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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예술가, 옛것의 빗장을 열다 (3) 임정현 대표( 옛것을 여는 사람들 )

  • 작성자

    진주평론

  • 작성일

    2024.03.05 PM 15:13

  • 조회수

    166

청년예술가, 옛것의 빗장을 열다

진주에서 활동하는 청년예술가들이 처해 있는 현실은 어떤가?

임정현 대표 청년예술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조차 확산되어 있지 못한 것 같다. 지역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청년그룹이 존재한다는 정도의 인식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은 문화예술계에 있어 청년예술가로서의 존재보다는 각종 행사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청년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지역에서 많은 청년들이 예술의 길을 걷고 있지만, 늘 사각지대의 짙은 그늘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청년예술가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청년예술가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임정현 대표 청년예술가들은 줄곧 위기에 놓여 있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청년예술가의 위기는 곧 자립의 문제로 이어진다. 청년예술가들은 공통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일반적으로 생계 곤란, 취업문제, 예술계 진입장벽 등에 따른 사각지대로 내몰림 상황이 심화되고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늘날 일반 청년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떠안고 있다고 보면 된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문화예술계의 침체에 따른 영향도 적지 않다. 지역에서 문화예술계에 대한 지원사업이 있었지만 청년예술가를 대상으로 한 사업이라기보다는 지원사업의 스태프의 일환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생계의 위기도 위기이지만, 기존 예술계에 대한 진입장벽이 오히려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재 청년예술가들에게 필요한 정책은 간단명료하다. 우선적으로 일자리 창출과 관련한 정책 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청년예술가를 대상으로 시행되는 각종 지원사업의 한계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청년예술가의 사회적 역할과 공공성에 대한 인식 확대가 가장 절실하다."

 

청년예술가가 안정적으로 예술 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임정현 대표 청년예술가라면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을 함께 나누려는 어떠한 노력이나 시도가 있어 본 적이 없다. 늘 청년예술가들의 몫이자,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해묵은 과제이다. 오늘날 청년문제에 대한 관심과 각종 지원책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청년예술가를 위한 정책을 본 적이 있는가? 청년예술가도 청년이다. 이분법적으로 구분 짓는 행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청년예술가들에게 필요한 정책은 간단명료하다. 우선적으로 일자리 창출과 관련한 정책 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청년예술가를 대상으로 시행되는 각종 지원사업의 한계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청년예술가의 사회적 역할과 공공성에 대한 인식 확대가 가장 절실하다.

 

청년예술가에 대한 지원은 어느 정도인가?

임정현 대표 청년예술가를 대상으로 하는 지원은 사실 전무한 실정이다. 일반적인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사업에 청년예술가들이 일부분을 담당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는 표현이 어쩌면 더 정확할 것이다. 청년예술 지원에 있어 어떤 방법이 적합하고, 일자리가 어떻게 창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이다. 누구와 의논하고 우리가 갈 방향을 정해야 할지 사실 모르겠다. 따라서 지역문화생태계 속에서 청년예술가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혼란과 자기 전문성을 의심하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지원사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원대상이 되는 장르의 분절과 제한은 물론이고 소액다건의 형식적 분배와 같은 지원사업의 구조 속에서 청년예술가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청년예술가로서의 삶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하다.

 

청년예술가들의 활동이 갖는 의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임정현 대표 문화예술이라는 전체 담론에서 본 청년예술가의 활동은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맞다. 하지만 청년예술가들의 활동이 지역사회를 변화시킬 가능성 혹은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주었으면 한다. 1970년대 청년문화가 대한민국의 문화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지배적 문화에 대해 거부하는 운동으로서 1970년대 청년문화에 담론을 두고 청년예술가를 바라봐 주었으면 한다. 기존의 틀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청년예술가들에게 2020년대 청년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뜻이다. 청년예술가에 대한 지원만으로 청년예술가를 육성하고, 나아가 지역 문화예술계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청년예술가에 대한 인식변화와 지원체계를 동시에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청년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연마하고 꿈을 펼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청년문화가 대한민국의 문화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지배적 문화에 대해 거부하는 운동으로서 1970년대 청년문화에 담론을 두고 청년예술가를 바라봐 주었으면 한다. 기존의 틀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청년예술가들에게 2020년대 청년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뜻이다."

