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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검절약·사회봉사 외길 추담楸潭 장충석張忠錫

  • 작성자

    진주평론

  • 작성일

    2024.03.05 PM 15:40

  • 조회수

    287

그의 삶의 원천이었던 세무사 생활에 한 치의 빈틈도 없었고, 어머니의 근검절약 정신을 이어받아 검소했으며,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 보다는 사회를 위해 사랑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은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은 채 자연으로 돌아갔다. 진주사람 추담 장충석은 그렇게 살았다.

경상남도가 경남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 100인’ 중의 한 사람인 진주사람 추담(楸潭) 장충석(張忠錫, 1922~2011).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오로지 ‘근검절약’과 ‘사회봉사’의 외길을 걸어왔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는 대한민국 제1호 세무사로서 한국세무사회의 창립멤버이자, 사회봉사단체인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단멤버로 47년간 봉사했다.
만학도(晩學徒)의 삶 역시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는 신선한 시도였다.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의 눈에는 지역의 인재육성이라는 새로운 삶의 목표가 들어왔다. 고희를 맞은 1991년에 추담장학재단이 설립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추담장학재단은 지금도 그의 뜻을 이어 지역발전을 위한 연구와 인재육성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경남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남도가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인상’을 수상한 것은 자랑스런 진주사람이자 그의 삶이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일이다. 추담의 행적은 캡슐에 보관돼 후세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그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사후에 경상대학교에 그의 시신과 장기 기증을 약속한 추담은 일일이 기록하기 힘들 정도의 봉사활동을 해왔고, 그 결과 2001년 ‘제1회 진주시민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리고 10년 후인 2011년 추담 장충석은 영원히 진주를 떠났다.
추담은 2001년 제1회 진주시민상, 2002년 대통령상, 2006년 경남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에는 제44회 저축의 날을 맞이하여 저축 유공자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저서에는 『삶의 지평』 『旅窓에 비친 南美大陸』이 있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끼니 때가 되어 거지가 찾아오면, 당신의 밥을 거지에게 주고 굶을 때가 많았다.’ 2007년 저축의 날을 맞아 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추담의 회고담이다.

 

자린고비 세무사

추담 장충석은 대한민국 제1호 세무사로서 한국세무사회의 창립 멤버이다. 1962년 2월 10일, 은행집회소에서 열린 한국세무사회 창립총회에서 133명의 회원 가운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세무사로서의 그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세무사로서의 삶을 시작한 그의 미래가 탄탄대로가 될 것임은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더군다나 1호 세무사라는 자부심과 그의 앞에 열린 탄탄대로는 무작정 걷기만 해도 부와 영예는 예약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진주에서 유명한 ‘자린고비 세무사’로 불렸다. 자신의 집에서 회계사무소까지 왕복 8km에 이르는 거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도보로 출퇴근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흔한 자동차 한 대도 사지 않고 평생을 걸어 다녔으니 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근검절약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추담의 어머니가 몸소 실천한 봉사하는 삶을 보고 배우며 자랐기 때문이다. 추담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끼니 때가 되어 거지가 찾아오면, 당신의 밥을 거지에게 주고 굶을 때가 많았다.’
2007년 저축의 날을 맞아 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추담의 회고담이다.
어머니의 근검절약과 봉사하는 삶을 배우고 자란 추담에게 ‘절약과 봉사’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흔한 자동차 한 대도 없이 도보로 출퇴근했던 그의 삶이 결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을 위해 살자’는 생활 신조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생활신조는 일상생활에서 철저히 실천되었다.
근검절약하는 삶을 산 추담은 무려 400여 개가 넘는 통장을 가질 만큼 넉넉했지만, 3천 원짜리 점심을 사먹을 만큼 그의 검소한 생활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절약하는 습관에 이어 그만의 재테크 비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세무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이후, 그는 진주의 한 금융기관과 거래를 했다. “한 금융기관과 거래를 하면 신용도도 쌓이고 VIP 대접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의 노하우다.
 

“일생을 두고 나 자신의 힘으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길 늘 기대해 왔다. 비록 만학도의 몸이긴 하지만 69세 되던 해에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낙후된 지방대학의 육성 발전을 위해 견실한 장학재단의 설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추담장학재단 설립

추담이 오로지 돈을 버는 데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평소의 경제관념을 알게 해주는 그만의 신념이 있었다. ‘돈 버는 자랑을 하지 말고, 돈 쓰는 자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린고비 세무사로 이름났던 추담은 이렇게 아껴 모은 돈으로 1991년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1991년 10월 고희연을 맞은 추담은 추담연구장학재단 발기인 총회를 열고, 12월 18일에는 1억 원을 출자해 재단설립 신청을 하면서, ‘추담장학재단’이 결실을 맺게 된다.
추담장학재단은 현재 5억 원의 출자금을 기반으로 지역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는 소중한 재단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1992년에 등록허가를 마친 추담장학재단은 이듬해인 1993년 제1회 연구비 및 장학금 수여식을 갖고 교수(2명)와 학생(12명)에게 총 1천만 원을 지급하게 된다. 이어 1994년에는 1,550만 원, 1994년에는 5,000만 원을 출자한데 이어 1995년에는 1,980만 원, 1997년에는 2,480만 원 등 지난 2001년까지 수혜금액은 2억 1,590만 원에 이르렀다.
추담이 별세한 2011년부터는 장학재단이 경상대학교로 이관되면서 ‘추담연구재단’으로 명칭은 변경됐지만, 추담의 설립 취지에 맞게 교수와 학생에게 연구 지원금과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추담은 추담장학재단 설립과 관련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생을 두고 나 자신의 힘으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길 늘 기대해 왔다. 비록 만학도의 몸이긴 하지만 69세 되던 해에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낙후된 지방대학의 육성 발전을 위해 견실한 장학재단의 설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추담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당시 추담이 가졌던 지방대학의 발전과 인재육성의 중요성. 그것은 만학도로서의 삶을 산 추담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만학도(晩學徒)의 삶

