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규
2024.06.29 PM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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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1919년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진 대한독립운동의 기운을 이어받아 진주시민은 물론, 신분상 최하층민인 기생과 걸인들까지 분연히 일어나 대한민국의 독립을 목청껏 외친 3.1독립운동의 성지(聖地)이다.
이에 진주시민들은 1971년 7월 1일, 3·1운동 52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의 의거를 기리기 위하여 진주성 안에 「3.1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웠고, 지역의 문화단체인 (사)진주문화사랑모임은 1996년 ‘진주걸인·기생독립단 만세운동’을 재현한 이후, 해마다 행사를 통해 진주가 3.1독립운동의 성지임을 대내외에 표방하고 있다.
진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을 통해 진주사람들의 국난극복의 의지를 천명했고, 1862년 진주농민항쟁을 통해서는 농민들이 주체정신(主體精神)을 갖고 수탈과 착취에 맞서 역사의 주인으로 우뚝섰으며, 1894년에는 수탈에 대한 불만을 넘어 반봉건 사회체제에 대한 항거와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진주 동학군의 치열한 전투가 일어난 소중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진주정신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정신적 유산은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청년유생들의 학당이었던 낙육재가 구한말 국권 수호를 위한 진주의병 투쟁의 중심지로 자리한 것은 천년 진주역사의 흐름으로 봐서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구한말 진주의병 투쟁의 중심지 낙육재
낙육재(樂育齋)는 구한말 진주 청년유림(靑年儒林)들의 학당(學堂)이자, 일제침략에 당당히 맞서 싸운 진주지역 최후의 의병활동의 중심지로 진주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낙육재는 유능한 유생(儒生)을 뽑아 독서와 학술연구에 매진토록 하기 위해 설립된 관립서재(官立書齋)이다. 1721년 경상도 대구에 있던 경상감영 내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진주유림들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1896년 경상도가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나뉘고 경상남도 감영이 들어서면서 경상남도 도청(관찰사청) 소재지인 진주에도 낙육재가 설치되었다.
당시 낙육재는 중안리 대사지 위쪽에 위치했으며, 재사(齋舍)는 과거 지방군대의 직소(職所)였던 토포영(討捕營)으로 사용된 관청건물을 이용했다. 진주에 설치된 낙육재는 인근 지역 유림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경남지역 최고의 학당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도내 각 지역의 향교에 배출된 인재는 물론 경향각지의 청년 유생들이 대거 몰려 들어 경남 최고의 인재육성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1897년 이후 민족자주화와 근대교육의 일환으로 낙육재는 ‘관립진주낙육학교(官立晋州樂育學校)’로 개교된다.
진주낙육고등학교는 근대 관립학교이면서 진주를 비롯한 경남지역의 우수한 인재가 모여들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낙육재는 민족적인 성향을 뚜렷히 간직한 교육기관이었다. 당시 낙육재 졸업식 광경을 찍은 사진을 보면 학생들 뒤에 걸려 있는 구한말 태극기 사진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낙육재는 항일의식의 거점지이자 민족자주화 교육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해 나갔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기점으로 전국의 유림들이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에 낙육재의 청년 유생들도 분연히 일어났다. 청년 유생들은 ‘동아개진교육회’라는 비밀결사조직을 만드는 한편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각 관서를 습격하는 등 항일투쟁 전면에 나섰다.
진주문화원이 발간한 『진주이야기 100선』에 따르면 당시 유생들은 낙육재에 모여 혈서를 쓰고, 연판장을 만드는 등 항일투쟁에 대한 결의를 다졌으며 향후 의병봉기의 주역으로 크게 활약했다. 이들이 작성한 연판장에는 ‘왜놈들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을 피로써 다짐한 집단 서약서였다.
일제는 낙육재 청년 유생들의 항일투쟁을 문제 삼아 1905년 12월 낙육재를 급습해서 유생들을 체포해 일부는 처형하고, 남아 있는 유생들은 모두 해산시키기도 했다. 일제는 1906년 진주에 통감부 이사청(理事廳) 지청을 두면서 낙육재를 폐쇄했다.
낙육재 복원 무산
일제의 군대해산령으로 1907년 대한제국군 진주지방 부대가 주둔하던 군사주둔지인 진영의 지방군대였던 진영대가 해산된다. 진영대 해산으로 낙육재 유생들의 항일의병투쟁이 다시 일어날 것을 우려한 일제는 이듬해인 1908년 낙육재를 완전히 폐쇄한다.