 

청년예술을 경제적 차원으로만 환원하고 관련 정책이 일자리 정책으로만 수렴되는 한계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임정현 대표 청년예술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차원의 문제를 배제하기는 어렵다. 청년예술가들도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청년예술을 바라보는 시각 측면에서 경제적 가치로만 환원하려는 시도가 불편하다. 청년예술뿐 아니라 다른 분야 역시 경제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문제는 청년예술을 전문분야로 판단하기보다는 경제적 가치라는 이윤이 창출되어야 한다고 믿는 인식이 문제다. 예술은 경제적 가치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예술이 가지는 또 다른 측면도 같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자리만 제공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청년예술을 고유한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하고 그게 걸맞은 각종 지원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일자리 정책은 수많은 청년예술정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우리 청년예술가들은 문화예술의 일부분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갓 도구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저변에 많이 깔려 있다. 지역에서 청년예술가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가장 시급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청년예술의 활성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임정현 대표 청년예술가들이 처해 있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논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정책적인 실천들이 그러한 다양성에 걸맞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혹시라도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짚어보는 기회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청년예술정책이 포괄적인 프레임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일반적인 청년예술정책에서 별도의 카테고리가 형성되지 못한 채 배제된 청년예술가들이 존재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지역의 상황에 근거해서 본다면, 청년예술가를 위한 정책은 없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우리 청년예술가들은 문화예술의 일부분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갓 도구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저변에 많이 깔려 있다. 지역에서 청년예술가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가장 시급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진주지역에 전통예술에 기반을 둔 청년예술가들의 현황은 어떤가?

임정현 대표 전통예술계에서 활동하는 입장에서 전체적인 청년예술가의 현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대체로 판소리, 농악놀이, 전통무용 등에서 활동하는 청년예술가들이다. 농악놀이의 경우 8명 정도이고, 판소리 쪽은 외부활동을 포함해서 8명 정도이다. 전통무용 쪽은 대략 5명 정도 되는 것 같다. 이외에도 각 분야에서 청년예술가들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옛것을 여는 사람들에서 활동하고 있는 회원 수는 50명 정도이다. 전통 분야에서 각자 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다.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친구는 대략 5~6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각자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옛것을 여는 사람들의 대표를 맡고 있다. 단체 소개를 해준다면.

임정현 대표 진주는 천년 역사와 문화 자산이 있지만 이를 활용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이제는 문화가 세상을 이끄는 문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진주의 천년 역사와 문화의 옛 문을 열어서 새로운 진주만의 콘텐츠를 발견하고 이를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로 만들어 가자는 차원에서 단체를 만들게 되었다. 원유를 캐서 가공하지 않으면 싼값에 팔리지만, 원유를 가공하면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내고 가치가 부여되는 것과 같다. 역사 자산을 지역의 젊은 청년예술가들이 캐내서 젊은 사람들의 감각으로 새롭게 가공하면 지역의 새로운 에너지로서 가치를 발할 것이다. 그것이 곧 청년예술가들이 만들어 내는 콘텐츠가 된다. 옛것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단체를 만들게 된 이유이다. 더불어 진주의 옛것을 젊은 사람들로 구성된 커뮤니티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고 만들어 간다면 옛것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진주만의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차근차근 준비해 나갈 생각이다.


"진주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양질의 공연 기회가 충분하지 못하다. 가끔 부산에 공연을 가면 솔깃한 제의를 받는 경우가 많다. ‘부산으로 오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진주지역 청년예술가들의 예술적 표현력은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진주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진주에 있다. 진주가 우리 청년예술가들의 삶터이고 텃밭이기 때문이다."

 

지역 청년예술가들의 주 활동 분야는 무엇인가?

임정현 대표 사실 분야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 현재 처한 상황에서 어떤 분야든 열심히 뛰어야 먹고살 수 있다는 분위기에 젖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진주성에서 개최되는 수성중군영 교대의식과 찾아가는 예술학교 강의, 전통예술공연 가운데 취타대와 판소리 그리고 전통무예를 하고 있다. 활동 분야가 다양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한 가지만 잘해서는 먹고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늘 배우면서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 지역의 청년예술가들의 현주소라고 보면 된다.