69세의 만학도 추담 장충석이 석사모를 쓰던 날, 그의 지나온 삶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자린고비 세무사에 저축왕으로 이름났던 추담이 만학도(晩學徒)로서의 새로운 삶을 걷게 된 이유는 여러모로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배움에 있어서는 청춘’이라는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던 건, 추담이 비교적 넉넉한 세무사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학문에의 끊임없는 욕구 때문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기회만 닿으면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고 말해왔던 추담은 끊임없는 업무와 노령으로 인한 건강 쇠약으로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1988년 경상대학교에서 1년 과정의 경영자반 학생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1년 정도면 늙은이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는 추담은 선뜻 마음을 내어서 원서를 제출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원서마감과 동시에 경영자 과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결국, 추담은 ‘큰 맘 먹고’ 석사과정에 등록을 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만학도로서의 삶은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경상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에 진학하긴 했지만, 칠순을 눈앞에 둔 노령의 몸으로 경영전공 서적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난생처음 대하는 영어는 큰 고민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담은 1학년 1학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추담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계속 장학생에 선발됐다. 그런 그가 떠올린 생각 하나. ‘나는 장학금을 받지 않아도 공부를 할 수 있는 형편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결국 추담은 자신이 받은 장학금을 가난한 학생에게 주기를 권하며 자신은 사양했다.
그의 만학도로서의 삶은 계속 이어졌다. 2학년 때는 그 어렵다는 종합시험도 거뜬히 통과한 추담은 논문심사도 무사히 통과했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은 「기업합병에 따른 세무회계처리에 관한 연구」이다.
1989학년도 학위수여식에 참석한 추담은, 69세의 최고령 학위수여자로 주위의 부러움과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만학도로서의 첫 꿈이 비로소 이루어지던 순간이었다.
추담의 학력을 보면 1946년 9월 30일 진주사범 교원양성학과 졸업, 1957년 경남대학교 졸업, 1990년 8월 25일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경영학석사) 졸업에 이어, 5년 뒤인 1995년에는 경남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세무사로서의 그의 삶이 그랬듯이 만학도로서의 삶 역시, 그에게는 하나의 끊임없는 도전이었고 결국에는 화려한 꽃을 피워냈다.

 

진주발전을 위한 그의 헌신도 적지 않았다. 이남두 진주시장 재임시절에는 ‘민간인 토지감정평가 위원’에 위촉돼 남강교~새벼리 도로 2차선 확장 공사 당시 강남동과 칠암동쪽 토지를 감정가로 매입하여 현재와 같은 4차선 보도를 설치하는데 공헌을 했다.

 

자랑스런 경남인

추담은 경상남도가 경남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선정한 ‘자랑스런 경남인 100인’에 선정됐다. 경남의 명예를 드높인 경남인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된 영예를 얻은 것이다. 그의 삶 곳곳에 깃들어 있는 교훈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린고비 세무사, 저축왕, 장학재단, 만학도로 대표되는 추담의 삶에 있어 또 하나의 흔적을 찾는다면 단연 ‘지역에 대한 봉사’이다.
1964년 국제라이온스클럽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립 멤버로 새로운 지역봉사의 지평을 열었다. 진주라이온스클럽 창단 이후 47년간 계속된 그의 사회봉사활동 경력은 아직도 모범사례로 남아 있다.
시내에 거주하고 있는 동거인 합동결혼식을 개최한 것은 물론 1991년 고희연 때에는 2명의 소년 소녀 가장에게 각 200만 원의 성금으로 국민주택에 입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민주화 시민정신운동과 관련해 김동길 교수 초청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의 정신문화 개선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1992년 4월에는 180만 원의 봉사금을 쾌척해 국제재단 Melvin Jones Fellow 회원이 되었으며, 1996년에는 경남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자랑스런 경남 100인’에 선정되어 캡슐에 그의 공적이 보관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진주발전을 위한 그의 헌신도 적지 않았다. 이남두 진주시장 재임시절에는 ‘민간인 토지감정평가 위원’에 위촉돼 남강교~새벼리 도로 2차선 확장 공사 당시 강남동과 칠암동쪽 토지를 감정가로 매입하여 현재와 같은 4차선 보도를 설치하는데 공헌을 했다.
또한, 진주시 지방세 심의위원으로 활동한 것은 물론 한국산업경제학회 고문으로 경제부분에서 활약을 하기도 했다.

 

삶의 지평

추담은 지난 1997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마지막 삶의 목표에 대해 밝힌 적이 있다. 평생을 근검절약과 봉사로 살아온 그의 마지막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만년에 배움에 대한 열의로 가득찼던 그가 가진 마지막 소망은 진주의 인재를 키우는 장학사업이었다.
추담장학재단은 그가 작고한 뒤에도 여전히 지역의 인재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고 있지만, 그의 속내는 진주발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연구자들과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이 밥을 하루에 한 그릇을 먹든, 두 그릇을 먹든, 죽을 때는 돈 한 푼 가져갈 수 없어. 쓸데없는 물욕이 사람을 망치는 길이야.”
추담의 말 속에는 욕심 없이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삶에 제법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진주에서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는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
그는 생전에 한 푼이라도 더 아껴 장학금을 만들고 싶어 했고, 그 장학금으로 지역발전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우수한 인재가 육성되어 장래 진주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했다.
추담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학구파였으며, 여전히 집에서 그의 직장까지 왕복 8km의 거리를 걸어 다녔으며, 3천 원짜리 소박한 밥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자린고비 세무사였다.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고, 매일 아침 세숫물을 변기에 부어 물을 아꼈던 추담. 평생을 세무사로 살았지만,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이라고는 땅 한 평도 없다.
그리고 추담은 자신의 시신과 장기를 경상대학교 의과대에 기증하기로 약속했고 실천했던 ‘아낌없는 삶’을 살았다.

 

추담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학구파였으며, 여전히 집에서 그의 직장까지 왕복 8km의 거리를 걸어 다녔으며, 3천 원짜리 소박한 밥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자린고비 세무사였다.

 

진주시민상 수상

진주시의 명예를 빛내거나 지역발전에 공이 있는 시민을 대상으로 수여하고 있는 ‘제1회 진주시민상’에 추담이 선정됐다.
진주시민상은 체육 및 지역발전에 공헌해온 사람에 대해 부문별로 시상을 해왔던 진주시문화상이 대상자가 줄고 권위가 없다는 지적에 따라 2001년부터 진주의 명예를 빛냈거나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을 선정해 시상하는 상이다.
추담이 처음으로 제정된 진주시민상에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어도 그가 걸어왔던 89년 삶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진주에 있었고, 그의 다양한 활동 역시 진주발전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축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뒤 그의 인터뷰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요즘 대학까지 애들 교육하려면 돈도 많이 든다는데 국민 저축률이 떨어져서 걱정입니다. 적게 벌더라도 아껴 쓰고 장래를 위해 반드시 저축해야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은 추담은 평생을 실천했다.
오늘날 자신만의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럴 때 추담 장충석이 걸어온 길을 한 번 되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는 그의 삶의 원천이었던 세무사 생활에 한 치의 빈틈도 없었고, 어머니의 근검절약 정신을 이어받아 검소했으며,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 보다는 사회를 위해 사랑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은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은 채 자연으로 돌아갔다.
진주사람 추담 장충석은 그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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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05
  • 작성자

