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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냉면과 교방냉면

  • 작성자

    황경규

  • 작성일

    2024.07.11 AM 10:46

  • 조회수

    950

대한민국의 냉면은 진주냉면과 평양냉면으로 대별된다. 진주냉면이 갖고 있는 문화산업적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다만 진주만의 문화상품으로 개발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할 뿐이다. 교방냉면 역시 그러하다.

진주의 역사와 문화에 기반한 콘텐츠의 산업화 노력은 때로는 지역경제에 엄청나게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 반면에 역사·문화의 산업화를 등한시하거나 기존 문화·역사 콘텐츠에 대한 보전·발전·계승 노력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 역사와 문화 그 자체를 잃어버리거나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진주의 경우, 진주냉면, 진주비빔밥, 진주소싸움, 의기논개 등이 그 예이다. 이들 콘텐츠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면, 이같은 지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콘텐츠와 스토리텔링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 결합된 문화상품의 파급력은 특정 지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전주 비빔밥의 경우, 전주를 대표하는 음식이자, 지역경제활성화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논개 역시, 전북 장수군의 대표 관광콘텐츠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청도 소싸움은 전국적인 지명도를 확보하기 위해 지금도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민간이 힘을 합쳐 지역의 콘텐츠에 스토리텔링을 입히는 과정을 통해 문화산업화 활성화에 전력을 투구하고 있다.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 가진 힘을 잘 활용하고 있는 사례이다.

진주의 전망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진주가 가진 콘텐츠를 다른 지역에 빼앗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를 들면, 진주비빔밥은 전주비빔밥이 가진 콘텐츠에 밀려나 경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논개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간직한 진주의 의기논개는 장수군이 주창하는 논개로 변질되었고, 소싸움은 청도가 도리어 원조임을 표방하고 있다. 

진주가 비빔밥과 논개, 소싸움을 타 지역에 빼앗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 지역의 노력에 비해 과감한 투자와 노력이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불편한 진실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도 진주만의 콘텐츠에 스토리텔링을 입혀 전국적인 문화상품으로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진주냉면과 평양냉면

 

진주냉면은 평양냉면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냉면으로 알려져 있다.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평양냉면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지역성을 내포한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반면 진주냉면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진주냉면이라는 콘텐츠 자체가 가지는 장점을 활용한 산업화에 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진주냉면은 진주를 대표하는 음식이라는 명성만 남은 채,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진주냉면과 평양냉면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주냉면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나 이론의 정립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다. 진주냉면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정립노력이 우선 선행되어야 한다. ‘진주냉면의 역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립무형유산원이 발간한 『진주의 무형문화유산』에 소개된 진주냉면에 대한 기록은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는 진주냉면에 대한 인식체계의 재검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국립무형유산원이 발간한 진주의 무형문화유산에 기록된 진주냉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진주냉면은 조선시대 진주지역 양반가에서 절기음식 내지는 특식, 국권피탈 이후에는 진주권번에 소속된 예기들의 생활터전이었던 기방에서 야식으로 눌러 먹었던 진주의 향토음식이다.’

이같은 기록은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기존의 진주냉면과는 역사성을 달리하는 음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김영복의 고증을 받아 황덕이 할머니가 재현했다는 광고효과로 널리 알려진 진주냉면과 차이가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더불어 진주냉면의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학술적 차원에서 진주지역 유학자들의 문집과 개인 기록 등을 통해서 진주냉면에 대한 실체를 철저히 재조명할 필요성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진주냉면의 역사를 온전히 정립하는 노력이 시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평양냉면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진주냉면이 진주를 비롯한 전국적인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방냉면과 교방음식 
 

