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2026.10.26 PM 16:19
79
진주 축구 100년 스토리, 4257에서 K4 우승까지
민족의 시간을 새긴 청년 축구단 4257축구단
시민의 이름으로 들어 올린 진주시민축구단의 K4 우승
진주시민축구단이 K4 리그 첫 우승을 확정했다.
지난 2019년 12월 창단한 이후 무려 일곱 해 만에 거둔 결실이다.
그동안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흘린 땀과 지도자의 노력, 구단 관계자와 시민들의 응원이 함께 만든 성취이다.
오는 11월 8일 진주종합경기장에서 열리는 마지막 홈경기 뒤에는 시민들 앞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릴 예정이다.
간만에 기쁜 소식이다.
이번 진주시민축구단의 K4 우승은 진주 축구의 오래된 기억을 돌아보게 한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기년법을 이름에 담았던 4257단, 전국대회에서 이름을 떨친 학교 축구, 올림픽과 월드컵으로 향한 선수들, 생활체육 현장을 지켜온 시민들.
우승컵 뒤에는 그렇게 쌓인 진주 축구 100년의 역사가 있다.
네 자리 숫자에 담은 민족의 시간
진주의 청년 축구인인 강수영, 정수만, 서종숙, 박학조 등 진주의 청년 축구인이 1924년 ‘4257축구단’을 결성했다.
축구단에 사용된 숫자는 그 해의 단기 연도인 4257년을 의미했다.
단기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원으로 삼는 기년법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활동하던 청년들이 팀 이름에 우리 역사의 시간을 새긴 것이다.
일제강점기 진주에서 활동을 시작한 4257단은 이름 때문에 탄압받았다.
일제는 4257이라는 팀명의 의미를 알아차린 뒤 책임자를 구금하고 강제로 해산시켰다.
순수하게 축구가 좋아 모인 진주 청년들에게 일제는 팀 이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4257축구단의 역사가 진주 축구사에 남긴 의미는 적지 않다.
먼저 축구단의 이름에 민족의 역사를 담았다는 점이다.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우리 역사의 시간을 팀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역사적 의미는 진주 축구와 청년운동이 연결되는 지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축구를 매개로 모인 청년들이 지역사회의 문제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더불어 진주 축구의 주체가 오래전부터 진주의 청년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진주 축구사를 더 깊게 기록하는 출발점이 됨과 동시의 진주축구의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계기가 된다는 측면에서 4257축구단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내려져야 한다.
우정환, 진주의 운동장에서 런던올림픽으로
일제강점기 진주의 축구는 학교 운동장에서도 성장했다.
동아일보 1936년 8월 1일자 보도를 보면 진주공립농업학교가 제8회 전조선중등학교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신문 기록은 진주 학생들이 전국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진주 축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우정환이다.
1914년 진주에서 태어난 우정환은 진주공립농업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공격수로 이름을 알렸다.
지역에서 성장한 그의 축구 인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를 가로지른다.
진주 축구가 전국무대에서 쌓아온 역량을 한국 대표팀으로 이어준 인물이었다.
우정환은 1948년 런던올림픽 최초로 한국 축구 국가대표로 출전해 ‘축구 국가 대표 최초의 올림픽 득점’과 ‘최초의 올림픽 8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는데 주축 역할을 했다.
진주는 진주공설운동장 3번 출구 인근에 우정환을 추모하는 비를 세웠다. 우정환을 추모하는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번개처럼 날쌘 철각과 무적의 드리블에다 총알 쏘는 듯한 슈팅의 위력으로 한국 축구 여명기의 갈색 포탄 같은 골로 기여했고, 오늘 세계 프로축구의 어디에 내세워도 뛰어난 별일 것임을 세상이 애석할 바다’

그의 별명은 ‘오토바이’였다.
빠르게 그라운드를 누볐던 공격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키 178cm, 몸무게 75kg의 뛰어난 신체조건에 100m를 무려 10초 9로 주파하는 스피드를 자랑했다.
학창시절엔 모교를 우승으로 이끈 우승제조기였다.
각종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어 우승기가 남대문 이북으로 넘어간 적이 없다며 격찬하기도 했다.
진주가 축구의 고장으로 명성을 떨치는 그 중심에 우정환이 있었던 것이다.
우정환은 지역 축구인들과 함께 뛰며 진주 축구의 명성을 쌓았다.
진주시체육회가 소개하는 1940년 밀양 개최 전국축구대회 우승 기념사진에는 우정환과 권창세, 김용하, 신기순, 조하구, 이강열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한 사람의 뛰어난 재능 곁에는 함께 달리고 승리를 일군 동료들이 있었다.
그의 축구 인생에서 중요한 장면은 1948년 런던올림픽이었다.
우정환은 한국 축구의 첫 올림픽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대표팀에는 김용식, 정남식, 정국진, 홍덕영 등 한국 축구 초창기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함께했다.
대표팀은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5대 3으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이어 스웨덴에 크게 패하며 세계 축구와의 격차를 경험했지만, 첫 올림픽에서 거둔 승리는 한국 축구사의 소중한 출발로 남았다.
진주에서 성장한 우정환도 그 도전의 일원이었다.

우정환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진주에서 공을 차던 청년이 세계무대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지역의 운동장과 올림픽 경기장이 한 선수의 삶을 통해 연결됐다.
