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ur Jinju (고고한 진주) 2. 남강 스타일, 대평 스타일 -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남강 스타일, 대평 스타일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시간(時間)의 강(江) 위로 ‘3000년 진주의 비밀’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 최고 규모로 알려진 청동기시대 진주인(晋州人)의 삶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다. 남강(南江) 물결 따라 켜켜이 쌓인 역사가 면면히 흐르는 곳. 풍요(豐饒) 땅, 진주의 대평유적(大坪遺跡)이다. 남강을 이웃한 ‘대평(大坪)’은 이름만큼 넉넉한 품을 내어 주었다. 남강을 따라 사람들이 산 것은 10만 년 전인 중기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의 일이다.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에 들어서면서 진주 사람들은 남강을 곁에 두고 집을 지었다. 그렇게 풍요의 물줄기 남강의 물결 따라 청동기 시대 진주 사람들의 삶은 곧 역사가 되었다.‘3000년 전 진주의 비밀’을 품은 청동기 시대 진주 대평 유적은 아주 잠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후 진양호 아래로 사라졌다. 최대 1만 평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청동기시대 밭 경작지와 400여 동의 집터, 100여 기의 무덤, 옥과 석기를 만드는 공방, 고도의 토목기술과 노동력이 집약된 환호 등의 마을 유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남강 물결 따라 청동기 시대 문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3000년 전 진주인의 삶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晋州靑銅器文化博物館)이다. 남강 물결 따라 청동기문화를 만나다 풍요의 물줄기 남강 물결을 따라서 대평유적(大坪遺跡), 귀곡동유적(貴谷洞遺跡), 평거동유적(平居洞遺跡) 등의 많은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선사시대 진주역사의 발원지인 남강이 만들어 낸 ‘남강선사유적(南江先史遺跡)’의 현장들이다. 대륙문화의 종착지인 남강 유적은 신석기-청동기-삼한시대로 이어지는 선사시대 역사의 변천 과정을 밝혀주는 한국 고고학의 보고(寶庫)이다.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진양호에 삶의 터전을 내어 준 대평 사람들의 애환과 청동기시대 대평인의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남강이 품어 낸 청동기시대와 대평인(大坪人)의 흔적을 찾아 떠나본다.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번성했던 진주 남강유역의 청동기시대 진주지역 문화상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지난 2009년 개관했다. 특히 진양호의 아름다운 풍광과 어우러지는 야외전시장과 수변 산책로를 가지고 있다. 지난 2021년 9월 대대적인 시설 개선을 통해 체험형 콘텐츠 보강을 비롯해 쾌적한 관람환경을 제공하는 역사문화체험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대한민국 선사유적의 보고 대평유적은 ‘대평(大坪)-대평 그 이전’ ‘풍요(豐饒)-농경생활’ ‘기술(技術)-대평공방’ ‘영원(永遠)-무덤과 의례’로 요약된다. 남강 물결 따라 축적된 청동기 문화는 대평, 그 이전에서 시작된다. 대평(大坪)-대평, 그 이전 대평리 강 건너 마을인 상촌리(上村里)에서 대규모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이 발견되었다. 선(線)을 그어 표면을 꾸민 빗살무늬토기와 사람의 뼈가 보관된 독인 옹관(甕棺), 그 외에 돌로 만들어진 여러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더불어 조, 수수 등과 같은 잡곡이 불에 탄 상태로 발견되어 신석기시대 남강 유역에서 이미 농경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인 ‘새김 덧띠 무늬 토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토기의 입구 바깥쪽 아래에 덧띠라고 부르는 점토를 붙이고 그 위쪽에 사선 무늬를 깊이 새겨 넣은 형태의 토기이다. 돌칼, 붉은 간 토기 등과 함께중국 동북 지역의 농경문화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특히 상촌리 신석기 시대 14호 집자리에서 사람의 뼈가 보관된 독인 옹관(甕棺) 2점이 발견되었다. ‘상촌리 14호 옹관’은 옹관은 세워진 채로 발견되었다. 내부에서는 불에 탄 어른 뼈가 확인되면서 화장(火葬)과 같은 장례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풍요(豐饒)-농경생활 선사시대에 삶의 방식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는 농경(農耕)이다. 농경사회로의 진입은 인류의 삶의 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집단생활, 식량과 재화의 축적, 인구 증가, 수공업품을 생산하는 장인(匠人)의 등장과 함께 최첨단 기술의 결과물인 청동기도 받아들여진다. 청동기시대의 이른 집자리는 대평리 어은과 대평리 옥방마을에서 조사되었다. 네모 반듯한 방형 혹은 직사각형 장방형의 평면형태의 집자리에는 출입 시설과 화덕, 토기를 땅에 묻어 저장시설로 사용한 흔적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 초기의 토기로 새김 덧띠 토기와 낮은 바리 항아리 모양의 호형토기 등 다양한 토기들이 제작되었다.토기에 남은 조리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대평마을에서 출토된 토기의 경우 표면에 까맣게 거을린 흔적과 음식물이 끓어 넘친 흔적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음식을 조리했을까. ‘화덕에 토기를 잘 세운 후, 그 주위에 나무 등의 연료를 쌓아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청동기시대 농경에 사용된 도구들은 대부분 돌로 만들어졌다. 밭을 일굴 때 사용하는 괭이, 호미, 돌보습, 곡물 수확할 때 사용하는 반달 돌칼, 돌낫이 출토되었다. 사냥 도구도 보인다. 대평인들의 삶에서 사냥도 큰 부분을 차지했다. 사냥에 유용한 도구로는 돌 화살촉이 있고 돌창과 사냥 돌도 사용되었다. 함정을 파 놓고 짐승이 걸려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기술(技術), 대평 공방 농경사회 진입과 잉여 농산물의 증가는 대평인들의 재화 소비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자급자족 시기를 넘어 분업화·전문화 생산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강 유역에서는 이같은 전문 장인(匠人)의 등장을 엿 볼 수 있는 다수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분야는 토기(土器), 석기(石器), 옥기(玉器), 직조(織造) 등 다양한 분야이고 그 생산물은 교역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청동기시대 옷 제작과 관련한 유일한 유물이 있다. 바로 가락바퀴이다. 옷감을 펴기 위해 섬유 여러 가닥을 꼬아 실을 만들고 가락바퀴를 회전시켜 탄력 있는 섬유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대평 석기 공방’이 있었다. 청동기시대에는 나무와 돌을 이용해 도구를 만들었다. 대평마을에서 석기를 만드는 재료, 도구, 돌가루가 확인돼 석기를 만드는 전문적인 공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대평 옥 공방’도 주목할 만하다. 대평마을에서는 옥마석을 비롯해 가공 이전의 옥(玉) 원석(原石), 석영으로 만든 뚜르게, 활비비 추 등이 확인되었다. 대평의 옥은 남해안을 따라 축조된 여러 대형 고인돌에 부장될 만큼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다.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사용된 ‘가지 무늬 토기’와 ‘붉은 간 토기’도 있다. 가지 무늬 토기는 둥근 토기 몸체에 어깨 부분에 검은색 가지 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남 서부 지역에서만 발견된다. 영원(永遠)-무덤과 의례 농경의 보편화로 정착해 살게 된 사람들은 일종의 기념물로 ‘무덤’을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집 자리의 바로 옆이나 밭 한가운데 열(列)을 지어있거나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영역을 분리하지 않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내세관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늦은 시기가 되면 점차 생활공간과 무덤의 공간이 분리되면서 공동묘지가 만들어졌다. 더불어 고도의 노동력과 많은 재화가 투입되는 대형무덤이 조성되기도 했다. 죽음을 애도하는 의례는 청동기시대의 사회를 통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청동기시대 매장의례(埋葬儀禮)는 시신과 함께 부장품을 묻는 방식이었다. 부장 유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지 무늬 토기와 붉은 간 토기이다. 보통 가지 무늬 토기는 관 바깥쪽, 붉은 간 토기는 관 내부의 시신 옆이나 머리맡 혹은 발치에 부장한 특징이 있다. 남강스타일, 대평스타일 남강 유역의 지역성을 보여주는 독특한 문화요소가 있다. 이름하여 ‘대평스타일’이다. 대평리식 겹아가리 사발(大坪里式 二重口線 盌)이다. 이 사발은 입구 부분 바깥에 점토 띠를 덧붙인 후 입술 부분을 안쪽으로 비스듬히 깎아 내 단면이 두꺼운 삼각형을 띠는 토기이다. 남강유역에서만 확인된다. 입술 부분이 아래로 수평의 횡침선을 새긴 가로 줄무늬 사발(赤色磨硏土器)은 대평리식 겹아가리토기의 변형이다. 