그러나 낙육재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청년 유생 일부는 낙육재 폐쇄와 상관없이 경남 각지로 흩어져서 의병봉기를 일으키는 등 국권상실 이후까지도 의병투쟁을 계속했다.
당시 전국 최초의 지방일간지였던 경남일보는 의미있는 기사를 보도했다. 1909년 11월 16일자 경남일보에는 빈 건물로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낙육고등학교를 다시 개교해야 한다는 진주시민들의 여론을 가감없이 실었다.
당시 기사의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當地 樂育高等學校는 道內 聰俊 子弟를 養成하는 一代機關인데 何事件을 因함인지 校門 閉鎖가 一週年을 近한 故로 一般 人士가 該校의 早速 開學함을 希望한다더라’
이같은 진주시민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낙육재는 재개교하지 못했다. 대신 낙육재가 있던 자리에 1906년 공립소학교를 옮겨왔으나 같은 해 폐쇄되고 만다. 1910년에는 낙육재 자리에 진주공립실업학교가 들어섰다가, 1923년에는 도립 자혜의원, 1925년에는 경상남도립 진주의료원으로 개칭되었다.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 1982년 6월에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고 1983년 7월 1일에는 지방공사 경상남도 진주의료원으로 개원했다.
지금은 모 병원이 들어서 있는 중안동 4번지에 있던 구 진주의료원이 바로 구한말 진주의병 투쟁의 중심지였던 낙육재 자리이다. 낙육재 터는 이처럼 진주 의병운동 역사에 중요한 위치이나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진주의료원이 이전하면서 한때 진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낙육재 복원 주장이 나왔지만, 결국 민간에 매각되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임진왜란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뿌리 깊은 항일 성지인 진주의 낙육재와 진주시민의 항일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매우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의 기 논 개(義 妓 論 介) 촉석루를 뒤로 하고 가파른 바윗길(危巖)을 내려와 의암(義巖)에 오르면 시퍼런 남강 물 빛 속에 서릿발 친 여인의 눈매와 손가락 마디마디 피 멍이 물 든 가락지 낀 여인의 한(恨)이 비친다. 의기 논개(義妓 論介)가 지금 이 시간에도 진주성(晋州城) 의암(義岩) 아래 시퍼런 물속 저 어딘가에서 흉악한 왜추(倭酋)를 부둥켜 안은 채 아직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듯하다. ‘진주성의 아우성 소리를 흘러간 과거의 아우성이 아니라, 현재 이 시점의 아우성으로 듣는 사람이 진주에 얼마나 있겠는가?’ 최근 일본의 경제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의기 논개의 정신이 무엇이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 권1 인륜편 효열조에서 논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구전되어 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논개는 진주의 관기이다(論介者 晋州官妓也)’라는 기록으로, ‘논개는 진주의 관(官)에 소속된 기생’이라는 뜻이다. 유몽인은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의열(義烈)에 감동해 어우야담에 순국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 1599~1661)은 인조 7년(1629)에 논개가 순국한 남강의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어 경종 2년(1722)에는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세워 논개의 정신을 기렸다. 『충렬실록』에 의하면 정식은 당시의 우병사 최진한(崔鎭漢)으로 하여금 논개의 포상문제를 조정에 계청(啓請)하도록 끈질기게 요청하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이어지면서 관기(官妓)였던 논개가 의기(義妓)로 불려지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의로운 기생(義妓)으로 되살아나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가 다시 의기(義妓) 정포(旌褒)를 계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논개의 의혼(義魂)을 봉안하는 사당인 「의기사(義妓祠)」가 건립되었다. 의기사는 ‘의로운 기생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더불어 논개를 추모하는 제(祭)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러지면서 지루하게 끌어왔던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절차가 마무리 된 것이다. 의기사는 500년 조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생에게 내린 사당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른바 ‘진주의 관기(官妓)’였던 논개가 ‘의로운 기생(義妓)’으로 공인된 역사적 사건이었다.고종 5년(1868)에는 목사 정현석(鄭顯錫)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명의 여기(女妓)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를 개최했다. 의기 논개의 제향은 영조 16년 이래 250여년간 진주의 기생들이 매년 음력 6월 29일에 봉행하다가 1992년에는 ‘의암별제’가 복원되어 매년 봉행되고 있다. 