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of 진주 경남도청의 과거와 현재 (4) : 조선총독부의 '도청 부산 이전'의 전모 1
조선총독부는 경부선을 축으로 하는 원활한 식민통치와 대륙진출을 위한 전초기지 확보를 위해 경상남도 도청의 부산 이전을 계획했다. 부산이 한(韓)·중(中)·일(日) 3국을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要衝地)이자, 군사, 외교, 경제, 교통 등 사회 각 분야에 걸쳐 행정 거점 도시로 급속히 성장한 것도 그 이유였다.통감부시대(統監府時代) 및 총독부시대(總督府時代) 초기에 이미 도청 이전이 획책(劃策)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진주도정시대의 종언을 구하게 된 도청 부산 이전의 전모를 알 수 있다.첫 번째로는 1909년 당시 경남관찰사였던 황철(黃鐵)이 부산 동래(東萊)의 어떤 모임에서 “도청(道廳)을 교통이 불편한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기는 것이 좋다”라고 한 것이 도청 이전과 관련한 최초의 발언이었다.황철의 발언이 당시 일본어 신문인 조선시보(朝鮮時報)에 게재되자, 수천 명의 진주 사람들이 촉석루(矗石樓 )에 모여 논의한 끝에 관찰부로 몰려가 항의하자 관찰사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고 사죄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당시 황철 관찰사의 이 발언은 사적인 발언이라 보기 어려웠고, 신문에 게재된 것도 진주시민들의 의향을 떠보기 위한 계획된 행동이었다.두 번째로는 1911년 6월 25일 자 부산일보(釜山日報)에 「도청(道廳) 부산이전(釜山移轉) 결정(決定)」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이에 진주 사람들은 촉석루에서 긴급시 민대회(緊急市民大會)를 개최하고 총독부에 진정하려하자, 당시 경남경찰부장이 ‘총독부에서는 절대로 그러한 사실을 발표한 바 없다’고 해명했다. 이어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에서도 「경남도청 이전은 허언낭설(虛言浪說)」이라고 보도함으로써 진정되었다. 세 번째는 1916년 제2대 총독이 취임한 직후에, 경성일보(京城日報)에 도청 이전 문제가 거론되었다. 진주에서는 5월 30일 이를 반대하는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대표위원 6명을 선출하여 반대진정을 위해 상경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총독부는 ‘아직 도청을 이전할 뜻이 없으며 따라서 진정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고 해명함에 따라 도청의 부산 이전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다.
- 202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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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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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of 진주 경남도청의 과거와 현재 (3) : 진주 사람들의 주체 정신과 배일 정신 (排日精神)
1910년부터 시작된 진주도정시대는 일본인에 의해 일본인을 위한 ‘도청의 부산 이전 작업’의 시작점임과 동시에 일제에 항거하는 진주 사람들의 처절하고도 한 맺힌 시절의 연속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배일사상(排日思想)이 특히 강했던 진주 사람들에 의해 일본인들의 진주 진출은 여 의치 않았다. 마산, 부산과 경남 해안지방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지만, 진주 사람들은 남도 제일 의 양반고을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바탕으로 왜인과 이웃하는 것을 수치라고 여길 만큼 주체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1910년 10월, 조선조 마지막 관찰사인 황철(黃鐵)을 대신해 일본인 행정관리인 카가와 아키라(香川 輝)가 도장관에 부임하면서 일본인들의 진주 입성이 본격화된다. 수백 명의 일본인이 떼 지어 게다를 끌고 다녔으며 장대동, 옥봉동 일대에는 일본 창녀 수십 명이 들어와 유곽까지 형성되었다. 남다른 배일사상으로 일본인들의 진주 진출을 거부했던 진주 사람들로 인해 카가와 도장관은 일본인 도 직원의 숙소를 진주성(晋州城) 안에 짓도록 하는가 하면, 헌병에 명령해 보초를 세우기도 했다.진주성 밖의 일본인들은 한밤중에 일본인 살해와 구타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자 무리를 이루어 외출하거나 집안에 일본도나 몽둥이를 비치해 두기도 했다.심지어 하야시다(林田芳彦)라는 일본인은 사제폭탄을 만들어 마루 밑에 숨겨두었는데, 어느날 그의 아들이 뇌관을 건드리는 바람에 폭탄이 터져 집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것이 이른바 ‘진주 사제 폭탄 사건’이다. 진주 사람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은 1912년 제2대 도 장관인 사사키가 부임한 후 무시무시한 헌병정치를 자행해 진주 사람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은 불가피하게 점차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주 사람들의 이러한 일제에 대한 저항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졌고, 1925년 일제가 계획한 도청의 부산 이전에 반대하는 시민정신으로 이어졌다.
- 202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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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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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of 진주 경남도청의 과거와 현재 (2) : 관찰부(觀察府)·진주도정시대(晋州道政時代)의 개막(開幕)
진주도정시대는 관찰부시대(觀察府時代)와 진주도정시대 (晋州道政時代)로 나누어진다. 진주는 1896년부터 만 14년 6개월 동안 관찰부(觀察府)로서의 역할을 했다. 12명의 관찰 사가 거쳐 가는 동안 진주는 경남의 모든 중심지로서 그 기능을 다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1910년 10월 조선조 마지막 관찰사였던 황철(黃鐵)을 대신해 일본인 카가와 아키라(香川 輝)가 도장관(道長官) 에 부임하면서 관찰부시대를 마감하고 본격적인 식민통치의 서막을 알리는 진주도정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진주(晋州)는 서부경남의 지리적 중심지이자, 과거 목(牧)의 소재지로 행정적 기반과 함께 문화(文化)와 역사(歷史)의 전통을 지닌 도시였다. 당시 인구 또한 9만5천여 명으로 경남 제1의 도시이기도 했다. 갑오개혁 당시 근대적 행정체제 개편을 추진한 조선왕조는 1896년(건양1) 8월 4일 칙령 제36호 「지방제도·관제·봉급·경비의 개정」을 통해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했다. 이때 전국이 13개 도로 편제되면서 경상도(慶尙道)가 경상남도(慶尙南道)와 경상북도(慶尙北道)로 분리되었고, 진주에 경남도청 소재지인 관찰부(觀察府)를 두었다. 경상남도 청사는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는 1925년 4월까지 지금의 진주성(晋州城) 내 진주시 남성동 73-10~11번지에 있었고, 건물이름은 선화당(宣化堂)이었다.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 관찰부는 도청(道廳)으로 개명되었고, 관찰부의 최고 책임자였던 관찰사(觀察使)는 도장관(道長官)에서 다시 도지사(道知事)로 불리게 되었다. 초대 관찰사에는 진주부사로 재임하던 이항의(李恒儀)를 경상남도 관찰사로 승진 임명하였다. 이 기간 재임한 관찰사(도장관, 도지사)는 한국인 16명과 일제강점기 일본인 4명 등 모두 20명이었다. 일제침략기 선상에 있던 진주도정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8월 조선총독부 설치와 헌병경찰제 설치를 통한 식민지 무단통치를 겪어야 했다. 더불어 일제는 지방행정조직의 장악을 위해 도장관 이하의 주요 기관의 관리들마저 모두 일본인으로 교체했다. 경상남도 역시 1910년 10월 1일 자로 관찰사에 재직하던 황철(黃鐵) 대신 일본인 카가와 아키라(香川 輝)로 교체됐다. 1910년 10월 9일 오후 3시 30분 데라우치 총독으로부터 경상남도장관으로 발령받은 카가와 아키라가 배편으로 삼천포를 거쳐 진주의 남강을 건넜다. 도청의 부산이전 이전까지 28년간의 진주도정시대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영욕(榮辱)과 애환(哀歡)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 202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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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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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of 진주 경남도청의 과거와 현재 (1) : 경남도청 이전과 진주
경상남도(慶尙南道)는 124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896년(건양) 8월 경남도청 소재지인 관찰부(觀察府)가 진주(晋州)에 설치된 이래, 올해로 124년째 되는 해인 것이다. 124년 역사에 빛나는 경상남도는 진주도정시대(晋州道政時代)·부산도정시대(釜山道政時代)·창원도정시대(昌原道政時代)를 거쳐, 창원도정과 함께 경상남도청 서부청사시대(慶尙南道廳 西部廳舍時代)에 이르기까지 변혁의 시대를 지나왔다. 진주도정시대 진주도정시대는 1896년부터 1924년까지 28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25년 4월 1일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선화당(宣化堂)이라 불린 경상남도 청사는 1925년 3월까지 진주성(晋州城) 내 진주시 남성동 73 10~11번지에 소재했다.부산도정시대 부산도정시대는 1925년부터 1983년 6월까지 58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1925년 4월 1일 부령 제76호에 의거 도청의 부산 이전을 강행했고, 경남도청 청사는 부산 부민동 2가 1번지에 신축 중이던 부산 부립 자혜병원 건물을 용도변경하여 사용했다.창원도정시대 창원도정시대는 1983년부터 현재까지 33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63년 1월 1일 부산이 정부 직할시로 승격된 이후, 신흥공업도시로 부각된 1981년 7월 경남도청 소재지로 창원이 결정되었고, 1983년 7월부터 창원도정 시대를 열었다.창원도정과 함께 경남도청 서부청사시대 창원도정과 함께 경남도청 서부청사시대는 2015년 12월 17일 진주시 월아산로 2026에 경상남도 서부청사가 개청되었다. 서부청사는 2013년 3월 28일 서부권개발본부가 신설되고, 2015년 4월 30일 서부청사 관련 조례 시행, 2015년 7월 3일 서부청사 기공식에 이어 2015년 12월 7일 개청된 것이다. 서부권개발국/농정국/환경산림국/인재개발원/보건환경연구원이 있다.