얇은 판석 몇 매를 듬성듬성하게 세워 긴 벽을 만든 석관묘(石棺墓)와 말각방형의 형태에 내부 중앙의 타원형 구덩이와 일부 중복되거나 일부 떨어지도록 두 개의 기둥구멍을 만드는 독특한 대평리식 집자리(大坪里式 住居址)도 남강유역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청동기 역사 탐험, 상설전시관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에서는 상설전시관과 야외 전시를 통해 수몰된 진주 남강 유역 청동기시대의 진품 유물과 실감 체험형 전시로 만날 수 있다. 상설전시관은 대평지역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청동기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상설전시관은 9개의 테마공간을 통해 대평 유적을 쉽게 알 수 있다.상설전시관의 첫 공간은 「가라앉은 비밀」이다. 진양호 아래 수몰되어 있는 대평리 유적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인트로 공간으로 암각화와 수몰 모습을 연출해 대평리 시대속으로 들어가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전이공간(轉移空間)공간이다. 다음은 「대평, 그 이전」이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에 이르기까지 시간적 흐름과 연혁을 이해하고 각 시대별 유물을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실감영상관」은 360도 입체 서라운드 영상관으로 타임가이드 호봇이 풍요로운 대평마을의 축제현장으로 안내한다. 「풍요, 농경생활」에서는 대평리의 이른 시기와 늦은 시기의 주거지와 토기를 확인하고 농경사회 모습과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기술, 대평공방」은 직조공방, 석기공방, 옥공방 등 대평리의 기술을 관람하는 곳으로 각 유물의 제작 방법 및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영원, 무덤과 의례」는 대평인의 권위와 죽음을 다룬 공간으로 환호와 부장양상, 제사유구를 확인할 수 있다. 「AR드론 관측실」의 「VR옥공방」에서는 가상현실로 대평의 특산품인 옥을 직접 제작해 보고, 여행을 마친 후에는 타임케슬 승강장에서 자신이 만든 옥 팬던트가 새겨진 굿즈(기념품)을 받을 수 있다. 「대평의 기억」 코너는 대평인의 식문화에 관련한 모습을 터치하면 해당 내용을 인터랙티브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연출하고, 모니터를 통해 움집, 망루를 움직여서 청동기마을을 직접 꾸며보는 참여형 방명록이다. 추억 저장공간, 야외전시장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에 들어서면 청동기시대 유적을 재현한 야외전시장이 눈길을 끈다. 야외전시장은 청동기시대 대평마을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이다. 마을을 보호하는 나무 울타리인 목책과 움집, 곡식을 저장한 다락 창고, 강변을 따라 넓게 펼쳐진 밭, 밥을 해 먹던 아궁이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다. 야외전시장 역시 9개의 테마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토기탐험」 코너는 박물관의 대표 유물인 대형 가지무늬토기를 전시하고 있어 추억을 쌓고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공간이다. 「호봇 공방」 코너는 청동기시대 늦은 시기의 옥 공방과 석기 공방으로 사용되던 말각 방형의 집 자리를 재현한 공간이다. 「다락 창고」 코너는 청동기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여러 가지 먹거리를 저장하던 다락 창고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공간이다.「진주네 집」은 이웃 부족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한 대평마을 사람들을 도와서 밥을 짓고 농기구도 수리해 보는 공간이다. 「대평이네 집」에서는 대평이와 진주의 움집 생활을 홀로그램 뮤지컬로 꾸며 놓았다. 「야외 아궁이」코너는 청동기시대 늦은 시기, 야외 아궁이에 함께 모여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던 모습을 재현한 공간이다. 「캐릭터 존」은 아름다운 진양호를 배경으로 다양한 대평 사람들과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공간이다. 「남강유역 움집 재현 실험」은 남강 유역에 축조되던 집 자리를 재현하는 실험으로, 1년 동안 존치·전시되면서 유지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무덤군」은 가호동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무덤을 이전 복원한 공간이다. 즐거운 놀이로 역사를 배우다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아이들이 즐거운 문화놀이터’로 변신했다. 역사 공부 대신에 즐길거리를 가득하다. ‘놀이를 통해 진주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한다.’는 전략은 기가 막히게 통했다. 박물관의 주 관람층이 자녀가 중심이 되는 가족 단위라는 점에서 확인된다.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은 시간여행 탑승권인 ‘옥 목걸이’를 받는다. 시간여행 가이드인 호봇의 안내를 받으며 풍요로운 청동기시대 대평마을로 타임워프(Time Warp)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받는다.미디어 체험 전시를 도입한 상설전시관은 풍요, 기술, 영원이라는 주제로 진주 대평 유적과 평거동, 초전동 등지의 진주 청동기시대에 출토된 진품 유물 4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청동기시대 대평마을의 생활모습을 재현한 전시모형(디오라마)와 AR맵핑으로 만날 수 있는 AR관측실에서는 청동기 시대 마을을 산책하는 듯한 편안한 공간 속에서 사냥, 목책 수리, 무덤 만들기 등의 게임도 즐길 수 있다. 특히 VR 옥 공방에서 만드는 옥 목걸이 팬던트는 관람객의 얼굴을 인쇄할 수 있어 ‘나만의 기념품’을 가질 수도 있다.새롭게 조성된 기획전시관에서는 ‘별을 보며 풍요를 빌다’라는 주제로 농경과 자신만의 별자리를 만들어 밤 하늘에 띄울 수 있는 체험도 할 수 있다. 물빛이 아름다운 진양호를 바라보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계단 전망 쉼터와 북카페인 옥방 쉼터도 박물관의 명소이다.야외전시장에는 청동기 주거지를 재현해 놓고 있다. 넓은 잔디밭과 호반 산책로가 자랑이다. 여기서 모션 인식형 체험, 홀로그램 뮤지컬을 즐길 수 있다. 아름다운 경관을 갖고 있는 야외 수변 공간에서는 XR망원경으로 수몰된 대평리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을 실감 기술로 물 위에 재현해 는 색다른 문화 체험을 제공한다.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선사시대 진주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진양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다양한 볼거리와 함께 3000년 진주역사를 간직한 선사시대 진주 특별시이다’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조가영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기획전시, 진주 평거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2024년 기획전 「진주 평거」를 선보였다. 이 기획전은 진주시 읍면동의 시대와 문화 흐름을 다루는 연속 기획전의 첫 번째로 평거지역(평거동 및 신안·판문동 일부)를 대상으로 했다. 예로부터 살기 좋은 땅 평거(平居)의 이미지를 진품 유물, 영상자료, IT전시기법 등을 활용해 친근하게 풀어냈다. 기획전 진주 평거는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 순으로 전시구성을 했다. 평거의 생활 변화상과 도시 발달사를 보여주기 위하여 국립진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평거동 출토 고고 유물 80여 점을 활용해 ‘평거 마을의 탄생’, ‘능숙한 농사꾼들의 마을’, ‘문명이 꽃피는 평거 마을’ 등의 주제로 입체적으로 전시했다. 특히 ‘영혼의 통로, 붉은 간 토기’ 전시는 3면 맵핑 영상과 투명 디스플레이를 활용하여 평거동에서 출토된 긴 목 붉은 간 토기에 담긴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망자에 대한 관념과 염원을 부각시켰다. ‘진주성도(晉州城圖)에 담긴 평거의 풍류’와 ‘평거지(平居誌)에 담긴 평거의 평안’ 전시에서는 진주성도(부산시립박물관 소장품)에 담겨진 촉석루에서 광탄까지 이어지는 뱃놀이의 모습을 평거산수도(平居山水圖)와 연계하여 미디어 전시로 재현했다.평거지의 실물 자료도 공개되었다. 이 자료는 1893년 우산 한약우(愚山 韓若愚, 1868-1911)가 작성한 것이다. 평거지에는 평거산수도와 유오서당도(柳塢書堂圖) 등 2장의 그림이 실려 있는데, 이 일대의 지명과 당시의 공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평거 일대는 1984년 진주 도시기본계획에 의해 주거지역으로 개발의 기본 방향이 수립되었다. 이에 ‘체계적 계획도시, 평거동’에서는 도시기본계획을 바탕으로 설계된 쾌적한 주거지역인 평거동 일대의 개발과 변천과정을 다루었다.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남강의 물줄기를 품고 있는 듯한 형상의 전시관과 청동기시대 마을의 모습을 재현한 야외전시장은 남강 유역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실감 기술과 다양한 전시기법으로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남강 물결 따라 청동기문화의 진수를 만날 수 있는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을 찾아 대한민국 최대, 최고의 선사유적지인 대평 유적과 함께 선사시대를 살았던 진주 사람들의 삶을 마음에 담아 보기를 권하고 싶다.
