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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飛車) ①

  • 작성자

    황경규

  • 작성일

    2024.07.25 PM 16:57

  • 조회수

    825

비거의 존재시기가 426년 전인 임진왜란 당시이고, 당시 학자들의 문집에만 전해질 뿐,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기록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비거(飛車)가 ‘임진왜란과 진주대첩’이라는 역사성과 공간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진주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될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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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飛車)  ① 

 

 

진주의 천년역사를 관통하는 핵심 컨텐츠는 단연 임진왜란이다. 국난극복의 역사현장인 사적 제118호인 진주성과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 7만 민관군이 순국한 계사순의, 의기 논개의 충절은 진주의 역사성을 담보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최근 임진왜란 당시에 진주성에 등장했던 세계 최초의 비행기로 추측되는 ‘비거(飛車)’가 새로운 역사컨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비거의 존재시기가 426년 전인 임진왜란 당시이고, 당시 학자들의 문집에만 전해질 뿐,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기록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비거(飛車)가 ‘임진왜란과 진주대첩’이라는 역사성과 공간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진주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될 가치는 충분하다.

 

비거(飛車)에 대한 여러 가지 문헌상의 기록

 

비거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신경준(申景濬)의 《여암전서(旅庵全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한글학자 권덕규의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일본 역사서 《왜사기(倭史記)》 등에서 ‘비거’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신경준(申景濬)의 《여암전서(旅庵全書)》  잡저(雜著) 거제책(車制策)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洪武年間倭寇圍嶺邑有隱者敎邑守以車法登城放之一去三十里此亦飛車之類也人之才智不可測度有如是夫(홍무(洪武: 명나라 신종의 연호) 년간에 왜구가 영읍(嶺邑: 영남지방의 고을)을 포위하자, 어떤 은자가 읍수에게 이 거법을 가르쳐 주어 성에 올라가 쏘아 단번에 30리를 가게 하였다. 이것이 또한 비거의 종류이다. 사람의 재주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신경준의 여암전서(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에도 비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壬辰倭酋猖獗也嶺南孤城方被重圍亡在昕夕有人與城主甚善而素抱異術迺作飛車飛入城中使其友乘而飛出行三十里而卸於地上以避其鋒(임진년 왜추가 창궐 했을 때 영남의 고립된 성이 바야흐로 겹겹이 포위를 당하여 망하는 것이 조석지간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 때 어떤 이가 성주와 매우 친하였는데 평소 매우 색다른 기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비거를 제작하여 성중으로 날아 들어가 그의 벗을 태워 날아 30리를 난 뒤에 지상에 착륙하여 왜적의 칼날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기록을 살펴보면 비거의 형태와 구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기록에 의하면 비행원리는 동체에 있는 가죽 주머니 아래쪽에 뚫려 있는 구멍을 열어 압축공기를 아래로 분출시키면서 그에 따른 반작용과 함께 공기 방석작용으로 이륙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방식인 것으로 예측된다.

이와 동시에 비거에 탄 4명이 날개를 움직이는 줄과 연결된 기계장치를 움직여 양쪽 날개를 상하로 움직임으로써 비거가 지면에서 떠오르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거는 공중에서 약 100장(200m) 정도까지 떠오를 수 있었으며, 상승기류를 타면 30리까지 날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비거는 조선 과학자들의 꿈과 정신

 

조선의 학자 이규경과 신경준은 비거에 관심을 갖고 그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결과적으로 400여년이 지난 지금, 이 기록 덕분에 비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비거(飛車)를 발명한 16세기 사람 정평구, 18세기의 윤달규, 그리고 19세기 이규경과 신경준에 이르기 까지 오랜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고 기록으로 이어져온 조선의 비행기인 비거(飛車).

KBS 역사스페셜은 비거(飛車)를 주제로 한 ‘조선시대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거는 과학기술로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조선시대 과학자들의 꿈과 정신을 말해주고 있다.’  

비거(飛車)에 대한 기록이 알려지면서 언론의 관심도 매우 높았다. 매일신보(每日新報)는 1914년 8월, 한강 변에서 개최된 비행대회를 소개하면서 ‘정평구라는 사람이 진주성에서 기계를 만들어 공중을 날아 벗을 구해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육당 최남선은 1915년에 간행된 《청춘》 4호에 ‘비행기의 창작자는 조선인이다’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비거를 만든 사람이 정평구이며 신경준과 이규경의 글을 처음으로 널리 알리게 되면서 비거가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신한민보(新韓民報), 개벽(開闢),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독립신문(獨立新聞) 등에는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비거에 대한 기사가 자주 게재됐고, 동아일보도 1936년 1월 1일자 신문에 「기록에만 남은 鄭平九 飛車」라는 제하의 기사를 게재하고, ‘300년전 우리 조선(朝鮮)에서 비행기 발명(飛行機發明)한 사실(事實)’이라는 내용을 전재했다.

 