회원의 수는 얼마 정도 되는가?

임정현 대표 옛것을 여는 사람들에서 활동하고 있는 회원 수는 50명 정도이다. 전통 분야에서 각자 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다.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친구는 대략 5~6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각자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많은 청년예술가들과 함께 하는 단체로 발전시키고 싶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측면이 있다. 단체에 대한 관심도 적을뿐더러 지원사업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단체의 규모만 생각하기도 어렵다. 현재로서는 추진하고 있는 사업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단체의 활성화가 지원사업의 규모와 비례한다는 사실이 실망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고, 그 현실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앞서 말했듯이 청년예술가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지원정책이 마련되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전통예술이라는 전문 분야를 잇는다는 것이 사실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임정현 대표 진주의 전통예술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전통예술의 뿌리가 깊은 전통예술이 많다. 여기에 종사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런데 젊은 예술가들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기성 예술가에게 밀려나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설 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도전과 진취와 실험이라는 단어를 대표하는 청년예술가들이 갈 곳은 거의 없다. 양질의 직장도 없다. 타지역의 경우에는 공연의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는 반면 지역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인근의 창원만 가도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활동의 기반이 충분하다는 것은 그만큼 청년예술가들의 활동이 자유로운 만큼 창의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주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양질의 공연 기회가 충분하지 못하다. 가끔 부산에 공연을 가면 솔깃한 제의를 받는 경우가 많다. ‘부산으로 오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진주지역 청년예술가들의 예술적 표현력은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진주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진주에 있다. 진주가 우리 청년예술가들의 삶터이고 텃밭이기 때문이다.

 

청년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은 것은 사실이다. 향후 지역의 청년예술 활성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임정현 대표 사회적 인식의 문제는 양면의 칼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제도적으로 청년예술가들의 머리를 숙이게 만드는 지역의 정서가 문제이다. 지역에서 창의적인 예술 활동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인 문제도 상존한다. 개인적으로 청년예술인할당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청년예술가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일을 하면서 자긍심을 가지고 예술가로 남을 수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이 있으면 견딜 수 있다. 희망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청년예술 활성화를 위한 첫걸음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임정현 대표 청년기획단을 꾸리고 싶다. 청년문화네트워크 청년기획단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젊은이들이 참여하는 한편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맘껏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 지역의 새로운 청년문화를 만들어 내고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디딤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지역의 청년들이 문화예술의 도시 진주에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청년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청년들의 바람을 담은 청년문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 1970년대 청년문화가 지배적인 문화구조를 거부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낸 것처럼 말이다. 동시대 청년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마련해 볼 생각이다.

 

일각에서는 청년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기도 한다.

임정현 대표 아마도 정부에서 추진 중인 각종 지원사업에서 비롯된 일종의 역할론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청년예술가 지원사업으로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에 예술단체가 직접 찾아가서 공연, 행사 등을 여는 사업이 있다. 일반적으로 매칭형/기획형/청년형의 세 가지 부류가 존재한다. 그런데 청년형의 경우에는 청년예술가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그들이 직접 지역으로 파고 들어가 사회문제를 예술로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청년예술에 대한 지원의 정당성을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나 기대로 두고 이를 청년예술가가 수행하게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문제시되어 온 청년 일자리 창출 문제까지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한국에서 성장하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공적, 사적 교육과정에서 예술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교육받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예술이 어떤 점에서 사회의 한 요소로 존재하는지조차 제대로 학습해 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왜 유독 청년예술가의 작업만이 사회적이기를 기대하는 이유를 알기 어렵다. 청년예술가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예술적 재능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가기를 원한다. 사회적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가진 사회적 기능을 인정하고 제대로 된 지원사업이 먼저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청년예술가의 입장에서 향후 바라는 점이 있다면?