- 202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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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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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28

진주평론외전 백악관은 금칠을 한 감옥이다
백악관은 금칠을 한 감옥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명사(名士)의 자녀치고 문제가 없는 자식들은 드물었다. 총으로 자살을 기도한 스탈린의 장남은 “총 하나도 제대로 쏘지 못하는 주제에…”라는 스탈린의 책망을 들어야 했다. 장남도 장남이지만 차남은 알코올 중독이요, 외동딸 내외는 시베리아로 유배를 당했다.인도의 국부(國父) 간디의 장남은 아버지의 금욕생활과는 달리 아버지의 명성을 팔아 돈을 챙기고 이권을 넘나들다 결국 막대한 부채를 얻었고, 이를 이기지 못해 결국 결핵으로 변사했다. 그리고 처칠 수상의 자녀 셋도 자살하거나 알코올 중독으로 유치장 나들이를 일삼았다.그런데 꼭 그렇지 않은 명사의 자녀들도 있었다.링컨 대통령의 아들 로버트는 변호사, 장관, 외교관을 역임하며 명망을 유지했지만, 주위의 강력한 출마권고에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백악관은 금칠을 한 감옥’이라는게 그 이유다. 그런 그는 링컨의 후광을 피해 가며 여생을 존경받으며 살았다.서양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저분하게 누구 누구 아들이 그렇다고 일일이 적지 않아도 온 국민의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읽는 수고를 덜어주는 차원에서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는게 좋을 것 같다. 누워 침 뱉기에 다름 아니니 그냥 건너 뛰는게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이다.이러한 것을 볼 때 동서양을 막론하고 ‘후광은 액물’이라는 역사의 궤적을 좀체 못 벗어남을 절감케 한다. 큰 나무 아래에서 작은 나무가 자라는 것이 어려운 일이고, 후광을 입는 순간 자신에게 쌓일 마음의 짐을 벗기에는 그 후광이 너무도 무겁기 때문일까? 결국은 예나 지금이나 허세의 공작 날개를 접고 제 갈 길을 묵묵히 걸어 가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는 길에 다다르는 첩경인 셈이다.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을거라고 생각하는 독자는 없으리라.물론 천만의 말씀이다.대(代)를 이어 이라크와 악연(惡緣)을 맺고 있는 미국의 대통령을 보면 그렇다. 세계평화를 위한 일이라 공언했지만, 전 세계 곳곳에서는 이라크와의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反戰)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다. 영화시장을 제패하고 있는 미국의 헐리우드에 사는 영화배우들도 그렇고, 프랑스에서도 연일 반전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인간방패를 자처하면서 까지 이라크 주변국까지 날아갔지만 지금도 전쟁은 목하 진행중이다.물론 전쟁이라는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으며 과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고 있는 중이니 ‘잘한다 못한다’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른다.어느 유명 작가의 글을 보면 미국은 뉴프론티어나 뉴딜이니 하는 모험이 수반되는 니오니즘의 욕구를 응집하고 수렴하는 인물을 선호하는 나라라고 하니까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런데 정은 옛정이요, 구관이 명관인 우리 사회에서 과연 이라크 전쟁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비단 이라크 전쟁 뿐이 아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전쟁의 명분이 아무리 정당하다 할지라도 피해를 보는 것은 정작 국민들이다. 나라가 피폐해지고, 가정이 파탄나고, 가족을 잃고, 마침내 미래마저도 불투명해진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서부의 명화 ‘백주의 결투’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보안관 게리 쿠퍼가 출옥한 악당 4명을 기다렸다가 백주에 처치하는 간단한 줄거리지만, 영화는 팽팽한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관객을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청초한 미모의 신부 그레이스 켈리와 주제가인 ‘하이눈’이 없었다면 관객들은 숨이 막혀 끝까지 보지 못하고 영화관을 뛰쳐 나왔을 지도 모르는 영화이다.‘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결투’가 진행중이다. 어쩌면 결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두들겨 패기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관객들은 이를 숨막혀 하지 않는다. 이미 나중에 밝혀질 스토리가 백일하에 다 드러나서 그런건 아닐까? 후광은 액물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 202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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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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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18

피플&스토리 (진주사람) 6. 권현옥(權鉉玉) - 나눔의 중독, 그리고 행복
권현옥(權鉉玉) 나눔의 중독, 그리고 행복 ‘행복의 열쇠는 남을 진정으로 도와주는 일이고, 사랑은 주는 사람의 것이라는 말을 나는 믿는다. 환자와 의사로서의 우연한 만남이 아름다운 인연으로 맺어지면서 삶의 작은 기쁨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내 삶의 축복으로 자리하고 있다.’‘울지마 톤즈’로 널리 알려진 고 이태석신부가 수상하기도 한 국내 최고 권위의 의료봉사상인 제29회 보령의료봉사상 대상을 받은 권현옥(權鉉玉) 원장. 소외된 이웃을 위한 마음 나누기에 이어 인도, 우즈베키스탄, 네팔, 캄보디아 등지의 해외의료봉사를 통해 지구촌 이웃에게도 따뜻한 온정을 나누는 그에게 의료봉사는 행복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할 때, 그 아픔 속에서 더 넓고 더 따뜻한 세상이 보이며, 척박한 고뇌속에서도 아름다운 세상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그의 봉사하는 삶은 2001년 진주에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비록 처음에는 사소한 봉사와 나눔이었지만, 후일 소외계층에 대한 봉사는 물론 해외의료봉사로 까지 확대되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2009년 장애인복지센터의 부지매입 성금으로 1,000만원을 기탁한 것을 시작으로 장애우를 위한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후원을 이어가고 있다. 외국인근로자 무료진료소 운영에도 동참하고 있으며, 범죄피해자 지원을 위한 일과 성폭력 피해여성 치료와 후원, 학생 무료진료 , 보리수 동산 입소아동을 위한 후원 등 그는 눈길이 닿는 곳마다 봉사와 후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독실한 불자의 삶을 살며 불교성지를 다니는 의료봉사를 꿈꾸었던 그의 해외의료봉사는 네팔 룸비니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고, 그 후 인도, 캄보디아,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봉사활동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에게 있어 해외의료봉사는, 어느새 ‘따뜻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는 축복의 길이 되고 있었다. 친구와 마씨다, 그리고 아리 그가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친구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 함께 해외의료봉사를 하기로 했던 대학동창이자 20년지기 친구가 3년간의 시간동안 암과 싸우게 된 것이다. 3년동안의 투병기간동안 그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친구만 따라다녔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10년이라면 저 친구에게 5년을 주세요”라고 부처에게 빌 정도로 그는 간절했다. 그의 간곡함과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끝내 세상을 떠났고, 그는 방황했다. 6개월이 넘도록 마음잡기가 어려웠다. 숨 쉬고 아침에 눈 뜨는것 조차 귀찮았던 그는 법당에서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10년만 더 살다 가자. 먼저 간 친구의 삶까지 의미있게 채우자’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친구의 죽음이 아니었으면 저도 제 주머니만 채우고, 가족만 사랑하는 사람이 됐을 겁니다.”어릴때 사월 초파일이 되면 어머니를 따라 절에 올라가 놀고 오는 것이 그의 유일한 불교 연중행사였다. ‘살면서 누구나 겪는 힘든 시기에 불교를 알게 되면서 불교성지 의료 순례가 꿈이 되었다’는 그는, ‘부처의 어머니 마야데비의 후손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그렇게 그의 의료순례는 시작되었다. 인도와 네팔의 경계지점으로 부처가 태어난 불교의 성지인 ‘룸비니’에서의 의료봉사는 그가 결코 끝낼 수 없는 의료봉사의 긴 이정표를 만들어 주었다. 룸비니에서의 첫 환자는 ‘마씨다’였다. 청각과 언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언청이였던 ‘아리’라는 남자아이와는 남매였다. 장애아를 가진 두 아이의 엄마는 죄인처럼 얼굴빛이 어두웠다. 