‘飛車’ 어떻게 부를 것인가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飛車’라는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 호칭의 기준이 애매하다. 그러나 국어사전 등에 수록된 한글 발음이 ‘비거(飛車)’로 수록된 것으로 볼 때 ‘비거’로 호칭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車’라는 한자가 통용되는 사례를 볼 때 크기가 작은 것은 ‘차’라고 읽었고, 큰 것은 ‘거’라고 읽었던 사실에 비추어볼 때 ‘飛車’는 당시의 우마차 보다 훨씬 큰 구조물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飛車’가 ‘비차’로 호칭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4월 8일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된 ‘조선시대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이후부터 비차라는 이름으로 병기하거나 괄호 속에 넣는 방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MBC, KBS 라디오방송 등 비거관련 프로그램의 바른 용어 사용으로 최근에는 ‘비거’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실례로 비거가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는 국립과천과학관의 설명 패널에도 ‘조선시대의 비행기 비차’였지만 최근 ‘조선시대의 비행기 비거’로 설명 채널을 바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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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된 유산, 땅과 한 몸으로 구축된 문화유산, 집단 장인기술로 구축된 유산에 두고 있다.진정성(authenticity) 측면에 있어서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수축과 수리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리되어 왔다는 점이며, 완전성(integrity)에 있어서는 한국의 독창적인 도성 형식으로 조성되었고, 규모 면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큰 성곽이면서 성곽의 70%가 성곽의 원형 또는 유적형태로 보존·관리되고 있다는 점이다.현재 한양도성은 국보와 보물, 그리고 사적으로 지정돼 국가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성곽의 잔존 및 훼손 구간에 대한 지속적인 복원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서울시는 한양도성 종합보존·관리활용계획을 수립하고 한양도성을 세계유산의 관리지침에 부합하는 기준으로 보호하고 있다.진주성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일까? 한국성곽연구소 심광주 소장은 진주성의 의미와 가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진주성의 훼손과 정화사업을 통한 경관회복 노력이다. 진주성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원형 경관이 급속히 훼손되었다. 1906년 동장대(東將臺)의 붕괴를 시작으로 1910년에는 일제가 진주성 성돌로 대사지(大寺池)를 매립했다. 이후 진주신사(晋州神社) 건립(1917년)과 읍성훼철령(1910년), 시가지건축물 취제규칙(1913년), 면제시행규칙(1917년)으로 진주성 훼손이 가속화되었고 진주성 경내에는 민가(民家)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섰다. 1963년 진주성이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지만, 진주성은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폐허로 변했다. 이후 진주성정화사업(晋州城淨化事業)의 추진으로 진주성은 오늘날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둘째, 진주성 축성에 응축된 우리나라 성곽 축성 기술의 가치이다. 진주성은 ‘우리나라 축성 기술사 연구의 보고’라는 것이다. 고려 석축성에서 조선시대 읍성 축성법의 연계성이 확인되고 있다. 축성기록이 잔존하고 있어 조선시대 각 시기별 축성법의 특징 파악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성곽 방어 시스템과 무기체계 등도 진주성이 가진 가치를 더해주고 있음은 물론이다.셋째는 견고하고 완전무결한 것으로 평가되었던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유산이라는 점이다.읍성의 축조가 갖는 의미는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상황이 반영된 독특한 방어시설이다. 이러한 점에서 진주성은 평지성(坪地城)이면서 산성(山城)의 방어력을 갖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읍성(邑城)인 것이다. 이는 제1차 진주성전투(1952년. 10. 6~10)에서 3,800명의 수성군이 2만여 명의 왜군을 상대로 승리했고, 제2차 진주성전투(1593. 6. 19~29)에서는 7만 명의 수성군이 10만여 명의 왜군을 상대로 항전했다. 서울의 한양도성(漢陽都城)과 진주의 진주성(晋州城)이 갖는 가치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곽(城廓)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군사유산이며 ,우리나라 성곽 축성 기술의 보고라는 점이다.「진주성 외성 찾기 프로젝트」를 위해 한양도성을 방문했을 당시의 일화이다. 진주성 외성 찾기 계획을 살펴보던 한양도성 담당자가 이렇게 말했다. ‘도심 속에 있는 진주성을 가진 진주가 부럽다. 진주성이 복원되면 대한민국 최고의 성곽유산을 가진 곳이 될 것이다.’ 서울의 한양도성과 견주어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진주성. 진주성이 잃어버린 성곽(城廓)을 찾아 나서는 여정(旅程)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진주성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진주성 외성은 진주의 도시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진주의 상징이자, 역사 현장인 진주성의 본격적인 훼철이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일제는 진주에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급증하자, 진주의 도시 근대화하는 명분 아래 경상우병영의 군사방어시설이던 진주성 성벽을 허물고 대사지를 매립했다. 이 시기 경남도청 선화당(宣化堂)을 비롯해 진주성 내의 주요 옛 건축물들이 역사 속으로 모습을 감춘 것은 물론 진주성 외성 역시 근대 도시화의 미명 아래 진주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시기의 진주성에는 더욱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진주성의 상징인 촉석루(矗石樓)가 전소된 것을 비롯해 진주 시가지는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진주성 역시 그 원형을 잃은 채로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되었다. 이 시기 진주성은 내성(內城)의 성곽은 거의 찾아 보기 어려웠고, 진주성 외성(外城)은 존재 자체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가 되었다.진주성(晋州城)의 복원에 대한 지역민의 건의가 이어졌다. 이에 따라 1963년 진주성이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사적지 지정과 동시에 성지 일원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이후에도 꽤 오랜 시간 진주성은 폐허 그 자체로 방치되었다. 지역사회에서 진주성 복원을 통한 진주의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진주시가 1969년 진주시장기계획사업으로 진주성정화사업을 설정했다. 진주성정화사업은 3차에 걸쳐 진행되었다.진주성은 제1차 진주성정화사업(1970~1975년)을 통해 성곽, 촉석문, 북암문을 복원하고 촉석루를 비롯한 9동의 문화재 보수와 성지 내 순환도로 개설로 사적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제2차 진주성정화사업(1979~1980년)에서는 성지 경내에 산재한 민가 751동의 철거와 토지 보상이 이루어졌고, 제3차 진주성정화사업(1981~1984년)에서는 성곽 490m가 복원되고 유적 7동이 보수되었으며, 광장 4,728평과 주차장 456평, 10,677평에 이르는 조경사업이 추진되었다. 국립진주박물관이 건립(1984년)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사실 진주성정화사업으로 인해 진주성이 오늘날의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지만, 진주성의 역사성·상징성·유일성이 내재된 역사 복원 혹은 역사공간의 원형보존에 실패한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시민 공원 또는 관광지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점은 진주성 뿐만 아니라 진주시 전체의 불행이기도 하다.진주성정화사업을 통해 진주성(內城)은 불완전하나마 제 모습을 찾았지만, 진주성 외성 복원과 정비에 대한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주성 내·외성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면서 다양한 성과물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최근 진주성 외성 복원 혹은 재현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진주성 주요 건축물의 발굴과 복원 진주성 외성을 찾는 일을 정의하자면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진주성에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다. 더불어 진주성 외성 찾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진주성 관련 연구와 발굴 성과의 축적에 이어 진주대첩광장(晋州大捷廣場)에서 진주성 외성의 성벽이 발굴된 것이 결정적이었다.진주성 내성·외성과 관련된 그동안의 연구 성과의 축적은 괄목할 만하다. 연구자들에 의해 다방면으로 이루어진 연구를 통해 진주성 내성과 외성의 일각을 확인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이러한 연구가 향후 진주성 내성과 외성의 주요 시설물의 발굴과 복원 자료로 활용되었음은 물론이다.진주성 주요 시설물의 초기 발굴조사는 ‘진주성 내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선화당 부지조사(국립진주박물관, 1997년), 공북문 조사(경남문화재연구원, 1999년), 촉석루 아래 성벽 조사(국립진주박물관, 2000년) 이후 진주성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진주성 내·외성의 주요 시설물에 대한 발굴과 복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10년 이후의 일이다.