논개의 순국사실이 알려진 이후, 논개 선양을 위한 진주사람들의 쉼없는 노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비록 논개의 신분이 천한 기생임에도 불구하고 충절(忠節)과 의열(義烈)의 교훈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기 논개를 노래하다 의기 논개의 충절은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의 가슴을 두드렸고 수많은 문학작품으로 되살아났다. 이들 작품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문제의식은 바로 항일의식(抗日意識)이다. 의기 논개가 가진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산(茶山) 장약용(丁若鏞)은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 논개의 정신을 기렸다.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報國)을 하였으니 군신(君臣)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심산 김창숙 선생도 ‘의기암’이라는 시를 통해 매국노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빼어나다 우리나라 역사에/기생으로 의암을 남겼구나/한심하다 고기로 배부른 자들/나라 저버리고 아직도 무얼 탐하는가’ 의기 논개 바로 알기 ‘의기 논개를 바로 알자’는 문제제기의 근본에는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異說)이 있기 때문이다. 진주지역 이외에서는 논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의 양반가문 출신이고, 성은 주씨이며, 최경회의 첩실 혹은 황진의 애인이다’ 인터넷 공간에 ‘논개’라는 단어를 치면 대부분 앞과 같은 내용이 펼쳐진다. 진주시민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의기 논개’를 잘못 알고 있고,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이다. 논개의 신분과 출생에 대한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 조정에서 내린 의암, 의암사적비, 의기사 등 논개와 관련한 역사적 유적이 진주에 소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주가 곧 의기 논개의 역사현장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의기사는 조정에서 하사한 이름 그대로 ‘의로운 기생’을 모시는 사당이다. 논개로부터 의기라는 말을 떼버리면 논개의 위상은 그것으로 끝난다. 만약 일부의 주장처럼 앞으로도 계속 주논개나 논개부인으로 부른다면 ‘의기사’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과거 진주사람들은 의기 논개의 죽음을 헛되이 두지 않았다. 일반 백성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초월해서 논개의 의열과 충절을 기렸다. 그리고 마침내 ‘관기(官妓)’에서 ‘의기(義妓)’로, 다시 ‘진주 정신’의 한 맥으로 이어왔다. 그런 반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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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문(拱北門) 진주에 경남도청 소재지인 관찰부(觀察府)가 설치된 것은 1896년(건양) 8월이다. 당시 경남도청은 관찰부청 또는 관찰사청이라 불렸고, 지금의 도지사격인 관찰사가 집무실인 선화당에서 도정업무를 보았다. 진주성 내에 소재했던 선화당의 위치는 진주성 북장대 남쪽(진주시 남성동 73-10~11)이며, 현재 과거 선화당 자리에는 경남도청이 있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경상남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진주시와 경상남도가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 복원을 추진했다. 당시 국립진주박물관이 「진주 선화당 복원예정부지 발굴조사서」를 통해 선화당의 실체를 확인했다. 문제는 복원부지에 이미 들어서 있는 사당의 이전이 사업추진의 걸림돌이 되었다. 사당 이전 협상이 결렬되었고, 경상남도 탄생 100주년을 기념 사업으로 추진했던 선화당 복원은 결국 무산되었다. 공북문 복원 사업 선화당 복원은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라는 진주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사적인 사업이었다. 이에 진주시민들은 경상남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완성을 강력히 염원했다. 이러한 진주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은 진주성의 내성(內城)을 지키기 위해 건립되었던 공북문(拱北門) 복원 사업으로 이어졌다.경남문화재연구원의 「진주성 공북문」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보고서(2000년 2월)에 따르면 공북문은 임진왜란 이후, 병사 이수일이 진주성을 개축했던 1603년(선조 31)에 세워진 것으로 조사됐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 병풍도」에는 공북문이 내성의 북문으로 홍예문(虹霓門) 위로 2층의 누각을 올린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국립진주박물관의 진주성 병풍도와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진주성도와 동일하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도 중 공북문. 진주성에 축조된 문(門) 가운데 2층으로 누각을 올린 것은 당시 내성(內城)의 공북문(拱北門)과 외성(外城)의 예화문(禮化門, 남문)이 있다. 