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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사람) 2. 조광래 '단디해라 힘들 때가 승부다'

  • 작성자

    황경규

  • 작성일

    2025.07.14 PM 16:17

  • 조회수

    321

한 언론에서는 조광래를 이렇게 평가했다. ‘조광래 축구는 굉장한 마력을 지녔다.  그의 품을 거치는 선수는 차원을 달리하고, 그의 손을 거치는 팀은 뚜렷한 색채를 띤다.  그야말로 소리없이 강한 진정한 축구의 달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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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래(趙廣來)

 

단디해라, 힘들 때가 승부다

 

축구장은 사각의 링이다. 그곳에는 울분, 눈물, 땀, 좌절, 환희, 재기, 희망이 공존한다. 그래서 ‘축구라는 스포츠에는 사람의 모든 감정과 철학이 녹아 있다’고 한 조광래의 말은 맞다. 50여년의 축구인생을 걸어 온 그에게서 대한민국 축구 역사의 어제와 오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축구인으로서는 최고의 명예인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지금은 진주축구와 한국축구의 미래를 위한 유소년 육성을 위해 ‘조광래 축구재단’을 운영하며 새 삶을 일구고 있는 조광래(趙廣來, 1954~ ) 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

그는 일상에서 ‘단디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똑바로 잘해라’는 경상도 사투리이다. 하지만 그가 쓰는 ‘단디’의 의미는 특별하다. 특히, 사각의 그라운드에서는 애틋함과 간절함이 담겨 있으며, 자율, 자신감, 책임감이 혼재하는 그만의 독특한 언어이다. 

‘단디’라는 말이 재미있는건 사용되는 의미가 상당히 폭넓다는데 있다. 그에게 단디란 ‘자유롭게 꿈을 펼쳐라’, ‘자신감있게 플레이 하라’, ‘책임있는 자세로 임하라’와 같은 격려의 의미는 물론 상호간의 신뢰이자 믿음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 한 마디로 정의한다. ‘단디해라.’

늘 단디를 외쳤던 그가 고향 진주에 내려와 ‘조광래축구재단’을 설립했다. 사각의 그라운드를 지배하며 대한민국 축구의 중심이었던 그가 축구재단을 설립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안양 LG 감독시절, 국내 축구에 유소년 축구시스템을 도입해 이청용 등 지금의 축구국가대표 선수를 발굴해 축구발전에 기여한 전력이 자연스럽게 조광래축구재단의 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조광래 감독은 현역시절, 숫자 ‘4’와 인연을 맺었다. 축구인의 고유 상징이기도 한 배번 가운데 4번은 선수들 대부분이 기피하는 번호였다. 하지만 조감독에게 ‘4’는 행운의 숫자였다. 사각의 그라운드를 지배했던 그는 4번이었고, 은퇴할때까지 4번을 달고 지구촌을 누볐다.

그래서 그는 조광래 축구재단에도 ‘4가지 꿈’을 담았다. 

 

 

 

단디해라

 

조광래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다. 당시 축구명문이었던 진주중-진주고 진학으로 충분하게 입증됐지만, 경기장에서도 영리하기로 따지면 단연 으뜸이었다. ‘컴퓨터 링커’라는 현역시절 애칭도 그만의 탁월한 두뇌 플레이의 소산물이다. 그의 패스 플레이는 송곳처럼 날카로웠고,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폭넓은 시야는 그야말로 차원을 달리했다.

현역시절의 화려한 경력에 이은 지도자로서의 삶도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000년 안양 LG를 K-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출중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선수출신 감독의 비상을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지만 그는 해냈다. 그리고 이청용과 같은 어린 선수를 발굴해 축구재목으로 키워내는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흠잡을데가 없었다.

한 언론에서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조광래 축구는 굉장한 마력을 지녔다. 그의 품을 거치는 선수는 차원을 달리하고, 그의 손을 거치는 팀은 뚜렷한 색채를 띤다. 그야말로 소리없이 강한 진정한 축구의 달인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화려한 경력의 이면에 숨어 있는 조광래의 축구 인생은 ‘노력의 결정체’ 그 자체였다. 축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학교 갔다 오면 공차는게 일상이었고, 아무도 없으면 혼자서라도 공을 찼다. 봉래초등학교 6학년 때는 주장 완장을 차고 경남도대회 우승을 이끌며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진주중학교로 진학한 조광래는 잠시 축구와 떨어져 있게 된다. 하지만 당시 수재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진주중학교로의 진학은 후일 명석한 두뇌를 가진 천재 플레이어의 탄생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축구인으로서의 재능을 꽃피우게 된다.

지옥의 비봉산 특훈은 그의 성실성을 대표하는 일화이다. 비가 와도 뛰었고, 하루도 빠짐없이 뛰었다. 한번은 집을 나섰다가 방범대원에게 붙잡히기도 했다. 통행금지가 해제되기 전에 비봉산에 갔다가 통금해제가 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난 것이다.

그야말로 24시간을 축구와 함께 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틈만 나면 연습했다. 학교 단체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인적인 프로그램을 짜서 훈련했다.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여자친구 한번 사귀어 보지 못하고 축구에만 매달렸다.

그에게는 대한민국 국가대표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 스스로에게 ‘단디해라’고 모질게 채찍질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힘들 때가 승부다

 

‘단디’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4년 진주고등학교 재학중에 진주고 46년의 축구역사상 첫 우승을 비롯해 전국대회, 춘계연맹전, 전국체전 우승 등 전국대회 3연패의 주역이 되었다. 축구도시 진주의 명성을 잇는 것은 물론 새로운 진주축구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역사적 첫 우승을 일군 이면에는 웃지 못할 스토리가 있었다. 고교졸업을 앞두고, 기가 차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외환은행으로 가기 직전에, 그 꿈이 무산되고 만것이다. 사정을 알아보니 축구한다고 했을때 대한축구협회에 1학년으로 등록을 해버린 것이다. 물론 본인의 동의 절차는 없었다. 그의 출중한 기량을 3년동안 써먹을 생각에 당시 감독과 학교가 짜고 한 학년을 내려 등록했던 것이다. 그 1년동안 조광래는 진주고등학교 축구부의 역사를 새로 쓴 것이다.

축구판에 일대 폭풍이 불었다. 조광래를 주목한 지도자들의 스카우트의 손길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실업팀을 포기하고 연세대학교 74학번으로 대학시절을 시작한다. 곧장 주전으로 발탁된 것은 당연했다.

‘단디’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잠시도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다시 개인 훈련 프로그램을 짰다. 이번에는 캠퍼스 진입로인 백양로를 훈련 터로 잡았다. “당시 백양로 화단에 나무를 심어놨는데 높이가 1m정도 였는데, 그 나무를 허들 넘듯이 뛰어 넘으면서 백양로 화단을 달렸습니다. 그것도 매일 새벽에요”

비봉산을 오를 때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새벽잠이 없는 그였다. 숙소에서 5시에 일어나 백양로를 달렸다. 막판에 허리가 끊어질것 같았지만 그때마다 주문을 외웠다.

‘힘들 때가 승부다. 지금부터가 승부다. 이제 시작이다.’

이 주문은 ‘단디’와 함께 그가 대한민국 축구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그만의 원동력이었다.

축구 국가대표시절이었던 1975~1986년에는 멕시코월드컵과 아시안게임 등의 국제대회에 참가해 국위선양은 물론 진주시민의 자긍심을 고취시켰다. 

멕시코월드컵에서는 본선진출의 중추적 역할을 해냈고, 1986년 아시안게임 결승에서는 첫 골을 기록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를 격파하는 선봉장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 축구역사상 첫 단독우승의 쾌거를 거두게 된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경기장. 첫 상대인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전에서는 조광래를 제외시키고 수비전술을 쓰다가 두 골을 헌납했다. 조광래가 투입되면서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고 두 팀은 이후 1골 씩을 주고 받았다. 결과는 ‘3대1’패. 불가리아전에서는 폭우속에서 ‘1대1’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이탈리아전에서는 ‘2대3’ 석패. 대한민국 대표팀은 1무 2패를 기록한 뒤 월드컵을 마쳤다.

아쉬운 결과에 불쑥 오기가 생겼지만, 가을에 벌어지는 서울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은퇴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그는 유럽행을 선택한다. 지도자 공부를 위해서였다.

조광래는 5번에 걸쳐 지도자 연수를 받게 된다. 1988년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지도자 연수를 받았고, 1994년에는 브라질로 건너가 브라질 지도자 연수 아카데미를 수료한다. 1998년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에서 지도자연수를 받은 그는 2005년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주요경기 참관 및 지도자연수를 받았으며, 2006년에는 독일에서 독일월드컵 현장 참관을 끝으로 연수를 마무리 한다.

군복무시절에는 육군충의팀 소속 축구국가대표 선수로 국위선양에 기여해 체육훈장 백마장을 받았고, 대우로얄즈 소속 선수시절에는 멕시코 월드컵 및 아시안게임 대표선수 국위선양에 기여하여 체육훈장 거상장을 받기도 했다.

안양LG 감독시절에는 국내 축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국내 축구에 유소년 축구 시스템을 도입해 이청용 등을 비롯한 지금의 축구국가대표 선수들을 발굴해 낸 것이다. 

2007년에는 경남FC축구단 감독으로 경남축구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열악한 재정 여건 속에서도 팀을 국내 최고의 축구팀으로 끌어올려 지도력을 확인시켰다.