진주성(晋州城) 외성(外城) 동벽(東壁)과 북벽(北壁)이 발굴되었다. 진주성 외성의 첫 발견이라는 의의가 있다. 최초로 성벽이 확인된 것은 진주교 사거리 동쪽에 위치(구 중앙파출소 골목길)한 진주성 외성의 동벽 구간이다. 그리고 진주성 외성 북벽은 지금의 진주경찰서와 진주우체국 앞길로 추정된다.진주성(晋州城) 외성(外城) 북서벽(北西壁)으로는 진주시 중안동 15-11번지에서 통일신라시대 채토 수혈과 외성벽, 대사지 호안 석축 등이 조사되었다. 대사지(大寺池) 북쪽 호안과 남쪽 호안이 발견된 진주 중안동 유적은 경상남도 진주교육청 이전 부지 내에서 발굴되었다.진주대첩광장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배수로와 고려시대 토성, 조선시대 석성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진주성 외성과 치성, 대사지 추정 유구가 2020년 발굴되었다.진주성(晋州城) 외성 북쪽 대사지 흔적은 중앙병원과 동산교회 사잇길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동성동 진주성 외성 동벽 구간에서도 해자로 추정되는 자료가 확인되었다. 지금의 중앙동행정복지센터 앞길이다.진주성 내 경상우병영 병마우후(종3품)의 집무공간인 중영(中營)이 복원되었다. 진주성정화사업 이후 촉석문(矗石門)과 공북문(拱北門) 등 문루(門樓) 이외에 건축물로는 진주성 내에서 최초로 복원된 건물이다.진주성 중영 복원을 계기로 진주성 원형 찾기에 대한 지역사회의 기대가 높아졌다. 진주시가 지난 2020년에 수립한 「진주성 종합정비계획 수립(2020)」 용역 역시 진주성 발굴과 정비라는 시대적 요청에 답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진주성의 역사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진주의 미래 먹거리 마련이라는 실천의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잃어버린 진주성을 찾아 나서다 진주성 외성 찾기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지적원도를 바탕으로 하되, 현 진주성 내성의 좌표값을 기준으로 진주성 외성의 위치와 좌표 값 도출로 진주성 외성과 대사지의 위치를 비정하고자 했다. 공간적 범위는 진주성 외성과 대사지이며, 시대적 범위는 일제강점기 훼철 이전의 진주성이다.진주성 외성 찾기는 ▲1910년대 지적원도와 2023년 지적도와의 대조 ▲진주성 외성 발굴지의 현재 좌표값 특정 ▲현 지적도 상의 진주성 외성과 대사지 비정 ▲특정된 좌표값을 기준으로 외성곽 및 외성길 개발 ▲진주성 외성과 구도심·재래시장과의 연계 방안 도출을 핵심과제로 삼았다. 연구는 ▲지적원도 검토 및 분석 ▲구 지적원도와 현 지적원도의 대조 ▲진주성 외성과 대사지 구간의 예측 ▲실측 ▲보전 ▲GIS(지리정보시스템)활용 ▲진주성 외성과 대사지 좌표값 특정순으로 진행되었다. 진주성 관련 관광 콘텐츠 개발과 활용 진주성 외성 찾기를 통해 이루고자 한 목표가 있다. 진주성의 성곽 문화자원을 활용해 진주를 대표하는 새로운 관광콘텐츠 개발에 이어 구도심과 재래시장 활성화의 계기 마련이었다. 진주성 외성을 찾는 과정에서 진주성 외성을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제안했다. 진주성은 조선시대 고지도에 그 형태가 표기돼 있지만 현재는 내성(內城)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대사지 매립을 시작으로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진주성 외성(外城)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도시화를 위해 성벽을 허문 자리에는 근대식 건물이 들어섰고, 대사지는 외성의 성벽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진주성 외성은 무려 9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땅 속에 묻힌 채,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진주성 외성 찾기를 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진주성 성곽을 활용한 관광자원화였다. 진주성 외성의 주요 시설지에 대한 발굴 조사와 현장 측량을 토대로 진주성 외성임을 인식할 수 있는 표식의 설치에 주목했다. 서울의 한양도성의 경우, 미디어 스마트 폴과 안내판 설치 등으로 한양도성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진주성 외성 스마트 미디어 폴 설치진주성 외성의 주요 시설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토대로 진주성 외성임을 인지할 수 있는 표식의 설치가 필요했다. 현재 발굴조사를 통해 시설지로 확인되어 표식설치가 가능한 곳은 5곳 정도로 파악되었다. ▲남문(南門) 추정지(진주대첩기념광장~옛 중앙파출소 골목) ▲동장대(東將臺) 추정지(대흥주차장 인근) ▲신북문(新北門) 추정지(기업은행 인근) ▲외성 북벽 추정지(진주우체국 앞 도로) ▲구북문(舊北門)추정지(공북문 옆 구 진주문화원 인근)이다. 진주성 관문(關門)인 남문(南門) 재현 진주성 내성과 외성을 포함하는 진주성 관문의 설치 필요성이 매우 높다. 남문은 진주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향후 진주성 복원 및 정비사업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사전사업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진다. 진주성 숏 다큐멘터리 제작 진주성 외성 찾기 사업의 결과물인 진주성 숏 다큐 제작을 통해 진주시민들에게 진주성 외성 찾기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고 진주성 복원과 정비에 대한 필요성을 제고하기 위해 필요하다.촉석루와 남문, 중영을 3D 영상 제작을 시작으로 향후 진주성 내성과 외성을 포함한 진주성 3D 제작을 통해 진주성의 역사성을 대내외에 알려야 한다. ICT기술 기반(AR글래스) 콘텐츠 개발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즉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AR글래스를 통해 진주성에 대한 접근을 편리하게 함과 동시에 모바일 에플리케이션을 활용한 진주성 활용 등을 통해 진주성 외성 컨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진주성 특화골목 개발 진주성 외성 찾기를 통해 진주성-구도심, 진주성-재래시장을 연결하는 ‘특화골목’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진주성 외성 찾기를 통해 진주성-구도심, 진주성-재래시장을 연결하는 ‘특화골목’의 조성 필요성을 제기했다. 진주성 특화골목은 ‘동장대 특화골목’과 ‘공북문 특화골목’ 등 2개소이다. •동장대 특화골목현재 동장대 추정지인 대흥주차장에서 북쪽 방향 200m지점을 지나 대로변 건너편에는 중앙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동장대-중앙시장에 이르는 이 특화골목은 가칭 ‘동장대 특화골목’으로 진주성 외성 탐방 이후 자연스럽게 중앙시장으로 연결함으로써 재래시장 활성화에 기여하는 측면을 강조할 수 있다. •공북문 특화골목공북문 특화골목은 진주시교육지원청 사거리-공북문에 이르는 골목길이다. 진주시교육지원청 사거리 입구에서 진주성 공북문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 골목에는 커피숍 등 다양한 상점이 즐비해 있는 것은 물론 진주성과 연결되는 구도심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진주 최초 ‘진주성 3D’ 제작 진주 최초로 진주성 3D 영상을 제작했다.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도(晋州城圖) 원본을 토대로 최대한 조선시대 진주성을 구현하고자 했다. 진주성 3D에는 현전하는 건축물인 촉석루, 의기사, 촉석문, 서장대, 의기사, 공북문, 중영 등을 3D 작업을 통해 구현했다. 이와 함께 진주 내성의 선화당과 남문, 신북문, 대사지 등도 3D로 구현해 옛 모습을 볼 수 있게 했다.진주성 3D는 현재 완성도 측면에서는 낮은 단계에 있으나 진주지역 최초로 구현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둘 수 있으며, 향후 지속적인 보완 작업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 나갈 예정이다.더불어 진주성 3D를 활용해 초·중·고교 교육자료로 활용하는 한편 진주지역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홍보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진주성 외성 찾기 필요성 진주성은 진주 미래 100년을 책임질 소중한 자산 중의 하나이다. 진주성에 녹아 있는 천년 역사의 흔적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성곽 문화자원을 발굴·활용한 관광자원 개발의 가능성 역시 무한대이다.진주성 외성 찾기, 혹은 진주성 원형찾기를 통해 ‘진주성의 정체성 확보와 이를 활용한 진주관광 미래 100년 마스트 플랜의 밑그림 그리기’가 필요하다. 다만 도심 속 건물에 파묻혀진 외성의 복원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진주성 외성 찾기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진주성 외성 찾기는 기존의 연구성과물을 바탕으로 세밀한 측량작업을 통해 진주성 외성의 위치를 특정함과 동시에 남문(南門), 동장대(東將臺), 구북문(舊北門) 등 외성을 구성하고 있는 성곽 문화자원의 발굴로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더불어 진주성 외성 찾기가 진주관광미래 100년을 책임지는 킬러콘텐츠의 보고(寶庫)라는 강점을 갖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진주성은 경상남도의 역사적 전통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경남도의 수부도시라는 상징성을 회복하는 길은 진주성의 복원이 될 것이다. 경남을 찾은 외국인들이 가장 인상깊은 곳으로 ‘진주성’을 꼽았다.(2008년 경상남도 관광실태조사) 외국인은 진주성을 경남의 상징물, 즉 랜드마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진주성 복원(외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회의론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한 진주성 복원은 요원하다. 일본의 오사카성(大阪城)의 천수각과 구마모토(熊本城)의 복원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오사카성 천수각은 1665년 소실 이후, 266년이 흐른 1931년에 복원이 되었다. 성채가 견고하기로 유명한 구마모토성도 1877년 소실된 이후, 83년이 지난 1960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도 진행중이다. 일제강점기부터 그 모습을 잃기 시작한 진주성 외성의 복원 프로젝트를 수립해야 한다. 이는 진주를 벗어나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업이 될 것이다.