최근 진주만의 고유한 문화콘텐츠인 교방문화(敎坊文化)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방냉면, 교방비빔밥, 교방한정식 등과 같은 이른바 ‘교방음식(敎坊飮食)’이 진주의 새로운 콘텐츠로 부상하고 있다. 진주지역 곳곳에 교방문화와 관련한 교방음식점이 생겨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교방문화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교방문화의 산업화 역시 매우 중요하다. 교방냉면을 비롯한 교방음식의 산업화가 가져 올 지역경제 선순환 효과는 물론 전주비빔밥에 못지 않은 진주만의 문화상품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 진주문화유산원 부설 교방문화연구소가 교방문화에 대한 학술적 연구와 더불어 교방음식연구회를 만들어 진주시민을 대상으로 한 교방음식 레시피 개발 및 무료 제공 등을 통한 교방음식의 산업화에 적극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경계해야 할 점은 교방문화에 대한 학술적 연구와 이론적 배경이 정립되기 이전에 이루어지는 성급한 교방음식의 상업화(商業化) 또는 이익화(利益化)이다. 단언컨대, 교방음식은 특정 단체나 개인을 위한 콘텐츠가 아닌 진주시민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의 정치권이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주냉면과 교방냉면이 갖고 있는 문화산업적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다만 진주만의 문화상품으로 개발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할 뿐이다. 진주냉면의 부활과 교방냉면의 새로운 도전에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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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2) 13.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진주소싸움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진주소싸움 대한민국 최고의 전통을 가진 진주 소싸움은 진주의 기상(氣像)을 닮았다. 진주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고 견디게 한 촉매제가 바로 ‘남강 백사장의 소싸움’이었던 것이다. 진주 발(發) 소싸움 소식이 들려오면 진주 인근에서 몰려든 인파로 남강 백사장은 인산인해가 되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의 싸움소의 긴장감 넘치는 혈투가 벌어지면 수만 군중의 함성은 하늘을 진동시켰다. 백사장을 뒤 덮은 차일과 인파 속에서 진주 양조장 술이 동이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주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진 진주 소싸움은 일제강점기 진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싸인 울분을 토해내는 해방공간이자, ‘일제의 심장을 겨누는 화살(矢)과 같은 존재’였다. 대한민국 지방지의 효시인 경남일보의 주필이던 위암 장지연은 「진양잡영(晉陽雜詠」에서 소싸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가을 풀 우거지고 밭갈이 쉬었기로 목동들은 한가한데, 억센 소 힘이 솟아 그 분기가 산과 같네. 뒤엉킨 뿔싸움 다투어 충돌하니 제(齊)나라 군대가 절묘한 승리로 묵적(墨翟)군을 파하고 돌아오는 듯 하네. 일제는 삼일독립운동과 기생걸인독립운동 이후, 황급히 진주 소싸움을 금지시켰다. 이처럼 진주 소싸움은 조선과 일본의 대리전(代理戰)의 성격을 가졌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놀이였다. 진주 소싸움의 역사 진주 소싸움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민족대백과사전에는 ‘삼국시대 전승 기념 잔치에서 비롯되어 고려 말부터 진주를 중심으로 자생한 고유의 민속놀이’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소싸움의 기원을 백제를 이긴 신라의 전승 기념잔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소를 많이 잡아 먹어 소들을 위령하기 위해 시작되었는 설이 있다. 북한과학원이 발간한 「조선의 민속놀이편」에는 ‘진주 일대에서 줄다리기와 더불어 소싸움은 연중 가장 큰 행사’라 적고 있다. 이처럼 진주 소싸움은 오랜 전승 과정을 통해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구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진주에서 소싸움이 처음 개최된 것은 1884년이다. 당시 소싸움은 진주성 성내(城內)와 성외(城外) 마을간 벌였던 소싸움이 최초의 기록이다. 1909년에는 위암 장지연이 진주 소싸움의 정경을 묘사한 시(詩)를 경남일보에 게재했다. 1913년에는 추석에 진주와 창원에서 투우대회가 개최되었다. 1917년에는 남강 백사장에서 개최된 소싸움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朝鮮)』에 「진주의 투우(鬪牛)」가 소개되었고, 당시 진양군수인 일본인 야마시타(山下正導)가 경성일보 등에 「진주 명물 투우」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특히 야마시타가 기고한 글을 통해 진주 소싸움의 정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야마시타에 의하면, 진주의 소싸움은 남강 강변에서 열린 우시장의 성행으로 자연스럽게 개최되었고 주로 초파일과 백중, 추석 명절의 정례적 행사였다고 한다. 1884년 진주에서 벌어진 소싸움의 경우, 성안마을에 사는 부호인 김선여와 성밖 마을의 호농인 오작지 두 사람이 평소에 우량소를 키우며 서로 과시하는 과정에서 소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을 계기로 마을 대항의 소싸움이 읍치에서 벌이는 성대한 소싸움으로 변모되었는데, 1897년경에는 고을민의 후원으로 우승상금을 마련했고 군수도 상금과 상품을 내걸면서 소싸움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진주 읍치의 성 안과 성 밖 마을들이 벌이는 소싸움이 끝난 다음날 도동면과 진주읍의 승부가 이어졌고, 17일에는 도동면과 금산면의 승부가 펼쳐졌다. 이와같이 19세기 말 진주에서는 마을 단위는 물론 고을 단위의 대동놀이로서 소싸움이 전승되었고 주민들은 싸움소를 자신이 속한 지역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소싸움은 경남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926년에는 진주, 김해, 마산, 통영, 산청 등지에서 투우대회를 개최했으며, 1927년에는 의령, 합천, 하동, 거창에서 투우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투우대회를 개최하는 지역이 증가했다. ‘진주는 투우놀이가 성하여 천의 군중과 함께 으르렁 으르렁 거리는 모습이 일대장관이더라’ 진주 소싸움은 일본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삼일만세운동으로 일제가 진주 소싸움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이후 일제의 축산장려정책으로 1923년 재개된 이후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지역으로 1930년대 까지 전승되었다. 해방 이후, 진주에서는 1949년 추석을 맞아 남강 백사장에서 전국 투우대회를 개최했다. 1961년에 이르러서는 진주에서 투우단체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진주 개천예술제의 외곽행사로 투우대회가 개최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969년 남강댐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 방문 기념 투우대회도 개최되었다. 전국 소싸움대회의 원조인 진주가 소싸움으로 위상을 갖게 된 것은 2006년 전국 최초로 진주전통소싸움경기장을 건설하면서 부터이다. 청도는 이듬해인 2007년에 청도소싸움경기장을 개장했다. 2011년에는 진주에서 ‘토요상설소싸움대회’가 시작되었다. 더불어 매년 10월에 개최되는 진주남강유등축제와 개천예술제 기간에 열리는 ‘진주 전국 민속 소싸움 대회’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의령군이 지난 2023년 채택한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에 관한 보고서」는 소싸움을 문화재로 인정받음으로써 소싸움의 민속문화적 요소들을 발굴하고 복원·전승 체계를 확고히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른바 겜블링 소싸움과의 차별화를 통해 소싸움 대회 및 싸움 소 농가의 자긍심 고취와 지속성을 확보하고 현존하는 전통 농경민속문화의 대표격인 소 싸움을 통해 국민 여가 활동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더불어 문화재 지정에 의한 소싸움의 활성화를 통해 지역 일자리 창출과 경제활성화라는 긍정적인 기대도 명시했다. 현재 소싸움은 진주를 중심으로 의령과 청도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진주 소싸움 우표와 싸움소 은퇴식 ‘진주의 독특한 투우’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면서 기념우표도 발행되었다. 1937년 발행한 「조선도읍대관」 진주읍 편에서 ‘진주 소싸움 우표’ 발행 소식을 전한 것이다. 진주 소싸움을 진주의 독특한 투우로 평가하면서 우편국에서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이 우표에는 진주성 촉석루와 진주 소싸움 장면이 실려있다. 당시 진주 소싸움이 가진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소싸움대회가 마치면 싸움 소의 은퇴식이 열리기도 했다. 은퇴식에서 우주(牛主)와 소가 관객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죽으면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의 시간도 가진다. 2009년에는 의령의 싸움소 ‘범이’가 은퇴식을 가졌고, 다음 해 범이가 죽자, 우주인 하영효씨는 정중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봉분과 비석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당시 ‘범이’의 은퇴식은 mbc뉴스 등 언론매체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은퇴식을 가진 싸움소는 박성권의 ‘깡패’, 진순호씨의 ‘강남스타’가 있다. 진주 소싸움 캐릭터 ‘맹우(猛牛) 진주 소싸움을 상징하는 캐릭터 ‘맹우(猛牛)’가 등장한 것은 진주에서 개최된 전국 민속 소싸움대회 캐릭터로 선정되면서 부터이다. ‘맹우(猛牛)’는 일제강점기에 유명세를 날렸던 진주 전통 소싸움 대회에서 명성을 날린 싸움소의 이름이다. ‘맹우(猛牛)’가 캐릭터로 선정된 것은 소싸움을 하던 도중 뿔이 부러지는 극한 상황을 극복하고 우승을 차지한 전설적인 진주의 싸움소이다. 캐릭터는 맹우의 힘찬 모습과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흰 옷을 입혀 왜침에 항거한 백의민족의 강인함으로 표현했다. 뿔치기·목치기·후려치기, 소싸움 기술 싸움소의 등장은 1970년대 이후 농기구 사용의 일반화로 농사 소의 이용이 줄어들면서 부터이다. 대회에 출전하는 싸움소는 평소 순발력과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 엄청난 체력 운동을 병행했다. 식단도 호박, 인삼에 이어 쓰러진 소도 뻘떡 일으켜 세운다는 낙지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영양 식단이었다. 그리고 싸움소는 싸움 기술을 연마했다. 소싸움 기술로는 일반적으로 치는 기술, 거는 기술, 미는 기술, 복합 기술 등이 있다. 치는 기술은 상대방 싸움소를 들이 받으면서 타격을 주는 기술로 들치기, 머리치기, 뿔치기, 옆치기, 후려치기가 있다. 거는 기술은 뿔을 이용해 상대를 걸어서 누르거나 들어 올리는 기술로 뿔걸이가 있다. 미는 기술은 힘으로 밀어 붙이는 기술로 밀치기, 목치기, 주둥이 뜨기가 있다. 복합 기술은 두 가지 이상의 기술을 연속으로 펼치는 기술이다. 대표적으로 연타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소싸움 기술은 싸움소를 기른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진 지식과 민간에 전해지는 지식이 합쳐진 민속 지식으로 볼 수 있다.이러한 싸움소의 기술을 생생히 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진양호 공원내 상설 소싸움 경기장이다. 특히 소싸움을 중계하는 해설자의 달변은 소싸움의 새로운 묘미와 재미를 알게 해준다. 경기장에서 최고의 스타는 싸움소를 제외하고는 단연 소싸움 해설자이다. 소싸움의 위기, ‘동물학대 논란’ ‘소싸움=동물학대’라는 동물·환경보호단체들의 반대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문화재청(국가유산청)은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보류하고 학술조사를 선행한 후, 추진 여부를 결정키로 한다. 이른바 ‘소싸움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문화재위원들은 이들 단체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세시풍속으로서의 소싸움과 현재 각 지역에서 상설 운영되는 소싸움의 동일시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역사성과 전승 주체, 지역주민들의 참여, 사행성, 동물 학대 등 문제 소지가 있는 부분은 학술조사를 통해 면밀히 따져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세시풍속이었던 ‘소싸움’이 ‘소 힘겨루기’라는 명칭으로 변경된다. 지난 2009년에 창립된 (사)한국민속소싸움협회도 2022년 (사)대한민속소힘겨루기협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전승위기를 기회로 소싸움은 오랜 전승 과정에서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구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지방종합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 등 지역축제와 결합하면서 관광자원화의 길도 열었다. 현재 전국 10개 시·군과 2개의 광역자치단체에서 소싸움 관련 조례를 제정했고, 4개의 시·군에서는 소싸움 전용 경기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싸움 관련 기술과 민속 지식의 전승 등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미룰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싸움이 가진 한민족의 전통적인 민속문화적 요소를 발굴·복원·계승하는 것은 물론 소싸움 지속적인 전승의 문화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더 이상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 등의 소싸움이 문화재로 지정된데 비해 대한민국의 소싸움은 전승 세대 부족 현상과 소싸움을 동물권 침해로 보는 견해 등으로 전승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대로라면 세대를 초월한 한민족의 전통 문화유산인 소싸움은 결국 존폐의 기로에 서고 말 것이다.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은 소싸움대회와 싸움소 농가의 자긍심 고취와 전승 지속성 확보, 국민여가 활동의 다양성 기여, 전통문화유산의 보존과 계승 등 소싸움의 미래를 결정짓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 소싸움의 명운이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소싸움을 동물권 침해로 보는 일부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 소싸움을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좀 더 깊은 숙의가 필요하다. 마권(馬券) 발행 처럼 소싸움에 대한 온라인 배팅 허용 문제 역시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러한 협의의 논란이 소싸움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뜻이다. 일제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전통의 진주 소싸움이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진주 소싸움의 주인공인 ‘맹우(猛牛)’가 갖고 있는 힘찬 모습과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흰 옷을 입고 왜침에 항거한 진주 사람들의 강인함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진주 소싸움은 일제의 심장을 겨눈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 2024-07-11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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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2) 12. 1889 함안군수 오횡묵의 진주 나들이 썸네일 이미지