임정현 대표 우선 청년예술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적 지원사업을 놓고 무엇이 문화이고, 무엇이 예술이냐는 출구 없는 논쟁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문제는 이러한 사업들을 통해 동시대의 청년예술가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토론하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한다. 거창한 일자리나 사회적 가치 담론을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기획하고 수행하도록 요구해서는 안 된다.
청년예술가들이 구현하고 싶은 예술적 가치를 발현하도록 돕고, 그것이 사회적 이슈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만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청년예술가들의 활동을 인내심 있게 지켜보고 응원하는 마음만 가져준다면 청년예술가들은 만족한다.


"선대의 공헌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문화유산을 잘 이어받아 그동안 많은 발전과 규모를 확장시켜냈지만, 예산 운영, 연령 고령화 등의 한계에 이르러 진주시의 예산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입니다. 그리고 의암별제가 빠른 시일 내에 문화재로 지정받는다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옛것을 여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해 한마디.

임정현 대표 옛것을 여는 사람들은 청년예술가를 위한 공간입니다. 지역의 청년예술인들이 모여 청년예술가의 오늘을 확인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당장은 먹고사는 일부터 뛰어야 하지만, 청년예술가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도 쉬지 않을 것입니다.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계십니다. 청년예술이라는 생소한 인식도 점차 개선되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진주의 옛것을 열어서 새로운 진주의 콘텐츠를 만들어 나가는 일입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청년들만의 패기로 한번 해볼 생각입니다.
옛것을 여는 사람들이 새로움을 창조하는 날을 기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진주희망탐사|옛것을 여는 사람들 임정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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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우리의 역할 (2) 유영희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