우정환은 진주 축구가 한국 축구의 초기 역사에 남긴 중요한 이름이다.
조광래, 한국 축구의 중원을 설계한 ‘컴퓨터 링커’
우정환이 한국 축구의 첫 올림픽 여정에 함께했다면, 다음 세대의 조광래는 월드컵 무대에서 진주 축구의 이름을 알렸다.
1954년 진주에서 태어난 조광래는 봉래초등학교와 진주중학교, 진주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로 진학했다.
진주의 학교에서 성장해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 잡은 인물이다.
조광래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다.
당시 축구명문이었던 진주중-진주고 진학으로 충분하게 입증됐지만, 경기장에서도 영리하기로 따지면 단연 으뜸이었다.
‘컴퓨터 링커’라는 현역시절 애칭도 그만의 탁월한 두뇌 플레이의 소산물이다.
링커는 공격과 수비를 연결하며 경기를 풀어가는 선수를 가리킨다.
조광래는 정확한 패스와 영리한 경기 운영으로 이름을 얻었다. 공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느 순간 공격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그의 강점이었다.
한 언론에서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조광래 축구는 굉장한 마력을 지녔다. 그의 품을 거치는 선수는 차원을 달리하고, 그의 손을 거치는 팀은 뚜렷한 색채를 띤다. 그야말로 소리없이 강한 진정한 축구의 달인이 아닌가 싶다.’

조광래는 1970∼1980년대 한국 축구의 주요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1978년과 1986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힘을 보탰으며,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도 출전했다.
한국이 1954년 스위스대회 이후 32년 만에 돌아간 월드컵 본선에 진주 출신 조광래가 있었다.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에도 그의 축구는 이어졌다.
프로팀 지도자로 나선 조광래는 2000년 안양 LG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영표와 이청용 등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도 관여하며 유망주를 발굴하고 기르는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경남FC를 이끌던 시절에도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선수들의 기술과 판단을 살리는 경기 운영은 현역 시절 자신의 축구와도 맞닿아 있었다.
2010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진주의 운동장에서 시작한 축구 인생이 국가대표 선수에 이어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 확장된 것이다.
우정환과 조광래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력에는 공통점이 있다.
진주에서 자란 축구 재능이 전국무대를 거쳐 세계무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의 기록은 진주 축구의 자부심을 구체적인 역사로 보여준다.
서서히 드러나는 진주 축구의 저력
진주 축구의 계보는 두 사람에게서 멈추지 않았다.
우정환, 조광래, 최진한, 김판곤, 남태희, 김민우.
여러 세대에 걸친 진주 출신 축구인들이 선수와 지도자로 한국 축구에 이름을 남겼다.
진주중학교와 진주고등학교를 거친 최진한은 국가대표와 프로선수로 활약한 뒤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김판곤도 선수 생활에 이어 국내외 축구 현장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다. 경기장에서 쌓은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하며 진주 축구인의 활동 범위를 넓혔다.
후배 세대의 남태희와 김민우도 국가대표로 성장했다.
남태희는 봉래초등학교에서 축구의 기본기를 익혔다.
대표팀 경기를 마친 뒤 고향의 모교를 찾아 스승과 후배들을 만난 일은, 세계무대에서 뛰는 선수에게도 어린 시절 운동장의 기억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민우 역시 봉래초등학교에서 어린 시절 공을 찼다.
진주 축구를 기록할 때는 출생지와 성장한 학교를 구분하면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주에서 태어난 선수뿐 아니라 이곳에서 배우고 성장한 선수들도 지역 축구사의 중요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봉래초등학교에서 성장한 백지훈과 정종선, 진주고등학교를 거친 윤일록도 그 명단에 들어간다.
이들의 이름은 진주가 축구인의 고향이면서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의 터전이었음을 말해준다.
특정 시기에 뛰어난 선수 한 명이 등장한 도시와 여러 세대에 걸쳐 축구 인재를 길러낸 도시의 역사는 다르다.
진주에서는 선배가 떠난 운동장에 후배가 들어섰고, 그 후배를 보며 또 다른 아이가 꿈을 키웠다.
그렇게 이어진 이름들이 진주 축구의 저력이다.
스타의 뒤에는 진주시민이 있었다
선수들의 성취를 가능하게 한 것은 지역의 축구 문화였다.
아이들에게 공 차는 법을 가르친 지도자, 훈련과 경기를 뒷바라지한 가족, 학교 축구를 후원한 동문, 새벽과 주말의 운동장을 지킨 동호인들이 그 바탕을 이뤘다.
권창세의 이야기는 그 문화를 보여준다.
우정환과 함께 뛰었던 그는 회갑 비용을 아껴 우승컵을 만들고, 1975년 권창세배축구대회를 창설했다고 전해진다.
개인의 기념일에 쓸 비용을 지역 축구인들이 함께 뛰는 대회로 돌려준 것이다.
진주 축구사는 국가대표와 유명 선수들의 기록에 더해 운동장을 지켜온 사람들의 역사까지 담아야 한다.
학교 축구는 선수를 길렀고, 생활축구는 직접 뛰고 응원하는 시민들의 기반을 넓혔다.
그 두 흐름 속에서 축구는 진주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진주시민의 이름으로 들어 올린 우승컵
2019년 12월 23일 진주시민축구단이 창단했다.