(STORY OF 진주2) 12. 1889 함안군수 오횡묵의 진주 나들이

1889 함안군수 오횡묵의 진주 나들이함안군총쇄록 조선시대 개항기의 문신·학자로 ‘조선시대 함안의 역사와 마을을 기록한 함안총쇄록(咸安叢瑣錄)’의 저자 함안군수(咸安郡守) 오횡묵(吳宖黙)이 진주(晋州) 나들이를 한 기록이 있다. 함안총쇄록 진주 편을 보면 오횡묵 군수는 1889년 5월 23일 소촌역(召村驛)을 시작으로 말티고개, 촉석루, 향교, 진주성 남문, 대사지, 함옥헌, 동장대 등 진주를 대표하는 공간을 탐방하면서 주요 건물의 위치와 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 시(詩)와 소감을 남겼다. 이는 1890년 이후 진주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오횡묵 군수의 진주 나들이를 토대로 ‘1890년 이후 진주의 모습’을 재구성했다. 참고로 함안군수 오횡묵은 1890년부터 1893년까지 함안군수를 지냈다. 함안총쇄록에 남겨진 진주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고 별도의 해설을 적어 보았다. 오횡묵 군수는 진주에 맨 먼저 도착한 곳은 문산의 소촌역(召村驛)이었다. 10리쯤 이르니 소촌역이 있었는데 호수가 천호(千戶) 쯤이었다. 마을의 모습이 부유해 보이고 사람과 물건이 번성해 보였다. 곧 영남 제일의 역이다.(倒十里有召村驛 可量近千戶 村容殷富 人物繁盛 乃嶠南第一察訪道也) 소촌역은 진주목(晉州牧)이 관장했던 관도(官道)인 소촌도(召村道)의 찰방역(察訪驛)이었다. 더불어 조선시대 41개 역도(驛道) 가운데 소촌역을 비롯한 16개 속역(屬驛)을 관장하던 문산찰방(文山察訪) 관할의 역이었다. 당시 소촌역의 인구수를 알기 어렵다. 다만 ‘찰방(察訪)과 역리(驛吏) 1,714명, 노(奴) 869명, 비(婢) 399명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이 기록으로 인해 소촌역 인근의 호수가 1,000호에 달했고 소촌역 일대가 진주 지역 내에서 상당히 번성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교남제일찰방도(嶠南第一察訪道)에서 교남(嶠南)은 ‘조령(鳥嶺)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경상도’를 말한다. 다음 날, 소촌역을 떠나 나루터에 도착한 오횡묵군수는 인근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새벽에 일어나 알아보니, 뱃사공이 배를 대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평평한 벌판을 바라보니 온갖 곡식이 싱싱했고, 그 앞으로 강이 두르고 있었다. 멀리 수풀이 하늘 속에 떠있었다. 하물며 장마가 막 개이고 아침 해가 비치니 나루의 풍경은 기절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제의 근심과 절망감이 오늘의 상쾌한 심정으로 바뀌었다. 배를 타고 시 한 수 읊었다. 배에서 내려서 7리(里)를 가서 도착한 곳이 마치(馬峙) 즉, 말티고개였다. 이곳에서 진주성에 있던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과 촉석루(矗石樓)를 발견하고는 율시 한 수를 짓는다. 배에서 내려 7리를 가자 마치(馬峙)고개가 있었는데, 소나무가 울창했고 대나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멀리 병영(兵營)이 보였고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회칠을 한 성벽 주위로 백성들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의 집에서 나는 연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가운데 누각 하나가 반공에 우뚝 솟아 있었는데 바로 촉석루(矗石樓)였다. 이에 율시 한 수를 지었다. 오횡묵 군수가 본 병영은 진주성에 있는 경상우도병마절도영(慶尙右道兵馬節度營)을 말하는 듯하다. 경상우병영은 임진왜란 이후인 1603년 마산 합포에서 진주성으로 옮겨왔다. 병영(兵營)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는 병마절도사가 있던 영문(營門)을 말한다.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것은 남강(南江)이다. 주목할 부분은 당시 ‘진주성의 성벽에 회칠(灰漆)을 했다’는 점이다. 회칠은 석회를 칠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 당시 진주성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율시(律詩)는 촉석루가 시제(詩題)였다. 고개를 내려가 얼마 되지 않아 위로 돌 절벽이 있었고, 아래로는 강가에 험한 돌다리 사이로 나 있는 한 줄기 길이 1리 가까이 되었다. 몇 백 미터 되는 곳에 향교(鄕校)가 있었고, 또 몇 걸음 안 가서 사정(射亭)이 있었는데, 몇 그루 오래된 나무가 겹겹이 덮고 있었고, 지세가 평평하였다. 정자 북쪽에 못이 하나 있었는데, 훤출한 연꽃줄기가 빽빽이 솟아 바람을 받고 있었다. 이 곳은 진주 병영 동쪽 성의 아래였다. 말티고개에서 진주성의 병영과 촉석루를 본 뒤, 말티고개를 내려와 마주한 돌 적벽은 ‘뒤벼리’이다. 뒤벼리는 이른바 진주층의 표식지를 대표하는 곳이다. 진주층은 중생대 백악기에 쌓인 일련의 퇴적층군을 말하는 것으로 회색 내지 검은색의 사암과 셰일이 교대로 싸인 지층이 바로 뒤벼리 절벽이다. 뒤벼리 옆에서 발견한 사정(射亭)은 진주 궁도의 산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진주 최고(最古)의 국궁장인 람덕정(覽德亭)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주 최초의 사정은 1879년(고종 16) 이전에는 남강을 사이에 두고 습사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879년에 이르러서야 남강변 동쪽 방수림 첩석환수하(疊石環樹下)에 정(亭)을 세우고 남사정이라 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한 사정은 람덕정인 것으로 보인다. 진주 병영 동쪽 성 아래에 있던 정자(亭子)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찾기 어렵다. 오횡묵 군수의 다음 목적지가 진주성 남문(南門)임을 감안하면 이 곳 부근에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을 따라 몇 발짝 더 가서 도니 성의 남쪽 문인데, 예화문(禮化門)이라고 편액을 걸었다.공북문(控北門)을 돌아 들어가 군방(軍房)에 속한 영주인 김학봉(金鶴奉)에게 머물렀다. 영주인을 불러 그 지역의 산 이름과 문의 이름을 물으며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병영의 주산은 북쪽에 있는 비봉산(飛鳳山)이고, 남쪽은 망진봉(望晉峯)이고, 동쪽은 선학치(仙鶴峙)이고, 서쪽은 청천(菁川) 늪이었다. 진주성의 관문인 남문(南門)은 일제강점기 읍성철거령(1910년)으로 인해 훼철되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당시 남문의 편액이 ‘예화문(禮化門)’이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가치를 지닌다. 『여지도서』에 실려 있는 경상도우병영지지도에는 외성(外城)에 옹성(甕城)이 설치된 곳은 구북문(舊北門), 신북문(新北門), 남문(南門)이었다. 촉석성(矗石城)은 안팎의 주위가 10리쯤 되는데, 성의 북쪽에는 대사지(大寺池)라는 큰 못이 있었다. 못 남쪽에는 망경대(望景臺)가 있고, 동쪽에는 수정봉(水晶峯)이 있었다. 남쪽은 예화문(禮化門), 서쪽은 의정문(義正門), 북쪽은 지제문(智濟門)이라고 했다.옛날에는 북쪽문을 대인문(對仁門)이라 했고, 내북문(內北門)을 공북문(控北門), 내동문(內東門)을 촉석문(矗石門)이라고 했다. 또 안팎의 수문(水門)이 있는데 이는 병영 안에 물을 길어오는 중요한 길이었다. 촉석성은 진주성(晋州城)을 말한다. 북쪽 문을 대인문(對仁門)이라 한 것은, 과거 진주성의 북쪽에 있던 구북문(舊北門)을 말한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도」에는 대인문은 구북문, 지제문은 신북문, 예화문은 남문, 의정문은 서문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수문(水門)으로는 외수문(外水門), 내수문(內水門 ), 암문(暗門)이 있었다. 동쪽에 동장대(東將臺)가 있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대변청(待變廳)이라고 했다. 서쪽에는 서장대(西將臺)가 있고, 그 아래 산성사(山城寺), 호국사(護國寺)가 있었다. 장대(將臺)의 이름은 봉서루(鳳棲樓)라고 했고, 누의 남쪽에 진남루(鎭南樓)가 있었다. 또 더 가니 북장대(北將臺)가 있었다.또 촉석루(矗石樓)가 있는데, 촉석루에는 남장대(南將臺)라고 써 붙였다. 동쪽에 조그마한 집이 있어 지붕이 촉석루와 이어졌는데 함옥헌(涵玉軒)이라고 편액을 붙였다. 동장대는 조선시대 진주성에 설치됐던 4개의 장대(將臺) 중 가장 바깥 쪽에 위치한 동쪽 누각(樓閣)을 말한다. 동장대의 이칭(異稱)은 ‘대변루(待變樓)’로 알고 있지만, 여기서는 ‘대변청(待變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동장대의 위상이 감안된 명칭으로 보인다. 촉석루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동서(東西)로 부속 누각이 있었다. 동각(東閣)으로는 능허당(凌虛堂, 나중에 함옥헌으로 개칭)과 청심헌(淸心軒)이 있었고 서각(西閣)으로는 쌍청당(雙淸堂)과 임경헌(臨景軒, 나중에 관수헌(觀水軒)으로 개칭)이 있었다. 함옥헌(涵玉軒)은 ‘누각이 넓은 강에 흐르는 옥 같은 강물을 담고 있는 듯한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촉석루 부속누각 중 최후까지 존속되다가 일본인에 의해 1906년 훼철되었다. 병영(兵營)의 외삼문(外三門)인 망미루(望美樓) 문 밖에는 기둥 모양의 높은 표석(標石)이 하나 서 있는데, 이 병영은 지형이 가는 배 모양이기 때문에 이 돛대를 세워 둔 것이라 한다. 현 진주성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의 별칭이 망미루(望美樓)이다. 문 밖에 있었던 기둥 모양의 표석(標石)은 현재 없고 ‘하마비(下馬碑)’만 있다. 하마비를 표석으로 표현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병영의 지형이 ‘가는 배 모양’이어서 ‘돛대’를 상징하는 표석을 세웠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내삼문(內三門)인 원수아문(元帥衙門)은 영우병마원문(嶺右兵馬轅門)이라고 편액을 달았다.동헌(東軒)은 운주당(運籌堂)이라고 했는데, 양위합(養威閤), 완대헌(緩帶軒), 은표각(隱豹閣), 한광루(閑曠樓)라고도 했다. 서쪽의 누각은 주변루(籌邊樓)라고 했고, 또 의추각(疑秋閣)이라고 했는데 촉석루(矗石樓)를 마주하여 우뚝하였다. 동쪽에 누각 하나가 있는데, 공진당(拱辰堂) 영하루(暎荷樓)라고 했다. 당(堂)의 바깥 동쪽에 있는 것을 백화당(百和堂)이라고 했는데, 곧 막부(幕府)였고 문의 이름은 예라문(禮羅門)이라고 했다. 경상우도병마절도영(慶尙右道兵馬節度營)의 부속건물 명칭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소장 「진주성도」에 나타난 각 기관의 건물 명칭 표기와 비교해 더 자세하다. 먼저 계명대학교 진주성도에 표기된 ‘삼문(三門)’이 바로 원수아문(元帥衙門)이며, 편액은 영우병마원문(嶺右兵馬轅門)임을 알 수 있다. 동헌의 명칭도 운주당을 비롯해 양위합, 완대헌, 은표각, 한광루 등의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동쪽의 누각은 백화당, 서쪽의 누각은 주변루임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향후 경상우도병마절도영의 복원이 이루어지면 사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으로 보인다. 동쪽에 중영(中營)이 있는데 우후(虞候)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정당(政堂)은 찬주헌(贊籌軒)이라고 했는데, 또 망일헌(望日軒)이라고도 했다. 최근 진주성에 복원된 중영(中營)은 경상우병영 우후(虞候)의 군영이다. 우후는 경상우병영의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3품의 외관직으로 병마절도사의 참모장이다. 현재 복원된 중영의 편액은 ‘중영(中營)’이다. 하지만 이 기록에 의하면 1890년 당시 중영의 편액은 ‘찬주헌(贊籌軒)’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횡묵 군수는 촉석루 누각에서 진주를 내려다 보며 다음과 같이 소회를 적었다. 촉석루로 향하여 가서 누각 위로 걸어서 올라갔다.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행장(行狀)과 담배는 꾸려 싸도록 했다. 경치를 두루 보니 누각은 성 가에 다달아 있는데, 큰 강이 그 아래로 흘러가고 있었고 장사 배와 고기잡이 배들이 혹은 물에 떠 있기도 하고 혹은 매어 있기도 했다. 뱃노래가 하늘거리고 수풀은 푸른 빛을 띠고 있었고 큰 벌판은 아득했고 여러 산들은 기이하니 정말 영남의 경치 좋은 곳이자, 군사 방어상 중요한 곳이었다. 누각은 수 십간으로 촉석루(矗石樓) 석 자로 편액되어 있었는데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필체가 힘이 있고 굳세었는데 한 글자가 집 한 칸에 다 찰 정도였다. 당시 붓을 놀릴 때를 상상해 보니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던 바에서 훨씬 뛰어났다. 옛날부터 이름난 학사(學士)나 유람객들이 남긴 시(詩)와 기문(記文), 발문(跋文) 등등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눈을 들어 보니 정말 찬란하였고 그 능력을 자랑하고 재주를 드러내고 문채가 돋보이는 것이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한 마디 말을 토하고 솜씨를 한 번 발휘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이 곳은 비록 좋은 문장이 많이 모인 곳이라 해도 과장하는 말이 아니다. 그 가운데 신유한(申維翰)의 시는 중국 사람들에게 칭찬 받았다고 한다. 함안군수 오횡묵은 촉석루에서 남긴 소회를 뒤로 하고, 개양(開陽)과 조사(皂沙)의 주막에 들른 뒤 십수교(十水橋)를 끝으로 ‘진주 나들이’를 마무리했다. 함안총쇄록(咸安叢瑣錄)은 오횡묵이 함안군수로 재직한 1890년부터 1893년까지 각종 업무를 비롯해 부임지의 전반적인 상황을 매일 자세하게 기록한 일기 형식의 글로 내제(內題)는 ‘경상도함안총쇄록(慶尙道咸安叢瑣錄)이다. 이 책은 책머리에 지도를 싣고, 부임 절차와 부임 도중 지나치는 지방에 대해 기록하고 있어 다른 지방의 실태 파악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함안총쇄록에 실려있는 진주 관련 기록은 당시 진주의 자연경관과 읍치 등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록물이다.

