를 겸하게 되었다. 진주로 병영을 옮긴 직후부터 성을 개축하기 시작하여 1605년에 완료하였다. 이때 촉석과 官碣의 양 언덕을 잇는 내성이 축조되었다. 그 이전까지 진주성은 내외성의 구분이 없었으며 모든 성이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이때 비로소 내성이 축조되어 내성과 외성이 구분되었다. 유사시 외성이 함락되더라도 내성에서 다시 방어할 수 있도록 하여 방어력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외성 구간은 이전의 관찰사 김수가 쌓은 성이 너무 넓어 방어가 힘들다고 여겨 僉正 李珣의 집터까지 안쪽으로 물려쌓았다. 이때 수축한 성벽은 조선시대 후기 진주성의 선형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이 성벽이 20세기 초까지 원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근대의 지적도에서도 흔적이 확인되고 있어 성벽이 선형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도 병영 설치 이후 수축된 진주성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지도서』의 우도 병영 절도사영조에 비교적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내성과 외성의 둘레와 높이는 丈尺과 尺, 그리고 步尺을 병기해 놓았다. 내성의 둘레는 193장, 1,930척, 386보, 외성의 둘레는 1,033장, 10,330척, 2,066보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 시기의 척도는 1장은 10척이며, 1보는 5척을 기준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자의 길이를 주척(0.208m)으로 환산하면 내성의 길이는 401m이고 외성의 둘레는 2,149m가 된다. 그런데 원래 선형을 따라 복원된 내성의 길이는 478m이고 추정 외성벽의 실측치는 2,580m에 달한다. 내성과 외성 모두 실제 규모와 추정 규모 사이에는 20% 정도의 오차가 발생한다. 실측치를 기준으로 치수를 역으로 환산하면 1자의 길이는 0.249m가 되어야 하지만, 이런 척도는 없다. 따라서 매우 정확해 보이기는 하지만, 『여지도서』에 수록된 1보의 길이에 착오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여지도서』는 1757년부터 1765년 사이에 간행되었고, 『화성성역의궤』는 약 30년 후인 1794년에 간행되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周尺 으로 6척이 1보가 되고 營造尺으로는 3척8촌이 1보가 된다. 아래도 모두 이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경기문화재단 2005, 35쪽). 1보의 길이를 주척 6척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내성의 길이는 481m, 외성의 길이는 2,578m로 추정치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까지 남아있던 진주성의 규모는 2,149m가 아니라(김준형 2013, 89쪽) 이보다 약 429m 정도 큰 2,578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쉬운 것은 내성 구간에 대한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내성 성벽의 축성법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내성 구간은 1605년 축조되었다. 일제강점기 사진 자료에 의하면 내성 성벽에는 잘 가공된 돌들이 사용된 양상이 확인되므로, 내성 역시 숙종대에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진주성 정화 사업으로 내성이 대부분 원헝을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원성벽이 남아있는 일부 구간에서 확인되는 성돌은 대첩광장 성벽의 중간 성벽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추후 정밀 조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5. 1680년 숙종대의 성벽 수축 진주성의 수·개축은 조선시대 후기에도 여러 번 이루어졌지만, 대대적인 수축은 숙종대에 이루어졌다. 숙종 6년에 이루어진 수축 공사의 흔적은 진주성의 전 구간에서 확인되고 있다. 숙종대에는 축성법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 전통적인 축성 기술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화약 무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고안된 새로운 축성 기술이 더해졌다. 숙종 대왕의 재위 초부터 시작된 많은 축성 사업을 통하여 배출된 전문인력과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이 되었다. 숙종대의 성돌은 화포공격에 견딜수 있도록 크고 무거운 성돌이 사용되었다. 성돌의 형태는 직육면체에 가까우며 모서리를 가공하고 줄정다듬을 통한 표면가공이 특징이다. 성돌과 성돌은 서로 맞물리도록 그랭이질을 하였으며 화강암 성돌이 주로 사용되지만, 진주성에서는 인근의 기반암이 퇴적암 지형이고 화강암을 구하기 어려운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사암이 주로 사용되었다. 기저부에는 지대석을 설치하고 매단 퇴물림을 하지 않고 경사 쌓기로 하여 기어오르기 어렵게 하였다(심광주 2017, 127쪽). 체성벽과 여장 기단석 사이에 미석은 두지 않고 체성벽에서 약간 안쪽으로 들여서 여장을 쌓았다. 여장은 막돌로 쌓되 가운데에 근총안을 설치하고 양쪽에 두 개의 원총안을 배치하였으며 총안은 바닥을 강회로 마감하고 상부에는 얇은 판석을 덮었다. 여장 안쪽에는 城廊이라 불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여지도서』의 우병영 지도에서 보면 진주성에도 10개의 성랑이 확인된다. 표현이 약화되었지만, 정면 3칸 건물임을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숙종대의 개축양상은 명문 성돌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중 북장대 하단 성벽에서 확인되는 명문성돌은 ‘康熙十九年二月 安陰’, 공북문 서쪽 성벽에서 확인되는 명문 성돌은 ‘康熙十九年山陰馬兵中哨 泗川昆陽河東丹城咸陽六官一哨’ 의 내용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숙종6년(1680)에 사천, 곤양, 산음(산청), 안음(안의), 단성, 함양 등 인근 고을의 군사들이 동원되어 진주성을 수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광주(한국성곽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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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지러우면 악덕 무당이 판친다. 제법 괜찮다는 길목엔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색천을 매단 대나무를 대문간에 세워두고 안방엔 신당을 차린다. 소위 신군(神君)을 자처하는 그들은 세상 살이 다급한 민초를 대상으로 혹세무민한다. 그리고 마치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판관처럼 행세한다. 보편적 인식이 그렇다는 말이다. 비단 무당에만 그치지 않는다. 조폭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패밀리’의 머릿수가 곧 ‘힘’인 이들은 ‘대부’의 그늘에서 복
‘잣대’라는 말이 있다. 길이를 재는 자로 사용되는 대막대기 혹은 나무 막대기의 일종으로 통칭 ‘자막대기’라고도 부른다. 이 말은 자고로 도덕적인 행위나 사물의 기준을 재단하는 객관적인 근거로 인용되곤 했다. 흔히 ‘객관적이지 못한 일’이나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이 잣대를 기준으로 잘잘못을 가리곤 한다.그런데 이 잣대란 말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잣대가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객관적이지 못하며 형평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 ‘잣대’는 일부 소수 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