이듬해부터 4부리그에 참가한 구단은 지역을 대표하는 성인팀으로 도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2026년, 창단 7년 만에 K4리그 첫 우승을 확정했다.
4257단과 진주시민축구단은 조직적으로 이어지는 같은 구단은 아니다.
그러나 두 팀을 진주 축구사라는 긴 시간 위에 놓으면 각 시대의 사람들이 축구에 담았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1924년의 청년들은 팀 이름에 민족의 시간을 새겼다.
오늘의 선수들은 진주의 이름을 달고 뛰며 시민들과 우승의 기쁨을 나눈다.
그 사이에는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학생들, 올림픽과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 다음 세대를 가르친 지도자들, 생활축구를 이어온 시민들이 있었다.
이번 우승을 오래 기억하려면 우승컵과 함께 그 시간도 기록해야 한다.
흩어진 사진과 대회 자료를 모으고, 원로 축구인들의 증언을 남기며, 학교와 동호회가 간직한 이야기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
우정환이 뛰던 시절의 기억과 조광래를 길러낸 운동장의 이야기는 다음 세대가 물려받아야 할 진주의 역사다.
진주 축구의 백 년은 이름을 지키려 했던 청년들과 더 넓은 무대에 도전한 선수들, 그리고 공을 놓지 않았던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왔다.
그래서 2026년 진주시민축구단의 첫 우승은 진주의 축구 역사에 새롭게 더해진 빛나는 한 장이다.
진주시민축구단의 K3도전에 힘찬 응원을 보낸다.
민족자본에 대한 침탈과 약탈로 얼룩진 일제강점기를 지나 근·현대 진주의 도시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서 진주 경제를 이끌어 온 수많은 기업과 기업인의 이야기를 최대한 담고자 했다. 진주라는 지리적 공간 속에서 변화된 진주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진주의 기업이 만들어온 진주경제의 역사를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도 매우 유의미한 일임에 분명하다.시간적 제약 속에서 진주경제를 함축된 표현으로 정리하는 일이 애초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인식했다. 결론적으로 시대를 관통하는 진주 경제의 핵심을 꺼집어 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힘들다. 어쩌면 거대한 진주경제의 흐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보는게 맞을지 모른다.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은 이 글을 통해 묵묵히 진주 경제를 이끌어 온 진주의 경제인과 기업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왔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기업가정신의 수도 진주에 걸맞는 기업과 기업인을 찾아내고 만나는 일도 의미 있었다. 일제강점기 민족자본의 침탈에 맞선 향토기업과 정체와 소외의 오랜 터널을 뚫고 근·현대 진주경제를 이끈 기업인들이 있었다. 이제는 이러한 진주의 기업과 기업인을 기억하고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는 시대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진주 경제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오늘날, 진주 경제의 과거·현재·미래를 담아내는 이러한 작업들의 연속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Memory of 진주경제』에 이어 ‘진주의 기업과 기업인’을 다루는 또다른 기회가 만들어진다면 부족한 부분을 조금이나마 채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진주 경제학(晋州 經濟學)’ 차원의 지속적인 학문적 연구활동의 필요성에 대해 숙의할 필요도 있다. 진주 경제학은 진주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을 연구하는 미시적·거시적 학문 활동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진주 지역의 성장과 발전, 변화 분석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경제적 현상을 이해하고 미래의 경제를 대응하는데 도움을 준다. 진주 경제인 주도로 ‘진주 경제학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진주 경제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진주 경제학 연구센터에 진주 경제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동시에 진주 경제의 흐름을 예측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기능이 보태지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진주경제에 대한 기억(Memory of 진주경제)』이 진주경제의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재설계하는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 경남경제의 중심지라는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시대의식의 발로가 진주경제를 이끈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뜻이다. ‘한 눈에 보는 진주 경제 이야기’가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덧붙이는 이유이다.