  • 2024-07-11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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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2) 11. 1966년 화마(火魔)가 중앙시장을 삼키다 썸네일 이미지

(STORY OF 진주2) 11. 1966년 화마(火魔)가 중앙시장을 삼키다

1966 화마가 중앙시장을 삼키다 진주에는 ‘날三子’라는 말이 있다. 진주에서 돈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은 3대 째가 되면 진주를 떠나야 한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는 시장교역(市場交易)의 이동성(移動性)을 의미한다. 더불어 객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와 함께 치부(致富)한 재산은 자손들이 관리하기 어렵다는 뜻도 갖고 있다. 더불어 1862년 진주농민항쟁운동과 형평운동, 경남도청 이전 당시 촉석루와 배다리를 가득 메워 진주의 정신을 보여준 이들도 바로 진주의 상인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진주의 시장역사(市場歷史)는 진주시민이 새로운 문물을 교환하고 개척하는 역사(交換開拓史)이면서 민권운동의 중심 세력사(勢力史)이자, 진주의 모든 행사의 전위사(前衛史)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로부터 인구가 모이고 농업이 풍성하며 교통의 중심지인 진주에 자연스럽게 저자(市場)가 생겨난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리고 시장에 구름 같이 사람이 모여 들면서 진주는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 발전해 나갔다. 이후 ‘진주장(晋州場)’으로 불렸던 중앙시장은 경남 경제의 총본산이었던 진주상무사의 중심 교역장으로 발전했다. 더불어 중앙시장을 비롯한 진주지역의 시장(市場)은 진주 경제의 뿌리인 시장경제(市場經濟)의 출발점임과 동시에 진주 서민들의 경제생활을 주도하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성내시장(城內市場)과 북문통시장 진주에는 사전(四廛)이 있었다. 진주에는 장터가 두 군데 있었는데 첫 번째 시장이 관아(官衙)의 감독을 받았던 성내시장(城內市場)이다. 당시 성내시장은 옛 세무서 앞에서 제일극장까지였다. 지금의 공북문 앞에서 촉석문까지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민간 시장의 형태로 농산물을 교역했던 농산물 장터인 북문통 시장이다. 옛 경찰서 자리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점포 형식이 아닌 노점이었다.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시전의 특권이 완전히 폐지되고 상인들의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진주장(晋州場)은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자본이 상륙하면서 시장은 그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당시 성내 시장은 현재의 진주경찰서 서쪽에서 한동안 성시를 이루었으나 끝내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일본인과 일본 자본이 대안동과 동성동 일대를 사실상 점거하면서 시장의 확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성내시장과 성외시장은 통합을 이루게 되고 명칭도 진주시장진흥회(晋州市場繁榮會)로 바뀌면서 조국의 해방을 맞게 된다. 이것이 근대 진주 시장의 시작이다. 옛날 중앙시장 거리들 사단법인 진주중앙시장번영회가 지난 1982년 발간한 『진주중앙시장 백년사(1982. 금호인쇄)』를 보면 일제강점기 당시의 시장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진주시장의 과도기는 1910년 일제의 강제 한일합방에서 3·1운동 이후, 1930년까지이다. 당시 성내장터는 이미 폐철된지 오래였고, 지금 장터는 진주의 대사지 건너 북문과 남문의 동북쪽에 있었던 정식 공설시장이 번창했다. 시장 서쪽에는 북문통(北門通)이라는 신작로개 개설되었고, 시장 쪽으로 경찰서, 의용소방대가 있었으며, 서쪽 편에 금융조합, 상업은행, 남쪽에 식산은행이 있었다. 당시 중앙시장의 의령길(시장 중앙) 남쪽에 ‘보리전’과 ‘쌀전’이 있었다. 길 양편에는 ‘잡화전(雜貨廛)’와 ‘포목전(布木廛)’, ‘고무신전’이 있었다. 북쪽으로는 ‘비단전’과 ‘야채전’, 그리고 장새미골목쪽으로는 ‘나무전’이 있었다. 고정점포는 객주업자가 제일 처음 지었고, 병자년(1936) 물난리 이후에는 고정된 현대식 점포가 들어섰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앙시장은 그야말로 폐허가 된다. 포탄에 산산조각난 시장의 모습은 아비규환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중앙시장 상인들은 그 폐허를 딛고 일어선다. 그리고 중앙시장이 제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최대의 시련과 마주친다. 바로 1966년 중앙시장의 대화재이다. 진주중앙시장을 삼키다, 1966년 대화재 사단법인 진주중앙시장번영회는 지난 1982년 『진주중앙시장 백년사(1982. 금호인쇄)』를 발간했다. 당시 안승균 진주중앙시장번영회장은 발간사에서 ‘고종 21년(1884) 1월에 결성된 진주상무사(晋州商務社)의 사전청금록을 근거로 백년사라는 표제를 붙였다. 경남 경제의 총본산으로서 진주장은 그 중심 교역장이었으나 그 밖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중앙시장 백년사’에는 중앙시장 관계자들의 증언과 1966년 중앙시장을 덮쳤던 대화마(大火魔)에 대한 기록과 생생한 사진이 실려 있어 중앙시장에 대한 기록물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중앙시장이 불길에 휩싸인 것은 1966년 2월 6일 오후 10시이다. 화마가 덮친 중앙시장은 다음 날인 2월 7일 아침 나절이 되기도 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성한 점포가 거의 없었다. 상인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렇게 중앙시장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것을 잃었다. 중앙시장 대화재 이튿날인 2월 7일 진주시내 기관장과 상공인, 금융관계인, 유지들로 구성된 ‘화재대책위원회’가 긴급소집되었다. 중앙시장 대화재 수습방안 등이 논의되었다.중앙시장 대화재 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1966년 2월 8일 중앙조사반이 화재현장을 방문했다. 진주중앙시장회의실에서 중앙조사반에게 화재복구 계획을 설명한데 이어 정부의 도움을 요청했다. 상인은 물론 진주시민들의 성금답지가 이어졌고 중앙시장은 신속하게 복구되었다. 화재 후 불과 3개월 여만인 1966년 5월 수정동과 대안동 일대의 가설시장이 문을 열었다. 중앙시장 복구공사 기공식은 1966년 5월 20일이다. 당시 기공식에는 하병렬 회장과 진주지역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중앙시장 복구공사는 7개월만인 1966년 12월 15일 완공되었다. 당시 중앙시장 화재로 피해를 입은 옥봉북동 이재민을 위한 주택 52동도 신축되어 제공되었다. 이후 중앙시장은 여러차례의 변화를 꾀하면서 오늘날 진주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중앙시장을 비롯한 진주의 재래시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정부차원의 재래시장 활성화 정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재래시장 활성화는 요원한 실정이다. 중앙시장 백년사에 ‘진주시장사 서설’을 쓴 이명길 전 한국예총 진주지부장의 글 가운데 중앙시장과 관련한 일화가 적혀 있다. 사실 처음 이름과 이야기라 묻기도 하고 자료를 찾아 보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다. 기인(奇人) 설대장사 박돌(朴乭)과 三수, 상인후견인 이무엽(李武燁), 진주시(晋州式) 놀음선수인 서울 덕수(德洙), 글 잘 쓰는 문술(文述)과 두 덕수(德洙), 설치기 조득제(趙得濟) 일화를 잘 아시는 분의 친절한 설명을 기대한다.