    황경규

  • 조회수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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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회장 / 진주문화유산 해설사회

진주문화유산의 배움과 나눔 공간 진주문화재야행 해설 봉사 나서‘진주 문화와 역사’ 지킴이 자임 진주문화유산원(원장 강주기)의 중점사업 중의 하나인 ‘진주문화유산대학’ 수료생들이 진주문화 유산의 배움과 나눔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 모임을 결성했다. 진주문화유산해설사회, 일명 ‘문사회’이다. 진주지역 문화유산의 보호와 관리 및 학술연구와 해설사 활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문사회 이춘호 회장을 만났다. ▲ 문사회를 소개해 주신다면. 정식 명칭은 ‘진주문화유산 해설사회’입니다. 줄여서 ‘문사회’라고 합니다. 저희들은 진주문화유산원이 진행한 진주문화유산대학의 수강생들로 이루어진 모임입니다. 진주문화유산대학은 진주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체득하는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냥 지나쳤던 진주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천년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모임을 통해서 진주문화유산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작은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 ‘문사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게 된 동기가 있다면. 진주문화유산대학 과정을 통해 진주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속적인 공부의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 다들 공감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22년 진주문화유산대학 졸업생을 중심으로 공부를 조금 더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단체명을 진주문화유산 해설사회라고 한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진주문화유산대학을 수료한 뒤 진주문화관광재단이 주최하는 진주문화재야행에서 무료로 문화유산 해설봉사를 했습니다. 비록 배움의 시간은 짧았지만, 진주를 찾아온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문화유산을 알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진주문화유산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진주의 문화유산을 해설하는 자원봉사를 해보자는 뜻에서 문사회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15명의 회원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 진주에는 유사한 단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문사회의 향후 계획이 있다면. 경남도가 운영하는 문화관광해설사들도 계시고 진주문화원이나 여타 다른 민간단체에서 운영하는 해설사님도 많이 계신 것으로 압니다. 다들 지역의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을 갖고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많이 배우고 공부해서 실력있는 해설사가 되자는게 회원들의 뜻입니다. 일단 문사회 회원들은 진주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이 깊습니다. 관심도 매우 높구요. 저는 이것이 문사회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주문화유산대학을 통해 지속적인 배움의 과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조금 더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해설사가 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지금도 진주문화유산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해설사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춘호 회장은 회원들과 함께 지난 2023년 진주문화재야행 무료해설봉사를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진주문화유산대학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사실 진주문화유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저희들로서는 지난해(2022년) 진주문화유산대학에서의 강의는 일종의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주문화유산으로 보는 진주의 역사와 문화의 깊이는 생각 이상이었습니다. 아마도 수강생 거의 모두가 저와 같은 생각이었다고 봅니다. 12번의 강의를 통해서 진주에 대해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올해에도 모두 10번의 강의를 수료했습니다. 다양한 강사님들의 강의를 통해서 진주문화유산의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존과 계승의 필요성까지 알게 된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사실 요즘같은 시대에 진주문화유산대학 같은 강의 중심의 강좌는 인기가 없습니다. 시각적이고 체험적인 강의가 주를 이루는 시대를 살면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는 그리 와닿지 않는 부분이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진주문화유산대학을 듣는 수강생 모두가 강의 기간 내내 높은 참석율을 보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매우 소중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수강생들의 호응이 좋았던 것도 물론입니다. 개인적으로 진주문화유산대학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문화유산 해설사를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진주문화유산대학 과정에는 진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화유산에 대한 이론강의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의 중간중간에 문화유산 해설기법 등에 강의와 현장 해설도 포함되어 있어 해설사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다양한 강의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올해(2023년) 진주문화재야행 행사에 해설사로서 첫 발걸음을 했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최선을 다해 맡은 문화유산에 대해 공부하고 해설연습을 하면서 무난하게 행사를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촉석루, 북장대를 비롯해 5개 문화유산에 2명의 해설사들이 3일 동안 무료로 해설봉사를 했습니다. 사실상 해설사 데뷔를 한 셈이었습니다. 해설봉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부족한 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조금 더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어야 겠다는 결론에 이른 점이 성과라면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문사회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계획인가요? 지금은 진주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부가 우선입니다. 진주문화유산대학이 마련한 강의를 충실하게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해설사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를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진주향당에 주최하는 진주역사골든벨 행사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대회 준비를 하면서 진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다양한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회 준비 기간 내내 시간만 나면 메모를 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진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붙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축적이 진주문화유산 해설사로서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 향후 문사회의 활동계획이 있다면. 우선은 진주문화유산대학 강의를 통해 전문적인 지식을 계속 쌓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주역사골든벨과 같은 행사의 적극 참여로 개개인의 역량을 점검하는 시간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진주문화재야행의 문화재 해설봉사에도 참여할 생각입니다. 문사회가 문화유산해설사를 꿈꾸는 분들이 모인 공간이기 때문에 본래 목적에 맞는 활동을 꾸준히 해나갈 계획입니다. 그리고 진주문화유산에 대한 학술연구도 계획하고 있습니다.현재 회원들과 진주에 소재하고 있는 문화유산을 찾는 현장 학습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창렬사를 방문해서 청소도 하고 해설을 들으면서 해설사로서의 경험을 축적하고자 합니다. 회원 모두가 바쁘지만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 회원님들께 한 말씀. 개인적으로 진주문화유산해설사회의 결성에 힘을 주신 회원 모두에게 먼저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더불어 부족한 저를 회장에 선임해 주심에 보답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쏟아서 문사회의 발전을 도모하겠습니다. 회원님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문사회라는 모임 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신 진주문화유산원 강주기 원장님과 문사회를 위해 갖은 잡무를 마다하지 않고 계신 전종실 사무국장님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회원 모두가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해설사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겠습니다.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불어 늘 적극적인 동참으로 힘을 주시는 회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 2024-03-05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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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궁사 향촌할매 / 활과 함께 한 54년 여무사(女武士)의 삶 썸네일 이미지