황경규
1110
이제 진주는 경남진주혁신도시 정착과 항노화 바이오산업의 약진, 차세대 미래산업인 우주항공산업의 도약, 경남국가항공산단과 미래운송장비산업 등으로 진주 경제의 장밋빛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항공우주부품·소재 강소 개발특구지정(2019년)과 항공우주분야 시험센터 개소(2020년), 뿌리산업단지 및 지식산업센터 조성(2020년), 수송시스템용 세라믹섬유 융복합센터 개소(2021년), 경남국가항공산단 조성(2022년), 사천 항공MRO단지 지정(2023년)에 이어 혁신도시 시즌2(공공기관 추가 이전), 우주항공청 사천 설립 등은 과거 진주 경제의 틀을 벗어나 가히 혁신적인 진주 경제의 틀을 구축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항공 우주도시로의 도약 진주가 우주산업 협력지구 위성특화지구로 지정돼 ‘항공우주도시’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초소형위성 ‘진주셋 원’ 개발 등으로 위성시장을 선점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2022년 진주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부터 우주산업 협력지구 위성특화지구로 지정을 받았다. 이번 지정으로 진주시가 국내 항공우주산업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다.진주시는 위성특화지구 지정과 함께 초소형위성 개발사업, 항공우주 관련 연구기관, 시험인증 기관, 교육기관 등 다양한 우주관련 산업 및 인프라를 잘 활용해 항공우주 분야가 진주의 미래를 바꿀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현재 진주시를 포함한 경남 서부지역은 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KAI), 한국항공서비스주식회사(KAEMS), 국방기술품질원, 경남테크노파크 항공우주센터 등이 입주해 있다. 항공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는 우리나라 항공우주산업의 전진기지로서, 국내 항공 산업의 70% 이상이 밀집돼 있는 지리적 특성을 살려 산·학·연·관이 협력해 항공우주분야 관련 기술창업, 기술 사업화, 연구개발 등을 추진 중이다. 수송시스템용 세라믹섬유 융복합센터 개소 경남의 주력산업인 항공, 자동차, 조선의 핵심소재부품 제조기반과 기업지원시스템 구축‧운영을 위한 세라믹섬유융복합센터가 2022년 2월 진주 혁신도시에 개소했다. 세라믹섬유융복합센터는 세라믹섬유 융복합 기반구축사업의 일환으로 지역의 신산업 육성을 위해 연구기반시설을 구축하고 기술개발을 지원함으로써 새로운 지역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사업이다.경남도와 진주시, 한국세라믹기술원이 2018년 산업부의 지역산업거점기관지원사업에 선정돼 유치한 '수송시스템용 세라믹섬유융복합 기반구축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했으며, 진주시 충무공동 소재의 한국세라믹기술원 옆 부지를 확보해 2019년 5월 착공했다.세라믹섬유융복합센터는 개별기업 차원에서 갖추기 어려운 고가의 첨단제조장비인 2,000℃ 초고온 열처리제조장비, 열가소성 복합재료 연속압출 성형장비, 로봇자동 고온압축성형장비 등이 갖춰져 있어 경남의 수송시스템 소재부품 제조업체들이 이를 활용하여 경쟁력 있는 제품을 생산할 것으로 기대된다.세라믹섬유융복합센터의 개소로 세라믹섬유를 융복합해 고기능 복합재로 만들어 지역의 주력산업인 우주항공을 비롯한 자동차, 조선해양플랜트 등 수송시스템 산업에 적용하는 미래 신성장산업의 핵심 사업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뿌리산단과 경남국가항공산단 진주뿌리산단은 항공·조선·자동차 등 전략산업과 연계한 남중부, 동남권 뿌리산업의 허브 산업단지로 지난 2016년 말에 착공해 2021년 1월에 부지 조성이 완료됐다.뿌리산업인 금형,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 주조, 열처리 업종뿐만 아니라 기타 운송장비 등 유치업종을 다양화해 정촌일반산단, 항공국가산단과 함께 고부가가치 신성장 동력 산업단지로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최근 고금리, 고물가, 고환율 3중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동산 경제 여건 속에서도 정부와 지자체의 우주항공, 교통, 도시 인프라 등 정책사업 호재가 잇따르면서 진주뿌리산단의 부지 분양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경남국가항공산단은 진주·사천 일대에 조성되는 대규모 항공우주산업 특화 산업단지이다. 항공우주산업이 가지는 국가적 중요도에 따라 경상남도에 항공우주산업의 60% 이상이 집적되어 있는 상태에서 항공우주산업을 보다 더 크게 발전시키기 위한 정부의 지원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진주시는 경상국립대학교 우주부품시험센터, 항공전자기기술센터 그리고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이 있다. 또한, 한국세라믹기술원 및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이 있으며 국방 부문으로 관련된 방위사업청 산하 국방기술품질원과 부설 연구소인 국방기술진흥연구소도 소재하고 있어 항공우주산업의 적지이다. 기업가정신 수도 진주와 기업인 기업가 정신의 힘은 국부 창출의 원동력이 된다. 지역 경제, 나아가 국가 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한 지역에서의 기업가정신의 확립은 중요한 일이다.일반적으로 기업은 경제 내 혁신을 촉진하고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유도해 지역의 경제성장은 물론 일자리 증가를 가져온다. 기업은 시대를 초월해 지역의 경제를 견인하는 역군으로 대접받아야 마땅하다. 다만, 한 지역의 기업가 정신이 특정 기업을 의미하는데 그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지역의 경제를 견인한 크고 작은 기업들이 이루어낸 지역경제에 대한 헌신을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지금까지 서술한 진주 경제 이야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진주의 기업과 기업인들은 때로는 격랑의 시대에서 때로는 소외와 정체의 시대를 견뎌내면서 진주 경제의 한 부분으로 제 자리를 지켜왔다. 