  • 202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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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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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 2)  1. 정조, 촉석루를 모방하다 썸네일 이미지

(STORY OF 진주 2) 1. 정조, 촉석루를 모방하다

진주성(晋州城)과 촉석루(矗石樓)의 제도(制度)를 모방하라는 지시를 내린 조선의 국왕이 있다. 그는 바로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이다.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할 당시, 조선 최고의 성(城)이었던 진주성과 촉석루를 벤치마킹하도록 한 기록이 있다. 국왕의 동정과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수록한 정무 일지인 『일성록(日省錄)』이다. 『일성록(日省錄)』 정조(正祖) 18년(1794년) 10월 19일(癸酉)의 기록이다. 진주성(晉州城)은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중국의 성제(城制)를 모방하여 쌓은 것인데, 그 유고(遺稿)를 보면 그의 재지(才智)와 역량은 실로 후인들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화성의 제도 역시 진주성을 모방하여 견고하고 완전무결함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대하려는 것이니, 어찌 급급하게 역사를 감독하여 오직 속히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겠는가. 만일 고 상신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반드시 내 말이 옳다고 했을 것이다.”(晉州之城卽故相柳成龍之摸倣中國城制者也見其遺稿其才智力量實非後人可及今此華城之制亦所以摸倣晉城而欲其鞏固全完期於永奠豈可急急董役惟以速成爲主乎若使故相在此則必後吾言矣) 수원(水原) 화성(華城)은 정조가 꿈 꾼 새로운 조선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시 화성을 계획했다. 수원 화성은 당시 최첨단 과학과 건축술이 적용된 역작이자, 동양 성곽(城廓)의 백미로 평가 받고 있다. 정조가 만들고자 한 수원 화성은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평지성이면서 견고한 성(城)이었다. 정조가 이른바 ‘진주성을 모방하여 견고하고 완결무결함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할 당시, 제도를 모방할 정도로 조선 최고의 성(城)은 바로 진주성(晋州城)이었다. 정조는 진주성의 제도를 모방하라는 교지를 내리기 1년 전인 정조 17년(1793) 12월 8일, 진주성 촉석루(矗石樓)에 주목했다. 화성 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 제도, 의식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영남의 여러 성 중에 진주성(晉州城)에 있는 초루(譙樓)가 매우 좋다고 하니 사람을 보내 알아 오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하니, 조심태가 아뢰기를,“함안 군수(咸安郡守) 심인(沈鏔)은 본래 재주와 슬기가 있다고 일컬어집니다. 곧 임기가 만료된다고 하니, 그로 하여금 몸소 가서 간심하고 나서 도형을 만들어 올라오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嶺南諸城中 晉州城看譙樓甚好云亦送人知來好矣 心泰曰 咸安郡守 沈鏔自有才諝之稱聞瓜期在卽云使之躬往看審仍爲圖形上來之地似好矣) 정조가 말한 ‘진주성에 있는 초루(譙樓)’는 촉석루(矗石樓)를 말한다. 조선 후기 형조판서와 장용영대장을 역임한 무신인 조심태(趙心泰)가 함안군수 심인을 시켜 ‘간심(看審)’ 즉 촉석루를 자세하게 보아 살핀 이후에 촉석루의 도형(圖形)을 만들어 올리게 하겠다고 한 것이다. 정조(正祖)는 진주성과 촉석루에 주목했다. 이는 정조가 꿈꾼 새로운 조선인 화성 축성에 있어 진주성과 촉석루가 제도의 근본이 되었다는 점은 ‘조선시대 진주성과 촉석루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에 촉석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66호)를 국보(국가지정문화유산)으로 재지정하기 위한 지역사회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진주성과 촉석루가 가지는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의 일환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촉석루 3D 유홍준과 촉석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MBC의 간판 예능프로그램인 강호동의 「무릅팍 도사」에 출연했다. 스타들의 실제 고민을 속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프로그램에서 유 전 청장은 ‘대한민국 문화유산 관리에 가장 큰 불만’을 내놓았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을 방문하면 항상 눈에 거슬리는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었다. 유 전 청장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목조건축물에는 사람이 살아야 그 건물도 살고 오래 보존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곰팡이와 먼지가 낀다. 천하의 좋은 집도 ‘들어가지 마시오’ 3년이면 흉가가 된다.’ 그러면서 ‘촉석루(矗石樓)’를 그 모범답안으로 제시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정자 중에 가장 보존이 잘된 곳이 바로 진주의 촉석루이다.’ 유홍준 전 청장의 이 말은 출입 자체를 금기시하는 우리나라의 다른 목조 건물들처럼 ‘들어오지 마시오’가 아니라 국민들이 마음 편히 촉석루에 올라 진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느낌과 동시에 촉석루의 산 역사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촉석루를 잘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유 전 청장은 JTBC의 시사 교양프로그램인 「차이나는 클라스」에도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촉석루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경복궁 경회루, 창경궁의 일반인 개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복궁의 경회루를 비롯한 대한민국 대표 문화유적들이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으면서 ‘문화유산 스스로 고립과 소외를 자청해 보존의 기회를 스스로 상실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유 전 청장은 방송을 통해 ‘문화재는 가까이서 보고 향유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촉석루가 입증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경남 진주의 촉석루가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현재 명지대학교 석좌교수인 유홍준 전 청장은 각종 기고를 통해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유 교수는 「유홍준의 문화의 창」이라는 칼럼에서 전국에 퍼져 있는 누정(樓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누정(樓亭)은 자연환경이 낳은 아름다운 연속유산이다. 삼천리 방방곡곡 풍광 좋은 자리와 쉬어 갈 만한 곳에는 반드시 누정이 있었다. 그 이름은 루(樓), 대(臺), 정(亭), 헌(軒)으로 대표되며, 그 중에서 관아에서 지은 누각은 그 고을의 상징적 랜드마크로 규모도 크고 자리앉음새도 탁월하다고 보았다.그러면서 조선의 3대 누각(樓閣)으로 진주(晋州) 촉석루(矗石樓)·밀양(密陽) 영남루(嶺南樓)·평양(平壤) 부벽루(浮碧樓)를 꼽았다. 이외에도 남원 광한루, 삼척 죽서루, 안주 백상루, 청풍 한벽루도 대표적인 누각으로 선정했다.