여궁사 향촌할매 / 활과 함께 한 54년 여무사(女武士)의 삶

여궁사 향촌할매활과 함께 한 54년 여무사(女武士)의 삶 싱그런 봄바람에 몸을 실은 나비가 날개짓 하듯, 그의 궁체(弓體)는 화려함의 극치다. 과녘에 고정된 눈초리는 매섭고 날카롭지만, 시(矢)를 날린 후의 그의 모습은 비상(飛翔)을 앞 둔 나비의 몸짓이다. 그의 사법(射法)이 좌궁(左弓)인 탓도 있지만, 깍지손을 가볍게 떼며 뒤로 시원스럽게 내 뻗는 동작은 ‘아름다운 여궁사(女弓射) 궁체의 모범’이 되었다.여궁사(女弓射) 김미이(金米伊 73). 그의 호(號)는 향촌(香村)이고, 아명(兒名)은 향자(香子)이다. 사정(射亭)에서는 향촌할매로 통하며, 특히 궁체가 아름다워서 ‘나비 할머니’로도 불렸다. 그런 그가 2001년 8월26일, 납궁례(納弓禮)를 갖고 ‘활과 함께 한 54년 여무사(女武士)의 삶’을 마감했다. 병약한 소녀시절, 병마(病魔)를 이기기 위해 활을 잡은 그가 반세기가 넘도록 활약하던 무림(武林)을 떠나 자연인(自然人)으로 돌아간 것이다. 납궁례(納弓禮)란, 자신이 쓰던 궁시(弓矢)를 활터에 반납하고 ‘활 인생을 정리한다’는 뜻을 강호의 무사(武士)들에게 알리는 일이다. 흔히 납궁례를 금분세수(金盆洗手)라고도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황금대야 손을 씻는 의식’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무림의 모든 문파를 대표하는 무사들을 초청해 놓고 황금으로 된 대야에 손을 씻고 무림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날로 그는 무림에서는 신화나 전설 속의 인물로 격상되며, 이후 무림에서 맺은 모든 원한과 관계는 깨끗이 청산된다. 무릇 무협지에서나 나올법한 이러한 예절은 1939년 전주 천양정에서 행해진 이우봉의 납궁례와 해방이후 서울 백운정에서 납궁례(納弓禮)가 행해진 이후 반세기만의 일이다.김향촌 여무사는 ‘시작은 있으되, 끝은 없기 쉬운 강호’에 사습(射習)의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후배 무사들에게 궁도인(弓道人)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화려한 궁체(弓體)와 무수한 입상기록으로 찬사(讚辭)를 받았던 그가 54년간의 활과 함께 한 삶을 정리하고, 이제 국궁사(國弓史)의 새로운 한 획을 그은 것이다.향촌할매는 3년전만해도 스스로 각궁(角弓)을 얹어서 활을 쏘곤 했다. 그러다가 몇 년전에 집안에 골치아픈 일이 생겼다. 게다가 건강까지 악화돼 병원을 찾는 횟수도 많아졌다. 한 일 년여를 끌다가 집안 문제도 해결되고, 병도 차츰 나아졌다. 그러나 칠순 노인이 그 사이에 겪은 풍파는 대단한 것이었다. 향촌할매는 마침내 납궁례(納弓禮)를 하기로 결심했다. 납궁례(納弓禮)가 행해졌던 2001년 8월26일, 사천(泗川) 관덕정(觀德亭). 분홍 한복에 단정히 빗어 넘긴 짧은 머리의 향촌할매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평생을 자신과 함께 한 소중한 활과 전통을 관덕정 사두(射頭)에게 전했다. 19세 어린나이에 집궁한 뒤, 지금은 칠순 노인이 된 향촌할매의 54년의 기나 긴 활 인생이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활과의 운명적인 만남김미이(金米伊) 여궁사는 1929년 경남 사천시에서 경주 김씨 경팔(慶八)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한 그는 열 아홉살 되던 해인 1947년에 활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사천산성(泗川山城)에 위치한 관덕정(觀德亭)에서의 일이다.작은 체구에 병약한 체질이었던 그가 우연히 관덕정에 올라갔다가 활쏘기 하는 것을 구경하게 되었다. 당시 병명은 폐결핵. 병원에 다녀도 병이 쉬이 낫지 않았던 터라 부모님들의 염려도 적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동네사람들은 ‘곡소리’만을 기다렸을 정도로 불치의 병으로 여겨졌다.그런던 차에 당시 사범으로 활약하던 조삼동과 고종 오빠이자 총무였던 목영주의 권유를 받게 된다. 활쏘기가 건강을 유지하는데 최고의 운동이며, 특히 위장병에 아주 좋다는 얘기에 부모님들도 흔쾌히 승낙을 하셨다. 여자의 몸으로 활을 쏜다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렸으나 ‘병을 고친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당시 궁도는 대부분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시대였고, 권번기적(券番妓籍)을 가진 여성들이 활을 쏘긴 했지만 여성궁도 인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집궁(執弓)을 하게된 그는 처음에는 사천산성에 위치한 관덕정에 오르 내리는 일조차 힘겨운 날들이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올라 정(亭)에 가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큰 일과였다. 그래선지 활 시위를 당기는 것조차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우(射友)들은 1개월이면 충분한 활당기는 연습을 무려 일 년동안 계속했다. 더구나 남이 쓰다 버린 활을 대나무로 재활용해서 만든 활이기에 자신의 체력에 맞는 활을 가질 수도 없었다. 끝없이 계속되는 연습은 지겨움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주살질(줄살)’은 쉼없이 계속됐다.나중에 그가 ‘아름다운 여궁사 궁체의 모범’이 돼 체법상을 수상하게 된 것도, 입사 이후의 이같은 노력 덕분이다, 사법(射法)이 보기드문 좌궁(左弓)이었던 이유도 따로 있다. 병약하다 보니 자연 힘이 좋은 오른 손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좌궁(左弓)이 된 것이다.일 년여의 주살질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대(射臺)에 서서 활을 쏘지 못했다. 무려 145m 전방에 있는 과녘까지 화살을 날릴 만한 힘이 그에겐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과녘 40~50m 전방에서 활을 당기곤 했다. 그러기를 다시 일년 여. 드디어 그는 정식 사대(射臺)에 섰다. 그가 활을 잡은 지 2년만이고, 그의 나이 21살때였다.집궁 후 열심히 습사(習射)를 한 그는 90일만에 몰기(沒技), 즉 ‘5矢5中’을 했다. 몰기(沒技)란 5개의 화살(矢)이 모두 과녘에 명중하는 것을 말한다. 궁도인에게 있어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건강이 남다르게 좋아졌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병이 나았다는 말이 맞았다. 병약했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는 정식 사대에서 힘차게 시위를 당기는 진정한 여무사(女武士)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향촌할매의 납궁례(다음카페) 최고의 여무사 향촌할매‘궁도(弓道)란 낚시처럼 좀체 그 손 맛을 잊기 어렵다’는 말처럼 ‘활’은 그에게 있어 전부가 되었다. 