이는 북쪽에 있는 왕을 바라보는 문으로 위엄을 갖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문보다 높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공북문 바로 앞으로 진무청(鎭撫廳)과 중영(中營)이 자리잡고 있어 공북문이 내성의 정문인 것을 알 수 있다.경남문화재연구원의 공북문에 대한 발굴조사는 공북문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에 있었지만, 진주성정화사업 추진 당시에 751동에 이르는 민가철거 과정에서 극심한 유구의 파괴와 퇴적층의 교란으로 정상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쉬운 일이다.공북문 복원 사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주성정화사업이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하지 못한 실패한 사업이라는 점은 향후 진주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복원사업 추진에 있어서도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공북문은 경상남도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되었던 선화당 복원사업의 무산을 대체한 사업이었지만, 지금은 촉석문과 함께 진주성을 대표하는 성문(城門)으로 자리하고 있다. 공북문은 2002년 5월 1일, 홍예식 2층 다락루로 복원되었다. 공북문은 200년 5월 1일 복원되었다.공북문 성벽 석각 공북문과 함께 진주성 축성(築城)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귀한 글귀가 있다. 바로 ‘공북문 성벽 석각(拱北門城壁石刻)’이다. 공북문 성벽 석각은 진주성 공북문의 서쪽 성벽의 하단부에 새겨져 있는 글귀이다. 석각은 가로 80cm, 세로 25cm 크기의 석재에 ‘강희십구년산음마병중초사천곤양하동단성함양육관일초(康熙十九年山陰馬兵中哨泗川昆陽河東丹城咸陽六官一哨)’라고 적혀 있다. 해석해보면 ‘강희 19년(1680년 숙종 6) 산 북쪽의 마병 소속의 초(哨) 병력과 사천, 곤양, 하동, 단성, 함양 등 여섯 고을의 초 병력이 힘을 모아 쌓다’라는 뜻이다.이 글귀는 진주성 수축 당시 동원되었던 사천, 함양, 단성, 하동, 곤양 등지의 백성이 자신들이 수축한 성벽 구간에 대한 일종의 구역의 표시이다. 이 공북문 성벽 석각은 진주성 축성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공북문 성벽 석각은 진주성 축성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공북문의 의미 공북문(拱北門)이라는 명칭은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예(禮)’를 의미한다. ‘공(拱)’이라는 단어는 ‘공수(拱手,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포개어 잡음)하여 가슴까지 올려 절하다’라는 뜻이며, ‘북(北)’은 ‘남면(南面, 군주가 정사를 볼 때 신하들이 앉아 있는 남쪽으로 얼굴을 향함)한 임금을 올려다 보는 방향’이다. 따라서 ‘공북(拱北)’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공수를 하고 절을 올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진주성(晋州城)은 진주성 우물복원(2013년 11월)과 공북문 복원(2002년 5월 1일)에 이은 중영(中營) 복원사업 추진으로 차츰 진주성 본래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최근에는 진주시가 ‘진주성 종합정비계획’ 용역을 통해 진주성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진주성복원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진주시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매우 중요한 사업이자,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촉석루 중건사업 이후 진주 최대 역사(役事)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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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飛車) ② 비거(飛車)를 진주의 대표 역사컨텐츠로 만들기 위해서는 진주시민의 올바른 역사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일부 문헌(文獻)과 전적(典籍)에만 드러날 뿐 실제 원형이 전해지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논개(論介) 역시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이라는 책에 ‘논개는 진주의 관기이다(論介者晋州官妓也)’라는 한 줄의 기록에서 시작돼 진주를 대표하는 역사컨텐츠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거(飛車)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확한 고증은 쉽지 않지만, 복원 혹은 재현이라는 진주시민들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진주의 역사를 빛내는 새로운 역사컨텐츠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비거에 대한 각종 기록과 서적 비거(飛車)는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정평구(鄭平九)가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디지털김제문화대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평구는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 의해 발탁돼 진주 병영 별군관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 휘하에서 화약을 다루는 임무를 맡았으며, 비거를 만들었다.’정평구와 관련한 기록은 김제군지(1917년대)에서도 발견된다. 