의암별제의 여흥가무 속에는 교방의 많은 춤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의암별제야말로 교방문화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의암별제는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제례의식입니다. 조선 시대 예악을 중시하던 사회에서 제사에 가·무·악을 올리는 것은 최고의 예로 간주했습니다. 의암별제가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례의식이 끝나고도 3일 동안 이어지는 여흥가무는 바로 교방문화의 꽃이자 현대 문화축제의 효시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의암별제 복원을 통해 논개정신을 되살리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여성의 가무제례를 진주의 문화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평생을 헌신적으로 살다가신 스승 운창 성계옥 선생님의 유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의암별제의 여흥가무 속에는 교방의 많은 춤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의암별제야말로 교방문화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의암별제는 비록 진주교방의 기녀와 진주의 민관군이 주축이 되어 치른 제례지만, 우리 민족의 수난기에 전국에서 모여든 이들이 함께했던 민족적 성격의 축제였다는 점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의암별제의 복원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유영희 이사장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상실되면서 의암별제의 운명도 달라졌습니다. 당시 기생들은 조선말 의암별제에서 가무를 했던 노기들의 뜻을 받들어 향불이라도 피우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의암별제는 결국 일제 때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습니다.해방 이후, 의암별제는 복원되지 못하고 의기창렬회라는 단체를 통해 의기사에서 겨우 논개에 대한 제사만 지냈을 뿐, 의암별제는 전설 속으로 사라질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의암별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성계옥 선생의 의지는 남달랐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최순이 할머니로부터 진주검무를 직접 전수받은 성계옥 선생의 노력으로 의암별제 복원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의암별제에 대한 문헌이 국립중앙도서관 고문서 수장고에서 발견되었고, 정현석의 『교방가요』란 책을 입수하게 된 성계옥 선생은 사실상 의암별제의 복원을 결심하게 됩니다. 정현석이 지은 『교방가요』는 의암별제의 제례 과정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사실 복원에 있어 완벽한 복원을 가능케 했습니다.성계옥 선생의 수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1987년 『의암별제지』가 간행되었고, 이후, 논개제향에 대한 모든 사무를 이어받은 성계옥 선생은 진주민속예술보존회를 중심으로 의암별제 복원에 나섰습니다.그리고 1992년 의암별제가 촉석루에서 감격적으로 재현되었습니다. 국권상실로 단절된 의암별제가 8·15 광복 이후 처음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해 중양절(양력 10월 4일)에 개최된 의암별제에 대해 성계옥 선생은 “이번에 재현하는 의암별제는 바로 그 의기 논개를 위한 제례행사입니다. 제례이긴 하지만 봄가을에 제를 지내던 것과는 별도로 의암별제는 음악과 노래와 춤으로 원혼을 달래던 특별한 제사였습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의암별제의 복원은 민족정신의 회복이자, 진주의 문화유산으로 반드시 보전하고 계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현재 의암별제의 경상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등록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추진상황과 향후 전망은 어떻습니까?유영희 이사장 故 성계옥 선생의 열정적인 노력 끝에 1992년 복원된 의암별제는 올해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봉행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28년간을 선생님과 우리 회원들은 묵묵히 지켜왔습니다. 교방문화의 정수로서 문화재로 지정해 온전히 보존하여 계승시켜 나가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지만 제가 무지한 탓으로 아직도 지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암별제의 온전한 보존을 위하여 좀 더 자료를 체계화하여 문화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의암별제의 문화재 지정은 진주 문화예술의 위상을 정립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의암별제가 가지는 가치를 인정받는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故 성계옥 선생의 열정적인 노력 끝에 1992년 복원된 의암별제는 올해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봉행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28년간을 선생님과 우리 회원들은 묵묵히 지켜왔습니다. 얼마 전 진주교방문화의 활성화와 계승·보존을 위한 제언의 성격을 담은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찾아서’라는 언론사의 기획특집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후 진주교방문화 발전을 위한 어떤 움직임이 있었습니까? 유영희 이사장 진주교방문화를 발전시키고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진주에도 진주문화유산원의 설립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진주의 문화유산을 전승하고 보존하는 전문단체의 설립은 교방문화의 활성화 측면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진주민속예술보존회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개인적으로 창립을 앞두고 있는 진주문화유산원에서 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과 교방문화단지 조성 등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방문화단지는 진주의 교방문화를 한눈에 보고, 듣고, 체험할 수 있는 매우 필요한 시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교방문화의 산업화를 위해 교방음식 등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일은 교방문화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방문화연구소 등의 설립이 가능하다면 저희들도 적극 참여해서 진주교방문화 활성화에 일익을 담당할 생각입니다.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와 예술성을 맛볼 수 있는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대한 의견은 어떻습니까?유영희 이사장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성과 예술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진주교방문화단지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조성이 시급한 시점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진주교방문화라는 큰 정책을 민간단체에서 수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진주시와 국회의원 등의 정치권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할 것입니다.우선적으로 교방문화가 가진 예술의 전통성과 문화원형을 통한 프로그램의 개발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고, 경상남도 진주시청, 교육청, 지역주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한다면 분명히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해서는 대시민 인식개선 사업 등의 추진이 시급하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홍보를 전담하는 조직 등의 설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요?유영희 이사장 진주시민의 인식개선이 우선 이루어져야 되겠지요. 그 방법은 인식개선을 위한 교육과 홍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는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에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미디어 영상, 유튜브 등 다양한 홍보자료를 위한 전문 콘텐츠팀을 구성해 운영해야 교방문화를 세계적인 문화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향후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유영희 이사장 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해서는 교방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교방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지역시민모임 구성과 교방문화를 연구하는 교방문화연구소 등의 기관 설립, 마지막으로 교방문화의 홍보를 전담하는 홍보팀을 구성해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주시와 교육청의 노력과 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향후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유영희 이사장 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해서는 교방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교방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지역시민모임 구성과 교방문화를 연구하는 교방문화연구소 등의 기관 설립, 마지막으로 교방문화의 홍보를 전담하는 홍보팀을 구성해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주시와 교육청의 노력과 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진주민속예술보존회의 향후 역할이 있다면?유영희 이사장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와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포구락무를 비롯해 정재기본무, 고무, 향발무, 남무, 입춤, 살풀이춤, 소고춤, 장고춤, 지전춤 등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통악기 분야인 장고, 좌고, 대금, 피리, 해금, 가야금 등은 물론 가곡, 민요는 물론 대작품인 ‘의암별제’, ‘선악(배따라기)’ 또한 전승에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할 것입니다.선대의 공헌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문화유산을 잘 이어받아 그동안 많은 발전과 규모를 확장시켜냈지만, 예산 운영, 연령 고령화 등의 한계에 이르러 진주시의 예산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입니다. 그리고 의암별제가 빠른 시일 내에 문화재로 지정받는다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의암별제’가 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있도록 많은 지지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선대의 공헌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문화유산을 잘 이어받아 그동안 많은 발전과 규모를 확장시켜냈지만, 예산 운영, 연령 고령화 등의 한계에 이르러 진주시의 예산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입니다. 그리고 의암별제가 빠른 시일 내에 문화재로 지정받는다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진주희망탐사100|유영희 (사)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 진주희망탐사100은 진주지역 각 분야별 최고 의사결정권자 100인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를 통해, 진주의 희망을 찾아내는 공간입니다.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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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우리의 역할 (1) 유영희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