- 202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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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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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of 진주 다시, 晋州精神이다 (4) : 진주정신 정립과 계승
진주정신의 정립과 계승을 위해서는 ‘왜 진주정신 을 정립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있어 야 한다. 더불어 진주정신의 정립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에 대한 대답도 준비해야 한다. 진주 정신 정립의 명확한 목적성과 활용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진주정신의 계승으로 이어지기는 커녕 자칫 공허한 담론에 그쳐 한순간에 폐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주의 도약과 정체진주는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 있고, 남 인재의 절반은 진주에 있다(朝鮮人才半在 嶺南 嶺南人才半在晋州)’고 할 만큼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진주가 배출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한 시대를 대표하거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재로 자랑스러운 진주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왔다.역사 이래로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진주는 지방행정과 경제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진주가 고종 33년(1896) 경상도가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분리되면서 생긴 최초의 경상남도 도청의 소재지가 된 것이다.하지만 일제는 1924년 12월 7일 총독부령 제 76호에 의거, 1925년 4월 1일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을 감행한다. 당시 도청 이전의 명분은 ‘교통 불편, 통치상의 어려움, 총독의 현안’이라는 이유였다. 진주시민들의 격렬한 반대 에도 불구하고 진주는 29년간에 걸친 ‘진주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은 정치(행정)·경제의 중심으로 기능했던 경남 수부도시로서의 존재감 상실을 의미했다.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된 1963년부터 경남도청 진주환수운동이 시작됐다. 경남도청 진주환수운동은 이전의 경남도청 부산 이전 반대운동보다 극렬했다. 하지만 진주시민들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경남도청 진주환수운동은 빛을 보지 못했다. 경남도청은 30년 동안 부산에 더부살이를 하다가 결국 창원에 둥지를 틀게 된다. 이로 인해 진주는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지 못하고, 더욱 정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진주의 미래이자, 진주와 서부경남의 경제핵심으로 자리했던 대동 공업사의 대구 이전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대동공업사는 진주경제의 핵심이자, 진주와 서부경남의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기업이었기에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진주시민들은 「대동공업 진주유치대책협의회」를 결성하고 20만 명의 진주시민들이 이전 반대운동에 서명하는 등 결사반대운동을 추진했다. 진주시민들의 격렬한 반대운동에 ‘대동공업은 이전하지 않습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꼬리를 내리는 듯했던 대동공업은 연차적으로 대구에 각종 공장을 설립한 뒤, 1987년 진주에 남아있던 판금공장과 본사를 이전함으로써 영원히 진주를 떠나고 말았다. 5도(盜) 10적(賊)의 잔영과 패배주의의 극복진주는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과 도청환수운동의 좌절, 그리고 대동 공업사의 대구 이전으로 이어지는 연속된 불행한 과거를 극복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더불어 정부의 각종 개발사업에서 소외되면서 정체와 낙후를 거듭한 것은 물론 진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공적·사적 기관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타인의 일방적인 행위에 대해 너무 쉽게 인정하고, 때로는 침묵하는 정신적 피폐함을 연속 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특히 대동공업의 대구 이전과 진주의 도시발전 과정에서 회자되었던 이른바 진주의 ‘5도(盜) 10적(賊) 이야기’는 당시 진주의 정신적 피폐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당시 진주사람들은 5도10적에 대해 ‘매국노가 나라를 팔아 자신의 배를 불렸듯이, 진주를 팔아 자신의 잇속을 챙긴 모리배’로 정의했다. '주체·호의·평등’이라는 천년 진주의 시대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是非)보다는 이익과 손해만 따져 묻는 이해(利害)만 철저히 가리는 정신문화의 피폐만이 진주를 뒤덮은 것이다. 진주의 발전을 저해했던 5도(盜) 10적(賊)의 발호와 함께 진주에 드리워진 패배주의 잔영은 오랫동안 진주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고, 극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새로운 도약과 시대정신의 정립경남 진주혁신도시는 진주의 새로운 도약의 출발점이 되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경남 진주혁신도시 선정을 두고 ‘무려 100년 만에 부흥의 나래를 펼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진주는 경남 진주 혁신도시의 정착과 함께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바야흐로 맞이하고 있다. 진주가 1896년 경남도청의 소재지가 된 이래, 불행했던 과거사를 지워버리고 진주의 위상을 정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경남 진주혁신도시의 성공적인 정착은 실제로 진주의 오랜 병폐였던 패배주의의 극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과거 경남도청 소재지로서 가졌던 것 이상의 파급효과를 얻고 있는 것이다. 더욱 반가운 것은 경남도청 부산 이전에서 시작된 상실감을 극복하고 경남의 새로운 중심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부여된 점이다. 이러한 진주시민들의 자신감은 각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진주시민들의 열망이 이루어낸 남부내륙고속철도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에 이은 조기착공과 진주의 미래산업의 동력이 될 항공산업 국가산업단지 조성 등 각종 대형사업들의 추진에서 진주의 새로운 도약과 비상을 예측할 수 있다. 더불어 정치(행정)·경제·사회·문화· 예술 등 각 분야별로 차근차근 진행되는 진주의 미래를 밝혀줄 사업들은 조만간 진주가 경남의 수부도시로 재부상하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새로운 천년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진주정신을 정립해야 한다. 천년 진주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고귀한 유산인 진주정신의 정립이 진주의 새로운 도시전략 개념이자 재도약의 바로미터가 되어야만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더불어 과거의 아픔을 거울삼아 진주의 발전을 저해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과거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침묵은, 잘못에 대한 암묵적 동의이며 공범이 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의 기반도 튼튼히 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주의 재도약과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 진주정신 정립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주정신과 도시전략 진주정신의 정립은 단 시일 내에 정립되기 어렵다. 진주의 주인인 진주시민의 공식적인 동의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몇몇의 주장에 의해 결정되어서도 안 된다. 진주정신 정립을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규명의 과정 역시 필요하다.따라서 진주정신 정립에 있어 일차적인 작업은 ‘진주정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이다. 그리고 진주정신 정립과 계승을 위해 민·관·학·연이 중심이 된 ‘진주정신정립위원회’의 운영이 반드시 필요하다. 진주정신정립위원회는 천년 진주를 관통하는 진주정신의 사상적 토대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와 심포지엄, 공청회 등의 개최는 물론 진주 사회 각 분야 확산을 위한 방안까지도 마련해야 한다. 진주정신은 시대에 따라 재정립될 수 있다. 기존에 정의된 개념이 있다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폐기하거나 수정하고 새로운 진주 정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진주정신으로 정의된 ‘주 체·호의·평등’만 고집하기보다는,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진주정신의 맥(脈)이 있다면 마땅히 함께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더불어 가능하다면 진주정신 정립 단계에만 머물지 않고 진주의 새로운 도시전략 개념으 로의 활용방안까지도 모색되어야 한다. 최근 추진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에 진주정신을 밑바탕에 두는 것도 새로운 진주의 도시전략 방안의 하나가 될 것이다. 진주정신의 계승과 선포진주정신의 정립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진주 정신의 계승이다. 