정평구가 그의 재간을 이용해 임진왜란 때 쳐들어 온 왜군을 농락했다는 기록을 확인한 것이다. 비거를 만들어 포위된 사람을 구해내고, 군량을 운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진나라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博物志)」와 북송의 시인 소식(蘇軾)의 「금산묘고대시(金山妙高臺詩)」에 비거와 관련한 기록이 보인다. 추측컨대, 정평구가 이들 기록을 응용해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전쟁기념관 박재관 학예연구관도 비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592년(선조 25) 10월 왜장 가등광태(加藤光泰)·등원랑(藤元郞) 등이 이끄는 2만 여명의 왜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서 그 길목인 진주로 몰려왔다. 왜군의 공격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3,800명의 군사로 결사항전하여 격퇴하였다. 당시 조선군은 조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장비를 이용했는데, 그 중 특이한 장비의 하나가 비거(飛車)였다.’우리나라 최초의 항공소설을 쓴 고원태씨는 자신의 저서 「잊혀진 우리 나래 비거(飛車, 2001)」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세계최초의 비행기는 우리나라 비거였다. 조선조 정평구라는 발명가가 만들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보다 300년이나 이전에 만들었는데도 고증이 안됐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진주의 소설가인 김동민씨도 소설 「비차(연인M&B, 2017)」를 통해 ‘우리의 올바른 역사관과 국가관 및 항공우주산업에 대한 꿈과 희망이 더욱 확대됨은 물론 전 국민적 관심과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기획했다’고 밝혔다.이외에도 비거(飛車)에 대한 폭넓은 관심에 힘입어 비거 관련 출판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앞서 소개한 고원태의 「잊혀진 우리 나래 비거(飛車, 2001)」, 김동민의 「비차(연인M&B, 2017)」, 장진선, 장진우(서누)가 집필한 「비차(2011, 파란미디어)」, 박형섭이 지은 「진주성을 나는 비차(2015. 파란자전거)」 등이 비거의 역사와 존재를 알리고 있다. 고원태 작가의 '잊혀진 우리나래 비거' 비거의 재현 혹은 복원 비거(飛車)의 복원(復元) 혹은 재현(再現)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 2000년 공군사관학교 비거 복원팀이 현재 남아 전하는 기록들을 토대로 비거를 재현하고 실제로 비행하는 실험을 했다. 당시 공군사관학교는 건국대학교와 공동 제작작업을 통해 대략 6개월 간에 걸쳐 임진왜란 당시 사용 가능했던 대나무와 무명천, 마끈 및 화선지 등만을 이용한 1/2 크기의 실물을 재현했다. 당시 재현된 비거는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국립과천과학관에도 두 가지 형태의 비거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전시되어 있는 비거들은 모두 후세에 추정하여 복원한 것들이다. 비거의 모형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형상이나 크기가 복원한 비거마다 들쭉날쭉이라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2017년에는 인천 하늘고등학교와 인천대학교 연구팀이 비거가 ‘유인 비행체’가 아닌 사람 형상의 허수아비를 태운 뒤 방패연에 매달아 날려 보내는 ‘교란용 비행체’라는 새로운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진주성에서의 현장 실험을 통해 비거가 사람을 태우고 날아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더불어 허수아비를 태운 교란용 비행체를 통해 진주성을 공격하는 왜군의 사격 분산을 유도하는 등의 효과를 보았을 것으로 추측했다.이처럼 비거가 실제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비거에 대한 공식적인 연구와 재현 혹은 복원에 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지난 2016년 진주에서 ‘비차발전위원회’라는 민간단체가 만들어진 이후, 최근에는 진주시가 비거(飛車) 복원에 대한 의지를 밝히고 나섰다. 이러한 움직임의 이면에는 비거를 항공역사의 시초로 보고, 우주항공산업과 연계해 비거를 미래 경남의 주력산업으로 이끌고자하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문제는 정확한 용어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비거 복원(飛車 復元)에 무게를 둔다면 철저한 고증을 거쳐 원형 그대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비거 재현(飛車 再現)에 무게를 둔다면 비거가 내포하고 있는 역사성을 바탕으로 원형에 가깝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건국대학교가 복원한 비거 모형 비거는 진주의 역사이다 비거는 이미 진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진주대첩’이라는 역사성과 공간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진주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될 가치도 충분하다. 비거 복원 혹은 재현에 대한 진주시의 의지와 민간단체의 노력도 뒷받침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비거를 진주의 역사로 인식하고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이다.