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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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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지 (大寺池)  썸네일 이미지

Story of 진주 대사지 (大寺池)

기록으로 보는 대사지대사지는 『삼국유사』에 신라 혜공왕 2년(766) 강주(康州) 관서(진주성)의 대사(大寺)라는 절의 동쪽 땅이 점점 꺼져 연못이 생겼는데 그 연못의 크기가 세로 13척, 가로 17척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대사지는 진주성의 방어시설인 해자(垓子)로 진영지(鎭營池)·진영못이라는 별칭(別稱)을 갖고 있다. 해자는 일종의 방어시설로 성 주위 땅을 파서 만든 연못 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방어하는데 일차적인 수성 역할을 했다.대사지의 옛 모습은 현존하는 진주성도(晋州城圖)와 진주지도(晋州地圖) 등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진주지도(1931년)에 의하면 대사지는 북쪽 성벽을 따라 3개의 연못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사지가 본격적으로 매립되기 시작한 1937년 이전의 대사지의 원형을 볼 수 있는 지도 이다.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해동지도 진주목 지도(조선, 1730년경)에는 대사지의 물길이 진주성의 동쪽을 돌아서 진주 남강과 합류하고 있다. 지도상의 진주성은 서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 북쪽과 동쪽의 대사지, 남쪽의 남강에 둘러싸인 고립된 하나의 섬이 되어 천혜의 요새로 자리매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대사지의 규모는 계명대학교 소장 19세기 진주성도(보물 제1600호)에서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진주성도 가운데 대사지의 규모와 모습을 가장 자세하게 그리 고 있다. 계명대학교 소장 진주성도에 나타난 대사지의 규모는 지금의 진주성 북장대 아래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진주성 외성의 신북문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응향정(凝香亭)과 연지(蓮池) 대사지는 아름다운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도심 속의 연못이었다. 진주성도에 그려진 대사지에는 만개한 연꽃과 그 사이를 한가로이 다니는 나룻배의 모습도 여러 척 보인다. 대사지 북쪽에 있던 진영(鎭營) 앞에는 나루터도 있었다. 뱃사공 없는 나룻배 한 척이 나루터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따라 진주성 공북문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정자(亭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응향정(凝香亭)이다. ‘연꽃 향기가 정자에 어린다’는 뜻에서 이름한 듯하다. 일부 진주성도에는 대사지를 연지(蓮池)라 적고 있다. 응향정을 더욱 빛나게 하는 대사지의 연꽃은 ‘대사지연(大寺池蓮)’이라 하여, 옛 진주 12경 중의 하 나에 포함될 만큼 그 아름다움을 뽐냈다. 대사지 전체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연꽃은 군사시설의 하나인 해자로 기억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도심의 휴식공 간이었다. 대사지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진양성지도(晋陽城地圖, 1950년대)에 따르면 대사지의 위치는 인사동로터리와 진주성 북쪽의 중안초등학교 일부와 배영초등학교, 진주경찰서, 진주우체국을 거쳐 대안동 일원에 걸쳐 소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경상문화재연구원이 2009년 진주교육지원청 부지의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길이 39.0m, 너비 1.5m, 높이 1.3m가량의 호안석축이 확인돼 대사지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제강점기 강제 매립이라는 일제의 만행으로 대사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대사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경남일보 등 각종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경남일보는 1909년 11월 20일 자 지면을 통해 “진주성 밖 대사지는 원래 관 소유로 지난해 일본인 모씨가 못을 메우고 시장을 개설한다는 소문이 퍼진지 오래 되었는데, 3일 전에 과연 그 못을 메우는 공사를 시작 했다”라고 보도했다. 경남일보는 1910년 4월 12일 자에도 진주성곽의 흙과 돌을 부숴 못을 메울 경우, 대사지 인근 지역 농민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어 군청과 도청에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경남일보 기사에 의하면 적어도 대사지는 1909년 이전에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후 일제는 1927년 진주에서 개최한 ‘시구개정(市區 改正) 기공식’과 1934년 6월 20일 총독부령 제18호로 공포된 조선시가지계획령의 시행을 계기로 대사지 매립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진주성 대사지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정치적 목적 달성의 희생양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는 대사지를 매립한 후 이 일대를 ‘영정’이라는 일본식 지명을 붙였다. 일부 일본인들은 못을 메우고 주택을 지어 사익을 챙기려 했고, 대사지를 메우는데 진주성곽의 돌과 흙을 사용했다는 점은 결코 용서하기 어렵다.한때 대사지 복원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천년진주의 역사복원은 반드시 필요하다. 진주성 복원과 함께 대사지 복원이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2024-03-06
  • 작성자

    황경규

  • 조회수

    2036