진주정신의 계승을 위해서 는 진주의 정신문화를 포괄하는 전문연구기관의 설립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동안 지역사회에서는 진주정신전승관(晋州精神傳 承館) 등과 같은 진주정신을 계승하는 기관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지금 진주에 올바른 시대정신과 제대로 된 시대가치를 정립하고 홍보하고 계승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진주지역의 민간단체나 대학 등 연구기관들이 앞장서서 진주정신에 대한 연구 노력을 해준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설령 진주정신을 정립한다 할지라도 시민들에게 파급시키지 못한다면 그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시민이 주인 되는 진주정신이야말로 진정한 진주정신의 발로가 되기 때문이다. 인근 전주시(全州市)의 경우, 전주정신의 정립에 그치지 않고 행정과 민간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전주시민들에게 홍보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사업들을 통해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진주정신의 계승을 위한 첫 발걸음은 진주정신의 선포이다. 진주정신의 선포가 갖는 선언적 의미는 진주정신 정립의 목적성과 활용성을 담보하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이는 진주시민들의 힘으로 정립한 진주정신을 진주시민들의 새로 운 시대정신이자 도시전략으로 정하는 약속이자, 새로운 시대가치를 지역사회에 정착시키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진주정신(晋州精神)을 21세기 새로운 도약을 앞둔 진주의 새로운 시대가치(時代價値)로 확립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더불어 지역사회에 회자되던 진주정신을 진주의 아젠다로 설정하고, 공식 논의 테이블에 올려놓는 일 또한 한 개인의 객기만으로 성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정신의 정립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제기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새로운 도약을 앞두고 있는 진주를 견인하는 진주정신의 필요성’에 있었다. 진주정신(晋州精神)이 바탕이 되지 않는 지역발전이 어쩌면 먼 훗날 과거 진주가 겪었던 정체와 소외를 되풀이 할 수도 있다는 괜한 우려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진주정신 정립을 위한 지역의 활발한 논의가 있기를 기대한다.
-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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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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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of 진주 다시, 晋州精神이다 (3) : 진주정신을 찾아서
조선 후기 대표적인 역사가의 한 사람인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조선 초기부터 영조 때까지를 담은 『열조통기(列朝通紀)』를 지어, 우리 역사의 체계를 세우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순암은 그의 저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 서문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역사가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계통을 밝히고, 찬역을 엄히 하고, 시비를 바로잡고, 충절을 포양하고, 전장(문물)을 자세히 하는 것이다.(史家大法 明統系也 嚴簒逆也 正是非也 褒忠節也 詳典章也)’ 순암은 그 과정에서 ‘고증’을 중시하여 과거의 역사 기록을 단순히 취사하여 조술(祖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역사를 통해 면면히 흐르는 정신(精神)을 읽어내고 다시 기록하는 일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기록은 가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진주역 사를 찾는 일은 천년 역사 속에 담겨있는 진주의 정신문화를 찾아내, 진주의 명예와 자긍심을 회복하는 일이기에 더 늦출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더불어 그동안 잊고 살아온 진주역사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진주인의 기질, 낙선호의진주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진주는 경상도를 대표하는 지역이다. 진주의 역사가 곧 경상도의 역사이므로 진주의 기질이 곧 경상도의 기질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진주로 대표되는 경상도민들의 기질을 평가하는 기록을 통해 진주의 정신문화적 가치와 평가의 일단을 발견할 수 있다.태조 이성계가 조선팔도 사람들의 특징을 한 구절로 평(評)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조선의 기틀을 다진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조선팔도 사람들의 기질을 평하면서 경상도(慶尙道)의 기질을 ‘송죽대절(松竹大節)’이라고 표현했다.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곧은 절개’를 가진 도민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조선의 실학자들은 전국 팔도의 지세(地 勢), 지리(地理), 지형(地形)을 보면서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인성(人性)이 서로 다르다는 지리인성론(地理人性論)을 주장했다. 조선 정조 때 대사간을 지낸 윤행임(尹行恁, 1761∼1801)은 경상도민을 ‘태산교악 설중고송(泰山喬嶽 雪中孤松)’과 같은 기질을 갖고 있다고 평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산교악은 크고 높고 험 한 산과 같이 웅장하고 험준한 기개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덕(德)과 명망(名望)이 태산처럼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며, 설중고송은 눈 속의 고독한 소나무와 같은 추상 같은 기상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조선팔도의 지역적 특성을 볼 때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의 사람들은 의(義)를 숭상하고, 경상좌도(慶尙左道) 사람들은 인(仁)을 지향한다고 했다. 특히 경상우도(慶尙右道) 사람들의 기질을 ‘낙선호의(樂善好義)’라고 평가했다. 즉 ‘착한 일 하는 것을 즐겨하고 의로운 일(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의 참모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杜師忠)의 사위인 나학천(羅鶴天)의 팔도 인물평도 주목할 만하다. 중국 건주 (建州) 출신으로 장인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나학천은 경상도 사람의 기질을 ‘우순질신(愚順質信)’ 즉 어리석고 순하지만 참된 기질이 있다고 표현했다.조선 시대 지리학자들은 조선팔도의 땅에 대한 풍수지리적 해석을 하면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생각해, 산천의 형세가 좋으면 좋은 인물이 태어난다고 하는 지리인성론 (地理人性論)을 주장했다. 지형의 형세가 지역민의 성격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 것이다.지리인성론을 통해 살펴본 진주의 기질적 특성이 반드시 역사적 사건에 내재된 정신문화 와 일치성을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지역 특성으로 인해 형성된 진주 만의 독특한 정신문화는 진주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확인된다. 인물(人物)로 본 진주정신남명 조식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은 진주의 정신사(精神史)에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학자이다. 남명은 삶 전체를 통해 권력의 장식품이 되기를 거부한 재야의 선비이면서, 백성을 공동체의 한 축으로 인식한 영남유학의 거두였다.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했다.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하면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중요시 여겨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고, 경상우도 학문의 특징을 이루었다.남명은 사림정치가 시작되는 명종~선조 전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평생 재야에 머물며 일생을 마쳤지만, 정치가 반드시 지위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것이 아님을 직접 증명했 다. 의(義)를 보고 행하지 않는 위선(僞善)을 타파하고, 진정한 선비상을 지행일치(知行一 致)의 행동유학(行動儒學)의 실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사의 난맥(亂脈)을 보고, 죽음을 불사하고 탄핵(彈劾)하고 나선 유명한 단성소(丹城疏)는 남명의 이러한 신념을 행동으로 표시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더불어 남명은 일상생활에서도 불의와 타협 하지 않았다. 경의정신(敬義精神)과 지행일치(知行一致)라는 실천학문에 힘입은 그의 제자들이 임진왜란이라는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분연히 일어선 사실은 선비가 학문에만 힘쓰는 것이 아니고 배운 학문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남명의 호의정신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진주를 중심으로 영남유학의 맥을 이어옴과 동시에 국난극복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동강 김우옹(지수), 각재 하항(수곡), 수우당 최영경(상대동), 신암 이준민(금산), 운당 이염(조동), 영모정 하진보(대곡), 영무성 하응도(대평), 조계 유종지(수곡), 무송 손천우(수곡), 부사 성여신(금산), 신계 하천주(대평), 백곡 진극경(백곡) 등이 그들이다.남명의 제자들은 국난(國難)과 부정(不正)이 있을 때마다 남명의 실천유학이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구한말 영남지역의 구국의병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남명을 주축으로 한 영남학파의 사상적 근간인 실천유학은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진주가 민족정신(民族精神)의 발원지가 된 근원이 된다. 