공군사관학교와 건국대학교 기계공학부 교수,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거 복원팀이 거둔 성과는 비거에 대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현재의 기록만으로 완전히 밝혀내지 못하지만 추진장치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비거의 형태나 크기는 지금과 달라질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비거는 존재했고, 그 비거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이다.진주가 노력한다면 비거는 진주의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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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飛車) ① 진주의 천년역사를 관통하는 핵심 컨텐츠는 단연 임진왜란이다. 국난극복의 역사현장인 사적 제118호인 진주성과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 7만 민관군이 순국한 계사순의, 의기 논개의 충절은 진주의 역사성을 담보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자리하고 있다.최근 임진왜란 당시에 진주성에 등장했던 세계 최초의 비행기로 추측되는 ‘비거(飛車)’가 새로운 역사컨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비거의 존재시기가 426년 전인 임진왜란 당시이고, 당시 학자들의 문집에만 전해질 뿐,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기록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비거(飛車)가 ‘임진왜란과 진주대첩’이라는 역사성과 공간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진주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될 가치는 충분하다. 비거(飛車)에 대한 여러 가지 문헌상의 기록 비거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신경준(申景濬)의 《여암전서(旅庵全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한글학자 권덕규의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일본 역사서 《왜사기(倭史記)》 등에서 ‘비거’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신경준(申景濬)의 《여암전서(旅庵全書)》 잡저(雜著) 거제책(車制策)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洪武年間倭寇圍嶺邑有隱者敎邑守以車法登城放之一去三十里此亦飛車之類也人之才智不可測度有如是夫(홍무(洪武: 명나라 신종의 연호) 년간에 왜구가 영읍(嶺邑: 영남지방의 고을)을 포위하자, 어떤 은자가 읍수에게 이 거법을 가르쳐 주어 성에 올라가 쏘아 단번에 30리를 가게 하였다. 이것이 또한 비거의 종류이다. 사람의 재주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신경준의 여암전서(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에도 비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壬辰倭酋猖獗也嶺南孤城方被重圍亡在昕夕有人與城主甚善而素抱異術迺作飛車飛入城中使其友乘而飛出行三十里而卸於地上以避其鋒(임진년 왜추가 창궐 했을 때 영남의 고립된 성이 바야흐로 겹겹이 포위를 당하여 망하는 것이 조석지간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 때 어떤 이가 성주와 매우 친하였는데 평소 매우 색다른 기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비거를 제작하여 성중으로 날아 들어가 그의 벗을 태워 날아 30리를 난 뒤에 지상에 착륙하여 왜적의 칼날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기록을 살펴보면 비거의 형태와 구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기록에 의하면 비행원리는 동체에 있는 가죽 주머니 아래쪽에 뚫려 있는 구멍을 열어 압축공기를 아래로 분출시키면서 그에 따른 반작용과 함께 공기 방석작용으로 이륙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방식인 것으로 예측된다.이와 동시에 비거에 탄 4명이 날개를 움직이는 줄과 연결된 기계장치를 움직여 양쪽 날개를 상하로 움직임으로써 비거가 지면에서 떠오르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거는 공중에서 약 100장(200m) 정도까지 떠오를 수 있었으며, 상승기류를 타면 30리까지 날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비거는 조선 과학자들의 꿈과 정신 조선의 학자 이규경과 신경준은 비거에 관심을 갖고 그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결과적으로 400여년이 지난 지금, 이 기록 덕분에 비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비거(飛車)를 발명한 16세기 사람 정평구, 18세기의 윤달규, 그리고 19세기 이규경과 신경준에 이르기 까지 오랜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고 기록으로 이어져온 조선의 비행기인 비거(飛車).KBS 역사스페셜은 비거(飛車)를 주제로 한 ‘조선시대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거는 과학기술로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조선시대 과학자들의 꿈과 정신을 말해주고 있다.’ 비거(飛車)에 대한 기록이 알려지면서 언론의 관심도 매우 높았다. 