일제강점기 일본기업들과 맞선 향토기업에서부터 현대의 최첨단 우주항공산업 관련 기업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기업도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진주의 기업가정신은 일제강점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헌신한 진주 기업과 기업인들을 기억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음은 진주 경제 역사의 산증인이자, 주요 산업별 대표 기업체 현황이다. ▲상업·유통진주상무사, 진주중앙시장, 농산물도매시장, 경남일보(고영진), 원창약방(원준옥), 진주극장, 천황식당, 구인회포목상점(구인회), 수복빵집 ▲식품·바이오산업진주전분공장(최재호), 진주양조(김백용), 진주곡자공업(이원휘), 기화제약(하용운), 진양농산(제양성), 고려식품(구자연), 설정식품(임승언), 장생도라지(이성호), 아미코젠(신용철), 휴림황칠(조창수), 선마린바이오텍(박시향) ▲ 견직산업동양염직소(추겸호), 진주제사, 조일견직(성재조), 해동제사·해동직물(최병주), 동명직물(신문기), 남강직물(류재기), 신화직물(권성근), 유창직물(백진웅), 수산직물(추태식), 남양염직(윤영표), 명화염직(최연동), 순실크(박태현), 그림실크(노권) ▲ 기계산업대동공업(김삼만), 대동기어(김수웅), 한국마그넷(강원근), 세일공업(최영태), 우성정공(성현석), 성화산업(노준형), 대신정공(구재홍), ITR인거스트리즈(이용재), 성광(김영욱), 코리아크롤러트랙(조행래), 대황정밀(김영수) ▲건설업대동건설(남기옥), 대경건설(이윤우), 한주종합건설(이상문), 흥한주택종합건설(강창근), 영남레미콘(최규진), 흥한건설(김회조), 양지산업(금대호) ▲화학·제지산업환일고무공장(문해술), 영진플라스틱(권석진), 해동화학(최종현), 대림화학(김명신), 신흥(김기석), 신흥화학(오세재), 진양화학(허성두), 진주특종제지(정영식), 신무림제지·무림페이퍼(이도균), 남강제지(하계백) ▲여객·운수업진주합동운수(정상진), 진주하주운송, 경전여객(강해리), 경진화물(서영환), 신흥택시(문상율), 부산교통(조옥환), 삼성공업(김성규), 삼성교통(김동기), 경원여객(강세민), 대동정비(양윤식), 한일교통(조재화) ▲ 항공산업 하이즈항공(하상헌), 에이엔에이치스터럭쳐(안현수) ▲ 미래운송장비산업우성정공(성재용), 케이엠씨(차재도), 일광금속(김말철)
황경규
1231
당시 진주는 공단종합시장(1981년) 설립에 이어 평거지구 택지조성사업(1987년), 중앙지하상가(1988년), 상평교 준공(1990년), 호탄지구 구획정리사업(1992년), 남해안고속도로 진주~광양(1992년), 신안택지개발(1992년), 이현종합시장(1993년), 실키안(1997년), 진주농산물도매시장(1999년) 등 진주 경제의 성장을 위한 발판마련이 가속화되고 있었다.공단종합시장은 진주시 하대동에 소재하고 있는 재래시장으로 1981년 12월 24일 개설되었다. 한국전매공사 경남지역본부 진주지사가 1987년 4월 1일 설치가 되고, 같은 해 11월 26일에는 상평3차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되었다. 12월에는 평거지구 일단의 주택지조성사업이 시행되었다.한국도로공사 경남지사 진주지부가 1988년 3월 2일 설치되었고 같은해 5월 28일에는 중앙지하상가가 개설되었다. 중앙지하상가는 2017년 6월 8일 ‘에나몰’로 새롭게 개장했다. 진주가 각 분야별로 경제 활성화를 위한 안정기에 들어선 것이 이 시기이다. 이에 따라 진주는 견직산업 육성과 농공단지 건설, 건설업 활성화, 바이오산업의 등장, 신선농산물의 수출 등으로 진주 경제 지표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진주 경제의 성장을 견인하는 필요충분 조건들이 충족되고 있었던 것이다.특히 한국견직연구원의 설립은 진주 견직산업의 발전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견직연구원은 견직의 제직·염색·가공·디자인에 관한 연구와 견직업체에 대한 기술지원 및 기술지도, 기술인력 양성과 생산비 절감, 그리고 품질향상을 위한 시제품 개발 지원 등을 통해 진주 견직산업 발전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한국견직연구원은 점차 퇴색해 가던 진주 견직산업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진주실크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에 힘이 되었다.진주지역의 건설업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시기도 이때이다. 진주를 대표하는 건설사와 관련업체로 영남레미콘(1985년), 한주종합건설(1985년), 흥한건설(1986년), 흥한주택(1990년)을 필두로 ㈜삼우건설(1986년), ㈜한반도건설(1990년) 등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한국실크연구원 대동공업 이전과 진주 경제 대동공업과 진주 경제는 따로 떼어 이야기 할 수 없다. 대동공업의 대구 이전으로 진주 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 경제는 일어섰다. 오늘날 진주 경제를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진주지역 기업체의 역할이 컸다. 다음의 글은 『스토리 오브JINJU』에 게재된 ‘대동공업과 진주’의 내용을 전제한 것이다.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1925년)이라는 치명타를 입은 진주는 두 차례의 경남도청 진주환원운동 역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데 이어, 정부 주도의 신흥공업도시 조성정책에서도 소외돼 198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낙후지역을 면하지 못했다.대동공업은 지역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유일한 향토기업이자 대기업으로 오랜 시간동안 진주경제의 핵심으로 자리해왔다. 당시로서는 촉석루와 남강, 그리고 대동공업이 진주를 상징한다고 칭할 정도로 진주와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 온 것이다.대동공업이 1986년 2월 경북 달성군으로의 이전을 최종 결정했다. 대동공업(주) 대구공장에서 개최된 제40기 정기주주총회에서 1986년 3월 1일부터 본점을 경북 달성군에 둔다는 정관개정이 통과됨에 따른 것이다. 