진주는 민족정신의 발원지진주는 역사 이래로 진주라는 이름으로 천년을 이어온 고도이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인재의 고장이기도 하다. 더불어 천년의 역사 속에서 역사의 중심으로 자리해온 명실상부한 경남의 중심지이자, 민족정신의 발원지이기도 하다.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정신과 제자들의 민족정신 발현과 함께 진주 정신을 잇는 대표적인 인물은 의기(義妓) 논개(論介)이다.의기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을 지키던 7만 민관군이 전몰하자, 왜장을 의암으로 유인해 투신해 순국했다. 이후 진주사람들은 논개의 의열정신을 받들어 1629년 진주선비 정대륭이 의암 글자를 새기고, 1722년에는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1740년 조선 조정은 조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를 세우도록 명한다. 논개가 의로운(義) 기생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몇 해 전에 대한민국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의기 논개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여인상’ 5위에 올라 의기 논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확인하는 기회가 있었다. 더불어 의기 논개의 매서운 의열과 정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의기 논개가 단순히 진주정신의 맥을 잇는 진주의 논개가 아니라 민족정신의 맥을 잇는 조선의 논개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은 ‘의기암’이라는 시를 통해 매국노를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진주정신의 맥을 이은 논개의 의열 정신을 칭송했다. ‘빼어나다 우리나라 역사에/기생으로 의암을 남겼구나/한심하다 고기로 배부른 자들/나라 저버리고 아직도 무얼 탐하는가’논개의 의열정신은 구한말 본주(本州) 기생인 산홍(山紅)으로 이어졌다. 산홍은 기생이라는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매수하려는 매국노 이지용을 꾸짖었다. 왜장을 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의 정신과 닮아 있다.산홍은 의기 논개의 충절과 정신을 이어가지 못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담은 시(詩) 한 편을 지었다. 산홍이 의기사를 참배하고 지은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이 바로 그것이다.‘천추에 빛나는 진주의 의로움/두 사당과 높은 누각에 서려 있네/세상에 태어나 뜻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풍악을 울리며 헛되이 놀기만 함이 부끄럽네’과거 진주사람들은 의기 논개의 죽음을 헛되이 두지 않았다. 일반 백성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초월해서 논개의 의열과 충절을 기렸다. 그리고 마침내 ‘관기(官妓)’에서 ‘의기(義妓)’로, 다시 ‘진주 정신’의 한 맥으로 이어왔다. 본주 기생 산홍의 정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논개의 정신을 잇다국권이 침탈된 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에 달할 무렵인 1919년 3월, 진주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3월 18일, 진주에 걸인독립단이 나타났다. 이들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의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들이 떠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는 것은 왜놈들이 우리의 재산과 인권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 2천만 동포가 모두 빈곤의 구렁에 빠져 거지가 될 것”이라고 외치며 거리를 누볐다. 일본 헌병과 경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을 비롯한 진주 곳곳은 만세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이때 한 무리의 아낙네들이 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우리나라 3·1독립운동 최초의 진주의 기생독립단이었다. 이들은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남강변을 돌며 촉석루를 향해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계속했다. 이들은 “우리가 이 자리에서 칼을 맞아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되면 여한이 없다.라고 소리치며 조금의 동요나 굽힘이 없었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의기 논개의 나라사랑 정신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이후 진주에는 학생의거(3월 21일)를 비롯해 미천면의거(3월 22일), 수곡면의거(3월 22 일), 문산읍의거(3월 25일), 정촌면의거(3월 18일), 유림의거(5월) 등이 연이어 일어났고 참가한 인원이 무려 3만여 명이 넘었다. 남명 과 임진왜란 의병, 의기 논개, 산홍, 걸인·기생독립운동은 지금도 진주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정수리에 퍼붓는 냉수 한 바가지‘새벽잠 끝에 정수리에 / 퍼붓는 냉수 한 바가지 / 우리나라 정수리에 퍼붓는/ 이 정갈한 냉수 한 바가지 / 晋州에 와 보면/ 그렇게 퍼뜩 精神(정신)이/ 들고 마는 것을 안다.’민족시인 허유(許洧, 1936∼)는 「진주(晋州)」라는 시에서 진주를 ‘새벽잠 끝에 정수리에 퍼붓는 냉수 한 바가지’처럼 그야말로 제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듬어야 할 곳이라고 표현했다.진주정신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이라도 진주정신을 찾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것이 진주정신이 뿌리 내려 있는 진주 땅을 밟고 살고 있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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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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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95
Archive of 진주 다시, 晋州精神이다 (2) : 진주정신과 전주정신
진주의 시대적·공간적 개념의 인지 진주정신에 대한 개념(槪念)의 정립을 위해서는 ‘진주(晋州)의 시대적·공간적 개념’과 ‘정신(精神)의 상호인지’에 대한 문제가 설명 되어야 한다. 특히 진주정신의 시대적·공간적 범주를 설정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취해진 행정구역 개편의 경우, 지역의 전통적인 공간에 대한 인위적인 행정구역 조정으로 공간적 개념의 강제적인 축소를 의미한다. 따라서 1914년 일제의 강압적인 행정구역 개편 이후로 설정된 진주의 공간적 범주 안에서만 진주정신을 찾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다시 말하면 진주정신의 정립에 있어 진주라는 공간적 의미가 반드시 현행 행정구역상 지방자치단체로서의 진주시를 의미하지 않 는다는 것이다. 진주라는 공간은 물리적인 행정구역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역사적 환경을 갖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 제한할 수 없는 공간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주정신을 정립함에 있어 진주라는 시대적·공간적 개념은 선사시 대부터 삼한 시대, 삼국가야 시대, 통일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대한제국 시대, 일제강점기 시대, 대한민국 시대를 통괄하는 과정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진주는 남강선사유적을 통해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삼한 시대에는 변진 12국 가운데 고순시국(古淳是國)으로 추정 되며, AD 42년에 시작된 가야 시대에는 가야연맹의 고령가야(古寧 伽倻)로 추측되고 삼국 시대 후기에 와서는 백제의 영역 안에서 거열성(居列城)으로 불리다가 신라에 병합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에 는 문무왕 3년(663)에 거열주(居列州)로 불리다가, 신문왕 5년(685) 에는 청주(菁州), 경덕왕 16년(757)에는 강주(康州)로 고쳤다. 고려 시대에는 태조 23년(940) 진주(晋州)로 개칭되었으며 당시 진주의 속군(屬郡)은 하동군, 남해군, 고성군, 함안군, 거제군, 궐성군 (단성), 천령군(함양), 거창군, 강양군(합천) 등 9개 군(郡)이었다. 성종 2년(983) 주제(州制)가 폐지되고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할 당시 진주는 진주목(晋州牧)이 되었다. 성종 14년(995)년 전국을 10도(道)로 나눌 당시, 진주는 산남도(山 南道)에 속해졌고, 영(營)이 설치되어 무려 10주 37현을 소관했다. 현종 9년에는 전국의 8목(牧) 가운데 진주는 진주목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조 1년(1392) 진양대도호부, 태종 2년(1402) 진주목, 고종 32년(1895) 진주부와 진주군, 건양 원년(1896) 경상남도 진주군 도청소재지,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 진주군이 진양군으로 개칭된 이래 1949년 진주부가 진주시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법률 제4774호에 의거 오늘날 통합 진주시가 출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주정신의 토대 구축이처럼 진주는 천년이 넘는 시대적·공간적 범위 안에서 경남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역할을 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진주정신의 토대를 구축해왔다. 진주정신을 정립함에 있어서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오늘날의 행정구역 범위로 한정시키는 우(愚)를 범하기보다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관통하는 시대적·공간적 범위 안에서 진주정신의 맥(脈)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진주정신의 정립은 다른 도시와 차별화된 지역민의 삶과 시대적 변화과정에서 나타나는 지역민의 사상이 무엇인지 밝혀내고 개념화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시대적·공간적 범위를 관통하고 있는 진주 를 대표하는 정신(精神)에 대한 지역민들의 상호인지의 과정 역시 필요하다. 