처음 병을 이기기 위해 시작한 궁도였지만, 지금은 활만이 그에게는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10년여의 공백기간이 생겼다. “활은 낚시처럼 손 놓기가 어려웠다”는 고백처럼 한동안 활은 그에게 있어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당대의 가정이면 누구나 겪었던 생활고와 여러 가지 이유는 여무사(女武士)로서의 순탄한 길을 보장하지 않았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그가 활만 쏘며 편안한 생활을 하기에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던 것이다.무려 10여년의 세월을 기다린 끝에 40대를 훌쩍 넘긴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활을 다시 잡았다. 다소나마 안정된 생활과 비교적 넉넉한 사람살이가 다시 활을 붙잡게 하는 여유를 가져다 준 것이다. 그 때부터 본격적인 활쏘기가 시작되었다. 최고의 여무사가 되기 위한 그 만의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그가 처음으로 시지(矢誌)를 받은 것은 25살이었던 1954년의 일이다. 마산의 추산정에서 실시한 궁술대회에서 여무사 부문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후 그의 입상 기록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개인 우승만도 20여차례나 기록했다. 시지(矢誌)란 궁도대회에 나가 우승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장을 말한다. 평범한 사람이면 시지 1개를 받기도 힘든데, 그는 54년의 활 인생에 있어 무려 23개가 넘는 시지(矢誌)를 받았다.그의 주요 입상기록을 보면, 경무대경찰서가 주최하고 내무부치안국이 후원한 제4회 대통령친람전국무술선수권대회 우승을 비롯해 전주 천양정에서 주최한 제27회 전국남녀궁술대회 우승 등 무수한 입상기록을 갖고있다.사천에 적(籍)을 두었던 그가 진주(晋州) 창림정(倉林亭)으로 옮긴 것은 그가 44세되던 해이다. 대회마다 입상은 따 놓은 당상이었고, 그의 명성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갔다.그가 이처럼 각종 궁도대회에서 입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연습과 노력도 있지만, 명궁을 찾아가 그 기술을 전수 받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데 있다. 전국적인 명궁으로 이름 난 임종남 명궁 밑에서 2년여동안 받은 강습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1954년 전주대회에서의 일이다. 50여명의 여궁사가 출전을 했지만 관중(貫中)을 하는 궁사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우승은 그의 몫이었다. 이같이 각종 대회를 휩쓰는 성적을 내자 궁술대회장의 분위기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향촌할매’가 대회장에 들어서면, ‘그만 쏴라’는 치기어린 말과 ‘정말 잘 쏜다’는 찬사가 엇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자그마한 체구의 향촌할매가 활을 잡고 사대에 서면 관중들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그를 집중했다. 그리고는 찬사를 터뜨린다. “정말 멋진 궁체구나”그는 1998년에 전국대회 10회 우승을 축하하는 기념비를 창림정(倉林亭)에 세웠다. 1954년 서울 황학정과 1955년 전주 천양정 우승 등 10차례의 우승을 기념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념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궁도는 정신세계의 사람됨을 중시하는 전래의 수신덕목이다’ 아름다운 여궁사 궁체(弓體)의 모범향촌(香村)은 궁체가 특히 아름다워서 대회장에 나가면 사람들로부터 ‘나비 할머니’왔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이는 발시(發矢)할 때 줌손을 과녘쪽으로 밀고 동시에 깍지손을 아주 가볍게 떼면서 뒤로 시원스럽게 내 뻗는 동작이 마치 봄바람에 나비가 날개짓을 하는 모양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그래선지 그의 수상기록에는 항상 궁체상(弓體賞)이 뒤따른다. 누구나 받을 수 있지만 쉽게 받을 수 없는 상(賞)이 바로 궁체상이다. 향촌할매는 전주 천양정에서 개최된 제26회 전국남녀궁도대회에서 체법상(體法賞)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각종 대회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여궁사 궁체의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광주 관덕정에서 2년동안 강습을 받을때의 일이었다. 향촌할매의 집궁하는 모습에 반한 여궁사가 사천까지 내려와 사범을 청했던 일도 있었다. 향촌할매가 54년의 활 인생을 정리하는 납궁례(納弓禮)를 행한 뒤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궁도에 입문하는 이에게 몇가지 당부를 했다. “처음 활을 쏠때는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낚시보다 더한 것이 바로 이 뿔병인데, 활이 나가는 순간의 그 느낌은 경험해 보지 못한 이라면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사업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자중할 것을 권하고 싶다.”광주에서 강습을 받고 있을 때 천석꾼이었던 궁도인이 있었는데, 체법도 좋고 활도 잘 쏘았는데 결국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말았단다. 자신의 사업은 돌보지 않고 무턱대고 활에만 매달린 탓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활에 대한 애정은 납궁례를 한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보게! 활을 선택할 때는 센 궁을 선택하면 안된다네. 자신의 힘에 맞는 궁을 선택해야 자신을 다스릴 수 있어.”활의 역사상 보기 드문 풍속인 납궁례(納弓禮)를 행하고, 무림을 떠나 평범한 자연인으로 돌아간 향촌할매의 궁도에 대한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2024-03-05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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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의회 '진주교방문화연구회' 박미경 회장