  • 2024-07-11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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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2) 10. 황소 목은 꺽어도 진주기생은 못꺽는다

황소 목은 꺾어도 진주 기생은 못 꺾는다논개· 산홍, 그리고 진주의 예인들 진주성(晋州城) 촉석루(矗石樓)를 바라보면 눈 맛이 절로 난다. 수다스런 단청도, 주책 맞은 니스 칠도 없다. 단아하고 기품이 있으며, 일체 속악한 것들이 발붙이지 못한다. 추한 것들이 진정한 아름다운 것을 짓밟는 행패 속에 얼마 남지 않은 진주(晋州)의 자산(資産)이자, 진주정신(晋州精神)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의기(義妓) 논개(論介)를 찾아서 가파란 바윗길(危巖)을 내려와 의암(義巖)에 오르면 시퍼런 남강 물 빛 속에 서릿발 친 여인의 눈매와 손가락 마디마디 피 멍이 물 든 가락지 낀 여인의 한(恨)이 비친다. 의기 논개가 지금 이 시간에도 진주성(晋州城) 의암(義岩) 아래 시퍼런 물속 저 어딘가에서 흉악한 왜추(倭酋)를 부둥켜 안은 채 아직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듯하다. 시인 강희근은 이렇게 말했다. ‘진주성의 아우성 소리를 흘러간 과거의 아우성이 아니라, 현재 이 시점의 아우성으로 듣는 사람이 향토에 얼마나 있겠는가?’ 임진왜란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종결된 것이 아니라는 역사의식, 바로 그것이 역사에 대한 살아 있는 접근이라는 뜻이다. 의기 논개의 정신을 오늘에 다시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에 부조된 의기 논개산홍(山紅)은 구한말 진주 기생이다. 을사오적인 매국노 이지용(李址鎔)의 죄를 꾸짖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광무 10년(1906)조 기록이다. 진주기생 산홍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하였다. 이때 을사오적의 하나로 지목되는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 이후 산홍의 기개와 관련한 기사들이 줄을 이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일본 특사로 가는 이지용에게 ‘일본에 산홍이 같은 기생이 또 있을까 두렵소’라고 비꼬았다. 『황성신문(皇城新聞)』에는 ‘미녀가 천금을 웃어넘기다(美人一笑輕千金)’라는 기사가 실렸다. 후학들에게 의리(義理)를 천명하고 강상(綱常)의 도리를 세우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한 유학자인 양회갑(梁會甲, 1884~1961)은 산홍의 절개를 칭찬하는 시(詩)를 남겼다. 바로 「기녀 산홍이 매국노의 죄를 나무라며 잠자리를 거절하고 스스로 죽다.(妓山紅 數罪賣國賊 不許寢 自死)」라는 시이다. 이렇게 매국노에게 당당히 맞선 산홍은 당시 진주 기생의 기개를 만천하에 알렸다.인터넷 자료구한말 기생 산홍(山紅)이 의기 논개의 사당인 의기사(義妓祠)를 참배하고 시(詩) 한 수를 남겼다.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이란 시이다. 의기 논개는 왜장을 안고 의암에서 순국해 천추에 의미있는 이름을 남겼지만, 자신은 일없는 세상에 태어나 피리와 북소리 따라 무의미하게 살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 「땅의 역사」의 저자인 박종인 작가가 진주를 방문해 산홍(山紅)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진주성과 촉석루, 그리고 의기사를 둘러보고는 ‘지조 있는 기생 산홍, 지조 없는 매국노를 심히 꾸짖더라’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박종인 작가와 인터뷰를 나눈 전 경남일보 논설위원 장일영이 이렇게 말했다. 황소 목은 꺾어도 진주 기생은 못 꺾는다. 그만큼 강단이 있다는 거다. 진주 기생의 강단(剛斷)은 절개(節槪)와 지조(志操)이다. 의기 논개와 산홍으로 이어지는 진주 기생의 계보는 진주걸인기생독립운동(晋州乞人妓生獨立運動)으로 이어진다. 황소 목은 꺾어도 진주 기생은 못 꺾는다 진주 기생의 강단(剛斷)은 절개(節槪)와 지조(志操)이다. 의기 논개와 산홍으로 이어지는 진주 기생의 의열(義烈)은 쉼없이 이어졌다.경성에서 독립선언문이 선포됐다. 1919년 3월 1일의 일이다. 그로부터 18일 뒤 진주기생조합원 50명이 태극기를 들고 경남도청에서 촉석루로 행진했다. 6명이 체포되고 고초를 겪었다. 바로 진주걸인기생독립운동이다.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는 이 사건을 두고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이라고 보도했다. 3월 19일에 진주 기생 한 떼가 구 한국 국기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 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하였으나 주모자 여섯 명의 검속으로 해산되었는데, 지금 불온한 기세가 진주에 충만하여 각처에 모여 있다더라’라고 적었다. 당시 진주 기생 한금화가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구금되었다.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자락에 이렇게 혈서를 썼다.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무궁화 다시 피누나’ 교방문화(敎坊文化)의 맥을 잇기 위한 진주 기생들에 대한 기록도 적지 않다.『매일신보(每日申報)』는 1914년 3월 12일 자 기사에 ‘진주 기생의 졸업식’을 보도했다. 주요 내용을 보면 ‘진주는 자고로 기생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나 금년에는 가무음률(歌舞音律)을 아는 기생이 하나도 없어서 유명무실이더니 작년에 기생 금련이가 이것을 개탄하여 기생조합을 설립하고 율객(律客) 중 유명한 김창조를 어렵게 모셔 와 기생들에게 음률을 가르치더니 본 월 7일에 수업식을 행하였는데 가야금에는 김귀연 명월이요, 양금에는 계선, 영옥, 매월 등인데 대대로 학습하는 기생이 다수하다더라’라고 보도했다. 진주 기생들의 선행(善行)에 관한 기록도 있다. 『매일신보』 1921년 2월 25일자에는 ‘진주예기 조합에서는 2월 23일 신구연극을 공연하기로 결정하고 그 수입금을 진주에 새로 설립된 공회당에 기부한다더라’라고 보도했다. 1928년 9월 21일자에는 ‘진주 기생 수해 구제 연주, 동정을 갈망’ 제하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진주권번에서 19일부터 2일간 진주지역기자단 및 북선수해구제회의 후원으로 관북 이재민 구제를 목적으로 연주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었다.『조선중앙일보』는 1933년 8월 14일자로 ‘진주 수해음악회 2일간 대성황’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주요 내용은 진주신문구락, 진주육학생, 진주기생권번 등이 주최가 되어 지난 8일과 9일 양일에 걸쳐 진주좌(晋州座)에서 수해구제 음악연주회를 개최했다는 것이다. 연주회에는 매일 밤 4~5백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이듬해인 1934년 8월 19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진주 여성단체 수해구제음악회’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진주여자위친계와 진주기생권번의 공동 주최로 진주좌에서 음악회를 개최했으며 권번기생들의 연주로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무대에 오르면 예인(藝人), 내려오면 천민(賤民) 서해안 배연신굿 중요무형문화재 김금화는 교방(敎坊)의 예기(藝妓)들이 무형문화재의 뿌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시선은 냉랭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무대에 오르면 예인(藝人), 내려오면 천민(賤民) 사실 현재 인간문화재로 대접받는 일부 예술인들의 문화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큰 집’은 ‘교방’이며, ‘큰 스승’은 ‘기생’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어쩌면 대한민국 무형문화재의 뿌리가 교방문화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지 못한 것도 교방문화와 예기였던 기생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때문이다. 하지만 진주 사람들은 교방문화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진주교방문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교방문화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교방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개선과 재조명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진주교방문화는 당시 만능 언테테인먼트였던 그들의 존엄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교방 문예의 부흥을 기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다.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플랫폼으로 방송을 보여주는 VOD 서비스인 OTT(OVER THE TOP) 방송인 ‘TIVING’에서 다큐멘터리 「기생, 꽃의 고백」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교방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긴 이유와 최고의 예인인 기생의 정의에 이어 기생이 시대의 희생물이자, 비운의 역사를 갖게 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의 게이샤들이 들어오면서 문화 예술적인 부분이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1942년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일본의 총동원령으로 기생에게 가무(歌舞)를 금(禁)하는 명령이 내려진다. 