유 교수는 이들 누정(樓亭)에 있는 기문(記文)에도 주목했다. 청풍 한벽루 기문을 쓴 조선 태종 때 문신인 하륜(河崙)의 글을 소개했다.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누각을 관리하는 일은 한 고을 수령된 자의 마지막 일감에 지나지 않지만, 그 누각이 관리되는 것만 보아도 고을의 행정실태를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어찌 작은 일이라 하겠는가” 호정(浩亭) 하륜(河崙)이 지은 「촉석루기(矗石樓記)」도 소개할 필요가 있다. 하륜은 촉석루기에서 촉석루를 둘러싼 풍광의 아름다움과 진주사람의 기상, 그리고 명승에 어울리는 자연경관에 대해 담담하게 적고 있다. 누의 규모가 크고 높으며 확 트여서 굽어보면 긴 강이 그 아래로 흐르고 여러 봉우리가 바깥쪽에 벌려져 있다. 가정집의 뽕나무 밭과 삼밭, 고대(高臺)의 화훼가 그 사이로 은근히 비친다. 사람의 기상이 맑고 풍속이 온후하며,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네는 그 일에 부지런하고 효자와 어진 후손은 그 힘을 다 쏟는다. 방아노래는 마을에 연이어 울리고 장단 맞춘 뱃노래가 벼랑을 따라 퍼진다. 새들이 무성한 숲에서 절로 날고, 물고기와 자라는 헤엄치고 자맥질하여 한 구역(一區)의 만물에 이르기까지 제 자리를 얻어서 모두가 볼만하다. 유홍준 교수는 대한민국 문화유산으로서의 촉석루가 가지는 가치를 결코 평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촉석루는 경복궁의 경회루와 창경궁의 일반개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촉석루가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과의 차별점은 ‘국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문화유산’으로 오랜 기간동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촉석루는 조선시대에 이어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누각(樓閣)으로 그 명성을 잇기에 충분하다. 다시, 촉석루 조선의 3대 누각(樓閣)인 진주 촉석루·밀양 영남루·평양 부벽루가 갖는 문화유산으로서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현재 조선의 3대 누각인 촉석루·영남루·부벽루의 위상이 어떠한지 확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밀양의 영남루는 지난 2023년 12월 국보(國寶)로 지정되었다. 평양의 부벽루는 국보 제17호이다. 반면 촉석루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전소된 후 재건되었지만 아직도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시도유형문화유산에 머물고 있다. 촉석루의 냉혹한 현주소이다.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국경을 초월할 만큼 독보적이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더불어 등재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세계사적 시각에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연속유산’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왕릉이다.최근에 ‘주목할만한 연속유산’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누정(樓亭)’이다. ‘다시, 촉석루’라는 명제를 떠올려야 하는 이유이다.지난 2023년 12월 밀양의 영남루와 삼척의 죽서루가 보물(寶物)에서 국보(國寶)로 승격되었다. 향후 이들 누정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유적의 보존실태에 대한 심사준비는 물론 건축, 문학, 역사 등의 학술대회를 통해 인문학적 가치를 쌓아 나갈 것으로 보인다.밀양루의 역사를 살펴보자. 국보로 승격된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는 일제강점기(1933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1955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1962년 1월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문화재 재평가로 보물로 격하되었다. 밀양루의 국보 지정을 위해 밀양시는 지난 2014년 시민운동 차원에서 국보 승격을 위한 노력을 진행하다가 결국 취하하고 만다. 대신 영남루의 원래 지형 복원을 위해 난립한 건축물을 매입한 후 원형 복원 노력을 추진했다. 2022년에는 영남루의 건축사적·인문학적 가치를 담은 「영남루 국보 승격 학술보고서」를 제출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이듬해인 2023년 12월 28일 국보(國寶)로 지정되었다.국보(國寶)였던 촉석루의 옛 위상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지역사회의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촉석루는 고려 고종 26년(1241)에 건립된 이래, 783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무려 아홉 차례에 걸쳐 중수(重修)와 보수(補修)를 거치면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왔다.일제강점기인 1937년에는 보물 제276호로 지정되었다가, 1948년에는 국보 제276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전소되면서 1956년에는 국보 지정이 해제되었고 1960년에 진주시민들의 힘으로 촉석루가 재건되었다. 이후 1983년에는 경상남도 지방문화재자료에 그치면서 2004년 지역사회에서 촉석루 국보환원운동이 일어났지만 무위에 그쳤다. 다시 2020년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제666호 지정되었다.최근 촉석루의 원형복원을 입증할 결정적인 문서가 발견되면서 ‘촉석루의 국가지정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조현신 경남도의회 의원이 경남연구원에 촉석루 국가지정문화유산 재지정을 위한 정책현안 과제를 의뢰한 결과, 촉석루가 원형복원됐다는 사실을 증명할 자료를 입수한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4건의 자료는 ▲일제강점기 촉석루 실측도(1937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 후 재건공사 설계도(1957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촉석루 조속복구 특별지시에 따른 원상복구 승인요청 공문 ▲원형으로 재건공사를 허가했다는 내용의 언론보도이다.이로써 국보-소실-복원의 반복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안고 있는 촉석루의 국가지정문화유산 재지정에 청신호가 켜졌다. 지난 2014년 문화유산 승격 신청 당시 부결된 과제를 해결하고 조선 3대 누각의 명성을 회복할 기회를 마침내 갖게 된 것이다. 경상남도 역시 ‘조선 3대 누각’인 촉석루의 국가지정문화유산 지정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주성(晋州城) 촉석루(矗石樓)를 바라보면 눈 맛이 난다. 수다스런 단청도, 주책없는 니스칠도 없다. 단아하고 기품이 있으며 일체 속악(俗惡)한 것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추한 것들이 진정 아름다운 것들을 짓밟는 행패 속에 얼마 남지 않은 진주의 자산(資産)이자, 진주정신(晋州精神)이 살아 숨 쉬는 곳이 바로 촉석루이다. 『촉석루(矗石樓)』라는 책을 쓰면서 서문에 적은 글이다. 촉석루가 진주를 중심으로 한 인문질서의 핵심이자, 이상적인 공간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촉석루가 진주의 역사성·정체성·유일성을 대표하는 ‘진주문화의 자긍심’이라는 점도 말하고 싶었다. 새로운 조선을 꿈꾼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하면서 모방한 진주성(晋州城)과 촉석루(矗石樓). 조선시대 이래 대한민국 최고의 성(城)과 누각(樓閣)으로 명성을 떨쳤던 진주성과 촉석루의 위상을 되찾아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 2024-07-25
  • 작성자