이른바 진주사람들이 말하는 진주정신에 대한 상호인식 과 이해의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정신(精神)의 상호인지(相互認知)는 진주라는 도시의 발전과정과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개념화된 명제로 보편화된 작업에 대한 인식이다. 진주정신의 정립을 위한 최우선 과제가 ‘진주정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의 정립과 지역사회의 인식 공유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역사회에서 진주정신의 핵심 명제로 ‘주체(主體)·호 의(好義)·평등(平等)’을 역사적 근거를 들어 제시하고 있다. 진주정신의 3대 명제인 주체·호의·평등에 대한 지역사회의 공통된 인식을 확장을 목표로 다양한 노력들이 수반되어야 한다. 진주정신 정립의 최종 목표는 진주정신의 상호인지와 교육 등의 과정을 통해 진주정신을 사상사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데 있다. 진주정신 정립을 위한 민관학의 연구성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주정신의 정립과 상호인지를 통한 진주정신에 대한 우리의 연구와 노력이 지속된다면 진주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가치를 정립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근거에 토대해야진주정신의 정립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전제조건을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선 역사적 근거에 토대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역사 속의 개별적 사건을 정신과 연계시키는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진주만이 가진 역사성이 아니라면 진주정신의 범주에 포함시키기 어렵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하지만 진주정신의 개념화를 위해서는 과거 진주의 역사적 사건과 그 사건을 통해 축적된 지역민들의 경험, 그리고 경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을 찾아내고 정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진주 정신의 정립이 규정화와 목록화에 있다기보다는 정립 과정에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에 근거한 진주정신의 정립은 미래의 올바른 역사 정립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진주의 공간적 범위에 대한 개념 정리도 필 요하다. 진주정신의 정립을 위해서는 진주라는 공간적 범위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진 주는 고려 태조 23년(940) 진주라는 이름을 가진 이후, 조선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 시기 에 이르기까지 경남의 정치·경제·문화·역사의 중심지로 기능해왔다. 따라서 진주의 포 괄적인 공간적 범위에 대한 합의는 진주정신을 정립하는 데 있어 일차적인 선결과제이자, 진주의 공간적 확장을 통한 지역민의 자긍심 확장에도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현 행정구역상의 진주시로 범위를 축소시키는 것은 진주정신의 정립을 통한 새로운 도시전략 수립이라는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진주정신의 정립에 대한 분명한 목표와 활용 또한 전제되어야 한다. 만약 진주정신 정립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자칫 공허한 담론에 빠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진주정신의 정립 필요성은 천년 역사 속에서 형성된 진주정신의 현대적 계승을 통한 새로운 진주의 시대정신 정립에 있다. 더불어 진주정신이 지역사회의 새로운 시대 정신으로 정착되고 확산될 수 있도록 하는 체계적인 노력도 더불어 진행되어야 한다. 진주정신을 계승하는 별도의 기관으로 진주 문화유산원이나 진주정신연수원을 설립해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진주시민에게 알리고 나아가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일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전주시의 대표정신 ‘꽃심’전주시는 지난 2016년 전주정신(全州精神)을 수립했다. 전주시는 전주의 대표정신을 ‘꽃심’으로 정했다. 꽃심이란 꽃을 피워내는 힘, 새로운 문화와 세상을 열어가는 강인한 힘을 의미하며, 故 최명희 작가가 혼불에서 쓴 ‘꽃의 심, 꽃의 힘, 꽃의 마음’으로 싹을 틔워내는 강인한 힘을 인용했다.더불어 전주사람들은 대동·풍류·올곧음·창신의 특질이 있으며, 꽃심은 이 네 가지를 다 아우르는 전주의 얼이며 정신이라고 정의했다. 대동은 타인을 배려하고 포용하며 함께 하는 정신이며, 풍류는 문화예술을 애호하며 품격을 추구하는 정신, 올곧음은 의로움과 바름을 지키고 숭상하는 정신, 창신은 전통을 토대로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창출해가는 정신을 말한다.전주시는 전주정신의 정립에 그치지 않고 사회 각 분야에 전주정신 교육과정을 비롯해 꽃심전주 전국 독후감대회 개최 등 다양한 전주정신 교육을 통해 전주정신의 확산에 노력하고 있다. 더불어 전주정신인 꽃심을 활용한 표준시안과 꽃심을 응용한 다양한 기념품 제작을 통해 전주정신의 확산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진주정신의 확산을 위한 심포지엄 개최진주정신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민간단체와 전문연구진 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천년의 역사를 내려온 도시의 역사와 삶의 방식을 정리하는 작업은 전문적인 연구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더불어 진주정신은 단 시일 내에 정립되기 힘들뿐더러 몇몇 사람의 주장에 의해 결론짓기도 어렵다. 따라서 진주정신 정립의 목적성과 활용성까지 전제함은 물론 범사회적 합의 과정을 통해 도출되어야 한다.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은 향후 진주청년포럼 주관으로 ‘진주정신 정립을 위한 심포지엄’을 개최해 진주정신 정립을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디딜 예정이다. 심포지엄을 계기로 진주지역에서 진주 정신이 정립되고 확산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향후 진주정신의 정립을 위한 절차가 마무리되면 진주시민의 날인 10월 10일에 ‘진주정신(晋州精神)’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진주정신을 진주의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정하고 새로운 시대 가치를 지역에 정착시키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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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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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of 진주 다시, 晋州精神이다 (1) : 진주정신과 시대정신
진주정신(晋州精神)은 천년 진주역사의 속살이 빚어낸 정신문화(精神文化)의 정수(精髓)이자, ‘시대와 함께 살고, 싸우고, 성찰하고, 증언한 진주의 목소리’로 정의할 수 있다. 이른바 ‘주체(主體)·호의(好義)·평등(平等)’을 바탕으로 하는 진주만의 고유한 정신적 유산이 바로 진주정신인 것이다. 천년 진주 역사의 맥락에서 진주는 ‘주체정신’으로 당당한 주인의식을 지녔고, ‘호의정신’을 바탕으로 불의(不義)에 항거하는 사회정의를 실천했으며, ‘평등정신’으로 지고지엄한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을 사회에 요청했다. 이것이 바로 진주역사의 속살이 빚어낸 진주정신(晋州精神)이자, 진주가 지닌 시대정신(時代精神)의 핵심이다. 진주정신이 가지는 가치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이고 독자적이며, 자립적이라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정신(精神)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초개인적인 원리로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전제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진주정신이 오랜 세월 동안 지역사회에서 전승되고 계승되는 정신문화의 유산이자, 시대정신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주정신을 이야기함에 있어 꼭 기록하고 싶은 부분은 역사를 통해 진주사람들이 보여준 시대정신(時代精神)이다. ‘올곧은 것은 살아남아 반드시 역사에 기록된다’는 신념 아래 형성된 역사적 동인이 바로 진주사람들이 가진 시대정신이다. 진주정신이 곧 진주사람이 지닌 시대정신인 것이다. 근·현대 역사를 몰비춤함에 있어 일제강점기 ‘경남도청의 부산 이전(1925년)’과 ‘대동공업의 이전(1984년)’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일들은 진주의 침체기를 예고하는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격변하는 정치와 경제의 변혁과정을 겪으면서 지역인재들의 역외유출로 인한 인물 공동화와 고도의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한 가치관(價値觀)의 혼란은 진주정신의 쇠퇴기를 예고했다. 그럼에도 ‘주체·호의·평등’으로 정의되는 진주정신은 ‘진주사람’에 의해 지역사회 곳곳에서 진주의 역사와 함께 전승되고 있다. 진주가 걷는 걸음마다 진주정신이 그 밑바탕에 있음을 각성하고 진주정신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천년 진주의 역사에서 생성된 진주의 고귀한 정신적 유산인 진주정신은 소멸되지도, 결코 소멸될 수도 없다. 단지 새로운 시대를 기다릴 뿐이다. 진주역사의 속살, 진주정신 진주정신의 연원(淵源)은 진주역사에 있다. 진주역사의 생성 과정상의 역사적 사건과 인 물에서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주정신은 우리나라 민권항쟁사의 기원이 된 1200년(고려 신종 3년) 고려민권항쟁에서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향리들의 탐학을 견 디다 못한 공·사노비들의 민권 회복적인 항쟁과 정방의의 폭력적 반란을 진주의 민중들 이 진압한 것이다. 진주정신의 출발점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임진대첩(1592년) 과 계사순의(1593년)는 진주인의 주체정신 을 드높인 싸움이다. 