마치 죄인의 삶을 사는듯 했다. ‘신이 저 아이를 버렸다면, 내가 저 아이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정작 세 인연을 살리자는 결심을 했지만, 머리와 가슴만으로 해답을 구하기 어려웠다. 아리를 한국에 데려와 수술을 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그는 봉사하는 삶에 빠져들고 있었다.한국으로 돌아 온 뒤에도 마씨다와 아리 엄마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108 자비손’이라는 의료봉사단체이다. 처음부터 단체를 만들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참석한 모임에서 룸비니에서의 인연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도움이 되겠다’는 의견이 나왔고, ‘수술도 하도록 해보자’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후원단체로 발전했고, 1,000만원이 모였다.한국에서 수술을 하게 되면 최소 3,000만원의 비용이 필요했다. 난감해 하고 있던 차에 2시간 정도를 이동해 인도에서 수술을 하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아리는 수술을 했고, 마씨다에게는 보청기를 선물했다.그리고 그는 약속했다. ‘적어도 10번은 룸비니를 방문하겠다.’ 1년에 두 번씩 열 번을 룸비니를 방문하게 된다면, 그 자신도 즐거운 일일뿐더러 ‘조그만 진료실이라도 하나 차려 좀 더 체계적인 도움을 줄 수 도 있겠다.’는 희망고문이었던 셈이다.룸비니 108 자비손 성금이 모이자, 그는 ‘불행한 낙원 룸비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차 의료순례를 떠났다.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았지만, 친구와 친한 언니에게 약을 후원받은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냉정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룸비니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18명의 환자들을 수술했다. 그는 룸비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108명의 자비로운 손길 ‘108 자비손’은 그가 세상을 향해 맘껏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준 ‘희망 사랑 모임’이다. 룸비니 마찌다와 아리의 수술을 위해 자발적인 모금을 해준 그들이 있었기에 그가 불행한 낙원 룸비니에서 그토록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희망이 실현되는 모습을 경험하면서 문득 이런 말을 떠올렸다.‘성자가 신은 왜 이런 힘든 세상을 만들었느냐고 하소연하자, 하늘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도와 줄 수 있는 너희를 만들었다’룸비니를 다녀 온 뒤 2주일만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후배 치과의사는 ‘권현옥산부인과 선천성 장애인수술 후원회’라는 이름으로 동료 10명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아왔다. 진주와 서울의 약사 7명이 지인을 통해 도움을 주기도 했다. 도움의 손길이 계속 이어졌다. 한국여의사회, 경남의사회, 진주의사회의 지인들과 스님, 그리고 진주선학로타리클럽 회원들도 성금은 물론 봉사활동을 같이 하기를 희망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소식을 듣고 거금을 내기도 했다. 희망은 그렇게 확산되고 있었다.제일 가슴 벅찼던 일은 2년 전 인도에서 봉사를 했던 열린의사회 회원인 서울의 염약사가 교회성금 200만원을 선뜻 성금으로 낸 일이었다. 그리고 진주시여의사회의 큰 역할로 한 달 사이에 108명이라는 자비로운 손길이 만들어졌다. ‘108 자비손이라는 이름은 누구를 위한 손길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선한 마음을 찾기 위한 이름이었다’ 고맙고 따뜻한 이웃들의 손길이 룸비니의 기적을 만들었고, 그 기적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마음’이라는 그는 의료순례가 진행되면서 행복과 만족이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이웃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진정한 수혜자는 그 자신이었다.더 늦기 전에 진정 행복한 삶을 찾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의료봉사활동은 오히려 그에게 현실에서의 고통과 숙제를 잊게 만들고 진료에 전념하게 만드는 비타민이 되었다. 그리고 룸비니에서의 열악한 환경은 한국에서의 현실을 감사하게 만드는 행복충전소 역할도 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한다. ‘한국에서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열심히 벌어서 룸비니에 작은 병원을 하나 세우고 싶다’가까운 미래에 네팔에 작은 의원을 세우는 삶의 목표가 이루어진다면 진주의 이웃들과 다같이 룸비니의 등불이 되기를 바란다는 그는 간디의 말을 전한다.‘세상은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한 곳이지만, 필요한 것을 나누기에는 풍족한 곳이다.’이렇게 ‘108 자비손’과 함께 한 그의 의료봉사활동은 ‘행복을 키우는 삶의 나무’가 되어갔다.그런 그에게 2차 순례 당시 ‘엑따른니사’와의 만남은 의료봉사에 대한 소명의식의 필요성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녀는 임신 8개월의 난소종양 환자였다. 당시 수술을 권했지만 그녀는 수술을 망설였다. 수술이라는 행위 자체가 종교관에 어긋나는 관습이었던 탓이었다. 세 번째 의료봉사를 다녀온 그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도착하기 1주일전에 난소종양을 앓던 엑따른니사가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었다.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는 그녀를 다시 살려 낼 수는 없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은 그의 의료봉사활동에 새로운 전기가 된다.‘의료 오지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가 잘 모르는 사회가 아닌, 하루만 고생하면 갈 수 있는 가까운 이웃’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는 어느새 의료봉사의 전도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중독, 그리고 행복 눈에 밟히는 룸비니의 이웃들만 생각하면 괜스레 웃음이 난다. 네팔행 비행기표를 예약하는 순간부터 ‘행복’해지는 그는 이미 ‘중독증상’을 보이고 있다. 가족의 든든한 지지와 성원도 큰 힘이 된다. 봉사활동을 한 뒤 오히려 가족이 더 화목해진 탓이다.그는 스스로에게 ‘왜 봉사활동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한다. ‘옛날 나를 위해 돈을 쓸때 보다 행복하다’ ‘의사로서 스트레스도 덜 받고 소명과 보람을 얻어 행복하다’ ‘부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자로서의 삶이 행복하다’ 이미 그에게 봉사는 ‘행복’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해외봉사 이후 그의 생활방식도 확연히 달라졌다. 출․퇴근때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탄다. 떡국 쉬어도 버리지 않고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다. 흔한 테이크아웃 커피나 유명 메이커 옷도 사지 않는다. 화장품도 싼 것만 산다.그는 말한다. “돈을 쓸때 마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립니다. 그 사람들이 나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제 자신에게 오히려 엄격하게 되더라구요” 그가 검소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경제적으로 넉넉해서 해외봉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모를때는 내가 많이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을 알고난 후에는 내가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누며 사는게 사람의 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겁니다.”그의 해외봉사론도 확고하다.사람들은 봉사할 때 행복해 한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한 뒤 병이 완치되었을때 가장 행복하고 희열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런데 봉사를 하면서 동시에 희열을 느낄 수 있는게 바로 의료봉사이다. 어떻게 보면 의사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그리고 그가 여성의 몸으로 해외봉사를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다른 이들에겐 희망이 되기도 한다. ‘남자로 태어나야 대접을 받는 세상에서, 여자도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해외봉사에 대한 그의 말들은 열정으로 가득했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고 있었다.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은 그만의 봉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우리나라의 병은 아주 풍족하면서 나눌줄 모르는 것입니다. 예전에 풍족하지 못했을때가 오히려 행복했습니다. 한국인이 더 행복해지려면 나누는 삶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행복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귀영화라는 것은 다 갖춘다 해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위해 하나를 먹으면 그 하나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을 먹는다고 해서 200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먹을 것을 다른이와 나누면 200, 300 이상의 행복이 되돌아 옵니다. 