진주상공회의소를 비롯한 진주시민들은 극렬하게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지난 1947년 5월 20일 대동공업사로 출발해 39년간 진주와 더불어 성장·발전해온 대동공업(주)은 1986년 진주를 떠났다. 대동공업은 1947년 5월 20일 대동공업사로 영업을 시작했다. 김삼만 회장 체제의 창립 초기에는 채 20명에 못미치는 근로자가 근무하는 가내수공업 규모로 운영되었다. 당시 대동공업에는 선반 4대를 비롯해, 공작 기계의 일종인 세이퍼 1대와 드릴링 머신 1대, 전기와 산소용접기 각각 1대씩을 갖춘 영세사업장에 불과했다.대동공업은 주한미군원조사절단(USOM)의 지원 아래 국제협력처(ICA) 차관을 받아 1960년 대단위 공장을 건립했다. 이후 1966년 대동공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바꾼 뒤, 가정용 송풍기 제작을 시작으로 경작용 쟁기, 제초기, 가마니 기계, 제승기, 탈곡기, 발동기 등 각종 농기구와 농기계를 제작했다. 더불어 1962년 대동공업의 대명사인 경운기를 국내 최초로 생산하면서 대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1968년 농용 트랙터, 1977년 이앙기와 바인더, 1982년에는 콤바인을 제작하면서 농기계 국산화를 이끌었다. 이후 대동공업은 국내 굴지의 종합 농기계 메이커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대동공업의 종업원 수는 1983년 기준 7천 여 명에 이르렀다. 대동공업이 진주시 산업경제의 4분의 3을 차지할 정도로 진주경제의 근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주시민들이 삶을 영위하는 삶 터이자, 진주경제의 뿌리였던 셈이다.대동공업은 1947년 창업 이래, 대한민국 최고의 농기계 제조업체로 성장해 진주산업경제의 핵심으로 자리해왔다. 당시 대동공업과 계열회사, 그리고 전문지정업체, 기타 부품제조 납품업체가 차지하는 공업생산고(工業生産高, 일정한 기간에 생산되어 나오는 재화의 수량이나 액수)가 진주시의 전 공업생산고의 50%를 차지했다. 더불어 대동공업과 계열사와 하청공장의 국세와 지방세 담세액이 진주시의 44%를 차지했음을 감안하면 대동공업이 진주경제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상 진주경제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대동공업 이전은 진주 경제의 근원을 뒤흔드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특히 진주의 시장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대동공업 이전이 임직원과 계열사·하청공장, 종업원의 연간 임금 120억원과 630억원에 이르는 물품대금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대동공업 이전과 관련해서 진주상공회의소와 지역 경제인들이 ‘대동공업(주) 진주유치대책협의회’를 구성하고 결의문을 발표하는 등 반대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대동공업(주) 김상수 회장은 1983년 1월 10일, ‘대동은 이전하지 않습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진주시 기점 10km이내 대동공업의 부지 물색 사실의 인정과, 분공장 건설의 필요성, 본사(주약동 156번지) 사업 주기종인 경운기와 부품생산을 위주로 한 본사공장 유지, 그룹회사 전문화 지정업체와 하청업체의 존속 등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대동공업(주)은 이전하지 않습니다’라는 방침을 재차 천명했다.하지만 대동공업(주)진주유치대책협의회는 ‘대동공업이 종전의 주장만 되풀이 하고 있다’는 판단하에 1983년 1월 13일까지 서명된 7만여명의 서명록과 건의문, 결의문을 가지고 관계요로에 진정한다. 건의문에는 ‘대동공업이 신기종공장 65,000평 규모를 타지역 공단에 신축하겠다는 발표는, 진주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며, 대동공업의 이전은 진주지역의 산업경제는 물론 진주시민의 생활의 부침과 생존상의 일대 위협이다.’라고 적시했다.특히 대동공업이 요구한 진주지역 입주요건 제시사항인 부지 6만평 확보문제와 세제혜택, 부족자금 100억원 지원, 부지대금 5년 분할상환 등에 대해 납득할만한 답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동공업은 경북 달성군 이전을 결행했다. 대동공업은 1984년 진주 본점을 대구공장으로 옮긴 후 공장부지는 주택업자에게 매각하면서 진주시 주약동 본 공장을 폐쇄하고 ‘대동공업 진주시대’를 마감했다.경남도청의 부산 이전과 대동공업의 대구 이전은 진주경제를 최소한 50년 이상 후퇴시켰다는 전망도 일부에서 제기되었다. 그리고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과 경남도청 진주환원운동의 실패와 더불어 대동공업의 이전은 진주산업경제의 근간을 뒤흔든 진주의 암울한 사건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진성농공단지 농공단지 건설과 신산업의 등장 전통산업인 농업이 시대를 지나면서 사양화되고 이촌향도 현상이 생기면서 지역의 경제적 기반은 더욱 위축되었다. 이에 지역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심화되면서 대도시 지역의 인구집중이라는 사회적 문제도 돌출되었다. 이에 정부는 농업만으로 문제 해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농촌공업화를 통해 소득원을 개발하기 위한 농공단지 개발을 추진했다. 농공단지는 농어촌지역을 개발수준에 따라 구분하고 단지개발 규모 및 지원내용을 차등화하는 것은 물론 농공단지 입주업체에 조세·금융등의 지원을 제공했다. 결론적으로 농공단지는 인력확보와 필요 시설 및 제품의 유통망 확보의 어려움으로 정상적인 공장가동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서 폐업사태가 속출했다. 하지만 정부는 운영난에 빠진 농공단지를 기초산업단지로 육성하기 위해 지원규모를 늘리고 면적한도와 부지조성비를 확대하는 등의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농공단지 조성은 농촌공업화에 의한 농촌소득원 개발사업으로 추진된 사업이다.이같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진주에도 농공단지 조성이 시작된다. 먼저 진성농공단지가 1989년 준공되었다. 