    황경규/진주향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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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 논개(義妓 論介)

의 기 논 개(義 妓 論 介) 촉석루를 뒤로 하고 가파른 바윗길(危巖)을 내려와 의암(義巖)에 오르면 시퍼런 남강 물 빛 속에 서릿발 친 여인의 눈매와 손가락 마디마디 피 멍이 물 든 가락지 낀 여인의 한(恨)이 비친다. 의기 논개(義妓 論介)가 지금 이 시간에도 진주성(晋州城) 의암(義岩) 아래 시퍼런 물속 저 어딘가에서 흉악한 왜추(倭酋)를 부둥켜 안은 채 아직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듯하다. ‘진주성의 아우성 소리를 흘러간 과거의 아우성이 아니라, 현재 이 시점의 아우성으로 듣는 사람이 진주에 얼마나 있겠는가?’ 최근 일본의 경제침략이 노골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의기 논개의 정신이 무엇이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 권1 인륜편 효열조에서 논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구전되어 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논개는 진주의 관기이다(論介者 晋州官妓也)’라는 기록으로, ‘논개는 진주의 관(官)에 소속된 기생’이라는 뜻이다. 유몽인은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의열(義烈)에 감동해 어우야담에 순국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 1599~1661)은 인조 7년(1629)에 논개가 순국한 남강의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어 경종 2년(1722)에는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세워 논개의 정신을 기렸다. 『충렬실록』에 의하면 정식은 당시의 우병사 최진한(崔鎭漢)으로 하여금 논개의 포상문제를 조정에 계청(啓請)하도록 끈질기게 요청하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이어지면서 관기(官妓)였던 논개가 의기(義妓)로 불려지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의로운 기생(義妓)으로 되살아나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가 다시 의기(義妓) 정포(旌褒)를 계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논개의 의혼(義魂)을 봉안하는 사당인 「의기사(義妓祠)」가 건립되었다. 의기사는 ‘의로운 기생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더불어 논개를 추모하는 제(祭)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러지면서 지루하게 끌어왔던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절차가 마무리 된 것이다. 의기사는 500년 조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생에게 내린 사당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른바 ‘진주의 관기(官妓)’였던 논개가 ‘의로운 기생(義妓)’으로 공인된 역사적 사건이었다.고종 5년(1868)에는 목사 정현석(鄭顯錫)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명의 여기(女妓)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를 개최했다. 의기 논개의 제향은 영조 16년 이래 250여년간 진주의 기생들이 매년 음력 6월 29일에 봉행하다가 1992년에는 ‘의암별제’가 복원되어 매년 봉행되고 있다. 논개의 순국사실이 알려진 이후, 논개 선양을 위한 진주사람들의 쉼없는 노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비록 논개의 신분이 천한 기생임에도 불구하고 충절(忠節)과 의열(義烈)의 교훈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기 논개를 노래하다 의기 논개의 충절은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의 가슴을 두드렸고 수많은 문학작품으로 되살아났다. 이들 작품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문제의식은 바로 항일의식(抗日意識)이다. 의기 논개가 가진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산(茶山) 장약용(丁若鏞)은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 논개의 정신을 기렸다.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報國)을 하였으니 군신(君臣)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심산 김창숙 선생도 ‘의기암’이라는 시를 통해 매국노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빼어나다 우리나라 역사에/기생으로 의암을 남겼구나/한심하다 고기로 배부른 자들/나라 저버리고 아직도 무얼 탐하는가’ 의기 논개 바로 알기 ‘의기 논개를 바로 알자’는 문제제기의 근본에는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異說)이 있기 때문이다. 진주지역 이외에서는 논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의 양반가문 출신이고, 성은 주씨이며, 최경회의 첩실 혹은 황진의 애인이다’ 인터넷 공간에 ‘논개’라는 단어를 치면 대부분 앞과 같은 내용이 펼쳐진다. 진주시민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의기 논개’를 잘못 알고 있고,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이다. 논개의 신분과 출생에 대한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 조정에서 내린 의암, 의암사적비, 의기사 등 논개와 관련한 역사적 유적이 진주에 소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주가 곧 의기 논개의 역사현장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의기사는 조정에서 하사한 이름 그대로 ‘의로운 기생’을 모시는 사당이다. 논개로부터 의기라는 말을 떼버리면 논개의 위상은 그것으로 끝난다. 만약 일부의 주장처럼 앞으로도 계속 주논개나 논개부인으로 부른다면 ‘의기사’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과거 진주사람들은 의기 논개의 죽음을 헛되이 두지 않았다. 일반 백성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초월해서 논개의 의열과 충절을 기렸다. 그리고 마침내 ‘관기(官妓)’에서 ‘의기(義妓)’로, 다시 ‘진주 정신’의 한 맥으로 이어왔다. 그런 반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 2024-07-25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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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문(拱北門)