이런 기분을 잘알기 때문에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권원장은 부산출신이고, 남편은 대구사람이다. 결혼 후 남편이 경상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게 되면서 진주에 정착했다. 그런 그의 ‘진주사랑’은 각별하다.‘내가 가장 잘한 것은 남편을 만난 것이고, 두 번째는 진주에 살게 됐다는 사실이다’그는 특히 진주성을 사랑한다. 매일 아침 진주성을 찾는다. 친구를 잃은 아픔을 달래준 곳도 진주성이었기에 각별하다. ‘진주성은 나라에서 관리해주는 개인 정원이라는 착각이 들때도 있다’고 할 정도다.그는 해외 의료봉사활동을 하기 훨씬 이전부터 국내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15년 전 마산에서 근무할 당시, 성폭력 상담을 시작으로 범죄피해자예방센터나 여성 쉼터, 성폭력상담소 등에 관여하면서 소외된 이들의 인권회복과 사회적 편견을 없애는데 힘을 보탰다. 진주시의사회의 장애아동봉사단체인 나누미도 그의 노력 덕분이었다.우연히 장애인 어린이 축제에 갔다가 즐겁게 노는 아이들과 봉사자들의 모습을 보고 감상문을 쓴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9년 6월 ‘진주시의사회 나누미’라는 이름으로 동호회가 만들어졌고 장애어린이 130여명, 유치원 4곳과 인연을 맺게 된다. 직접 활동하는 8명의 이사와 회비를 내는 45명의 회원으로 구성됐다.나누미는 1년에 4번의 행사를 한다. 5월 어린이날 행사와 7월 바다축제, 10월 가을 밤의 축제, 12월 크리스마스 축제가 그것이다.나누미뿐만 아니라 ‘더 많은 대한민국 의사가 엄마의 마음으로 장애아동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는 ‘진주시 장애아동의 영원한 키다리 아저씨가 될 것’을 약속했고, 지금도 실천하고 있다.2004년부터는 경상남도 의사회, 경상대병원, 열린의사회 등을 통해 우즈베키스탄,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 네팔, 아프리카의 오지로 해외봉사를 나섰다. 2009년 12월 혼자서 룸비니 지역으로 봉사를 떠났다. 그곳의 참상을 접한 그는 의료순례를 떠났고, 그는 룸비니의 희망이 되었다.2006년 경상대병원과 함께 한 우즈베키스탄 의료봉사에서는 피붙이 처럼 반겨준 고려인과의 만남으로 ‘나의 기쁨이 타인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2008년 베트남 봉사에서는 ‘신의 손을 가진 의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하찮은 피임약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의료오지에서는 기적의 약이 되었던 것이다.권원장에게 불교는 삶의 지렛대였다. 불자인 그는 평소 <금강경(金剛經)>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즉 집착없이 베푸는 보시라는 글귀를 가슴에 새기고 산다. 베풀었다는 생각조차 마음의 짐이 될 수 있기에 그는 항상 이 글귀를 되뇌인다. 여성, 장애인, 그리고 오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푼 그는 8여년동안의 의료봉사활동을 인정받아 ‘보령의료봉사상 대상’을 수상한다. 한국의 슈바이처 상으로 불리기도 하고, ‘울지마 톤즈’로 널리 알려진 고 이태석신부가 수상하기도 한 바로 그 상이다.그리고 진주시민들은 2011년 진주시민상을 수여했다. ▲학·경력1991 고신대학교 의대졸업1996 산부인과 전문의 취득1998 동마산병원 과장2001 목화산부인과 원장현 권현옥산부인과 원장2005~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운영위원2008~경상남도의사회 사회복지 이사 한울타리 운영위원 진주 성폭력상담소 자문위원▲포상2006 창원지검진주지청장 감사패2009 대한의사협회장 감사패2009 (사)열린의사회 이사장 감사패2010 경남의사 봉사대상
- 202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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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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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58

Story of 진주 (STORY OF 진주2) 6. 통역이 필요한 '진주사투리' 클래스
통역이 필요한 클래스진주 사투리 진주 사투리 에피소드 하나. TVN 예능프로그램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은 분야를 넘나드는 잡학박사들이 가진 지식을 대방출하는 프로그램이다. 특정 주제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해 다소 쓸모없어 보이지만 알아두면 흥이 나는, 수다 중심의 여행 프로그램으로 인기몰이를 했다.이른바 알쓸신잡3의 주인공들인 수다 박사 유희열, 잡학 박사 유시민, 문학 박사 김영하, 도시계획 박사 김진애, 과학 사 김상욱이 진주(晋州)를 찾아 떠나는 여행길에서 갑자기 ‘진주 사투리’가 주제로 떠올랐다. 일명, ‘통역이 필요한 진주 사투리 클라스’의 진수가 소개된 것이다. 유시민이 “진주 사투리는 부산 사투리 보다 더 쉽게 못 고친다”면서 진주 사투리를 대방출한다. ‘니 글쿠이 내 글쿠지 니 안글쿠모 내 글쿠나.’ 문학박사인 김영하가 “선생님, 한국말로 좀 부탁 드려요”하면서 박장대소를 한다. ‘우리말이었어?’ ‘맞어? 맞어?’ 하는 가운데 진주 며느리인 도시계획 박사 김진애의 명쾌한 통역이 곁들여진다. ‘니가 그러니까 내가 그러는거지 니가 안 그러면 내가 그럴 리가 있나.’ 사람이 언쟁(言爭)을 하다 보면 흔히 쓰는 용법이다. 진주에서는 굉장히 자주 쓰는 표현이지만, 처음 듣는 이에게는 외계어처럼 들린다. 이것이 바로 ‘통역이 필요한 진주 사투리 클라스’이다. 진주 사투리 에피소드 둘, KBS2 예능프로그램인 「스펀지」는 정보와 실험이 합쳐진 고품격 지식 정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다양한 주제와 실험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달해 주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KBS Entertain:깔깔티비의 「스펀지 레전드」 편에 ‘진주에서 언니를 이렇게 부른다구요? 상상도 못한 정체’라는 이름으로 진주 사투리를 소개하고 있다. 2004년 3월 6일자 방송이니, 20년이 넘었지만 지금 봐도 새록새록하다.‘진주에서 언니를 어떻게 부르는가’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출연자들은 상상도 못한 답을 내놓는다. 개그맨 홍록기는 ‘자야’, 가수 에스더는 ‘세야’, 가수 박상민은 ‘기집’ 등이다. 물론 오답들이다.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일까? 바로 ‘응가’이다. 경상도에서는 일반적으로 ‘형’을 ‘성’ ‘세이’ ‘응가’라고 부른다. 이중 ‘성’ ‘세이’는 ‘형’에서 나온 말이고, ‘응가’는 ‘언니’에서 나온 말이다. 진주KBS방송국에서는 진주사람들을 방송에 출연시키고 직접 네이티브 스피커로 정답을 공개했다. ‘응가, 내 하고 같이 가자!’ ‘응가 이기 얼마예요?’ 등의 실전 사투리를 작렬했다. 그리고 ‘떡집 언니’를 ‘떡 엉가’로 부르자 출연자들은 배꼽을 잡았다.스펀지는 프로그램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진주는 인심만큼이나 말도 정겹습니다.’ 진주 사투리 에피소드 셋. EBS 교양프로그램인 「장학 퀴즈」는 1973년부터 시작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내 장수 퀴즈 프로그램이다. 장학 퀴즈의 초대 진행자는 차인태 아나운서였다. 최근 차인태 아나운서가 모 언론 인터뷰에서 ‘장학 퀴즈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그중에 하나가 이른바 진주 사투리의 절정으로 불리는 ‘물 고매 사건’이다.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퀴즈의 답이 고구마였는데, 사투리 쓰는 학생이 ‘고매’라고 대답해서 틀린 적이 있어요. 나는 그게 사투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때 속으로 참 안타까웠어요.” 하도 오래된 일이라 당시 사건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하지만 대략 기억을 더듬어 보면 ‘물고매 사건’은 다음과 같다.장학 퀴즈 월말 장원전에서 장원을 결정짓는 마지막 문제가 출제되었다. 문제는 ‘일본에서 들여 온 농산물입니다. 식량사정이 어려웠던 농촌에서 구황식품으로 널리 애용된 작물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만 맞히면 역전이 가능했던 진주의 모 고등학생 참가자가 벨을 눌렀다. 그리고 정답을 외쳤다. ‘고매입니다’ 사회를 맡았던 정인태 아나운서는 학생의 대답이 사투리라는 것을 눈치채고, ‘두 음절이 아닌 세 음절’이라고 힌트를 주었다. 그러자 그 학생이 다시 정답을 외쳤다. ‘물 고매!’이것이 바로 ‘진주 사투리의 절정, 물고매 사건’이다. 진주 사투리는 진주의 토양에서 진주 사람들이 오랜 세월 가꾸고 꽃 피운 정신문화의 뿌리이자, 정신문화의 특수성, 보편성, 정체성이 배어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단순한 의사전달의 방편이나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문화를 창조하는 가교(架橋)로서 지역통합과 결속을 다지는 매개체이다. 진주의 정신문화를 가꾸고 꽃 피우는 기본적 자산으로서 길이 전승되어야 마땅하다.예전에는 사투리를 사용하면 웃음거리로 삼거나 ‘고쳐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사투리를 소재로 한 콘텐츠가 MZ세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다양한 콘텐츠와 서비스를 통해 대중들과 접촉하면서 ‘사투리의 가치’를 되새기자는 움직임이 늘고 있는 것이다.진주 사투리는 진주의 문화와 정체성을 담고 있다. 알쓸신잡과 장학퀴즈에서 든 사례는 진주 사투리가 가진 우리 말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는 언어적 자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진주 사투리 세상 밖으로 나오다 진주지역만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진주지역의 방언 7,200여 어휘가 수록된 책이 발간되었다. 바로 『진주지역방언집』(장일영, 2002, 금호출판사)이다. 