동시에 그는 경남FC U-18클럽에 진주고등학교를 선정하는 ‘진주축구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다. 도민구단인 경남FC가 경남의 축구명문인 진주고등학교를 연고 고등학교로 지명한 것이다. 이 일은 진주축구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우선 연고지명으로 인해 경남 FC가 진주고 축구팀의 운영권 및 관리권을 갖고 팀 운영에 관한 일체의 비용을 지원하게 된것이다. 그리고 지도자 파견과 보수지급, 지도자 교육 등을 통해 체계적인 유소년 선수 육성은 물론 선수관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또 진주고의 우수 선수 4명에 대해 우선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어 진주출신 선수들의 프로구단 진출이 용이해지게 되었다.

2010년 7월 23일은 조광래 감독은 물론 진주축구 역사에 있어 가장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진주출신 축구선수이자 감독으로 명성이 높았던 조광래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축구도시 진주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갔다.

 

 

조광래 축구재단 비전 ‘4’

 

조광래에게 축구는 인생철학이고 전부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늘 미쳐있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미친다’는 말의 의미는, 축구와 함께 한 삶 전반을 꿰뚫고 있는 열정과 노력, 승부근성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조광래 감독의 꿈은 기술축구의 완성으로 대변된다.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조감독은 ‘한국형 기술축구’의 완성을 위해 전력을 쏟았다. 일부에서는 만화축구라고 말했지만, 체력과 투지, 조직력의 차원을 넘어 기술의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이 한국축구의 과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축구지도자로서 선수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좋지 않은 습관을 개선하라’는 것이었다. 축구선수로서 좋은 플레이의 습관과 효율적인 경쟁력은 처음 축구를 배울 때 형성된다. 그래서 그는 어린이축구, 즉 유소년 축구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축구인생의 후반기를 진주에서 보내던 그는 마침내 ‘조광래 축구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그는 조광래 축구재단에 ‘네 가지 꿈’을 담았다.

그 4가지 꿈은 ‘축구교실’, ‘장학사업’, ‘사회공헌’, ‘글로벌FC’로의 실현이다.

그의 첫 번째 꿈은 축구교실을 통해 어린이들의 체력증진과 건전한 인성함양으로 훌륭한 사회인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대의 교육과 학습은 다재다능한 인재상을 추구하는 만큼 우리 어린이들이나 선수들에게도 공부는 물론 ‘축구도 잘하는’ 올바른 인성을 가르치고자 합니다. 저는 진주는 물론, 전국 어디서든 우리 어린이들을 위한 축구교실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성원에 보답할 것이며, 또 재단에서는 축구발전과 사회공헌 등 목적사업을 정직하게 실천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의 축구사랑이 진주사랑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하는 말이다.

두 번째 꿈은 장학사업을 통한 꿈나무의 발굴과 지원으로 세계적인 선수를 육성하는 일이다. 그는 ‘꿈이 없는 그라운드는 존재가치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한국축구의 미래가 유소년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 그이기에 ‘축구에 대한 장기적인 관심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이다.

그의 세 번째 꿈은 그가 가진 재능을 소외계층에게 전하고, 사회공헌활동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라운드에는 양지와 음지의 경계가 없다는 그는 공통분모인 축구를 매개로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모두에게 부여된 과제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꿈은 스포츠의 생활화이다. 축구대회 개최 및 용품, 캐릭터 등을 제작해 브랜드화 하고 싶어한다. 이를 스포츠마케팅으로 활용해 내실있는 경쟁력과 미래를 선도해 나가는 축구재단을 만들고 싶은 것이 조광래축구재단에 담겨 있는 ‘4가지 꿈’이다.

조광래 축구재단을 소개하는 글에는 그의 이상이 오롯이 담겨 있다.

‘유소년 축구클럽 운영과 전국 유소년축구대회 개최를 통한 체육영재육성과 생활체육 저변확대를 동시에 달성하고자 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에도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유소년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지원 및 장학금 지급, 축구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에 대한 기여 등을 재단의 중심사업으로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재단의 약속에 따라 그는 다양한 사회공헌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경남미래교육재단과 MOU를 체결한데 이어 축구영재 발굴을 통해 우수선수에게는 해외 축구연수의 특전도 제공하고 있다. 소외계층과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무료축구 클리닉을 운영하는가 하면 진주시 소재 초·중·고·대학 축구팀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진주여중 축구부 창단을 기념하는 공식구 전달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군인가족 위문 어린이 대상 축구 클리닉과 공군교육사령부 소속 어린이가족 대상 용품지원 등 사회공헌 사업도 이제 일상화된 일이다.

 

 

 

꿈, 그리고 단디 페스티벌

 

고향 진주로 돌아와 ‘조광래 축구재단’을 설립한지 1돌을 맞은 2013년 11월 10일. 진주스포츠파크에서는 바르셀로나 유소년축구교실 창립 첫돌 기념으로 ‘단디 페스티벌’이 개최됐다.

제2의 조광래를 꿈꾸는 축구 꿈나무들을 위한 잔치였다. 1년이란 짧은 기간안에 어느새 유소년 축구의 미래를 내다보는 축구교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잔치마당이었다.

130여명 축구교실 회원과 아이들의 부모가 주인공이었던 이 단디페스티벌은 형식적인 틀을 깨트린 그야말로 잔치 한마당이었다. 진주시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모두 참석했지만 그들을 위한 단상도, 길고 긴 형식적인 인사말도 없었다.

연령대별로 흩어져 아이들의 경기가 펼쳐졌고, 중간에는 아빠들의 축구경기도 마련됐다. 기성용과 이청용, 그리고 조광래감독의 친필사인이 새겨진 레어축구화는 단연 최고의 인기였다. 

그 자리에서 조광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광래축구교실이 진주를 축구의 메카로 만들기 위한 초석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제 시작이다. 오래지 않아 전용 경기장이 마련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경기장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할 수있을 것이다. 진주에 있는 축구 꿈나무를 위한 공간은 물론이고 다른지역에서 진주로 축구전지훈련을 올수 있는 기반이 돼 진주가 진정한 축구의 도시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단디페스티벌에는 대한민국 내로라 하는 축구스타들의 축하인사가 이어졌다. 

은퇴한 박지성 전 국가대표선수는 ‘축구는 머리와 몸으로 느끼면서 브레인과 바디가 일체감을 이뤄야 좋은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조광래 감독님의 철학에 감사’했고, 조광래가 중학교때 직접 발탁한 이청용 선수는 ‘중학교때 발탁하여 오늘의 저를 있게 해주신 조광래감독님의 축구교실 첫돌을 너무너무 축하드리고 저와 함께 뛸 선수들이 많이 나오길 희망한다’며 감사를 전했다. 

이영표 전국가대표는 ‘저의 축구인생을 성공적으로 길러주신 조광래 스승님’으로, 기성용축구국가대표는 ‘유럽까지 오셔서 힘을 주신 감독님’이라는 메시지를, 윤일록 국가대표선수는 ‘저에게 태극마크를 달아준 진주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했다.

대한민국 축구사에 한 획을 그은 조광래감독.

그는 다시 고향 진주로 내려와 새로운 축구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난 50여년의 시간동안 늘 그랫듯이, 자신과 같은 축구선수가 되기를 희망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단디해라. 힘들 때가 승부다.’

 

▲학·경력

1962~1968 진주봉래초등학교

1968~1971 진주중학교

1971~1974 진주고등학교

1974~1978 연세대학교 

1975~1986 축구 국가대표

1987~1993 대우 로열즈 코치 및 감독

1998~2003 안양LG감독

2003~2004 FC서울감독

2010 대한민국 축구대표 감독

 