이로 인해 ‘접대만 하라, 접대부 역할만 하라’는 강제에 따라 접대부라는 용어가 해방 이후 전쟁까지 이어지고 일반 대중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이 뿌리 깊게 내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기생은 우리시대 최고의 예인(藝人)’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기생은 당시 최고의 예인이었지만 예인 대접을 받지 못했다. 기생에서 시작된 한국의 춤은 무대화, 제도화에 이어 문화재로 지정된 역사성과 기생이 일제강점기 말에 비록 천대를 받았지만 전통 가무악의 핵심을 이어받은 점도 지적했다. 해방과 전쟁 이후에도 전통 가무악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왔으며 대한민국 전통 예술의 명맥을 지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도 강조했다.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 권번 기생이 전통예술의 계승과 후대 전승의 역할을 한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문화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면서 ‘기생은 시대의 희생물이자, 비운의 역사’라고 끝을 맺었다. YouTube 채널의 「역사 돋보기」에서도 ‘조선의 기생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주제로 한국사회의 기생 인식에 대한 문제점 개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임영상 교수와 전통 춤이론가 김영희가 출연해 기생에 대한 인식변화를 요청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엔터테인먼트나 연예계에 대해 천하다고 여기는 사회적 시선도 결국은 기생에 대한 잘못된 편견의 연장선이라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언론도 ‘기생의 부정적인 인식 개선’에 나서고 있다.『중앙일보』의 오피니언 칼럼인 서소문포럼은 ‘아직도 기생을 깎아내리나’라는 제하의 칼럼을 게재했다. 주요 내용은 기생은 ‘우리 춤과 노래를 지켜온 종합예술인’이며 3·1운동 때는 독립운동에도 가세한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문화 각계서 재평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했다. 예단일백인(禮壇一白人)과 진주 기생 「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이다. 이 신문의 전신은 양기탁, 어니스트 베델이 설립한 《대한매일신보》다. 대한매일신보는 1902년 한국에 온 영국인 기자 어니스트 베델이 양기탁 등 민족 계몽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을 받아 창간한 신문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단 하루만에 동시에 총독부의 일본어판 기관지 《경성일보》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하여 제호에서 '대한'을 뺀 뒤 경성일보의 자매지로 재출범하여 1910년 8월 30일자 부터 발행을 시작했다.매일신보는 1914년 ‘예단일백인(禮壇一白人)’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연재했다. 당시 전국의 유명한 예인(藝人) 100명을 소개하는 코너였다. 매일신보에 소개된 예인 중 진주 교방 출신 기생 6명이 소개되었다. 화홍(花紅)「매일신보」의 1914년 1월 31일자 신문에 예단일백인 4번째 인물에 진주 출신 기생 화홍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화홍은 15세에 고향 진주에서 기생이 되어 16세에 경성으로 올라왔다. 당시 나이는 21세였다. 육자배기, 잡가, 시조에 능통했다고 되어 있다. 월중선(月中仙)「매일신보」의 1914년 2월 5일자 신문 예단일백인 8번째 인물은 진주 기생 출신 월중선이다. 월중선은 진주군 수정봉 아래 대안면에서 일대 명기로 태어났다. 10세에 기안에 입참해 진주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서울로 상경한 뒤 23세에 광교기생조합의 취체역(수석기생)이 되었다. 현금, 양금, 가야금, 승무, 검무, 입무 등에 재주가 있었다. 난홍(蘭紅)「매일신보」의 1914년 2월에 예단일백인으로 난홍이 소개되었다. 난홍은 13세부터 진주에서 동기(童妓)로 지내다가 15세에 상경했다. 광교기생조합에서 가무(歌舞)를 배웠는데 재주가 뛰어났다. 동료 가운데 제일 먼저 검무(劍舞)의 묘방(妙方)을 얻었고, 양금, 노래, 가사, 시조, 육자배기, 흥타령에 뛰어났다. 금홍(錦紅)「매일신보」의 1914년 3월 3일자 신문에 예단일백인 28번째 인물로 진주 기생 금홍을 소개했다. 금홍은 21세로 노래와 가사, 육자배기, 잡가 등에 능통했고, 그중에 단가(短歌)와 가야금을 잘했다고 한다. ‘경향 기생 중에 금홍 같이 가야금에 익숙함은 아마도 그 짝이 없을 것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농옥(弄玉)「매일신보」의 1914년 5월 1일자 신문에 진주 기생 농옥을 소개했다. 농옥은 14세에 상경해, 노래, 가사, 잡가에서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곡기생조합에서 체취역을 맡았는데 가야금과 양금이 장기었다. 매일 아침 여러 기생을 지휘해 기예를 배우게 하고 공익을 자담하고 자선을 표창하여 기생계의 선두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난주(蘭珠)「매일신보」의 1914년 6월 7일자 신문에 예단백인 97번째 인물로 난주가 소개되었다. 난주는 진주 출신으로 15세에 상경해 광교기생조합에 적을 두었다. 천성이 재기롭과 민첩하며 수신(修身)으로 기생계의 최고라는 평판을 얻었다. 황소 목은 꺾어도 진주 기생 목은 못 꺾는다. 의기 논개와 산홍, 그리고 예인으로 살았던 진주의 문화예술가들에 대한 새로운 시대 인식이 필요하다.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에 실린 진주 예기(晋州 藝妓)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출판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은 조선의 예기 611명의 사진과 이력 등을 기록한 화보집이다. 일제강점기 문화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이며 기생사 연구에 필수적인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성일보사의 사장인 아오야나기 고타로가 신구서림(新舊書林)을 운영하던 지송욱(池松旭)과 함께 제작한 책이다. 조선 전도의 미인의 사진과 기예와 이력을 수집하고 조선 언문과 한문으로 서술한 책이다. 발간 목적은 풍속교화를 달성하고 예기들의 용모와 기예를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조선미인보감에는 경성을 비롯한 진주, 대구, 동래, 평양의 권번 혹은 기생조합에 소속되어 있었던 예기 611명에 대한 개인 프로필과 사진을 싣고 있다. 예기들의 연령대는 9세부터 33세까지 다양하다. 조선미인보감에는 진주(晋州)의 예기(藝妓) 15명의 프로필이 실려있다. 원적(原籍)과 현 주거지, 이름과 나이, 그리고 대표적인 기예(技藝)를 상세히 적고 있다.조선미인보감에 실려있는 예기는 다음과 같다. 김영희(金英熙, 錦香, 30세), 김단계(金丹桂, 25세), 왕월출(王月出, 22세), 이매홍(李梅紅, 22세), 정진홍(鄭眞紅, 22세), 박농화(朴弄花, 21세), 강채희(姜彩姬, 20세), 이화향(李花香, 18세), 문초운학(文楚雲鶴, 19세), 이죽향(李竹香, 19세), 김계선(金桂仙, 18세), 황능파(黃綾波, 18세), 홍국화(洪菊花, 17세), 김학희(金鶴喜, 16세), 진선옥(陳仙玉, 16세) 김영희(金英熙, 錦香) 원적은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 평안동(平安洞)이다. 전명(前名)은 금향(錦香)이다. 기예(技藝)로는 각종 정재무(呈才舞)와 검무(劍舞)에 뛰어났다. 특히 노래(歌), 우계면(羽界面), 가사(歌詞)에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 김단계(金丹桂) 원적은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이다. 기예(技藝)로는 노래(歌), 각종 정재무(呈才舞), 서남잡가(西南雜歌), 양금(楊琴)에 뛰어났다. 왕월출(王月出) 원적은 진주군(晋州郡) 중안동(中安洞)이다. 기예(技藝)로는 노래(歌), 우조(羽調), 각종 정재무(呈才舞)를 잘했고 특히 진연때 추던 궁중무용인 춘앵무(春鶯舞)가 특기였다. 이매홍(李梅紅) 원적은 진주군(晋州郡) 진주면(晋州面)이다. 기예(技藝)로는 노래(歌), 우계면(羽界面), 각종 정재무(呈才舞), 남무(南舞), 검무(劍舞), 가야금, 양금, 삼미선(三味線), 경사잡가(京西雜歌)에 뛰어났다. 정진홍(鄭眞紅) 원적은 진주군(晋州郡) 진주면(晋州面) 대안동(大安洞)이다. 기예(技藝)로는 양금(楊琴), 가야금(伽倻琴), 각종 정재무(呈才舞)를 잘했다. 정진홍의 경우에는 특상(特上)의 기예라는 명칭을 붙였다. 특히 노래(歌), 우계면(羽界面), 가사(歌詞), 시조(時調), 검무(劍舞), 승무(僧舞)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박농화(朴弄花) 원적은 진주군(晋州郡) 진주면(晋州面) 내성동(內城洞)이다. 기예(技藝)로는 남방리요(南方俚謠), 각종 정재무(呈才舞)를 잘했다. 가야금(伽倻琴)과 산조(酸調), 삼미선(三味線), 내지요(內地謠), 국어(國語)에 뛰어났다. 강채희(姜彩姬) 원적은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이다. 기예(技藝)로는 노래(歌), 우조(羽調), 서남잡가(西南雜歌), 검무(劍舞)에 재능을 발휘했다. 이화향(李花香) 원적은 진주군(晋州郡) 진주면(晋州面)이다. 기예(技藝)로는 서도잡가(西道雜歌), 남도이요(南道俚謠)에 재능이 있었다. 문초운학(文楚雲鶴) 원적은 진주군(晋州郡)이다.기예(技藝)로는 각종 정재무(呈才舞), 춘앵무(春鶯舞), 무산향(舞山香), 검무)劍舞), 남방리요(南方俚謠)에 재능이 있었다. 이죽향(李竹香) 원적은 진주군(晋州郡) 진주면(晋州面)이다. 기예(技藝)로는 남방리요(南方俚謠)와 국어(國語)에 재능이 있었다. 김계선(金桂仙) 원적은 진주군(晋州郡)이다. 기예(技藝)로는 우조(羽調)와 남중잡가(南中雜歌)이다. 황능파(黃綾波) 원적은 진주군(晋州郡)이다. 기예(技藝)로는 서도이가(西道俚歌), 남방이요(南方俚謠)이다. 홍국화(洪菊花) 원적은 진주군(晋州郡)이다. 기예(技藝)로는 검무(劍舞), 양금(楊琴), 노래(歌), 우계면(羽界面), 각종 정재무(呈才舞), 춘앵무(春鶯舞), 무산향(舞山香)에 재능을 있었다. 특히 남중잡가(南中雜歌)로 이름을 날렸다. 김학희(金鶴喜) 원적은 진주군(晋州郡) 진주면(晋州面)이다. 기예(技藝)로는 남방이요(南方俚謠), 서도잡가(西道雜歌)에 뛰어났다. 진선옥(陳仙玉) 원적은 진주군(晋州郡)이다. 기예(技藝)로는 노래(歌), 우계면(羽界面), 남방이곡(南方俚曲), 춘앵무(春鶯舞)에 뛰어났다.