공북문(拱北門) 진주에 경남도청 소재지인 관찰부(觀察府)가 설치된 것은 1896년(건양) 8월이다. 당시 경남도청은 관찰부청 또는 관찰사청이라 불렸고, 지금의 도지사격인 관찰사가 집무실인 선화당에서 도정업무를 보았다. 진주성 내에 소재했던 선화당의 위치는 진주성 북장대 남쪽(진주시 남성동 73-10~11)이며, 현재 과거 선화당 자리에는 경남도청이 있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경상남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진주시와 경상남도가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 복원을 추진했다. 당시 국립진주박물관이 「진주 선화당 복원예정부지 발굴조사서」를 통해 선화당의 실체를 확인했다. 문제는 복원부지에 이미 들어서 있는 사당의 이전이 사업추진의 걸림돌이 되었다. 사당 이전 협상이 결렬되었고, 경상남도 탄생 100주년을 기념 사업으로 추진했던 선화당 복원은 결국 무산되었다. 공북문 복원 사업 선화당 복원은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라는 진주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사적인 사업이었다. 이에 진주시민들은 경상남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완성을 강력히 염원했다. 이러한 진주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은 진주성의 내성(內城)을 지키기 위해 건립되었던 공북문(拱北門) 복원 사업으로 이어졌다.경남문화재연구원의 「진주성 공북문」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보고서(2000년 2월)에 따르면 공북문은 임진왜란 이후, 병사 이수일이 진주성을 개축했던 1603년(선조 31)에 세워진 것으로 조사됐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 병풍도」에는 공북문이 내성의 북문으로 홍예문(虹霓門) 위로 2층의 누각을 올린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국립진주박물관의 진주성 병풍도와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진주성도와 동일하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도 중 공북문. 진주성에 축조된 문(門) 가운데 2층으로 누각을 올린 것은 당시 내성(內城)의 공북문(拱北門)과 외성(外城)의 예화문(禮化門, 남문)이 있다. 이는 북쪽에 있는 왕을 바라보는 문으로 위엄을 갖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문보다 높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공북문 바로 앞으로 진무청(鎭撫廳)과 중영(中營)이 자리잡고 있어 공북문이 내성의 정문인 것을 알 수 있다.경남문화재연구원의 공북문에 대한 발굴조사는 공북문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에 있었지만, 진주성정화사업 추진 당시에 751동에 이르는 민가철거 과정에서 극심한 유구의 파괴와 퇴적층의 교란으로 정상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쉬운 일이다.공북문 복원 사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주성정화사업이 진주성의 역사성을 담보하지 못한 실패한 사업이라는 점은 향후 진주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복원사업 추진에 있어서도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공북문은 경상남도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되었던 선화당 복원사업의 무산을 대체한 사업이었지만, 지금은 촉석문과 함께 진주성을 대표하는 성문(城門)으로 자리하고 있다. 공북문은 2002년 5월 1일, 홍예식 2층 다락루로 복원되었다. 공북문은 200년 5월 1일 복원되었다.공북문 성벽 석각 공북문과 함께 진주성 축성(築城)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귀한 글귀가 있다. 바로 ‘공북문 성벽 석각(拱北門城壁石刻)’이다. 공북문 성벽 석각은 진주성 공북문의 서쪽 성벽의 하단부에 새겨져 있는 글귀이다. 석각은 가로 80cm, 세로 25cm 크기의 석재에 ‘강희십구년산음마병중초사천곤양하동단성함양육관일초(康熙十九年山陰馬兵中哨泗川昆陽河東丹城咸陽六官一哨)’라고 적혀 있다. 해석해보면 ‘강희 19년(1680년 숙종 6) 산 북쪽의 마병 소속의 초(哨) 병력과 사천, 곤양, 하동, 단성, 함양 등 여섯 고을의 초 병력이 힘을 모아 쌓다’라는 뜻이다.이 글귀는 진주성 수축 당시 동원되었던 사천, 함양, 단성, 하동, 곤양 등지의 백성이 자신들이 수축한 성벽 구간에 대한 일종의 구역의 표시이다. 이 공북문 성벽 석각은 진주성 축성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공북문 성벽 석각은 진주성 축성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공북문의 의미 공북문(拱北門)이라는 명칭은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예(禮)’를 의미한다. ‘공(拱)’이라는 단어는 ‘공수(拱手,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포개어 잡음)하여 가슴까지 올려 절하다’라는 뜻이며, ‘북(北)’은 ‘남면(南面, 군주가 정사를 볼 때 신하들이 앉아 있는 남쪽으로 얼굴을 향함)한 임금을 올려다 보는 방향’이다. 따라서 ‘공북(拱北)’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공수를 하고 절을 올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진주성(晋州城)은 진주성 우물복원(2013년 11월)과 공북문 복원(2002년 5월 1일)에 이은 중영(中營) 복원사업 추진으로 차츰 진주성 본래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최근에는 진주시가 ‘진주성 종합정비계획’ 용역을 통해 진주성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진주성복원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진주시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매우 중요한 사업이자,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촉석루 중건사업 이후 진주 최대 역사(役事)가 될 것이다.