▲포상

1978 체육훈장 기린장

1981 체육훈장 백마장

1986 체육훈장 거상장

2000 프로축구 최우수 지도자상

2000 스포츠 신문 4사 선정 올해의 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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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企業家) 박종실(朴鍾實) 무소유의 나눔과 실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기업가(企業家) 박종실(朴鍾實, 1920~2002).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도덕성과 실천력을 두루 겸비한 진주사람이다. 기업의 사회환원이 실종됐다는 사회 일각의 비판이 비등하는 오늘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의 고향 진주에 내어주고 떠났다.회고해 보면, 그는 분명 성공한 기업가이다. 일면을 보면 지역경제활성화에도 큰 기여를 했고, 지역사회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그의 공적은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결코 녹록치 않다. 기업가로서 어쩌면 당연한 행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업가 박종실의 삶이 환히 빛날 수 있었던 건, 지역사회의 공공이익을 위한 헌신적인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진주산업대학교 종실연구장학재단 설립에 이어 진주사람들에게 ‘병상(病床)의 나눔, 아름다운 팔순(八旬)’으로 기억되는 재산의 사회환원. 그는 떠나면서 그의 재산 모두를 진주의 인재육성에 기부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의미있게 쓰겠다’는 평소 그의 신념은 바로 실천으로 이어졌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실천되는 순간이었다.기업가 박종실이 걸어 온 길은 곧 지역 운송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1920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1942년)한 박종실은, 삼가금융조합의 서기로 근무하다가 1946년 조선화폐자동차에 근무하게 된다. 경전여객자동차(주) 전무이사를 역임한 그는 대한통운(주) 진주지점장에 이어 1969년 경전여객자동차(주) 대표이사와 뉴종로관광호텔 대표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기업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지역사회에 대한 공헌에도 기여한 그는 모교의 축구부 후원회장을 맡으면서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중안초등학교 악대부 창설에 이은 전국대회 우승, 그리고 춘추회 회장을 맡으며 동문화합을 이끌어내는 산파역을 해냈다. 기업가로서 성공한 그는 70세 되던 해인 1990년 재단법인 진주산업대학교 종실연구장학재단을 설립하면서 지역인재 육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2001년 병상에서 투병중이던 그는 공시지가 26억 5,000만원에 이르는 그의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다. 그가 바란 것은 오로지 모교의 발전과 지역발전, 그리고 인재육성이었다.그의 모교인 경남과학기술대학교는 그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학생회관의 이름을 ‘종실회관(鍾實會館)’으로 정했다. 벽지와 도시를 연결하다 기업가 박종실은 1920년 1월, 진주에서 태어났다. 향년 82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까지 그의 삶은 오로지 진주의 경제발전과 인재육성에 집중됐다. 그는 1941년 2월 진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이듬해 삼가금융조합 서기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디게 된다. 당시만 해도 진주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산촌지역으로 변변한 사회기반시설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는 깡촌에 불과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한 그는 지역경제를 살리는 일이 급무(急務)임을 깨닫고 가슴속 깊이 담아 두었다.1946년 조선화폐자동자(주) 경리주임을 역임하면서 마침내 낙후된 지역경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실천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당시 운송업에 종사했던 그의 주 관심사는 효율적인 진주시의 운송체계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1951년 버스업체인 경전여객자동차(주) 전무이사를 맡으면서 그의 꿈은 점점 현실화되기 시작했고, 1958년 대한통운(주) 진주지점장을 역임하면서 진주시의 물류체계와 운송의 효율성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그의 이러한 신념은 1969년 경전여객 대표이사를 맡은 뒤 본격적인 기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현실화되었다. 그는 우선 벽지와 도시를 연결하는 대중교통 노선을 개발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도농(都農)간의 격차 해소가 곧 지역발전과 연계된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경영진들은 이러한 벽지노선 개발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벽지노선을 개발하고 운행을 하게 되면 ‘남는게 적다’는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익을 우선하는 기업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운수업은 이익보다 승객들의 불편을 덜어 주는게 가장 중요하다’며 경영진의 반대를 일축했다.이러한 그의 기업이념은 진주시의 교통사(交通史)에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그것은 곧바로 기업가로서의 성공을 담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기업가 박종실은 진주에서 성장해 나갔다.그가 1976년부터 운영했던 뉴종로호텔은 지역에 대한 그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진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자했던 많은 외국인들에게 아늑한 쉼터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눈에 띄는 서비스와 애향심의 발로는 곧바로 기업의 성공의 바로미터가 되었다.그에게 기업은 곧 지역경제발전이라는 등식으로 연결됐다. 그러기에 그는 진주에서 가업(家業)을 이룬 기업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실연구장학재단 설립 기업가 박종실의 꿈은 기업가답게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그의 꿈은 일흔 살이던 1990년까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는 삶의 거의 모두를 기업을 일으키는 일과 가업을 지켜나가는 일, 그리고 ‘먹고 살기 힘든 시대의 탈출’에 쏟아 부었다. 그런 그의 꿈과 희망은 결실을 보고 있었다.고희(古稀)의 기업가 박종실은 새로운 삶의 도전을 시작했다. 그것은 지역의 인재육성이라는 새로운 꿈이었다. 그는 남다른 모교사랑을 바탕으로 후배사랑과 지역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1990년 1억원을 출연하여 진주산업대학교에 ‘종실연구장학재단’을 설립했다.재단에서는 가정형편이 어렵지만 타의 모범이 되는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그들이 묵묵히 걷고 있는 면학(勉學)의 길에 힘을 보태주었다. 그리고 교육연구발전을 위해 교수들에게 연구비를 지급했다.기업가 박종실은 ‘좋은 교육을 받고 열심히 공부하는 인재가 국가발전의 초석’이라는 명제를 몸소 실천한 것이었다.후배들 역시 모교발전과 후배들의 학업증진을 위해 사재를 출연해 만든 박종실 동문을 추모하는 모임인 ‘혜봉회’를 만들어 선․후배간의 나눔의 전통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당시 종실장학금의 수혜를 받은 많은 학생들이 현재 사회 각계에서 국가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신념과 선택은 분명 옳았음이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동문화합을 위한 그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진농․진산대의 원로 모임인 춘추회 회장을 10여년간 역임했다. 춘추회는 모교에 대한 헌신적 봉사로 동문화합은 물론 대학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일들을 추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종실연구장학재단의 설립은 기업가 박종실이 기업의 사회환원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정한다. 병상(病床)의 나눔, 아름다운 팔순(八旬) 팔순의 박종실은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병상(病床)에 누운 그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평생 모은 재산을 의미있게 쓰고 싶다”외아들인 영환을 비롯한 자녀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다. 단 한마디의 이의제기도 없었다. 기업가 박종실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진주시 장대동 소재 토지 464평을 재단에 기부했다. 시가(時價)가 무려 26억 5,000만원에 이르는 알짜배기 땅이었다.이 땅은 진주시내의 단독주택 한 채를 제외하고 그가 소유했던 유일한 재산이었다.‘재학생중에 부모님이 땔감을 팔아서 학비를 마련하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아팠다’는 그는 이번 기부가 ‘모교와 사회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고 기증을 결심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2001년 11월 당시 정해주 총장에게 기증의사를 밝힌 뒤 그는 다음달 바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 기업가 박종실의 아름다운 기부가 알려지자 곧바로 언론에서는 지방과 중앙을 가리지 않고 대서특필을 했다. 그리고 그의 기부를 이렇게 평가했다.‘병상(病床)의 나눔, 아름다운 팔순(八旬)’평생을 운수업과 호텔업에 종사했고, 모교를 졸업한지 50년 되던 해에 종실연구장학재단을 설립한 그는, 자신이 몸을 누일 집 한 채를 제외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것이다.‘모교와 후배사랑의 평소 소신을 실천으로 옮겼을 뿐’이라는 겸손한 인터뷰는 곧장 기업의 사회환원이라는 의제로 옮겨져 지역사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경남과학기술대학교는 그의 뜻을 받들어 장학사업과 교직원 연구지원에 활용하겠다고 약속한데 이어 학생회관의 명칭을 ‘종실회관’으로 명명(命名)해 선후배간의 새로운 나눔의 전통을 만들기도 했다.기업가 박종실의 아름다운 기부는 지역대학발전과 지역주민의 교육열 향상이라는 원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크게는 국가의 교육발전과 인재양성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교훈적인 일이다.지역의 관점에서 보면, 한 개인이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지역을 위해 쾌척한다는 일은 분명 쉽지 않고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아름다운 뜻은 전국의 신문과 방송으로 전파되어 국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고, 기업의 사회환원 붐을 조성하는 계기로 자리잡기도 했다.이렇게 기업가 박종실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기부는 진주의 명예를 전국에 드높이는 소중한 진주의 한 역사가 되었다. 지역사회에 남긴 흔적 기업가 박종실은 지역사회의 다양한 분야에도 그 흔적을 남겨 두었다. 생전에 1남5녀를 둔 그는 평소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운송업과 호텔업에 종사하면서 지역경제발전과 교육에 헌신적인 열정을 쏟았다.그런 그의 가슴 한 켠에 머물고 있던 또 하나의 관심은 학교발전을 위한 작은 밑거름을 뿌리는 일이었다.1960년대 모교인 진주농림고등학교의 축구발전을 위해 후원회 회장을 흔쾌히 맡으면서 후원자로서의 그의 활동은 시작됐다. 당시 축구부는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모교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대회를 치르고 있었다. 그는 축구부의 이러한 헌신에 주목했다.그가 축구부 후원회장을 맡으면서 축구부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적극적인 후원의 결과는 1965년 전국 고등학교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이라는 보답으로 돌아왔다.당시의 우승은 축구의 도시인 진주의 명성을 잇는 쾌거이자, 향후 진주가 전국의 축구대회 최강자로 등장하게 되는 물꼬를 여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지역사회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봉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진농․진산대 원로 동문 모임인 ‘춘추회’ 회장직을 맡게 된다. 춘추회는 모교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기획을 생산해 내고 실천하는 모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남다른 열정과 물심양면의 지원아래 춘추회는 학교라는 작은 사회의 화합과 발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의 화합과 다양한 분야의 발전이라는 시너지 효과를 거두게 된다.지역사회에 대한 그의 헌신적 봉사와 지원은 다양한 결과로 나타났다. 그는 진주중안초등학교 악대부 창설에 기여를 했다. 당시 불모지였던 초등학교 악대부의 창설은 단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중안초등학교 악대부는 그의 지원 아래 1995년 전국 아동음악경연대회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그리고 이듬해인 1996년에는 조계종 전 종정인 청담스님 선시시비건립추진 운동이 시작되자, 곧바로 추진위원장을 자임했고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관내에 청담대선사 선시비를 건립하기에 이른다.‘지역을 자산으로 성장한 기업은 반드시 지역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명제에 한 치 어긋남이 없었던 그의 행적은 분명 기업인들의 모범이 될 만하다. 그래서 그의 지역사회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는 더욱 값지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경제계의 큰 별이 지다 기업가 박종실은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1960년대 대륙공업사, 경전여객 등을 창업해 진주의 운수업을 이끌었고, 1970년대에는 호텔 경영 등을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그는 그가 평생 모은 재산을 종실연구장학재단에 기부했다. 세상을 떠날 때 그의 곁에는 다 헤어진 점퍼와 구두 그리고 자전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모교인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학생들은 모교 소식지에 그를 추모하는 글을 실었다. 그의 후배들은 그의 삶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숭고(崇高)한 삶을 사셨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기업가 박종실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검소한 삶을 실천한 기업가 박종실. 그는 주로 점퍼와 운동화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업무처리를 위해 타지(他地)에 갈 일이 아니면, 자동차를 일체 이용하지도 않았다. 그가 타계한 뒤 그의 가족들은 낡은 구두를 그의 곁에 두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어렵게 공부했던 한(恨)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는 그는 종실연구장학재단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그리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마지막 재산을 뜻깊게 쓰고 싶다’던 그는 가족들의 동의하에 자신의 전 재산을 모교 후배들에게 쾌척을 했다.그런 그가 평생을 살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은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보낸 편지를 읽을 때였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서 매년 한 두차례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과 식사를 하면서 격려하는 시간이 행복했다고 한다.기업가 박종실은 임종을 앞두고 유언을 남겼다.‘조의금을 일체 받지 말고 가족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러달라.’당시 정해주 총장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학교장으로 치러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는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2002년 1월 25일 기업가 박종실의 장례는 학교장으로 치러졌다.평생동안 그의 마음속의 고향이었던 모교에서 치러진 장례식은 개교 92주년을 맞은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최초의 학교장이었다. 당시 정해주 총장은 “당신은 돌아가시면서도 지방대학의 열악한 재정을 염려하셨다”고 회고했다.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기업가 박종실. 그는 성공한 기업가이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보여준 실천적 기업가이다. 진주시는 지역사회와와 지역인재 육성, 지역경제분야, 공익사업분야, 사회위생분야 등에 그의 공적을 높이 기려 2002년 제2회 진주시민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기업의 사회환원과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고 실천한 기업가 박종실이 진주시민상을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학․경력1941. 2 진주공립농업학교 졸업(5년제)1942. 4 삼가금융조합 서기1946. 9 조선화폐자동차(주) 경리주임1951. 10 경전여객자동차(주)전무이사1958. 11 대한통운(주) 진주지점장1969. 8 경전여객자동차(주)대표이사1976. 3 뉴종로관광호텔 대표1990 4 재단법인 진주산업대학교 종실연구장학재단 설립1990. 5 진농춘추회 회장2001. 12 대지증여(3필지 464평 공시지가 26억5,000만원)2002. 1 별세