  • 2024-07-11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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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2) 9. 남강을 가로지는 다리는 몇개 일까? 썸네일 이미지

(STORY OF 진주2) 9. 남강을 가로지는 다리는 몇개 일까?

지역과 지역, 사람과 사람을 잇다배다리에서 김시민대교까지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보면서 ‘이 나라가 재건하는데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서울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는 한강(漢江)을 중심으로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보란 듯이 성공적으로 일궈냈다. ‘한강’은 역사, 문화, 자연의 보고이며, 한강의 다리들은 대한민국의 발전과 성장을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로 자리하고 있다.한강의 다리(橋)는 몇 개일까? 서울시의 한강 교량 정보에 의하면 반포대교와 잠수교를 같은 다리로 볼 때,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총 32개이다. 한강 최초의 다리는 동작구와 용산구를 잇는 ‘한강철교(1900년)’이다. 가장 먼저 지어진 인도교(人道橋)는 제1한강교라 불리는 ‘한강대교(1917년)’, 제2한강교는 영등포구와 마포구를 잇는 ‘양화대교(1965년)’, 제3한강교는 강남구와 용산구를 잇는 ‘한남대교(1969년)’이다. 한강의 기적은 바로 한강을 지나는 다리의 건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진주에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남강을 건너는 다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기회는 드물다. 도시를 구성하는 한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특별한 것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남강을 지나는 각각의 다리는 저마다의 역사를 간직하면서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을 잇는 가교역을 자임하면서 ‘진주 발전과 성장의 견인차이자, 상징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진주 남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몇 개일까? 진주시의 「남강 수계 교량 현황」에 따르면 총 15개의 다리가 있다. 수계(水系)는 ‘지표의 물이 점점 모여서 한 물줄기를 이루며 흐르는 하천의 본류나 지류의 계통’을 말한다. 남강 수계에 있는 다리를 순서대로 총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강 최초의 다리이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배다리(1914. 5. 16)’를 제외하고 대관교(대평면~산청군), 대평교(대평리~사평리), 진수대교(내동면~대평면), 오목교(판문동), 진주대교(평거동), 희망교(평거동~내동면), 천수교(신안동~망경동), 진주교(칠암동~본성동), 진양교(칠암동~상대동), 김시민대교(충무공동), 상평교(상평동~호탄동), 남강교(상평동~문산읍), 금산교(초전동~금산면), 월강교(대곡면~진성면), 장박교(지수면~의령군) 등 15개이다. 배다리 남강 최초의 다리, 배다리 조선시대 군사 요충지였던 진주는 목교(木橋)와 뱃나루(나루터)가 주요 통행수단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남강에 가설된 다리로는 십목교(十木橋)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진양지(晋陽誌)』에는 별원교(別院橋, 주의 안 봉명루 앞에 있다), 대사교(大寺橋, 진주성 북문 밖에 있다), 광탄교(廣灘橋, 청천의 상류에 있다. 겨울만 통행), 황류탄교(黃柳灘橋, 운당의 하류에 있으며 겨울만 통행) 등 29개가 있었다. 남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다리인 배다리(船橋)가 가설되었다. 일제강점기, 사천항을 통해 집결된 물자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남강을 건너는 다리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14년 5월 16일 우마차와 승용차의 통행이 가능한 배다리가 완공되었다. 배다리의 길이는 120m, 폭 3.6m였다.배다리는 일제가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 일대의 풍부한 물자를 약탈하기 위한 루트의 필요성에 기인했지만, 진주라는 공간의 일대 혁신을 초래한 계기가 되었다. 사천 등 서부 경남의 물자가 진주 도심으로 유입되면서 진주 도심이 변화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진주의 시내 풍경은 확연하게 변했다. 도심의 확장도 가져왔다. 배다리 가설로 인해 진주의 도심이 남강의 남쪽으로 확대됐다. 배 건너 먼당으로 불렸던 천전지역을 중심으로 한 ‘강남지역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강남지역의 도시화를 급속도로 진행시킨 동력은 진주~마산간 철도인 경남선(慶南線)의 개통(1925년)과 진주역의 영업개시(1925년), 남강철교(1927년)의 완공이다. 배다리는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유실된다. 이에 일제는 배다리를 대체하는 교량 건설의 필요성에 따라 1927년 남강 철교를 가설한다. 남강 철교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당시 서울의 한강교에 버금가는 안전한 교량이었다. 남강 철교의 가설로 인해 진주의 천전리를 중심으로 한 강남지역에는 공장과 기업이 생겨나면서 철도 물류 중심의 번화한 상업지역으로 번성했다. 진주지역에 가설된 다리로 인해 남강을 건너는 대표적인 운송수단이었던 대표적인 나루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루터는 지역과 지역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 운송수단이었다. 하지만 남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생기면서 교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진양호 전망대남강댐의 산물, 대관교 남강 수계 최초의 다리는 대관교이다. 산청군 단성면 소남리 관정과 대평면 대평리를 잇던 나루터 자리가 대관교이다. 대관교는 하류에 있는 남강댐보강공사 완료 시점인 1999년 1월 7일 착공해 2000년 7월 2일 준공됐다. 연장 560m, 폭 9.2m, 높이 10.5m, 경간 10개이다. 시행청은 경남도 남강댐지원사업소이다. 대관교를 통과한 남강의 물길은 다목적 인공호수인 진양호(晋陽湖)에 이른다. 진양호는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남강 다목적 댐의 산물인 진양호는 대평면민들의 삶의 터전을 앗아갔지만 소남리와 연결되어 삶의 공간이 더욱 확장되었다. 최근 산청군이 ‘경호강 100리길 자전거도로’와 진주시 대평면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산청군 단성면 대관교 구간을 연결해 친환경 자전거 문화확산을 꾀하고 있다. 상촌나루터수몰 지역과 진주를 잇다, 대평교(大坪橋) 대평교는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와 대평면 상촌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남강 다목적댐 보강공사가 완료되면서 대평면 대평리를 중심으로 남강댐 수몰 지역 주민의 이주단지가 대평면에 만들어졌다. 이에 진주 시내와의 원활한 교통로를 확보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2001년 대평면 대평리와 상촌리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된 다리가 바로 대평교이다. 1999년 6월 27일 착공해 2001년 8월 30일 준공되었다. 연장 376m, 폭 9.2m, 높이 10.5m, 경간 8개이다. 시행청은 경남도남강댐지원사업소이다.대평교의 건설로 대평면과 산청군 지역 간의 교류가 원활하게 되었고, 이 일대의 농업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다. 특히 진주에서 출발해 내동면~수곡면~대평면~명석면으로 이어지는 진주 남강 마라톤 코스는 아름다운 진양호반을 일주하는 코스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대평교가 있는 지점은 옛날 상촌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상촌 나루터는 남강에 나룻배가 최초로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남강 변에 생겼다가 사라진 수많은 나루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존속했던 나루터이다. 대평교가 건설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진양호를 가로지르다, 진수대교(晋水大橋) 진수대교는 진양호를 가로질러 진주시 대평면과 내동면을 잇는 다리이다. 지리산에서 흘러 온 덕천강의 물길이 닿는 곳이 진주대교이다. 남강댐 건설로 인해 형성된 진양호는 내동면 내평리 상촌마을과 수곡면 내촌리 내촌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를 집어삼켰다. 진주에서 수곡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사천시 완사면을 둘러가는 방법과 명석면과 대평면을 지나 우회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이에 진주시가 진양호를 가로지르는 진수대교와 부속도로를 개통했다. 진수대교는 1997년 11월 4일 착공해 2000년 10월 28일 준공되었다. 연장 830m, 폭 10.4m, 높이 10.4m, 경간 17개이다. 시행청은 수자원공사 남강댐관리단이다. 진수대교의 건설은 하동군 지역과의 연결은 물론 수곡면을 비롯한 인근 지역 농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수곡면은 대부분 농가에서 겨울철 비닐하우스를 이용해 딸기 농사를 지어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남강댐 발전소 아래 첫 다리, 오목교 진주시 판문동 남강댐 발전소 바로 아래에 작은 다리가 하나 있다. 