  • 2024-07-25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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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飛車) ②

비거(飛車) ② 비거(飛車)를 진주의 대표 역사컨텐츠로 만들기 위해서는 진주시민의 올바른 역사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일부 문헌(文獻)과 전적(典籍)에만 드러날 뿐 실제 원형이 전해지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논개(論介) 역시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이라는 책에 ‘논개는 진주의 관기이다(論介者晋州官妓也)’라는 한 줄의 기록에서 시작돼 진주를 대표하는 역사컨텐츠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거(飛車)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확한 고증은 쉽지 않지만, 복원 혹은 재현이라는 진주시민들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진주의 역사를 빛내는 새로운 역사컨텐츠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비거에 대한 각종 기록과 서적 비거(飛車)는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정평구(鄭平九)가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디지털김제문화대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평구는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 의해 발탁돼 진주 병영 별군관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 휘하에서 화약을 다루는 임무를 맡았으며, 비거를 만들었다.’정평구와 관련한 기록은 김제군지(1917년대)에서도 발견된다. 정평구가 그의 재간을 이용해 임진왜란 때 쳐들어 온 왜군을 농락했다는 기록을 확인한 것이다. 비거를 만들어 포위된 사람을 구해내고, 군량을 운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진나라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博物志)」와 북송의 시인 소식(蘇軾)의 「금산묘고대시(金山妙高臺詩)」에 비거와 관련한 기록이 보인다. 추측컨대, 정평구가 이들 기록을 응용해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전쟁기념관 박재관 학예연구관도 비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592년(선조 25) 10월 왜장 가등광태(加藤光泰)·등원랑(藤元郞) 등이 이끄는 2만 여명의 왜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서 그 길목인 진주로 몰려왔다. 왜군의 공격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3,800명의 군사로 결사항전하여 격퇴하였다. 당시 조선군은 조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장비를 이용했는데, 그 중 특이한 장비의 하나가 비거(飛車)였다.’우리나라 최초의 항공소설을 쓴 고원태씨는 자신의 저서 「잊혀진 우리 나래 비거(飛車, 2001)」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세계최초의 비행기는 우리나라 비거였다. 조선조 정평구라는 발명가가 만들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보다 300년이나 이전에 만들었는데도 고증이 안됐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진주의 소설가인 김동민씨도 소설 「비차(연인M&B, 2017)」를 통해 ‘우리의 올바른 역사관과 국가관 및 항공우주산업에 대한 꿈과 희망이 더욱 확대됨은 물론 전 국민적 관심과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기획했다’고 밝혔다.이외에도 비거(飛車)에 대한 폭넓은 관심에 힘입어 비거 관련 출판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앞서 소개한 고원태의 「잊혀진 우리 나래 비거(飛車, 2001)」, 김동민의 「비차(연인M&B, 2017)」, 장진선, 장진우(서누)가 집필한 「비차(2011, 파란미디어)」, 박형섭이 지은 「진주성을 나는 비차(2015. 파란자전거)」 등이 비거의 역사와 존재를 알리고 있다. 고원태 작가의 '잊혀진 우리나래 비거' 비거의 재현 혹은 복원 비거(飛車)의 복원(復元) 혹은 재현(再現)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 2000년 공군사관학교 비거 복원팀이 현재 남아 전하는 기록들을 토대로 비거를 재현하고 실제로 비행하는 실험을 했다. 당시 공군사관학교는 건국대학교와 공동 제작작업을 통해 대략 6개월 간에 걸쳐 임진왜란 당시 사용 가능했던 대나무와 무명천, 마끈 및 화선지 등만을 이용한 1/2 크기의 실물을 재현했다. 당시 재현된 비거는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국립과천과학관에도 두 가지 형태의 비거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전시되어 있는 비거들은 모두 후세에 추정하여 복원한 것들이다. 비거의 모형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형상이나 크기가 복원한 비거마다 들쭉날쭉이라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2017년에는 인천 하늘고등학교와 인천대학교 연구팀이 비거가 ‘유인 비행체’가 아닌 사람 형상의 허수아비를 태운 뒤 방패연에 매달아 날려 보내는 ‘교란용 비행체’라는 새로운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진주성에서의 현장 실험을 통해 비거가 사람을 태우고 날아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더불어 허수아비를 태운 교란용 비행체를 통해 진주성을 공격하는 왜군의 사격 분산을 유도하는 등의 효과를 보았을 것으로 추측했다.이처럼 비거가 실제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비거에 대한 공식적인 연구와 재현 혹은 복원에 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지난 2016년 진주에서 ‘비차발전위원회’라는 민간단체가 만들어진 이후, 최근에는 진주시가 비거(飛車) 복원에 대한 의지를 밝히고 나섰다. 이러한 움직임의 이면에는 비거를 항공역사의 시초로 보고, 우주항공산업과 연계해 비거를 미래 경남의 주력산업으로 이끌고자하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문제는 정확한 용어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비거 복원(飛車 復元)에 무게를 둔다면 철저한 고증을 거쳐 원형 그대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비거 재현(飛車 再現)에 무게를 둔다면 비거가 내포하고 있는 역사성을 바탕으로 원형에 가깝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건국대학교가 복원한 비거 모형 비거는 진주의 역사이다 비거는 이미 진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진주대첩’이라는 역사성과 공간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진주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될 가치도 충분하다. 비거 복원 혹은 재현에 대한 진주시의 의지와 민간단체의 노력도 뒷받침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비거를 진주의 역사로 인식하고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이다.공군사관학교와 건국대학교 기계공학부 교수,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거 복원팀이 거둔 성과는 비거에 대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현재의 기록만으로 완전히 밝혀내지 못하지만 추진장치의 비밀이 밝혀진다면 비거의 형태나 크기는 지금과 달라질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비거는 존재했고, 그 비거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이다.진주가 노력한다면 비거는 진주의 역사가 된다.

  • 2024-07-25
  • 작성자

    황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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