  • 2025-07-14
  • 작성자

    황경규/진주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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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사람) 4. 우정(雩汀) 김동렬(金棟列) - 애국심과 향토애를 가슴에 품다

우정(雩汀) 김동렬(金棟列) 애국심과 향토애를 가슴에 품다 애국지사, 문인, 언론인, 문화예술인의 삶을 산 우정(雩汀) 김동렬(金棟列, 1922~2008). 우정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그의 가까운 친척 어른들이었다. 그의 삶이 항일독립운동으로 향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해방이후에는 문인으로의 삶을 지향했다. 1948년에는 영남문학회 최초의 문예종합지인 <영문(嶺文)>의 발간에 앞장 서 진주를 문예도시로 발둗움시켰고, 시인협회 결성에 참여해 <등불>이라는 시지(詩誌)를 발간하기도 했다.문인의 삶을 살던 우정은 지방지(地方紙)의 효시인 경남일보사에 입사해 언론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언론인 우정은 반공(反共), 반독재(反獨裁), 반부패(反腐敗)의 필봉(筆鋒)으로 투쟁하는 강직한 언론인으로 민주언론 창달에도 기여했다.1949년 문총(文總) 진주특별지부(晋州特別支部)가 결성되자, 영남예술제(지금의 개천예술제) 창제에 참여해 무보수 사국장을 역임하면서 초창기 어려웠던 개천예술제의 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했다.우정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남일보 간부들과 부산에서 서부경남 전재대책위원회(戰災對策委員會)를 결성해 진주에서 온 피란민들의 구호에 전력을 다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에 들어가 종군문인(從軍文人)으로 활약하기도 했다.<지리산 평화제>를 창설해 양민학살이라는 피맺힌 한을 품은 서부경남 지역민들에게 평화와 화합의 정신을 심어주었고, 남명제(南冥祭)에서 선비정신 선양은 물론 1991년부터 4년동안은 개천예술제 대회장과 제사장을 역임해 예술의 대중화에도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우정이 작고한 2008년, 지역의 언론은 그의 삶을 평가해 이렇게 적었다.‘지역의 별이 떨어지다’ 항일애국지사의 삶 우정 김동렬이 애국지사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정은 어린나이에 조부로부터 기미년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속에 항일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지방의 항일독립운동의 주동역할을 한 인사들이 우정의 족숙(族叔) 김영숙(金永淑)과 재종형(再從兄) 김상호(金相浩) 등이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고, 심한 고문을 당했으며 외지로 망명하는 독립인사들의 삶을 직접 지켜보면서 어린마음속에서 반일 독립사상이 더욱 굳어져 갔던 것이다.일본의 패망을 확신한 우정은 삼종질인 김용환(金用煥)과 만나 일제에 대한 투쟁방법을 협의하고 앞날에 대비해 지하조직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국제공산당원으로 구국운동을 하다가 형무소를 탈출한 정태옥(鄭泰玉)이란 사람을 도운 사실이 드러나 종로경찰서에서 3개월간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우정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호적상 나이가 미성년(未成年)이라는 적용을 받아, 소년범(少年犯) 특혜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고 구속 1년여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복역과 고문 후유증으로 고역(苦役)을 치르기도 했지만 우정의 철저한 항일사상은 더욱 강해졌고, 그의 이러한 애국정신은 후일 문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할 당시 그의 사상을 지배하는 핵심으로 자리하게 된다.대한민국은 우정을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로서의 공로를 인정하고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문인(文人), 그리고 언론인(言論人) 문학은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할 때 생명력을 가진다. 우정은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발발한 한국전쟁 이후 국민의 삶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사회는 국토의 양단과 민족분열, 그리고 동족간의 갈등으로 점철돼, 항일 애국지사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재종조부인 홍안선생(弘菴先生)에게서 한문학을 수학한 우정은 서울로 올라가 법정전문학교(法政專門學校)에 이어 지금의 경남대학교인 해인대학 법과(法科)에 편입하여 학자(學者)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진주에 내려온 우정은 파성 설창수 선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이 운명적인 만남은 우정이 문인과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우정은 파성과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파성은 나의 마음에 시심(詩心)을 일깨워준 선배이자 운명이었다’우정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내 비록 좋은 작품을 만들 수는 없었지만 일찍이 나라 잃은 서러움과 제국주의의 잔학성을 용서할 수 없었던 의기(義氣)와 분노(忿怒) 그리고 내 피 속에 꿈틀대고 있는 감성들이 시를 짓게 했다”결국 우정이 생각한 시인은 ‘거짓이 없고 정의감이 강한 불굴의 정신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애국지사로서의 삶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물이었다.우정은 한국전쟁 당시에는 문총 구국대 소속의 종군문인(從軍文人)으로 활약하기도 했다.이후 우정은 파성과 진주시인협회(晋州詩人協會)를 결성하고 회지(會誌)인 <등불>을 간행했다. 여기에는 동기 이경순, 백상현, 최계락 등의 시인뿐 아니라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유치환, 조향, 조지훈의 작품도 수록했다.우정은 일제강점기 당시, 역경을 겪으면서 틈틈이 적은 시고(詩稿)를 정리해 1948년 <조춘(早春)>이라는 시집을 출간한데 이어, 영남문학회(嶺南文學會)를 창설하여 최초의 문예종합지인 <영문(嶺文)> 발간에 동인으로 참여했고, 산청 향토기(鄕土記)와 해인사지(海印寺誌) 등 단행본을 발간해 문인으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살게 된다. 간혹 경남일보에 시(詩)를 발표하던 우정은 경남일보에 입사해 언론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우정은 기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지리산으로 들어가 삐라형식의 신문이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태가 급박해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당시 우정이 가진 반공의식이 어땠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1950년 7월 31일 적은 진주까지 쳐들어왔고, 대세에 밀려 피난을 가게 된다. 부산에 도착한 우정은 부산시 중앙동에 서부경남전재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이재민 구호에 힘을 쏟았다.서부경남전재대책위원회에서 우정은 총무를 맡았다. 우정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서부경남 피난민들에게 구호품을 나누어 주고 격려하는 일을 한시의 빈 틈도 없이 수행했다. 이후 진주로 돌아온 우정은 4.19 혁명때 까지 편집국장, 논설위원, 전무이사 등의 중책을 수행하면서 반공(反共), 반독재(反獨裁), 반부패(反腐敗)의 노선을 견지했다. 우정은 1948년 이승만 정권 수립때까지 이어진 좌․우익의 극렬한 싸움의 틈바구니에서도 반공의 선봉으로서 필(筆)을 아끼지 않았다. 정부수립 이후에는 반독재 투쟁의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하면서 때로는 테러를 당하고 협박에 시달리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9.28 수복 이후에는 잿더미가 된 폐허속에서 온갖 악조건을 무릎쓰고 간부 사원 몇 명과 더불어 경남일보를 복간했고 사옥 재건에도 크게 기여를 했다.