진주시의회 연구단체인 진주교방문화연구회를 결성한 계기가 있다면. 진주의 교방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이 진주를 방문했을 당시, 진주검무를 비롯한 교방악가무의 상시공연 등을 통한 ‘교방문화 특화 지시’도 있었다. 진주만이 가진 진주교방문화를 활용한 특화관광도시 조성에 희망이 보였다.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늦다는 생각에서 연구단체인 진주교방문화연구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교방의 악가무 뿐만 아니라 교방음식과 교방복식, 교방기념품 등 교방문화를 활용한 관광콘텐츠 개발로 지역경제활성화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해주신 의원님들의 참여로 진주교방문화연구회를 결성했다. 진주교방문화연구회의 주요 활동을 소개해 주신다면. 진주교방문화연구회의 전문성 확보를 위한 사업부터 시작했다. 우선 교방문화 전문가 초청 을 시작으로 교방문화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정립하는데 주력했다. 교방문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없이 연구단체로 제자리를 잡을 수 없다는 의견에 따랐다. 전문가 초청 강연을 통해 교방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타 지역의 사례를 살피기 위해 선진지 견학을 실시했다. 그 결과 진주만큼 교방문화의 역사와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 이는 진주의 교방문화가 대한민국 교방문화의 본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주시의회의 연구단체로는 사상 처음으로 용역을 실시했다.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진주’를 만들고자 했다. 교방문화 관광특화도시의 개념이 대해 말해주신다면.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는 진주교방문화라는 진주 고유의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해 기존 지역의 산업과 연계하는 관광활성화는 물론 먹거리산업 등 지역경제활성화에 기여하는 도시를 의미한다. 진주교방문화는 교방악가무, 교방음식, 교방복식, 교방 문화상품 등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내재하고 있다. 교방의 악가무는 진주검무를 비롯해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고, 교방음식 또한 진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는 진주만의 먹거리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높다. 교방복식은 진주실크산업과의 연계를 통해 새로운 콘텐츠 개발과 미래산업으로의 활용가능성이 크다. 교방 문화상품 역시 교방문화 관광특화도시 조성을 위해 반드시 추진하고 키워내야 할 관련 산업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높다. 진주가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로 조성이 된다면 전국의 관광객들이 진주를 찾을 것이다. 진주의 교방문화는 희소성을 가진 문화자원이다. 오늘날 관광트랜드 역시 희소성을 가진 지역의 관광콘텐츠를 선호하고 있다.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기반으로 블루오션 문화관광도시 진주를 만들고 싶다. 어쩌면 진주 관광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 중요한 일이다. 타 지역의 교방문화 관광 자원화 사례가 있는가. 전국적으로 교방문화의 관광자원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부안군은 명기 매창을 소재로 테마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정읍시는 기생 소란을 주제로 고택문화체험, 밀양시는 기생 운심을 활용해 신안운심문화마을 조성과 운심검무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국외 관광 자원화 사례로는 일본의 게이샤문화를 들 수 있다. 지금 일본의 게이샤 문화는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자리잡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때 이미 타지역에서는 교방문화를 활용한 관광콘텐츠 개발에 역량을 쏟고 있다. 하지만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관광적 가치와 비교해 본다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진주는 이들 지역에 비해 교방악가무, 교방음식, 교방복식 등 종합선물세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진주교방문화를 특화해 전국에서 으뜸가는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로 만들어가야할 당위성을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주교방문화는 충분히 ‘K-브랜드’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진주 조성 용역을 통해 얻은 성과가 있다면.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말씀드린다면 진주교방문화의 진수를 담아내는 특화관광도시 진주 조성 필요성에 대해 크게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 진주의 관광콘텐츠가 진주남강유등축제 등 축제분야에 집중되면서 관광도시가 갖추어야할 필요충분조건인 다양성을 잃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주시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가장 관심이 높은 분야는 바로 교방음식이었다. 설문조사 참여자의 90%가 교방음식의 개발 필요성에 공감했으며, 교방음식을 활용한 밀키트개발 등 음식콘텐츠 개발도 필요한 것으로 응답했다. 이를 반영하듯이 현재 지역내에서도 교방음식에 대한 관심도 높다. 교방음식의 개발을 통한 지역 먹거리산업의 활성화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교방문화를 활용한 특화도시 진주 조성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있다면. 진주교방문화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진주시교방문화지원조례를 제정하는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조례제정의 필요성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진주시민은 70%, 관광객은 65%가 찬성의사를 밝혔다. 교방악가무의 상시공연과 교방음식 개발, 교방 문화상품 개발 등을 통한 교방문화활성화를 위해서는 관련 조례의 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진주시의회 차원에서 조례제정을 비롯해 교방문화활성화를 위한 제반 지원을 심사숙고할 생각이다. 물론 집행부에도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조성을 위한 노력을 주문할 생각이다. 진주는 교방문화의 본산이다. 그리고 진주에 와야만 교방문화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명분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진주교방문화가 K-BRAND를 선도하기 위한 조건이 있다면. 진주교방문화활성화를 위한 진주향당과 진주문화유산원 등 민간단체의 노력에 이어 진주시가 교방문화 활성화 기본 용역을 수립했고 이어서 진주시가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진주 조성이라는 실행계획을 수립했다.진주시의회 연구단체인 진주교방문화연구회는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진주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조성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용역 결과를 보면 교방문화활성화를 위한 4개의 목표와 전략이 세워졌다. 산업화(교방문화 창업), 관광화(관광자원화), 대중화(생활문화확장사업)가 바로 그것이다. 산업화로는 교방음식 경진대회, 교방음식 밀키트사업, 교방음식한마당 등이 제시되었다. 관광화는 진주논개제 등 지역축제연계사업으로 대한민국 검무 대전, 대중화는 교방문화 아카데미, 교방문화거리조성, 교방문화의 역사 정립, 글로벌화는 세계교방문화투어 등이다. 지금부터 진주교방문화가 K-BRAND를 선도하는 진주만의 관광자원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향후 계획은. -일단 교방문화 특화관광도시 조성을 위한 첫걸음은 관련 조례를 제정하는 일이다. 그 다음에는 진주 논개제 등 지역축제와 연계해 진주만이 가진 교방문화의 전통성을 대내외에 홍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교방음식을 개발함과 동시에 교방문화상품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할 일은 많지만,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주시와 진주시의회가 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진주는 교방문화로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도시로 거듭날 것으로 믿는다. 진주시의회 차원의 노력도 약속드린다.