진주시 진성면 상촌리 일대에 있는 공업단지로 1988년 5월 17일 지정되었고 1988년 12월 29일 착공해 1989년 7월 25일 준공되었다.이어 이반성농공단지가 조성되었다. 진주시 이반성면 길성리 일대의 공업단지이다. 1993년 7월 19일 지정되어 1994년 4월 1일 착공되었고, 1995년 10월 10일 준공되었다.대곡농공단지가 1996년 12월 27일 지정되었다. 대곡농공단지는 대곡면 와룡리 일대의 공업단지로 1997년 3월 착공되어 1998년 12월 31일 준공되었다. 사봉농공단지는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 일대에 있는 공업단지이다. 1996년 12월 27일 지정되었고, 1997년 12월 4일 착공되었다. 진주를 빛낸 기업들 진주 경제의 성장발판을 마련한 이 시기 진주지역의 기업체들은 견직산업, 건설업, 바이오산업, 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했다. 대표적인 기업들은 다음과 같다. 세일공업(1982), 남강제지(1982), 남양염직(1983), 명화염직(1983), 성화산업(1983), 고려식품(1982), 영남레미콘(1985), 한주종합건설(1985), 흥한건설(1986), 설정식품(1988), ㈜한반도건설(1990년), 대신정공(1988), 흥한주택(1990), 순실크(1990), 장생도라지(1995), 케이엠씨(1996), 일광금속(1996), 진양화학(1998), 드림실크(1999) 등이다.
황경규
1566
더불어 진주도청환원운동이 시작되면서 서남지구개발추진위원회가 1963년 발족되었다. 당시 진주상공회의소는 서남지구개발추진위원회의 활동에 이어 1964년의 제1차 도청환원운동과, 1977년의 제2차 도청환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8년에는 진주-하동-광양-순천을 잇는 경전선이 개통되었다.당시 진주는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서남지구개발추진위원회를 필두로 한 경남도청환원운동(1964년과 1977년)에 이어 진주청년회의소(1966년)가 설립되었다. 진주청년회의소는 ‘청년이 조국의 미래’라는 기치 아래, 지역사회 청년 경제인들의 친선도모와 협력을 통한 지역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상평공단의 태생을 예고한 상평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68년)이 추진됨과 동시에 같은 해에는 경전선이 개통되었다. 상습 침수로 해마다 수해를 겪었던 진주는 남강댐 준공(1969년 10월 7일)을 통해 택지개발, 공장용지 확보 등 진주 경제의 든든한 후원군을 맞이하게 된다.남강댐은 진주시 판문동과 내동면 삼계리 사이의 남강에 구축된 다목적 댐이다. 서부 경남의 생·공·용수 및 관계용수의 안정적 공급과 남강 하류 및 사천만 연안의 홍수 피해 방지, 수력발전 등 수자원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진주 경제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남강댐의 준공과 함께 남해고속도로 개통(1973년), 사천공항 항공기 취항(1969년), 진주시외버스터미널 건립(1974년)은 곧바로 진주 경제에 다양한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장대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70년)을 필두로 서부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71년), 칠암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1974년), 남강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79년), 봉원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1980년) 등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현대 신도시 진주의 면모를 갖추는 원동력이 되었다. 남강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1979년) 진주 경제 발전의 신호탄, 상평공단 사실 진주 경제는 진주상평산업단지조성 전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주상평산업단지는 지역산업구조 개편을 통해 진주 경제 발전을 이끈 신호탄이자, 선두두자인 셈이다. 남강댐 건설 이후, 홍수기 백사장이었던 상평지구의 택지개발과 공장 용지 개발이 추진됐다. 1970년대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에 따라 제1차 산업이 주종이었던 진주에도 제2차 산업인 공업화 정책이 시작됐다. 공업정책에 발맞춰 지방 공업 육성 방안으로 공단 조성 계획이 수립됨으로써 전형적인 소비도시에서 생산도시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이에 진주상평산업단지 조성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당시 진주에는 주택지 곳곳에 가내 공업 형태의 섬유공장과 국내 유일의 농기계 생산공장인 대동공업의 부품공장이 산재해 있었다. 이른바 기계부품과 섬유업체의 집단화를 통한 지역산업의 구조조정 촉진의 대안으로 자리잡은 것이 공단(工團)이었던 것이다.진주시는 1978년 3월 15일 건설부 고시로 지방공업 장려지구로 지정하고 공단조성 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했다. 이후 진주시는 상평지역에 남강 하류 지역의 상습 침수 지역인 상대지구와 상평지구 등 3개 동의 일부를 공업용지로 활용키로 승인했다. 때마침 정부 역시 1970년대 지방의 균형개발 정책을 통해 서울과 지방간의 경제 격차를 완화하고 각 지방의 특색에 알맞은 지방 공업 발전 및 고용증대를 목표로 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평공단의 조성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상평공단 조성 과정에서 진주시는 지방재정이 빈약하다는 점을 감안해, 공사비 대부분을 수익자 부담 원칙에 의한 입주자의 분양 가수입을 통해 재원을 조달했다. 상평공단의 유치업종은 입지 구역, 구조 위치, 부존자원 등 다각적인 검토를 통해 섬유, 기계금속, 제지, 식음료, 기타 등 6개 계열을 지정했다. 노동 및 기술집약적이고 공해가 적은 공장이 입주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완공 후 260여개의 기업이 입주해 2만 8,000여명의 고용 효과를 기대했다.