임진년(1592) 진주대첩 의 승리는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로 진주 시민들의 국난극복의 의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듬해인 계사년 제2차 진주성전투는 7만 명의 민관군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진주정신의 소름 돋는 실천의 역사이다.임진왜란기 진주사람들의 주체정신이 돋보인 의병활동은 진주(晋州)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전국 의병의 35.1%를 차지한 경상우도의 의병들은 왜구가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했을 뿐 아니라, 북상해 있던 적을 고립시킨 것은 물론 당시 와해 상태에 빠진 관군(官軍)이 대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진주정신의 시대구현이다. 진주농민항쟁(1862년)은 조선 후기의 민권운동을 대표할 뿐만 아 니라 진주의 전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민중운동의 대표 격이다. 진주를 기점으로 일어난 농민항쟁은 1894년 한 단계 발전된 농민운동이라 할 수 있는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진다. 진주정신의 역사적 계승이다.진주동학농민운동(1894년)은 진주에서 봉기한 동학군의 ‘왜적토벌’과 ‘항일구국’ 정신이 엄연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진주 동학군의 우국충정의 이념은 일제강점기 의병운동과 3·1운동으로 이어지는 구국운동(救國運動)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진주정신의 실현이다.일제강점기의 의병활동(1896년)은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지속적인 투쟁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특히 40여 명이 넘는 의병장을 중심으로 3백여 차례에 걸친 토왜(討倭) 투쟁을 벌인 점은 국권 회복기 후기의 대한민국 의병사(義兵史)에 빛나는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진주정신의 엄중한 실천이다.경남일보의 창간(1909년)이 천년 진주의 역사적 맥락에서 지니는 불변의 가치는 대한민국 지방신문의 선구자이자, 신문역사의 새로운 장(場)을 열었다는 점이다. 국운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던 1909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최초로 ‘간악한 일제의 압제를 이겨내고 한국인이 지방에서 신문사를 설립한 지방신문’이 바로 경남일보인 것이다. 진주정신을 오롯이 담아낸 소중한 그릇이다.진주의 3·1만세운동(1919년)은 임진대첩과 계사순의의 민족혼을 잇는 진주사람의 민족혼과 항일정신을 대내외에 표방한 의의를 갖고 있다. 당시 신분적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던 기생과 걸인의 독립 만세운동 역시 진주정신의 올바른 계승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갖는다.진주에서 시작된 인권운동인 형평운동(1923년)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는 반차별운동으로 일제강점기 동안 전국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사회운동이다. 형평운동으로 인해 진주는 인권 평등 운동의 발상지이자,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개천예술제(1949년)는 정부 수립의 실질적인 자주독립 1주년을 기리고 예술문화의 발전을 위해 개최된 대한민국 지방종합예술제의 효시이다. 전통예술 경연을 통해 우리의 예술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해왔고, 지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역사적 사건을 통해 본 진주정신의 줄기는 여기서 끊어진 채, 이어 지지 못하고 있다. 근·현대를 관통하고 있는 진주정신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더불어 진주정신을 형성하고 있는 진주의 인물과 사회 각 분야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와 접근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진주정신은 진주시민의 힘으로사실 진주정신에 대한 개념적 정의는 광범위하고 모호하다. 진주 정신의 시대적·공간적 개념과 ‘정신(精神)’에 대한 상호인지의 문제 가 설명되지 않는 한 진주정신의 개념적 정립은 쉬운 일이 아니다.실제로 진주정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제는 진주정신의 정립 필요성에 대한 근원적 이해와 진주정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에 대한 목적성을 분명히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진주정신의 정립은 ‘지역사회의 이해와 공 감’에 기초해야 한다. 현재 지역사회에 회자 되고 있는 진주정신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학술적·이론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전주시(全州市)의 경우, 지난 2006년부터 민관학(民官學)이 힘을 합쳐 전주정신(全州精 神)을 정립한 데 이어 지역사회에 확산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주시는 전주정신을 정립하면서 ‘대동·풍류·올곧음·창신’ 등 4가지 정신으로 전주의 역사성과 고유성을 담보했다.진주정신 역시 진주의 힘으로 정립하고 발전 방안까지 도출해내야 한다. 진주사람의 시대 정신이 담긴 진주정신(晋州精神)에 대한 각 성(覺醒)이 없고, 진주(晋州)가 진주(晋州)인 의미를 찾지 않는다면 진주의 천년 역사는 한갓 책장 속의 한 권의 책에 불과할 것이다. 천년 역사를 지닌 진주정신의 현대적 계승을 통한 새로운 진주의 시대정신 정립에 진주시민의 힘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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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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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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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of 진주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찾아서 (4) : 진주교방문화 보존과 전승을 위한 과제와 전망
경남 문화·예술의 총본산으로 명성을 떨쳐 온 진주의 현주소를 되짚어 보아야 할 시기를 맞고 있다. 진주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역사·문화·예술의 도시임을 자부함에 있어 누구도 쉽게 부정하기 어렵지만, 현실은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데 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지역의 정체성을 담보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을 바탕으로 한 재창조라는 시대적 과제에 눈을 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남을 대표하는 문화도시로의 도약을 준비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약진이 눈에 띈다. 경남 최초로 문화도시에 선정된 김해시를 비롯해 창원시와 통영시도 최근 문화도시추진위원회를 출범하고 문화도시 추진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들 도시들은 지역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 지역 문화가치 발굴, 지역 문화브랜드 세계화 등에 필요한 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더불어 문화유산과 연계한 특화, 브랜드 사업과 문화지구 활성화 등에 대한 조사와 연구 작업도 병행해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남 최초의 문화도시 김해 경남 최초의 문화도시로 예비사업지역에 선정된 김해시는 이를 계기로 ‘오래된 미래를 꿈꾸는 역사·문화도시 김해’를 완성하는 첫걸음을 뗀 셈이다. 김해시는 김해 문화도시가 김해의 가치와 도시철학을 만들고 도시의 미래발전을 견인하는 새로운 전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김해시는 김해에 스며있는 스토리를 바탕으로 도시재생사업과 문화도시사업을 연계하는 사업전략을 제시해 가야문화권 대표도시로 나아가는 마중물로 삼겠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다. 창원시도 문화예술 전문가와 시민대표로 구성된 ‘문화도시추진위원회’ 출범식을 갖고 문화도시 추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창원시의 문화도시 사업은 역사와 문화, 사람과 자연을 잇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창원 문화도시’ 선정에 전력을 다할 계획이다. 통영시 역시 2020년 문화도시 지정을 목표로 지난해 ‘문화도시추진협의회’를 구성하고 통영의 문화도시 계획수립에서부터 심사평가단 현장설명 등의 사업을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다. 더불어 문화도시 지정을 위한 예비사업 계획 수립과 사업 추진을 위한 세부적인 일정 역시 마련해 놓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하는 문화도시는 지역별 특색있는 문화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문화 창조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지역문화진흥법에 따라 지정하고 있다. 물론 문화도시로 지정되어야 진정한 문화도시임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도시 지정 과정에서 확산되는 지역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와 인식 전환, 보존과 전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효과가 문화도시 지정을 뛰어넘는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진주문화유산원의 설립과 문화유산의 창조적 활용 진주시가 문화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역 내에 산재해 있는 문화유산을 통합·관리하는 기관의 설립과 그 보존과 전승을 위한 추진체계를 다시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문화창조력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문화를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문화 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상생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상생의 시대에 걸맞은 최우선 행보는 무형문화재와 유형문화재를 포괄하는 지역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과 전승 체계 개선을 위한 문화유산 보존 연구 기관의 설립이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한국국학진흥원은 우리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잘 계승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관이다. 