발간 동기는 ‘할머니와 손자 사이에 통역이 있어야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저자는 진주 M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사투리 퀴즈’를 출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진주 사투리를 하나 둘 메모하면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진주지역방언집』이다. 그동안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졌거나, 농담거리 정도로 치부되던 ‘진주사투리’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된 순간이었다.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물론이다.진주 사투리를 대표하던 ‘에나’ ‘하모’ ‘단디’ ‘문디’ 등의 단어가 세상 밖으로 뛰쳐 나온 것이다. 무심코 평상시에 늘 사용하던 진주 사투리가 가진 파워를 새삼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현재 진주를 대표하는 캐릭터로 전국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하모’가 순수 진주 사투리임은 말할 것도 없다.진주 사람들의 생활언어 몇 가지를 보자. 진주 사람들은 글을 깨우치는 순간부터 ‘정지’가 부엌이고, ‘부석’이 ‘아궁이’임을 눈치채게 된다. 하지만 마당의 ‘삐가리통’과 ‘작수발’은 물론이고 ‘베릉빡’ ‘줄대불’은 도대체 알 도리가 없다. 읽기는 가능하지만 해석은 불가능한 답답함은 책을 통해 곧 해결된다. 삐가리통은 병아리 등을 가두어 기르기 위해 덮어 놓는 싸리나 대나무로 만든 물건인 ‘어리’이다. 작수발은 한끝을 엇결여서 동여맨 작대기로 무엇을 받치거나 걸 때에 쓰는 ‘작사리’이다. 베릉빡은 방이나 칸살의 옆을 둘러 막은 둘레의 벽을 가르켜 ‘바람벽’이라 한다. 줄대불은 벽에 옷을 걸 수 있게 만든 막대를 말하는 ‘횃대’임을 알고 나면 ‘아! 들어본 적 있다’ ‘옛날 우리 집에 다 있던 것들’이라면서 박수를 치게 만든다.진주 사람의 놀이에도 사투리가 점령하고 있다. 봄 날 뒷동산에서 뽑아 먹던 ‘삐삐’는 ‘뺄기’이고, 갓 물오른 소나무 가지를 꺾어 먹던 ‘송구’는 ‘송기’이다. ‘뻔덕’은 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을 말하는 ‘버덩’이다. 어릴 적 냇가에서 물수제비 뜨기를 좀 해본 기억이 있다면 ‘빤대치기’를 기억한다. ‘옹구발’은 짐을 싣기위해 지게에 얹는 소쿠리 모양의 물건인 ‘발채’이다. 싸리나 대오리로 둥글넓적한 조개 모양으로 만들어 걸어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다. 진주 중앙시장 나무전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갈비’는 먹는 소(牛)가 아니라 말라서 땅에 떨어져 쌓인 솔잎인 ‘솔가리’를 말한다.공부도 되고 재미있어 몇 가지 더 소개해 본다.‘데리’는 생소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나누어 낸 돈이나 곡물로 음식을 장만하여 나누어 먹는 것’을 뜻하는 진주 사투리이다. ‘소드레’라는 말은 알 턱이 없다. ‘이 사람에게는 저 사람 말을, 저 사람에게는 이 사람 말을 좋지 않게 전해 이간질함’을 뜻한다.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오늘 소드레 얹혔다’는 말을 무의식중에 사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진주지역방언집의 저자 장일영은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방언도 소수 민족어와 비슷한 운명에 놓여 있다. 길을 잘못 들어선 국어정책에다 대중매체의 발달로 지역 간 교류와 의사소통이 활발해지면서 그 소멸속도가 급속히 빨라지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지 모르나 ‘서울말’로서는 지역마다 다른 특유의 말 맛을 살려낼 수가 없다. 따라서 서울에 없는 좋고 아름다운 말은 과감하게 표준어로 올려 겨레의 말살이를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게 해야 한다. 진주 사람들이 자주 쓰는 진주 사투리.어릴적 씻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씽냉이’라고 했다. ‘꼬질꼬질하고 지저분한 얼굴’이라는 뜻이다. ‘쏘물다’는 ‘물건의 사이가 비좁거나 촘촘하다’이고, 마땅한 놀이가 없던 시절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를 갖고 놀던 ‘깔래’는 ‘공기놀이’이다.벅벅 거칠게 문지르는 것을 ‘응때다’라고 말했고, 대견한 사람에게는 ‘싸개라’,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손을 내저으며 아니라는 몸동작과 함께 ‘상구 아이다’라고 말했다. ‘씨사이’는 실없는 사람이고, ‘엉가’는 사람이나 동물의 배설물이 아닌 ‘언니나 형’을 이르는 말이다.진주 사투리는 엉청난 흡인력을 갖고 있다.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가 가지는 힘이다. 이것이 ‘진주 사투리 클라스’이다. 진주사투리 사전 발간으로 이어지다 『진주지역방언집』 발간 이후, 진주 사투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2010년에는 『진주 사투리』(조규태, 경상국립대학교)라는 학술서가 발간되기에 이른다. 기존에 발간된 진주 사투리 관련 서적과 현장 채록 작업이 시작되었다. 장일영, 조규태, 이창수 세 사람이 진주 사투리 사전을 쓰기로 마음을 모았다. 진주문화관광재단의 후원으로 『진주 사투리 사전』(장일영, 조규태, 이창수. 2021. 진주문화관광재단)이 출간되었다. 『진주 사투리 사전』은 ‘진주 사투리사전’ ‘진 주사투리의 특징’ ‘진주의 땅이름과 강역의 바뀜’으로 되어 있다. 진주 사투리 사전은 『진주지역방언집』을 바탕으로 ‘진주 사투리의 어휘를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싣고, 표기법, 발음, 어원, 의미, 용법’을 실었다. ‘진주 사투리의 특징’은 말소리와 특이한 단어, 문법형태소, 땅이름을 싣고 있다. ‘진주의 땅 이름과 강역의 바뀜’은 진주의 땅 이름의 변천사를 적고 있다.『진주 사투리 사전』은 진주 사투리 가운데 ‘특이한 단어’를 소개하고 있다.‘간게이’는 소금에 절인 생선이다. 진주에서는 ‘간게이’와 같이 생선의 종류에 ‘간’을 붙여 만든 말이 많이 있다. ‘간 깔치, 간 고등애, 간 조구’ 등이 그 예이다. 덧붙이자면 ‘간 조구’는 ‘소금에 절인 생선인 조기’를 말한다.비 온 뒤 마당에 자주 출몰하는 ‘거시’도 있다. 바로 지렁이를 말한다. ‘노란 조시’는 생소하다. 진주지역에서 달걀 껍데기 안쪽에 있는 단백질로 된 흰 부분을 가리킨다. 힌 조시에 둘러싸여 있는 생명체를 ‘노란 조시’라고 한다. 아침과 저녁에 생기는 노을은 ‘북새’이고, ‘살 밖’은 사립문을 말한다. 진주 사투리 중에 긍정적이면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있다. 바로 ‘세건’이다. 용례를 들자면 ‘어린애 줄 알았더니 제법 세건이 들었네?’ 혹은 ‘세건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네’이다. 표준말로는 ‘소견(所見)’이다. 대구지역에서는 ‘시건 없는 짓 하지 마라,’ ‘시건머리가 고거밖에 안돼?’로 사용된다.진주사투리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말은 ‘소풀’이다. 진주사람이면 소가 먹는 풀(草)로 이해하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표준어로 ‘부추’이다.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는 ‘솔’이라고 하기도 하고, 전라도 서부 일부 지역에서는 ‘소불’이라고 한다. ‘소풀’로 만든 찌짐의 종류를 ‘정구지’라고 부르는건 다들 잘 아실 것이다. 진주지역에서 사용되는 특이한 말 중에 ‘칼클하다’라는 말이 있다. 표준어로는 ‘깨끗하다’인데, ‘모욕탕에 가서 칼클키 씻고 오이라’ ‘일을 매듭질라마 칼클하이 끝내야지’등의 용례가 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들이 손가락을 하나 둘 접으면서 세는 숫자는 아직도 기억날 것이다.‘하나, 둘, 서이, 너이, 다아, 여서, 일고, 여덜, 아호, 열, 수물, 서른, 마은’ ‘진주 사투리가 진주의 토양에서 진주 사람들이 오랜 세월 가꾸고 꽃피운 문화’라는 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투리의 저력이 발휘된 이야기 한국 해병대의 산 증인인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이 언론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의 일화’를 소개했다. 인민군에게 통신기를 빼앗기자, 제주도 방언을 암호로 사용한 이야기이다. 한국전쟁 당시 해병 1연대가 SCR-300 무전기를 쓰고 있었는데, 몇 개가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인민군은 국군의 통신기를 이용해 통신 내용을 듣고 역습을 했다. 이에 공정식 사령관은 대평양전쟁 당시에 국군과 같은 처지에 있었던 미 해병대가 나바호 인디언 언어를 암호로 사용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제주도 출신 병사들을 암호병으로 차출했다. 제주도 방언은 제주 사람이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당연히 인민군이 국군의 통신내용을 훔쳐 들을 수 없었다. 전투가 끝난 뒤 이른바 ‘사투리 통신’의 공로로 당시 통신대장이었던 이판개 대위는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진주사투리사전』 미국 프린스턴 대학 한국학 컬렉션 소장 진주 고유의 토박이 말을 알리는데 공헌하고 있는 『진주사투리사전』이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한국학 켈렉션에 소장되었다. 기증된 책은 프린스턴 대학교 도서관 시스템에 등록되며, 도서관을 이용하는 모든 방문객들의 열람이 가능하다. 진주 사투리에 애정을 가진 민간 연구자에서 시작된 『진주지역방언집』은 진주사람들이 1000년 이상 사용해 온 진주 고유의 토박이말을 모은 『진주사투리사전』 발간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한류를 타고 미국 대학에까지 진주사투리가 전해졌다. TVN 교양 프로그램인 「알뜰신잡3」에서 잡학박사 유시민의 말을 인용한 ‘통역이 필요한 진주 사투리의 클라스’는 이제 진주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진주 사투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필요한 시대이다.