복간된 경남일보의 주축이었던 우정은 경제, 문화 등 사회적 전반의 문제를 최대한 보도하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 지역문화의 등불로서 역할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문인과 언론인의 삶을 살았던 우정이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49년 문총(文總) 진주특별지부(晋州特別支部)가 창설되자, 우정은 부위원장 또는 최고위원으로 영남예술제(지금의 개천예술제) 창제에 기여를 했고, 초대~3대까지 무보수 사무국장을 맡아 초창기 개천예술제의 초석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국난의 시기속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지면서 문인과 언론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우정이 지역의 문화예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이후 우정은 개천예술제 대회장과 제사장을 각각 두 번씩이나 연이어 맡기도 했다. 민족전통계승의 선구자 1960년 4.19 학생의거로 과도정부가 들어서자, 우정은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한 농촌을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고향 산청으로 돌아간 우정은 산청군농업협동조합의 조합장에 당선된 뒤 농촌발전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농촌 발전을 위한 우정의 신념은 이듬해 탄생한 군사구테타 정권조차도 막지 못했다. 1961년 이후 조합장 임명제로 제도가 바뀌었지만, 무려 20년동안 조합장으로 계속 연임되었다.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모범조합장으로 화제가 된 것은 물론이다.그리고 지리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산청군은 한때 공비 출몰과 토벌작전으로 수많은 주민들과 젊은 군경들이 희생됐다. 이에 우정은 지역민들과 의논하여 1969년 지리산 평화제를 창설하게 된다. 우정은 창설초기 3년간 대회장을 역임해 지리산 평화제 창설의 취지와 역사적 의의를 널리 알리는데 공을 들였다.그때 우정이 지은 취지문 일부이다.‘14년 동안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그 반복의 악순환에 몸바친 충혼은 얼마이며, 학살된 양민은 그 얼마인가. …… 이 영산에 제단을 모아 평화를 기원하노니. 이 기원의 불씨가 온 겨레의 가슴에, 온 인류의 가슴에 번지게 하소서’시대적 상황을 가슴아파했던 우정의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는 글이다.다시 진주로 돌아온 우정은 파성과 진주시인협회로부터 영남문학회의 창간에 이르기까지 반세기가 넘는 기간동안 진주의 문학과 진주문단 태동의 불쏘시게 하나를 숙명처럼 붙들고 지키며 묵묵히 시인의 길을 걸었다.우정은 전통윤리관과 도덕심 함양을 위한 일에도 적극 뛰어들었다.해방 후, 각 사회단체나 지역에서 주최하는 모임에 강사로 초빙되어 시국강연(時局講演)과 문화강연을 수십차례 가지기도 했다. 1983년에는 3년동안 진주고등학교에 초빙강사로 나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주 2시간, 총 240시간의 예절교육을 실시해 윤리의식은 물론 가정의 화목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질서의식을 고취시켰다.1986년부터는 대아고등학교에 초빙되어 예절교육을 실시하는 등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윤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한편, 덕천서원(德川書院) 등 유명 서원들과 단성향교, 진주향교 등에서 인성교육을 하기도 했다.그리고 파성의 뒤를 이어 영남예술제를 오늘날의 개천예술제로 승화시키고 진주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하는 삶을 살았다.여든 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우정은 매사에 부지런하고 의욕적이었다. 2008년 세상을 떠나기전까지 각종 문화단체의 임원이나 회원으로 활약하면서 전통문화계승에 단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그리고 유림학회에서도 성균관 전의(典儀), 남명학연구원 이사 및 운영위원, 전국 심원회(尋源會) 회장, 산청군 한시회 회장, 산청문화협회 고문, 그리고 영남일대의 여러 서원과 재실의 당임(堂任)과 헌관(獻官)을 맡기도 했다. 두루마기 입은 처사 강희근 시인은 김동렬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시인이 한 지역의 보편적인 문화공간에서 있는 듯 없는 듯이 그 문화의 이름으로 살면서, 거기 시를 한 줄씩 써서 보태는 일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 곁으로 난 오솔길에나 비유할 수 있을까? 오솔길을 걸어가는 두루마기 입은 처사에 비유할 수 있을까?’ 우정 김동렬은 시인의 길로 접어든 1948년 그의 제1시집인 <조춘(早春)>을 발행한데 이어 1958년에는 <해인사지>, 1996년에는 <한시동인집>을 발행했다. 그리고 2003년에는 무려 55년만에 제2시집인 <생애의 창변>이라는 시집을 발간하게 된다.당시 생애의 창변이 주목받은 이유는 시인으로 선비로 살아온 작가의 긴 여정이 시편에 그대로 녹아 있었고, 암울했던 시대를 살아 온 80노구의 시인이 한 평생 시를 지으면서 자신의 양심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촛불같은 양심이 바로 시(詩)정신의 뿌리였고, 그 시정신이 나를 위험에서 구해준 구원의 연가였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시인이란 자기 영혼과 대화하고 마음을 헹구고 그 영혼까지 헹구며 살아가야 할 양심의 소유자이다. 시인이 죽은 사회란 썩은 사회라고 하지 않는가’그러면서 우정은 미래의 시인들에게 당부했다.‘미래의 젊은 시인들이여. 당신들은 세상을 밝힐 책무가 있습니다. 불의에 분노하면서 비리를 규탄하면서, 또 눈물 나는 억울한 일에는 가슴 아파하면서 이 세상을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미래의 시인들에게 中)’시대적 아픔을 공유했던 노시인의 외침은 그가 평생을 간직해온 애국애족 정신과 동떨어져 생각할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하고 절실했다.우정이 작고한 뒤 후손 김위찬은 고인의 글을 묶은 <인생, 그 문학의 그늘에서>와 <우정시고>를 발간해 고인 뜻을 기렸다.애국지사였으며,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이었던 우정 김동렬. 그는 민족예술의 혼(魂)을 이 땅에 심고자 노력했으며, 캄캄한 절망의 시대를 넘고자 노력한 강직한 언론인으로 살았다.진주에 대한 애정은 그칠줄 몰랐다. 시집 발간에 이어 지역의 현안문제에 대해 끝없는 관심을 표명했다. 신문 기고란을 통해 경상대학교에 한의과 신설을 강력히 요청하는가 하면, 어로(漁路)를 설치해 어족의 보고인 남강유역을 살리고자 했으며, 진주의 최대현안이었던 진주~대전간 고속도로의 신속한 완공을 요청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민족언론사 정립을 위한 경남일보 제호(題號)찾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그를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를 확인시키기도 했다.젊은 시절 왜놈들의 만행에 저항하고 항일투쟁을 꾀하다가 모진 옥고를 치른 우정은 훈장증과 독립유공자증을 받음으로써 독립유공자로 예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우정은 예기치 않은 병마를 만나게 되고 2008년 5월 3일 가족들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우정은 국립 현충원에 모셔졌다.애국심과 향토애를 기반으로 애국지사, 문인, 언론인, 문화예술인으로서의 삶을 산 우정이 천년 진주의 역사에 모범이 됨은 물론이다. 이에 진주시민들은 그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에게 제5회 진주시민상을 수여했다. ▶학․경력1947 서울법정전문학교 법과 졸업1955 해인대학교 법학과 졸업1946 진주시인협회 등불지 발간 참여1947~1960 경남일보사 근무1948 영남문학회 영문지 발간 참여1949~1958 문총 진주특별지부 부위원장 최고위원 역임1949~1952 개천예술제 초대, 2대, 3대 사무국장 역임1950~1952 서부경남전재대책위원회 사무국장1960~1980 산청군농업협동조합장 및 중앙위원 역임1968~1980 지리산평화제 창설1990 개천예술제탑 건립사업회 부이사장 역임1991~1992 개천예술제 대회장 역임1993~2004 심원회(尋源會 ) 회장1996~2000 성균관 전의1997~1998 개천예술제 제사장 역임1998~2004 두류한시회 회장2002~2003 진주문화원 원장 역임 ▶수상1961 경남일보 공로대상1990 개천예술인상1995 산청군 항일독립유공자비에 등재2003 우수작품집상2003 진주예술인상2003 문화원 발전 공로패2005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 ▶저서제1시집 <조춘>간행(1948년)<海印寺誌>간행(1958년)<漢詩同人集>간행(1996년)제2시집 <생애의 창변>간행(2003년)<인생 그 문학의 그늘에서> <우정시고> 발행(2010년)