국학진흥원은 자료의 수집과 보존에 이은 아카이브 구축, 학술 연구 및 교류와 출판사업 등을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보존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의 전통문화를 홍보하기 위한 문화공간으로 설립된 ‘한국의 집’ 역시 전통 한옥의 멋을 간직한 공간에서 전통의 음식·공연·혼례·문화상품을 판매하는 등 서울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는 홍보대사역을 자임하고 있다. 진주는 천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형성된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문화의 도시이다. 하지만 천년의 전통문화를 꽃피운 진주에 이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기관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는 진주의 다양하고 정체성을 간직한 문화유산이제대로 모아지고 보존·계승되어야 한다. 시대적인 요청임은 물론이다.따라서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인 교방문화를 비롯한 진주의 천년 역사와 정체성을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올바른 전승과 보존을 위한 ‘진주문화유산원(晋州文化遺産院)’과 같은 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진주문화유산원은 전통문화와 문화유산에대한 조사·연구 및 아카이브 구축, 연구·위탁사업, 전문인력 양성 및 시민교육사업, 학술행사 개최 및 지원사업 등을 통해 진주문화유산의 폭넓은 이해와 보존과 전승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수행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특히 진주가 진정한 문화도시로 성장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진주의 문화유산에 대한 아카이브 구축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주시 문화유산에 대한 아카이브 구축은 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 확보는 물론 창조적 문화 활용을 통한 문화상생시대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진주교방문화의 경우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이지만 제대로 된 조사나 연구 작업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보존과 전승을 위한 책임을 민간에 미루어 놓는 바람에 창조적 활용은 고사하고 명맥 유지에만 그치고 있는 실정임을 유념해야 한다.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의 필요성 제기에만 그칠 게 아니라 진주문화유산원이 교방문화에 대한 아카이브 구축과 연구, 창조적 활용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고 추진하는 추진 주체가 되어야 한다. 비단 진주교방문화뿐만 아니라 진주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그 대상이 됨은 물론이다.문화의 역할은 즉각적일 수는 없지만, 그 근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진주 문화의DNA를 풍요롭고 건강하게 하기 위한 진주전통문화예술의 보존과 활용은 더 이상 미룰수 없는 일이다.진주문화유산원이 문화도시 진주의 다양한문화유산을 수집하고 보존하며 연구하면서진주만의 멋과 맛을 확산시킬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있도록 진주시는 물론 전문가, 시민모두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진주교방문화의 보존과 전승 과제 진주교방문화의 보존과 전승 과제는 진주시의 문화도시 지정 노력과 도시재생사업과의 연계, 진주문화유산원의 설립 의지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진주교방문화 활성화를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연구작업과 교방문화단지 조성 등이 민간차원에서 추진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자료조사, 활용방안 마련 등의 과제들은 민간단체가 담당하기에는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진주의 전체 문화유산을 아울러 연구하고 활용하는 기관의 설립을 통해 진주교방문화의 보존과 전승을 위한 과제를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진주문화유산원을 통해 진주교방문화의 창조적 활용 방안이 마련되고 시민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그 영향력은 다른 문화유산에 파급돼 선순환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진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과 연계를 짓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우선적으로 독창적인 진주만의 전통문화라는 장점을 도시재생과 연계 짓는다면 도시재생사업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국적인 것이 아닌 진주만의 것이라는 장점은 도시재생에 큰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역축제를 통한 진주교방문화의 전국적인 홍보도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진주의 봄축제인 ‘진주논개제’를 통해 진주교방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적극 홍보해 나갈 필요성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진주논개제의 대표 프로그램인 의암별제는 진주교방문화의 진수이자, 킬러 콘텐츠로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다. 의암별제뿐만 아니라 진주교방의 악가무인 진주검무와 교방굿거리춤, 한량무, 포구락무 등의 콘텐츠를 차별화시키고, 대중화시켜 나갈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된다면 진주교방문화가 바탕이 된 진주의 대표적인 축제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진주교방문화가 아닌 백화점식 프로그램이 남발된다면 진주교방문화는 물론 진주논개제의 미래는 결코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다.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이라는 기획을 연재하면서 기대한 것은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지역사회의 이해와 바른 인식에 있었다. 더불어 진주교방문화가 진주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진주교방문화 시리즈를 통해 이른바 기생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바람을 담았고, 진주의 교방문화가 남긴 미래의 가치에 주목하고자 했다. 진주교방문화단지 조성이라는 창조적 활용방안을 제시했고, 궁극적으로 문화도시로의 방향 설정은 물론 진주문화유산원 설립, 도시재생사업과의 연계 등의 과제로 발굴했다. 이제 남은 것은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지역사회의 노력이다. 진주시와 진주시의회, 문화예술전문가, 민간단체, 진주시민에 이르기까지 진주교방문화에 대한 관심과 보존·전승코자 하는 의지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하지만 진주교방문화가 전 시민의 자랑거리가 되는 그날까지 조금씩 준비해 나가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과 강력한 추진력이 필요하다. 진주교방문화는 독창적인 진주만의 문화유산이다. 그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보존과 전승에 이어 창조적 활용으로까지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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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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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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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of 진주 진주교방문화의 멋과 맛을 찾아서 (3) :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와 문화·예술적 평가