- 202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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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글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손글씨 우제 강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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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89

주간평론 공인(公人) 사용 설명서 2(feat. 관료)
공인(公人) 사용 설명서 2(feat. 관료) 공인(公人)이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시민들에게 직접 공개했다. 더 나아가 아예 휴대전화를 소통창구로 활용했다. 시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겠다는 뜻이다. 휴대전화에 제기되는 수많은 민원들도 직접 답장을 한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앞다퉈 벤치마킹을 하지만 진정성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이른바 ‘진심과 흉내의 차이’이다. 정원오 서울 성동구청장이 그 주인공이다. 정원오 구청장의 지표와 평판을 보자. 행복지수는 서울 자치구 중 상승률 1위, 포용지수는 25위에서 1위로 도약했다. 지역내 총생산(GRDP) 성장률도 서울 25개 자치구 중 2021년 기준 10.9%로 1위를 차지했다. 인물에 대해서도 진정성있는 ‘사람 중심 정치’라는 평가와 함께 높은 평점을 매겼다. 전국적인 화제를 모은 것은 당연했다. 요즘 세상에 판을 치고 있는 관료(官僚)가 아니라, 쉽게 볼 수 없는 제대로 된 공인(公人)이었기에 언론에서도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공인(公人)에 비해 관료(官僚)라는 단어는 부정적 의미로 곧잘 쓰인다. 관료의 사전적 의미와 용례를 살펴보자. ‘관료는 행정을 집행하는 임명직이다. 권력을 배경으로 국민의 의사와 사정을 무시하고 독선적·획일적으로 일을 처리하며,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는데 급급해하는 특성을 갖는다. 이를 비난하는 경우에 관료라는 말을 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전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굳이 나서서 오지랖을 떨 필요까지는 없다. 미국 행정학자 랠프 험멜은 「관료제 경험(1977)」이라는 글에서 ‘관료에 대한 5가지 오해’를 적시했다. 50여 년 전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순간, 저절로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하게 된다. 관료에 대한 5가지 오해를 살펴보자. 사회적 관점에서 관료는 ‘사람을 다룬다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관료는 사람이 아닌 사례(事例)를 다룬다.’ 문화적 관점에서 관료는 ‘정의·자유·폭력·억압·병폐 등에 관심을 갖고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관료는 통제와 능률에만 관심을 가진다.’ 심리적 관점에서 관료는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머리와 영혼이 없는 새로운 퍼스낼리티이다.’ 언어적 관점에서 관료는 ‘그들만의 언어를 쓰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 의견을 나누기보다는 어떻게 꾸미고 알리는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정치적 관점에서 관료는 ‘공공 관료제가 사회에 대한 봉사기구가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는 통제기구라고 생각한다.’고 진단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공인 사용 설명서’ 보다 ‘관료 퇴치 설명서’가 더 필요한 사회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공인(公人)의 탈을 쓴 관료(官僚)가 지금도 활개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도 관료사회에 남아 있는 ‘권위주의에 기반한 조폭 문화’를 목격하면 관료의 부정적 이미지가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창동 전 문화관광부장관은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의전 행위에 대해 ‘관료사회의 권위주의적 조폭문화’라고 회고했다. 지금도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각종 의전(儀典)이 횡행하고 있다. 흡사 조폭과 흡사해 보이는 이같은 ‘권위에 대한 복종문화’는 여전히 행정과 평범한 일반 시민과의 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확인하게 한다. 사실 의전은 관료만이 누릴 수 있는 달콤한 권력이자, 알면서도 모른 척 향유하는 관료의 속내이기도 하다. 물론 의전은 조폭문화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공인(公人)은 ‘지방 소멸을 걱정’하지만, 관료(官僚)는 ‘지역사회를 지배하는 통제기구가 되기를 꿈꾼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공인 사용 설명서’보다도 ‘관료 퇴치 설명서’가 더 시급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공인(公人)과 관료(官僚). 누구를 선택할지는 시민의 손에 달려 있다.
- 202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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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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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Tour Jinju (고고한 진주) 1. 익룡(翼龍), 진주 하늘을 지배하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
익룡(翼龍), 진주 하늘을 지배하다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 백악기(白堊紀) 익룡(翼龍)이 진주의 하늘을 지배했다. 일억 일천만 년 전 백악기 익룡의 땅이었던 진주(晋州)는 자연사(自然史)의 보고(寶庫)이다. 중생대 백악기 공룡(恐龍)은 진주 땅의 지배자였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육식공룡의 화석을 보유한 화석산지(化石産地) 진주는 1억여 년 전 백악기 자연유산(自然遺産)의 보물창고임에 손색없다. 진주에는 4개의 공룡화석산지가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천연기념물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공룡축제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경남 고성군은 화석 관련 천연기념물이 2개에 불과하다. ‘화석산지(化石産地) 진주(晋州)’의 가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세계 최대의 중생대 익룡 발자국 화석이 전시된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서 ‘고고(古古)한 자연사 여행’을 떠나 본다. 익룡(翼龍), 진주 하늘을 날다 세계 최대 규모의 중생대 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갈퀴 새’를 포함해 새 발자국 화석 642개와 육식공룡인 수각류의 발자국 화석 67개가 발굴되었다. 당시 이 화석산지는 문화재계와 학계를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진주는 다양한 중생대 백악기 생물들의 흔적인 화석이 존재하고 있는 세계 최대, 최고의 화석산지로 고고학계에 등장했다. 진주혁신도시 조성 공사 중 발견된 천연기념물 제543호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가 바로 그곳이다. 경남 진주 혁신도시 개발 사업 조성 공사 구역 내 입회 조사를 실시하던 중 토목공사 구역의 퇴적층에서 익룡 발자국 화석, 새 발자국 화석, 수각류 발자국 화석 등의 화석이 대규모로 발견되었다. 발굴 조사에서 발견된 익룡 발자국은 개수, 밀집도, 그리고 보존 형태 등에서 국내 최대로 발견되어 학술적 가치와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2011년 10월 14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 백악기 하늘을 지배했던 익룡과 다양한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익룡자연유산적 가치 세계 최대 규모의 익룡발자국 화석이 매우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발견되었다. 이는 중생대 백악기 당시 익룡의 행동 특성 연구와 익룡의 해부학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 특히 단일 지역 내에서 최고의 생물 다양성 군집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전 지구적인 백악기 공룡시대의 고생태와 고환경 이해에 있어 중요한 자연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이 지역에 분포하는 백악기 진주층은 호수 또는 호수주변부 퇴적환경에서 형성되었으며 발자국 화석의 생성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고고학계에 따르면 세계 최대 규모의 익룡 발자국을 비롯해 매우 잘 보존된 도마뱀 발자국, 세계 최소 랩터 발자국 등 진주에서 발견된 우수한 화석들이 가지는 가치와 중요성이 높다. 국내에서는 1996년 전남 해남에서 아시아 최초로 300여 점의 익룡 발자국이 발견된 이후, 경남 하동, 사천, 거제 등지에서도 나타났다. 하지만 진주의 화석산지는 규모 면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이 산출된 곳으로 관심을 모았다. 특히 발자국 화석의 경우에는 걸어 다닌 흔적인 ‘보행렬’도 5개 이상 발견이 된 것은 물론 보존 상태도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는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을 개관하고, 익룡 발자국 2,500여점을 비롯해 중생대 백악기 생물들의 화석을 전시함과 동시에 1억 1천만년 전 익룡과 공룡 등 당시 동물들의 발자국 화석을 보유한 진주의 고고학적 가치를 대내외에 알리고 있다.