진주의 교방문화는 150년이 넘는 오랜 역사성과 예술성을 갖추고 있지만 교방문화(기생문화)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홍보 부족으로 인해 진주의 문화유산으로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방문화에 대한 정의를 내려 주신다면? 유영희 이사장 ‘교방문화’는 고려 시대 이후 교방에서 전래된 종합예술입니다. 반면, ‘기생문화’는 일제강점기 이후 형성된 일종의 사치 문화라는 점입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린다면 ‘교방문화’는 예절과 함께 가야금, 아쟁, 해금, 대금, 장고, 가사, 가곡, 시조, 검무, 아박무, 승무, 고무, 포구락무 등을 교육하는 종합예술문화로 말할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부터 전통을 이어받은 것을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교방이 설치되었고, 이를 통해 기녀들에게 악(樂)·가(歌)·무(舞)를 연습시키는 예인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해왔습니다. 각 지방에 감영이 설치된 곳에는 대부분 교방이 있어, 교육받은 기녀들은 지방관아에 모든 행사에 참여토록 했습니다. 또한 궁중에 큰 잔치가 있을 때면 지역 교방에서 예술이 뛰어난 기녀를 뽑기도 했는데 이를 ‘선상기’라고 합니다. 선상기는 목관아 교방의 예기(13세~14세)를 뽑아서 서울로 올려보냈다고 합니다. 그 예로 진주교방 출신 최순이 할머니가 마지막 선상기로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교방문화의 교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방 관아에서 행해지던 춤이 궁중으로 가고, 궁중의 춤이 지방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향발무나 아방무, 고무 등은 궁중춤이지만 춤의 교류에 따라 지방에 정착하게 된 경우입니다. 따라서 교방문화는 악가무를 갖춘 기녀들의 문화이지, 세속에서 말하는 ‘기생문화’는 아닙니다. 기생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구한말 고종 때 일패기생, 이패기생, 삼패기생으로 분류했는데 교방의 기생은 일패기생입니다. 종합예술인이 바로 교방의 기생입니다. 그래서 기생문화는 틀린 말입니다. 교방문화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일반 시민들은 교방문화를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문화말살정책의 하나로 시도된 기생문화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교방문화와 기생문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유영희 이사장 교방문화는 교방에서 연행되던 악가무(樂歌舞)와 시서화(詩書畵)를 포함한 종합예술을 말합니다. 고려 시대부터 시작된 예기들의 종합예술문화이자, 그 역사도 오래된 우리 고유의 문화입니다.최근 국립진주박물관에서 경남지역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모임인 ‘진주향당’ 주최로 「교방문화 그 풍류와 멋을 찾아서」를 주제로 심포지엄이 개최된 바 있습니다. 심포지엄에서도 기생과 공창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습니다. 대체로 교방문화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교방문화’를 ‘기생문화’라고 비하 발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민족의 전통성과 유구한 역사문화를 왜곡하고 단절시킨 35년간의 일제강점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 세월 동안 국민(시민)들은 진주관아에 교방청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일제가 예인집단인 교방의 학생 즉, 기녀들을 창기로 만들어 모든 국민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이 뿌리박히도록 변화시킨 것이 오늘날 이처럼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교방문화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를 지나면서 이른바 ‘기생문화’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자리 잡았고, 서구문화 유입 이후에는 기생=창기라는 인식이 고착화 되었습니다. ‘기생’이라 함은 일종의 ‘사치노예’라고 할 수 있으며 ‘기녀’는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라고도 흔히 말을 합니다. 이는 사회적 계급 분화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며 ‘기생문화’는 계층에 형성된 일부분의 지역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자료가 되는 문화원형을 의미한다면 ‘교방문화’는 역사성과 지역 정체성을 내포하면서 지역문화(악가무, 시서화)를 포괄하여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하는 데에 공헌한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주에서 처음으로 교방문화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운창 성계옥 선생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운창 선생이 말한 진주의 교방문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유영희 이사장 故 성계옥 선생은 1961년부터 진주검무를 배우기 위해 최순이 선생님과 강귀례 선생님을 만나 전수를 받기 시작합니다. 