교방문화를 선도한 기녀(妓女)는 신분제도에 있어 하층민에 속한 존재로 신분적 멸시와 냉대는 물론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중 삼중의 억압과 천대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힘든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특히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이른바 기생문화라는 그릇된 인식의 확산에 따라 전통문화예술을 계승해 온 교방문화가 이 땅에서 소멸되다시피한 것은 사실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더불어 교방문화의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부족해 교방문화가 가진 문화·예술적 가치가 과소평가되어 온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교방문화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부당한 제도와 부적절한 사회적 시선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방문화가 간직하고 있는 문화·예술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 교방문화의 전승과 보전이라는 시대적인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방(敎坊)의 역사와 기녀(妓女) 고려 시대에 기녀(妓女)들에게 춤과 음악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중앙에 교방(敎坊)이 있었다. 교방은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으로, 교육을 받은 기녀들은 궁중의례와 연회, 외교사절 접대, 연등회, 팔관회 등과 같은 국가행사에 동원됐다. 교방(敎坊)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기녀들의 교육을 관장했고, 조선 초기에 설치된 악학도감과 장악서 등을 계승한 장악원(掌樂院)이 설립된다. 장악원은 성종 1년(1470) 이후, 고종 광무 1년(1897)의 관제 개혁으로 교방사(敎坊司)로 개칭될 때까지 427년 동안 활동한 국립 음악기관으로 자리했다. 조선 세조 때 장악원(掌樂院) 하부의 좌방(左坊)과 우방(右坊)을 합쳐 교방이라 불렀고, 조선 후기에는 지방에도 교방을 설치했다. 특히 지방에 설치된 교방의 위치는 읍성 내의 가장 중요한 위치한 지방 관아(官衙)에 딸려 있는 건물로 대개 관문 밖 객사(客舍)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진주의 교방에 대한 기록은 진주의 인문지리지 『진양지(晋陽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우(館宇)」 조에는 ‘중대청(中大廳) 동쪽과 서쪽에 낭청방(郞廳房)이 있고, 서쪽 낭청방 앞에 교방(敎坊)이 있었다(中大廳 東西各有郞廳房 西郞廳之前 有敎房)’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옛 진주MBC가 바로 진주객사가 있던 자리이며 진주교방이 있던 곳이다. 갑오개혁(1894년)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됨과 동시에 장악원이 해체되었다. 이에 따라 궁중과 지방관아에 속한 기생안(妓生案)이 사라지면서 관기(官妓)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1905년에는 고려 시대 당악정재·향악정재를 연주했던 교방악의 전통을 이은 여악(女樂)마저 폐지되면서 1909년 관기제도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생계유지를 위한 자구책의 하나로 기생조합들이 생겨나게 된다. 최초의 기생조합은 1909년 4월 경찰 주도하에 만들어진 한성기생조합이며, 조선기녀의 전통과 역사가 반영된 다동기생조합과 광교기생조합도 잇달아 만들어진다. 이때부터 이른바 ‘기생문화’가 이 땅에 자리 잡게 된다. 당시 일제는 기생조합의 설립에 따른 기생활동을 통제하는 단속령을 내리게 된다. 당시 기생은 관청에 속한 관기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던 일패 기생과 은근자(隱勤者)라 불린 이패 기생, 탑앙모리(搭仰謨利)라 해서 몸을 파는 유녀인 삼패 기생으로 엄격히 구분했다.하지만 일제는 이러한 엄격한 구분을 해체한뒤 예기(藝妓)와 창기로 구분하기 시작했고,시간이 흐르면서 속칭 ‘기생(妓生)’으로 불리게 되는 불행한 운명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상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통문화의 계승자였던 기녀(妓女)들이 기생(妓生)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가지게 된다.특히 당시 기생조합들은 1914년부터 일제의강요에 의해 ‘권번(券番)’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권번제도가 도입되면서 예기와 창기의 구분이 없는 ‘가무와 몸을파는 기생’이라는 이미지로 정착되고 만다.이는 일제가 자국에서 들여온 저급한 유녀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예인(藝人)으로서 자존심을 지켜왔던 조선 기녀(妓女)들의 가치가평가절하됨은 물론 성적 이미지의 왜곡이 더욱 심해지고 노골화된 것이다.이러한 왜곡된 인식하에서도 당시 기생(妓生)의 신조와 원칙은 ‘노래를 팔지언정 몸은팔지 말라(買唱不賣淫)’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기생독립운동 등 애국(愛國)에 대한 열정은물론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기생들도 적지 않았다.진주권번은 1915년 당시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지만, 진주 기녀인 금향을 비롯한 노기(老妓)들이 다시 ‘진주기생조합’을 만들어 재정이 건실한 권번으로 발전되었다. 당시 진주 기생조합은 여성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바뀌고 경영권이 남자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비리와 부조리가 만연하게 된다. 진주권번은 1939년 11월 2일 주식회사 ‘진주예기권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면서 전통적인 진주 기생의 풍류와 멋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게 된다. 진주권번은 현재 우리은행(옛 상업은행) 자리에있었다. 진주권번의 교육과 가무국립문화재연구소 중요무형문화재 기록 도서인 『진주검무』를 보면 당시 진주권번의 교육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당시 진주권번은 기생 100명과 견습생 50~60명으로 학부를 설치했다. 오전과 오후 두 번에 걸쳐 진주검무와 한량무를 비롯한 가무를 시작으로 음곡, 산술, 일본어, 예법 등을 가르쳤다. 견습생들은 각 과목당 3개년 수업 연한으로 고전시조, 가야금, 유행가, 서화, 수신, 산술 등 학술 방면의 교육을 받았다. 합격자에 한해서는 기생 자격을 부여하고, 3개년의 의무 연한제를 제정해 진주 기생의 양성에 목적을 두었다. 진주권번에는 대개 12~13세에 입학했다. 이들과 같은 동기(童妓)들은 예의범절부터 배웠다. 12세 때는 시조, 우락, 계면, 편 등의 가곡을 수련했으며, 춘향가, 단가 등을 교육시켰다. 춤은 검무, 한량무, 신무(神舞), 춘향무 등을 익혔다. 이 가운데 진주검무는 진주권번에서 익히는 중요한 무용이었다. 오전에는 주로 창(唱)을, 오후에는 무용을 수련했다. 당시 진주권번의 무용 선생으로는 김창조(1865~1919)가 유명했다. 중외일보는 1929년 당시 진주권번의 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진주에서는 권번에 입적하여 기예를 익히는 과정의 기생을 ‘학생기생’이라 하였다. 학생기생은 3년간 월사금 2원씩을 내고 국악 전반에 관해 학습을 하게 된다. 또한 배우는 학과에 따라 자신이 부족한 부분은 따로 수업료를 내야 했다.’ 이처럼 진주권번은 기생의 양성을 책임지는 교육기관으로 조직을 탄탄히 갖추어 나갔다. 진주를 비롯한 서울, 평양, 대구, 부산 등 대도시의 권번들은 예능인 배출이라는 목표하에 다양한 내용과 철저한 방식으로 교육을 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진주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의 존재 의의는 예능(藝能)에 있으며, 기생 교육의 본질적 목표가 예도를 구현함에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진주교방문화의 문화·예술적 평가 진주교방문화가 가지는 문화·예술적 가치는 대단히 높다. 실제로 진주의 교방문화는 전국적으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진주만큼 교방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는 지역이 드문 것이다. 진주권번에서 계승된 궁중무와 민속무는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춤으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시·도문화재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교방에서 진주권번으로 이어진 교방악가무는 우리 전통 악가무의 주역이자 중심이며, 오랜 시간을 이어오면서 길러지고 다듬어진 진주교방문화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만하다.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그 풍류와 멋을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로 재발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로 전승되고 있는 교방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적 접근의 필요성은 물론 교방문화가 풀어야 할 숙제인 이른바 ‘기생문화’라는 부정적인 인식변화를 위한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진주교방문화의 문화·예술적 가치에 대한 심포지엄을 비롯한 학문적 접근은 물론 교방문화의 인식개선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등의 노력이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이 올해 문화재청 생생문화재 활용사업에 ‘교방문화 그 풍류와 멋’이라는 공모사업에 선정됐다.향후 본격적으로 교방문화에 대한 인식개선을 비롯한 토론회를 비롯해 지역민과 함께 호흡하는 교방문화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비록 오늘날 진주의 교방문화가 역사 속의 전설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정신사적 가치와 문화예술적인 가치를 전승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예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계승· 보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 존재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단법인 진주민속예술보존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노력이 더해져 진주교방문화가 가진 문화·예술사적 가치가 계승·발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진주의 봄축제인 진주논개제를 통해 진주교방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대내외에 꾸준히 알려나가고 있다는 점도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진주교방문화의 문화·예술적 가치 평가에 이견(異見)이 없다면, 이제는 지역사회가 나서서 진주교방문화를 어떻게 계승·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진주의 문화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우리의 진정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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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주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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