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에서 발견된 주요 발자국 화석은 익룡 발자국 2,486개, 새 발자국 1,220개, 육식공룡 발자국 122개, 초식공룡 발자국 47개, 척추동물 발자국 11개 및 악어·도마뱀·개구리·포유류 발자국 등 약 4,000여개인 것으로 보고되었다.현재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 전시된 주요 화석은 다음과 같다. ▲밀집된 익룡 발자국 화석 ▲ 아주 작은 아기 익룡의 발자국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개구리의 발자국 ▲ 세계에서 가장 작은 육식 공룡인 랩터의 발자국 ▲ 중생대 백악기 호수에 살았던 악어와 거북의 발자국 ▲ 가느다란 발가락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겨진 도마뱀 발자국 ▲ 캥거루처럼 뒷발 두 개로만 깡충깡충 뛰어다니던 뜀걸음형 포유류의 발자국 ▲ 수컷 육식 공룡이 짝짓기를 위해서 암컷 육식 공룡을 유혹했던 구애 흔적 ▲ 네 발로 걸어 다닌 포유류의 발자국 ▲ 정체를 알 수 없는 대형 척추동물의 발자국 등이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의 진주화석관(晋州化石館)에는 진주혁신도시 조성 공사 중 발견된 1억 1천만 년 전 살았던 익룡 발자국 화석뿐만 아니라 희귀한 도마뱀 발자국과 세계에서 가장 작은 랩터 발자국, 캥거루쥐 발자국까지 다양한 발자국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도마뱀 발자국희귀한 도마뱀 발자국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에는 전 세계에서 단 3개만 발견된 1억 1천천만년 전 도마뱀 발자국이 전시되어 있다. 도마뱀은 무게가 가벼워 발자국을 남기기 어렵고 서식지가 달라 공룡에 비해 화석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랩터 발자국 거대한 육식공룡의 이미지와 달리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룡인 랩터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발자국 길이가 1cm로 ‘진주에서 발견된 드로마에오사우루스의 발자국’이라는 의미로 ‘드로마에오사우리포미페스 라루스(Dromaeosauriformipes rarus)라고 불린다. 일반적으로 랩터는 세 개의 발가락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먹이를 낚아 채기 위해 위로 휘어져 있어 두 개의 발자국을 남긴다. 수각류발자국최초 발견, 억어 발자국 화석 혁신도시 조성 공사 중 가장 먼저 발견된 화석은 중생대 백악기 공룡과 함께 생활한 악어(鰐魚) 발자국 화석이다. 발견된 화석수는 2,486개이다. 악어는 앞다리는 5개의 발가락, 뒷다리는 4개의 발가락을 갖고 있다. 뜀걸음 포유류 발자국 화석 코리아살티페스 진주엔시스(Koreasaltipes Jinjuensis)는 ‘진주에서 발견된 한국의 뜀걸음 발자국’이라는 의미의 학명이다. 이 발자국 화석은 캥거루처럼 두 발로 깡충깡충 뛰어다녔던 작은 포유류이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의 진주화석관(晋州翼龍館)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익룡 발자국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진주에 살았던 익룡으로 추정되는 듕가리프테루스의 뼈 화석(복제)가 대표적이다. 진주익룡발자국전시관 내부세계 최고 익룡 발자국 화석산지 진주혁신도시에서 발굴된 익룡 발자국은 8개의 발굴 지층에서 2,500여 개가 발견되었다. 대부분의 발자국은 1, 4, 8층에서 800여 개씩 발견되었다. 특히 일부 익룡 발자국에는 물갈퀴와 발톱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어 ‘최대 최고의 익룡 발자국 화석산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진주에 살았던 익룡 진주에서 발견된 익룡 화석은 ‘듕가리프테루스 화석(Dsunggaripterus Weii)’와 ‘안항구에라 화석(Anhangguera Blittersdorfi)’이다. 듕가리프테루스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끝이 뾰족하고 길쭉한 턱으로 위로 굽어있고, 턱 앞부분은 이빨이 없으나 턱 뒤쪽에는 강하고 뭉툭한 이빨을 가지고 있어 부리로 조개 등을 찾아 이빨로 부숴 먹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안항구에라는 포르투칼어로 ‘늙은 악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약 4.6m의 큰 날개를 가지고 있는 중형급 익룡이다. 세계 최고(最古)의 개구리 발자국 진주에서 발견된 개구리 발자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4번째 발견이다. 개구리 발자국 화석을 보면 4개의 앞발과 뒷 발자국이 보존되어 있고, 연속적인 뜀걸음 보행렬(hopping trackway)이 관찰된다. 새 발자국 화석들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을 통해 새들이 개구리를 잡아먹기 위해서 이곳을 돌아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개구리 발자국 화석은 최소 1억 1천만 년 전에 개구리가 점프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증거이다. 보호각전 세계가 진주를 주목하다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들 논문들 중에 주목을 받고 있는 논문은 ▲ 세계에서 가장 작은 랩터 공룡 발자국(사이언티픽 리포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개구리발자국(백악기연구) ▲가장 큰 도마뱀 발자국(사이언티픽 리포트) ▲동북아시아 최초의 악어발자국(백악기연구) ▲뜀걸음형 포유류 발자국 ▲육식 공룡 발자국 화석 등 백악기 공룡생태계를 알 수 있는 다양한 화석들에 대한 연구였다.‘진주에서 최초로 발견된 화석’으로 이름이 명명된 것은 3종류이다. ‘드로마에오사우리포미페스 라루스’(Dromaeosauriformipes rarus), ‘네오사우로이데스 이노바투스’(Neosauroides innovatus), ‘코리아살티페스 진주엔시스’(Koreasaltipes jinjuensis)다. 더불어 새로운 종류의 익룡 발자국으로 테라이크너스 그라실리스(Pteraichnus gracilis)로 명명된 화석이 있다. 한국, 일본, 스페인에서 보고되었던 소형 익룡 발자국과 비교해 앞발자국에서 뒤쪽을 향하는 세 번째 발가락이 길이가 더 길고, 좁고 긴 형태를 보이고 있는 이 소형 익룡 발자국 화석은 중생대 백악기 동안 호수에서 퇴적된 진주층에서 발견되었으며 약 1억 700만 년 전에 살았던 익룡이 남긴 발자국이다. 중생대 백악기 화석산지의 중심, 진주 진주는 전 세계적인 화석산지의 중심이다. 현재 진주의 화석산지는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390호) ▲진주 가진리의 새발자국 및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395호) ▲진주 정촌면 백악기 공룡·익룡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566호) ▲진주 호탄동 익룡·새·공룡 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543호)가 있다. 진주 가진리의 새 발자국 및 공룡 발자국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395호로 새와 공룡의 발자국이 함께 남아 있는 드문 경우에 해당하는 화석산지이다.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세계적인 공룡과 새 발바국 화석산지이다. 원래 해발 55m 정도의 구릉지였다. 경남과학교육원 신축과정에서 화석이 발견되었다. 발굴 결과, 5개 지역에서 새 발자국 2,500개, 공룡 발자국 80개, 양 날개 길이가 20m에 달하는 익룡 발자국 20개가 발견되었다. 새발자국은 3종으로 나뉘는데 가장 큰 발자국은 길이가 419m에 달한다. 땅의 겉표면이 말라 거북이등처럼 갈라져 터진 모양과 물결자국 등도 발견되었다.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390호이다. 이 화석산지는 약 1억 년전 중생대 백악기에 물과 바람에 의해 모래와 진흙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퇴적층으로 두 개의 공룡화석층이 150m 사이를 두고 발견되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용각류의 지골, 발가락 뼈, 새끼 공룡의 좌골화석, 종류를 알 수 없는 두개골 화석 2점, 장골편 등 147점에 달하는 공룡화석이 발굴되었다. 오래된 토양층이나 나무 그루터기 화석, 숯 화석, 각종 과거 생물의 생활 흔적 화석 등 다양한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공룡이 살던 당시의 환경과 화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진주 정촌면 백악기 공룡·익룡발자국 화석산지 천연기념물 제566호이다.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과 익룡을 비롯해 1만 여개의 발자국 화석이 대거 발견되었다. 단일 화석지로 높은 밀집도와 다양성이 있는 화석 산지로 보고되었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로 보고되었다 7,000여개의 공룡 발자국이 집단 보행을 하는 화석이 발견된 것이다. 특히 2cm 남짓한 아주 작은 크기의 발자국부터 50cm가량 되는 대형 육식 공룡 발자국까지 나타났다.이 화석산지는 발자국의 밀집도, 다양성, 학술적 가치 측면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더불어 1억 년전 대한민국에 살았던 동물들의 행동양식, 서식환경, 고생태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진주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주요 화석산지이다. 진주 권역에 집중된 공룡 발자국 등의 화석의 보관과 관리, 연구의 필요성이 매우 높다. 현재 중생대 백악기 화석산지인 진주에 국립지질유산센터의 설립을 추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02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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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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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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