  • 2024-03-05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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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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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 현양, 또 하나의 애국 오효정吳孝正

‘우리의 혼(魂)을 보존하는 사업이야말로 진정한 투자(投資)이며, 유산(遺産)이다.’한국과 중국의 역사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민족혼 현양사업이라는 오효정(吳孝正, 1941~ ).그가 실천한 남다른 역사인식과 겨레사랑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에겐 ‘광개토대왕의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사업차 중국 동북지방을 둘러보던 그는 지린성 지안시 광개토대왕비역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고, ‘광개토대왕비’가 잡초더미에 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 ‘광개토대왕은 신음하고 있었고, 쓰레기더미에 묻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가 사업을 제쳐두고 사재를 털어 광개토대왕 비를 정비하고, 10억 원대의 땅을 희사해 광개토대왕의 왕릉을 성역화 하고자 했던 이유이다.이후, 그는 한민족의 역사와 위상에 대해 고민하는 한편 민족혼 현양사업에 투신한다. 1999년에는 중국 길림성 옌벤시 연변대학교 뒷산에 ‘항일 무명영웅비’를 세웠다. 일제강점기 연변 동북3성에서 오로지 항일구국의 일념 하나로 일제와 싸워 이름 없이 산화한 영령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자 건립된 비(碑)이다. 일제의 억압에 맞서 싸운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뜻’을 가진 동포였기에 그에겐 ‘또 하나의 애국(愛國)’이었다.민족혼 현양에 이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일’도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당시 일본의 강제징용자와 종군위안부에게 가한 만행을 고발하기위해 사비 3,500만 원을 들여 『강제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이라는 책자를 발간해 무료로 배포했다. 그는 강의를 통해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민족정신 고취시키는 일에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그는 중국 화룡시 공무원 국내 위탁 교육생 2명을 위해 등록금 등 경비일체를 부담해 한국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노인을 공경하라’는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노인복지회관을 건립해 진주시에 기증하는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활동은 물론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발전기금으로 1억 원을 기탁하는가 하면, 남북통일기원 통일기금 1억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그의 ‘사회공헌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조각비’를 건립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민들이 항일운동을 펼치다 순국한 용사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내비쳤다.민족의 위상과 자존심을 지키는 일에 자신의 삶을 희사한 오효정.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그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역사는 미래다한국과 중국의 역사논쟁이 활발하던 당시, 고구려가 개척했던 광활한 만주벌판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서 ‘만주는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땅’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일면 민족정신의 발로이자, 한민족의 혼과 얼이 담겨 있는 애국심의 발로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선조들이 남긴 발자취와 웅대한 기상을 자부(自負)하고 싶을 뿐이다.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만주벌판에 한민족의 기상을 떨친 광개토대왕은 한민족의 기개와 얼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은 장수왕은 부친의 뜻을 기리고자 중국 길림성 지안시에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세웠다.진주에서 건설업을 운영하던 그가 이곳을 찾은 것은 지난 1996년의 일이다. 중국 안내원의 안내로 방문한 광개토대왕비역. 반가운 마음은 잠시, 민가에 둘러싸여 초라하게 방치된 비를 보고는 참담한 마음이었다. 허물어진 담장 안쪽에 방치된 비는, 길 가의 흔한 돌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모습은 부끄러움을 넘어 분노로 다가왔다.중국 관리에게 1,000달러를 주고 비역 주변 정비를 부탁하고 귀국했지만, 광개토대왕비가 처해 있던 현실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나중에 관리로부터 비역을 정비한 사진을 받았지만, 그의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그는 중국정부에 5만 달러를 투자해 묘역정비를 의뢰했다.‘너희 땅도 아니고 정비를 한다 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매몰찬 답변이 돌아왔다. 여섯 차례에 걸친 부탁 끝에 마침내 정비공사 허가를 받아냈다. 동생 오영환을 현지에 보내 현지답사를 벌인 뒤 광개토대왕비역 정화사업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설계도를 작성해 사업을 시작했다.비역 벽면에 벽화를 다시 그려 넣은 것은 물론 주변의 잡목들은 모두 베어내고 한국의 적송과 백두산에서만 자라는 백자작나무까지 구해다 심었다. 진입로 포장과 담장 개보수에 이어 기와를 덮고 출입문까지 웅장하게 달아 단장을 마쳤다.비역 정비과정에서 중국과 마찰도 적지 않았다. 중국정부는 정비공사 허가에서 부터 수명이 1,000년이 넘는 측백나무를 심지 않고 적송을 심으려던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적송이 한민족의 대표나무라는 생각에 거의 사투를 하다시피해서 적송을 심었다.동생 오영환은 직접 감독하며 장장 8개월의 시간 동안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정비사업에 심혈을 쏟았다. 무려 2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광개토대왕비는 정비가 되었다. 이후 중국정부는 물론 지안시 사람들도 그의 진솔한 마음을 받아들였고, 명예시장으로 임명하기 까지 했다.“한국인으로서 민족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광개토대왕비가 중국 현지에서 잡초더미에 묻혀 있다는 게 마음이 아파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언론 인터뷰에서 한 그의 말에서 절절한 민족애를 발견할 수 있다.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광개토대왕비에서 200여m 떨어져 있는 곳에 방치되고 있는 광개토대왕릉의 정화사업을 추진했다. 이미 비 정화사업에 사재 2억 5,000여 만 원을 투자한 그는 왕릉 정화사업에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시가 10억 원 상당의 땅을 희사하겠다고 나섰다.이 사업은 규모가 너무 커 비용은 자신이 부담하고 공사는 국가 혹은 민간단체, 현지에 나가 있는 대기업이 맡아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이 같은 사업이 바로 민족운동이며, 진정한 투자인 동시에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 그 자체이고, 분단이 종식되는데 조금의 기여가 된다면 족할 뿐’이라고 그는 담담히 말한다.‘언젠가 다시 우리가 찾아야 할 역사이다. 광개토대왕비 정비사업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으로서 후손들이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라는 그는 우리 민족의 역사성을 확인하고 정체성을 찾는 문화사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무명용사의 애국과 일제 만행을 기억하다광개토대왕비 정비사업은 그가 가진 재산으로 추진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부나 재벌들도 엄두를 내지 못한 일을 거뜬히 해냈다. 민족정신 고취에 대한 그의 집념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넓디넓은 중국 땅에 널브러져 있는 고구려 유적 정비사업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다.일제 강점기에 청산리 전투 등에서 일제와 싸우다 숨진 5만여 명에 이르는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01년 중국 연벤대학 뒷동산에 ‘항일무명영웅기념비’를 세웠다.2년여의 공사기간과 7억 원의 사비를 들여 길림성 연길시 연변대학 내 북산 인근 500여 평의 부지에 기념비와 야외공연장, 만남의 광장 등이 들어선 항일영웅 추모공원이 완공됐다. 기념비 주변의 대리석은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교가 기증했고, 북한측도 공원건립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그리고 그는 비문에 이렇게 적었다.‘항일구국의 일념으로 일제와의 투쟁에서 이름 없이 산화한 영령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자 비를 세웁니다.’그가 이 기념비를 세운 것은 후세들에게 민족정신을 재무장시키고 또한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광개토대왕비 정비사업처럼 민족혼 현양사업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그가 세운 항일무명 영웅기념비는 그 의미가 단순하지 않다.