매일신보(每日新報)는 1914년 8월, 한강 변에서 개최된 비행대회를 소개하면서 ‘정평구라는 사람이 진주성에서 기계를 만들어 공중을 날아 벗을 구해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육당 최남선은 1915년에 간행된 《청춘》 4호에 ‘비행기의 창작자는 조선인이다’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비거를 만든 사람이 정평구이며 신경준과 이규경의 글을 처음으로 널리 알리게 되면서 비거가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신한민보(新韓民報), 개벽(開闢),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독립신문(獨立新聞) 등에는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비거에 대한 기사가 자주 게재됐고, 동아일보도 1936년 1월 1일자 신문에 「기록에만 남은 鄭平九 飛車」라는 제하의 기사를 게재하고, ‘300년전 우리 조선(朝鮮)에서 비행기 발명(飛行機發明)한 사실(事實)’이라는 내용을 전재했다. ‘飛車’ 어떻게 부를 것인가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飛車’라는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 호칭의 기준이 애매하다. 그러나 국어사전 등에 수록된 한글 발음이 ‘비거(飛車)’로 수록된 것으로 볼 때 ‘비거’로 호칭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車’라는 한자가 통용되는 사례를 볼 때 크기가 작은 것은 ‘차’라고 읽었고, 큰 것은 ‘거’라고 읽었던 사실에 비추어볼 때 ‘飛車’는 당시의 우마차 보다 훨씬 큰 구조물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飛車’가 ‘비차’로 호칭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4월 8일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된 ‘조선시대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이후부터 비차라는 이름으로 병기하거나 괄호 속에 넣는 방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하지만 이후 MBC, KBS 라디오방송 등 비거관련 프로그램의 바른 용어 사용으로 최근에는 ‘비거’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실례로 비거가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는 국립과천과학관의 설명 패널에도 ‘조선시대의 비행기 비차’였지만 최근 ‘조선시대의 비행기 비거’로 설명 채널을 바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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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댐과 진양호 남강댐이 올해로 준공 55년을 맞았다. 낙동강치수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1969년 건설된 이래, 서부경남 100만 지역민에게 생명수를 공급하고, 홍수피해 등 재해로부터 지역민의 안전을 담보해 온 남강댐은 우리나라 다목적 댐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이듬해인 1970년에는 남강댐 건설로 형성된 인공호수인 진양호(晋陽湖)가 건설되었다. 무려 7년 6개월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준공된 진양호는 진주 8경중의 하나로 지정될 만큼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진주시와 서부경남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해왔다. 남강댐과 진양호의 건설은 서부경남의 재해예방 첨병역은 물론, 진주에 부족했던 문화레저 공간을 제공하며 지역민과 함께 영욕의 50년 세월을 함께 해왔다. 남강댐 건설의 역사 남강댐 건설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20년(1796) 5월 8일 임자(壬子)의 기록에 의하면, 장재곤(張載坤)이라는 사람이 ‘경상도 13개 읍의 농지화 가능성’을 위한 제방 건설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진주 너우니(廣灘)와 지소두(紙所頭) 아래에 제방을 만들고 방수로를 사천만으로 뚫으면 낙동강 하류 경상도 13개 읍이 홍수의 위험으로 벗어나 좋은 농지로 만들 수 있다”시대를 앞선 장재곤의 이러한 건의는 경상도 관찰사인 이태영(李泰永)의 장계에 의해 ‘거짓말’로 낙인되어 실현을 보지 못했다. 진주는 예로부터 풍수해로 인한 자연재해가 많았다. 진주의 대표적인 풍수해와 관련한 기록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인 1920년 경신년 대홍수를 시작으로 1925년 을축년 홍수와 1933년 계유년 홍수, 1959년 사라호 태풍에 의한 홍수 등이 있었다.그 가운데 1936년에 발생한 병자년 대홍수는 진주지역에 전무후무한 큰 참화(慘禍)를 안겼다. 당시 기록을 보면 1936년의 병자년 대홍수는 칠암동, 본성동, 남성동, 동성동, 장대동, 대안동, 중안동, 계동, 인사동, 봉곡동, 상봉동 등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 특히 인사동과 대안동, 장대동, 본성동, 동성동 등은 완전 침수라는 대재앙을 맞이해야 했다.당시 피해상황을 보면 사망 5명(진주읍 4명, 대평면 1명), 완전히 파괴된 가옥 500여채를 비롯해 반파가옥(1,397채) 등의 피해를 입었고, 토지의 침수는 물론 도로·교량·제방 등의 유실로 인해 당시 520만원이라는 초유의 피해액을 기록하기도 했다. 낙동강치수사업과 남강댐의 건설 일제강점기인 1920년부터 1925년까지 낙동강 개수계획 수립 당시 남강댐 지점을 선정하고 1926년 개수공사에 착수해 1934년 완료되었다. 