전수받을 때마다 최순이 선생님으로부터 교방과 궁중에서 행해지던 여러 작품들과 논개 제사인 의암별제와 선악 배따라기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평소 교방문화에 많은 관심을 보인 성계옥 선생은 지난 1975년 단국대학교 김동욱 교수를 통해 ‘교방가요’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성계옥 선생은 교방에서 행해졌던 의암별제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문교육학과에 입학합니다. 이후 교방가요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끝에 마침내 1987년에 『의암별제지』를 발간하게 됩니다.성계옥 선생은 지난 1986년부터 전국에 명성 높은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진주에 초청한 것은 물론 회원들에게 악·가·무를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성계옥 선생은 ‘유교식 제례를 교방의 기녀들이 지낸 사실’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이 교방문화이다”라는 말씀을 그때부터 하시게 된 것입니다.운창 성계옥 선생은 진주교방문화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십시오. 유영희 이사장 故 성계옥 선생은 천년 역사 도시인 진주의 교방문화 복원과 계승·발전에 평생을 바친 예인이십니다. 성계옥 선생은 지난 1982년 후진 양성을 위하여 전수회관을 설립했습니다. 전수회관 설립을 위해 사유지를 제공한 것은 물론 스위스의 한 사업가에게 기부를 받아 신안동에 전수회관을 건립했고, 2001년까지 (사)진주민속예술보존회 회원들의 연습실로 사용했습니다. 1987년에는 『의암별제지』를 창간했고, 1986년부터 1998년까지 13년간 교방문화 인적 인프라 구축을 위하여 단기(6개월) 시립국악학교를 운영했습니다. 진주지역의 국악관현악의 발전을 위해 비상임 국악단을 운영(1989년~1998년), 1991년에는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12호인 진주포구락무를 복원했습니다. 1992년에는 선생님의 염원이던 「의암별제」를 복원해 봉행했습니다. 2007년에는 「선악(배따라기)」을 복원하여 제48회 한국민속예술제에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받았습니다. 故 성계옥 선생께서 8년만 더 계셨다면, 늘 고민하고 계획하셨던 ‘향장무’를 발굴, 복원하는 데에 힘을 쏟았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의암별제 복원을 통해 논개정신을 되살리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여성의 가무제례를 진주의 문화유산으로 남기기 위해 평생을 헌신적으로 살다가신 스승 운창 성계옥 선생님의 유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의암별제의 복원은 진주교방문화의 꽃을 새롭게 피우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의암별제의 복원이 갖는 의의는 무엇입니까?유영희 이사장 의암별제(義巖別祭)는 매년 음력 6월에 길일을 택하여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기생들만이 치른 대규모 의식으로, 악공을 제외하고 제관(祭官) 등 모든 의식을 여자(기생)들이 주관하는 독특한 제전이며, 선비들의 음악인 정악(正樂)을 사용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하는 행사입니다.1868년 고종 5년 당시 진주목사이던 정현석은 진주병사(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의논하여 논개의 사당을 다시 중건한 뒤, 춘추상제와 별도로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논개에 대한 제향을 실시토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의암별제였습니다.기생의 문화와 국악에 관심이 많았던 정현석은 논개에 대한 불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제의와 가무로서의 의암별제를 만들었습니다. 조선 시대 종묘(宗廟)에서 역대 임금을 제사 지낸 종묘대제(宗廟大祭)나 문묘(文廟)에서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성인들과 한국의 유학자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제외하고서 이처럼 음악과 노래, 춤이 어우러진 제사의식을 치른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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