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그런대로 공적을 인정받고 있지만, 중국땅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숨진 무명영웅들에 대한 조명은 전무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사비를 들여 기념비를 세운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고 값진 것이다.그가 추모공원을 건립하게 된 것은 일제시대 무명 영웅들을 위한 기념장소가 필요하다는 현지 동포들의 건의에 공감해 시작했다. 그리고 백두산 관광 코스에서 방문하는 연길시에 이 기념비를 세운다면 이곳을 한 번씩만 들르더라도 이곳에 묻힌 애국지사들이 큰 위안을 받을 수 있고, 후손들의 민족애,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시키는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추모공원을 세운지 10년이 지났지만, 이곳을 찾는 국민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백두산을 가려면 연길을 거쳐야 하고, 연길에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민족관과 국가관을 바탕으로 한 애국심의 발로를 주문하기도 했다.2000년 12월, 그는 또다시 사재를 털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책을 발간해 무료로 배포했다.그가 발간한 책은 『강제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이다. 그리고 뒤이어 청소년들이 읽기 편하도록 쉽게 풀어쓴 『끌려간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이라는 책을 제작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했다.특히 『끌려간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할 수 없는 희생자가 된 만주지역 동포의 삶을 기록한 것으로 중국 조선족의 역사와 삶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이 책은 중국의 조선족 2세 사학자인 강용권씨가 중국의 지린(吉林), 헤이룽장, 랴오닝 등 동북 3개 성에 사는 강제징병자와 종군위안부 49명을 만나 그들의 체험을 기록한 것을 토대로 했다. 연변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강씨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항일 민족운동 기록을 수집하던 중 과로로 쓰러져 숨졌다.그는 “일본군에 징병됐거나 위안부로 끌려간 사람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생존자마저 고령자여서 기록을 남기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남긴 뼈아픈 흔적을 치유하는데 모두가 합심하는 계기로 삼고, 후세들에게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해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특히 이 책은 통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즈음에 발간돼 민족통합의 문제를 좀 더 넓게 일깨워 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기도 했다. 사회가 필요하다면…그는 늘 말한다. “사회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으며, 사회가 필요하다면 그 어떤 일이든 뜻있는 일을 하겠다.”여력이 있는 한 사회공헌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흔 중반의 그는 사회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사회에 필요한 일을 찾아 나서고 있다.우선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에 있는 교민들에게 농업기술교육을 실시했다. 연변지구를 여행하면서 소득수준이 낮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교민들을 본 그는 농업기술을 전수해주기만 하면 비옥하고 넓은 평야를 이용해 잘살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그는 화룡시 직원에게 농업을 전공한 학사출신 2~3명을 추천받아, 진주소재 경남과학기술대학교에 영농위탁교육을 시켰다. 그들은 선진농업기술을 전수받는 것은 물론 유실수 개종 및 현지 토양에 맞는 식물 재배를 통한 소득향상 방안을 공부하고 연구했다.그의 동포사랑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그리고 일제의 만행을 기록한 ‘강제징병자와 종군위안부’에 대한 KBS의 방송내용을 담은 영상교육 자료를 만들어 학생의 교육용으로 무료 배포했다.책자 발간 이후, KBS창원총국에서 관심을 갖고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한 것이다. 중국 동북 3성에 살았던 강제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삶을 담은 이 프로그램은 방송 이후, 지역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그는 이번에도 직접 나섰다. KBS 본사에서 방송한 자료를 바탕으로 테이프 400개를 제작해 경남도내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초청해 내용을 소개하고 학생들의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후, 이 자료를 활용한 역사교육이 실시되었고, 많은 학생들은 민족을 아픔을 직접 체험한 절절한 마음을 독후감에 담아내기도 했다. 그는 독후감에 감동했다. 그리고 자신이 추진해 온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이 사업을 계기로 제가 평생을 두고 시행해야 할 사업으로 여기게 되었고, 향후 경남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대해 시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그가 추진해 온 많은 일들이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종군위안부의 처절한 삶을 직접 목도한 그가 종군위안부를 위한 일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그는 전쟁으로 어려운 삶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과 종군위안부라는 과거 때문에 아픈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위로하는 일은 물론 생활비를 보태는 일도 잊지 않았다. 특히 자의가 아닌 타의의 강요에 의해 자신의 삶을 잃은 강제징병자에게는 고향을 찾아 친척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그의 사회공헌은 또 있다. ‘오효정장학회’를 만들어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고학생들에게 4년간에 걸쳐 장학금을 지급한 것은 물론 광개토함에 체육시설을 기증하기도 했다.광개토대왕 사적 정비사업을 마친 뒤. 광개토대왕의 위상을 빛낸 공로로 광개토대왕함 함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그는 병사들에게 체력단련장 설치를 약속했고, 2002년 그는 광개토대왕함장 최호진 대령에게 1,000만 원을 전달해 병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노인을 공경하라’는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진주시 복지타운 상락원 노인복지회관에 노인들을 위한 공간을 건립해 2002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기증했다. ‘덕의관’으로 명명된 이 회관에는 교육실을 비롯해 할머니방과 취미교실, 체력단련실, 다목적실,경로당, 체력단련기구 등을 갖추고 있다.그리고 덕의관 준공에 맞춰 그의 아들과 딸, 사위, 조카들도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1,000만 원을 모아 TV, 에어컨, 운동기구를 기증해 그의 뜻에 동참했다.그는 덕의관 건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기업은 사회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는 만큼, 기업이취득한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최근 그는 지인들과 함께 망진산 봉수대 앞 빈터에 단풍나무를 심었다. 이에 앞서 석갑산과 평거동에도 단풍나무 묘목을 식재했다. 소나무가 재선충병에 걸려고사하는 것을 보고 대체목으로 단풍나무를 심은 것이다.등산객들이 단풍나무를 보고 일상에 찌든 마음의 여유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이다. 소박한 일상으로 돌아 온 그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민족혼 선양을 위한 마음마저 사그라든 것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조각비를 건립하고 싶다.” 그야말로 쉼 없는 전진이다.“사람이 살면서 하루 세끼를 먹는 것은 같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자녀에 대한 교육과 애국관을 쉼 없이 강조한다. 그가 평생을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해온 일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 울산 언양에서 태어나 진주에 이사한 지 40년이 넘은 그에게 진주는 이미 그의 고향이 되었다. “이제는 진주가 고향이 됐고, 앞으로 가까이는 진주, 나아가서는 한민족의 뿌리를 찾는데 공헌하고 싶다”며 향후 계획을 밝혔다.그가 걸어 온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각박한 현실 사회에서 쉽게 기억해내기 어려운 ‘민족정신 고취와 현양사업’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그가 걸어온 자취는 더욱 의미 있고 값지다.진주의 명예를 드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진주시민들은 그에게 진주시민상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는 수상금에 사비를 더해 1,000만 원을 진주시를 위해 기증했다.그는 자랑스런 진주사람이다.

  • 2024-03-05
  • 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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