진주상평산업단지는 1978년 3월 15일 건설부 고시 제25호에 의거 지방공업개발장려지구로 지정되었고, 상공부 고시에 의해 1986년 7월 19일 공업단지로 지정되었다. 1977년 10월 15일부터 1992년 12월 31일까지 조성해 기업체에 분양했다. 상평공단(2007년) 진주 경제 발전의 걸림돌, 그린벨트 완화 건의 진주상공회의소는 1997년 9월 22일 건설교통부에 ‘진주권 및 지방 중소도시 그린벨트 해제 건의’를 했다. 당시 건설교통부가 그린벨트내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조건부 규제완화 방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규제 완화에도 불구하고 진주시를 비롯한 지방 중소도시의 그린벨트가 규제완화 대상에서 제외됨으로써 이의 해결방안을 요구한 것이다.진주권의 경우 춘천권, 통영권, 제주권 등과 함께 관광자원과 자연보존이라는 특수목적으로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있었다. 특히 진주권의 경우 지정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하게 설정되어 있었다.더불어 통합 진주시는 서부경남의 중추도시로서 그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정부의 개발정책에서 소외되고 과도하게 설정된 그린벨트로 인해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또한 경남도내의 개발도시에 비해 경제 규모 및 재정 자립도가 낮은 상황에서 진주시의 장기 개발계획 수립시에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린벨트의 해제없이는 바람직한 도시개발과 지역발전을 이룰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진주상공회의소의 이같은 건의는 그린벨트가 진주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시대적인 인식 아래 취해진 조치였다. 하지만 그린밸트 해제와 규제완화는 여전히 진주 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오랜 기간 동안 작용했다. 이후 진주상공회의소는 1998년 3월 10일 진주지역에 신산업 단지 조성을 진주시에 건의하게 된다. 진주 상평산업단지가 가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진주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던 것이다.당시 진주상공회의소는 상평공단이 가진 문제점을 인식했다. 상평공단은 규모가 협소해 질 높은 생산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공단조성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신규공장 설립이나 공장확장 등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가폭등으로 인한 경쟁력 상실은 물론 도심에 위치함에 따른 효율적인 도시계획 저해와 각종 주민 민원 야기 등의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었다.이와 함께 입주기업들의 용지난 심화, 정부의 광역개발계획에 따른 적극적 지역개발, 통합 진주시의 생산 기반시설 확충 필요성, IMF체체 극복 이후의 입주기업 시설 확장 애로 등에 대한 지적과 함께 신산업 단지 조성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했다. 이같은 진주상공회의소의 진주 경제 활성화를 위한 노력은 1988년 대곡농공단지 조성을 시작으로 추진된 농공단지 조성 등으로 진주 경제의 성장 발판을 구축하는데 유의미한 역할을 했다. 진주 경제의 디딤돌, 기업 진주 경제 발전의 버팀목이 된 진주상평산업단지의 조성으로 진주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에 진주에는 진주 경제를 이끌어 갈 기업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견직산업과 농기계산업에 이어 화학산업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 진주에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이 시기(1961~1980) 진주직물공업협동조합(1962년)이 설립된다. 당시 섬유업계의 어려운 재정적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동양염직 대표였던 추연택을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해 설립했다. 당시 100여개 업체 중 비교적 큰 규모의 50여 개 업체가 참여했다. 진주직물공업협동조합은 1996년 조합명칭을 경남직물공업협동조합으로 변경했다.이어 진주지역 대표적인 운수업계인 부산교통(1963년)에 이어 삼성교통(1965), 경원여객(1966년), 한일교통(1967년)이 차례로 등장했다. 견직산업 분야에서는 남강직물(1965년), 신화직물(1972년) 제지업계로는 진주특종제지(1965년), 신무림제지(1973년) 기계로는 대동정비(1968년)와 영진플라스틱(1969년)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이후 신흥(1973년), 대동기어(1973년), 한국마그넷(1973년), 진주상호신용금고(1973년), 대동건설(1973년), 유창직물(1975년), 신흥화학(1976년), 진양농산(1977년), 수산직물(1978년), 대경건설(1979년), 우성정공(1980년)이 진주 경제를 이끌었다.
황경규
1004
조규일 진주시장 좌하 ‘관치 식민지 시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의 자치가 철저히 배제되고 일본인 총독과 관료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식민지 관치 체제’를 말합니다. 이 시기의 행정은 일본식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그대로 계승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자치제도는 허울뿐이었으며, 경제는 관치금융과 관치경제로 대표되며, 사회 통제를 위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했습니다. 해방정국과 군사정권을 거쳐 민주주의가 정착된 작금에, ‘관료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