  • 2025-07-14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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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사람) 3. 이성호 '장생도라지의 꿈과 열정' 썸네일 이미지

(진주사람) 3. 이성호 '장생도라지의 꿈과 열정'

창전(創田) 이성호(李聖鎬) 장생도라지의 꿈과 열정 ‘오래된 도라지는 산삼보다 낫다’는 신념 하나로 인간 사랑의 외길을 걸어 온 장생도라지 영농조합법인 대표이사 창전(創田) 이성호(李聖鎬, 1931~2025 ). 창전은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았고, 쉽게 갈 수 없었던 도전의 길을 선택했다. 무려 45년이라는 긴 세월이었고, 무수한 고비가 그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도라지로 존귀한 생명을 구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내가 죽지 않는 도라지를 만든 것은 이름을 얻겠다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오. 홍수에 떠내려가는 사람 하나만 구해도 칭찬받을 일인데, 많은 사람을 병에서 구해줄 선약을 만든다면 진정 가치있는 삶이 아니겠소”창전은 ‘도라지에 미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도라지 하나만을 가슴에 새기면서 가히 초인적인 삶을 살아왔다. 도라지 재배를 위해 깊은 산중에서의 고난한 삶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도라지 재배’를 위한 그의 삶은 한의학 공부로 이어졌고, 땀과 열정을 쏟은 너른 땅에는 20년이 넘는 도라지가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창전은 자신의 삶과 맞바꾼 21년생 도라지를 ‘장생도라지’라 이름 붙였다. 도라지 재배에 평생을 바친 대가로 산삼의 효능을 능가하는 장생도라지 재배의 일인자로 자리매김한 창전은 비로소 ‘도라지가 사람을 위해 하늘이 내려 준 선물’임을 깨닫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데 모든 노력을 쏟기 시작했다.직접 개발한 재배법 특허 기술을 통해 유용성 높은 가공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현대의 각종 난치성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국민들의 건강개선에 일익을 담당하기 시작했다.“부와 명예를 생각했다면 도라지를 키우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처자식을 팽개치고 도라지에만 미쳐 살지 않았을 겁니다. 오로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불로초 전설을 오늘에 되살려 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고 싶어서였을 뿐입니다.”스물 여섯해 되던 해 도라지와 첫 인연을 맺은 창전은 여든 셋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도라지에 대한 열정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1995년 장생도라지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한데 이어 1999년에는 (주)장생도라지를 만들었고, 최근에는 장생도라지박물관을 개관해 끊임없는 도라지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부가가치가 높은 가공사업을 통해 연 매출 100억여원을 달성했고, 도라지 재배 위탁을 통한 지역의 농가소득 증진은 물론 고용창출과 외화획득 등 지역경제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한 점은 도라지에 헌신한 그의 삶을 뒤돌아 본다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병(病)없는 세상을 위해 나를 바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창전 이성호에게 시민들은 2014년 진주시민상을 수여했다. 신비한 명약, 도라지 창전 이성호가 도라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54년 초여름의 일이다. 마을 어른과 나무를 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던 창전은 도라지의 신비한 효능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나무를 하는 동안에도 심한 기침과 지병으로 고생하던 마을 어른이 잠시 쉬는 동안 주변에 있던 오래된 식물의 뿌리를 우연히 발견했다. 약초 뿌리이겠거니 하고는 무심하게 캐어 먹은 그 마을 어른은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고 해가 지도록 깨어나지 못했다.해가 져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창전은 사흘 뒤, 그 산속을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그때까지 마을어른은 잠을 자고 있었다. 걱정스런 마음에 몸을 흔들어 깨우자 마치 단잠을 잔듯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산을 내려왔다.그 후, 며칠이 지난 뒤 마을 어른은 오랫동안 앓고 있던 지병이 말끔히 나았고, 새로 태어난 것처럼 건강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창전은 그 마을 어른이 우연히 산속에서 캐 먹은 것이 오래 묵은 도라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도라지는 창전의 가슴깊은 곳에 자리하게 되었다.청년이 된 창전은 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는 갖가지 병으로 죽어가는 현실을 목도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다. 이름없는 풀과 나무도 저마다 받은 생명을 누리고 사는데 반해 존귀한 사람의 생명이 온갖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길이 있다면 인생을 바칠 가치가 있다’고 결심한 창전은 도라지 재배에 그의 온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된다.오래된 도라지의 효능을 직접 목격한 창전은 사람을 살리는 불로초(不老草)의 기능을 간직하고 있는 오래 묵은 도라지의 실체를 찾아 나서게 된다. 전해 내려오는 모든 자료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 약초의 보고로 알려진 지리산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무모한 도전이었고, 가혹한 시련이 그에게 닥쳐왔다. 쉽게 찾기도 어렵고 관련문헌조차 없는 상황에서 창전의 도전은 말 그대로 무모했을뿐 아니라, 그를 반기는 것은 가혹한 시련뿐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아주 외롭고도 기나긴 자신과의 싸움이었지만 창전은 스스로 다짐했다. ‘오래묵은 도라지를 키우기도 어렵겠지만, 키워낸다해도 약효가 없으면 절대 세상에 내놓지 않겠다’오래 묵은 도라지 찾기에 정열을 바쳤던 창전은 직접 도라지를 재배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평균 수명이 3년에 미치지 못하는 도라지를 오랜 시간동안 재배하는 것은 처음부터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 천 평이 넘는 밭에 도라지를 심고 정성들여 재배를 했다. 그러나 3년 이상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한 뿌리도 캐지 못하고 썩혀서 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한마디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설령 오래 기른다해도 약효가 있을지 의문이었고, 자칫하면 인생을 허비하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만 졸이기 일쑤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실패가 거듭되면서 가세(家勢)도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오기가 생겼고 이렇게 다짐했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 가지 선한 일을 해서 사회와 국가, 그리고 후세에 좋은 일을 하나 해놓는다면 나름대로 의미있는 인생이 아니겠는가. 설령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그냥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인생 한 번 없었던 셈치자’ 창전은 오랜 세월동안 멸시와 조롱을 받아가며 외로움과 불확실한 미래와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장생도라지를 재배해 내는 일은 ‘세상과의 싸움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장생 도라지 재배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그리고 창전은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다. 오직 도라지 재배에만 전념하기 위해 지리산으로 향한 것이다. 장생도라지의 비밀을 풀다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지리산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터를 잡았다. 인적없는 지리산의 밤은 외롭고 무서웠다. 밤이면 알 수 없는 동물의 울음소리만 들려왔고, 산 속에 그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는 사실에 그의 심정은 착잡하고 서글펐다.겨우 겨우 움막을 지어 몸 누일 곳은 마련했지만, 먹을거리는 직접 구해야만 했다. 가재, 개구리는 물론이고 나무껍질과 칡뿌리, 솔잎 등으로 겨우 연명해 나갔다. 가뜩이나 깡마른 체구로 지리산 곳곳을 다니다보니 손은 나무 껍질처럼 갈라졌고 날이 갈수록 몸은 야위어 갔다. 하지만 그 어떤 외로움이나 고난도 도라지에 대한 열망을 꺾지는 못했다. ‘내가 하는 일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온 식구들이 극구 말리고 나설때 마다 ‘십 년이 걸리든 백 년이 걸리든 간에 반드시 죽지 않는 도라지를 키워내겠다’는 각오를 더욱 다졌다.지리산에 들어온지 5년째 되던 해에 마침내 창전은 장생도라지의 비밀을 풀게 된다. 도라지의 뿌리가 썩지 않도록 키우기 위해서는 기름기 없는 땅에 도라지를 심은 뒤 2~3년 마다 옮겨 심어 주기만 한다면 수 십년, 아니 수백 년을 키워도 뿌리가 썩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해 낸 것이다.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주변의 온갖 질시를 스스로 이겨내야 했고,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에서도 결코 지지 않았던 창전은 그대로 땅에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 노벨상을 탄 것보다도 기쁘고 벅찬 감동이 밀려왔고, 그간의 온갖 고초와 응어리가 다 씻겨져 나가는 기쁨을 오랫동안 누렸다. 창전의 나이 46세때의 일이었다.고향에 돌아왔다. 장생불사 도라지의 비밀은 알아냈지만 집안 꼴은 말이 아니었다. 자식들 공부는 고사하고 빚쟁이들의 성화에 가족들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하지만 창전은 여기서 그만둘 수 없었다. 한의학을 공부해 도라지의 효능에 대해 공부한 뒤 세상을 위해 공헌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앞섰다. 그 누구도 창전을 말릴 수 없었다.10년여의 한의학 공부를 마친 뒤, 장생도라지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20년 넘은 도라지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도라지를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지만 창전은 오래된 도라지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팔지 않겠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도라지 재배를 위해 많은 빚을 지고 있던 창전에게 있어서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지만 ‘도라지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데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던 것이다.20년 이상 자라는 도라지 재배에 성공한 뒤에도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약효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비로소 오래된 도라지의 성분적 특성과 효능을 밝혀낸 창전은 자신의 재배 방법에 따라 21년 이상 자란 도라지를 ‘장생도라지’라 이름 붙였다. 장생도라지 재배에 평생을 바친 창전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인사과장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던 아들 이영춘이 과감히 사표를 내고 부친의 도라지와 함께 하는 삶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부도직전의 가공 판매회사의 사장 자리를 떠맡은 이영춘사장은 부친의 업을 이어받아 장생도라지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게 된 것이다. 이후 장생도라지는 창전의 염원대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한줄기 희망이 되는 회사로 성장해 나가게 된다. 장생도라지영농법인이 1995년에 설립된 이후, 1997년에는 장생도라지 가공공장이 준공된다. 장생도라지를 이용한 항암 연구도 시작되었고 1998년에는 농업 아이디어박람회에서 농림부 장관상을 수상한데 이어 1999년에는 ‘신지식인’으로 지정된다.1999년에는 (주)장생도라지를 설립한 뒤 일본 동경과 오사카 총판 설립에 이어 홍콩과 일본에도 총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ISO 9001 국제품질인증 획득과 함께 (주)장생도라지는 벤처기업으로 등록하게 된다.2000년 들어서는 미국지사와 하와이 총판을 설립하고, 기술경쟁력 우수기업 선정(2000년), 2000 경남 50대 수출전환대상업체선정(2000. 4), 유망중소기업지정(2000. 9), 경남 우수벤처기업 선발대회 대상 수상(2000, 9) 등의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이후 장생도라지를 이용한 각종 난치질환의 치료제가 국내외에 특허등록되었고, 각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진이 세계에 자랑할 장생도라지의 참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지금도 연구실의 밤을 밝히고 있다. 신지식인 이성호의 새로운 삶 ‘장생도라지 노하우를 혼자만 알고 떼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창전이 장생 도라지를 재배한 목적은 각종 이름모를 질병으로 생명을 잃는 일을 줄이고자 한데서 시작되었고, 이웃과 더불어 잘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가공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창전의 신념과 철학은 장생도라지의 경영이념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창전은 장생도라지를 많이 재배해 많은 사람들이 싸게 사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생도라지영농조합법인과 (주)장생도라지가 설립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창전은 도라지 재배를 지역의 농가들에게 위탁했다. 230여 농가가 15만평에 이르는 땅에서 도라지를 재배하도록 한 것이다. 지역의 농가들은 농외소득을 올릴 수 있고, 창전은 보다 좋은 도라지를 생산해 보급할 수 있었기에 서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도라지 계약재배는 현재 연 평균 172 농가에 연간 6억여원의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농가소득을 보장해 주고 있으며, 가공식품 생산 수출로 연간 100억여원의 매출을 올리는 근간이 되고 있다. 그리고 기업 이익의 사회환원은 물론 사회봉사를 위한 일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최근 5년간의 기부협찬 실적을 보면 705건에 4억7,500만원을 사회에 환원했다. 기부뿐 아니라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위한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팔순잔치 비용을 이웃과 함께 하는데 사용하는가 하면 태안재난지역 자원봉사와 연말 김장담가주기 자원봉사, 좋은세상 만들기 기부 등 창전의 사회봉사 영역도 더욱 다양해 지고 있다.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기업연구 프로그램을 개발해 관광산업과 연계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지난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의 (주)고양사외 3개 회사에서 장생도라지를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농업을 관광산업과 연계하고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광산업과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측면이 적지 않다.(주)장생도라지는 다년생 토종 도라지의 재배와 연구, 한방의 과학화에 앞장서 국민건강 증진에 기여하고자 만들어졌다. 창전이 처음 도라지 재배에 뛰어들 당시의 신념과 일치한다.여든 세 살인 창전은 지금도 1년 365일 도라지만을 연구하고 생각한다. 하루 5시간 이상을 자지 않는 것도 도라지 연구에 대한 창전의 의지가 어떤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최근에는 창전의 필생의 염원이 오롯이 담겨 있는 장생도라지 박물관이 개관됐다. ‘장생도라지의 꿈과 열정’이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박물관은 창전의 삶과 애환은 물론 장생도라지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정식 박물관이다.‘도라지 하나로 세계를 제패하다’고등학교 한국지리 교과서에 실린 창전 이성호에 대한 글을 보면 창전의 삶의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다.창전은 도라지 하나로 세계를 제패한 농군이자, 45년의 세월을 도라지 재배법 연구와 개발에 쏟아 부은 한국 도라지 개발의 산 증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도라지는 수십년생짜리를 길러낸 기록이 없어 창전의 국제 특허 출원은 획기적인 일로 평가받고 있다.창전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다년생 도라지는 국제경쟁력을 인정받아 1994년 우루과이 대체작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창전의 염원대로 지금 전국의 수많은 난치성 질환자들이 장생도라지를 복용하고 치료한 사례를 창전 앞으로 보내오고 있다. ‘치료하기 어려운 병을 고칠 수 있는 선약을 만들 수 있다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는 창전의 고집스런 철학이 마침내 현실화된 것이다.창전은 지금도 장생 도라지와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여든 세 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늘 도라지 연구과 강의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장생 도라지의 생명력과 창전의 삶은 어느새 서로 닮아 있다. 경력·포상 1954 다년생 도라지 재배연구1991 「다년생 도라지 재배법」세계 최초 특허 취득1995 장생도라지영농조합법인 설립1998 농업박람회 농림부장관상 1999 신지식인 지정1999 (주)장생도라지 설립2000 제6회 세계농업기술상 대상 수상 경남 우수 신지식농업인상 수상 석탑산업훈장2002 제12회 일가상 수상