남강댐 발전소에 아래에서 시작된 남강 물길 위에 만들어진 첫 다리이다. 옛날 땅 이름이 ‘오목내’라고 불렀다. 오목교라는 이름을 갖게 된 유래이다. 오목교는 남강댐 아래 오목내~내동면을 연결하는 다리로 1989년 11월 30일 착공해 1998년 12월 15일 준공되었다. 연장 100m, 폭 11m, 높이 11m, 경간 4개이다. 시행청은 수자원공사 남강댐관리단이다. 오목교는 진주에서 하동으로 이동하는 여행자들과 통근자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진주 시내에서 오목교를 지나면 한국수자원 공사가 운영하는 물박물관과 노을공원을 비롯한 휴양공간과 평생학습관 등 교육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남강 가로지르는 가장 긴 다리, 진주대교(晋州大橋) 진주대교는 진주시 평거동과 내동면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남강을 가로지르는 15개의 다리 중 가장 긴 다리이다. 대전~통영간 고속국도 개통(2000년 12월)을 앞두고 건설되었다. 고속국도에서 진주 진·출입이 가능한 서진주 IC와 남해안고속국도와 연결되는 정촌 IC가 가까이 있다. 진주대교는 1992년 12월 28일 착공해 1996년 12월 21일 준공되었다. 연장 1,160m, 폭 24.2m, 높이 17m, 경간 24개이다. 시행청은 한국도로공사 산청지사이다. 진주 남부권 개발 기폭제, 희망교(希望橋) 희망교는 진주시 신안·평거지역과 내동면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희망교의 개통은 상대적 낙후지역이었던 내동면과 정촌면 등 남부권의 발전은 물론 신안·평거지역 교통난 해소에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진주~사천은 물론 하동 간 국도와 곧바로 연결돼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로 진주의 새로운 관문역할을 하고 있다.희망교는 1997년 4월 27일 착공해 2011년 7월 30일 준공되었다. 연장 270×2m, 폭 10.95m, 높이 10~11.2m, 경간 5개이다. 시행청은 진주시이다.희망교 건설로 평거~내동~가좌동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주거 벨트라인의 형성과 도로변을 중심으로 한 근린시설 및 상업시설이 들어서 남부권의 미개발지역 발전에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천년 진주역사를 남강에 새기다, 천수교(天壽橋) 천수교는 진주시 신안·평거 택지개발지구와 망경동 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건설된 다리이다. 천수교는 사단법인 진주천년기념사업회(회장 하순봉)가 천년 진주의 역사를 기리는 기념비적인 사업을 추진하자는 과정에서 건설되었다. 당시 진주천년기업사업회의 목적은 ‘진주 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기념하고 지난 천 년을 더듬어 참다운 우리의 정신과 긍지를 되살려 이를 도약의 바탕으로 빛나는 새 역사를 창조하여 영원토록 계승한다.’였다.신안동과 평거동을 중심으로 한 대형 택지 개발로 인해 상대적 낙후 지역으로 떠오른 망경동 지역 개발을 위한 것이 천수교 가설이었다. 천수교 망경동 지역은 하동 방면 국도와 진주역 진출을 용이하게 하고, 석류로를 통해 남해안 고속국도 진주 IC와의 접근성을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천수교는 1992년 7월 14일에 착공해 1996년 11월 17일 준공되었다. 연장 284m, 폭 24m, 높이 11m, 경간 6개이다. 시행청은 진주시이다. 경남 도내 최초의 철교, 진주교(晋州橋) 진주교는 철골 콘크리트 구조물로 가설된 다리로는 경남 도내 최초이다. 진주교는 진주시의 중앙부와 칠암동, 강남동, 망경동 등 진주의 관문인 남부지역을 연결하는 주 통로이다. 더불어 ‘중앙동~칠암동’을 연결하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교통량이 많은 다리이다. 진주교는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건설된 이래 1980년 11월 옛 진주교보다 조금 아래쪽에 건설되었다. 1980년 11월 18일에 착공해 1983년 6월 17일 준공되었다. 연장 272.75m, 폭 25m, 높이 11m, 경간 9개이다. 시행청은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이다.진주교에는 논개를 기리는 뜻에서 교각 아래 부분에 거대한 황동 반지를 부착해 충절의 고장 진주를 상징하는 다리가 되고 있다. 진양교 야경 남강 가로지른 두 번째 다리, 진양교(晋陽橋) 도심 확대 등 진주 발전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칠암동과 도동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진양교 건설 이후, 도동 지역의 개발이 본격화된 것은 물론 진주시의 발전 방향이 동부지역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진양교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두 번째 다리이다. 1968년 9월 15일에 착공해 1969년 9월 14일 준공되었다. 이후 2004년 10월 21일에는 확장사업이 추진되었다. 연장 260m, 폭 18.9m, 높이 11.4m, 경간 13개이다. 시행청은 진주시이다. 상평교진주의 동쪽 관문, 상평교(上平橋) 상평교는 진주시의 동쪽 관문(關門)으로 상평동과 호탄동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진주상평공업단지 조성과 남해고속국도 진주 IC 건설로 도동지역으로의 접근성 확대를 위한 필요성에 따라 가설되었다. 상평동에 위치하여 상평동과 호탄동을 연결하고 있어 다리 이름을 상평교라 했다.상평교는 1987년 12월 29일에 착공해 1990년 12월 15일 준공되었다. 연장 320m, 폭 25m, 높이 10m, 경간 8개이다. 시행청은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이다.상평교는 진주상평산업잔지의 물류 이동과 남해고속국도, 도동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가설되었다. 현재 상평산업단지 입주업체, 진주시청 등의 기관들이 위치하고 있으며 호탄동 택지개발로 인해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진주 광역교통체계 변화 주역, 남강교(南江橋) 남강교는 진주시 상대2동과 문산읍 소문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남해고속국도 문산 IC 개통 시기에 맞춰 동진로와 문산IC를 직선으로 연결할 목적으로 가설되었다. 남강교는 1996년 6월 13일에 착공해 2001년 12월 31일 준공되었다. 연장 420m, 폭 30m, 높이 13.8m, 경간 8개이다. 시행청은 진주시이다.남강교 건설로 인해 고속국도 진입로가 상평교, 새벼리 방면에 이어 세 곳으로 확대되어 진주시 광역교통체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경남 진주혁신도시와 진주시내를 연결하는 핵심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금산교동부지역 균형발전의 핵심, 금산교(錦山橋) 진주시 초전동과 금산면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금산면의 대단위 택지개발로 교통난 해소와 진주 동부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가설되었다. 특히 금산면의 경우 신도시형 대단위 주거단지가 들어서고 공군교육사령부, 혁신도시 정착 등으로 새로운 인구의 유입이 가속화되는 지역이다. 금산교는 1993년 10월 25일에 착공해 1998년 3월 17일 준공되었다. 연장 400m, 폭 16m, 높이 8.5m, 경간 8개이다. 시행청은 진주시이다.진주의 동쪽에서 진주시내로 진입하는 관문인 금산교는 1936년 병자년 대홍수 이전까지 잠수교(潛水橋)였다. 금산면과 진주시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금산면(琴山面)에는 황류진(黃柳津)과 구암 나루터가 있었다. 황류진은 금산면 송백리 안담 남쪽에 소재했으며, 마을사람들이 진주로 가던 유일한 뱃길이자, 진주 사람들이 마산과 대구로 가는 나루터였다. 구암 나루터는 잠수교가 있던 자리에 있었다. 김시민대교진주혁신도시의 상징, 김시민대교(金時敏大橋) 경남 진주 혁신도시 서쪽에서 진주 시가지를 잇는 다리이다. 김시민대교는 혁신도시와 진주시의 동반성장을 위해 만들어졌다. 국내 최대 비대칭 사장교인 김시민대교는 주탑 상부에 논개의 정절을 상징하는 쌍가락지와 혁신도시의 진취적인 기상을 표현한 문양을 새겨넣었다. 경남 혁신 도시로의 원활한 진출입을 위해 진주시 상평동과 혁신도시 서쪽인 문산읍 소문리를 잇고 있다. 김시민대교는 2009년 12월 21일 착공해 2013년 7월 9일 준공되었다. 길이는 488.5m, 주탑의 높이는 120m이다.진주혁신도시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는 김시민대교는 웅장하고 당당한 진주성을 이미지화했다. 달빛 어린 남강을 품다, 월강교(月江橋) 월강교는 대곡면 덕곡리와 진성면 가진리를 잇는 다리이다. 진성면 북쪽에 있는 가진리와 대곡면 가정리를 잇는 가좌진(伽佐津)이 있었다. 월강교(月江橋)가 생기면서 사라졌다. 월강교는 1989년 9월 25일 착공해 1993년 11월 23일 준공되었다. 연장 390m, 폭 10.5m, 높이 10m, 경간 13개이다. 시행청은 경상남도이다.월강교는 ‘달빛이 달에 어린 다리’라는 아름다운 뜻을 품고 있다. 대곡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난 1007번 국도를 따라가면 월강교에 닿는다. 진주·의령의 경계에 서다, 장박교 장박교는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와 의령군 화정면을 잇는 다리이다. 장박마을은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옆에는 방어산이 자리하고 있다. 안계나루는 지수면 청담리 안계마을과 의령군 화정면 화양리를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장박교는 연장 380m, 폭 10.5m, 높이 16.5m, 경간 8개이다. 시행청은 경상남도이다.장박교는 진주시와 의령의 경계이다. 진주와 의령을 연결했던 의령 염창마을의 염창나루터는 1972년 남해안고속도로 개설 당시에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지만 장박교가 놓이면서 사라졌다.

  • 2024-07-11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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