1932년 8월에는 진주시민들이 ‘남강치수문제 진주시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의 홍수피해 방지를 위한 남강치수문제의 해결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강치수문제는 지지부진했고, 1936년 병자년 대홍수 이후에야 낙동강 홍수 피해 복구와 사천만 방수로 굴착공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추진된 남강치수사업에 대한 기록은 동아일보 기사(1938년 10월 1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동아일보는 기사를 통해 남강치수공사의 연혁과 향후계획에 대해 자세히 보도했다.남강댐 1차 착공의 일환이자 낙동강 홍수피해 복구를 위한 사천만 방수로 굴착공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43년 공사가 중단된다. 해방 이후 1949년 중단된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이듬해인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또다시 공사는 중단되었다.전후복구 시기인 1962년 4월 남강댐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박정희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사업에 남강댐 건설이 포함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으로 건설하게 된 것이다. 이후 남강댐은 7년여의 사업기간을 거쳐 마침내 1969년 10월 7일 준공하게 되지만 1981년 9월 진주를 휩쓴 대홍수로 인해 남강댐 보강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를 계기로 1989년 남강댐 숭상공사에 들어간 구 남강댐은 1998년 7월 16일 폭파되어 자취를 감췄고, 1999년 현재의 남강댐으로 그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대홍수로 인해 촉석루에 빨래를 널어 건조하는 모습(1933년) / 윤방 진주의 대표적인 관광단지 진양호의 탄생 남강 다목적댐은 수력발전을 비롯해 농업용수공급, 홍수방지, 관광 등 여러 가지 용도를 목적으로 건설한 댐이었다. 특히 남강댐은 다른 댐들과 달리 홍수조절과 관광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따라서 남강댐에 ‘진양호’라는 관광단지가 조성된 것이다.진양호는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인공호수로 유역 면적 2,285㎢, 저수량 1억 3600만 톤으로 7년 6개월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70년에 준공되었다. 그 후 1999년 10월 댐 보강 공사가 완공되어 현재는 저수량 3억 920만 톤 규모로 확대되었다.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진양호는 진주시민과 서부경남도민들이 이용하는 관광지이자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진양호 공원은 전망대와 동물원을 제외하고는 관광객들이 이용할만한 공원시설이 적어 관광객의 감소 등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진양호 공원 활성화에 대한 요구는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지만 구체적인 활성화방안 마련에 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남강댐과 진양호의 새로운 도전 남강댐 준공 50돌을 맞아 한국수자원공사는 ‘미래 50년 비전 선포식’을 가졌다. 최신 기술이 결합된 수력현대화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비전사업은 물론 남강댐 수몰지구와 인근 지역민을 위한 지역환원사업으로 새로운 남강댐의 출발을 알렸다.진양호 역시 진주시의 ‘진양호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추진으로 공원기반시설정비와 레저·문화·생태가 어우러진 복합문화 체험공간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진주시는 진양호공원 활성화를 위해 가족과 함께 편안하고 쾌적하게 즐길 수 있는 진양호 근린공원과 지역관광과 연계한 찾고 싶은 문화공원, 4계절 축제와 이벤트가 있는 특별한 모험공원, 울창한 숲과 자연이 함께 하는 건강한 힐링공원 등이 조성된다.남강댐의 새로운 출발과 진양호의 부흥 프로젝트가 가시화된다면, 지역민과 애환을 함께 한 남강댐과 진양호는 명실상부한 전국 최고의 대표공원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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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지러우면 악덕 무당이 판친다. 제법 괜찮다는 길목엔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색천을 매단 대나무를 대문간에 세워두고 안방엔 신당을 차린다. 소위 신군(神君)을 자처하는 그들은 세상 살이 다급한 민초를 대상으로 혹세무민한다. 그리고 마치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판관처럼 행세한다. 보편적 인식이 그렇다는 말이다. 비단 무당에만 그치지 않는다. 조폭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패밀리’의 머릿수가 곧 ‘힘’인 이들은 ‘대부’의 그늘에서 복
‘잣대’라는 말이 있다. 길이를 재는 자로 사용되는 대막대기 혹은 나무 막대기의 일종으로 통칭 ‘자막대기’라고도 부른다. 이 말은 자고로 도덕적인 행위나 사물의 기준을 재단하는 객관적인 근거로 인용되곤 했다. 흔히 ‘객관적이지 못한 일’이나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이 잣대를 기준으로 잘잘못을 가리곤 한다.그런데 이 잣대란 말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잣대가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객관적이지 못하며 형평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 ‘잣대’는 일부 소수 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