  • 2025-07-14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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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사람) 1. 아인 박종한

아인(亞人) 박종한(朴鐘漢) 시대의 참스승으로 살다 경남사학(慶南私學)의 염원을 남명정신에 두고, 평생을 교육에 헌신한 진주교육계의 거목 아인(亞人) 박종한(朴鐘漢, 1925~2012). 아인은 반진단(般震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이며, 반진구국(般震救國) 정신을 건학 이념으로 대아중·고등학교를 설립해 오민교육을 실시한 교육자이자, 이 시대의 참스승이다.반진구국과 오민사회건설을 바탕에 둔 그의 교육이념은 오민교육과 오민박물관 개관, 경의정(敬義情) 학생다도교육, 창렬사 참배, 화랑숙(花郞塾)교육, 충무공백의종군 등으로 이어져 경남사학 교육의 표준이 되었다. 특히 학교교육에 다도를 접목한 아인은 문교부에서 전국의 장학사를 대상으로 ‘다도교육지도안’을 발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아인은 민족문화재가 가진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는 민학회(民學會) 발족과 ‘민학지’ 발간에 이어, 전국 최초로 서울에 ‘진주향토문화사전(晋州鄕土文化史展)’을 개최해 천년 진주의 역사와 전통을 전국에 알리기도 했다.진주정신의 바탕이 되는 남명정신을 계승하고자 ‘남명제(南冥祭)’를 창설했고, 한민족현창회를 창설해 민족제단을 건립하는 등 민족정신 현창에 노력했다. 남명제는 ‘남명정신을 사학에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시됐다. ‘학교교육은 학자를 배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생활인을 기르는데 목적을 둔다’는 아인의 교육이념을 엿볼 수 있다.한국차문화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초의선사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찾아 복원한 아인은 진주다도회 창립은 물론 최범술, 김미희, 박동선 등과 (사)한국차인회를 창립했으며, ‘차의 날 선언문’을 직접 작성해 진주 촉석루에서 ‘차의 날’을 선포하는 등 한국 차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의 차(茶) 스승’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아인은 하버드대학과 MIT, 예일대학 등의초청강연에서 한국 차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아인의 생애 전반은 오민교육이 바탕이 된 경남사학의 발전을 염원한 교육자의 삶과 평생을 차(茶)와 함께 한 한국 다도(茶道)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아인 박종한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식(2025. 5. 17) 반진구국의 정신 대아고등학교의 창설정신은 항일투쟁단체인 반진단(般震團)의 반진정신(般震精神)에서 비롯됐다. 아인은 육당 최남선의「조선역사(朝鮮歷史)」라는 책을 읽다가, 옛날 우리 민족이 고조선을 세우기 전에 ‘진(震)(東夷族의 故國名)’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대아고등학교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던 ‘반진문(般震門)’이 나오게 되었고, 대아고등학교의 창설정신으로 자리잡게 된다.아인은 최소해(崔小海), 김대성(金大成), 서병도(徐炳道) 등 8명과 뜻을 모아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을 예측하고 민족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반진단(般震團)’이라는 항일투쟁단체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943년 8월의 일이다.반진단 결성 이듬해인 1944년 7월 하순경, 단원들은 부산의 부두폭파를 목표로 삼고 차근차근 실천해 나갔다. 독립군이 은닉해 놓은 군자금과 무기매설 장소를 표시한 지도 한 장을 확보한 단원들은 군자금과 무기찾기에 나섰다. 당시 진주 요시노국민학교(현 중안초등학교)에서 촉탁으로 교편을 잡고 있던 아인은 자신의 한 달치 월급 40원을 여비로 제공했다. 하지만 일경의 불심검문에 걸려 단원들이 체포되고 만다. 당시 반진단의 아지트였던 부산 대신동 최소해의 하숙집에는 벌써 일본경찰이 들이닥쳐 반진단의 혈서연판장과 독립선언문, 사제폭탄을 모조리 압수해 간 뒤였다. 아인도 무사할 수가 없었다. 수업도중 경남도경 조선인 형사 2명에 의해 연행되어 진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그때가 1944년 11월 24일의 일이었다.이후 6개월동안 각 경찰서를 전전하며 고문을 당했고, 예심에 회부되어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것은 이듬해 6월이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영어의 몸이 된 반진단원들은 그로부터 두 달 후 광복으로 풀려나게 되었다.비록 반진단은 가시적인 항일투쟁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대동아공영의 기치아래 역사를 거스르는 일제의 단발마적 발악과 조선인들의 체념어린 ‘황민화 정책’에의 동화의식이 풍미하던 태평양전쟁 말기에 순수하고 뜨거운 민족의식을 보여 주기에 충분했다.아인은 광복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자유아시아학생연맹’을 결성했다. 세계의 각축장이 된 아시아의 발전을 위해서는 아시아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아인은 ‘아시아의 안목을 가진 지도자’ 육성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선친인 만암의 전 유산을 기본 재산으로 대아중·고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다.대아고등학교의 ‘대아(大亞)’라는 교명은 ‘아시아의 안목을 가진 큰 지도자를 길러 내겠다’는 아인의 희망이 담겨 있다. 대아학당과 오민교육 1946년 4월 8일. 반진단원들이 아인의 자택에 모였다. 당시 나라는 좌우익으로 갈라져 사회는 극도의 혼란 상태를 맞고 있었고, 반진단원들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아인은 각계 분야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육영사업에 뜻을 두게 된다. 그후 아인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들어가 경제학을 전공, 학업에 전념했다. 그러나 일찍이 그의 가슴속에 불붙었던 조국애는, 조국의 운명을 바꾸는 일로 바뀌었다. 조국의 운명이 바로 아시아의 운명이며, 조국의 현실이 바로 아시아의 현실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인은 기성 정치인을 배출하는 것 보다는 앞으로 조국의 지도자가 될 학생들의 결속과 유대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철기 이범석 장군의 지지와 후원을 얻어 그 조직과 결성을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중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과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아인은 학업은 물론 ‘자유아시아학생연맹’의 꿈도 모두 중단한 채, 노부모를 모시고 선영이 있는 남해의 재실로 피난길을 떠났다.휴전이 성립되던 해, 아인은 선친의 유산을 기본재산으로 반진단의 구국정신을 계승하는 재단법인 하천학원 대아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때가 1953년 12월 23일의 일이다. 당시 아인의 마음속에는 ‘조국의 통일과 자유가 아시아의 독립과 자유에 있음을 자각하여 밖으로는 아시아 학생연맹을 조직하고, 안으로는 신생 조국의 지도자를 양성한다’는데 있었다. 1973년 12월 29일에는 대아고등학교가 매 학년 10학급으로 증설 인가를 받았고, 이후 학교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그러나 학교가 커가면서 아인의 고민도 덩달아 많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학교들은 진학위주의 시험교육을 우선했다.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팔고, 교직은 돈을 벌기 위한 가장 손쉬운 직업을 전락되어 가고 있었다. 이와같은 풍조는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아인은 학교교육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그리하여 참된 교육은 학교교육보다 가족적인 사제동행(師弟同行)의 사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실시한 교육이 화랑숙(花郞塾)교육이다. 그러나 60여명의 학생을 선발해 24시간 교육을 실시했지만 이 역시 채 2년이 못돼 좌절되고 말았다.아인의 오민교육(五民敎育)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1970년 4월 8일, 아인은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 구국이념을 참고해「오민교육(五民敎育)」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대아학원에 오민교육(五民敎育)을 실시하게 된다.아인의 오민교육은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 民族 民生 民權)’에 민성(民性)과 민복(民福)을 추가해 감응과 체험을 위주로 하는 전인교육(全人敎育)이었다.아인은 즉시, 오민에 기초한 교육을 실시했다. 민성교육(民性敎育)으로는 모현단에 봉안된 민족선사 추모교육(智)과 세계선사추모교육(情), 오성다도를 통한 정서안정교육(意)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민생교육(民生敎育)으로는 민족후생생활사교육과 세계후생생활사교육, 능률적 자습교육이 실시되었다.민족교육(民族敎育)으로는 민족제단 교육과 세계 호국사교육, 충무공 추모행군, 민권교육(民權敎育)으로는 민중운동사교육, 세계인권운동사교육, 국민주체의식교육이 행해졌고, 민복교육(民福敎育)으로는 민족문화사교육, 세계문화사교육, 예능창작교육등이 실시되었다. 다도교육과 차문화운동 아인은 대아고등학교에서 현대 한국 차문화운동의 시초가 된 다도교육을 실시했다. 대아고등학교는 한국 차문화의 발원지가 되었고, 우리나라 차문화사(茶文化史)에서 아주 중요한 일로 기록되었다.한국 차문화의 발원지이자 한국차인회 발족의 계기가 된 대아고등학교의 다도교육은 1969년에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정서안정을 위한 다도교육은 비록 정규시간은 아니지만 교장실에서 교장이 직접 지도했다. 당시 다도교육에 사용한 찻 잔을 ‘경의잔(敬義盞)’이라 불렀는데, 이는 당시 진주지방에 종사로 계셨던 남명(南冥)선생의 경의정신을 흠모했던 아인의 아이디어였다.이러한 대아고등학교의 다도교육은 신문지상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면서 ‘대아고등학교=차(茶)’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후 대아고등학교의 다도교육은 사단법인 한국차인회 발족의 계기가 되었고, 현 한국차문화의 요람이 되었다. 아인은 진주다도회를 결성했다. 대아고등학교 교장실에 삼현여고의 최재호, 선명의 강명찬, 미도양화점 김창문, 제일극장 최규진, 경상대학교 김재생 등이 참여했다. 첫사업으로 일본의 차인들을 초청해 문화교류를 시작했고, 효당 최범술을 고문으로 추대해 ‘대아다법(大亞茶法)’ 등 한국 고유의 다도를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진주에서 출발한 다도(茶道)는 최범술, 김미희, 박동선 등 몇몇 차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사단법인 한국차인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서울 오류동 박동선의 자택에서 한국차인회 발기회가 열리고 1980년 서울 무역회관에서 한국차인회 설립총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아인은 ‘아인 차문화 운동 3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였다.아인은 1970년대 말, 차문화 운동을 추진하던 중 한국 차문화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차(茶)의 성지인 초의선사의 ‘일지암’을 재건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1824년(순조24)에 건립했다. 초의선사는 1866년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이곳에서 다인들의 교과서인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하며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한 한국차의 성지이다.아인은 1979년 몇차례의 답사 끝에 대둔산에 있었던 일지암을 찾아냈고, 조자용, 김봉호, 김두만 등과 거동이 불편했던 해남 박응송 스님과 함께 초의선사의 일지암지를 표시한 표시목을 박은 뒤, 1979년 4월에 일지암을 재건했다.일지암을 재건한 아인은 1981년 5월 25일, 진주정신의 상징인 촉석루에 전국의 100여명의 차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차의 날’을 제정하고 선포했다. 아인이 차의 날을 제정한 것은 전국에 우리고유의 ‘차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 차를 마시는 운동을 추진하면서 부터이다. 차의 날은 입춘에서부터 100일이 되는 날인 5월 25일로 정했다. 아인은 직접 ‘차의 날 제정선언문’을 작성하고 낭독했다.아인은 선언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차의 날을 기하여 많은 국민들이 차(茶)와 인연을 맺어 찬란하였던 민족의 차문화(茶文化)가 이 땅에 다시 꽃 피워질 것을 확신하면서 5월 25일을 차의 날로 선언하는 바이다’아인은 1981년, ‘경의정(敬義情) 학생다도’를 정립하는 것은 물론 전교생에게 다도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아인의 다도교육은 전국의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애다흥국(愛茶興國)’에 평생을 헌신한 아인은 학생들에게 3가지 행다법(行茶法)을 가르쳤다.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이 그것이다. 조신은 ‘몸을 바로 세우는 것’이고, 조식은 ‘1분 18식의 단전호흡방법’이며, 조심은 ‘차의 오감(五感)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아인은 차(茶)가 정서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1981년 학교가 이현동으로 이사할 당시 다실(茶室)을 지을 정도로 학생들에 대한 다도교육은 그에게 중요한 교육이었다.이러한 아인의 다법은 학교일선에서 물러난 1985년 이후 오성다도(五性茶道)로 완성돼 차인들에게 전수되고 있다.아인의 차정신은 남명정신과 맞닿아 있다. 아인이 남명제를 창설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아인은 당시 각 사립학교의 설립정신을 조사했지만, 대부분의 사학들은 설립이념이 없었다. 그래서 아인은 당시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위대한 실천 철학자 남명이 세운 사학정신을 경남사학의 정신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1977년 남명의 475회 생신을 맞아 경남체육관에서 ‘제1회 남명제(南冥祭)’를 개최했다. 남명제에는 술 대신 맑은 차를 올렸다. 아인은 남명제 창설을 통해 ‘학교교육은 학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하는 생활인을 기르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 남명보다 더 훌륭한 교육자는 없다는 그의 신념이 반영된 것이다.이렇게 아인은 민족정신을 실천하는 교육자이자, 한국 차의 스승으로 자리잡았다. 진주차례회의 4인방(아인 박종한, 의재 허백련, 효당 최범술, 차농 김재생) 차(茶) 그리고 하천다숙아인은 다도강연을 비롯해 다기(茶器) 제작에 관심을 쏟았다. 당시 아인이 제작한 다기는 무애사발(이도다완), 오행다완, 경의잔 등이었다. ‘경의잔(敬義盞)’은 아인 스스로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즉,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남명의 정신을 다도에 접목하고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국내외적으로 다도강의를 통한 ‘차문화 활성화’를 위한 활동도 쉬지 않았다. 1991년 이후 차 교육에 매진한 아인은 300여개 단체에 1만여명이 넘는 다인들에게 차교육을 실시했으며, 미국 하버드대학과 MIT, 예일대학 등의 초청강연에서 한국 차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개최된 ‘제1회 한국차인회 다도연구발표회’에서 아인은 ‘한국다도의 정신’에 대해 강연해 일본의 다도와 확연히 구분되는 한국의 전통 다도를 알려 나갔다.아인은 ‘다산의 차 사랑’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2회 다산 대상에서 문화예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사단법인 다산연구소로부터 다산 정약용선생의 삶에 밴 차 정신을 널리 알리고, 한국 차 산업을 일으켜 차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공로상’을 수상했다. 1998년에는 초의문화재단으로부터 ‘초의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차인연합회의 ‘명원차문화공로상’을 수상했다.(사)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은 2012년 11월 13일, 평생을 후학양성과 차문화발전을 위해 헌신한 아인을 ‘한국의 차 스승’으로 추존했다. ‘한국 다도의 실천자이며, 우리 다문화 정착화의 주춧돌이셨던 고 아인 박종한 선생님을 한국 다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차인들의 마음을 담아 한국의 차 스승(師表)로 추존한다’ 고 이유를 밝혔다. 남해군 설천면 덕산리에 위치한 하천다숙(荷泉茶塾)은 현대 차문화운동의 선구적 산실이다. 아인이 차문화운동의 계몽적 차원에서 이름 붙인 하천다숙은 최근 한국전통건축으로 선정돼 국가문화재로 등록되었다.‘하천재의 물리적인 공간과 정신적인 공간이 그대로 후손에게 연계되면서 이 지역은 물론 국제적으로 공개된 건축물로 생활을 예술화하고 예술을 철학화하는 계몽적 차생활 문화공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아인은 만년에 하천다숙에 기거하면서 오성다도의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한 ‘오성다도’ 등의 차 관련 서적을 집필했다. 오성다도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근대 차문화사는 물론 한국 차 철학을 정립한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아인은「오민교육」「한국인의 차 생활사」등을 집필했다.2012년 5월 7일, 진주교육계의 거목인 아인 박종한은 세상을 떠났다.항일 애국지사, 교육자, 차인들의 사표(師表)였던 아인의 뜻을 기려 진주시민들은 진주시민상을 수여했다. 진주차례회와 일본 나고야 차도회의 한일차문화교류(1970년) ▲학·경력1943 진주공립중학교, 진주고등학교 졸업1950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재학중 한국전쟁으로 학업 중단1953 대아중·고등학교 설립1969대아고등학교 다도교육 실시1976 진주향토문화사전 개최1977 남명제 창설, 헌다례 복원1978 아인요 설립1979 (사)한국차인회 설립1979 일지암 재건1981 차의 날 창설1982 무애사발, 오행다완, 경의잔 창작1993 한민족현창회 창설1994 오성다도 정립2007 하천다숙에 차의 날 선언기념비 제막 ▲포상1989 (사)한국차인회 창설 공로패1998 차문화공로상(한국다도협회)1998 초의상(초의문화재단)2000 명원차문화공로상(한국차인연합회)2008 한국차인대상 교육공로상2012 한국의 차 스승( 사 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

  • 2025-07-14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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